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인생의 두 번째 위기라고 P는 생각했다. 첫 번째 위기는 군대에 끌려가던 순간이 아닐까 싶은데, 적은 가능성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심정에 그나마 가장 면제 사유에 가까운 체중 불리기에 도전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표준체중이 늘어나고 안경을 쓰는 게 일반화된 추세에 따라 면제 기준은 점점 엄격해지고 있었다.
어머니의 부재(不在)로부터 열흘 이상이 지났다. 시계를 전혀 보지 않던 P도 사흘이 지났을 때부터 컴퓨터를 통해 날짜와 시간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가 사는 공간, 감각이 닿는 영역 전체인 너비 약 6㎡, 높이 3m 짜리 지하실 안에는 달력도 시계도 휴대전화도 없다. 시간을 확인할 수단으론 컴퓨터의 OS에 기본적으로 내장된 시계가 유일했으나 그나마도 평소엔 볼 일이 없다. P에게 있어 시간의 흐름은 무의미했으니까. 지하실의 낮과 밤은 불을 켜고 끔에 따라 정해지고, 기상과 취침은 전혀 일정하지 않은 생체 리듬에 따라 불규칙하게 이루어졌다. 이 작은 세계에서 하루의 시작과 끝은 오직 P의 의지에 의해서 정해진다는 점에서, 그는 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 신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어머니의 보살핌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P의 어머니가 진짜 신이고 그는 피조물이며 애완동물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과도한 수면과 신경 안정제 복용으로 인해 희미하고 몽롱한 머릿속을 뒤져보면 이런 일이 없지는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만 두 번은 되었다. P가 방에 틀어박힌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에, 배가 고프면 어련히 나오겠지 하는 안일한 마음을 품은 어머니는 밥을 안 주고 굶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시도는 언제 어떻게 시도해도 사흘을 넘기지 못했다. 움직임이 거의 없는 생활이기에 하루는 가볍게 넘길 수 있고 이틀도 버틸 수 있지만 사흘째가 되면 굶주림이 닥쳐온다. 그러면 얌전한 애완동물이 우리에 갇힌 야생동물로 급변하고, 부모에 대한 거친 폭력이 발생한 후 평온한 생활로 돌아오는 결말을 맞는다. 두 번째 강제 단식은 지하실로 거처를 옮긴 직후에 있었다. 가슴을 치고 울면서 말리던 어머니는 밥을 주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일주일가량 지나도 아무런 기척이 없자 걱정이 되어 지하실 문을 두드리자, 안에는 미리 콜라와 초콜릿 등 비상식량을 쌓아놓고 멀쩡하게 버티던 아들의 모습이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폭력사태로 번지고, 규칙적인 배급이 재개되었다.
P는 스스로 지금의 상태를 히키코모리 3기로 규정하고 있다. 1기는 사회와 타인에 대한 불만과 공포, 스스로에 대한 혐오와 자괴감을 버무려서 만든 콤플렉스 덩어리 상태였다. 그때는 집을 나가기 싫어하는 정도로, 식사는 식탁에 앉아서 하고 담배나 먹을 것이 떨어지면 사러 가는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초여름이나 가을에는 놀이터의 벤치에 앉아서 시간을 때우기도 했다.
2기는 방에서 아예 나가지 못하게 될 무렵이었다. 하루에 화장실 두 번 가는 것이 전부로, 식사도 어머니가 아침저녁으로 문 앞에 갖다 주어야 했다. 3년이 지날 무렵 P는 딱히 쓸 일이 없이 방치되었던 지하실로 거처를 옮겼다. 형광등 하나 뿐인 사각의 콘크리트 공간에 전선과 랜선을 잇고 바닥에는 초등학교 소풍 이후로 쓰지 않은 돗자리를 깐 다음 라꾸라꾸침대와 앉은뱅이 탁상과 컴퓨터를 놓은 것이 전부인 조촐한 공간이었다. 이때부터를 3기라 부를 수 있다.
하루 두 번 어머니가 밥과 물통을 문 앞에 놔둔다. 빈 그릇과 휴대용 변기가 놓여 있으면 수거해서 변기는 세척한 후 다시 갖다 놓는다. 그릇 옆에는 간혹 쪽지가 놓여 있는데 주로 담배와 맥주, 초콜릿 등 필요한 것이 적혀 있다. P는 휴대전화를 쓰지 않았고, 어머니는 컴퓨터와 인터넷을 쓰지 않으므로 두 사람의 대화는 메모지를 통해서만 이루어졌다. 어머니가 설득이나 비난의 말을 답장으로 보내던 것도 옛날 옛적의 일이고 지금은 그런 것도 없어졌다. P가 〈에쎄 순〉이라고 적어 놓으면 다음날 밥과 반찬이 담긴 쟁반 구석에 한 갑이 놓여 있을 뿐이다.
공간이 좁아진 이후 P의 세상에 대한 관심사가 오히려 커졌을 때도 있었다. 1기에서 2기 무렵에는 뉴스 사이트를 돌아보며 최신 소식이나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열심히 흡수하며 자신이 아직 이 세상에 속해있음을 자각하려 애썼다.
하지만 3기인 지하실 생활을 하면서는 세상에 대한 미련을 놓았는지 인터넷 브라우저를 띄우는 일도 거의 없어졌다. 그렇다고 방 안에서 가만히 있기엔 무료하니 인터넷으로는 쉐어나 퍼펙트 다크 같은 P2P 프로그램만을 돌려서 최신 PC게임이나 만화를 다운받는 것이 일과의 전부였다. 다만 MMORPG 같은 온라인 게임은 하지 않게 되었다. 이 역시 초기에는 빠져들었으나 이내 모니터 저편에 인간이 존재함을, 자신과 같은 시간, 같은 게임 속 공간에 누군가가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게 된 것이다. 당연 미니홈피 같은 타인과의 소통수단도 써본 적 없다. 전자우편도 안 쓴지 5년은 넘었고, 삐삐나 휴대전화는 개통 경험도 없다. 이제 타인과의 연결고리는 아예 없어졌고 P는 구청의 서류 속, 호적 등본에만 존재하고 있었다.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오직 매일 사라지는 밥과 채워지는 변기를 통해서만 알 수 있었다.
