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2217년 9월 14일- 서울 I*C 삼성동 구 코엑스 아케이드
코엑스 아케이드 ‘계곡 길’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아셈 병원에서 환희에 찬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셈 병원의 병원장이자 유일한 의사이며 파파의 주치의인 ‘폴 그린그래스’는 양손을 흔들면서 병원에서 뛰쳐나왔다. 폴은 근처에 있던 자경단원을 붙잡고는 소리쳤다.
“파파에게 전해! 전일기가 깨어났다고 말이야!”
잠시 어안이 벙벙해 있던 자경단원은 폴의 말을 이해하고는 빙그레 웃으며 소식을 전하기 위해 뛰어갔다. 자경단원의 소식을 전해들은 파파는 한달음에 아셈병원으로 달려왔다. 폴은 득의만면한 미소를 지으며 파파를 맞아들였다.
“그렇게 헤매더니 도대체 어떻게 한 건가?”
폴은 자신의 둥그런 안경을 고쳐 쓰고는 아셈병원의 안쪽으로 안내하며 설명을 시작했다.
“흔히 말하곤 하는 인식의 전환인거지. 전일기의 몸을 면밀히 살펴보니 심장 박동에 따라 손목이나 발목의 맥은 뛰는데 관자놀이의 맥은 뛰지 않는 걸 발견 한 거야, 사실 그럴 수 없는 거거든? 아무리 뇌사라고 해도 혈류가 통하지 않는 건 아니니깐. 그러고 보니 목 위쪽으로 통하는 동맥이 완전히 막혀 있더라고, 그래서 안색이 이렇게 파리했던게지. 일종의 on/off 스위치랄까? 어차피 규소로 만들어진 뇌세포는 산소와 장시간 접촉 못했다고 괴사하지는 않으니깐 이렇게 동맥을 막아서 두뇌를 비활성 상태로 만들어 놓는 거지.”
폴의 설명이 끝날 때쯤, 파파는 초점 없는 눈으로 천정을 응시하고 있는 전일기와 마주 할 수 있었다.
“그새 일어나 앉아 있었군.”
폴은 전일기에게 다가가 조그만 손전등으로 눈을 비쳐보았다. 강렬한 빛이 동공을 찌르자 전일기가 눈을 질끈 감았다. 폴은 전일기의 뺨을 툭툭 치며 말했다.
“어이 정신 차리세요. 여기가 아직도 청와대인줄 아시나?”
외부의 자극에 초점이 돌아온 전일기는 황급히 몸을 움츠리려다 침대에서 떨어졌다. 전일기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뭐, 뭐야!? 여긴 어디지? 사후세계인가?”
파파는 전일기에게 다가가 차근히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울 거 알고 있소. 진정하고 설명을 좀 들어주기 바라오. 당신이 해줘야 될 일이 있으니깐.”
파파는 전일기에게 의복을 가져다 입히고는 의체로 갱신하는 게 실제로는 어떤 의미인지 알려주기 시작했다. 해마기관의 적출과 이식 수술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런 비리를 폭로하기 위해 당신을 구했노라고 말했다.
“그러니깐 당신이 청와대나 방송사에 가서 모습을 노출하는 것만으로 많은 사람이 이 사태의 전말을 이해할 수 있을 거요.”
파파의 얘기를 침착하게 듣던 전일기는 허탈한 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하하, 그렇게 된 거였군. 어째 내가 아직도 살아있다 했더니.”
“……?”
“그쪽 뭐, 파파라고 했나? 당신이 한 얘기 중에 나에게 새로울 얘기가 하나라도 있을 거라 생각했나?”
“무슨 소리?
파파의 안색은 어느 새 파리해져 있었다.
“우리는 애초에 알고 있었어.”
“우, 우리라면 누구말인가?”
“위정자들이지. 우리는 듀갈과 계약을 했던 거야. 파파, 듀갈의 애초 의도는 영혼을 축출해서 이식하는 거였지. 듀갈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영혼의 존재를 규명하려 했지만, 이원론을 물리적으로 풀어내는 것은 무리였지. 결국 그의 최종적인 결론은 애초에 수정란의 상태에서 영혼이 존재했을 리는 없으니 영혼이란 것은 장기간의 경험과 감정의 누적에서 자연 발생되는 무엇이라는 거였어. 그래서 그는 그 장기간의 경험과 감정의 누적이라는 것을 의체에서 복구 시키는 방법을 생각해냈어. 타락하긴 했지만 그는 역시 천재였지.
