콰당-!
그 문이 닫히던 소리가 아직도 귓전을 울린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내뱉어버리고 만 말에 눈시울이 금방 붉어지던 마지막 모습도...... “
< 고래의 꿈 >
- 고래다!!!
“...으윽”
- 제군들!! 일어나라, 일어나! 마침내 일할 때란 말이다! 빨리 빨리 움직여라...! 이 게을러터진 굼벵이들아! 우리는 하루 24시간 365일 빛의 속도로는 계산할 수 없는 매일 매일 놈을 기다리지만 놈은 우리를 기다리지 않는 다는 것을 잘 알고 있겠지? 일어나!! 그 주둥아리로 처 들어갈 음식 값을 해야 할 것 아니야!
스피커에서 꽥꽥거리며 울려나오는 선장의 요란스러운 목소리에 곤한 잠에 빠져 있던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잠자리에서 깨어났다. 아, 진짜 선장의 꽥꽥거리는 목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는 거 정말 싫다. 표정을 구기면서 시계를 보니 잠든 지 2시간 밖에 되지 않았다. 제기랄. 몸을 일으키고서도 너무 졸리고 멍해서 멍청하니 앉아 있었다. 그 자세로 그냥 그대로 뒤로 쓰러져 자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시끄럽게 꽥꽥거리는 선장의 목소리가 너무 듣기 싫어서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아, 졸려. 너무 졸려. 이놈의 고래새끼가 사람을 아주 잡는 구나 잡아.
낮 밤이 뚜렷하지 않은 우주선 안이라 달리 수면시간이 있을 리 없건만, 우주선의 선원 모두는 내내 약을 올리듯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면서 주변을 맴도는 빛 고래 때문에 근 이틀가까이 잠을 자지 못했다. 나는 선장에 대한 저주를 퍼부으며 수면 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감은지 며칠이나 되어 기름때 가득한 머리를 득득 긁자니 찝찝해 죽겠다. 샤워를 해야겠지만 에너지가 없어 전력이 모자라니 찬물밖에 없단 말이다. 게다가 느긋하게 샤워할 시간이나 주어져야 말이지. 오늘 나더러 좀 씻으라고 잔소리 하는 놈이 있다면 패버리겠어. 이건 내 탓이 아니라고...!!
- 아직도 제 구역으로 돌아가지 않은 놈들 있나? 오호라, 시몬스, 긴! 네놈들이 늑장부리는 것에는 최고봉이지, 빨리 빨리 움직여라. 너희들은 빨리 빨리란 단어의 뜻을 모르나? 그것은 꽁지 빠지게 움직이라는 소리다. 그 느려터진 축 쳐진 궁둥짝에 불을 붙이기 전에 잽싸게들 뛰지 못할까? 계약 끝나고 받아 처먹을 잔금 생각하면 빨리 움직여! 이 돈만 밝히는 게으름뱅이들아! 재워주고 먹여주고 나중에 돈까지 쥐어주는데 제대로 일을 해야 할 것 아니야! 엉?
아, 시끄러. 저 새끼는 도대체 잠은 자는 거야 마는 거야...?? 선장이 늘 들고 다니는 술병에 술이 아닌 뭔가 초인을 만드는 마약이라도 들어있는 게 틀림없다고 어린 견습 선원들이 수군거리는 말을 나조차 믿을 지경이다. 근 30여년을 빛 고래만을 쫓으며 살아온 선장의 집착이란 정말 초인에 가까운 것이라서, 결국 죽어나는 것은 아래의 선원들이었다. 십여 년 가까이 그런 선장의 뜻과 함께하며 빛 고래를 잡겠다는 의지에 동참해온 항해사들이나 고급선원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저 계약 선원인일 뿐인 난 그런 선장의 극성이 짜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들처럼 기필코 빛 고래를 잡겠다는 의지나 사명감 따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제발 사람답게 살자, 사람답게 좀. 나는 중얼거리면서 바지와 티셔츠를 꿰어 입은 후 내 구역으로 향했다. 스피커에서는 선원들을 재촉하는 선장의 독려랄까 윽박이랄까 재촉이 계속 되고 있었다. 목도 아프지 않나?