사실 그동안 P에게 있어 어머니가 자리를 비우는 일은 별다른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 이상한 종교에 빠져든 것도 알고 있었다. 식당에서 일하기에 점심 무렵에 출근하여 밤늦게 퇴근하는 것도 안다. 따라서 어머니의 정상적인 시간축에서 보면 아들에게 주는 식사의 시간은 점심과 야참이지만, P에게 있어서는 잠에서 깨어 먹는 것이 아침이요, 자기 전 먹는 것이 저녁에 불과하다. 음식을 넣고 빈 그릇과 더러워진 옷을 꺼내기 위해 문을 여는 잠깐의 순간, 바깥의 밝기에 따라서 대강의 시간을 추측할 수 있겠지만 그나마도 지하기 때문에 쉽사리 알 수가 없다. P처럼 신경을 쓰지 않으면 영영 모르는 채 있게 된다.
어머니가 종교 집회니 뭐니 해서 장기간 집을 비울 경우 문 앞에는 반드시 그 사실을 알리는 쪽지와 함께 빵이나 떡 같이 밥보다 오래 보존이 가능한 음식을 남겨두곤 했다. 그런데 그런 예고도 준비도 없이 갑작스레 찾아온 어머니의 부재가 P에게 위기감을 안겨 주었다. 열흘이 넘도록 버텨왔지만 이젠 비축한 초콜릿도 다 먹었고 변기도 꽉 찼다.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산 휴대용 변기는 뚜껑이 달려 있긴 하지만 악취를 다 막을 순 없다. 그는 구석에서 쪼그리고 앉은 채 방 안이 냄새로 가득해져 자신을 짓누르는 상상을 한다. 창문도 없는 이 지하실은 냄새 분자가 차곡차곡 쌓일 것이고, 이대로 P 자신도 죽어서 썩고 해체되고 뒤섞여서 언젠가는 이 폐쇄공간을 꽉 채울 것이다. 그때야말로 그가 원하던 홀로 존재하는 자유와 평화를 얻는 순간이 될지도 모른다.
P의 상념을 흩뜨리려는 듯 어떤 신호가 느껴졌다. 아주 미세하고 희미하지만 그의 예민한 감각기관은 바로 잡아낼 수 있었다. 그건 발소리, 콘크리트 계단을 콩콩 거리며 내려오는 작고 가벼운 발걸음 소리였다. 보통사람이라면 눈치 채지도 못할 정도의 음량이지만, P는 포식자의 낌새를 느낀 작은 짐승처럼 온몸의 털이 곤두 서는 공포와 긴장감에 사로잡혔다.
그 발소리는 평소에 들어서 익숙한 어머니의 소리가 아니었다. 하루에 두 번씩 지하실을 오르내리는 그 소리는 자신의 숨소리만큼이나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걸음 사이의 간격, 소리의 크기와 울림까지 모두 고막에, 뇌 주름 사이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어 절대로 혼동하거나 잘못 짚을 수 없다. 심지어 들고 있는 물건의 무게에 따른 차이마저 감지해낼 수 있을 정도다. 또한 지하실에 들어온 이후로 어머니 이외의 사람이 지하실로 들어온 적조차 없다. 즉 지금 열한 단의 계단을 밟으며 내려오고 있는 저 인물은 P의 어머니가 아니다. 그 사실만으로도 그는 공황상태에 빠져서 호흡마저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 5초도 안 되는 시간동안 P는 수많은 상념에 빠졌다. 스피커의 음량을 최대로 올리고 음악을 틀어서 저 발소리를 지울까,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가 숨을까, 아니면…….
하지만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면서 침착함을 되찾은 P는 아무 기척도 내지 말고 가만히 있는 게 제일 현명한 대책임을 깨달았다. 상대방의 정체가 가스 검침원이나 외판원일지도 모르고, 대문이 열려 있는 틈을 타 슬쩍 들어온 빈집털이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런 자들에게 괜히 여기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줄 필요는 없다. 지하실의 철문은 빈틈이나 구멍 하나 없이 안쪽에서 자물쇠로 단단히 잠겨 있으니까. 원래는 눈높이 정도에 내부를 들여야 볼 수 있도록 쇠창살이 붙은 창이 하나 뚫려 있었는데, P는 문 안쪽에 아크릴 판자를 대고 공업용 본드로 붙여서 가려 놓았다. 도구가 없는 관계로 용접을 하지 못했기에 망치 같은 걸로 두드리면 떨어질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두방망이질을 치는 가슴을 부여잡고 두서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에 발소리는 그쳤고 조용해졌다. 저 미지의 인물은 지하실이 잠겨 있음을 알고 도로 계단을 올라갔을까? 아니, 분명 올라가는 소리는 없었다. 공포는 아직 사그라지지 않았다.
통통통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곳곳에 페인트가 벗겨지고 시커멓게 녹슨 부분이 번진 낡은 청회색 철문을 누군가가 손등으로 두드리고 있다. P의 어머니는 식사를 놓거나 간이 변기를 씻어서 갖다 줄 때 문 아래쪽을 툭툭, 두 번 두드리곤 했다. 따라서 허리 정도 높이에서 세 번의 소리가 들리는 건 이곳에 들어온 이후 처음이다. 처음 느낀 이질감에 P의 몸과 마음은 소금기둥이 된 소돔의 시민처럼 그 자리에 굳어진 상태였다. 어떻게 대처할지 놀라움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문 저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대답하지 마. 소리도 내지 말고.”
마치 귀신이, 사냥꾼이, 마녀가 하는 말 같았다. 먹이를 눈앞에 둔 육식동물의 포효처럼 들렸다. 반쯤 속삭이는 소녀의 목소리였건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듣기만 해.”
그 인물이 말을 이었다.
“이 안에 네가 있을 확률은 50%. 너는 거기에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나는 네가 있다고 생각하고 말을 하겠어.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
너는 내가 죽 찾고 있던 사람이야. 너에 대해서 좀 알아봤거든. 13년째 밖에 나가지 않은 상태로 살고 있다지? 여기 지하실로 옮긴지는 10년이 되었고, 이후로는 엄마조차 얼굴을 보거나 얘기를 나눈 적도 없어. 즉 지난 10년간 너의 존재를 확인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이야. 간접적으로 접촉한 당신 엄마도 음식이 사라지고 대소변이 생기는 것만으로 네가 살아 있다고 추측하는 거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 겉모습부터 시작해서 너의 모든 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단 말이야. 가족이나 학교 친구들, 예전에 만났던 사람들은 과거의 모습이나 찍었던 사진을 보고 지금도 비슷할 거라고 추측이야 할 수 있겠지. 근데 그건 상상일 뿐, 직접 보고 알아낸 건 아니잖아? 네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지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 그런 농담이 있거든, 히키코모리는 똥 만드는 기계라고. 사회적으로 볼 때 존재하지 않는 셈이지. 생산도 하지 않고 세금도 안 내. 소량의 음식을 소비하지만 가족의 범위에서 지나칠 정도의 차이가 없어.
