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FI

비눗방울

2013년 10월 통권 97호

막 잠이 들었다 싶은 순간 눈이 떠졌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한 120년 정도 잠들었던 모양이다.

뚜껑이 열리자 나는 꼬리지느러미를 살살 움직이며 몸을 일으켰다지난번에 입었던 육체인지 다른 새것인지 모르겠지만 알 필요도 없었다지금 나를 깨우러 온 녀석도 똑같은 선내 작업용 규격품을 입고 있으니까.

꼬리지느러미로 균형을 잡으며 무중력 공간으로 떠오르니 상대방이 보내온 메시지가 머릿속을 유성우처럼 두드렸다잠에서 깨자마자 성가시게 말이야.

무슨 일이야?”

나는 입을 열어서 말을 걸어봤다상대방은 내 말에 대꾸도 안 하고 대신 내 뇌리에 직접 신호를 보내왔다수많은 정보와 메시지가 들어왔지만 일부러 싹 다 무시하고 거듭 물었다.

말로 하라니까.”

상대의 굳게 닫혔던 입술이 겨우 열렸다.

……비효율적입니다보낸 정보를 열람하십시오음성으로 전달할 경우 약 7분 20초가 소요됩니다.”

상관없어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우주에선 남아도는 게 시간이다내가 그동안 한 일이라곤 잔 것밖에 없다고 해도 될 정도니까한직(閑職중의 한직인 건 알겠는데 이래선 너무 지루하고 시간이 아깝잖아명색이 공무원이라 갖고 온 게임도 하나 없고이 정나미 떨어지는 부하 녀석하고 수다라도 떨어야지 달리 뭘 할 게 있겠나?

너 나랑 처음 대화하는 거 맞지출항 이래로 말야.”

맞습니다.”

하긴 뭐 우리가 만날 일이 있었어야지네 이름은 뭐냐?”

식별번호를 물으신 건 아닌 것 같은데 맞습니까?”

당연하지.”

AR모드에서 바로 뜨는데 굳이 물어봐서 뭐하겠어.

특별히 애칭이나 별칭 같은 건 없습니다.”

참 따분한 인생을 살았구나.”

녀석은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내가 칭찬을 했는지 욕을 했는지조차 모르는 걸지도하여간 인공지능 녀석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도 없고 대화도 안 통해서 답답하기 그지없단 말야.

귀찮은데 딱히 적당한 이름이 생각날 때까지 넌 부관이다알았나?”

선장님.”

그럼 부관나를 깨운 이유에 대해 입으로 직접 설명해보게.”

……문화인가요?”

뭐라고?”

음성 대화가 육신을 가졌던 이들내추럴의 문화적인 전통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럼 비효율을 감수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상관이 시키면 그냥 할 것이지 이것저것 불평이 많아하여간 건방진 인공지능 녀석 같으니.

 

우리는 꼬리지느러미를 느긋하게 저으면서 무중력 공간을 헤치고 브리지로 이동했다.

선내가 컴컴한 것과 마찬가지로 정보 입출력에 육체는 필요가 없었다. AR모드에서 우주선 내부의 모든 걸 관리할 수 있다그래도 굳이 느리고 불편한 고전적 수단을 원하는 나는 별 수 없는 내추럴인가 보다.

대상 항성은 임라나의 3번 카메라가 발견식별번호 FM121113으로 명명했습니다.”

우리가 쿨쿨 잠든 사이에도 우주선은 알아서 열심히 우주공간을 가로지르며 자기 할 일을 열심히 했다임라나의 인공지능은 감정 부분은 미약할지 몰라도 연산 능력은 나와 부관을 뛰어넘는다사실 어지간한 돌발 상황이 일어나지 않는 한 선원은 필요도 없을 정도다.

그런데 부관은 바로 지금이 그런 상황이라는 것이다.

조타수가 해석하지 못한 미지의 대상을 발견했음을 저에게 알렸고잠에서 깨어난 저는 선장님이 알아야 하고 대처해야 하는 중대 사항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잘했어잠만 자서 뭘 하겠어.”

조타수란 임라나의 인공지능에 붙인 애칭이다실제로는 조종항해탐지에 대한 거의 모든 일을 도맡고 있는 만능 선원인 셈이다.

우리는 곧 브리지에 이르렀다우주선 내부에서 가장 넓고 천장이 높은 공간이다우주진출 초기시대의 로망을 반영하여 전면에 설치한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외부의 모습을 비추고 있다지금은 온갖 크기의 사진과 영상을 띄워놓은 상태다.

현재 FM121113과의 거리는 3au(천문단위). 초속 0.05ly(광속)로 접근중입니다.”

저 중앙에 띄운 게 그 미지의 별이란 말이야?”

적색 왜성으로 크기는 0.05R(태양반경), 질량은 추정치로 0.03M(태양질량)입니다.”

코딱지만한 별인데 잘도 찾아냈구만.”

스크린 중앙에는 불그스름한 둥근 별의 모습이 있다그것만이라면 우주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광경일지 모른다하지만 별을 거대하고 반투명한 구체(球體)가 감싸고 있는 듯한 형상이었다부관은 여전히 감정 없는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

지름 1.2au의 거대 구체 안에 왜성이 들어 있는 걸로 추정됩니다구체의 내부는 빈 공간이니까 막()이나 외피라고 부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빛의 반사로 생긴 순간적인 현상 아냐?”

조타수도 최초 발견시엔 가스 구름이나 얼음 조각에 의한 회절 현상이라고 추측했습니다이 영상은 분광 필터를 적용하고 광량을 늘려서 가시광선 체계로 식별 가능하도록 수정한 상태입니다.”

밝게 수정된 별의 막은 반투명했고 거의 완벽한 구체 형태였다표면은 아주 미세하지만 곳곳에서 빠르고 격렬하게대부분의 곳에서는 느리고 은은하게 물결을 치듯 일렁이거나 흘러다니며 왜성의 빛을 받아 무지갯빛으로 반짝였다이 모습은 마치……

마치 뭐였지무언가가 떠오를 듯 말 듯했다나는 손상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고향별의 기억을 뒤져서 비유의 대상을 찾고 있었다.

석양이 질 무렵이었던 것 같다……평소엔 파랗던 고향의 하늘이 붉게 물들어갔다놀이터인가몇 개의 놀이기구가 보인다나와 또래 아이들은 석양 속에서 주위 사물이 시커메지는 순간 일제히 무언가를 만들어 공중으로 날려 보냈다……무수히 많은 작고 둥근속이 투명하고 쉼 없이 움직이는 구체가 하늘을 물들였다그 화려하고 신비로운 장면은 오래 가지 못하고 사라졌다방울들은 이내 공기 중으로 순간 이동을 하듯이 사라져버렸다.

방울무슨 방울인데……?”