- 자아, 우리의 대시를 기다리는 빛 고래가 저기에 계시단 말이다! 모두 모니터를 봐라, 그 어느 때보다 선명히 놈의 꼬리가 보이지 않느냐? 은하수처럼 반짝거리는 저 통통한 꼬리가 말이다! 제군들, 내가 빛 고래를 잡으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할지 아는가? 놈의 지느러미를 잘라서 회를 쳐 먹을 거란 말이지! 내가 여태껏 먹었던 그 어떤 음식보다도 가장 달콤할 것이라고 자신한다! 하하핫! 니 놈들도 빛 고래의 비늘 한 장이라도 가져서 떼돈을 벌고 싶거들랑 빨랑빨랑 움직여!
빛 고래 비늘 한 장이라도 주려고? 선장이 얼마나 인색한지는 온 우주가 다 아는 사실인데, 설령 빛 고래를 잡는다 할지라도 계약된 금액 이외에는 국물도 없을 걸. 나는 코웃음을 날리며 커피를 따르고 자리에 털썩 앉아 다리를 올린 후 계기판을 응시했다.
- 레이더망엔 아무런 문제가 없나? 양자기 출력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 소리, 방향을 제대로 잡아 제대로! 데이브, 그러다간 빛 고래의 수염에 얻어맞고 말거다! 똑바로 해 똑바로!!! 네 두 눈은 폼으로 달렸냐? 히만, 놈의 움직임을 추적해. 그 굼뜬 손가락을 빨리 빨리 움직이란 말이야! 어디로 공간이동 해갈지 최대한 추적 망을 펼쳐서 다음 이동치를 예상해봐! 어떠냐. 긴! 에너지는 충분한가?
난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충분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mkl482의 뒤편으로 들어온 지 일주일이 넘어갑니다. 태양의 ㅌ자도 못 본지 열흘이 넘었다고요. 아직 엔진을 돌릴만한 에너지는 남아있습니다만 충전하지 않으면 안돼요.”
- 최대한 놈의 추적으로 모든 에너지를 돌려라! 적어도 엔진은 움직이고 있지 않나, 쓸데없는 불은 전부 다 꺼!
“나 참, 여기가 무슨 아파트도 아니고 불 좀 끈다고 에너지 고갈이 덜하진 않는다는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게 기름으로 움직이는 배도 아니고, 전등이 깎아먹는 에너지래 봤자 마더 컴퓨터와 양자기 출력이 단 1분 동안 잡아먹는 에너지에도 못 미치는데, 선원들의 복지에도 신경 좀 쓰시죠.”
- 시끄러워!!
“저는 또 냉동음식 데울 에너지도 없어 몇날 며칠 차가운 음식만 먹고 차가운 물에 샤워하는 것은 사양입니다만...”
- 긴, 너는 쓸데없는 소리가 너무 많은 것이 단점이군!
“그럼 계약파기하시고 절 지구로 데려다 주시든가요. 바라는 바입니다요.”
이젠 정말 지쳤어. 저딴 우주 물고기 따위를 쫓아 우주를 떠도는 일 따위는. 선장이 뭐라 뭐라 더 고래고래 소리쳤지만 나는 네네, 대충 대답하고는 절감해도 될 부분의 에너지를 돌려두었다. 이 배에는 구식이라고는 해도 나쁘지 않은 시설들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늘 이런 일들의 연속으로 인해 제대로 사용되지 못하고 있었다. 수면대도 잠깐만 눈을 붙여도 신체 회복을 활성화 시켜주는 기능을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침대 대용으로 이불 말고 들어가 몸을 눕히는 곳에 불과했으며, 주방도 가끔은 화력이 없어 냉동식품을 그대로 먹는 일 다반사였고 오락 시설 같은 것은 창고로 변한지 오래였다.
나는 다시 한 번 사람답게 좀 살자고 중얼거리며 모니터를 응시했다.