갱신 시에 걸리는 32일이라는 시간이 뭘 의미하는지 알고 있나? 그건 꿈꾸는 시간이야, 한쪽이 끝없이 이어지는 꿈을 꾸는 동안 다른 한쪽은 그 꿈을 통해 경험과 감정을 받아들이지. 꿈이란 건 경험과 감정의 집약체니깐 그의 해답은 유효했어. 듀갈의 의도는 성공했지만, 그는 영혼이 둘이 되어버리는 결론에 혼란을 느꼈어. 그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영혼이라는 게 유일무이한 하나라면 갱신이 끝난 순간, 어느 한쪽은 영혼이 없다고 말할 만한 상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야.
그의 오랜 고민의 결과는 결국 복제인간에 불과 했지. 그것도 기존의 복제인간이 가지는 결함들을 완전히 제거한 복제인간 말이야.”
파파는 마치 면도날을 삼킨 듯이 숨쉬기가 힘들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파파는 물었다.
“도, 도대체 왜 그 모든 것을 알면서 사람들을 속이는 거지? 당신 지금까지 9차례 갱신했지? 지금까지 당신은 9번 죽은 거야! 그 사실이 끔찍하지 않아?”
전일기는 그걸 모르냐는 듯이 말했다.
“끔찍하지, 의회가 나에게 갱신을 권하는 순간을 기억해. 그들의 눈빛은 너무나 고요했지. 그 어떤 살의도 보이지 않았어. 하지만 원망하지 않아. 우리 모두는 그 룰을 지키기로 맹세했으니깐.
이봐, 파파, 당신도 사람들을 다스리고 있으니 알거야. 대중이란 게 얼마나 무지한 존재인지. 그들이 그들을 다스리는 위정자들이 다 전 세대의 그들의 지지를 받았던 인물의 복제에 불과하단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혼란이 발생할까? 너무 끔찍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파파, 그런 사소한 감정만 배제하면 이 사회가 얼마나 발전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봐. 아직은 170세 정도가 최고기록이지만, 이 연령은 계속 늘어날 거야. 400년, 800년 뿐 아니라 1000년도 가능하겠지, 1000년을 산 인간의 지혜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줄까? 궁금하지 않아?“
파파의 창백해진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전일기의 얼굴은 열기로 달떠있었다. 파파는 심적인 타격을 받아서인지 거센 기침과 함께 각혈을 하였다. 활기차게 떠들던 전일기는 어느 순간 말을 멈추고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점차 식어가는군, 의체의 수명이 다한 모양이야. 지금의 기분을 말해줄까 파파? 이 육체는 19년을 살았지만, 지금 이 순간, 난 160년을 회고할 수 있어. 그 사실이 기뻐. 거짓되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말을 마친 전일기의 머리가 천천히 숙여졌다.
18.
2217년 9월 17일 - 서울 I*C 서울아산생명연구원
공교롭게도 큰할아버지의 장례식이 진행 중인 곳은 서울아산생명연구원이었다. 진석은 자신이 온 길을 되짚어 돌아가는 무인택시 안에서 자신의 외할아버지에 관해서 생각했다.
길가에 놓인 가로등이 기나긴 빛의 실타래가 되어 차창 밖을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진석은 옆에서 불안해하는 경아의 손을 꼭 잡으며 머릿속을 정리해보려 애썼다.
서울 시내의 집값은 서울시가 세계적으로 특화된 몇 개 안되는 도시가 됨에 따라 지방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높아져 있었다. 그 서울에서 살며 진석은 지방에 큰 수입도 안 되는 병원을 세우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외할아버지의 보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진석은 외할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자신이 결코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외할아버지의 죽음이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진석은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에게 무척 많은 사랑을 받았었다. 외할아버지에게는 손자가 4명이 더 있었지만, 어찌 된 까닭인지 진석을 가장 아꼈다.
진석은 레일로드에 다리가 절단되는 사고를 당했던 11살 때까지는 부모님보다는 외할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진석이 사고를 당한 후, 부모님은 치료보다는 의체로 몸을 갱신하는 쪽을 택했고, 간단한 응급처치와 봉합 후에 그는 11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최초갱신을 하게 되었다.
그런 외할아버지의 죽음이 슬프지 않을 리 없었지만, 우선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진석은 그런 자신이 불합리하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어릴 적의 감정을 불러내서, 감정을 조성한다는 행위도 그저 자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금 그에게는 그것이 필요했다.
