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안토니오 델 카레토
"교수님, 손님이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신데요."
연구실로 들어서자마자 조교 바이올 양이 쪽지를 내민다.
"누구?"
나는 받을 생각도 않고 질문부터 던졌다. 오늘이야말로 어지간하면 집에 일찍 들어가서 아내와 아이들의 점수를 딸 생각이다.
"무슨...후버씨라고 하던데요."
나도 모르는 사이 마치 거머리를 손에 쥐는 모양으로 그 쪽지를 건네받았다.
'대학 구내 커피숍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후버.'
이마 허드서커와 주고 받았던 지적 논쟁 탓에 상쾌해졌던 기분이 순식간에 곤두박질치는 느낌이었다.
***
"당신이란 사람, 정말 예의도 없군."
나는 후버의 면상을 갈겨주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커피 잔을 거머쥐었다. 내 잔과 잔받침이 거칠게 부딪치며 달그락거렸지만, 후버는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그의 얼굴은 지난번 만났을 때와 다름없이 어떤 확신에 차 보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당신 말고 누가 역사학자의 고리타분한 연구실을 뒤지는데 흥미를 갖겠소?"
잠시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한적한 금요일 오후인지라 커피 숍에는 두 사람밖에 없었다.
"어떻게 생각하시든 그건 제가 대답할 성질의 것이 아니군요."
짐짓 잡아떼는 그를 보며, 너무 흥분하면 나만 손해라는 생각에 나는 조금씩 마음을 추스렸다. 구내 커피숍 특유의 찌든 커피향까지 덩달아 마음을 산란하게 했다. 커피잔을 들어올리니까 아침에 연구실에서 활활 타오르던 분노의 불길이 원액의 깊이를 알 수 없는 표면에 비쳐 일렁이는 것 같았다.
"그것보다는... 성 요한 기사단의 몇몇 주요 인물들에 관해 교수님에게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어쩜 도청까지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당시 기사단 단장이었던 필리프 드 릴라당은 기록에 따르면 1534년에 죽었죠, 교수님?"
"나도 지금쯤은 당신이 누군지 대충 짐작은 가오."
"요한 기사단이 투르크 군의 인해전술을 상당기간 막아낼 수 있을 만큼 견고한 성을 설계했던 건축가 가브리엘로 마르티넨고 대령은 그 공방전 후에 베네치아로 돌아가 1544년 죽었고..."
"하지만 이보쇼, 후버씨. 도대체..."
"안토니오의 문헌에 아주 매력적인 인물로 묘사된 기사들 가운데는 프랑스 출신의 장 파리소 드 라 발레트를 빼놓을 수 없겠죠. 기사단장의 비서관이었던 그는 로도스 섬의 전투 당시 28세에 불과했지만 후에 릴라당의 뒤를 이어 기사단장이 되었고 1568년까지 살았지요."
"... 나한테서 뭘 원하는지 모르겠구려."
"그런가하면 좀 멋대로 구는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용맹 하나는 알아주는 이탈리아 출신 기사 잠바티스타 오르시니는 어떤가요? 그는 분명히 투르크 군과의 전투가 치열했던 그 해 12월 18일 25세의 나이로 아라곤 성벽에서 전사했다고 봐야겠죠?"
"이봐요, 지금 나랑 농담 따먹기 하자는 거요? 뭐요?"
"네, 오르시니가 그 때 죽은 건 틀림없을 겁니다. 안토니오의 문헌말고도 그것을 입증해주는 단편적인 기록들이 남아 있으니까. 그럼... 그 공방전의 주요 기록을 남긴 안토니오 델 카레토 자신은 어떻습니까, 교수님?"
후버의 마지막 물음은 이전까지와는 달리 강한 의혹을 풍겼다. 나는 어안이 벙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세에 벌어진 전투기록을 재료로 그는 새로 추리소설을 쓰겠다는 얘긴가, 뭔가?
"안토니오는..."
나는 무어라 말하려다 그만두어버렸다. 뭔가 알 수 없는 불길한 육감이 내가 섣불리 말하는 것을 말렸다. 일단은 이자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요한 기사단이 로도스섬에서 철수한 뒤 몇년 간 함께 난민생활을 한 끝에 수도원에 들어갔다고 하셨죠, 교수님의 주석에 따르면 말입니다. 전투의 부상으로 오른쪽 다리를 마음대로 쓸 수 없었던 게 가장 큰 원인 같은데, 그 뒤 그는 잠시 수도원에 머무르면서 교수님이 발견하신 그 당시의 전쟁기록을 남겼다고 추정됩니다.
그 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그는 북아프리카로 건너갔다는 설이 유력하죠. 거기서, 그는 이슬람 해적에게 붙잡힌 기독교도들을 노예의 신분에서 풀어주도록 몸값을 주선하고 그 가운데 병을 얻은 사람들을 돌봐주는 종교단체에서 활동하다가 죽었다는데 정확한 사망년도는 알려져 있지 않지요."
"꼼꼼히도 기억하고 있구려. 다 알면서 굳이 왜 물어보는 거요?"
그가 던질지 모르는, 예측못할 질문에 대비해 내 근육은 나도 모르게 약간 움추러들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교수님? 로도스 섬에서 벌어진 공방전에 참여해서 비교적 이름을 날렸던 요한 기사단의 기사들 가운데 유독 카레토만이 말년이 불분명하단 말입니다.
로도스 공방전에 참여했던 핵심 기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장 파리소 드 라 발레트의 경우를 볼까요? 그는 1557년 후임 기사단장 직에 오르고 1565년 몰타 섬에서 다시 한번 투르크 군을 맞이해 멋진 복수전을 벌인 다음 1568년 사망했다고 여러가지 기록들이 입증해주고 있지요. 심지어는 전사한 기사나 기사단의 일원이 아니었던 축성 기술자의 생몰년까지 이런 저런 문헌을 열심히 뒤져보면 알아낼 수 있더라구요. 이에 비해 그 뒤에도 한참 더 오래 살았고 라 발레트보다도 젊었던 안토니오의 행적은 북아프리카로 떠났다는 언급 이후로는 어떤 기록에서도 분명치가 않다 이겁니다."
어느새 그는 만년필에서 나오는 빛을 커피숍 탁자에 투영해보며 연월일을 대조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실 만년필이 아니라 일종의 미니 컴퓨터로 그것이 담고 있는 정보는 그 끄트머리에서 뿜어지는 빛을 통하여 어디에고 비춰볼 수 있었다. 휴대가 매우 편리하고 많은 정보량을 담을 수 있기에 나도 과거로 탐사를 떠날 때 가져가보려 했던 적이 있는 기종이었다. 하지만 시간안전국에서 금지시켰다. 내가 주로 탐구하러 떠났던 시대는 아예 만년필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보니 이 모델은 최신버전인 모양이었다. 내가 마음에 두었던 것보다 1/3은 더 작아보였다.
"그래서요?"
감을 잡은 내가 평정을 되찾으며 되물었다.
"설마하니 16세기의 역사기록이 털 끝 하나 손상되지 않고 남아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거요?"
"물론 정말 안토니오가 세인의 시야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버렸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교수님. 그러나 이를테면... 안토니오가 그냥 주변 친지들에게 그렇게 둘러댔을 수도 있지요. 속셈은 정작 딴데 있으면서 말입니다."
"내가 안토니오의 기록을 조작이라도 했다는 말이오?"
나도 모르게 갑자기 내 목소리가 격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학자의 양심이 의심받을 때는 아무리 얌전한 학자라도 제정신일 수 없는 법이다.
"대체 무엇 때문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는 물끄러미 내 눈을 들여다 보았다. 나는 정말 이런 타입의 인간을 싫어한다. 냉정을 가장한 채 심문하는데 희열을 느끼는 존재들... 이 자는 시간 안전국의 보안과 소속이 분명하다. 갑자기 내게 후버를 소개해주던 존 글렌의 어색해하던 표정이 떠올랐다.
"그 말씀에 대해 직접적인 답변을 하기 전에 지난번 만났을 때 지적했던 중요한 문제점 하나를 다시 환기시켜드리고 싶군요."
그는 마치 내 마음에 이는 잔물결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안토니오가 쓴 원본은 종이의 재질이나 제작방식으로 미루어보건대 적어도 서로 몇백년 이상의 차이가 나는 쪽들이이 함께 뒤섞여 있지만 방사능 연대 측정법으로 확인해보면 같은 시대의 것으로 판명됩니다. 뒷부분의 수수께끼의 종이들을 안토니오는 어떻게 구한 것일까요? 과연 안토니오는 그 기록을 전투가 끝난지 몇 년 뒤에 이탈리아의 모 수도원에서 썼던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궁금한 것은..."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 만년필 컴퓨터는 꺼져 있었다.
"그는 왜 그 기록을 남긴 뒤 황급히 북아프리카로 사라져야 했을까요? 그는 왜 요한 기사단 안에 남아있질 못했을까요? 단지 다리를 절게 되어서? 목숨을 내건 댓가로 당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고리대금 금융조직 중 하나였던 그 기사단에 거처 하나 마련할 수 없었을까요? 또 그는 이탈리아에 있는 어머니에게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잖습니까. 로도섬에서의 공방전 이후 그는 기록 하나만 달랑 남긴 채 세인의 눈길에서 펑하고 사라진 것입니다."