화면에 보이는 빛 고래는 언제나처럼 느긋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워낙 거대하기에 고래라고 불리고는 있지만 사실 녀석의 외모는 잉어에 가까웠다. 펄럭거리는 긴 수염과 지느러미를 가진 잉어.
빛 고래의 모습은 상당히 장관이었다. 스스로 빛을 내는 다채로운 색깔의 비늘은 어두운 우주에서 오로라처럼 신비롭게 발광했다. 컴컴한 우주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놈의 모습은 환영 같기도 하고, 꿈결 같기도 했다. 빛 고래를 쫓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모습을 본다면 신비함에 이끌려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쫓아갈만한 존재였다.
우주에서 발견된 유일한 생물. 중력도 없고 산소도 없는 곳에서 살아가는 저 신비한 생물은 전설이나 불가사의로만 존재하다가 실재한다는 것이 확인된 지난 50년 전 이후 수많은 사람들의 꿈과 환상이 되어 왔다. 선장도 그런 꿈을 꾸는 사람들 중의 하나였지만, 빛 고래는 단 한 번도 사람과 접촉하여 그 흔적을 남기거나 생포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빛 고래는 놈을 잡아 일확천금을 꿈꾸거나 단순히 빛 고래 그 자체에 집착하는 다소 허황된 꿈을 꾸는 그런 자들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다. 국가 단위에서도 수십 조 원을 투입해 오로지 빛 고래를 낚기 위한 우주선을 개발하고 수많은 선장과 낚시꾼들을 동원해 빛 고래를 쫓았다.
그것은 놈이 공간이동을 하기 때문이다.
캄캄한 우주에서 반짝거리는 빛 고래의 흔적을 발견하고 쫓아가보면, 녀석은 마치 어둠에 묻히듯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추적해보면 몇 백 광년이나 떨어진 저 우주 너머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빛의 속도로도 어림없는 빠르기였다. 빛 고래는 말 그대로 우주의 공간과 시간을 모두 뛰어 넘었다. 가끔은 머리는 저쪽에 벌써 가 있는데 꼬리는 아직 이쪽에 남아있는 그런 모습을 포착할 때도 있었다.
우주 식민지를 개척하고 우주여행을 하는 시대가 오긴 했지만, 아직 그런 공간이동 만큼은 이루지 못한 기술이었다. 까마득히 멀고 넓은 우주를 모든 우주선들은 빛의 속도로 밖엔 움직일 수 없었다. 덕분에 모든 우주 여행자들은 물체의 속도와 가속도의 법칙에 따라 모든 시간을 뒤로 등지게 된다. 빛의 속도로 우주를 누비다 보면 지구와는 시간의 흐름이 틀려져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특수 상대성 이론의 가장 흔한 예였다.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우주선에서 보면 지구의 시간은 마치 멈춘 것이나 다름없다. 지구에서 본다면 지구의 밤하늘에 비치는 별빛이 몇백년 몇천년 전의 것이듯, 우주를 여행하고 돌아온 사람들도 몇백 몇십년 전의 사람인 것이다. 우주 여행자들이 다시 지구로 돌아가면 몇십년이 훌쩍 훌쩍 지난 경우가 다반사였고, 우주터미널엔 몇십년, 몇백년전 과거의 유령들- 이른바 우주 촌놈들이 득시글거렸다. 너무나 변해버린 지구의 모습과 나이 들어 버린 가족, 친구, 연인의 모습에 적응하지 못하고 우주 여행자들은 다시 우주로 떠나고, 별과 별 사이를 방황하면서 살아간다. 그것이 우주에 발을 내딛은 자들의 운명이었다.
하지만 저 빛 고래를 잡아 공간이동의 비밀을 밝혀낸다면, 우주 여행자들은 더 이상 방황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별과 별 사이를 시간의 엇갈림 없이 저렇게 순간 이동할 수 있게 된다면, 지구에 있는 사람과 마찬가지의 시간의 흐름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식민지에 물자 하나를 보내는 것에도 막대한 시간과 돈을 들여야 하는 정부와 툭하면 고립되기 일쑤인 척박한 식민지의 이민자들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기술이었고, 모든 우주여행자들의 꿈이었다.