화가 나? 열 받아? 하지만 대답은 하지 마. 왜냐하면 난 너의 존재를 인식하고 싶지 않아. 너 역시 나를 파악하지 못하잖아. 가령…… 내가 외계인이라면 어쩔 거야?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 넌 내 목소리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사람이라고 추측할 수는 있어. 그치만 내가 의족을 달고 온 다리 없는 인간일 수도 있고, 두 다리만 써서 계단을 내려온 문어발 외계인일지도 몰라.
아인슈타인이 이런 말을 했대. ‘달은 우리가 보았으니 존재하는 것이고, 우리가 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단 말이냐?’ 우리가 보든 말든 해도 달도 예전부터 존재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 신이 주사위 놀이를 할 리가 없다며 우주 상수를 찾느라 허송세월했던 인간이 할 만한 얘기야. 근데 우리가 볼 수 없는 작은 세상에서는 그 말이 맞게 돼. 아주 약한 빛을 가느다란 구멍 두 개를 뚫은 판자에 비추면 판자 뒤 필름에 간섭무늬가 생겨. 빛에게 파동의 성질이 있다는 얘긴데, 문제는 전자가 좌우 어느 구멍을 지나갔는지 관측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야. 전자 하나가 판자에 닿는 순간 좌우 두 슬릿을 통과하는 상태가 겹쳐져 있고, 도착지점은 확률로만 알 수 있어. 그렇다고 전자가 분신술이라도 쓰듯 둘로 나뉜 건 아니겠지? 관측을 하게 되면 전자는 파동의 성질을 잃고 수축되어서 한 지점에만 있는 상태로 보이게 돼. 그래서 파인만은 관측 행위 자체가 관측의 대상물에 영향을 끼친다고 말한 거야.
그러니까 관측을 하기 전의 달과 후의 달은 다른 존재가 된단 말이지. 모습이며 위치, 궤도 등등 달의 모든 건 최초의 인간이 올려다본 순간부터 지금과 같이 생겨난 거야.
궁금하지? 왜 갑자기 나타나서 달과 전자에 대한 말을 하는지? 하나만 더 말할게. 전 국민이 읽었다는 『어린왕자』알지? 그 중에 이런 얘기가 있어. 왕자가 주인공에게 양을 그려달라고 하거든. 주인공은 나름대로 예쁘고 건강한 양을 그리려고 애쓰지만 몇 마리를 그려줘도 왕자가 퇴짜를 놓아. 화도 나고 진력이 난 주인공이 대충 네모난 상자를 그려다가 네가 원하는 양은 이 안에 있다고 말하니까 왕자의 표정이 환해져. 상자 속의 양은 아직 관측되지 않았기에, 어떤 존재인지 규정되지 않았어. 오직 왕자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고 있는 거야.
이제 슬슬 왜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지 궁금해지지? 마음껏 생각하고 있어. 어차피 지금은 알 수가 없을 테니까. 다음 이야기는 내일 이 시간에 할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상자 속의 양 아저씨.”
그 말을 끝으로 모래가 얇게 깔린 콘크리트 바닥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가볍고 경쾌한 계단 오르는 소리. 내려갈 때보다 더 빠르다.
P는 침대에 누워서 생각해봤지만 전혀 짚이는 바가 없었다. 어머니가 카운슬러라도 부른 것일까? 하지만 놀리는 듯 갖고 노는 듯한 수수께끼의 말만 남기고 사라진 걸 감안하면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사정을 제법 알고 있는 모양인데, 어머니가 부주의하게 주위에 떠벌인 걸 들었을지도. 히키코모리가 무슨 자랑이라고 그걸 선전하고 다닌담. 괜히 원망의 말을 속으로 늘어놓으며 잠을 청했다.
* * * * * * * * * *
약속한대로, 정체 모를 상대는 다음날 그 시간에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P도 컴퓨터로 시간을 자주 확인해서 알 수 있었다. 도피하고 싶은 마음이 커져서 잠을 자려고도 했으나 약속 시간이 다가올수록 심장이 거세게 뛰고 정신이 또렷해져서 그만두었다.
“양 아저씨? 나 왔어. 요즘 세상은 난리가 났는데 혼자만 속 편하신 것 같네. 문 위쪽으로 선이 두 개가 이어져 있는데, 하나는 전기고 하나는 랜선 맞지?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다면 뉴스를 봐서 알겠지. 멸망이니 위기니 하면서 난리법석이야.
오늘은 나에 대해 말할게. 사실 나도 예전엔 지금 너만큼 은톨이였어. 어릴 적에 TV에서 전파에 대한 방송을 본 게 계기였던 것 같아. 어린이용 교육 방송이었지 싶어. 이 세상엔 보이지 않는 전파로 가득해서, TV도 라디오도 HAM도 인터넷도 모두 파장을 통해 퍼져 나간다는 내용이었지. 우리 목소리가 공기를 진동하는 음파로 이루어져 있듯이 세상의 수많은 전자기기, 통신장비는 전파를 주고받는다는 거야.
그 방송을 본 난 두려움에 사로잡혔어. 그렇다면 지금 내 주위에도 온갖 보이지 않는 전파들이 날아다니고 있다는 얘기잖아? 저 하늘에서 인공위성이 소나기처럼 뿌려댄 전파들이 벌떼처럼 화살처럼 이곳저곳을 날아다니는 모습을 상상했어.
물론 방송에서도 그랬고 도서관에서 찾아본 책에서도 인체에 큰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는 말했지만, 그 전파라는 존재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아. 라디오 방송이 시작된 후 이제 100년밖에 되지 않았어. 전파들이 인간의 몸과 두뇌를 뚫고 지나가면서 어떤 영향을 줄지 누가 알겠어? 비록 지금은 괜찮아 보인다고 해도 조금씩 쌓여서 언젠가 미래의 후손들에게 심각한 부작용을 안겨줄지도 모를 일이잖아.
태양광과 우주선(宇宙線) 같은 경우는 대기권이 거름종이 역할을 하고 있잖아. 인간이 만든 전파는 아무런 방어막도 없이 우리 몸과 영혼을 덮치고 있는 거야.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무서워져서 방에 틀어박혀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바깥세상으로 나가기를 거부하게 되었어.