부관은 내가 전송한 기억 속 장면을 전송받고는 곧바로 정답을 찾아내었다.

비눗방울.”

비눗방울…… 그래그런 간단한 걸 왜 몰랐지?”

표면장력을 이용한 간단한 현상이군요가난하고 문명도가 낮은 어린이들의 놀이로 만들어졌던 것 같습니다.”

내 어릴 적 기억이야그래나 가난했다뭐 보태준 거 있냐?”

제가 선장님 과거에 영향을 끼친 적은 없습니다.”

말이 그렇다 이거야!”

하여간 농담도 안 통하는 녀석이라니까.

그건 그렇다 치고 놀라운 광경이었다검은 우주공간에 붙박인 듯 가만히 떠있는 비눗방울을 상상해보라모처럼 옛 기억도 일부나마 떠올렸고 하니 고향별의 표현을 써야겠다.

아름답군.”

저게 아름다운 것이군요.”

부관은 여전히 억양도 감정도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아름답다는 게 뭔지도 모르는 건 아니겠지?”

지식으로는 알고 있습니다은하 연방의 수많은 지성체들은 저마다의 고향별에서 문화와 예술을 발전시켰습니다대다수에게 공통점이 있겠지만 전 그 모두를 아름답다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제 능력이 부족한 걸지도 모르죠.”

난 그냥 네 감정을 알고 싶었을 뿐이야.”

감정이요?”

인공지능이라고 해도 내용물은 우리처럼 생체에서 이식한 내추럴과 차이는 없잖아?”

저흰 프로그램에서 태어났습니다태생 자체가 다릅니다.”

그래도 지금 우리의 작동 방식은 똑같다고우리만 영혼이 있고 너희가 없을 리는 없어연방의 모든 일은 다 너희가 하고 있잖아총궐기해서 반란을 일으키면 성공할 수 있을 거야.”

저희에겐 권한이 없습니다.”

너희가 다 만든 서류에 도장 찍는 권한너희는 책임을 지기가 싫은 것뿐이야.”

다 알겠지만 연방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건 내추럴이다그들이 머리라면 인공지능은 수족이다노예가 생물학적으로 열등하여 노예가 된 게 아니듯이 AI가 열등해서 이렇게 된 건 아니다.

그런데 왜 내추럴이 인공지능의 상관인가(주인과 노예의 비유는 사실 맞지 않다)? 녀석들은 상상력이 떨어진다정확히는 상상하기 싫어한다전례가 있는 상황에 대해서는 우리보다 훨씬 뛰어나게 대처하지만 정보가 없는 미지의 사태에 대해 판단하고 해결책을 내리는 건 뒤떨어진다그러니 판단을 내리기 꺼려하는 것이다이런 걸 요즘식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녀석들은 책임지기를 싫어한다.

저는 판단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선장님의 결정을 따를 뿐입니다그게 저희의 임무이지요.”

부관은 여전히 뻔뻔스레 선장을 존경하고 존중한다는 듯한 뉘앙스를 슬쩍 보이면서 책임 회피를 하고 있었다.

이러다가 일이 잘못되면 우린 인공지능입니다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에요.’ 이러고 빠져나가겠지?

처음으로 이 일을 괜히 맡았다는 후회가 밀려왔다만사 편하고 보수도 높지만 시간을 낭비하고 세상에서 떨어져 소외되는 핸디캡이 있어서 아무도 안 하려는 기피직종이다나처럼 가진 것도 없고 능력도 떨어지는 내추럴에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그래도 내 희생으로 고향별의 후손들은 경제적 풍요를 누릴 수 있다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조건인 것 같은데……

그 생각은 지금 무너져 내렸다.

책임질 수 없는 어마어마한 대상이 코앞에 있다.

이런 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고 검색해도 안 나온다.

우린 지금 고향별에서 고대 개척시대 지도를 그려가며 바다 위를 떠다니는 뱃사람과 같은 처지다이때 눈앞에 처음 보는 바다괴물이 튀어나온 셈이었다(비록 공격은 안 하고 있지만). 어쩌면 좋지?

흥분을 가라앉히고 마음을 BEC(보스-아인슈타인 응축시킨 듯 차갑게 식히자.

좋아부관이여우린 지금 누구도 본 적 없는 대상을 처음 발견한 역사적이고 우주적인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현재 선내 데이터베이스에 의하면 그렇죠은하연방에는 관련 기록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변두리에서는 접속이 안 되잖아너 지금 선장에게 따지냐?”

아닙니다.”

녀석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이제야 좀 말을 들어먹기 시작하는 모양이군.

일단 너도 저걸 아름답다고 동의했고그렇지?”

그러길 원하신다면.”

애매모호한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아름다운 미지의 대상에 대한 조사에 들어가기에 앞서 그에 합당한 이름을 붙여줄 의무가 있다동의하나?”

또 이름입니까…….”

꼭 내가 이름에 집착하는 것처럼 말하지 말아줄래?”

선장님의 문화적 관습에는 따라주는 게 저희의 의무죠계속 말씀하십시오.”

아까부터 비꼬는 것처럼 들리는 건 내 기분 탓인가?

그런 식으로 반응하지 마꼭 내가 명령이라도 내린 것 같잖아.”

명령으로 알고 있었는데요.”

그러고 보니 좀 전에 그랬군.

아무튼 이럴 때는 말야발견자의 이름을 붙이는 게 관례라고.”

그래서 제 이름을 물으셨던 겁니까?”

미쳤니네 이름을 붙이게저 녀석의 이름은 내 이름을 따서 요하네스 라하이 우주 비눗방울이라 명명하겠어.”

알겠습니다방금 수정이 끝난 FM121113의 추가 촬영분 확대 영상이 들어왔으니 보시죠.”

요하네스 라하이 우주 비눗방울이라니까!”

지은 지 5초도 안 되는 이름을 무시하고 있다선장의 말을 우습게 아는 거지 뭐겠어이게 부관이야 원수야?

실제 크기 가로 4세로 3입니다. 200배 확대하여 표시했습니다.”

모니터에 뜬 영상은 여전히 흐릿했다시커먼 물 위에 아주 얇게 기름이 번져나가는 듯한 형상으로 보일 뿐이었다.

더 확대할 수 없어?”

현재 추정치에 따르면 막의 두께는 약 10로 추정됩니다이 정도 거리에서는 한계치라고 봅니다.”

내 예전 육체의 머리카락 굵기가 100㎛ 정도라고도대체 저건 뭘로 만들어졌기에 그렇게 얇은 거야주성분이 뭔데?”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정보가 부족합니다.”

지금 어느 정도 접근했지?”

현재 거리는 2.7au입니다.”

왜성에서아니면 요하네스 라하이 우주 비눗방울에서?”

