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FI

앱솔루트 바디

2007년 3월 통권 18호

 

메사슈미트 선생님께.

 

저는 뷔겐 자르라고 합니다. 이탈리아 촌구석 파이프 공장의 말단 직원이죠. 세계 최고 권위의 물리학자인 선생님께 별 볼 것 없는 녀석이 무슨 볼 일이냐고 생각하시겠지요? 지금부터 선생님께 보내는 이 글이 미친 소리처럼 들릴 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하지만 박봉의 월급을 받고, 겨우 지하 34층의 저소득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전 절대 미친놈은 아닙니다. 그러니 제발 이 메일을 닫지 마시고 끝까지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제 목숨이 달린 일이거든요.

 

선생님. 저에겐 굉장히 희귀한 병이 하나 생겼습니다. 어쩌면 지구상에 보균자가 저 하나뿐인 괴상한 바이러스에 걸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조금만 흥분해도 모세혈관이 스프처럼 녹아내리는 하브챠일 병도 아니고요, 피부가 색소를 잃어버린 채 투명해져서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모습이 훤히 드러나는 구아누챠르 증후군도 아닙니다. 어쩌면 선생님께선 기형적으로 등뼈가 튀어나와 ‘악마의 날개’라고 불리는 카무스티아 병을 생각하고 계실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그 병도 아닙니다. 바이러스 전쟁의 산물이자, 최악의 신체 등급이라는 클래스 M(Mutant Body: 바이러스 감염률 75% 이상의 신체)의 인간들이 가진 저런 질병들은 저와는 거리가 먼 얘기지요.

 

처음 제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2주 전이었습니다. 아침부터 귀를 찢어대라 울리는 자명종 소리에 저는 평소처럼 검지 손가락을 이용해 자명종의 입을 다물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손가락을 움직이는 느낌은 있었는데 자명종 소리가 계속 울리는 거예요. 이상하게 생각한 저는 오른쪽 손을 눈앞에 가져갔죠. 그리고 여태껏 살아오면서 질렀던 비명 중 두 번째로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제 오른쪽 검지 손가락이 사라져 버린 겁니다. 마치 누군가가 지우개로 손가락을 지워버린 듯, 새카맣게 절단된 부분이 저를 빤히 쳐다볼 뿐이었습니다. 입술의 경련이 느껴질 정도의 경악이 지나고 나서, 그 와중에도 궁금증이 일어났습니다. 그 새카만 부분을 펜으로 찔러봐도 아무런 고통도 없었기 때문이죠. 흉터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검지 손가락을 움직여 본다고 생각하자 감각이 그대로 느껴지는 거였어요. 물론 사지가 절단 되어도 그 감각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만, 이건 너무 생생했죠. 바로 그 때 왼쪽 발바닥이 갑자기 가려워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무심히 이불을 걷고 왼쪽 발바닥을 살펴봤죠. 그리고 여태껏 살아오면서 질렀던 비명 중 가장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제 왼쪽 발바닥에 손가락이 돋아나 있었습니다!

 

선생님. 제발 창을 닫지 마십시오. 정신병자의 소리처럼 들린다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귀중한 시간을 빼앗는 악질 장난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제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입니다. 저 역시 발바닥에 돋아난 손가락을 보고 기절할 뻔 했다고요.

 

회사에 출근할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지각이라도 하는 날에는 주임 에밀리에게 엄청난 질책을 받을 게 뻔했죠. 어떻게든 지각만은 면해야 했습니다. 저는 냉정을 유지하려 애썼고, 그때서야 왜 발가락이 간지러웠는지 깨달았습니다. 자명종을 누른다고 생각했던 오른손의 검지 손가락이 왼쪽 발바닥을 긁어댔던 거죠.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확실히 그것은 제 검지 손가락이었습니다. 제 뇌가 손가락을 굽히라고 명령하면 굽히고 빙빙 돌리라고 명령을 내리면 그대로 따라했죠. 어쨌든 잘려나간 것은 아니라고 위로하며 저는 몸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곧장 비명을 지르며 바닥 위에 쓰러지고 말았죠. 손가락이 옆으로 꺾이는 고통을 아십니까? 저는 그날 알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그 몰골로 출근할 수는 없었습니다. 파이프를 끼워 맞추는 제 일에는 검지 손가락이 반드시 필요했으니까요. 일단 회사에 연락해서 몸이 아프다고 둘러댔죠. 당연히 주임 에밀리의 홀로그램은, 고래고래 악을 질러 댔습니다. 저보다 겨우 한 등급 위인 클래스 N(Normal body: 바이러스 노출도 25% 미만의 신체)일 뿐이면서 그녀는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았어요. 게다가 툭하면 끄집어내는 ‘꼽추’란 단어까지 써 가며……. 이런, 얘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군요. 죄송합니다. 아무튼 저는 그 손가락을 처리할 수 없었습니다. 한차례 꺾인 후라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픈데다가, 그렇다고 잘라내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죠.