"설사 그랬다한들 그건 전적으로 안토니오의 마음 아니겠소?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란 말요? 그 사람이 종적을 감춘 이유와 동기까지 역사학이 꼬치꼬치 캐내야 할 어떤 당위성이라도 있소?"
"당위성이라..."
후버는 잠시 그 단어를 입 안에서 우물거리면서 음미하는 듯했다.
"이런 가정을 한번 세워보면 어떨까요."
그의 허연 이빨이 탐욕스럽게 두툼한 입술 사이로 번뜩였다.
"2150년에 살던 한 역사 복원학자가 중세의 로도스섬으로 찾아갑니다.
오랜 세월에 걸친 십자군 전쟁의 결말이 이슬람 세력의 손을 들어주자, 당시 본의 아니게 기독교 세력권의 최전방이 되어버린 로도스 섬에서 두 세력이 다시 격돌하는 상황을 자세히 조사하는 것이 목적이었죠.
그는 유태인 의사로 변장해서 그 기사단 안에 자리를 얻습니다. 유태민족은 모국을 잃은 이래 지중해 세계에서부터 유럽에 이르기까지 각지로 뿔뿔이 흩어졌는데 언제 어디서든 이방인 신세를 면치 못했지요. 이러한 대우는 중세 유럽에서도 더 심하면 심했지 다를 바가 없어서, 언제 박해받고 추방당할지 모르는 만큼 의사나 장사꾼 같은 전문직을 가져 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자녀들을 교육하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유태인은 아무리 뛰어나도 군무에 종사할 수 없었다고 하죠. 목숨을 바칠 조국이 없는 사람들이었기에 신용을 얻지 못했던 거지요. 어쨌거나 그 바람에 중세와 르네상스를 통해 의사집단에서 유태인을 빼버리면 의사라는 직업 자체가 소멸해버릴 판이었다고 하니까 알만하죠. 이러한 현상은 이슬람세계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니까요. 이 역사복원학자는 그 시대적 풍조를 시의적절하게 잘 이용했던 셈입니다."
"그건 가정이 아닐세,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있을 뿐이야."
그는 내 퉁명스런 대꾸에 잠시 말을 멈춘 채 나를 바라보았다. 이 작자는 눈동자가 마주치면 물러설줄 모른다.
"제가 마저 끝마치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만..."
할 수 없이 나는 마음대로 하라는 손짓을 해보이며 손톱에 내장된 시계를 슬쩍 들여다보았다. 무려 삼십 분이 넘게 예상치 않은데 내 개인 시간이 낭비되고 있었다. 시간안전국 직원이라는 심증만 들지 않았더라면 이 작자가 뭐라고 지껄이거나 말거나 일찌감치 자리를 뜨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의사, 아니 역사 복원학자는 재수없게도 기사단의 의심을 사 투르크와 내통하는 첩자로 내몰립니다. 실제로 첩자가 있다는 심증을 갖게 하는 사건이 일어난 뒤였고 --- 기록에 따르면, 기사단의 부단장이 배후 인물로 되어있죠.--- 의사의 방에서는 미래에서 가져온 약간의 이상한 비품들과 알아볼 수 없는 언어로 쓴 암호문들이 발견되어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고 말았죠. 물론 여기서 암호문이란 실제로는 그 학자가 보고 느낀 바를 우리 현대어로 적어 놓은 것에 불과했을테죠. 그러나 당시 사람들에게 그런 얘기가 어디 통하겠습니까? 누명을 벗기는 커녕 좀 더 긴 고문을 당할 뿐이겠죠. 아무튼 그 학자는 제대로 자기변명 한번 못해보고 지독한 고문 끝에 참살당하고 맙니..."
"지금 소설이나 듣고 있을 정도로 내가 한가한 줄 아시오, 후버씨?"
극도의 짜증과 분노가 뒤섞였지만 최대한 자제해서 말하다보니 내 어조가 마치 오디오 스피커가 낼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는 바람에 찌그러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들렸다.
그는 싱긋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유태인 의사가 첩자로 몰린 것은 사실이죠, 이미 교수님이 8년 전에 발표하셨다시피?"
"당시 내가 유태인 의사로 가장했던 것은 물론 사실이오. 더우기 내 혈통 속에는 진짜로 유태인의 피가 흐르고 있소. 의사란 내 본모습 그대로 그 시대에 다가가기에 가장 안성맞춤인 직업이었던 거요. 이 시대의 내가 지닌 정도의 지식이면 거기도 의사 노릇도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고... 단, 첩자로 몰린 의사는 내가 아니었소. 거기에는 유태인 의사들이 나말고도 여러명 있었소. 그 만큼 뒤를 캐고 다녔으면, 그 무렵의 로도스 섬의 병원시설이 이탈리아 최대규모의 병원과 맞먹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거요. 무슨 근거로 당신은 내가 당신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단정하는 거요, 대체?"
"평론은 소설을 다 듣고 하는 법입니다, 그렇잖습니까?"
시간안전국 보안과 놈들은 다 이렇게 재수없는 부류일까? 내 학문은 그 성격상 시간안전국과 긴밀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지만 주로 교통과나 수송과 쪽 사람들과만 부대끼기 때문에 이런 더러운 대접은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지은 소설에서는 안토니오가 그 의사를 심문하거나 아니면 그 심문과 관련된 일을 맡게 됩니다. 고문 과정에서 허약한 학자는 되는 소리 안되는 소리 다 지껄여댈 수밖에 없겠죠. 그 과정에서 결국 고통에 못이긴 그 학자는 자기가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 때문에 왔는지를 실토할 거구요. 물론 다른 사람들은 다 웃어제꼈겠지만, 유독 안토니오만은 호기심을 갖습니다. 사실 그 때는 10만 대군의 인해전술을 펼치는 투르크 군 앞에서 아무리 철벽같은 성벽을 가졌다지만 요한 기사단이 전멸하기 딱 좋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습니다. 안토니오는 매일 그 첩자, 아니 학자에게 마실 것과 먹을 것을 갖다주며 미래 세계에 대한 이런 저런 정보를 얻습니다. 이미 온 몸 여기저기가 부러지고 살이 터질대로 터진 처지에 그 학자가 숨길 게 뭐가 있었겠습니까? 그는 재수없게도 몸에 지녔던 자살용 캡슐조차 먹을 기회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안토니오는 생각에 잠깁니다. '어차피 이 전쟁은 승산이 전혀 없는 버티기에 불과하다. --- 물론 실제 역사가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고요.--- 설사 이 전쟁에서 살아남는다 해도 나는 이제 유랑하는 요한 기사단의 뒤꽁무니나 평생 쫓아다녀야 할거다'하고 말입니다. 그는 교수님이 지난 주말 심포지움에서 발표하신 논문 주제의 산 증인, 바로 카데토 아닙니까. 그는 귀족 출신이지만 장자가 아닌 까닭에 빈털터리나 다름없습니다. 겉만 번지르르한 속빈 강정이랄까요. 그가 요한 기사단을 선택한 것은 출세의 기회를 잡기 위해서인데, 요한 기사단의 수명이 오늘내일 하는 겁니다.
그는 결단을 내립니다. 그 첩자의 말이 진실이건 아니건 그의 말을 믿어서 손해볼 게 없다는 생각이 든거죠.
안토니오는 그 학자를 꼬여서 ---뭐, 다 털어 놓으면 목숨만은 살려준다는 뻔한 수법을 썼겠지요.--- 미래 세계로 가는 방법을 알아낸 뒤 처형장으로 보냅니다. 사실 교수님도 아시다시피 그건 방법이랄 것도 없잖아요. 원래 시간여행자는 과거로 떠나기 전에 시간안전국의 수송과 관리와 언제 돌아올 건지 미리 협의를 해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약속한 그 시점이 되면 시간안전국의 타임머신이 시간여행자가 지닌 휴대용 발신기의 위치를 파악해서 그에게 시간터널을 만들어주니까요. 물론 처음에는 안토니오도 상당히 주저했을 겁니다. 단테의 <신곡>을 믿던 시대의 사고방식으로는 불경스럽기 짝이 없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매일매일의 구역질나는 살육전은 안토니오에게 생사의 갈림길에서 선택을 하게 만들었고 마침내 안토니오는 전투 기록을 작성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당시 상황을 역사로 남기려는 목적 못지 않게, 만일에 대비해 자신의 미래를 위한 알리바이를 만들어둘 필요성을 느꼈던 거죠. 미래세계에서 자신의 증발을 확실하게 믿어줄만한 정보를 과거의 역사 기록 사이에 슬쩍 집어 넣는 수법이라...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가지 작은 문제가 생깁니다. 기록을 하다보니 종이가 다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아직 자신의 증발을 합리화할 알리바이는 적어넣지도 못했는데 말입니다. 투르크 족에게 완전 포위된 처지에 외부에서 종이를 들여온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유태인 의사의 방을 뒤집니다. 아니나 다를까 종이 다발이 발견되질 않겠습니까. 진짜 학자라면 종이는 기본으로 지녔을 거라고 추정하는 게 상식이니까요. 물론 중세 사람인 그가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측정법을 걱정했을 리 만무합니다. 그는 그 기록을 밀봉한 다음 성 어딘가에 묻어 놓습니다. 예를 들면 조르주 성채 부근 같은 곳이 아니었을까요. 이런 곳이라면 바다와 닿아 있는 저지대라 투르크 군이 공격해오기도 마땅치 않았을 테고... 또 실제로도 성 요한 기사단이 로도스 섬을 본거지로 삼은지 200년이 지나도록 그 부근에서는 이렇다할 싸움이 일어난 적조차 없으니까요. 이에 비해 그 성채에서 약 200미터 정도 떨어진 당부아즈 성문부터는 지면이 올라가 적의 공격에 취약한 편이기 때문에 이런 곳에다 기록을 묻고 싶지는 않았겠죠.