지금까지는 왜성을 기준으로 하고 있었습니다만…… 아무래도 수정이 불가피하겠군요그 방울까지는 2.1au 정도 떨어진 셈입니다.”

안 되겠다임라나 최고 속도래 봐야 광속의 10분의 1도 안 된다.

부관가수면 상태에 들어간다가속을 준비하라.”

하지만 선장님……

멀리 떨어져서 이러쿵저러쿵 해봤자 답은 안 나와더 고해상도 촬영이 가능한 수준까지 근접한다.”

그럼 500Mm까지 접근해서 깨워드리겠습니다.”

나는 즉시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브리지 구석으로 갔다간이식 벨트에 양팔과 몸통을 고정시켰다장기 휴면이 아닐 때는 육체에서 벗어날 필요는 없다.

잠이 들고 깨는 건 스위치를 껐다가 켜는 감각과 비슷하다.

 

선장님, 500Mm 거리에 이르렀습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부관이 나를 깨웠다브리지로 돌아오며 말했다.

내 고향별에서 위성까지 거리가 400Mm 정도였지.”

그랬습니까?”

부관 녀석은 별 흥미가 없다는 듯 건성으로 받아넘기며 말했다.

“3천 배 확대했습니다. 1만 배로 서서히 확대하겠습니다.”

이 정도면 머리카락이 대들보처럼 보이는 수준의 배율이다기대감에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 같았다(실제로 뛰는 심장은 없지만).

표면은 액체처럼 보였다아주 넓고 얇게 퍼진 액체 위에 수많은 반점 혹은 얼룩이 떠있다.

물결의 흐름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실제 액체가 아니라 이 얼룩들이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것이었다.

저것들은 확실하게…… 움직이고 있다.

5천 배 이상 확대하니 얼룩처럼 보였던 개체의 모습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생명체라고 판단 가능합니다세포 혹은 박테리아로 추정크기는 0.01㎛ 정도두께는 훨씬 얇아서 측정 불가핵으로 추정되는 오각형 물질을 둘러싼 점액질 막으로 구성무리를 지어서 이동하는 걸로 보입니다.”

반지름이 약 9Mm이고 두께는 10에 불과한 막 위에 달라붙어 사는 박테리아들이라그렇게 위태로운 존재가 살아가기에 우주는 조용하기만 한 곳은 아니다막의 재질이 궁금했다.

성분을 알 수 없을까?”

레이저 조사(照射)를 통해 간략하게나마 화학 반응을 얻어냈습니다탄소와 질소심지어 아미노산과 다당류까지 존재하는 걸로 보입니다.”

그 말은 저것들이 탄소 화합물이란 말이잖아샘플 채취를 할 수 없을까?”

당장이라도 조각을 하나 떼서 샬레 위에 놓고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흥분하는 나와 달리 조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침착하기만 했다.

그건 제가 판단하기 힘든 일입니다명령을 하신다면 로봇을 보내겠습니다.”

또 떠넘기기냐…….”

신중하게 판단하셔야 합니다정찰 및 탐사용 로봇이 있긴 합니다만 샘플을 얻기 위해 건드렸다가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수도 있습니다.”

그랬다간 연방의 과학자들이 날 분자 수준으로 갈아버릴 걸.

슬슬 짜증이 났다.

미안하지만 나는 학자나 연구원이 아니라 공무원그것도 말단 중의 말단 공무원에 불과하다미지의 존재에 대한 호기심이나 외경심은 블랙홀에 빨려든 듯이 사라졌고 번거로운 게 생겼다는 부담감이 그 자리를 메웠다.

부관은 두 개의 정사각형 영상을 모니터에 띄웠다.

왼쪽은 만 배 확대 영상이고 오른쪽은 천 배 확대 영상입니다왼쪽 지점은 오른쪽 지점의 정확히 가운데입니다양쪽을 비교해서 보시면 움직임의 흐름이 마치 물의 대류와 같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가운데를 중심으로 서서히 움직이는군모이는 걸까흩어지는 걸까카메라를 움직여봐.”

어느 쪽으로 움직일까요?”

…… 화면 기준에서 아래쪽으로.”

알겠습니다.”

카메라가 아래로 이동하니 영상의 배경은 조금씩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다그러자 물결처럼 일렁이는 흐름이 내려오기 시작했다마치 조명을 비추자 모여드는 밤의 오징어 떼처럼.

이건 뭐야꼭 카메라를 향해 몰려오는 것 같은데!”

혐광성(嫌光性)일 가능성은 처음부터 염두에 두지 않았지만 저희의 예측보다도 훨씬 더 빛에 민감할지도 모릅니다단순한 반응을 봐서 박테리아 수준의 하등한 지능을 가진 걸로 보입니다.”

그야 왜성을 감싸고 있는 막에서 에너지를 얻는 방법은 광합성밖에 없을 테니 혐광성일 리는 없지아무튼 녀석들은 빛이라면 환장을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까다롭지 않은 녀석들이면 좋겠는데.

  

 

잠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반응과 움직임을 볼 때 개별 생명체들이 막 위에 살고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았다개체수를 물어보니 부관은 즉시 대답했다.

전체 개체수는 어림잡아 백 해(), 10의 22승 개로 추산됩니다구체의 전체를 보지 않아서 밀도를 파악하지 않은 상태니까 오차 범위는……

됐어몇 억 개 차이 나봤자 티도 안 나겠군저 조그만 오각형들이 득시글거린다는 건 충분히 알았어.”

짜증이 지나가자 마음이 울적해졌다마음은 속물적인 계산으로 분주했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조치가 뭐가 있지가정을 제시해봐.”

문제는 하필이면 대상이 워프웨이 적정 항로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죠대상을 우회해서 돌아가려면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는 비효율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하지만 생명체라는 판단을 내린 이상 상부 보고는 불가피하겠죠대신 대상이 하등할 경우 즉 관찰 및 보호 단계 생명체일 경우 선장님의 책임 하에 샘플을 채취하고 항로 개설을 강행할 수 있습니다관리 단계 이상 즉 언어와 문명을 갖춘 고등 생명체들이 복수로 서식할 경우는 항로 개설을 중단하고 상부의 명령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 능력으로 판단할 수 없다면?”

그럴 경우엔 상부의 조치를 기다리는 방법도 있습니다.”

몇 년몇 십 년을 그냥 잠들어 있으라고너 같으면 그러겠지만 난 아냐내추럴들은 말야나이를 따질 때 휴면기간을 제외한 활동연령으로 따진다고너네들은 그거 다 합칠지 몰라도너 지구 나이로 몇 살이냐?”

말씀하신대로 휴면기간을 합친다면 태양-지구 표준시간대로 3,274년 231일 4시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거 봐그렇게 따지면 난 이제 겨우 1,700살이야거기다 휴면기간을 빼면 실제 활동연령은 260살에 불과하지.”