삼 년 정도는 그렇게 지냈던 것 같아. 가족들이 도서관에서 빌려다주는 책을 읽으며, 언젠가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교재를 사달라고 해서 혼자 검정고시 공부를 하며 지내고 있다가 어느 책에서 우주에서 온 파장을 수신하는 채널링에 대해 알았어. 지구에 퍼진 나쁜 전파를 이겨낼 방법은 지구 밖의 존재, 우주 외에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난 거기에 푹 빠져들었어. 이후로는 가족들이 잠든 한밤중에 옥상에 올라가기 시작했어. 우리 집은 이 층짜리 단독인데 도로 쪽은 기와처럼 보이는 슬레이트 지붕으로 꾸몄고 반대쪽은 그냥 평평한 시멘트 바닥이거든. 나는 거기 버려진 해수욕장에서나 볼 만한 플라스틱 벤치 위에 누워서 우주를 향해 손을 뻗고 채널링을 시도했어. 전파 속에 몸을 노출시키는 건 위험했지만 그나마 대부분의 전기제품이 꺼진 밤이니까 용기를 낸 것이지.
지난 여름날 밤이었을 거야. 몇 달 만에 마침내 안드로메다은하에서 날아온 메시지를 수신하는데 성공했어. 그건…… 예언이자 경고였어. 가까운 미래에 인류 멸망의 위기가 닥칠 것이다. 지구로 죽음의 괴전파가 쏟아져 내려와 인류의 태반이 죽고 수많은 동식물이 멸종하는 대참사가 일어날 것이다, 라고 말이야.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나에게 메시지를 보낸 상대를 향해 답신을 보내려 시도했어.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요, 미래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있나요. 오랜 시간이 걸려 힘겹게 얻어낸 대답은 간단명료했어. 괴전파를 피할 방법은 있다, 그걸 해낼 자격 있는 자를 찾아라. 그때 난 나의 사명을 깨달았어.
구체적인 내용은 내일 알려줄게. 그럼 잘 있어, 양 아저씨.”
발자국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자 P는 다시 침대에 누워 소녀(의 목소리)가 남긴 말을 곱씹어보았다.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저런 부류를 흔히들 전파계(電波系)라고 부른다. 전생을 기억한다는 둥 외계인의 메시지를 수신했다는 둥 하면서 망상에 빠져 헛소리를 늘어놓는 인간들. 요즘엔 만화나 게임에 빠진 애들이 저러고 다닌다고 한다. P는 전파계 인간 따위가 자신을 깔보는 말투로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았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었다. 얼마나 얕보였으면 이럴까. 인간을 계층으로 분류한다면 가장 밑바닥에 놓이는 것이 히키코모리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건 너무했다. 비록 대학을 제대로 다닌 적은 없지만, P는 엄연히 천문학과 학생이었다.
아인슈타인을 들먹이는 것부터 그렇다. 우주 상수는 분명 본인도 실수라며 철회하긴 했으나 시간이 흐른 뒤 오히려 그 가치가 높아졌다. 양자장 이론에선 실제로 우주 상수가 관측됐던 것이다. 진공은 물질이 없을 뿐 입자와 반입자가 충돌하고 소멸하며 에너지를 가진다. 그런 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 한답시고 뻐긴 것이다. 그리고 전파가 유해하니 어쩌니 하는 미취학 아동 같은 피해망상도 그렇다. 그렇게 전자파 과민증이 걱정된다면 스웨덴에 가서 살라고 빈정대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무래도 목소리부터 시작해서 정황을 감안하면 망상에 빠져 등교를 거부하는 여중생 정도가 아닐까 싶었다.
그러다가 P에 대해 알게 되었고, 자신보다 못난 인간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가지고 놀려는 심산일 테지. 그런데 그렇다면 저 전파 소녀(가칭)는 어떻게 P에 대해 알게 되었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P는 ‘우주에서 받은 메시지’ 부분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사이비 종교 냄새가 풀풀 나는 그 부분이 수상했다. 문득 어머니가 믿는 종교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적어도 자신이 아는 유명 종교가 아님은 분명했다. 히키코모리 1기에서 2기로 가던 시절, 어머니는 그에게 온갖 유인물과 책을 건네주었다. 그에 대한 P의 응답은 잘게 찢어서 집 안 곳곳에 뿌리는 것이었고, 그렇게 종교의 손길을 겨우 뿌리칠 수 있었다. 그때 본 책의 제목을 떠올려보았다.
『영성의 때가 온다』, 『자미원(紫微垣)에서 온 방문자』, 『하느님은 우주에 계신다』, 기타 등등.
느낌이, 이미지가 전파 소녀의 말과 딱 겹쳐진다. 추측은 어렵사리 할 수 있지만 물증이 필요했다.
여기서 P가 선택할 미래는 두 가지로 나뉘었다. 하나는 남아 있던 담배를 한 개비 피우고 새로 다운받은 야동을 보며 자위를 한 후에 나른한 몸과 마음으로 잠이 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 멸망 어쩌고 하는 말에 대해, 그리고 사라진 어머니와 때를 같이 하듯 나타난 전파 소녀에 대해 조사해보는 것이다.
속 편하다는 빈정거림과 다르게 지금 P의 상태는 위험했다. 비축해두었던 콜라와 과자도 전부 먹어치웠다. 이 이상 식료품의 보급이 없다면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 지금 자신의 상태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그 자체였다. 다세계 해석이 맞다면 P가 자살했거나 굶어 죽은 세계가 훨씬 더 많을지 모른다. 그 작고 작은 확률 속에서 겨우 살아 있는 세계를 선택한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P는 알 수 없었다.
인상을 찌푸리며 마우스를 잡고 흔들자 스크린 세이버가 사라지며 바탕화면이 떴다. 인터넷 브라우저를 띄워서 정말 언제 접속해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포털 사이트의 주소를 입력했다. 이 세계에선 속아 넘어가주마. 더 많은 다른 세계에선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며 쏟아지는 정보의 물결에 휘말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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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스위프트 감마선 관측 위성이 태양계로 접근하는 감마선을 감지했다. 이어서 페르미 우주 망원경도 감마선 폭발을 관측했다. 〈GRB 111123〉으로 명명된 이 폭발은 약 3000 광년 떨어져 있는 중성자성이 운석 혹은 같은 중성자성과 충돌하며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지구와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폭발로 감마선의 직접적 피해가 예상되고 있어 큰 혼란에 빠진 상태였다.
이미 고대 지구에 감마선 폭발로 인한 대량 멸종이 일어난 적 있었다는 학설도 있다. 단 10초간의 감마선 노출로 오존층의 절반이 사라진다는 연구 결과도 들린다. 그렇게 되면 감마선 자체도 유해하지만 무엇보다 태양의 자외선이 그대로 쏟아져 지구상의 생명체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거라고 한다.