어쨋거나... 이런 와중에서 밤새도록 살육전을 벌이느라 녹초가 된 어느 날 새벽, 안토니오는 몸에 휴대하고 있던 발신기의 작동음을 들으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 즉 그의 미래세계로 오게 됩니다. 시간안전국의 타임머쉰은 발신기만 챙기지 귀환자의 신상까지 시시콜콜 따지는 기계는 아니었으니까요. 안토니오는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성벽 어딘가에 숨겨놓은 자신의 기록을 꺼내 이탈리아의 오래된 수도원 한 곳을 찾아가 그곳의 문서보관소 안에 슬그머니 꽂아둡니다. 원래 이런 곳에는 오래된 문헌들이 부지기수로 쌓여 있는지라 낯선 책 한 권이 어두컴컴한 구석에서 새로 발견된다 해서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요. 그는 누구보다도 수도원의 오랜 전통과 생리를 잘 알고 있는 성직자 겸 기사 아닙니까. 그는 그 수도원의 고문서들을 연구하는 척하고 장기 체류하다가 자신의 기록을 어느 날 갑자기 찾아낸 것처럼 꾸밉니다. 안토니오는 그 학자로부터 개인적인 신상과 하는 일까지 그대로 전수받았던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제가 설명드리지 않아도 되겠지요, 안토니오씨?"
"허허허...."
나는 배꼽이 떨어져 나가라고 웃어제꼈다. 후버는 내 반응에 개의치 않았고 기분나빠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거요? 소설가 양반? 하하하..."
후버는 말투가 좀 더 사무적으로 변했다. 이 또한 나를 심리적으로 제압하기 위한 술수인지 모른다.
"안토니오는 자신이 직접 약 육백여년 전에 써놓은 기록을 실마리로 삼은 것처럼 행세하며, 로도스 섬을 다시 찾아가 그 폐허를 용의주도하게 발굴함으로서 역사학계의 주목을 받습니다. 사실 그 기록은 안토니오에게는 장식에 불과했지요. 그곳의 세세한 내용은 원래 머리 속에 다 들어 있었으니까... 놀랍게도 그는 그 학자의 빈자리를 소리소문없이 그럴 듯하게 메워버리는 솜씨를 발휘했습니다."
상당히 긴 침묵이 흘렀다. 나는 아무 말도 할 가치를 못 느꼈다. 망상에 도취된 녀석과 무슨 대화를 한단 말인가? 어이없어서 웃자고 해도 너무 기차차서 그렇게 되질 않았다. 시간 안전국의 보안과 녀석들이 늘 신경과민이라는 것 쯤은 한 다리 건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막상 당해보니 이만저만 짜증스런 상대가 아니었다.
"22세기에 살아보니 어떻습니까? 안토니오씨!"
나는 웃음기 가신 얼굴로 커피를 한 모금 축였다. 보안과의 녀석들 가운데 나를 이런 식으로 의심하는 팔푼이들이 얼마나 될까?
"당신 죄목은 살인과 시간여행법 위반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체포할거요?"
나는 비양거리는 투로 물었다. 웨이트리스가 다가와서 빈 잔에 커피를 다시 채워 주었다. 후버는 허를 찔린 듯 잠시 나를 멍하니 바라보더니 다시 애초의 심드렁한 미소로 돌아갔다.
"소설 얘기는 그만하도록 하죠. 어차피 증거가 있으니까."
"뭐? 정신없는 소리 작작하라구, 이 양반아! 안토니오는 전형적인 이탈리아인이고 나는 유태인일세, 검은 곱슬머리와 이 매부리코가 안보인단 말인가, 자네는?"
마침내 나는 폭발하고 말았다. 웨이트리스와 여주인이 힐끔 돌아본다. 아마 대학 구내에서 내가 큰 소리 내는 것은 처음 보았을 것이다.
"역사학이 전공이라고 해서 요즘 생물학이 어떤 수준인지 모른다 이겁니까? 인종적 특성과 피부색을 멋대로 바꾸고 조합하는 일은 십여년 전부터 임상실험 중이었고 특히 요새는 젊은이들 사이에 인종 성형이 첨단 유행이라는 것 정도는 아실텐데요. 당장 저 웨이트리스를 놓고 봅시다. 두툼한 입술에 뚜렷한 쌍까풀, 북구 유럽인의 피부색, 동양인의 살결... 당신만 다른 세기에 살고 있습니까? 머리 속에 든 것만 빼고는 뭐든지 다 바꿔 놓을 수 있는 세상 아닙니까? 모든 건 시간이 다 해결해 줄 거요. 내가 당신이 찾아간 병원과 수술기록 일체를 찾아낼테니."
"이런... 이젠 아예 대놓고 협박을 하시는 구만 그려... 좋아, 그렇다치고 아까 말한 증거가 뭔지나 들어봅시다. 뭘로 내가 안토니오란 것을 입증할 거요?"
아무리 과대망상증 환자라도 그러한 사람이 중요한 자리에 있으면 신중하게 대응해야 하는 법이다. 일단 내 쪽에서도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했다. 시간안전국 수송과의 잘 아는 간부에게 손을 쓰기 전에 말이다. 융통성없는 관리들의 덕을 보면서 연구를 하려면 이 정도의 불편이나 오해 쯤은 감수해야 하는 걸까.
"필적이죠."
"필적?"
"진짜 아론 이스마엘 교수와 당신, 안토니오 델 카레토의 필적을 비교 감정하는 겁니다."
"뭐 대단한 방법을 발견해냈나 했더니... 그게 그거구만. 대체 당신 정체가 뭐요? 역사 연구가라는 것은 순전히 거짓말이지. 시간안전국 사람?"
후버는 두 팔을 들어올려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DNA 혈청 검사를 해보면 금방 판가름나지만, 지금으로서는 이스마엘 교수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구할 수 없는 처지니까요."
"대체 나를 의심하게된 동기가 뭐요?"
약간 두통이 생겼지만, 진정해야 했다. 나는 웨이트리스를 향해 손짓했다. 좀 더 많은 카페인이 필요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시간 질서의 확립이 제1의 과제입니다."
'우리'라는 단어를 씀으로서 후버는 처음으로 자신의 정체를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여기서 우리란 두말 할 것없이 '시간 안전국'을 지칭하는 것일 터였다.
"시간여행자의 사소한 실수가 인류의 궁극적인 운명을 어떻게 비틀어 놓을 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일단 시간여행자가 우리 시대로 돌아오면 그의 행동거지를 몇 년이고 눈에 안띄게 관찰하는 게 원칙입니다. 만약 2차대전 무렵의 독일로 갔던 시간여행자 대신 그 사람 흉내를 낸 다른 과거인이 귀환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더구나 그 과거인이 아돌프 히틀러라면...?
따라서 육백여년 전의 로도스에서 돌아온 당신이 일정 기간 동안 우리 부서의 감찰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하고도 자연스런 수순이었죠. 그런데 우리는 이내 흥미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시간여행을 떠나기 전의 당신과 돌아온 뒤의 당신은 생긴 건 흡사해도 사고방식이나 행동에서 완전히 딴판이었던 겁니다. 그 뒤로 우리는 당신의 일거수 일투족에 주목하게 되었죠. "
이런 말을 듣고 나니 나 역시 혼란스런 기분이 되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가 참으로 어려운 법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제까지 사람들의 역사를 연구하면서도 내 자신을 돌아본 적은 한 번도 없지 않은가?
"대체... 내가 뭐가 어떻게 달라졌길래?"
"물론 처음에는 이렇다 할 의심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관례로 한 동안 하는 관찰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곧 이상한 점이 눈에 띄더라 이겁니다. 원래 이스마엘 교수는 괴짜로 소문난 사람입니다. 젊은 소장파 학자였음에도 역사학자로서의 연구 성과를 학계에서 인정받을 정도로 학문적 깊이가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사람 을 무척 가려 만나고 공개적인 자리를 기피하는 특이한 캐릭터였죠. 일례로 로도스로 떠나기 전만 해도, 대학에서 그는 연구 교수로만 일했을 뿐 학생들 강의는 거의 맡지 않았습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차라리 그를 만나려면 스톤 헨지나 사해(死海)의 동굴을 뒤지는 쪽이 더 빠를 거라고 농담할 정도였으니까... 가족들조차 십여년 간 서로 왕래가 없었는데다 학계 동료들조차 그가 이런저런 학술지에 부지런히 발표해대는 논문은 자주 대할지언정 같이 식사 한 번 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가 자신의 전문분야를 중세로 잡고 과거로만 돌아다녔던 행태도 이로 미루어 볼 때 이해가 안가는 바도 아니지요.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은거하는 고집불통 괴짜 교수의 전형이었다고 할까요. 자, 그럼 당신이 돌아온 뒤의 8년 간을 비교해볼까요?"