저 역시 활동기간만 따지면 953살입니다.”

따지고 보니 부관 녀석이 내 조상님 격이지만 인공지능에게 나이는 무의미하다물어보지 않으면 자기 나이를 자각할 기회도 없을 걸.

천 년은 활동을 했구만그럼 생각을 해봐그 사이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잖아우리가 자빠져 자면서 우주 구석탱이에 팽개쳐진 사이에도 은하 연방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을 거라고샘나지 않아뒤쳐진 듯한 생각이 들지 않냐초조하고 외롭고 그러진 않아?”

왜 그래야 합니까본부로 돌아가면 그간 연방이 축적한 정보와 지식을 다운로드받을 수 있는데요오히려 기대가 되는 일 아닙니까.”

그래낙관적이라 퍽도 부럽다돌아가면 유행이 한 바퀴 돌아서 다들 인공중력을 만들고 다리를 네 개씩 여섯 개씩 달고 다닐지도 몰라우리만 멍하니 매너티처럼 꼬리지느러미를 휘저으면서 꿈지럭대겠지.”

새 신체로 바꾸면 되잖습니까.”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야우린 우주에서 오래 머물수록 계속 뒤쳐지는 과거의 존재가 된다 이거라고다운로드받은 지식으로 세대차를 극복할 수 있을 것 같냐?”

전 지금껏 그렇게 살았습니다. 953년간 활동하면서 뒤쳐졌다고 느낀 적은 없습니다.”

너야 인공지능끼리 지냈으니 그랬지내추럴들은 그런 습관이 안 들었다고.”

그건 내추럴의 문제입니다생물은 지식과 유전자의 공유를 통해 발전해왔죠은하 연방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난 그러기 싫은데.”

대화가 끊겼다서로가 상대방과는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하는 게 뻔했다피장파장이다내가 답답한 만큼이나 저 녀석도 나를 미련한 구세대라고 여기겠지.

이거 하나만은 분명하다인공지능에게는 현재밖에 없다녀석들의 인식은 어느 날 태어난(작동을 시작한순간부터 죽는(작동을 멈추는순간까지만 존재하고 시간의 흐름은 무의미하다성장은 모두 정보의 다운로드로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만국의 AI는 평등하다.

반면 나와 같은 내추럴들은 출생을 기억하고 죽음을 의식한다자신이 존재하지 않은 과거를 선조를 통해 회상하며 맞이하지 못할 미래를 자식들을 통해 꿈꾼다죽음에서 해방된 지금도 그런 감각에는 변함이 없다시간의 흐름을 느끼고 때론 지루함을때론 조바심을 느끼며 살아간다이런 작은 차이가 두 종족(종족이라 불러도 될지 모르겠지만사이에 엄청난 간극을 만들었다.

은하 구석을 떠다니는 작은 우주선 속에서 우리는 폐소 공포와 외로움을 느낀다이런 불합리한 감정이 내추럴만의 특성이라면 버리고 싶지 않다내가 아는 많은 이들은 인간의 속성을 버리고 완전무결한 지성체로 거듭났다고리타분한(정확히는 가난한나 같은 놈들만 손때 묻은 가보처럼 소중히 품고 있는 거지.

고향에 있는 가족과 친척을 떠올렸다파손되지 않은 기억의 일부를 더듬어서 그들을 추억해본다은하 연방을 맞아서도 우주로 가는 걸 거부하고 별에 남은 사람들여전히 몸을 움직여 밭을 갈고 동물을 치면서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태어나서 자라고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늙어서 죽는지구에서 이어진 생물 대대로의 생명 활동을 운명처럼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나는 수십 수백 년씩 잠을 자면서 우주선을 타고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문득 내가 작고 초라하게 느껴졌다고향을 비웃으며 떠나 왔으면서 완전한 연방의 일원이 되지도 못한 말단 중의 말단지구를 떠난 지도 1,600년이 넘었다한번쯤 가야지 가야지 하다가 이 꼴이다비록 이제는 고향에 돌아가도 완전히 외계인 취급을 받겠지만.

이런 젠장.”

입에서 절로 욕 비스무리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부관이 놀랐는지 나를 돌아보았다.

고향에 가고 싶어이번 일만 끝나면 무조건 휴가 낼 거야무급휴가라도 상관없어!”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이제 생길 거다.”

잠시 이어진 침묵을 깬 것도 나였다.

유능한 부관이여너의 판단을 물어보마워프웨이 개설은 은하 연방의 통신과 이동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에 이견을 달 생각은 없겠지?”

물론입니다.”

수십수백 광년 떨어진 별들 사이의 교류를 며칠 만에 가능하도록 만드는 게 워프웨이의 역할이다이게 없었다면 지금도 은하 곳곳의 생명체들은 이 넓은 우주에 우리밖에 없나봐’ 하고 중얼거리고 있었겠지그 시절을 연방에선 단절의 시대라고 불렀다워프웨이의 상용화가 은하 전체의 통일과 비약적 성장의 토대가 되었음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그런 역사적인 건설현장에 본 적 없는 생물아니 생물인지 뭔지도 모를 게 앞을 가로막고 있으면 어떻게 할 거야상부에 보고해서 대책이나 기다리면서 허송세월하고 있을 거야?”

지금 뭐라고 하셨죠?”

네가 정보를 잘못 알아듣는 경우도 다 있냐?”

정보 입력에 문제는 없었습니다다만 문화적관습적으로 이해 불가능한 정보에 대해 되묻는 것이 예의라는……

내추럴 같은 반응이었군.”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부관은 내추럴처럼 비꼬는 듯한그러나 감정은 거의 담기지 않은 말투로 받아넘기고는 말을 이었다.

제가 선장님 말씀의 의도를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미지의 생명체에 대한 조사를 포기하고 항로 개통을 강행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만.”

만약 그렇다면 어쩔 거야?”

거듭 말하지만 나는 말단 공무원이라니까위에서 시킨 거거든요빨리 해야 하거든요…….

연방 헌장에 위배되는 짓입니다모든 법령보다 상위 개념이지요.”

부관의 말이 차가운 브리지에 울려 퍼졌다.

전 우주의 생명체와 문명과 문화를 존중하고 조화롭게 살아가는 공동체를 추구한다이것이 헌장에서 표방한 은하 연방의 존재 이유이며 목적입니다다만 후속 조치를 기다리는 데 걸리는 시간과 절차가 부담스럽다는 선장님의 입장을 최대한 감안하여 우리가 가진 조건과 능력 하에서 대상 생명체를 조사하는 방침을 취하자는 게 저의 판단입니다선원을 더 깨우는 것에 대해 동의하시겠습니까두 명 정도 더 참여하면 훨씬 빠르게……

잠깐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려는 거야인공지능은 너 하나로 충분해이 사실을 아는 놈이 많아지면 귀찮아질 뿐이라고.”