진석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에 무인택시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장례식장은 매스컴과 조문객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매스컴은 존 듀갈 박사와 함께 불멸의 시대를 연 강원택 박사에 대한 기사를 누구보다 빨리 전하기 위해 곳곳에서 떠들어 대고 있었다. 진석과 경아가 차에서 내리자 그를 알아본 방송기자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카메라의 렌즈와 사람들의 눈이 몰려들자 진석은 부담감을 느꼈다. 기자들은 진석과 거리가 조금이라도 확보되는 순간 마이크를 들이대고는 마구 질문을 외쳤다.
“강원택 박사와의 추억 중에 특기할 만한 게 있나요?”
“두 분 사이는 좋은 편이었나요? 강원택 박사는 회고록에서 하진석씨를 가장 많이 언급했습니다만…….”
“강원택 박사가 필멸을 고수한 이유를 알고 계시나요?”
“강원택 박사의 재산이 미화달러로 100억에 달한다는 데 사실인가요?”
진석은 어느 마이크에 어떤 대답을 해야 되는지 전혀 알수 없었고, 그다지 대답해 줄 의무를 못 느꼈기 때문에 경아의 손을 잡고는 재빨리 포토라인 너머로 넘어갔다.
기자들의 출입이 제한된 생명연구원 내부는 밖과는 대조적으로 매우 고요했다. 사회 각계 인사가 보낸 화환과 조문깃발이 장례식장으로 가는 복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화환의 이름 중에는 전일기 대통령을 필두로 한 국내의 정치인들 뿐 아니라 동양의 풍습을 존중한 외국 유명 인사들도 다수 있었다.
그가 장례식장에 들어서자 오랜 시간 못 봤던 일가의 친척들이 그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장례식이라는 것 자체가 워낙에 생소한 행사이다 보니 상복조차 챙기지 못한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고 절하는 순서를 몰라 누군가가 하면 기웃거리며 주춤주춤 따라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다만 진석은 얼마 전에도 박영감의 장례식을 다녀왔기 때문에 예절을 무리 없이 지킬 수 있었다. 경아와 진석이 영정에 조문하고 분향실을 나오자 경아는 아는 친척들에게 가서 간만에 정담을 나누었고 진석은 자신에게 다가온 청년에게 말을 걸었다.
“오셨어요. 외삼촌.”
“잘 지냈냐? 아직 아이는 없고?”
20대 초반의 청년의 모습을 하고 외삼촌을 바라보며 진석은 위화감을 느꼈다. 외삼촌은 그에게 아버지가 고집을 부리시더니 이렇게 가신다며 한탄 비슷한 이야기를 하다가 다른 친척들에게 자리를 이동했다. 외삼촌은 자기보다 어려 보이는 청년을 보더니 ‘작은 아버지’라며 유쾌하게 반겼다.
얼마 전만 해도 박영감의 장례식을 갔다 온 진석에게 이런 풍경들은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젊은 청년과 여자들만 가득한 장례식장에서 어색하게 웃고 있는 외할아버지의 영정사진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마치 고아들 같군.”
진석은 씁쓸하게 내뱉었다. 그때 그의 등 뒤로 둔탁한 무엇인가가 그를 지그시 눌러왔다. 진석이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려 하자 강력한 힘이 그의 어깨를 눌렀다.
“가만히 있어, 하진석. 안 믿을지 모르겠지만, 자네의 등을 겨누고 있는 것은 총이야. 확인해보고 싶나?”
진석은 당황스러웠지만, 확인은 나중에 하기로 했다.
“좋아, 꽤 신중한 편이군. 자 이제 자연스럽게 문으로 이동해.”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은 채 진석은 장례식장의 출구로 갔다. 그런 그를 외삼촌이 멀리서 불렀다.
“진석아, 어디 가냐? 설마 벌써 돌아가는 건 아니겠지?”
진석의 뒤에 있던 괴인은 어깨를 짚고 있던 손에 힘을 푸는 대신 총구로 진석의 등을 더욱 압박했다.
“아니요. 친구가 와서요. 잠깐 나가서 얘기 좀 하다 올게요.”
“네 앞으로 남기신 유서도 있으니깐 유서 공개 전에 돌아와라.”
괴인은 배짱 좋게도 외삼촌을 향해서 살짝 웃어보이고는 진석을 더욱 재촉했다. 둘은 장례식장을 나와 병원의 외곽으로 빠졌다. 경아가 뒤늦게 남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눈치 채고 진석의 이름을 부르며 장례식장을 헤맸지만, 진석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19.