 

그 날 저는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못 하고 누워있어야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악몽이기를 바랬죠. 그렇게 다음 날이 찾아왔습니다. 눈을 뜨자마자 제가 한 일은 오른쪽 손가락을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제발 손가락이 원위치로 돌아와 있기를 바라면서요. 어땠느냐고요? 저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검지 손가락이 제자리에 붙어 있던 거예요! 물론 전날의 고통은 그대로였지만 말입니다. 혹시나 해서 살펴봤던 왼쪽 발바닥도 깨끗했죠. 악몽은 하룻밤으로 끝났던 거라 생각하며 저는 몸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어요. 전 매일 저녁 방을 청소하는데, 그 순간 익숙하고도 지독한 악취가 갑자기 제 코를 찔러댄 거죠. 저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거울을 쳐다봤습니다. 짐작이 가십니까? 제 코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던 겁니다. 저는 그 즉시 옷을 벗고 거울에 온 몸을 비춰보았죠.

 

맙소사. 제 코는 오른쪽 엉덩이에 버젓이 돋아나 있었습니다. 지독히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전 결코 웃을 수 없었죠. 대변을 볼 때 엉덩이를 손으로 꽉 잡은 채로 냄새에 몸부림쳐 본 경험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오직 저 혼자만 가지고 있을 겁니다.

 

이제야 이해가 가십니까, 선생님? 저는 몸의 일부분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해괴한 병에 걸렸습니다. 한 부분이 제자리로 돌아오면 다른 한 부분이 말썽을 피우죠. 이젠 매일 아침 일어나는 일이 악몽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합니다. 그래도 믿지 못하시겠다면 첨부파일로 보낸 제 팔꿈치 사진을 봐주십시오. 분명히 팔꿈치에 돋아난 어금니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합성사진이라고요? 그럼 합성 전문가에게 의뢰해보세요. 제 말이 사실임을 금방 깨달으실 테니까요.

 

메사슈미트 선생님. 전 2주째 회사를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다간 분명 해고당할 거예요. 그렇다고 오른쪽 볼에 젖꼭지를 붙인 채 출근할 수도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목덜미에 돋아난 혓바닥은 또 어떻게 설명하구요. 에밀리 주임에게 그런 말을 꺼낸다 해도 그녀는 절 정신병자로 취급할 거란 말입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저는 꼭 다시 출근해야 합니다. 이 병을 고칠 방법이 있을까요?

 

2047. 0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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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사슈미트 선생님께.

 

보내주신 답장은 잘 받았습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제 메일을 끝까지 읽어 주신 점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역시 선생님을 고른 제 안목은 틀리지 않았군요.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인 선생님께선 최고의 등급이라는 클래스 P(Perfect Body: 감염률 0%의 신체)의 냉철한 이성을 갖고 계시지만, 그만큼 분수처럼 솟구치는 호기심도 갖고 계실 거라고 믿었거든요. 과학자가 아니라면 누가 이런 현상에 관심을 가지겠습니까.

 