태양계로 다가오는 감마선은 도달할 때까지 이틀밖에 남지 않았고 지구에 직접 닿아 피해를 줄 가능성은 매일 높아져서 최초 관측시 10% 정도라는 발표가 무색하게 현재는 76%라고 한다. 아마도 내일이면 90% 이상으로 올라가고 그 다음날에는 향후 몇 년간 외출을 못 하게 되는 재앙의 시대가 시작됨에 틀림없었다.
인터넷 공간은 이미 난리가 난 상태였다. 세상의 종말이 왔다는 떠들썩한 외침부터 시작해서 이 틈을 탄 온갖 종교와 뉴에이지 나부랭이들이 구원의 방법을 안다고 주장하며 창궐했다. 지구에 닿을 실제 가능성은 더 낮다거나 피해가 크지 않을 거란 분석도 있지만 방호복과 방호시설에 대한 정보와 문의가 끊이질 않았다. 임시휴교령에 신이 난 철부지도 있고, 환경과 생물보다 경제와 산업에 대한 피해를 더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P의 반응은 처음엔 멍했고, 그 다음엔 누가 웹사이트를 해킹해서 장난을 쳤나 의심했고, 조금 더 지나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전파 소녀가 거짓말을 하지는 않은 셈이었다. 그 아이는 나름대로 감마선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전파 공포증인 자신에게 맞게 해석하여 죽음의 전파가 외계로부터 인류를 공격한다는 시나리오를 짜냈던 모양이었다. P는 미친 사람처럼 정신없이 웃어댔다. 세상이 말하는 재앙이란 것이 자신에게는 너무나 희극적이고 풍자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감마선과 자외선이 두려워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세상.
전 인류의 히키코모리화!
은둔자의 천국이 도래했도다!
확실히 감마선은 유전자 변형과 암 유발을 일으킬 정도로 유해하다. UV-B 자외선을 오존층이 걸러주지 못하고 직접 받으면 눈, 피부, 면역계통에 피해를 입힐 뿐 아니라 미생물이 죽고 식물의 엽록소가 감소되어 생태계에 이상을 일으키니 인류와 자연에 큰 피해를 입히는 것만은 틀림없다. 하지만 P는 인류 멸망 운운이 그저 오버라고 생각했다. GRB 111123에 대해 알려진 정보를 종합하면 지구의 감마선 노출 시간은 2초, 길어봐야 5에서 10초 이하다. 오존층 피해는 크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회복될 것이다. 인류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자숙하면서 오존층 파괴를 줄인다면 회복에 10년 정도 걸릴 것이다. 즉 길어봤자 10년짜리 재앙이라는 얘기다. ‘외계의 괴전파로 인류 멸망!’ 같은 호들갑은 사이비 교주들 배나 불려줄 소리라는 뜻이다.
P는 주저 없이 두 번째 선택지를 골랐다. 새로운 미래로 향하는 수레바퀴가 서서히 움직였다.
* * * * * * * * * *
문이 열리자 P는 평소와 다른 신선한 공기의 냄새를 맡았다. 음식과 변기를 옮길 때 잠깐 여닫곤 했지만 그때완 천지차이다. 유난히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걸음을 옮겼다. 늘 앉거나 누워 지내서 그런지 행동이 굼뜨고 허리가 굽어진다. 먼지가 두텁게 쌓인 슬리퍼를 신고 걸음을 내딛었다. 다행히도 바깥은 해가 졌는지 어두침침했다. 시커먼 콘크리트 계단을 올라 다용도실로 들어섰다. 10년만의 외출이긴 했으나 여전히 집 안. 하늘도 바깥세상도 보이진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문은 그대로여서 예전 열쇠가 그대로 통했다.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조심스레 내딛게 된다. 자신의 집임에도 불구하고 불법침입 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내부의 모습은 거의 달라지지 않아 무척이나 낯익건만 격한 이질감이 풍겨왔다.
어색함의 원인은 냄새였다. 좁은 지하실 안은 P의 체취와 음식과 배설물 냄새를 뒤섞고 먼지와 곰팡이를 가미하여 발효한 악취로 가득 찼음을 새삼 자각했다. 거기에 익숙해지면서 후각이 퇴화되었나 싶었지만 바깥 공기를 잠깐 들이마신 순간 민트 사탕을 먹은 것처럼 막힌 코가 뚫린 듯 했다.
누군가의 집에는 특별한 그만의 냄새가 존재한다. P는 다른 사람의 집에 들어갔던 몇 안 되는 기억을 더듬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친구네에 놀러갔던 적이 있다. 생일 파티에 초대받은 적도 있고, 알라딘보이 게임기를 하러 간 적도 있다. 그 당시에 받은 가장 큰 인상은 집 안에서 풍겨오는 독특한 냄새였다. 이 집에선 나무의 냄새가, 저 집에선 좀 느끼한 마가린 같은 냄새가 났다. 지금 P의 존재가 사라지고 어머니 혼자서 살아온 집 안에선 희미한 신 김치와 마른 이불의 냄새가 났다.
마치 도둑처럼 주위를 조심스레 둘러보던 P의 시선이 침대 맡의 탁상 달력과 두터운 다이어리로 향했다. 달력의 날짜 칸에는 쉬는 날, 종교 집회일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올해 다이어리는 보이지 않아서 작년 것을 꺼내어 넘겨보았다. 스케줄 란에도 마찬가지로 종교 관련 모임의 시간과 장소가 적혀 있었다. 그 중에서 정기적으로 반복되는 모임과 집회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찾았다. 〈상담〉, 〈가족 모임〉이라는 글자가 눈에 확 들어왔다. 다이어리를 넘겨 해당 날짜의 기록을 읽었다.
이제야 아귀가 맞아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P의 어머니는 아들 문제로 의사나 카운슬러의 상담을 받고 히키코모리 가족의 모임에 참석했다. 스스로 방에 틀어박힌 적이 있다던 그 전파 소녀도 거기에 참여해서 어머니로부터 P의 정보를 입수했음에 틀림없다.
어머니의 의도였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아들을 방에서 나오도록 설득해달라고 전파 소녀에게 부탁을 했던지, 아니면 종교단체에서 포교를 목적으로 시켰을 가능성도 있다. 자신보다 더 극심한 상태의 히키코모리가 있음을 안 전파 소녀가 멋대로 찾아온 걸지도 모른다.