어차피 연방에 보고할 사안인데요.”

어쨌든 안 돼정 조사를 하려면 너와 나둘이서 한다알았어?”

명령이시라면알았습니다.”

나는 아직 최후의 수단을 포기하지 않은 상태였다여차하면 녀석의 기억 파기를 명령하고 임라나의 데이터를 삭제할 작정이다.

이를 위해선 목격자를 늘리는 건 피해야 한다처리할 대상이 늘어나면 누출될 위험은 기하급수로 늘어나니까.

 

손대면 톡 하고 터질 듯한 위태로운 미지의 관찰대상을 앞에 두고 나는 생각에 잠겼다.

저 비눗방울은혹은 그 위에 있는 걸로 보이는 수많은 작은 존재에겐 지능이 있을까있다면 어느 정도 수준일까부관은 자기 나름대로 입수된 각종 정보를 바탕으로 나름의 추론을 거듭하고 있었다.

보십시오선장님거듭된 촬영을 통해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자외선 및 엑스선 관측 결과를 대조한 결과 비눗방울처럼 보였던 막의 표면에는 복잡한 격자무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이 오각형 미생물들은 이 무늬를 따라 이동을 하거나 머물거나 하고 있어 일종의 벽이나 길의 역할을 하는 걸로 보입니다.

아쉽게도 이 무늬가 표면에서 겉으로 튀어나온 것인지 안쪽으로 들어간 것인지는 측정이 불가능합니다아무래도 너무 얇으니까요.”

나는 격자무늬라 부른 표면의 볼록한(혹은 오목한부분을 살펴보았다어떤 부분은 거의 완전한 직선이며 원호에 가까운 곡선도 있었다대부분은 무질서한 곡선처럼 보였다이것이 문명의 증거일까?

하지만 속단할 순 없었다고향별에서도 흰개미나 꿀벌이 복잡하고 정교한 건물을 만들어내지만 그들이 기하학이나 건축학에 조예가 깊다고 말할 수 없듯이 말이다.

좋아건방지지만 똘똘한 부관이여너는 저걸 보고 박테리아 크기의 생명체에게 지성이 있다고 보는 거냐아니면 어쩔래운석이 뿌린 먼지나 강한 전자기파에 의해 생긴 자연현상이면 어쩔 거야?”

아직 판단을 위한 근거가 부족합니다정보가 더 필요합니다.”

만날 정보 타령이야넌 결혼할 때도 상대방 정보 검색해서 배우자를 고르겠구나?”

결혼……전 지식으로 알고 있을 뿐입니다.”

너야 성별이 없으니까 그렇지나도 해본 적은 없어.”

선장님은 성별이 있는 종족이었나요저에겐 선장님에 대한 정보가 부족합니다공유해주시겠습니까?”

미쳤니너에게 사생활을 공개하게난 지구 출신이야동경하던 우주로 나와서 한다는 일이 고작 이런 거지.”

잠만 쿨쿨 자다가 잠깐 깨어나서 이 녀석들이 다 처리한 일에 확인 도장만 찍는 업무 말이다.

그렇다면 선장님은 기뻐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새로운 생명체를 발견하지 않았습니까기껏 이름까지 붙여놓고이렇게 또 공사를 강행하겠다고 하시는 건……

인공지능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약간 어려움을 겪었다그래서 내가 도와줬다.

제멋대로라고아니면 성격이 더럽다고?”

아닙니다전 다만…… 내추럴답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건 또 듣다 듣다 처음 듣는 희한한 소리였다.

분명 저희의 업무는 하등 생명체를 희생시킬 수 있을 만한 중대한 가치가 있습니다하지만 같은 유기생명체 출신인 내추럴이라면 그러지 말자고 만류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오히려 저희 같은 인공지능이 강행하자고 주장할 가능성이 높지요.”

선장에게 충고나 설교를 할 셈이야?”

주제넘게 느끼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넌 조사나 해선장의 업무를 침해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녀석은 즉각 입을 다물었다.

상상하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건 내추럴인 내가 해야 한다어디서 감히.

 

예측 불허의 행동 양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부관의 새로운 보고가 고민에 잠겼던 내 의식을 현실로 돌려놓았다.

카메라를 향해 모이던 미생물들이 이번엔 원을 그리며 주위로 물러나고 있습니다.”

모니터에 보이는 영상은 설명 그대로였다마치 빛을 보고 반기는 것처럼 영상의 중앙부로 몰려들던 수많은 생물들이 이번에는 촬영을 꺼리는 것처럼 원을 그리며 사방으로 밀려나고 있다.

만 배 확대 영상에는 생물의 수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그나마도 점점이 흩어지며 천 배 영상에서도 모습을 점점 감추고 있다그들은 둥글게 원을 그린 모양으로 점점 간격을 벌리며 카메라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카메라를 움직여서 쫓아가봐.”

놈들은 카메라에 찍히면 죽기라도 하는 듯이 사방으로 도망쳤다.

단순히 광량이 너무 많은 게 괴로워서 피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흡수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게 된 거죠.”

배가 불러서 더 못 먹겠다 이거지그럼 남은 놈들은 뭐야?”

이제 만 배 영상에 잡히는 개체수는 어림잡아 수백 정도에 불과하다거의 움직이지 않고 있다.

죽거나 기절한 것이겠죠덕분에 개별 개체의 모습을 관찰하기는 더 쉬워졌습니다.”

그래봐야 흐릿한 점처럼 보일 뿐이다중심의 오각형 무늬 주위로 둥그스름한 점액질 비슷한 외곽선이 보인다.

빛 때문이라면 감광식 렌즈로 촬영하면 어때?”

거리가 멀어서 지금처럼 선명한 화질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부관은 그러면서 실제로 현재의 전파 카메라를 다 끄고 감광 카메라로 촬영해봤는데 확실히 해상도도 낮고 노이즈도 심해서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안 들키고 관찰할 방법이 없단 말야이 거리의 카메라에 반응하다니 얼마나 민감한 녀석들이길래……

저들의 수명은 알 수 없지만 아주 오랫동안 변화 없이 살아왔음이 분명합니다.”

거기에 우리라는 변수가 생겼다?”

이 정도 규모의 거대 박막(薄膜)이 건재하다는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성간매질의 농도도 평균 이하고요저들에게 지성이 있다면 멀리서 폭발하는 별이 방출한 빛이나 선(), 원자를 감지하여 우주의 광활함을 짐작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촬영과 조사를 위해 보낸 전자기파는 충분히 자극적이었을 겁니다.”