왜 의사를 찾아가지 않았냐고 물으셨죠? 저도 당연히 처음엔 그러려 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건 매우 위험한 짓일 수도 있었어요. 의사들은 얼핏 보기엔 끔찍한 제 몸을 보자마자 돌연변이 수용소에 가둬버릴 지도 모르니까요. 그렇게 되면 제 인생은 끝장입니다. 날 때부터 꼽추라는 이유로 클래스O(Obstacle Body: 1차 감염에 그친 부적격 신체)의 판정을 받아 파이프 끼우는 일이나 하고 있는 것도 억울한데, 더 낮은 등급으로 떨어지면 전 견디지 못할 겁니다. 그 놈의 빌어먹을 신체등급 제도 때문에 웬만한 기업 서류면접조차 못 보고, 공공시설 이용 금지는 물론, 평생 친구 한명조차 사귀기 힘든 판국이라고요. 무엇보다 전 절대 돌연변이가 아닙니다! 2017년에 있던 바이러스 전쟁에서도 안전지대에 있었고, 일 년에 두 번씩 정기적으로 방사능 검사도 받고 있단 말입니다. 어쨌든 이러한 이유로 의사를 찾아갈 수는 없었죠. 전쟁 이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클래스 M의 인간들은 발견 즉시 격리수용 되는 현실을 아실 겁니다. 꼽추로 평생을 살아온 저는, 해괴한 이 모습이 남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요. 그런 이유로 저는 지금 3주째 외출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상태는 좋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어느 날은 아침에 눈을 떴더니 오른쪽 눈과 왼쪽 눈에 전혀 다른 광경이 보이는 게 아니겠어요? 제 왼쪽 눈이 허리에 가 있더군요.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그 이틀 뒤에는 더 끔찍한 일이 일어났죠. 전 그날 아침 일어나 눈, 코, 입. 그리고 손과 발 모두 확인했습니다. 아무 이상 없더군요. 그렇게 무심코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려 하는데, 갑자기 목덜미 뒤가 뜨뜻해지는 겁니다. 제 성기가 뒤통수에 돋아나 있었거든요. 이제 일어나자마자 옷을 모두 벗은 채 전신을 거울에 비춰 보는 게 하루의 일과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전 보내드렸던 메일에 제가 선생님께 그랬죠. 전 정신병자가 아니라고. 어쩌면 그 말이 거짓말이 될 지도 모릅니다. 매일매일 아침마다 제 몸의 한 부분이 이사를 가 버리는 이 병에 제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예요.

 

이젠 회사에서 연락도 오지 않습니다. 돈도 점점 떨어져 가구요. 무인 배달기로만 주문할 수 있는 인스턴트식품들도 점점 질려 갑니다. 이러다가 이 흉측한 병 때문에 굶어죽는 것은 아닐까요? 모르죠. 지금이야 손가락이나 눈자위, 콧구멍 등만이 옮겨 다니고 있지만 이 증세가 장기(場技)로 영역을 넓혀 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어제 이런 상상을 해 봤어요. 제 손톱 중의 하나가 심장의 내벽에 뜬금없이 나타난다면? 아니면 제 허벅지에 있는 사마귀가 혈관 속에 돋아난다면? 정말이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메사슈미트 선생님이 계셔서 저는 희망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한 달이 다 되어 가도록 지하 34층에서 햇빛도 보지 못한 채 갇혀 있는 저에게는 유일한 상담자이자 조력자이시니까요.

 

선생님께서 알려주신 경로로 MS스캐너(a Molecular Spectrum Scanner: 분자 스팩트럼 촬영기)

 

를 구입하느라 답장이 늦어지게 됐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우편으로 스캐너를 보내줄 테니 주소를 대라’ 하셨지만 죄송하게도 그건 무리한 요구이십니다. 클래스 P의 선생님께서는 조금만 생각해 보셔도 알아채셨을 텐데요. 제가 최첨단의 홀로그램 커뮤니케이터가 아닌, 선생님처럼 연로한 학자들이나 즐겨 쓰는 이메일로 연락을 취한 이유를요. 바로 이메일만이 돌연변이 격리 위원회의 감시망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통신 수단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클래스 M으로 의심받는 일만큼은 죽는 한이 있어도 피하고 싶어요.

 

 

어쨌든 이 스캐너는 매우 신비한 물건인 것 같습니다. 골격뿐만 아니라 온 몸의 모세 혈관까지 모두 투시가 가능한 것 같아요. 물론 저는 봐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선생님께서 무언가를 알아내 주시겠죠.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2047. 0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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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사슈미트 선생님께.

 

아무 이상이 없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오히려 아무 이상이 없기에 더욱 큰일일지도 모른다고 하시네요. 하긴, 신체의 일부분이 마음대로 이동하는데도 골격은커녕 모세혈관 하나정도의 손상도 없다는 것은 저에게도 매우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의학적으로 설명이 안 된다는 것쯤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물리학자이신 선생님께 요청하는 거예요. 두 개의 사진을 잘라 붙인 것이 아니냐는 선생님의 질문은 저를 꽤 슬프게 만들었습니다. 제가 무엇 때문에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겠습니까. 아시잖아요. 제가 의지할 대상은 선생님뿐이라는 사실을.

 

이틀 전, 회사에서 해고 메시지가 왔더군요. 왜 통신을 하지 못했냐고 물으실 정도로 선생님은 생각이 얕진 않을 겁니다. 대체! 무슨 수로! 입이 아랫배에서 춤추고 있는데 홀로그램 전원을 켤 수 있겠습니까? 결국 전 에밀리 주임의 냉정한 해고 통보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젠 선생님의 답장을 기다리는 일이 제 전부가 되어버렸어요.