일단 목적을 이뤘으니 더 있을 필요는 없다. P는 마치 쫓기는 사람처럼 헐레벌떡 지하실로 돌아왔다. 잠깐 나갔다 들어왔는데도 코에 악취가 확 풍겼다. 이왕 나간 김에 해치우자는 생각으로 변기를 비우고 샤워도 했다. 부엌을 뒤져서 라면과 김치, 통조림과 생수를 챙겨왔다. 공복을 해결하고 몸도 청결해지니 온몸에 신선한 기운이 퍼지면서 머리도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어떻게 할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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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감마선의 지구 도달 가능성은 94%까지 올라가 있었다. 전 세계의 아우성은 더욱 커졌다. 뉴스와 신문 사이트의 댓글에서 올라오는 소란법석을 강 건너 불 보듯이 넘겨보고 있는데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P는 이제 놀라지도 겁을 먹지도 않는다. 미리 문에 쪽지를 붙여 놓았기 때문이다. 전자우편 주소만을 적어 놓았지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가 없겠지.
오랜만에 열어본 메일함엔 세계 각지에서 온 스팸 메일 수백 통이 쌓여 있었다. 전부 지우고 기다리는데 의외로 금방 연락이 왔다. 꼬맹이로 알았는데 스마트폰을 쓰는 모양이다. 어차피 요금은 부모님이 내주겠지. 어머니 뒷바라지로 사는 자기 처지가 떠올라 괜히 화가 났다.
메일은 아주 짧았다. 「메일은 너무 느리니까 트위터를 써.」그리고 자기 트위터 주소를 남겨 놓았다. P는 트위터가 뭔지 몰랐기 때문에 여기저기 검색해서 알아보고 겨우 가입을 했다. 서로 폴로를 하면 다이렉트 메시지라는 일종의 쪽지 주고받기를 할 수 있다. P는 다짜고짜 단도직입으로 추궁했다.
「엄마한테 들었지?」
「그 나이에 엄마라니 창피하지도 않아?」
답장이 너무 빨라서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해본 적은 없지만 채팅을 하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아직도 반말 짓거리라니, 당돌한 것도 유분수지.
「그러는 너는 몇 살인데 반말이냐」
「역시 남자들은 그래서 안 돼. 나이 따지고 뭐 따지고 해서 대화가 되겠어? ㅉㅉ」
「네 목적이 뭐냐」
「여태껏 말했잖아. 우주에서 날아오는 괴전파로부터 지구를 지키기 위해 양 아저씨가 필요해.」
「그게 왜 난데」
답변은 손가락이 아니라 입술이 했다. 화면 대신 문 저편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내게 메시지를 보낸 이들이 그랬어. 마땅히 부를 이름이 없어서 내가 〈갤럭시 옵저버(Galaxy Observer)〉라고 지어 붙였는데, 걔들에 의하면 이 우주는 양자의 공리로 이루어져 있대. 우주를 사람이라고 봤을 때 우리 은하는 세포 한 개이고, 태양계는 원자이며 지구는 원자핵을 도는 전자와도 같아. 지구 안에서 옹기종기 모여 사는 우리는 고전물리학의 규칙에 구애되며 살고 있지만, 저 태양계 너머 은하계 이상으로 가면 거기는 이미 양자물리학의 세계야. 그런 의미에서 아인슈타인은 진실을 말한 셈이지. 보어의 말대로 ‘관찰된 현상이 아닌 한, 어떤 현상도 현상이 아닌’ 거야.
원래 우리 태양계 행성의 궤도는 원자의 내부구조와 같았어. 톰슨도 러더포드도 아닌 슈뢰딩거의 원자모형. 전자구름이라고 하지?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태양계 행성의 궤도는 일정하고 예측이 가능하지. 그건 우리 인류 자신이 관측했기 때문이라는 것도 한 가지 이유지만, 또 하나가 있어. 우리 이웃 은하 저 멀리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존재가 있어. 양자물리학의 규칙 아래 존재하는 갤럭시 옵저버가 말야.
그런데 얘들이 특이한 점이 있어. 자기들은 다른 은하계의 지성체를 찾아내서 살펴보면서, 남들이 자기네를 관측하는 것은 원치 않거든. 무슨 뜻인지 이해하겠어?”
갑자기 질문을 끝으로 침묵이 찾아왔다. P의 반응이 알고 싶었던 걸까. 하지만 그의 응답이 없자 더 참을 수 없었는지 직접 말을 이었다.
“그 마음은 아마 히키코모리인 아저씨가 제일 잘 이해할 수 있을 걸……. 갤럭시 옵저버는 관측자, 그러니까 타인에 의해 자신들의 존재가 확정되기를 바라지 않고 철저히 숨어 지내고 있어. 그래서 걔들이 말하는 자격이란 자기네가 관측할 수 없는, 파장이 충분히 큰, 존재와 비존재가 중첩되어 있는 사람을 뜻해. 있거나 없거나가 아닌, 있으면서 동시에 없는 존재. 10년이나 모습을 숨긴 히키코모리가 딱이잖아?
지금부터가 중요하니까 잘 들어. 하나의 은하엔 같은 별이 두 개씩 있어. 아니, 같다는 말은 정확한 표현은 아냐. 그러니까 얽힘 상태에 있다는 말이지. 위치는 은하 중심의 블랙홀을 기준으로 반대편에 있을 걸로 추측해. 아까도 말했지만 관측하지 않은 별의 위치는 확률로밖에는 얘기할 수가 없어서 말야.
다세계 해석의 지지자들이 들으면 실망할지도 몰라. 우주는 하나고 지구가 두 개밖에 없다는 건. 그래도 갤럭시 옵저버에 의하면 기존 이론 중에서는 다정신 해석(Many-minds interpretation)이 가장 적합하다고나 할까? 즉 우리의 육체는 고전물리학에 얽혀 있으나 정신만은 파동함수로 기술된다는 거야. 폰 노이만은 ‘파동의 수축은 인간의 의식 안에서 발생한다’고 말했는데 그게 정답일지도 몰라. 인간이 자연과 우주를 정의할 수는 없어. 인간이 아는 것, 알 수 있는 것,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할 뿐이지.
우주가 암흑 에너지로 가득하다는 건 알고 있지? 갤럭시 옵저버는 그 에너지의 정체와 이용방법을 알고 있었어. 여기선 데이빗 봄의 비국소성 원리를 적용해야 해. 파동이 중첩되지 않은 양 아저씨는 은하계 너머로 의식을 확장시킬 수 있어. 그리고 암흑 에너지를 이용하는 거야. 비유하자면 수영장 한 가운데에 있는 비치볼을 꺼내고 싶은데 수영을 못 하면 어떻게 해야겠어? 손발로든 뭐든 물살을 일으켜서 비치볼을 가장자리로 밀어내면 되겠지? 그런 식이야.