하지만 내게 빛 고래 같은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내가 놈을 쫓는 것은 그저 내가 탄 배가 저 놈을 추적하는 낚싯배이기 때문이고 나를 지구에서부터 아주 오랫동안 아주 멀리 떨어트려 놓아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별 수 없이 나에게 그녀를 단념시켜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 마음은 언제나 이미 까마득한 세월이 지나버렸을 지구의 한 사람에게 매여 있다.
진심이 아니었던 말, 익숙하지 않아 등 돌려 버린 감정.
그 붉어졌던 눈시울을 아무리 떠올려도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설령 지금 당장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람을 만나 인연을 맺은 후겠지. 몇 명이든 훨씬 많은 사람들과 사랑했었을 지도 모른다.
“제기랄.”
그 생각만 하면 속이 뒤집힌다. 그녀에게 나는 이미 과거의 사람이겠지만, 나에게 그녀는 아직 현재의 사람이었다. 나에게 찰나의 시간 동안 그녀가 벌써 나를 까마득히 잊고 다른 사람과 사랑한다 생각하면 속이 끓었다. 지금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몇 분 사이에도, 그녀는 어떤 사람과 사랑하고 섹스하고 이별하고 또다시 다른 사람을 만났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우주 여행자들에게 비틀어진 시간은 비틀어진 과거와 추억을 낳았다.
아아, 이런 꿀꿀한 상념은 그만두자.
나는 모니터를 보면서 아마 선장을 미치게 만들어 버릴 요량으로 맴을 돌고 있는 놈을 쳐다보며 에너지 조율을 하기 시작했다. 지긋지긋한 작업이지만, 어디까지나 선장의 목적은 놈의 생포였으므로 일단은 생포하는 일에 필요한 에너지를 분배해 놔야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놈이 또다시 공간이동이라도 하면 꽁지 빠지게 놈을 쫓아가는 일에 에너지를 다시금 분배해 넣어야 했다. 내가 하는 일은 온종일 그 일의 반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빛 고래가 보이지 않으면 느긋하게 점검이나 하고 에너지 충전이나 하면서 농땡이를 피울 수 있을 텐데, 요 며칠은 정말 죽을 맛인 게다. 아니, 저 놈의 고래새끼가 나타나지 않으면 우주선의 모든 선원들이 농땡이를 피울 수 있었다. 하지만 저 자식만 나타났다 하면 선원들 모두는 선장의 윽박지름 아래 초죽음이 되는 것이다.
콰당!
음. 여기에도 초죽음이 된 반시체가 한명.
퀭한 눈으로 자동으로 열리지 않는 문을 마구 발로 걷어차며 들어온 시몬스는 나를 보더니 꾸에엑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크악!!! 저 새끼는 잡히려면 잡히던가. 아주 멀리 가려면 가버리던가 왜 주변에서 빙빙 돌면서 사람을 미치게 만들어?!! 벌써 48시간을 못 잤어! 이틀을 못 잤다고! 아니 선장은 놈의 꼬리근처에라도 가면 날 대기시킬 일이지 제대로 된 일 한번 해본 적도 없는데 왜 죽어라고 나를 자리에 앉혀놓으려고 난리냔 말이다!”
“원래 선장은 모든 선원들 마음이 다 자기 같은 줄 알잖아. 자기처럼 모두 빛 고래에 환장해 있는 줄로만 알지. 그나저나 여긴 또 웬일이냐?”