후버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지만 요지는 간단했다. 육년여 년 전의 로도스 섬에서 돌아온 뒤 내가 180도 달라졌다는 얘기다. 내가 돌연 사교적인 사람이 되어 이런 저런 심포지움이나 세미나에 자주 참석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기더니만 돌아온지 불과 반년도 안되어서 열렬한 사랑에 빠져 결혼에 성공했다 이거다. 그리고는 아이를 둘이나 낳고 전형적인 가정을 이루었고. 그러나 아무리 독야청청 하리라 외쳐도 사랑하는 여자에게 정신을 빼앗기고 나면 원래의 페이스를 유지할 수 없는 법 아닌가. 나는 분명 사교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녀를 만나면서 많이 변한 게 사실이었다. 나 역시 외토리로 지내는 나 자신이 즐거워서 그런 것은 전혀 아니었거니와, 그저 사람들과 있으면 마음이 편치 않았을 뿐이었다. 아내와의 만남은 그러한 나를 다시 조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이런 개인적인 얘기까지 후버에게 털어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쨋거나 그 바람에 후버의 엉뚱한 상상력을 자극했던 모양이다.
"물론 외모는 뛰어난 성형기술 덕분에 거의 구분이 되지 않는 게 유감입다만... 당신은 분명 다른 사람입니다. 그건 지난 팔 년 간의 당신의 행적 하나하나가 증명하고 있지요. 격심한 전쟁터에 갔다와서 성격이 바뀌었다? 뭐, 그런 가정을 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지요. 하지만 더욱 이상한 것은 당신이 그처럼 사교적으로 바뀌었으면서도 이제까지 직계가족과도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중요한 명절날에도 당신은 전화 한통으로 때우고 말지요. 그처럼 사회성이 풍부하고 많은 친구를 갖게된 사람이 정작 자신의 가족과는 팔년 동안 전화 몇 통으로 때우고 말다니... 당신이 생각해봐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당신은 내 연구 논문들을 찬찬히 뒤져보기 시작했구려. 전화 도청이나 미행만으로도 모자라서... 으음, 이건 사생활 보호법에 어긋날 뿐더러 명백한 인권침해라고 생각되지 않소?"
약간 지친 표정으로 내가 물었다. 더 이상 화내고 자시고 할 가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세계정부에서 가장 끝발이 좋은 시간안전국 소속이었고, 그것도 서슬이 시퍼런 보안과 소속이었고, 나는 그냥... 좀 유명한, 일개 대학교수에 불과했다. 손톱시계는 이미 내가 커피숍에 들어온 지 한 시간 반이 넘었음을 새삼 일깨워주었다.
"시간여행자들에게는 사안에 따라서 그러한 권리가 유보될 수 있습니다. 당신이 타임머신을 타고 떠나기 직전 수송과 직원들이 분명히 공지해주었을텐데요. 시간보안법 제8조 9항에 의거하여...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뭐 외우라던 거 있지 않았나요?"
듣고 보니 그랬던 기억이 나긴 한다. 하지만 늘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었다. 나는 쓴 웃음을 지었다.
"세상의 질서가 토대부터 무너지는데야 인권이고 뭐고 따질 개제가 되겠습니까? 당신이 우리 시대에 돌아왔을 때는 안토니오 델 카레토 본연의 모습이었겠죠. 우리가 당신의 소재를 파악하는데 한달 남짓 걸렸고... 그러니 그 때는 이미 일이 다 끝나있던 거죠. 당신은 이미 이 세상의 기본적인 지식을 다 섭취하고서 아론 이스마엘인양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에서 고문서철을 들추고 있었으니까..."
"내가 어디로 귀환했는지는 시간전송 공사 상황실에 조회해보면 금방 알 수 있었을텐데..."
시간여행은 과거로 갈 때보다는 미래(또는 현재)로 돌아올 때가 훨씬 간편했다. 과거로 가려면 시간의 화살을 역행시켜야 하고 그러자면 시간여행자를 일시적으로 반물질로 바꿔야 한다. 더욱 큰 문제는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에너지를 퍼부어야만 인과율을 역행하는 시간좌표를 설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무엘 앤더슨의 시간역행 방정식이 발견되기 전까지만 해도 과거로의 시간여행은 불가능했다. 마침내 앤더슨은 역행 에너지의 99.9999999999999999.....%를 허수로 반전시키는 방법을 발견해내기 전까지는.
그러나 이같은 상쇄에도 불구하고 타임머신을 과거 좌표로 가동시키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했다. 원래 그 기본값이 무한대였음을 감안하면 이나마도 다행인 셈이다. 이에 비하면 현재로 돌아오는 것은 인과율에 위배되지 않는 양(+)의 방향으로의 좌표설정인지라 과거로 가는데 필요한 에너지량의 1/10000이면 충분했다. 그래서 타임머신 발신기가 휴대용 사이즈로까지 작아질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경제적인 이유로 과거에서 현재로 돌아오는 에너지 비용을 최소화하다보니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시간전송 공사의 전송실로 돌아올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 바람에 시간여행자는 휴대용 타임머신 발신기가 있던 바로 그 장소의 현재 시점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래서 시간여행자는 귀환한 뒤 한달 반 안에 시간안전국에 자진신고를 하게 되어 있다. 오지에 떨어지게 될 가능성을 고려해서 그렇게 기간을 정한 것이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살던 곳이라도 현재에는 황무지나 다름없게 되어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전송 공사의 타임머신 중앙제어장치는 내 발신기가 현재 시대의 어느 지역에 출현했는지를 바로 알아낼 수 있다. 이런 장치 덕분에 설사 내가 칼리하라 사막 같은 곳에 떨어지면 즉각 구조대가 출동할 수 있었다.
"그것 참, 늘 그렇지만 관공서끼리는 업무 협조가 잘 안되는 것이 문제지요. 심지어는 쓰잘 데 없는 파워게임까지 일삼으니까. 공교롭게도 당신이 도착한 날은 세계정부 수립 기념일입디다. 온 세계의 공무원들이 노는 날 당신이 찾아왔던 거요. 규칙상 당연히 귀환날짜를 그런 식으로 잡아서는 안되었지만, 이스마엘 교수가 1년 가량 체류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공사측 담당자가 귀환 날짜를 꼼꼼하게 따져보지 않았던 것이 실수였죠. 그래서 당신이 언제쯤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준비했던 사람들은 우리 밖에 없었던 겁니다. 공사의 컴퓨터는 그날 전력 공급을 받을 수 없었고..."
여지껏 내게 향하던 그의 총부리가 잠시 다른 쪽으로 비껴갔다.
"지금이라도 '시간 안전국' 관할 하에 '시간 전송 공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 국의 일관된 입장이지요."
"정부는 시간안전국이 시간을 지배할까봐 두려워하고 있잖소."
내가 반박했다. 사실 그렇게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요, 정부의 겁장이들이 우리의 진의를 오해하고 있죠. 시간안전국이 공사를 꽉 틀어쥐고 운영해야만 당신 같은 불청객들을 원천봉쇄할 수 있을텐데..."
"이봐요, 후버씨. 나는 정부의 공인된 시설을 이용해 과거로 갔고 연구를 위한 합법적인 허가도 받았소."
"예, 그랬죠. 당신이 아니라 이스마엘 교수가요. 교수가 과거로 떠나던 날은 시간안전국 수송과 관리가 그 현장에서 공사측의 진행을 지켜봤지만 돌아온 날 당일의 당신을 목격하고 증언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더 이상 대꾸할 필요를 못느꼈다. 목격자가 없다고 해서 후버의 주장이 맞고 내 의견이 무시되어야 한다는 발상은 어불성설이다. 이 정도의 편집광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를 감옥에 넣으려 안간힘 쓸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나를 이 세상에서 내 몸의 분자 하나 안남기고 없애버리려 들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솔직히 나는 연구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던 나머지 로도스의 전장에서 돌아온 날이 정확히 몇일인지, 나아가서는 그 날이 공휴일이었는지 아니었는지조차 관심이 없었다. 타임머신의 귀환방식을 그런 식으로 만든 게 내가 아닌 이상 목격자가 없다고 내가 왜 책임을 져야 한단 말인가? 물론 돌아온 나를 알아본 사람들이 몇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런 날이 올줄 대비해서 주소나 전화번호를 적어 놓았겠는가? 로도스 산꼴짜기에서 만난 배낭여행족을 지금 어디가서 찾는단 말인가?
후버의 장광성은 계속 되었다.
"당신과는 상관없는 얘기로 샛군요. 다시 필적 감정 건으로 돌아가볼까요. 안토니오의 문헌으로 당신의 위선이 반쯤은 드러난 셈입니다."
"좋아요, 좋아. 나는 물리학자가 아니오. 안토니오의 문헌에 설사 당신이 말하는 바와 같은 결함이 있다고 칩시다. 그렇다 해도 그게 내가 안토니오일지 모른다는 당신의 터무니없는 망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잖소?"
사실 그랬다. 만약 그 문헌의 진위에 문제가 있다면 학자로서의 내 명예에 흠이 가기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나를 느닷없이 안토니오니 누구니 하는 식으로 몰아부치는 짓은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후버는 약간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 안색을 살폈다.