 

그나저나 선생님이 말씀하신 병의 원인에 대해 저도 생각해 봤습니다. 왜 갑자기 이런 현상이 제 몸에 생겼는지 말예요. 그리고 세계39억 사람들(2017년 바이러스 전쟁 이후 급격히 감소한 인구는 2031년 공식 통계 때 3,946,371,400여명으로 집계되었다.)중에 하필 저에게 일어났는지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뚜렷한 원인을 모르겠어요. 전 그저 우주선에 쓰이는 파이프를 접합하는 일만 계속했을 뿐인데……. 하지만 평소와 다른 일은 모조리 떠올려 보라는 말씀에 생각을 해 보긴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일이 생기기 전 며칠 동안 야근을 한 적이 있었어요. 제가 공장에서 주로 하는 일은 파이프를 접합하는 일이지만, 가끔 오래된 우주선의 동력로 파이프를 해체하는 일도 하거든요. 물론 업무 시간 이외의 일이고, 가끔 정체불명의 우주선 의뢰를 받긴 하지만 짭짤한 수당 얘기에 혹하지 않을 사람은 없겠죠. 물론 동력로에는 파이프 해체공인 저만 들어갔을 뿐이구요. 외관은 평범한 우주선이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론 선미에 Oak……뭐라고 적혀 있던 걸로 기억해요. 혹시, 그 며칠 동안의 야근이 원인이었을까요? 하지만 파이프 해체를 성공시켰을 때도 보라색 액체만 손가락에 조금 묻었을 뿐인데요. 선생님께서 과민 반응 하시는 건 아닐까요?

 

 

아무튼 선생님께서 제 병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말에 저는 정말 반가웠습니다. 물론 당장 답을 찾으실 순 없으시겠죠. 메사슈메트 선생님도 그 유명한 메사슈메트 우주중력 제4법칙을 하루 이틀 만에 생각해 내신 것은 아닐 테니까요.

 

그래도 제 병의 원인을 하루 빨리 알아냈으면 좋겠습니다.

 

2047. 0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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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사슈미트 선생님께.

 

제 병의 원인이 그런 것에 있었다니, 정말 놀랐습니다. 저는 솔직히 어제부터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정말로 내가 돌연변이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한 참이었거든요. 선생님이 보내주신 메일에는 워낙 어려운 말들이 많이 적혀 있어 완벽히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대충 그 의미를 파악할 수는 있었습니다. 이 부분이 가장 충격적이더군요.

 

 

……그러므로 자르 군이 만진 그 파이프가 담긴 비행선은 비밀리에 이탈리아에서

 

진행된 광속주행 비행선 개발 프로젝트에 사용된 오크나스(Oakneus)호입니다. 그

 

동력원으로 사용된 VL00736975이란 액체는 인체에 어떤 영향을 줄지 학계에 밝

 

혀진 바가 없는 위험한 물질입니다. 그리고 오크나스호의 실험은 실패로 끝이 났

 

다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자르 군. 그대의 몸에서 일어나는 증상은 어쩌면 물리

 

학적으로……

 

 

맙소사. 제 몸에 미니 웜홀이 존재한다니요. 믿기 힘든 말인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제 말을 선생님께서 믿어주신 것처럼 저 역시 선생님의 말을 믿기로 했어요. 어쨌거나 제 몸의 블랙홀로 손가락이 들어가서 화이트홀로 빠져나온다는 얘기시잖아요. 그렇긴 해도 선생님이 그렇게 흥분하시는 것에 동감하긴 힘들더군요. 블랙홀과 화이트홀이 같은 차원에 존재하는 게 그토록 놀라운 물리학적 발견이라니. 어쨌든 선생님이 기뻐하시니 저도 기쁩니다.

 

아, 건강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쥐꼬리만한 퇴직금이지만 근근이 살아가고 있어요. 가끔은 인스턴트 식품이 아닌 포터블 레스토랑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이 몸도 슬슬 적응이 되어가고 있어요. 사실 엄밀히 말하면 몸의 일부분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습니까. 오히려 편리할 때도 있고요. 왼쪽 팔에 귀가 돋아났을 땐 거울을 쓰지 않고도 귀지를 보고 파내는 신기한 경험까지 했다니까요.

 

어쨌든 희망이 생겼습니다. 이 희한한 증상이 그 오크나스라는 비행선의 VL00736975이라는 액체 때문이라면 연합정부에 신고해 재해보상보험으로 치료를 받을 수도 있다는 소리잖습니까. 어쩌면 다시 복직이 가능할지도 몰라요! 이 모든 게 전적으로 선생님 덕분입니다. 첨부파일로 제 주소와 연락처를 넣었습니다. 이제는 신고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졌으니까요.