현대에 가장 유명한 여성을 꼽으라면 누가 뭐라 해도 첫 순으로 실리카 루시(Silica lucy)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최초의 인류라고 알려진 루시(Lucy)에게서 이름을 빌린 이 여성은 그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실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듀갈 박사가 전신일괄대체재를 발표하면서 처음으로 그 이름이 언급된 이후로 언론은 실리카 루시의 정체에 과도하다고 할 만한 관심을 기울였지만, 듀갈 박사는 그 어떤 힌트도 주지 않았다. 이후로는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실리카 루시가 최초의 의체인으로서 듀갈 박사의 논문에 등장하기는 하지만, 설명의 유용함을 위해 가상으로 만들어진 인물이 아니겠느냐 하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최초의 의체인인 실리카 루시는 실존하였고, 그 이름은 키요시키 아나벨이었다.
키요시키 아나벨은 신의주 가압경수로폭발사고에 자원으로 갔다가 6시버트에 이르는 방사선에 장시간 노출 되었고, 세포가 이상 증식하는 질병을 안게 되었다. 듀갈 박사는 자신에게 시련을 내리는 신을 원망했지만, 아내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최초의 인체대체재인 실리카 알파(Silica alpha) 이후로 멈춰있던 그의 연구가 다시 진전되기 시작했고, 규소생명체로는 도달불능점이라고 알려진 뇌세포와 시신경, 그리고 골수 등을 차례로 성공시켰다. 그리하여 듀갈은 그의 아내의 유전정보를 바탕으로 재현된 최초의 의체 실리카 루시(Silica lucy)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듀갈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아나벨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고, 미처 임상실험도 하지 못한 의체 갱신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듀갈 자신에게는 지옥과도 같았던 32일의 시간이 지나고 실리카 루시는 깨어났다. 그리고 그의 아내 아나벨 또한 깨어났다. 짧은 순간에 교차하는 행복과 절망, 듀갈은 두 여인에게 서로의 존재를 차마 알릴 수 없었다.
듀갈은 아나벨에게는 실험이 실패하였다고 하였고, 루시에게는 실험이 성공하였다고 하였다. 이 둘 사이를 오가면서 듀갈은 자신의 정신이 갈가리 찢겨져 나가는 것 같다고 느꼈다. 둘은 건강문제를 제외하고는 너무나 똑같았고 듀갈 자신도 루시에게 있을 때는 아나벨을 잊었고 아나벨과 있을 때는 루시를 잊었다. 아나벨은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오래 살았다. 루시가 태어난 이후로도 10여년을 더 살았던 아나벨이 죽던 날, 듀갈은 그녀의 죽음에 안도한 자신에게 크게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20.
2217년 9월 17일 - 서울 I*C 서울아산생명연구원
괴인은 지하의 배전실로 이동하고는 여전히 총을 겨눈 채 전깃줄을 던져주며 말했다. 진석은 그제야 겨우 돌아서서 괴인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외꺼풀의 눈이 냉정한 인상을 주는 사내였다. 그리고 진석은 그와 동시에 그의 손에 들린 묵직한 질감의 총 또한 확인 할 수 있었다.
“알아서 다리 묶어, 묶고 얘기를 좀 해보자고.”
“이봐요. 돈이라면 드릴 테니 이러지 맙시다.”
“조용해, 하진석, 내가 강도 따위로 보이나? 얼른 묶어.”
진석은 다리를 묶으며 볼멘소리로 말했다.
“아니 강도도 아니라면 도대체 뭐 때문에 이러는 거요? 내게 이럴 이유가 없잖소.”
하진석이 다리를 묶자 괴인은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물었다.
“좋아 하진석, 내게도 그리 시간이 많지 않으니, 빨리 빨리 묻도록 하지. 7월 22일 날 어디서 무엇을 했나?”
“뭐요? 지금 취조라도 하는 거요? 당신 경찰이요?”
“우선은 경찰이라고 해두지, 크게 틀린 것도 아니니깐, 그러니깐 어서 대답해 하진석, 7월 22일 날 뭐했나?”
“7월 22일이라면, 평일이니깐 천안에서 진료를 보고 있었을 거요.”
괴인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고는 다시 물었다.
“거짓말이 서툴군. 내가 말해주지. 하진석, 당신은 7월 22일 서울국제역에서 자신의 홍채를 복사해달라고 렌즈거래상한테 부탁했어! 아닌가?”
진석은 너무나 생뚱맞은 소리에 언성을 높였다.
“아니 무슨 소리요! 서울국제역에는 근처에도 간 적 없소!”