"진짜 게임은 이제부터입니다, 안토니오씨. 진짜 이스마엘 교수는 간첩으로 몰려 죽기 직전까지 자기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을테니까요. 다시 말해서 1522년에 벌어진 로도스섬에서의 피비린내나는 공방전을 자기 나름대로의 시각으로 기록해았을 거라 이 말입니다. 가짜인 당신 입맛에 맞게 왜곡시켜놓은 역사가 아니라, 요한기사단이나 투르크 황제인 술레이만 1세의 입장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역사를... 역사복원학의 본질이 잘 드러난 진정한 역사를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토니오, 당신의 술수가 바로 백일하에 드러나는 겁니다. 공사측 자료에 나와있듯, 16세기로 돌아간 이스마엘 교수는 그 시대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않기 위해, 기록도구로 잉크와 종이만을 가져갔었습니다. 깃털펜이야 그 시대로 가서 구입하면 되지만, 잘 정제된 잉크와 충분한 양의 종이를 구하는 게 쉽지 않을 거라 여겼던 탓이죠.
당신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겠지만, 요즘 시대에는 수동 필기도구를 거의 쓰지 않는 탓에 로도스로 떠나기 전의 이스마엘 교수가 직접 손으로 써서 남긴 기록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통용되고 있는 자필 서명이야 연습해서 그대로 흉내내면 그만이니까요.
그러나 역사복원학자라는 그의 직업 때문에 그는 과거인과 다를 바 없이 직접 손으로 능숙하게 글을 쓸 수 있는 훈련을 쌓았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연습하느라 썼던 종이들은 폐기되고 지금은 구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로도스행 여행이 그로 하여금 자신의 필적을 뚜렷하게 남기도록 해주었습니다. 이스마엘 교수가 직접 손으로 기록한 문헌의 필체와 당신의 필적을 정밀 감정한다면 당신이 가짜라는 게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이스마엘 교수는 로도스 성벽 어딘가에 자신의 기록을 숨겨두었을 겁니다. 그게 우리 손에 들어오는 날, 수술로 뒤집어 쓴 당신의 번지르한 껍질도 소용이 없게 될테지요.
안토니오씨, 한 번 해봅시다. 날 이길 자신이 있습니까?"
"내가 만나본 안토니오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소, 후버씨."
이제는 후버가 나에게 던지는 덫의 윤곽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겁장이는 커녕 그는 너무 이상에 들뜬 젊은이인지라 몸을 돌보지 않고 앞장서다가 그만 한 쪽 다리를 못쓰게 되었다오. 당신은 왜 그가 전장에서 뒷걸음질쳤다고 생각하는 거요?"
"글쎄요, 정말 한 쪽 다리가 불구가 되었을까요? 그건 안토니오 당신이 자신의 알리바이를 좀 더 강화하기 위해 당시 주위 동료 기사들에게 그렇게 말했거나 다른 이들의 관련문헌에 첨삭을 가했을 수도 있죠. 어차피 시작한 역사왜곡인데, 못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이쯤되면, 나로서도 더 이상 침착을 가장할 필요가 없었다.
"미쳤군, 미쳤어. 당신은 미쳐도 한 참 미쳤어."
"위장술에 비해 소설을 비평하는 솜씨는 별로군요, 안토니오씨. 당신의 논문에도 나와 있으니, 이거 하나는 분명히 해둡시다. 요한 기사단 사람들은 결코 성자가 아니었소. 인생의 돌파구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집합소였을 뿐이지. 안토니오 델 카레토는 그러한 전형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중세 기독교 세계 사람들에게는 오지나 다름없는 북아프리카의 어딘가로 가서 이슬람 교도들로부터 노예가 된 기독교인들을 구제하는 일을 하다가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도 모르게 생을 마감한 사내라... 나보고 이걸 정말 믿으란 얘깁니까?"
"이보쇼, 후버씨. 당신 말대로 내가 안토니오라 칩시다. 그리고 이스마엘은 첩자로 몰려 죽었다고 치자구. 그렇다고 내가 그 자리를 탐낼 이유는?"
내 목소리가 격해졌는지 주인과 웨이트리스가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손님들이 드문 시간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정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명예훼손 소송을 심각하게 고려해봐야 할 것 같았다.
"답은 바로 당신이 며칠 전 발표한 논문에 나와있지 않나요? 당신은 장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중세 봉건 유럽에서 귀족의 모든 재산과 지위는 장자가 물려받게 되어 있잖아요. 당신은 당시 신흥귀족이었던 데 카라토 가문의 둘째 아들... 로도스 섬으로 기사를 자원해온 이들의 대부분이 당신 같은 처지였죠. 생각해보세요. 로도스에서 쫓겨나면 기사단 자체가 갈 곳이 마땅찮은 신세... 패잔병 무리를 따라다녀 본들, 쇠락한 기사단의 형편으로 다시 옛날의 영광을 회복할 전망이 보이지도 않고... 그래서 당신은 마지막 도박을 한 겁니다. 이스마엘 교수의 말을 얼마나 믿었는지는 모르지만 더 이상 밑질 게 없는 처지였고... 마지막 배팅을 해본 거 아니겠어요!"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시끄럽게 굴면 나만 손해다.
"마음대로 해보쇼, 한 번. 나도 생각이 있으니까."
후버는 나를 올려다보면서 빙그레 웃음지었다.
"이스마엘 교수의 필사본만 발견되면 당신의 체포영장은 100% 맡아놓은 셈입니다. 뭐, 기다려 보십쇼. 우리 직원들이 동분서주하고 있으니."
"자신만만 하시군, 그래."
"도저히 이스마엘 교수의 진본을 찾을 길이 없다면... 오늘날까지 전해져오지 않고 파기되었을 수도 있으니까.... 당신이 떠나온 무렵으로 직접 찾아가 뒤지는 최후의 수단이 남아있죠. 흠, 하긴 그렇게 되면 필적 대조를 할 필요도 없이 진짜 이스마엘 교수와 안토니오를 동시에 만나볼 수 있겠군..."
후버의 표정없던 얼굴에 흥미로운 기색이 떠올랐다.
"당장 지금이라도 그렇게 해보시지."
일어선 채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으며 내가 말했다. 자리를 박차고 떠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마지막으로 한 방 먹여줄 말을 궁리 중이었다.
"아직 그럴 필요까지야... 당신도 대충 짐작하겠지만, 사실 그런 수까지 동원하려면 우리 국장의 결재가 필요합니다. 시간안전국 요원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시간대를 드나들 수는 없는 법이니까. 더우기 내가 16세기로 날아가 설치다가 자칫 오히려 시간줄기가 더 뒤엉켜버릴지 모른다는 염려도 되구요. 신중함이 우리의 신조라는 것, 잘 아시죠. 말 그대로 그건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두어야 더 공평한 게임이 되지 않겠어요?"
"이만 가야겠소, 후버씨. 내 전공이 정신병리학이 아닌 게 유감이오. 그랬다면 좀 더 들어줄 수 있을지 모르겠소만..."
나는 정문 쪽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가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마지막으로 하나 물어봅시다, 홈즈 양반. 내가 진범이라고 확신한다면 왜 당신은 이 사건을 몰래 수사하지 않고 내 앞에서 이렇게 시시콜콜 늘어 놓는 거요? 설마 나보고 조심하라고 미리 경고해주는 건 아닐테고. 수사의 ABC를 내버린 까닭이 뭐요?"
후버의 철판을 깐 것 같은 얼굴에 당혹감이 피어 오르는 게 보였다. 아울러 어떻게 대답해야 지금까지 따놓은 점수를 까먹지 않을까 궁리하는 표정도 읽을 수 있었다.
"내가 대답해주지, 잘난 수사관 양반. 당신은 그릇된 가정에서 출발한 심증만 있을 뿐, 뭐 하나 뚜렷한 증거가 하나도 없는 거요. 물론 당신네 국장이 그처럼 허황된 얘기를 듣고 엄청난 비용과 위험이 뒤따르는 시간여행을 쉽사리 결재해줄 리도 없을테고...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나를 극도로 자극해서, 내 이성을 무너뜨려서 내게서 무언가 헛점을 찾아내려는 거요? 그렇죠?"
후버는 입술만 달싹거리며 말이 없었다.
"오늘 얘기는 내가 주인공만 아니었다면 정말 흥미로웠을 거요, 후버씨. 당신이 시작한 이 게임의 승자는 이미 정해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요. 난 기록과 진실을 중시하지 당신 만큼 창의적이지는 못하니까. 그러니 당신의 소설이 출간되면 내게도 한 권 보내주지 않겠소?"
***
후버와 허비한 시간이 적지 않은지라 나는 부랴부랴 서둘러서 지하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집 부근 역까지는 이십 분 남짓이면 충분하다. 나처럼 과거 세계를 장기간 돌아다니는 사람에게는 자동으로 운행되는 지하버스가 안성맞춤이었다. 1년 내내 달구지만 타고 다니다가 갑자기 개인용 에어카(공기부양차)를 운전하려면 여간 까탈스러운 것이 아니다. 특히 시내 중심가는 아예 에어카로 들어갈 생각조차 말아야 한다.
기다린지 몇 분이 채 안되어 지하버스가 도착했고 나는 성큼 안으로 뛰어 들었다. 버스 안에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다. 스무 명 분의 좌석이 마련되어 있는 버스에 승객이 하나도 없다니... 웬지 께름칙한 기분이 들어 손톱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4시 23분. 대학가 역이라 비교적 승객이 한산한 시간이긴 하지만 이 정도인 적은 없었다. 후버와 일도 있고 해서 불안해진 나는 창밖을 보려 했지만 이미 버스는 암흑의 터널을 달리고 있었다. 후버와 언쟁을 벌이느라 정신이 산란해진 바람에 역사에 사람이 몇명이나 있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의 불길한 예감은 곧바로 사실로 확인되었다. 버스는 마치 대륙 횡단 특급처럼 중간역들을 무시한 채 속도를 점차 올리고 있지 않은가! 이런 속도면 집 가까운 역까지는 7분이면 도착하고도 남을 것이다. 나도 모르는 새 식은 땀이 흘렀다. 이 버스는 원래 시의 중앙통제센터에서 원격조종하게 되어 있다. 운전기사는 물론 운전석 자체가 따로 있지 않다. 내가 버스 구석구석을 살피며 어떻게 세울 수 없을까 궁리하는 사이, 예상대로 버스는 내가 마땅히 내려야 할 역사를 날렵하게 지나쳐버렸다.