 

 

2047. 06.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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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사슈메트 선생님께.

 

먼저 선생님의 은혜는 제가 절대로 잊지 않을 거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만약 선생님께서 제 메일을 악질 장난으로 취급해서 삭제해 버렸다면, 혹은 아예 이메일 자체를 열어보지 않았더라면 전 지금쯤 폐인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연합정부에 신고하지 말라는 선생님의 말씀은 이해가 잘 안갑니다. 이 일이 바이러스나 방사능 오염으로 일어난 게 아니라면 저도 돌연변이 수용소에 가지 않아도 되고, 치료법을 찾게 될 지도 모르잖습니까? 그리고 퇴직금도 슬슬 바닥나고 있단 말입니다. 물론 선생님께는 MS스캐너의 비용이 껌 값일 수 있겠지만 저에겐 3개월 치의 월급이라고요. 연구 대상이 되어 달라니요? 저는 실험용 쥐가 아니란 말입니다!

 

아무리 선생님의 말씀이라지만 이번 권유는 받아들이기가 참 힘드네요.

 

 

2047. 06.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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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사슈미트 선생님께.

 

보내주신 돈은 정말 고맙게 쓰겠습니다. 하하. 사실 저라고 선생님의 연구에 동참하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습니다. 그냥 신경이 예민해져서 그때는 그런 말을 꺼냈던 거죠. 앞으로는 전적으로 선생님께 협조하겠습니다. 제 은인이신데, 정말 큰 실례를 범할 뻔 했군요.

 

선생님이 보내 주신대로 감마선 측정기를 몸에 대 보았습니다. 결과 수치 액정에 12,033,763이라는 숫자가 뜨더군요. 그런데 이렇게 하면 정말로 미니 웜홀을 유지할 수 있는 제 몸 속의 에너지원이 밝혀지는 건가요? 젠장, 도대체 그 요상한 액체는 제 몸에 무슨 짓을 해 놓은 거죠? 전 정말 괴물이 되어 가고 있는 건가요? 무섭습니다, 선생님.

 

물론……, 보내주신 돈이 조금 부족하다는 얘긴 절대로 아닙니다.

 

 

2047. 06.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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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사슈미트 선생님께.

 

선생님! 성공했습니다! 제 의지대로 몸을 이동시킬 수 있게 되었어요! 선생님이 보내주신 PAC(Plasma amplification Controller: 플라즈마 증폭 제어기)를 장착한 뒤 정신을 집중하니까, 손등에 돋아난 머리카락 한 웅큼이 반대쪽 손등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겠어요? 하지만 이 작업은 엄청난 에너지를 동반하나 봅니다. 몸의 이동이 끝나고 나면 굉장히 몸이 무거워지고 배가 고파오거든요. 그래서 항상 잠든 상태에서 이 현상이 일어났던 것 같아요. 몇 번의 실험을 하느라 답장이 늦어지게 되었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처음에는 이동 위치를 잡아내기가 꽤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몇 번 계속 시도하다보니 이제 몇 센티미터의 오차를 제외하곤 거의 정확한 부위에 제 몸을 이동 시킬 수가 있었죠. 뭐, 선생님께는 예상했던 결과라고 미리 말씀하셨으니 별로 놀라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아무리 선생님이라도 실험 일주일째에 제가 거둔 성과를 들으시면 놀라 자빠지실 걸요?

 

저는 미니 웜홀을 제 몸 뿐만 아니라, 외부에도 만들 수가 있습니다! 천장에서 손이 매달리게 만드는 것을 성공했죠. 물론 몸속에서 미니 웜홀을 만들어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작업입니다. 세 번 연속으로 시도하면 완전히 졸도해 버릴 정도죠.

 

하지만 전 지금 굉장히 흥분됩니다. 이건 굉장한 초능력이거든요! 날이 갈수록 조절도 능숙해져 가고 있고, 화이트홀을 만들 수 있는 범위도 2미터까지 넓어졌습니다. 선생님. 제가 그 액체를 저주했던가요? 취소하겠습니다. 그 VL00736975는 병을 준 게 아니었어요. 놀라운 능력을 내려주었죠. 선생님께서는 ‘부작용’을 걱정하고 계시지만 제게는 거리낄 것이 없습니다. 잊으셨나본데 전 클래스 O의 몸이라고요.

 

‘부작용’을 몸에 달고, 평생을 살아온 몸이라 이겁니다.

 

하지만 선생님. 지금은 어떻습니까? 제 몸은 ‘진화’하고 있습니다. 전혀 새로운 종류의 신체가 탄생한 겁니다.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닿지 못했던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거라고요!