시몬스는 낚시꾼이었다. 사람들은 빛 고래를 잡으러 미쳐 돌아다니는 사람들 중 양자기로 그물을 짜서 포획하는 일을 하는 자들을 낚시꾼이라고 불렀다. 원래 낚시꾼들은 정말 낚시에 일가견이 있다거나 어부의 아들이라거나 하는 것이 아닌 우수한 프로그래머가 대부분이었다. 양자기를 그물모양으로 짜는 일은 컴퓨터 언어와 무수한 프로그램으로 뜨개질실을 한 올 한 올 짜 넣는 것처럼 섬세한 운용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몬스가 말했다시피 그가 정말 양자기 그물을 짜서 놈을 포획하려고 시도해본 적은 딱 한번 밖엔 없었다. 포획하려고 접근하기도 전에 놈이 사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시몬스는 선장의 다그침 때문에 빛 고래가 나타나기만 하면 컴퓨터 앞에서 대기하고 있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막상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늘 스트레스에 치받아 있었다. 시몬스는 한 구석에 처박힌 담요를 몸에 둘둘 말더니 어슬렁거리며 커피포트를 찾기 시작했다.
“항상 뜨거운 커피가 있는 곳은 여기밖에 없잖아. 커피 어디 있어 커피?”
“나한테 커피 맡겨놨어? 내가 무슨 네 커피메이커야?”
“커피 어디 있냐고!!”
“저기 선반에 있잖아 선반에! 매일 따라 먹는 주제에 그게 어디 있는지도 못 찾아!”
시몬스는 자기 전용의 스프 컵인지 머그컵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세숫대야에 커피를 모조리 따라 붓더니 내 옆에 주저앉아서 그것을 홀짝거리기 시작했다.
“아아, 이제야 좀 살 것 같군. 쳇, 별의 뒷면에 들어오니 춥기는 더럽게 춥지... 보나 안보나 선장이 난방에 돌릴 여유도 없다고 펄펄 뛰었겠지?”
“불도 켜지 말라는데 날더러 뭘 어쩌라고.”
“네 재량으로 이 방에만 어떻게 안 될까?”
“아서라. 그 커피포트를 사수하는 것만도 나는 벅차다.”
“쳇.”
우우우우웅--------------
빛고래에게 기척 없이 접근하기 위해 꺼지는 엔진의 마지막 울림이 들리고, 컴퓨터와 모니터의 불만 깜빡거리는 가운데 우주선은 침묵에 잠겼다. 마침내 왕왕 떠들어 대던 선장의 목소리도 멈췄다. 빛 고래를 쫓아 달려오던 우주선은 시동을 멈추고, 관성만으로 움직여 기척 없이 빛 고래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빛 고래에 대해서는 그 어떤 것도 알려진 것이 없었지만, 빛 고래는 꼬리 쪽으로 접근하는 우주선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허옇게 든 눈동자가 어딜 얼마나 어떻게 보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텔레포트를 하는 이 신비한 생물도 생물이기는 한 모양인지 시야에 사각이 존재했다.
우리를 따돌리기 위해서인지 몇 번이나 근거리로 공간이동을 시도한 놈은 마치 지친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허공에 떠 있었다. 지금쯤 선장은 손에 땀을 쥐고 있겠지. 하지만 나는 느긋하게 녀석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 놈이 우리가 질기게 따라붙는 것을 알면서도 이 구역을 떠나지 않는지 모르겠다. 빛 고래에게 영역 같은 건 없는 것 같던데...
말했다시피 빛 고래의 생태에 대해선 그 어떤 것도 알려진 바가 없었다. 짝짓기는 하는지, 알을 낳는지, 뭘 먹는지, 똥은 싸는지, 영역의 개념은 있는지 등등... 빛 고래에 대해 알려진 것이라고는 단 하나. 그 시야의 사각의 존재와, 빛 고래는 우주 저편에서 와서 우주 저편으로 간다는 단순한 사실이었다. 처음 빛 고래의 존재를 밝혀내어 평생을 빛 고래만 쫓으며 산 BJ헌터의 기록에 의하면 지구와 태양계 인근 식민지를 지나가는 빛 고래들 중 똑같은 녀석이 발견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했다. 공간이동을 하는 놈들이니 같은 놈을 발견할 확률이 지극히 적은 것이다. 나야 어느 놈이 어느 놈인지 알아 볼 수 있는 재주 따위는 없었다. 내겐 크기 차이가 있다뿐이지 죄다 똑같이 생긴 것 같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빛 고래에 정통한 선장들은 빛 고래의 얼굴과 빛깔 등에서 개체를 구분해 낼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우리 선장 역시 내가 보기엔 그 놈이 그 놈인 빛 고래들의 얼굴에서 그 특징을 잡아내곤 했다. 이놈은 입술 한 구석이 들렸느니 이놈은 수염 빛깔이 푸르스름하다느니 이놈은 눈이 작다느니 등등.