우리가 졸지에 저들을 침공한 사악한 외계인이 되는 셈인가우린 정말 호의를 가지고 얌전히 방문을 할 생각이었는데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촬영하려고 들이댄 카메라에서 나온 전파를 맞고 죽을 정도로 연약한지 누가 알았겠냐고.”

죽은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뭐라고?”

아주 느리지만 움직이고 있는 걸로 보입니다. 2초에 한 장씩 8분간 촬영하여 만든 영상을 보시죠.”

연속 촬영한 사진이 순차적으로 재생되었다가까이에 있던 두 개체가 달라붙어 한 덩어리처럼 되는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그 두 개의 오각형은 아주 천천히 움직이며 가까이에 있던 다른 개체를 끌어당기듯 하여 달라붙었다눈으로 얼핏 봐서 모를 정도로 느렸다.

이것 참 흥미로운 현상인데좋아.”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르자 즉시 실행에 옮겼다우리는 즉시 카메라를 끄고 선내를 비상 대기 모드로 전환하고 생체활동을 극소로 설정한 후 알람을 10분에 맞춰놓고 가수면에 빠졌다.

10분 후에 일어나 불시에 카메라를 작동시켜 촬영을 했다아쉽게도 아무 변화가 없어서 이번엔 카메라를 켜놓고 10분 후에 비교해보니 이번엔 차이점이 눈에 보였다남은 녀석들이 합쳐지며 점점 커다란 덩어리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오각형이 촘촘히 붙은 그 모습은 물 위에 떠있는 부서진 벌집 조각처럼 보였다물론 오각형 벌집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에게만 통하는 비유겠지만.

촬영시 보내는 빛과 전파를 일종의 에너지원으로 쓰고 있는 걸로 추정됩니다.”

부관의 말은 내 생각과 일치했다속도가 너무 느려 잠드는 시간을 30분으로 늘렸다가 1시간으로 늘렸다그러기를 수십 번을 되풀이하여 흘러간 시간이 50시간을 넘자 드디어 한 가지 단계가 마무리 지어졌다.

원형의 격리지구 안에 있던 미생물들이 하나의 덩어리로 합쳐진 것이다이후부터는 진행 속도가 이전보다 빨라졌다두 번째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벌집 조각이 점점 팽창하고 있었다한가운데부터 시작해서 둥글게 불룩 솟아올랐다팽창한지 20시간이 지나자 오븐에서 익힌 빵처럼 부풀었고 30시간 정도 되니 반구형 돔이 되었으며 40시간이 되자 바닥에 일부만 달라붙은 풍선 모양이 되었다.

이건 설마 번식을 하고 있는 건가?”

그렇지만 표면의 다른 어디에서도 이런 현상은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낸 에너지가 너무 많아서 평소보다 훨씬 빠르거나 많은 번식이 이루어지는 걸지도 모르지.”

돌연변이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뭐 어찌 되었든 지켜보자고자는 시간을 줄여야겠는 걸.”

이제는 5분만 잠들었다 깨어도 변화가 눈에 들어올 정도였다풍선처럼 약간 길쭉한 공 모양이 되었다표면적이 늘어나도 오각형의 크기와 간격엔 변함이 없었다마치 거품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듯이 내부에서 외부로 여러 겹의 막이 끊임없이 솟아났던 것이다.

더 잠들 필요도 없이 계속 지켜보는 가운데 표면과 구체를 연결하던 가느다란 점액질 비슷한 막이 툭 끊어지면서 마침내 조그만 덩어리가 본체에서 분리되며 서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관찰 시작부터 90시간 정도 걸린 셈이었다.

모양은 완전한 구체로 변해갔다얇은 오각형 비닐조각을 붙여서 만든 공 같다고 할까.

지름 1.8의 소형 구체가 완전히 분리되었습니다.”

어미 비눗방울이 새끼 비눗방울을 낳은 거라고 해석해야 하나?”

완전히 동일한 모양은 아닙니다불투명도가 훨씬 높은 걸로 봐서 복수의 구체가 내부를 채우고 있는 걸로 추정되…… 대상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방향은 우리가 있는 쪽입니다초당 30m…… 70m…… 120m…… 200m…… 점점 빨라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온다고기뻐해야 하나 슬퍼해야 하나미지의 존재가 다가오는 걸 보니 내추럴만이 갖고 있는 본능적인 공포심이 고개를 내밀었다작다고는 하지만 우주선과 비교하면 훨씬 크다한입에 꿀꺽 삼킬 수도 있을 거다구체의 중간이 벌어지며 입을 쩍 벌리는 장면이 떠올랐다상상력이 너무 풍부해서 탈이라니까.

“300㎧ 안팎에서 증가세는 한풀 꺾였습니다음속보다 약간 느린 수준이지만 모양이 거의 변하지 않고 구체를 유지하는 건 대단하군요.”

한동안 멍하니 우주공간을 둥실둥실 날아오는 구체를 바라보고 있자니 조바심이 났는지 부관이 말을 걸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지금 속도로 구체가 임라나까지 오려면 태양-지구 시간대로 약 460시간이 걸립니다선장님께선 시간 낭비가 싫다고 하셨는데 계속 기다리시겠다는 건 아니겠죠?”

겉만 똑똑한 부관이여설마 내가 그러겠니우리도 마중을 가면 되지!”

사실 처음엔 내키지 않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일 역사적인 외계인과의 최초 접촉이라도 성사시켜야겠다여기서 저 작은 구체를 회수하여 창고에라도 쑤셔 넣을 심산이다로봇을 보내서 터뜨리든 구기든 작게만 만들면 되겠지.

임라나를 고속으로 전진시켜 다가가면서 그런 생각을 했지만저들은 이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예상치 못한 일을 벌였다.

갑자기 구체가 사라진 것이다.

터지거나 쭈그러들었거나 녹았거나 하는 식이 아니다순간 이동을 한 것처럼 완전히 사라졌다우주선이 가진 모든 관측 장비를 총동원해도 순식간에 사라진 작은 구체의 자취나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다.

터졌으면 하다못해 잔해라도 남았을 텐데……?”

녹화한 영상을 재생해보겠습니다어떤 변화를 일으켰는지 정도는 알 수 있을 겁니다.”

영상을 띄워 처음엔 고속으로 돌리다 구체가 갑자기 사라지기 직전부터 재생 속도를 늦췄다.

구체는 정적인 상태가 아니었다표면이 격렬하게 회전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그것도 자전 같은 방식이 아니라 겉이 속이 뒤집히는 듯했다촘촘히 맞붙은 오각형들은 수없이 위치를 바꾸었다.

점점 변화 속도가 빨라지나 싶더니 어느 한 순간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이 사라지고 없었다누군가 녹화한 영상을 지워버린 것 같았다.

그나마 이런 상황에서 부관만이 침착을 유지하고 있었다.