 

 

2047. 0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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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사슈미트 선생님께.

 

선생님!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신다면 놀라실 걸요? 제가 오래 전부터 말씀드렸던 주임 에밀리 말입니다. 오늘 만났거든요. 하하. 그녀는 병원에 실려 갈 때까지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한 지도 몰랐을 겁니다.

 

사실 회사에 어떤 목적을 가지고 간 건 아니었습니다. 전 이미 해고되었고, 금전적인 문제 역시 선생님께서 보내 주시는 연구 협조 비용만으로 충분했으니까요. 하지만 아무 연락 없이 회사에 나가지 못했던 것을 해명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간 것뿐이었어요.

 

그 일은 전적으로 에밀리 탓이었습니다. 매사에 신경질적인 그녀는 사무실에 들어온 절 보자마자 툭 튀어나온 광대뼈를 씰룩이며 노골적인 욕을 퍼붓더군요. 저 같은 인간은 어느 회사를 가도 평생 말단 직원에 그칠 거라나요? 물론 그것까지는 참았습니다. 하지만 제 외모에 대한 인신공격을 꺼냈을 때는-제가 제일 혐오스러워하는 ‘꼽추’란 단어까지 써 가며- 더 이상 참기 힘들더군요.

 

저는 제 짐을 챙겨가겠다고 말하곤 제가 일하던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에밀리는 못마땅한 듯이 자신의 자리에서 제 등 뒤를 째려보고 있더군요. 그 정도쯤이야 눈 한 쪽을 뒤통수로 이동시키면 간단한 일이죠. 짐을 뒤지던 저는 가위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곤 쾌재를 불렀어요. 혹시나 해서 PAC를 가져온 게 다행이었죠. 아, 선생님. 절대로 제가 에밀리 주임을 해코지 하려고 가져간 게 아닙니다. 믿어 주세요.

 

어쨌든 저는 그 가위를 가지고 놀라운 일을 해냈습니다. 제 새끼 손가락의 손톱을 에밀리의 뱃속으로 이동 시킨 다음 손톱을 잘라 버렸죠. 그 다음은 볼만했습니다. 그렇게 흉폭하던 에밀리가 마치 어린아이처럼 배를 붙잡고 비명을 지르더군요. 그녀가 엠뷸런스에 실려 갈 때까지 저는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았습니다. 당연하죠. 남들이 보기에 전 그냥 짐을 정리했을 뿐이니까요.

 

뭐, 조금 후회되긴 합니다. 만약 오늘 제가 에밀리의 뱃속이 아니라 심장을 노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결과가 조금 궁금해지기 시작했거든요.

 

 

2047. 0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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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사슈미트 선생님께.

 

맹수의 왕 사자에게 어느 날 갑자기 물갈퀴가 생긴다면 어떨까요? 온순하기 그지없는 염소에게 어느 순간 치명적인 맹독이 생긴다면? 거대함을 자랑하는 코끼리에게 날개가 생겨나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겠죠.

 

아마 그들은 처음에 매우 혼란해 할 겁니다. 진화의 정보가 차근차근 유전자에 쌓이지 않고 갑자기 육체적 선물을 받는다면 말이죠. 하지만 곧 그들은 자신들의 육체에 완벽히 적응하게 될 겁니다. 모든 생물은 그렇게 설계되었으니까요.

 

저도 요즘 변화된 제 몸에 최대한 적응하려고 노력중입니다. 처음 제 손가락이 사라졌을 때의 공포는 이제 상상이 안 될 정도지요. 더 이상 밖으로 나가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물론 아직도 사람들은 굽은 제 등을 보고 경계의 시선을 드러내지만, 이젠 그런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죠. 전 그들보다 더욱 뛰어난 몸이니까요. 클래스 N? 클래스 P? 이런, 클래스 P의 신체를 가지신 박사님께는 실례가 될지 모르지만 전 이제 조악한 신체 등급의 굴레에서 자유로운 몸이 되었습니다. 이 몸을 무엇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전 클래스 A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Absolute Body(완전무결한 몸)라는 뜻이죠. 어떻습니까?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육체에 어울리는 등급 아닙니까?