여기서 움직여야 할 별은 우리 태양계가 아니라 얽혀 있는 반대쪽이야. 자기 자신을 움직이게 할 수는 없거든. 여기는 고전물리학이라는 족쇄가 채여 있으니까. 얽혀 있는 두 행성은 하나가 위치를 혹은 에너지를 바꾸는 순간 다른 쪽도 즉시 바뀌게 될 거야. 속도로 따지면 빛의 속도보다 훨씬 빠른 셈이지. 아마도 은하를 위에서 내려다본다면 동시에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걸. 기적 같지만 갤럭시 옵저버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당연한 광경이야. 하지만 그 움직임은 천천히 이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아. 일종의 양자도약을 일으키는 거지. 지구에 사는 우리는 아무런 물리적 변화를 체감하지 못할 거거든.
이제 개요는 알아들었을 테고, 어때? 내 말대로 할 생각이 들었어?”
* * * * * * * * * *
양자물리학의 법칙을 따르는 우주, 은하 반대편에서 우리와 얽혀 있는 또 하나의 지구, 갤럭시 옵저버가 보낸 메시지, 암흑 에너지를 이용한 태양계의 양자 도약, 그리고 파동 상태의 인간만이 그걸 가능케 한다…….
어머니로 인해 사이비 종교와 뉴에이지, 오컬트에 대한 분노와 냉소를 쌓아온 P에게 있어 쉽게 받아들일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는 다시금 두 개의 미래를 놓고 선택을 해야만 하는 기로에 놓여 있었다. 전파 소녀의 말을 무시할 것인가, 아니면 믿고 따를 것인가.
그 아이의 말이 참이라면, 무시할 경우 지구는 감마선 샤워를 받고 재앙에 빠지게 된다. 따를 경우 지구를 구하고 아무도 안 알아주는 구세주가 된다. 거짓이라면 무시할 경우 지구는 감마선을 맞는다. 따를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얼핏 따르는 것이 맞는 일 같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는 엉터리 논리다. P는 파스칼이 이런 식으로 예수를 믿으라고 설교했음을 알고 있다. 더구나 인간은 죄수의 딜레마를 봐도 알 수 있듯이 늘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행동하지 않는다. 인간의 마음은 이기적이고 욕심쟁이이며 간사하고 자기중심적이다. 자존심과 체면도 빠질 수 없는 요소이다. 그 모든 것들이 암흑 에너지처럼 P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10년이 넘도록 굳게 닫힌 P의 마음의 문은 이미 벽과 구분도 되지 않는 상태가 된 지 오래다.
여자애의 허무맹랑한 소리를 듣고 고분고분 따라할 정도로 어수룩해 보였던 모양인데, 어림없는 소리! P는 안광으로 문을 뚫어버릴 듯이 노려보았다. 그때 세 번째 선택지가 떠올랐다. 바로 저 문을 활짝 열고 미지의 존재를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그 순간 두 사람은 서로를 관측하고 중첩은 사라진다. 전파 소녀가 문어발 외계인인지 어떤지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만 그건 여전히 불가능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 타인을 마주 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이 두려우면서 동시에 불쾌한 일이다. 공포와 혐오가 동시에 밀려온다. 어릴 적부터 상대방의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를 하지 못했다. 그로 인해 생기는 꾸중과 놀림은 그를 더욱 움츠리게 만들었다. 돌이켜보면 P의 인생은 늘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중첩 상태였다. 그의 존재는 타인에게 있어 있으나 마나였다. 어머니조차 밥을 주고 빈 그릇을 치우는 행위가 반복적인 일상이 되었고, 살아 있는 인간이 문 너머 저편에 있음을 서서히 잊어버렸다. 그는 정말로 살았지만 산 것이 아닌, 살았으며 동시에 죽은 존재였다. 생물학적인 호흡과 식사, 배설이 그의 생명을 완전히 증명할 수 없었다. 그의 정신이, 영혼이, 불확정 상태의 파동으로 남아 있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이쪽은 결과가 확실하다는 차이가 있다. 파스칼은 천국과 지옥을 입증하지 못했지만 감마선 지옥은 94%의 확률로 준비되어 있다. 전파 소녀의 말대로 다세계 해석이 옳지 않아서 다른 세계가 없다면, 무엇을 선택해도 책임을 모면할 수는 없을 터. 히키코모리가 아닌 자신, 다른 인생을 사는 자신, 혹은 자살했거나 굶어 죽은 자신이 어딘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을 수가 없어졌다. 다만 얽혀 있는 반대편 세상과 이어질 수 있는 자격이 자신에게 있다면, 한 가지만 꼭 전달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너는 어떻게 살고 있니? 너는 행복하니?’
그 생각은 P가 하려는 동시에 전해졌다. 굳이 비유하자면, 헤드폰을 끼고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할 때 느끼는 감각과 비슷했다. 말을 함과 동시에 그 말이 자기 귀에 들린다. 시간의 오차나 지연도 없다. 이건 말하자면 환청이나 건강의 이상일 것이다. 고전물리학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면 그렇게 반응할 테지. 하지만 다정신 해석을 따르자면 이는 다른 정신의 발현이다. 물론 다중 인격과 같은 개념은 아니다. 하나의 육신, 하나의 영혼임에는 틀림없다. 단지 그 정신은 저 몇 만 광년 떨어진 얽힌 세계와 이어져 있다. 그 둘은 빛보다 더 빠르게, 시공간의 차이를 무시하기라도 하듯 반응한다.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P는 깨달았다. 얽힘 상태의 또 하나의 세계가 대안이 될 수는 없다. 그 세계의 자신은 똑같이 태어나 똑같이 살다가 똑같이 지하실에 숨어 있음에 틀림없다. 결국 그의 질문은 자기 자신에게 한 것과 마찬가지이고, 따라서 대답도 스스로 해야만 했다.
‘나(너)는 이렇게 살고 있어. 네(내)가 행복하기를 바랐는데…….’
이제 선택지가 그(나/너)에게 주어진다.
나(너)의 행동을 선택하시오.
0. 제안을 거부한다
1. 제안을 받아들인다
인간의 마음은 불완전하다. 합리적이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래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도 못하고 종교에 빠져들기도 한다. 기뻐하고 슬퍼하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의 작용은 끝없는 간섭무늬를 그린다. 그러니 누구도 P의 결정을 반대하거나 비난할 수 없으리. P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안 하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전파 소녀의 스마트폰에 새 메시지가 도착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돼?」
“이제야 할 마음이 생긴 거야? 양 아저씨!”
얼핏 놀리는 듯한 목소리에는 분명 반가움이 담겨 있었다. 최소한 P가 관측한 상대방의 감정은 그랬다.