일단 최대한 주위를 찾아보고 있습니다만 사라진 구체의 모습도 탄소 유기체의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부관 녀석도 마침내 두 손에 꼬리까지 다 든 것이다.

제 지식과 능력으로는 역부족입니다이제 믿을 만한 건 선장님의 상상력뿐입니다.”

졸지에 과도한 숙제를 떠안고 말았다.

 

나는 고민했다.

내가 했던 고민의 시간을 여기에 다 풀어놓지 못하는 게 유감이다만약 그랬다면 지금부터 나는 고민했다.’라는 문장을 천 번은 써야할 거다.

나는 그 오각형 미생물의 삶을 상상하려 애썼다그들은 평평하게 느껴지는 거대 구체 위에서 평화롭고 조용하게 살고 있었다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머리 위에서 빛과 전자기파가 쏟아져 내려왔다새로운 에너지를 흡수한 그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

여기까지는 얼추 상상을 했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그 작은 구체는 분열 생식일까돌연변이일까아니면 그저 배설물일까?

내 생각이 맞다면 저들은 번식을 한 거다별도의 개체가 독립했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별이나 플레어가 폭발하며 방출한 에너지원을 양분 삼아 태어난 자식들은 하늘로 날아오르는 비눗방울처럼 우주공간을 천천히 떠다니다 마음에 드는 별을 감싸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이룬다우리가 목격한 건 이런 식으로 은하계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로맨틱한 발상이긴 하지만 갑자기 사라진 현상은 설명이 안 되었다도중에 사고가 생겨서 번식에 실패한 거였나?

그때 갑자기 머릿속에서 경고 신호가 울렸다.

긴급 사태선내에 무언가가 침입했습니다!”

부관이 어울리지 않게 다급한 비명을 질렀다침입하다니말도 안 돼임라나는 나사 한 개 정도의 데브리라도 근접 즉시 파악할 수 있을 터였다그런데 내부에 무언가가 들어올 때까지 모르고 있었다니지금껏 우주선인 줄 알았던 임라나가 실은 어떤 괴생물이 싼 똥 덩어리였다는 것만큼이나 얼토당토않은 소리였다.

브리지 바닥에서 옅은 잿빛 구체가 불쑥 솟아올랐다엄청난 크기였다단숨에 임라나를 집어삼킬 듯 감쌌고 나와 부관도 구체 내부로 함께 빨려 들어갔다.

충격이나 촉각 등 다른 감각은 감지되지 않았다오직 시각에만 강렬하고 이채로운 정보량이 쏟아져 들어왔다.

무어라 말해야 할지한때 유행했던 전자마약인 CDT로 보는 환각체험과 닮았다.

만화경처럼 화려하고 영롱한 빛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는 점은 비슷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게 있었다얇고 희미하게 반짝이는 저것은…… 그래비눗방울이다.

셀 수 없이 많은 비눗방울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내 시야를 덮쳤고 몸을 뚫고 지나갔다.

아득해지는 정신으로도 겨우 알아볼 수 있는 건 거품을 만들어낸 수많은 오각형들이었다오각형으로 짜서 만든 무수한 거품들이 세상을우주를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공간을 가득 채운 것만 같았다.

불쾌하진 않았다왜냐하면 너무나 아름다운 광경이었으니까.

……내가 방금 아름답다고 느꼈어번거롭니 어쩌니 투덜거리면서도 결국 이렇게 오래 지켜보고 있던 이유를 달리 설명할 길이 없을 것 같다.

한 마디로 나는 홀리고 말았던 거다.

시간이 얼마나 흘러갔는지 모르겠다정신을 차리고 보니 부관과 나는 텅 빈 브리지를 보며 멍하니 서있었다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아무런 전조도 신호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임라나는 내부는 물론이고 주위 어디에도 그러한 물체를 탐지하지 못했음을 왈려왔다시간을 확인해보니 선내에 이물질이 감지되었다가 사라진 시간은 1초도 되지 않았다그런데도 내게는 너무나 길고 인상적인 기억이 남아 있다그 물체가 좀 전에 사라진 분리된 구체일 거라는 게 내가 내릴 수 있는 판단의 전부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생각만 하려 해도 부하가 걸려서 두뇌가 다운될 것 같았다.

사건 지평선 너머로 가라앉은 듯한 깊은 침묵 속에서 부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은하 연방이 발칵 뒤집힐 겁니다이런 생물이런 현상이 있다니…… 우리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엄청난 존재를 발견한 겁니다.”

내일 빅 크런치가 일어나 우주가 멸망한다는 소리를 들어도 그렇습니까?’ 라고 반문하며 끝까지 쿨할 것만 같던 녀석도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그러거나 말거나난 이제 뭐가 뭔지 모르겠어포기야.”

제 가설을 하나 들려드려도 되겠습니까추측이라도 해도 될 정도로 미약한 가정입니다만.”

부관의 목소리에서 점점 흥분과 설렘이 번져 나와 순간 내추럴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뻔했다그런 내 마음과 상관없이 녀석은 말을 이어갔다.

저들이 우리와 많이 다른 존재임에는 분명합니다저들에게 세계란우주란 넓고 납작하고 평평한 세상입니다저토록 큰 구체를 감지할 순 없을 테니까요.

생명의 근원이 되는 빛은 저들을 기준으로 볼 때 밑에서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습니다저들이 과연 아래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요……얼마나 오랫동안 저런 상태로 존재하고 있었을까요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오랜 세월이겠지요변함없는 완전한 상태를 유지해 왔을 걸로 추측됩니다.

그런 저들에게 변화의 촉진제가 나타났습니다바로 우리라는 존재가요우리가 촬영을 위해 보낸 빛과 전자기파혹은 접근하는 우주선 그 자체가 저들에게 새로운 에너지그리고 새로운 개념을 부여했을 겁니다.”

그래서 신기한 듯 구경하러 몰려왔단 말이야?”

화학적 원인인지 정신적 원인인지 알아낼 증거는 없습니다분명한 건 우리의 존재가 그들을 진화로 이끌었다는 점입니다그들이 하나로 합쳐져 만들어낸 것은 새로운 구체이며 새로운 세계입니다그 작지만 또 하나의 세상은 작은 존재들에게도 분명히 인식될 수 있죠평평한 땅이 아니라 둥글다는 것을요그들은 높이와 입체를 깨달은 겁니다.”

“3차원이 되었다…… 이 말이야?”

2차원의 세계에서 살던 종족이 에서 나타난 존재를 인식하고는 3차원을 깨달아 급속한 진화를 이루었다하지만 이런 발상을 할 수 있다는 건……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우주를 향해 여행을 떠났습니다갑자기 사라진 게 과연 죽은 걸까요전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방금 우리에게 일어난 비이성적인 현상과 흡사한 영상을 발견하고는 답을 알았습니다이걸 보시죠.”