별 소용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밑져야 본전이란 심정으로 비상벨을 눌러 보았다. 비상 신호음이 울렸지만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중앙통제 센터의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어야 마땅했다.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내 손톱시계는 어느새 다섯 시간 이상이 흘렀음을 알려주었다. 달리고 있는 동안 문이 열릴리 만무했고 버스는 서지 않았다. 도대체 이 버스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과연 목적지는 있기나 한 걸까? 고장일까? 아니면, 누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후버의 패거리 짓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랬다면 오늘처럼 그렇게 대놓고 나를 몰아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이런 식의 협박은 아무런 득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누가... 도시 지하버스의 중앙통제센터의 컴퓨터를 떡주무르듯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일까?
또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밖은 칠흑같은 어둠, 마치 거대한 진공의 우주 안에 나 혼자 달랑 남아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시계를 들여다 보는 짓도 포기한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몸 안의 시계는 어김없이 때를 알려주었다. 정말 저녁식사 생각이 간절했다.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모처럼 외식을 나설 참이었는데... 영원히 가족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치자 정말 공포감이 일었다.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 속도를 내느라 지하버스가 야생마처럼 나를 흔들어댔다.
문득 나는 후각이 예민해지는 것을 느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해초나 짠물 냄새 같은 게 나고 있었던 것 같다. 지하버스의 창 틈에다 코를 갖다댄 나는 또 한번 간담이 서늘해졌다. 통상 익숙해져 있는 터널의 냄새와는 다른 미립자들이 내 후각을 자극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버스는 지금 해저 터널을 지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지름길을 택하려고 단순히 만을 횡단하는 정도일까? 아니면...? 대서양 밑바닥일까, 태평양 밑바닥일까? 방향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원래 이 정도 급의 소형 버스로는 시내 통행 밖에는 허가되지 않는다. 나를 납치하려는 이들은 정체가 뭔지 몰라도 대단한 수준의 친구들인 것만은 분명하다. 불행하게도 나를 위해서 거액을 몸값을 치뤄줄만한 후원자가 아무도 떠오르지 않았다.
꼬박 두끼를 굶었다고 몸 안의 시계가 나를 질책할 즈음, 내가 탄 버스가 속력을 줄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미치광이 버스는 어느 자그마한 지하역에 나를 내려주었다. 여기저기 금이 가고 철골조에 녹이 슨 것으로 보아 폐기된지 오래된 역사 같았다.
문이 열렸다. 나는 선뜻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냥 그렇고 있으려니까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창가로 특이한 복색을 한 여인 하나가 내게 나오라는 손짓을 하는 것이 보였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어차피 내 힘으로는 이 버스를 되돌아가게 할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막상 나와보니 승강장은 생각보다 넓었다. 아까 내게 손짓했던 여자에게서 몇발짝 떨어진 거리에 십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마찬가지로 유별난 차림새로 나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딥니까?"
주눅이 들긴 했지만, 나도 모르게 질문이 튀어 나왔다.
갑자기 그 일행 중 맨 앞에 서 있던 중년 남자가 주문을 외듯 뭐라 중얼거리기 시작했고 다른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후렴구를 붙이는 것 같았다. 전공분야가 아니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중동지역의 고대어 같았다. 문득 그 남자의 중얼거림 가운데 "아후라 마즈다의 이름으로..."라는 구절에 내 귀에 걸렸다. 어느새 나를 에워싼 사람들의 염불에서도 "미트라"라는 아후라 마즈다 신의 아들 이름을 걸러내 들을 수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감을 잡았다. 어느 정도 불길한 예감은 하고 있었지만, 종교집단에게 테러 대상이 된다고 생각하니 진땀이 솟았다. 그들이 입고있는 묘한 제복은 조로아스터 교의 고유 의상인 모양이었다. 내가 역사복원학자이긴 하지만 종교적인 문제와 나의 연구과제가 피곤하게 꼬인 적이 없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그들은 이제 역사복원학자들을 모조리 싸잡아서 배교자로 낙인 찍으려는 것일까?
나를 환영(?)하는 일련의 의식이 끝나자, 일행은 두줄로 나란히 섰고 나는 그 가운데 있었다. 반백의 수염을 멋지게 기른 초로의 제사장 같은 인물이 그 사이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순간 나는 왜 내가 이 자리에 초대받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 초로의 인물 뒤에는 여성 신도 몇 명이 따라 오고 있었는데, 그 중 맨 앞의 인물이 낯선 제복 탓에 처음엔 가물가물했지만 누군지 기억이 났다. 이마...이마 허드서커...그렇다.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내게 경고를 하러 왔던 것이다. 강의 시간에는 마치 그녀가 기성종교의 입장에서 조로아스터 교를 다소 힐난하는 척했지만, 그녀의 속 뜻은 역사복원학에 대한 내 신념을 시험하는데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그녀의 암묵적인 경고에 코웃음쳐버렸고 그 결과 오늘 그들의 만찬에 손님으로 초대받은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나는 손님이 아니라 그들의 만찬꺼리 신세인지도 모르지만...
***
나는 죽지는 않았다. 죽을 만큼 고생하긴 했지만. 다음날 아침 나는 영국 테임즈 강변의 명물인 시계탑의 거대한 분침에 묶인 채로 발견되었다. 내 추측대로 나는 쫄쫄 굶으면서 대서양을 건넜던 것이다. 그들은 나를 때리지도 고문하지도 않았지만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주지 않았으며 경고인지 설교인지 분간할 수 없는 연설을 장황하게 늘어 놓았다. 나는 조로아스터교의 주신 아후라 마즈다를 모독한 벌로 완전히 발가벗긴 채 거대한 시계의 분침에 매달렸다. 내 온 몸에 "조로아스터가 심판한 자"라고 페인트로 씌여 있었다. 물론 저항이라곤 불가능했다. 머리에 피가 몰려 생긴 두통 때문에 깨어나기 전까지는 인사불성이었으니까. 그들이 내게 뭔가를 주사했던 걸까? 딱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들은 밤새도록 교대로 돌아가며 나를 설교했고 아침녁에 나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아무도 내가 거기에 매달려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기에 구조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목청을 돋워 '살려달라'고 외칠 기력도 없었다. 경찰에 따르면, 나를 우연히 발견한 구세주는 관광차 그 아래를 지나는 한 독일부부의 손에 매달린 5살박이 한 꼬마였다고 한다. 그의 예리한 눈에 축복이 있기를!
추운 것까지는 그런대로 참을 만했다. 하지만 분침이 360도 회전하면서 내 머리를 땅 쪽으로 향하게 하는 동안은 머리의 피가 몰려 죽을 지경이었다. 특히 분침이 50분과 10분사이를 오가는 동안 말이다. 만약 그들이 분침이 아니라 시침에다 나를 묶어 두었으면 나는 몇 시간을 못넘기고 뇌출혈로 죽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그 댓가를 톡톡히 치루었다. 내 발가벗은 사진은 포르노 잡지가 아닌, 전세계의 일반언론에 대서특필된 최초의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이 정도 센세이션이면 또다른 역사복원학자가 미래에서 나를 인터뷰하러 올지도 모를 일이다. 역사복원학의 고된 역사를 고증하기 위해 말이다. 아무튼 나는 탐험가로서의 건강체에도 불구하고 기아와 추위에다 기합까지 감수하느라 병원에서 한달 여의 회복기간을 필요로 했다. 조로아스터 교단 쪽에서는 이 사건과의 관련을 강력 부인했지만, 자칭 조로아스터 교의 미래를 개척해간다고 주장하는 모 단체들이 서로 언론에다 전화를 해서 자기들이 한 짓이라고 우겼다. 물론 이 해프닝은 조로아스터 교 산하 여러 강경파들이 함께 공모한 것일 수도 있다. 이마에 대해 조회해보니 이미 휴학계를 낸 뒤여서 종적을 알 수 없었다고 병문안 온 쥬디스 메릴이 귀뜸해 주었다. 이마가 내게 개인적인 악감정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란 건 이해하지만 나는 너무 놀랐고, 배고팠고, 머리가 아팠다.
이 사건의 최대 수혜자는 조로아스터 교도도 이마도, 선정적인 언론도 아니었다. 병실을 줄곧 지킨 내 아내는 내 앞에서는 내색을 안했지만 이따금 구석에서 피식 웃곤 했다. 아내와 나는 한 달 간 하루도 빠짐없이 함께 산책을 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내가 몇년 만에 얻은 가장 긴 휴가를 만끽하고 있었다.