“웃기는 군, 분명히 렌즈거래상은 본인의 홍채를 복사해 갔다고 했어. 말해 하진석, 전일기는 어디에 빼돌린 거지?”
진석이 미처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을 때 괴인의 등 뒤로 다가온 또 다른 그림자가 괴인의 머리에 시커먼 장총을 겨누었다.
“거기에는 내가 대답해 줄 수 있을 거 같군, 이성찬 검사.”
“아하, 이건 또 뭐야?”
이성찬은 혀를 차며 총을 내려놓았다. 별안간 장총을 겨눈 청년이 장총의 개머리판으로 이성찬의 머리를 내리 찍었고, 이성찬은 별다른 저항도 못한 채 풀썩 쓰러졌다. 청년은 하진석에게 물었다.
“선택하시오. 개머리판으로 찍힐 건지, 순순히 눈을 가리고 따라올 건지.”
이쯤 되자 진석은 오늘의 운세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후자로 하지요.”
청년은 만족한 듯 웃고는 검은 천을 던져 주었다.
“그걸로 눈을 가리시오.”
진석이 눈을 가리자 여러 개의 발소리가 주변을 어지럽게 오가더니 누군가 그의 다리를 풀어 일으켜 세우고는 팔짱을 끼우고 이동했다. 주변의 소리를 들어보니 이성찬이라고 불린 검사도 들어 옮겨지고 있는 듯 했다. 배전실로 들어오던 길을 다시 돌아나가자 마자 진석을 안내하던 손길이 진석의 머리를 푹 눌렀고 진석은 머리를 숙인 채 차에 올라탔다.
어딘가로 차는 달리기 시작했다. 진석은 많은 것을 알 수는 없었지만 이 자동차가 수소자동차라는 것과 달리고 5분이 채 안되어 검은 천 너머로 먹먹하게 느껴지던 빛이 사라진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지하인 것 같았다. 그렇게 2시간쯤 달리고 자동차는 멈춰 섰고, 진석은 차에서 내려 또 한참을 걸어 들어갔다. 미미하지만 다시 빛이 느껴지고 있었다. 차갑고 딱딱한 질감과 구두에 부딪쳐 울리는 소리가 아무래도 바닥은 대리석 같았다. 진석이 기다림에 지쳐 안대를 풀어줄 것에 대한 기대를 슬슬 접을 때쯤 아까의 청년이 ‘도착했다’라고 말하며 진석의 안대를 벗겨주었다. 홍채의 조리개가 어찌나 급속히 줄어드는지 눈이 뻐근해질 지경이었다. 진석이 정신을 차리고 앞을 살피자 병색이 완연한 한 노인이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군, 하진석.”
진석은 하루 동안 두 번이나 낯선 인물들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대자, 강원택의 외손자란 자리가 참으로 대단하구나라고 생각했다. 노인은 어딘가 낯이 익었고, 노인도 진석에게 그 사실을 주지시켰다.
“그쪽도 날 보는 게 처음은 아닐 텐데, 기억나지 않나보지?”
진석은 눈을 가늘게 뜨며 노인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지금은 좀 몸이 쇠해지긴 했지만, 노인치고는 여전히 강건한 체격이었다.
“아, 그 외할아버지 주택에서 보았던……,"
“기억이 났나보군, 그보다 내 얼굴을 보면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나?”
진석은 노인을 아무리보아도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대답은 의외의 반향에서 들려왔다.
“끄응, 당신. 하진석이군.”
이성찬의 목소리였다. 하진석과 함께 끌려온 이성찬이 정신을 차리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진석은 뒤를 돌아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뭘 새삼스러운 척 부르는 거요?”
“정말 눈썰미 꽝이로군, 당신 말고 저 노인네 말이요.”
“뭐?”
그제야 진석은 노인의 얼굴이 자신의 아버지와 닮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검사 양반도 깼군. 좀 거칠게 모셔오게 됐지만 이해하라고, 우리의 뒤를 캐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설마 진석이에게까지 갈 줄은 몰랐어. 그 유능함은 칭찬해주지.”
“별말씀을, 결국에는 완전히 헛짚은 거였잖소. 그보다 의체복제라는 게 대단하긴 하군, 일란성 쌍둥이도 서로 다른 홍채까지 완전히 같았다니. ”
“듀갈은 ‘같다’라는 것에 광적으로 집착했으니깐.”
“어딘가 이상하긴 했지, 아무리 봐도 이 하진석은 오늘 내 총을 본 게 처음인 거 같았거든, 그래도 단서가 달랑 이거 하나니 한번 찔러봤는데, 허탕은 아닌 거 같군. 전일기 대통령은 어디 있나? 하진석.”