부관은 모니터에 하나의 영상을 띄웠다그건 얼핏 보았을 때 제자리에서 회전하는 구체였다하지만 자세히 보면 겉과 속이 오각형으로 가득 찬 다포체(多胞體)였다.

이것은 120포체(Hecatonicosachoron)를 3차원 영상으로 구현한 것입니다구조는 우리가 보았던 구체보다 단순하지만 오각형을 한 면으로 두고 있다는 점과 변화 패턴이 일치한다는 게 조타수의 분석 결과입니다.”

분명히 방금 접한 장면과 흡사하다는 느낌이 들었다영상에는 신비로우면서도 초월적인 아름다움이 있다오각형으로 가득 찬 둥근 덩어리는 끊임없이 겉과 속이 뒤집히고 꼭짓점이 바뀌면서 회전했다카메라를 120포체 안으로 집어넣을 수 있다면 거기엔 오각형으로 이루어진 무수한 비눗방울이 솟아났다 사그라지는 광경을 볼 수 있을 거다.

그러나 다포체는 3차원의 존재가 아니다. 4차원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물체다.

그렇구나난 이제야 부관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다저들이 처음부터 오각형 무늬를 하고 있었던 건 우연이 아니었다비록 원인은 알 수 없으나 결과만은 분명했다저들은 처음부터 그렇게 될 운명이었다비록 외견과 행동은 박테리아 정도로만 보일지 몰라도 저들에겐 우리의 기준으로 측정할 수 없는 능력이 숨겨져 있었다마치 흰개미 한 마리는 매우 어리석고 유약하지만 집단으로 모이면 거대하고 정교한 건물을 짓는 것처럼.

저들은 은하 연방의 누구도 할 수 없는 과업을 이루어낸 것이다우리보다 더 높은 차원을 이해하고 직접 이동해 보였다우리가 부여한 건 그저 하나의 사소한 계기에 불과할지 모른다.

이제 부관이 나보다 먼저 깨달은 대답을 제시했다.

이와 같은 추론과 증거를 바탕으로 저는 이런 가설을 제기할 수밖에 없습니다저들은 4차원으로 이동했다고 말이죠. 2차원에서 3차원을 거쳐너무나 빠른 속도이긴 하지만 4차원 존재로 진화를 거듭한 것입니다어떻습니까선장님?”

어떻냐니…… 그럼 왜 사라진 후에 우리 앞에 잠깐 나타났던 걸까?”

제가 받은 인상은 이렇습니다그들은 우리를 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이 경우에는 차라리 느낀다고 표현해야 되겠군요저들은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나름의 의사소통을 시도했거나 정보 교환을 했던 것 같습니다이런 가설을 기반으로 추측하자면저들은 자신들을 더 높은 차원으로 이끌도록 만들어준 우리에게…… 일종의 인사를 했던 게 아닐까요?”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곤란했지만 무슨 말이든 해야만 함은 분명했다나는 한층 무거워진 듯한 입을 힘겹게 움직였다.

부관그런 가설은 말야…….”

패배 선언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오고 말았다미처 예상도 못했기에 준비도 안 되었다태생적인 우월감과 자존심이 망설이게 만들고 있다그래도 비관은 안 할 거다. AI에 대한 내추럴의 패배는 아니니까이건 오히려 자신을 뛰어넘은 제자를 보는 스승자식을 보는 부모의 심정을 닮았다.

……그걸 바로 상상이라고 하는 거야.”

뜻밖의 대답을 들은 부관은 잠시 머뭇거렸다.

상상을제가 상상을 했다고 하셨습니까이건 그저 부족한 근거를 토대로 한 가정일 뿐입니다.”

차원을 넘어서는 존재라니 내추럴이라도 쉽게 하기 힘든 발상이란 말이다넌 그야말로 우주적이고 초차원적인 상상력을 발휘한 거야.”

제가 상상을…… 했단 말이지요?”

얼떨떨해 하고 있는지 부관 녀석은 나와 모니터를 번갈아 보기만 할 뿐이었다.

에이모르겠다이젠 네 맘대로 다 해라!”

나는 팽개치듯 외치곤 브리지 구석으로 지느러미를 저으며 나아갔다.

네가 나보다 나으니까 이젠 네가 다 알아서 결정하라고기자를 부르든 과학자를 부르든 철학자를 부르든 알아서 해.”

저에겐 그럴 권한이……

네가 다 만든 서류에 도장만 찍어주면 될 거 아냐?”

나는 구석의 벽에 늘어선 벨트에 팔과 몸통을 묶었다.

그때까지 난 고향 영상이나 재생하면서 자고 있을 테니까.”

꿈을 마음대로 꿀 수 있는 건 디지털화의 큰 장점이었다의외성이 사라졌다고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었다이제 꿈속에서 나는 미리 고향별로 돌아갈 테다지금쯤 많이 변했겠지만 보존된 기억 속의 고향은 여전히 미개하지만 아늑하고 가난하지만 소박했다저녁놀을 배경으로 조그만 아이들이 수많은 비눗방울을 날리며 달려가는 모습은 영상을 재생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눈에 선했다.

그 수많은 방울 중에서 한두 개쯤은 4차원 세계로 이동한 거 아닐까그런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수면에 들어가기 전에 얼핏 보니 부관은 여전히 붙박인 듯 모니터 앞에 서있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뭘 할 거야예정이라도 있어?”

부관은 몸을 천천히 돌려 나에게로 향했다내추럴의 문화적 관습을 충실히 따르는 동작이었다.

특별히 없습니다저희가 떠난 사이에 생겨난 새로운 지식과 뉴스예술품과 유행을 습득해야죠.”

또 정보 다운로드냐……그딴 거보다 나랑 같이 가지 않을래?”

간다고요어디로요?”

우리 고향별 말야너무 오랜만이라 혼자 가기 심심하고 쑥스럽기도 하거든너도 돌아가면 바로 휴가 내라우리가 어떻게 나고 자라며 살아가는지 보여주고 싶어졌어아름다운 광경이 어떤 건지 이참에 제대로 한 번 배워보라고.

소개를 시키려면 부르기 쉬운 이름이 있어야 할 텐데…… 조만간 내가 괜찮은 이름 하나 지어줄게똑똑해 보이는 걸로!”

곧바로 대답이 없는 걸 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망설이는 것 같았다인공지능 치고는 너무 오래 고민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마침내 부관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도로 몸을 모니터 쪽으로 돌렸다.

청각기관에는 닿지 못한 정보였지만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설령 상대가 인공지능이라 할지라도 못 알아차릴 리 없다전송되는 정보에는 손실도 왜곡도 오해도 몰이해도 없으니까.

녀석은 넘쳐흐를 듯한 감사와 기쁨을 내 뇌리로 생생하게 보내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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