4. 아론 이스마엘
에게 해 동남쪽, 금세라도 소아시아에 착 달라붙을 것 같이 가까이 자리잡은 로도스는 남서쪽에서 북동쪽을 향해 마치 럭비공을 세워둔 듯 떠있는 섬이다. 전체면적은 1500평방 km가 채 안되고, 세로로 가장 길게잡아도 80km, 폭 역시 가장 길게 잡아 38km밖에 안된다. 등뼈처럼 산맥이 달리고 있는데 높은 산이라고 해봤자 1200m높이의 산이 하나 있을 뿐이다.
이곳은 고대로부터 이상적인 기후로 유명한 땅이다. 시가지는 가장 추운 2월에도 섭씨 2도를 밑돌지 않고 가장 더운 8월에도 응달에서는 25도를 넘을 때가 드물다. 양지의 기온이 30도를 넘으면 한여름이다...(중략)...더운 계절에는 시원한 바람이, 추워지면 따듯한 바람이 불어서 로도스 섬의 기후는 온순하다고 정평이 나있다. 산맥에서 흘러나오는 시냇물 덕에 물도 풍부하다...(중략)...
지중해의 낙원같은 이 섬을 인간이 그냥 지나칠 리 없다. 역사시대부터 따져봐도 B.C. 1500년을 전후해서 크레타로부터 온 이주자가 섬의 북부에 살기 시작한 이래 에게 해의 다른 섬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 민족과 더불어 변천을 거듭해온 땅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절에는 마케도니아의 편에 섰는가 하면, 로마 시대에는 귀족들이 학문과 요양을 위해 즐겨 찾는 곳이 되었으며, 1310년에는 이슬람 세력에게 예루살렘을 잃고 방황하던 십자군의 잔여세력인 성요한 기사단에게 그 차례가 돌아온다.
------- 시오노 나나미, 로도스섬 공방전, 한길사, 1998년, 41~44쪽 발췌
장미꽃이 많이 핀다해서 붙여진 이름 로도스, 그러나 이 섬의 새로운 정복자는 부겐빌리아와 하이비스커스다. 그나마 어두운 밤의 장막이 부겐빌리아의 자주색과 하이비스커스의 진홍색 꽃잎을 덮어버렸고 레몬 열매의 노란색만 간신히 그 윤곽을 내비칠 뿐이다.
인부 둘이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진땀을 흘리며 성벽 아래를 파고 있었다. 눈에 띄지 않게, 날이 밝기 전에 그 기록들을 모두 찾아야 한다. 나의 두번째 로도스 유적 발굴은 비밀리에 진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고맙게도 특유의 상쾌한 미풍이 땀이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손을 써주었다.
나와 인부들이 작업하고 있는 곳은 공방전 당시 성문 가운데 하나였던 당부아즈 문에서 성 조르주 성채 방향으로 약 150미터쯤 떨어진 지점이다. 이제는 여기도 성벽 위에 기사들 한 두명이 보초서던 시대와는 사정이 달랐다. 조심 조심 가능한 한 소리내지 않고 성벽 밑을 파들어가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후버라는 친구는 상당히 아는 게 많을 뿐 아니라 추리력도 비상한 수사관인 것 같다. 정확하게 이곳은 아니지만 그가 문헌을 안전하게 숨겨둘 만한 곳으로 성 조르주 성채 부근을 예로 들었던 것을 보면. 그의 말대로 이 부근 성벽은 육백여년 전에 치뤄진 공방전에서도 별 파손을 입지 않고 지금까지 건재하다. 물론 내가 찾고 있는 것은 후버가 찾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이지만.
지난 삼년 간 후버는 별 수단을 다 써본 모양이다. 최근에는 수송과의 모 관리로부터 후버가 시간안전국 국장에게 직접 로도스 공방전 당시로 조사를 떠나게 해달라고 결재를 올렸다가 욕만 먹었다는 후문을 들었다. 나로서도 명예훼손 소송을 심각히 고려해봤지만, 세계정부의 정보기관을 상대로 싸움을 걸어보았자 나만 손해라는 쥬디스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시간안전국의 승인없이 내가 어찌 연구를 위해 과거로 떠날 수 있겠는가.
결국 나는 후버의 스토킹을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이것은 처음에는 오히려 후버의 의욕을 더욱 고취시키는 효과를 낳아서 적잖이 애를 먹었지만, 삼년이 지난 현재 그도 한풀 꺽인 것 같다. 무엇보다 증거가 없지 않은가. 연대가 다른 종이로 만들어졌다는 안토니오의 기록만 제외하고는. 하지만 가령 그게 위서(僞書)라 해도 내 혐의가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게 그의 머리 속에서 맞춰진 정황논리들 뿐이지 않은가.
그래도 감시받으면서 연구를 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 못된다. 그래서 이번 발굴을 위해서 나는 가짜 이름을 쓰고 위조 여권을 아는 친구를 통해 구했다.
"쉿, 조용하라구!"
긴장이 풀어진 인부들에게 다시 내가 주의를 주었다. 이 성벽 뒤는 몇년 전에 지어진 호텔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호텔의 4면 벽 가운데 하나가 내가 올려다 보고 있는 이 성벽이었다. 불필요한 주의를 끌어서는 곤란하다. 대신 인부들에게는 두둑한 사례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뭐가 곡괭이에 닿는데요?"
새벽 4시반, 동이 틀 채비를 갖추는 걸 보면서 예민해져 있던 내 신경이 재빨리 반응했다. 내가 직접 묻었지만 육백년이나 뒤에 와서, 그것도 밤 중에 은밀히 파내자니 시행착오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구덩이의 흙을 손가락으로 파헤쳤다. 여행용 가방만한 돌상자가 나왔다. 서류와 종이들이 비록 노랗게 바래기는 했지만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 있었다. 돌이 습기를 차단해준 덕분이기도 하지만 이 지역의 건조한 기후도 한 몫을 했으리라.
거칠게 묶인 서류철의 먼지를 툭툭 터는데, 갑자기 내 손에 전자수갑이 채워졌다. 황망해하는 나는 아랑곳 없이 인부 하나가 반지에 대고 무어라 중얼거렸다. 반지에 소형 전화기가 들어 있었나 보다. 또 한 친구는 수갑이 잘 채워졌는지 잘 살펴본 다음 내가 성벽에 등을 대고 있으라고 명령했다.
한 오분쯤 그러고 있었을까, 나로서는 참으로 암담하고 철렁한 순간이었다. 잠시 후 차에서 내린 사내의 머리카락은 불규칙한 주파수처럼 하늘로 들쑥날쑥 솟아 있었다. 잠결에 부리나케 달려온 티가 역력했다.
"안토니오 델 카레토, 당신을 시간안전법 위반 및 아론 이스마엘의 살인 혐의로 체포한다."
의기양양하게 떠들어대는 후버의 얼굴보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그를 따라 차에서 내린 여자였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내 연구실을 마음놓고 언제나 뒤질 수 있는 또 하나의 인물이 나 말고 또 한 사람 있다는 사실을 깜빡하고 있었다. 나를 지난 오년 간 챙겨준 조교 바이올 메이크피스 양이 새삼 낯설은 듯 후버의 등 뒤로 표정을 감췄다.
"도둑이 제발저린다고... 내 압박 작전이 주효했지. 결국은 당신이 찾아나설 줄 알았소, 카레토 씨. 밤 고양이처럼 로도스 성벽을 기웃거리다니... 당신의 수가 고작 그 정도 밖에 안되었던 거요? 내가 포기한 줄 알았던 모양이지. 이거 생각보다 실망인데...하하하."
그 문서철을 뒤적이는 후버의 표정은 마치 어린아이 마냥 즐거워보였다. 바이올이 자동차 라이트를 그 쪽으로 맞추었다.
전자수갑은 신축력이 있어 아무리 잡아 당겨도 내 피부에 상처를 주지는 않았지만 두 주먹 사이 거리를 10cm이상 벌릴 수 없게 했다. 인부들까지 후버와 한 패거리인 걸로 보아 그는 내가 집에서 떠날 때부터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한 게 불과하다. 어쩌면 내가 위조 여권을 만들려고 소개받은 그 친구도... 그 친구한테서부터 정보가 새나갔다면 그 다음부터는 내가 아무리 이리저리 교통편을 갈아타고 술수를 부려도 소용이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나는 피식하고 웃음이 나와버렸다.
"아직도 할 말이 남아있는 있다 이겁니까, 카레토 씨?"
"흠, 번지 수를 잘못 짚었네, 홈즈 양반. 내가 밤을 이용해 발굴하려 한 건 자네들 때문이 아니야."
"로도스 공방일지 1522년에서 가을까지라... 모두 열 다섯 권 분량이군. 생각보다 큰 수확인 걸. 엉, 지금 뭐라고 했죠?"
방금 전까지 나의 인부였던 한 사내가 건네준 서류를 받아들면서 후버가 내 쪽을 바라보았다.
"바로 이 벽 뒤에 뭐가 있는지 알고 있나? '로도스 아일랜드 호텔', 이 섬에서 일 이등을 다투는 특급호텔이지. 나, 아론 이스마엘은 1522년 한 해 동안 조사하고 기록한 자료들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다 가지고 올 수가 없었다네. 그래서 상당량을 밀봉해서 급한 대로 바로 이 성벽 밑에다 묻었지. 세월이 지나 아무리 지형이 변하고 사람들이 이곳에 정착하고 떠나기를 반복한다 해도 이 성벽, 특히 당부아즈 문에서 조르주 성채까지 이어진 벽은 자네가 예측했던 대로 잘 보존될 거라도 판단했던 거지. 그 생각은 물론 그리 틀렸다고 볼 수 없네. 지금 우리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시피. 하지만 나로서도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게 하나 있었지."