 

메인 스트리트에 나와 보니 절 유혹하는 것이 굉장히 많더군요. 가장 먼저 제 눈을 간지럽힌 것은 화려하게 진열된 호사품들이었습니다. 합성하기가 그토록 어렵다는 황금빛 진주에서부터, 현대 컴퓨터 공학의 진수라는 VRH(Virtual Reality Handtop: 가상현실 플레이어)까지. 물론 그중에서 가장 탐나는 것은 부작용 때문에 클래스 N이상의 사람들만이 착용 가능하다는 플러리쉬 마스크(Flourish Mask: 마음대로 얼굴 골격을 바꿀 수 있는 인공 가면)였습니다. 돈 때문이 아니라 신체 등급 때문에 가질 욕심조차 내지 못했던 그런 아티팩트들은 언제나 제게 선망과 동시에 질투의 산물이었거든요. 물론 지금까지 언급한 것들은 현재 제 방 속에 고스란히 진열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울트라 세라믹 창 안에서 보란 듯이 행인들을 향해 고개를 쳐든 그 물건들을 꺼내오는 것은, 너무 쉬운 나머지 오히려 맥이 빠질 정도였지요. 창속으로 손을 이동시킨 다음에 다시 빼 내오기만 하면 되었으니까요.

 

안타깝게도 그 부피 때문에 플러리쉬 마스크만은 가져올 수 없었지만, 집에 돌아와 생각해 보니 그렇게 아쉬워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더군요. 전 그 때까지만 해도 가지고 싶은 것이 있다면 제 능력으로 빼내오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니 그럴 필요가 전혀 없더군요.

 

'탈취'가 아니라 '구입'하면 되지 않습니까?

 

 

2047. 0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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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사슈미트 선생님께.

 

역시 선생님은 대단하십니다. 물리학에만 조예가 깊은 게 아니셨군요. 그저께 일어난 로마 국제은행 도난 사건이 제 소행이란 걸 알아내시다니. 어떻게 했는지는 원래 비밀이지만……, 제 은인인 선생님께만 살짝 알려드리죠.

 

사실 식은 죽 먹기였습니다. 제 능력은 이제 7미터 바깥까지 닿을 수 있게 되었거든요. 먼저 금고 청소부라고 자신을 속였죠. 제가 가진 파이프 접합용구들은 전문가가 아니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알 수 없을 정도거든요. 은행원은 아무런 주저 없이 저를 금고 속으로 데려 가더군요. 하긴, 그 누가 삐쩍 마른 삼십대의 꼽추를 은행털이범으로 생각하겠습니까.

 

저는 대충 청소를 하는 척하면서 그에게 말을 걸었죠. 일부러 아둔한 말투로 ‘도둑이 들면 어쩌려고 경비원이 한 명도 없나요?’란 식으로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멍청한 은행원은 입술이 떨어져나갈 정도로 자기 은행 칭찬을 하더군요. 무인 레이저 경비 시스템에 DNA 인식 열쇠까지 말입니다. 도난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속으로 비웃었죠. 아니, 실은 비웃을 틈도 없었어요. 철통같이 보호되고 있는 금고 속의 전자 화폐를 7미터 바깥에 놓아둔 제 가방으로 옮기느라 정신이 없었거든요.

 

전 수십 대의 감시 카메라가 저를 감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금고를 싹 비워낸 뒤 유유히 은행을 빠져나왔죠. 그들은 몇 시간 뒤에서야 자신의 금고가 털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겁니다. 최고의 경비 시스템이면 뭐하겠습니까. 금고 속까지 감시 시스템이 작동하는 것도 아닌데. 제 클래스 A의 신체를 당해낼 순 없는 거죠.

 

어쨌든, 메사슈미트 선생님. 뉴스만 보시고 제 소행이란 걸 눈치 채신 건 칭찬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전 이제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로마 은행 뿐 아니라 전 세계 은행의 금고를 비울 수도 있거든요. 세계 최고의 재벌이 되는 것도 시간문제지요.

 

그러니 범죄 행각을 그만 두라는 선생님의 말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사실 조금 기분이 불쾌했거든요. 죄책감이 들지 않느냐고요?

 

선생님. 제가 지난번에 말씀 드린 것 같은데요. 제 능력은 사자에게 물갈퀴를 선물한 것과 같다고 말입니다. 사자가 물갈퀴를 쓰는 데에 있어 ‘죄책감’을 느끼겠습니까?

 

 

2047. 0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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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사슈미트 선생님께.

 

너무 오랜만에 메일을 보낸 것 같군요, 선생님. 아무래도 이 편지가 마지막이 될 것 같습니다. 그동안 왜 연락하지 못했냐고요? 잠시 도피 중이었거든요. 제가 마지막으로 편지를 보내드렸던 그 다음 날, 연합 정부군이 저희 집을 덮쳤습니다. 지금까지도 제 방문이 폭파되는 소리가 생생히 들리는 듯 하네요. 선생님도 저 뷔겐 자르가 붙잡혔다는 뉴스는 보셨을 겁니다. 물론 제가 간단히 탈출했다는 뉴스도 보셨을 테고요.