아무튼 놈들은 어디론가에서 어디론가 간다. 우주를 유영하는 것 자체가 놈들의 삶이라면, 사람과 같다. 태어났다가 죽는다. 그것 역시 어디론가에서 왔다가 어디론 가로 가는 것이니까. 그것에 큰 의미는 없고, 그것은 역시 빛 고래들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나는 가끔 그렇게 생각한다. 우주 어딘가, 즉 A점에서 B점으로 가는 것 자체가 놈들의 인생이 아닐까...하고.
그 사이 놈들은 짝짓기도 하고 먹기도 하고 싸기도 하고 자기도 하겠지만, 공간이동을 하는 그들에게 우리는 너무 찰나의 존재라서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일순간 날아가는 파리나 하루살이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을지도.
- 이 자식! 시몬스, 시몬스 어디 갔어!!
“엑 제기랄. 좀 쉬려고 했더니만. 아직 접근하려면 한참 멀었잖아!!”
선장이 우리가 꽤나 가까이 다가가도록 빛 고래가 반응이 없자 흥분해서 시몬스를 찾아대었다. 시몬스는 담요 안에 웅크리면서 울상을 지었다. 당장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겠느냐고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 선장 목소리가 듣기 싫었던지 시몬스는 스피커를 꺼버렸다.
“쳇, 저렇게 소릴 질러서야 고래새끼도 놀라 도망가 버리지.”
“어차피 네가 여기 있는 줄 뻔히 알고 또 누군가 찾으러 올 텐데, 돌아가던지 다른데 가 있는가 하지 그래? 커피 줬으면 됐잖아?”
나는 내가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어도 가지 않고 곁에 버티고 있는 시몬스가 거슬렸다. 그래서 그를 쫓아낼 요량으로 말을 꺼냈더니만, 그는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왜. 뭘 쳐다 봐.”
“매정한 새끼 같으니라고, 난 여기 있을테다.”
“여긴 자리도 좁아서 나 하나 부대끼기도 힘들어. 눕고 싶으니까 비켜.”
좁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내가 있는 구역 자체가 좁기도 좁거니와 청소를 하지 않은지 한참이 되어 담요며 잡지며 의자며 책이며 마구 범벅이 되어 모니터 앞의 의자를 제외하고는 발디딜 틈조차 없었다. 거기에 담요를 칭칭 두른 커다란 짐 덩이 하나가 더 있으면 갑갑함이 들 지경이다. 하지만 시몬스는 정말 갈 생각이 없는지 자기 무릎을 탁탁 치며 말했다.
“여기 누워라.”
“개 소리 말고 빨리 꺼져라.”
“아- 매정하네.”
지금 누가 누구더러 매정하다는 거야.
나에게 이렇게 친근한 척 굴긴 해도 시몬스는 다른 선원들과 그다지 친하지 않았다. 사교성 넘치는 성격이 아니란 건 진즉부터 뻔 한 사실이어서, 흔히 어울리기 마련인 여러 그룹들 어느 곳에도 끼지 않고 제 볼일만 보는 녀석이었다. 천재의 분위기를 풍기는 똑똑한 두뇌에 얼굴까지 매끈하면 아웃사이더의 분위기를 풀풀 풍기기 마련이다. 성격이라도 더럽지 않으면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지 않겠는가? 누가 친해보려 말을 걸어도 무심하게 넘겨버리는 놈이라서, 나와 말이라도 주고받는 사이가 된 것은 순전히 이곳 내 구역에 있는 뜨거운 커피포트 때문이었다. 준다는 말도 안 했는데 말없이 커피만 마시고 가는 녀석이 너무 어색해서 내가 말 한 두 마디 걸던 것이 제법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사이까지 되었는데, 요즘 들어 부쩍 친한 척을 해왔다.