전일기 대통령의 이름이 언급되자 노인의 얼굴은 눈에 띄게 침울해졌다. 그러자 옆에 있던 둥그런 안경의 외국인이 대신 대답했다.
“전일기는 의체의 수명이 다해서 죽었다. 어쨌든 갱신은 의체의 수명이 다해 갈 때 하는 것이니깐 이상할 것 없지.”
이성찬은 허탈한 표정으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뭐야, 전일기 대통령을 국회에 데리고 가서 한바탕 뒤집어 줄 생각이었는데, 내 유일한 조커가 먹튀가 되버렸군.”
진석은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부랑자 같은 괴인은 검사였고, 눈앞에 있는 노인은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대통령은 죽었다고 한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진석이 혼란에 빠져 있을 때 노인이 진석을 불렀다.
“하진석, 이걸 기억할 수 있겠나?”
노인은 자신의 바지를 걷어 올려 양 무릎을 보여줬다. 절개선이 희미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힘들었지만, 노인의 다리는 무릎 아래로 인체대체재였다.
“11살 때였지 아마? 굴러간 연보라색 공을 좇다가 레일에 발이 끼어 버린 게 말이야.”
진석은 눈을 부릅떴다. 그러고 보니 노인의 얼굴은 아버지보다는 자신을 닮아 있었다. 만약에 자신이 의체를 사용하지 않고 자연스레 늙었다면 바로 저 노인의 얼굴이 됐을 터였다. 그러나 진석이 스스로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인지하기는 무리였다. 한 번도 의심된 적 없는 진리가 처참한 소리를 내며 무너지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주지 하진석, 자네가 자내 머릿속에 있다고 믿고 있는 해마기관은 바로 내 머릿속에 있어. 전 인류를 상대로 한 대단한 사기극이었지. 의체갱신은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켜주는 기술이 아니라 단순히 인간을 복제하는 기술일 뿐이었던 거야. 알겠나?”
불과 하루 전에 갱신을 끝마친 진석은 속이 메스꺼워 지는 걸 느꼈다. 진석은 바닥으로 위액을 토해냈다. 지난 세월 동안 그가 갱신을 하기 위해 병원에 들어서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때그때 분명히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경아와의 결혼이 기억났고, 경아와 함께 한 신혼여행에서 본 그랜드 캐년의 일출도 생각났다. 그 뿐 아니라 박영감의 죽음도 기억이 났다. 싸늘한 시선을 눈앞에 두고 했던 생각들도 기억났다. 모든 게, 이상하리만치 모든 게 기억났다. 그러나 이 순간 진석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과연 그 자리에 있었는가?’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진석은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그래서 나에게 바라는 게 뭐지? 이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 나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주는 이유가 뭐야?”
노인 하진석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네 의체가 필요하다. 하진석, 난 얼마 안 있으면 죽을 몸이야. 길어야 두 달을 살까 말까하지. 그렇지만 난 아직 죽을 수 없어. 그래서 자네가 내가 되어줬으면 하는 거야.”
“싫다면?”
“거부권은 없어. 하진석,”
“갱신해봤자, 그게 수명의 연장이 아니라는 건 그쪽이 더 잘 알지 않나?”
“물론, 잘 알고 있지. 그러니 억울하게 생각하지 마, 죽는 건 나야. 다만 난 나를 대신해 줄 사람이 필요해. 우리가 하는 건 우리의 조상들이 그랬듯이 누군가의 뜻을 이어받고 유지를 이어가는 행위일 뿐이야. 갱신이랄 것도 없지. 우리는 늘 이런 식으로 살아왔으니깐.”
“궤변이군.”
“상관없어. 폴, 의체 갱신기를 준비해주게.”
“그러지, 하지만 파파, 결과는 누구도 장담 못해. 이미 자아가 자리 잡은 의체에 또 다른 자아가 유입되면 양 쪽이 충돌을 일으켜서 소멸 될 수도 있어. 백치가 되어버린다고.”
58년 동안 자신의 이름 없이 파파라고 불려온 하진석은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을 수도 있는 거겠지?”
“뭐, 모르는 거니깐.”
폴은 노인 하진석의 뒤로 가더니 벽이라고 생각되던 곳을 열고 들어갔다. 노인 하진석은 진석에게 물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지금이 마지막일지 아닐지는 좀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말이야.”
“그럼 좀 더 두고 보고 말하도록 하지.”