 

 

사실 일부러 잡혀준 겁니다. 아무리 클래스 A의 저라고 해도 그 많은 군인들을 당해낼 수는 없었거든요. 그래서 기회를 보고 있었습니다. 교도소로 후송되던 도중 앞 칸에 타고 있던 운전사의 눈을 찔러 버렸죠. 그들은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PAC를 뺏은 것에 대해 지나치게 안심하고 있더군요. 사실 이미 더욱 강력한 PAC를 몸속에 숨겨둔 것도 모른 채 말입니다. 어떻게 했냐고요? 간단한 일이죠. 컨트롤러를 등 뒤에 붙인 뒤 피부를 이동 시켜 덮어 버리면 되니까요. 애초부터 꼽추인 저에게 그 정도는 티도 나지 않거든요.

 

하지만 선생님. 전 아직도 조금 궁금하단 말입니다. 그들은 제 주소를 어떻게 알았을까요? 제 주소를 알려 드린 건 오직 선생님 하나뿐인데 말이죠. 은행 감시카메라에서 저의 모습을 발견해 낸 걸까요?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엔 시간이 너무 빠르더군요. 게다가 고작 은행털이범을 잡기 위해 연합정부군의 일개 중대가 출동한 것 또한 이해하긴 힘들지요. 선생님, 기분 나빠하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전 이런 추리도 해 봤거든요. 연합 정부군의 병력을 설득시킬 정도의 인물이라면, 당연히 클래스 P의 사람일 것이고, 그 중에서도 ‘저명한’ 인물이어야만 할 것이라고요. 물론 그럴 리 없겠지만 이 일에 선생님이 조금이라도 관련됐을 경우를 생각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두 번 다시 그런 시도를 하지 마십시오, 선생님.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저를 붙잡거나 처벌하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유럽이 아니라 해외 어디든 도망칠 수 있거든요. 이것은 과시도, 허풍도 아닙니다. 엄연한 사실을 말씀드리는 거죠. 검문소? 그것도 절 막진 못합니다. 지문 감식이야 지문의 배열을 살짝 이동 시켜 바꾸면 되는 거고, 안구 인식도 마찬가지죠. 뭐, 사실 잡힌다 해도 걱정은 없어요. 그 어떤 감옥도 저를 막을 순 없거든요. 문 밖으로 손을 이동시켜 열어버리면 그만이니까요. 물론 현재로서는 그런 세밀한, 능력의 컨트롤은 조금 힘들지만 머지않은 때에 가능하게 될 겁니다. 클래스 A의 신체에 불가능이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지금 당장은 저 또한 조심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겠더군요. 단순한 경찰이 아닌 연합정부군에서 저를 쫒는다면 얘기가 달라지니까요.

 

온몸이 결박된 채 교도소로 후송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저를 전자 베리어에 집어넣은 한 군인이 저를 뚫어지게 쳐다보더군요. 저는 그저 제 굽은 등을 보고 그러는구나 싶어, ‘꼽추 처음 봅니까?’하고 비아냥거려주려 그의 눈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눈은 사람들에게서 익숙히 보아오던 ‘혐오’의 눈빛이 아니었습니다. 뭐랄까…… 그래요, ‘공포’가 담긴 눈이었죠. 그때서야 저는 연합정부군이 출동한 진짜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웠던 겁니다.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신체 등급제의 울타리를 마음껏 뛰어넘을 수 있는 저의 존재가. 그래서 저를 제거하려 든 것이겠죠? 정체성을 위협하는 존재가 나타났을 때 인간이 늘 취했던 파괴본능을 말하는 겁니다. 설마,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메사슈미트 선생님. 저는 당신의 은혜를 아직 잊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저를 섭섭하게 만드는 행동은 부디 하지 말아주세요. 이번 한 번만은 옛정을 생각해서 너그럽게 봐 드리겠습니다. 괜한 정의감을 불태우시다가 화를 입으신다면 저 또한 아쉬울 겁니다. 그냥 몇 년 동안 조용히만 계십시오. 평소에 하시던 대로 물리학 연구나 하시란 말입니다.

 

뭐, 몇 년 뒤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제 능력을 완벽히 깨우치고, 문득 세계를 뒤흔들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가 온다면 그 때 연락드리겠습니다. 그 때 선생님만큼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드리죠. 아, 그렇게 고마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선생님은, 이 완벽한 클래스 A의 몸을 만들어 주신 은인 아닙니까.

 

 

2047. 0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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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태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