“비켜.”
“싸늘한 녀석 같으니라고. 가서 네가 드러누워 졸고 있다고 선장에게 일러줄 테다.”
“스피커 껐으니 상관없어. 빛 고래가 앞에 있으니 여기까지 쫓아올 선장도 아니고. 가 봐.”
시몬스는 툴툴거리면서 마침내 끈질긴 엉덩이를 일으켰다. 놈이 나가고, 마침내 바닥에 덩어리진 담요에 기대 다리를 뻗으니 절로 잠이 왔다. 눈을 감아도 컴컴한 곳에서 모니터를 계속 응시했던 탓인지 빛 고래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나는 그 잔상을 쫓으려고 노력하며 돌아누웠다.
“아- 돌아가고 싶다.”
돌아가고 싶다. 그곳으로. 그 시간으로. 이미 추억이 되어버렸을 기억 속으로.
그녀를 만난 것은 내 시간으로 불과 3개월 전이었다. 그녀에겐 얼마나 지났을지 모르지. 계산을 해보면 나오겠지만, 하도 빛 고래를 쫓아 불규칙적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귀찮아서 해보지 않았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고.
나는 오랫동안 식민지 사이를 떠돌아다니며 여러 대의 우주선에서 일했고, 잠깐씩 우주정거장이나 터미널에서 머물 때는 있었지만 평생 우주를 떠돌며 살았다. 나는 우주 정거장에서 태어났고, 우주선의 선주이자 선장인 엄마 밑에서 유아기를 보내고 부모님이 이혼한 후로는 선원인 아버지를 따라 갖은 우주선을 전전하며 우주를 돌아다녔다. 우주 여행자들이 흔히 돌아갈 곳으로 그리워하고 고향이라 되뇌는 모성- 지구는 나에게 별 의미 없는 곳이었다. 나는 우주에서 태어나 자랐고, 우주선이 내 집인 것에 익숙했다. 오히려 땅에 발을 붙이고 서는 것이 불안할 만큼.
임금체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구에 내린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지구에서는 몇 십 년이 흘러 있었고, 달의 우주 정거장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른바 우주촌놈이었다. 우주시대가 열린 뒤로 그 변화의 속도가 20세기에 비해서야 현저히 느려졌다고는 하지만, 모든 것이 너무 변해버려서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하다못해 택시를 타거나, 건물에 들어가거나, 공중화장실을 이용하는 사소한 일조차도. 편리하게는 변했지만 사용방법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당혹스러울 뿐이다. 그런 일들의 연속이었다. 짜증스러워서 다음 일이 정해지는 대로 빨리 지구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되도록이면 오랜 기간 동안 할 일이면 좋을 거라 생각했고 마시고 싶었던 맥주나 실컷 마시면서 우주 정거장에 딸린 숙박 지를 벗어나지 않았다. 괜찮은 일거리가 생기기만을 기다리는데 인맥도 없고 하다 보니 좀처럼 다음 일이 잡히질 않았다. 난 오랫동안 임금체불로 인해 지긋지긋한 일을 겪었으므로 아무 우주선에나 덥석 계약하고 탑승할 수가 없었다. 우주에서는 까닥하면 에너지 고갈이나 해적 등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고립되어 구조당하는 경우가 흔했고, 그런 경우엔 어마어마한 비용이 청구되어 선주들이 파산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렇기에 나 같은 에너지 조정사가 필요한 것이다. 우주선에 태양에너지를 확보시키고, 그것을 일정에 맞추어 필요한 곳에 배분하고, 에너지가 고갈되기 전에 일정을 조정하는. 하지만 조정사의 말을 언제나 선장들이 고분고분 따라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괜찮다며 제 고집을 피우다가 그런 식으로 파산해버려 임금도 받지 못하는 일에는 정말 진력이 났다. 그러니 내 임금을 떼먹지 않을 신용 있는 일자리를 잡으려면 신중해야 했고, 그 우주선과 선장에 대해 잘 알아야만 했다.