진석은 저항할 수 없었다. 아니 저항해야 될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자신은 복제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자꾸만 머리를 맴돌았다. 그것도 무려 7번이나 반복적으로 계속되어 온 복제 아닌가? 어디서 어떤 손실이 생겼어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자경단원이 진석을 일으켜 세웠고 노인 하진석과 진석은 폴이 들어간 방으로 들어갔다.
21.
존 듀갈 박사가 생전에 남긴 수많은 글 중에서 가장 유명한 글이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속칭 ‘불사(不死)의 변(辯)’이라고 불리는 의체품질보증서의 서문이고, 또 하나는 불사의 변을 스스로 논박했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필멸(必滅)의 변(辯)’이라는 그의 유서이다.
불사의 변이 일종의 매뉴얼로서 누구나 볼 수 있게 배부된 것에 반해 그의 유서인 필멸의 변은 그의 친우인 강원택 박사에게만 공개되었기에 사람들은 필멸의 변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 너무나 궁금해 하였다. 인터넷에는 주기적으로 ‘필멸의 변’이 공개되었다는 오보가 나왔고, 몇 번인가는 꽤 그럴싸한 ‘필멸의 변’이 올라오기도 했다. 하지만 강원택 박사는 사람들의 부산스러운 소란에도 불구하고 ‘필멸의 변’에 대한 일언반구의 말도 전해주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세계적인 인물인 듀갈 박사의 유언은 인류 공동의 유산이라고 봐야 된다며 강원택 박사에게 공개를 요구했지만, 강원택 박사는 ‘듀갈 박사의 뜻을 존중해 달라.’라는 한 마디로 거절했다. 결국 그렇게 필멸의 변은 일종의 도시전설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80여 년의 세월이 지나 강원택 박사마저 노환으로 세상을 뜨게 되자, 사람들은 다시 ‘필멸의 변’의 행방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강원택 박사의 유언공개는 거의 첩보전을 방불케 했다. 도청장치는 물론이고, 문상객으로 위장한 기자들이 장례식장에 넘쳐났다. 그러나 유언 공개가 끝난 후에도 ‘필멸의 변’의 행방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과연 ‘필멸의 변’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22.
2217년 10월 19일- 서울 I*C 삼성동 구 코엑스 아케이드
구 코엑스 계곡길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아셈병원에서도 뒤로 한참을 들어 가야하는 방안에서 하진석은 깨어났다. 깊고 구불구불한 통로를 지나 눈앞에 빛이 닥쳤다고 느낀 순간, 하진석은 짜고 따스한 욕조의 물속에서 몸을 벌떡 일으키고는 거세게 기침을 했다. 하진석은 눈앞에 붙어 있는 안대를 떼어냈다. 타월로 몸을 대충 닦은 그는 주변을 살폈다. 방안에는 시큼하고 쾨쾨한 냄새가 잔뜩 고여 있었다. 하진석은 자신이 있던 욕조의 바로 옆에 있는 욕조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노인 하진석이 죽어 있었다. 죽은 지 일주일은 된 거 같았다. 물은 노인 하진석의 토혈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물끄러미 노인의 시체를 바라보던 하진석은 한쪽에 놓여있는 옷을 챙겨 입고 문을 나서려 했지만 문이 뭔가에 막혔는지 잘 열리지 않았다. 한참을 어깨로 밀어치자 그제야 뭔가가 주르륵 밀리며 문이 열렸다. 밖으로 나서던 하진석은 문을 막고 있는 것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시체였다. 머리가 날아가거나 배가 뚫린 자경단원들의 시체가 문을 가로막고 있었다.
구 코엑스는 완전히 궤멸되어 있었다. 여자와 아이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지만, 여기저기 자경단원의 시체들이 꽤 많이 보였다. 도대체 무슨 총을 쏜 것이진 자경단원의 시체 중에는 사지가 온전한 것이 별로 없었고 바닥과 벽의 대리석에는 여기저기 사람 머리만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하진석이 터덜터덜 아셈 병원을 나설 때 쯤 누군가 속삭이듯이 그를 불렀다.
“이봐! 파파!”
폴 그린그래스였다. 그는 병원의 데스크 밑에 있는 비밀 공간에서 기어 나오고 있었다. 폴은 하진석에게 다가오다가 무엇에 생각이 미쳤는지 멈칫거리며 물어보았다.
“파파, 맞는 거겠지? 성공한 거지?”
하진석은 별다른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하하하, 역시 하늘이 우릴 버리진 않았군!”
하진석은 처참하게 부서져 있는 주거구역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어느새 침울해진 폴이 말했다.