해가 완전히 떠올라 이제 주위는 환하게 밝아져 있었다. 내가 쓴 기록들을 자신의 가방에 차곡차곡 집어 넣으며 후버는 내 말을 건성으로 듣고 있었다. 이제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 길고 긴 성벽 가운데 하필이면 내가 그 자료를 묻어 놓은 자리의 성벽이 로도스에서 가장 번화한 호텔의 한 쪽 벽이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이곳은 사계절 온난하고 관광객이 많아서 내가 아무리 학문적인 명분을 내걸고 부탁을 해도 호텔측은 발굴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네. 하지만 나로서도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어. 이건 역사학에 기여할 귀중할 기록이니까..."
"얼마나 귀중한지는 필적 감정 전문가가 진단해줄 거요, 카레토 씨."
후버가 나를 뒷좌석에 태우며 말했다.
"글쎄, 내가 지은 죄라고는 이것 뿐일세, 가택침입 및 기물파손죄."
"그것도 추가하지요."
후버가 콧노래를 부르며 대답했다.
***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다시 자유의 몸이 되었다. 호기부리던 후버는 견책을 받고 쥐라기로 파견나갔다고 한다. 그날 밤 찾아낸 문헌들은 내가 써논 것이니 현미경을 들이댄들 꼬투리가 잡힐 까닭이 없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여전히 개운치 않은 표정으로 나를 내보내주던 후버의 얼굴을 생각하면 지금도 일년치 밥먹은 게 쑥 내려가는 기분이다.
후버의 새로운 임무는 공룡 복원학자들 일부가 불법적으로 공룡뼈를 밀반출한다는 혐의를 조사하는 거란다. 하지만 오히려 그는 스테고사우르스가 공룡학자를 먹어치우고 공룡학자로 둔갑해 우리시대로 돌아올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지는 않을까...
후버가 티라노 사우르스의 고함에 놀라 불면증에 시달릴 즈음 나는 시간안전국에서 돌려받은 문헌들을 정리해서 로도스 섬 공방전을 주제로 한 심포지엄을 한 차례 열었다. 발표는 대성공이었다. 최근 들어서는 조로아스터교를 비롯한 기성 종교들의 지도자들과 역사복원자들이 한데 모여 발전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회담을 추진 중이었다. 그로 인한 화해 무드는 내가 마음 놓고 가족과 함께 외딴 바닷가에서 모처럼 휴가를 즐길 수 있게 해주었다.
***
아들 녀석과 아내가 해변에서 비치볼 놀이 하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비치의자에 반쯤 잠들어 있었다. 돌연 인기척을 느꼈을 때 나는 그 사람이 불청객이란 것을 눈을 뜨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아내와 아들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리고 있었으므로. 그 불청객은 내 옆의 비치 의자에 선뜻 앉았다. 마지 못해 나는 눈을 떳다. 흰 양복을 단정하게 입은 사내가 나를 찬찬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보다 열살 쯤 많아 보였지만, 눈에서 나오는 빛에 나는 순식간에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다.
"이스마엘 교수?"
"그렇습니다만..."
나는 엉거주춤 일어나 앉으며 자세를 고쳤다.
"같이 좀 걸을 수 있을까요?"
"또 뭡니까? 두번째 셜록 홈즈요, 당신이?"
나의 퉁명스런 대답에 그는 빙긋 웃더니 플라스틱 디스켓 하나를 내밀었다.
"그 안에는 당신이 11년 전 한국의 모 병원에서 인종성형 수술을 받은 일체의 기록이 담겨 있소. 자, 이 정도면 나와 기꺼이 산책할만한 선물이 되지 않을까요?"
잠시 입을 벌린 채 나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갑자기 아내와 아들의 목소리가 갑자기 우주 저편으로 사라지는 에코오처럼 아득하게 들렸다.
"나를 직접 체포하러 오기에 좀 지체높으신 양반 같군요."
고개를 떨군 채 내가 말했다.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이 단번에 산산조각나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결국 내가 패배한 것인가.
"그건 당신의 비밀을 간직한 유일한 자료요. 병원의 원본 데이터는 지워졌으니까. 이건 단지 내 말이 거짓인지 확인해보라는 뜻으로 준 것 뿐이오."
다시 한 번 망치로 한 대 맞은 기분이 된 나는 받아들은 디스켓을 만지작거리면서 그 신사가 말하는 뜻을 되새김질 했다.
"자네가 파놓은 덫에 그 친구 잘도 넘어가더군. 만일에 대비해서 또 다른 알리바이를 11 년 간이나 묻어놓고 기다리다니, 후버도 끈질겼지만 자네도 대단하이."
그는 일어나면서 아내와 아이가 놀고 있는 쪽과는 반대 방향을 가리켰다. 약간 고풍스런 흰 색 중절모가 그의 풍성한 반백의 머리결을 덮어 주었다. 나 역시 따라 일어섰다.
"사실 이번에 발굴된 문헌자료들은 언제고 꺼내려던 거였습니다. 호텔측의 발굴 허가가 순조롭지 않아서 차일피일 하던 처지에 후버가 자꾸 들쑤시니까 결행을 했던 것에 불과합니다."
"아무려면 어떻소, 이제 정말 자유인데..."
인적이 드문 바위 언덕 위에서 그가 멈춰섰다.
"무슨 뜻입니까?"
그는 수평선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세월의 무게도 이 사람만은 빗겨가나보다. 중년의 끝에 서있는 그의 표정에는 세상을 손에 넣은 듯한 만족감이 흘러 넘쳤다. 그는 수평선 끝에 닿을 듯한 구름에 시선을 둔 채로 말했다.
"그 친구, 아직 자넬 포기하지 않았다네. 하지만 이젠 더이상 자넬 괴롭히진 않을 걸세."
"네?"
"그 친구, 의욕이 좋은 건 알겠는데, 어지간히 성가시게 굴어야지."
"쥬라기로 파견나갔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만..."
"내가 귀환 장치의 데이터를 약간 휘저어놨지. 그가 귀환하려다 어느 시대로 나뒹굴게 될지는 나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니까."
계속 뚱단지 같은 소리만 하는 그 앞에서 나는 상황을 이해할 시간이 필요했다. 바짝 긴장을 해서인지 머리가 약간 아파왔다. 나는 바위 그루터기에 앉았다. 그 신사는 멀리서 비치볼을 주고 받고 있는 나의 아내와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안토니오 델 카레토... 자네 역시 적응을 잘하는 편이군."
"시간안전국에서 당신을 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요. 거물인가요?"
"거물이라... 글쎄 난 요즘에는 꽤 소박해져서... 현재 직함은 시간안전국을 총괄하고 있는 국장일세. 뭐, 옛날에는 몇개 대륙을 다스려본 경험도 있지만..."
"네?"
"어차피 이스마엘 흉내내느라 역사 공부 좀 했을테니 내 옛 이름 정도는 기억하고 있겠지?"
나는 바다 저편으로 디스켓을 집어던졌다. 이제 나의 아킬레스 건은 염화나트륨과 염화 마그네슘를 뒤집어 쓰고 22세기에서 아예 사라지는 것이다.
"당신이 누군데요?"
그는 눈을 지그시 감더니 한자 한자 소중한 기억을 되살려내는 듯한 투로 말했다.
"알렉산드로스, 알렉산더 대제... 내게도 한 때 이스마엘 같은 학문만 아는 멍청이가 찾아온 적이 있었지. 나를 직접 눈 앞에서 연구한답시고 말이야. "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나보다 선배가 있으리라고는 꿈조차 꿔본 적이 없었다.
"나와 그 학자는 거래를 했지. 서로의 역할을 바꿔보기로. 나는 떠나기 전에 그를 섭정으로 앉혔지. 그에게는 직접 고대사회를 통치하는 노하우를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 그 무렵 난 내 절친한 친구 헤파에스티온 Hephaestion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었거든. 나에게도 재충전이 필요했지. 하지만 결국 난 돌아갈 수가 없게 되어버렸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역사를 보면 내 부하들이 그 친구 말을 잘 안들었던 모양이야. 그는 불과 며칠을 못 버티고 미이라로 만들어졌어. 그리고 내가 요절했다고 온 천하에 공표되었지. 그의 미이라는 3백 년이 넘도록 내 이름을 딴 도시에서 신으로 추앙받으면서 내 행세를 했다니까 그에게 너무 섭섭한 일만은 아니지. 아무튼 그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나도 이 시대에 눌러 살게 됐지 뭔가. 그 때야 알렉산드로스라는 이름으로는 타임머신을 이용할 수 없었으니까. 이제 와서는 시간안전국을 내 손 안에 움켜쥐었지만..."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천년이 넘도록 세상을 호령하고 있는 사나이의 눈에서 꺼지지 않는 불꽃을 보았다.
"그럼, 왜 다시 돌아가지 않습니까?"
내 물음에 알렉산드로스는 살짝 윙크를 하면서 장난스런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이제 대륙이 아니라 모든 시간을 지배하거든."
(끝)
0
독자님의 정보를 입력해주세요.
* 는 필수항목입니다
첨부파일은 최대 3개까지 가능하며, 전체 용량은 10MB 이하까지 업로드 가능합니다. 첨부파일 이름은 특수기호(?!,.&^~)를 제외해주세요.(첨부 가능 확장자 jpg,jpeg,png,gi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