그래서 결국 우주선과 선원들을 서로 소개시켜주는 크루워크넷의 직원을 고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직원이 바로 그녀였다.
갈색 곱슬머리에 연한 다갈색의 눈동자. 어째서 그녀가 마음에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눈에 확 띄는 미인도 아니었고 특별난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그녀를 처음 보는 순간부터 강한 친근감을 느꼈다. 그리고 지구에서의 생활이 어렵다는 이유로 툭하면 그녀의 도움을 요청했다. 그녀는 보기 드물 만큼 착하고 무른 사람이었고, 내가 장난삼아 별 거 아닌 일로 귀찮게 굴어도 싫다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녀와 사랑에 빠진 것은 정말 순식간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순간에 타인과 친해지고 가까워질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만난 지 일주일 만에 입술을 겹치고 그녀를 품에 안아보았을 땐, 나사가 제 구멍에 찾아들어가고, 경칩이 제 자리에 맞물리듯이 그녀가 내 몸에 딱 들어맞는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덥석 마음을 줘버리고 변한 내 자신이나, 몸에 스며들듯 일부분이 되어버린 그녀에 대해서나 나는 어떤 의문도 품지 않았다. 사랑에 눈멀어 있으니 그 모든 것들이 당연하게 생각되어졌던 것이다.
안일했지.
나는 쓴웃음을 머금고 자리에서 일어나 스피커를 켰다.
아니나 다를까 선장이 꽥꽥 거리며 날 찾아대고 있었다. 나는 네네, 대충 대답을 해준 뒤 에너지 배분을 다시 짜 넣었다. 모니터에 닿을 듯 바싹 다가온 빛 고래의 꼬리가 보였다.
나는 모든 에너지 출력을 양자기 쪽으로 돌린 뒤 최대한 가까운 우주 정거장과 터미널을 검색했다. 적어도 거기까지 돌아갈 수 있을지, 가는 동안 태양에너지를 충전시킬 수 있을지 컴퓨터를 들여다보며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시몬스가 그물을 짜고 있는지 에너지 수치가 무섭게 떨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만약 이번에도 실패하면 빛 고래가 졸졸 따라온다고 해도 우주 정거장으로 돌아가서 보급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면 좀 쉴 수 있겠지, 맥주도 실컷 마시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쑥쑥 줄어드는 에너지를 흐뭇한 마음으로 쳐다보았다. 육안으로는 확인되지 않는 양자기 그물이 모니터에 표시되었다. 나는 틀림없이 이때쯤 빛 고래가 줄행랑을 칠 것이다 생각하고 잡는 것은 기대도 하지 않고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하지만 빛 고래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놈이 정말 지치기라도 한 건가, 왜 공간이동을 하지 않는 것이지?
나는 모니터 앞에서 일어나 창을 가린 책 더미를 치우고 밖을 쳐다보았다.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무척 가까웠다. 바로 코앞이었다. 놈의 번쩍거리는 비늘과 수염이 작은 창을 꽉 채우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밖으로 튀어나갔고, 선장실 쪽으로 달려갔다. 선장실 쪽 복도는 창이 컸기 때문에 거기에는 이미 많은 선원들이 다닥다닥 붙어 빛 고래를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나는 그들을 헤치고 선장실로 들어갔다.
선장실로 들어가니 정말로 장관이었다. 선장실은 시야 확보를 위해 전면이 창이기 때문에 빛 고래의 전신이 다 보였다. 놈의 커다란 수염이 바로 앞에서 넘실거리고 있었다. 선장은 조종 관 앞에 서서 넋을 잃고 있었고, 그것은 선장실 내의 다른 모든 선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두 서서는 멍하니 빛 고래를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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