“파파가 들어가고 20일 쯤 되었을까? 그때 갑자기 군대가 밀레니엄 광장으로 들이닥쳤어. 우리는 파파도 없는데다가 군대가 직접 밀레니엄 광장으로 들어올지는 몰랐기 때문에 순식간에 밀렸지. 성찬군이 자경단원들을 지휘해 주어서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긴 했지만, 그들이 레일건을 꺼내들자 어떻게 할 방법이 없더군. 성찬군은 군부대와 협상을 했지, 그들이 저항을 포기하고 무장해제하는 대신 여자와 아이들을 단순 부랑자로 처리해달라고 말이야. 부랑자가 지하거주구역에 들어가면 형기가 배로 올라가거든, 그래서 나머지 사람들 모두 수용시설로 연행됐어.”
“이곳 지리를 군인들이 어떻게……?”
“우리도 그게 궁금했지. 우리에게 가장 튼튼한 방어벽이 이곳의 복잡한 지리였는데, 그게 한순간에 무너졌으니 말이야. 알고 보니 변한수가 우리를 밀고 했더군, 군에서 물류창고를 습격한 K-2에 상당한 양의 현상금을 걸었던 모양이야. 돈에 환장한 녀석이니 지하거주민들끼리의 유대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겠지. 개자식!”
폴은 눈앞에 변한수가 있기라도 한 듯이 허공을 노려보며 말했다.
“아, 그리고 아이들 몇 명은 내가 구했어.”
폴이 약국의 데스크를 향해 휘파람을 불자 아이들 여섯 명이 주변을 잔뜩 경계하면서 밖으로 나왔다.
“차마 수용소로 보낼 수는 없더라고, 그래서 되는 대로 같이 들어갔던 아이들이야.”
아이들은 낯선 하진석의 모습에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폴은 멍하니 주변을 바라볼 뿐인 하진석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지 파파?”
하진석은 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더 이상 파파라고 부르지 마, 폴, 난 하진석이야.”
“아, 그래, 이거 영 어색한데, 이제 어떻게 할 거지 진석?”
“해야 될 일이 하나 있어.”
하진석은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고, 폴은 아이들을 데리고 그 뒤를 따랐다.
終.
폴 그리고 여섯 명의 아이들은 하진석을 따라 천안으로 향했다. 하진석은 천안에서 이아람의 집을 찾아갔다. 늦은 저녁에 찾아간 이아람의 집 앞에는 상중임을 나타내는 등이 달려 있었다. 그곳에서 이아람의 아버지와 만난 하진석은 이아람이 난산 끝에 여자아이를 출산했고, 지나친 하혈로 끝내 숨졌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진석이 아이를 차후에 어찌할지 묻자, 딸의 죽음에 격렬한 분노에 휩싸여 있던 이아람의 아버지는 강간범의 자식 따위는 어찌되어도 상관없다고 하였다. 하진석은 그런 이아람의 아버지에게 입양을 제안했고, 이아람의 아버지는 출생신고도 안한 손자라 하여 하진석에게 아무런 절차 없이 아이를 주었다. 그렇게 아이는 7명이 되었다.
갓난아이를 안고 하진석은 다시 상암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경아와 재회한 하진석은 집과 재산을 처분하고는 케이프타운 행 티켓 10장을 구매했다. 케이프타운 종점에 이르기 전에 아마도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곳을 찾을 수 있을 터였다. 경아는 하진석에게 강원택 박사가 남긴 편지봉투를 주었다.
케이프타운으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하진석은 편지 봉투를 뜯어 차근히 읽어 보았다. 놀랍게도 편지는 강원택이 하진석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니었다. 편지는 ‘내 삶에서 유일했던 진정한 벗이자, 조언자였던 강원택에게’라는 문구로 시작하고 있었다. 별다른 소음도 없이 미끄러지듯 유영하는 대륙횡당열차 안에서 편지를 끝까지 다 읽은 하진석은 편지를 조각조각 찢기 시작했다. 하진석은 중얼거렸다.
“그런 거 변명할 필요 없어.”
하진석이 잘게 자른 종이를 창문에서 뿌리자 뒷좌석에 앉은 아이들이 눈이 온다며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창밖에는 아직 시베리아의 얼음들판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하진석의 눈에는 벌써부터 희망봉이 보이는 듯했다. 그들은 그곳으로 가서 자연스럽게 늙어죽을 것이고 아이들은 자라 다시 아이를 낳을 것이다. 그리고 세대는 갱신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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