* * * * * * * * * *
인생은 선택이다. 누가 그랬던가. 옛날 개그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그래, 결심했어!’ 라고 외치며 두 가지 선택의 길을 다 체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그렇지만 이것 아니면 저것, 이라는 식의 선택에 얽매인다는 자체가 고전물리학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다. 지금의 P는 완전히 양자론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0도 1도 선택하지 않았다. 혹은 0과 1을 다 선택했다고 표현해야 할까. 어느 쪽도 정확하진 않다. 굳이 말하자면 비트가 아니라 큐비트(qubit)다. 〈0 or 1〉 이 아니라 〈0 and 1〉의 상태. 존 휠러는 동참하는 우주를 역설했다. 이를 받아들인다면, 결국 우주를 관측하고 판정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그리고 인간의 감각이, 우주 망원경이 닿지 못하는 저 너머의 세계를 알아내는 건 전파 소녀와 P와 같은 〈양자적 인간〉의 역할이다.
저 지하실 밖, 세상 속은 왠지 조용하다. 전 인류가 숨을 죽이고 이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파장이 마치 긴 꼬리를 빛내는 혜성처럼 지구의 곁을 지나가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 수십 억 쌍의 눈이 밤하늘을 관측했을 때, 우주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최후의 유인원은 어느 날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별들에게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별이, 은하가, 우주가 그를 관측했을 것이다. 그로써 그는 최초의 인류로 거듭날 수 있었다.
P는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컴퓨터 모니터에는 시시각각 줄어드는 감마선 피해 가능성의 퍼센트가 표시된다. 대기권의 감마선 노출 예상 시간은 0.2초 정도라는 구체적인 수치까지 나오고 있다. 안도한 사람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행운이나 신의 가호에게로 영광을 돌렸다. 원래 예정된 대로 일어난 일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기계와 컴퓨터의 부정확함 혹은 계산착오를 질타하는 의견도 들렸다.
이러한 혼란 상태가 P의 마음을 괜히 즐겁고 들뜨게 만들었다. 진실이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다. P가 어젯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을 뻗어서 암흑 에너지를 밀어내어 은하 저편에 있는 얽힌 태양계를 양자 도약시켰고, 그로 인해 우리 태양계도 동시에 움직이면서 감마선을 피했다고 말해도 좋다. 그보다 감마선은 원래 지구에 닿지 않을 운명이었다고, 폭발이 일어나 감마선이 방출된 순간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고 말해도 좋다. 저쪽에 있을지 모를 또 다른 P는 그렇게 해석했을지도 모른다. 이 세계는, 우주는 해석의 결과로 존재하고 있는 것. 어떤 해석도 섣불리 틀렸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갤럭시 옵저버만이 정답을 아는 듯 뿌듯한 미소를 흘리며 〈창백한 푸른 점〉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어딘가에서 희미한 환호 소리가 들린다. 월드컵에서 한 골이라도 넣었나 싶었다. 이유는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었다. 뉴스 사이트에선 이미 감마선이 지구를 빗겨 가서 완전히 사라졌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P는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며 은하 저편에 얽혀 있는 자신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너)는 행복하게 살고 싶어. 네(내)가 부디 행복해지기를…….’
닿을 거란 확신은 없었지만, 어차피 송신자도 수신자도 그 자신이었다. 그(나/너)의 격려를 받고 기운을 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 P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발소리를 듣는다. 이전보다 훨씬 빠르고 다급한, 하지만 기쁨과 행복이 가득 담긴 소리다. 가볍게 콘크리트 계단을 두드리는 소리. 그리고 숨을 헐떡이는 소리. 조금 부끄러움과 망설임이 담긴 숨소리.
저 밖에 한 사람이 있다. 자신을 믿었고 자기가 믿었던 사람이. P가 무엇을 했는지 알고 있고, 기억해주는 유일한 존재가 저기 있다. 무슨 말을 하러 왔는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P는 훤히 알 수 있었다. 상대방의 마음을 짐작하다니, 이런 느낌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이게 아마도 공감이나 이해라고 부르는 감정. 갤럭시 옵저버와의 짧은 대화에서 P는 들었다. 우주 저편의 관계도 없는 별에게 닥친 위기를 알려주며 도와준 이유, 전파 소녀가 그들의 메시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 그들은 단 하나의 짧은 문장으로 답했다.
‘고독한 존재만이, 우주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주를 이해한 사람은, 타인에게로 마음을 열 수 있으리라. P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P는 문으로 손을 가져간다. 열쇠를 넣고 돌린다. 덜컥, 자물쇠가 깊은 한숨을 토하며 입을 벌린다. 긴장한 자신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심장소리가 점점 크게 들린다. 지금 P의 모습은 누추할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믿는다. 상대방이 P를 봐줌으로써, 그는 세상 속에 존재하게 된다.
관측되었음이 곧 확정되었다고 단정할 순 없다. 관측 행위가 대상에게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으니까. 힐베르트 공간 속에서 인과의 법칙과 운명론은 힘을 잃고 퇴색된다.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면 광자가, 전자가, 그리고 우주 전체가 전력으로 이를 응원하고 있다.
P는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의 모습, 생활, 인생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지 모르지만 마음은, 정신은 결정되어 있지 않음을. 그의 마음도, 관측자의 마음도 어지러이 물결치고 있다. 둘의 파장이 겹쳐져 상쇄될지 보강될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이것만은 분명하다. 관측하는 상대에 의해 P의 결흩어짐이 일어난다. 상대방이 원하는 모습이 된다. 그리고 P는 미래를 선택한다. 오직 하나밖에 없는 세계를 만들어내며 새로운 미래로 향한다.
어린 왕자는 분명 상자의 뚜껑을 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으리라. 왕자가 마음속으로 그리던 이상적인 양이 바로 그 안에 있으니까. 왕자의 관측을 통해서 양은 존재할 수 있었다. 양이 마주봄으로써 왕자는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
문 너머, 햇살이 희미하게 얼굴을 비추어 P는 눈을 살짝 찌푸린다. 바로 앞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관측자가 서있다. 그 모습은……
“안녕, 양 아저씨?”
전파 소녀가 말했다.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은 표정이었다.
(끝)
정희자
2007년 크로스로드에 「지구의 아이들에게」를 실었다. 『앱솔루트 바디』, 『유, 로봇』, 『커피잔을 들고 재채기』, 『아빠의 우주여행』등의 공동 단편집에 참여했고 『코뉴코피아』, 『화석환초』를 전자책으로 출간했다. pilza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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