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FI

연애소설 읽는 로봇(2)

소설가

2011년 1월 통권 64호

오후 업무가 시작되기 전 임시로 소집된 업무 회의에서 조 성화 부장은 문화부로부터 근로 환경을 조사하는 조사관이 파견되었음을 공지 하였다연방정부에서 의례적으로 실시하는 현장 실사이니 만큼 큰 부담을 갖지 말라는 그녀의 말을 그다지 신뢰하는 직원은 없어 보였다도서관 구석구석을 활보하고 다녀도 되는 자격은 얻었지만 직원들의 시선으로부터는 자유스럽지 못했다고작해야 종합대출실 한쪽에서 윤지수를 노려봐도 되는 위치를 얻은 셈이다나는 스크롤을 펼쳐들고 의미 없는 문서들을 펼쳐 놓은 다음 대출실안을 두리번거리거나 윤지수의 움직임을 조심스럽게 눈으로 쫒았다지수는 간혹 나와 시선이 마주칠 때 마다 짓궂은 표정을 짓거나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사서의 업무를 가까이서 지켜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알 수 없는 일들이 더 많았지만 그녀는 요란하지 않은 쾌활한 몸짓으로 주변의 분위기를 밝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지수가 반납된 도서를 모은 카트를 밀며 서가 사이를 누비는 사이에 스크롤로 에이프릴의 문자 메신저가 연결되었음을 알리는 메시지가 떴다.

 

-[사월이 미네르바 마이티스!!! 꺄오 ^o^)/ ] 뭐해?

-[Chung.Lee - 3할도 못 치는 쓰레기들미네르바 마이티스]도서관에 왔어.

-[사월이 미네르바 마이티스!!! 꺄오 ^o^)/ ] 오호라음흉한 아저씨가 미모의 사서를 스토킹중이시군근데 그 대화명은 뭐 얏?

-[Chung.Lee - 3할도 못 치는 쓰레기들미네르바 마이티스]시끄러조금 있다가 직원들 인터뷰 해야돼용건만 말해.

-[사월이 미네르바 마이티스!!! 꺄오 ^o^)/ ]레지던스 영상 분석 다 끝냈는데문제없음이야활동로그 분석 들어갔어.

-[Chung.Lee - 3할도 못 치는 쓰레기들미네르바 마이티스]혹시 말인데 최근에 지수가 퇴근 후에 레지던스 말고 다른데서 누굴 만난 기록이 있나 살펴봐누군지 알아내면 더 좋고.

-[사월이 미네르바 마이티스!!! 꺄오 ^o^)/ ]뭔가 짚이는 게 있는 거야?

-[Chung.Lee - 3할도 못 치는 쓰레기들미네르바 마이티스]아직이따 말할게나 나간다인터뷰 하러 가야돼.

 

나는 자리에 일어나 지수가 어디 있나 두리번거렸다

그녀는 서가의 중앙 통로 한복판에 서 있었다서가의 한쪽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시선 끝이 어디인지 보기 위해 나는 책장의 반대편 끝으로 가서 그녀의 시선 끝에 서있을만한 사람이 누군가 찾아보기 시작했다지수가 서서 바라보고 있는 쪽 열에는 여고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 두 명과 후드가 달린 청록색 재킷을 입고 있는 사람 하나뿐이었다책장에 가려져 남자인지 여자인지 판단 하기는 힘든 뒷모습의 일부였다내가 다시 중앙통로 쪽으로 몸을 옮기자 지수와 나의 시선이 마주쳤고 그녀는 잠시 얼어붙은 듯 서 있다가 카트를 끌고 서가의 반대편으로 향했다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녀가 바라보던 서가의 열 쪽으로 향했다.

두 명의 여고생은 자신들이 고른 책의 표지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리며 중앙통로 쪽으로 나왔다나는 서가의 책들을 무심히 훑어보다가 아무 책이나 한권을 뽑아 들춰보았다하필이면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이라니나는 잠시 책장을 훑어 보는 척하며 서가 끝 쪽에 서있는 이를 힐끔거렸다지수가 그를 보고 있는 것인지는 불확실하지만 저녁에 그녀의 활동 로그를 분석하다보면 답이 나올지도 모른다처음에는 남자라고 생각 했지만 그건 단지 옷차림과 짧은 단발머리 때문이었다지수보다 한 뼘은 작을 듯한 키에 마르고 나이를 짐작하기 힘든 인상이었다얼핏 보면 열여섯 살처럼 보이기도 하고 다시 보면 20대 후반처럼 보이기도 하는 모호한 얼굴이었다이미 두어 권의 책을 옆구리에 끼고 감각의 논리를 들추고 있던 그녀는 곧 결심을 굳힌 듯 책장을 덮고는 그것을 옆구리에 끼고 있던 책들과 함께 양손에 들었다나는 그녀가 내 곁을 스쳐가는 동안 정면에서 얼굴을 보기 위해 노력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단지 그녀의 머릿결에서 나는 라벤더 향 만 맡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뒷모습을 쫒아 중앙 통로에 나오자 통로 끝에 마주하고 있는 대출대에는 어느새 지수가 서있었다나는 잠시 그녀가 카트를 들고 향했던 서가 끝으로 발걸음을 재빨리 옮겨 그쪽을 들여다보았다 카트는 한쪽 구석에 내팽개쳐져 있었다카트위의 책들도 그대로였다다시 대출대 쪽으로 걸음을 빨리 하며 지금 시간을 보기 위해 시계를 힐끔거렸다시간을 외우고 난 다음 대출대 옆으로 갔을 때 지수는 여자의 책들을 스캐너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나는 잠시 지수와 여자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을 기대하며 둘을 바라보았지만 둘은 서로 다른곳을 보고 있었다여자는 지갑에서 대출카드를 꺼내었다지수는 그녀의 카드를 받기 위해 손을 내밀었지만 여자는 그녀의 손을 못 본 것처럼 카드를 스캐너위의 책들 위에 올려놓았다손을 다시 거두어 단말기를 조작하는 지수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의체들이 출고될 때 초기의 표정이 아닌말 그대로의 경직된 무표정이었다나는 다시 한 번 시계를 보고 시간을 확인 한 다음 대출대 한쪽구석에서 스크롤을 펴고 에이프릴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오늘 오후 4시 37분 로그에 마킹Marking해놔뭔가 낚은 거 같아.

 

근로환경 조사원이라는 위장신분에 충실하기 위해 몇 명의 직원들과 형식적인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시간은 창밖은 어느새 해가지고 난 다음이었다나는 서둘러 짐을 챙겨들고 한 대리에게 연락했다본사에 들렀다가 도서관으로 오는 중이던 한 대리는 30분 뒤에 도착할거 같다고 말했다나는 회의실을 빠져나와 1층에 있는 커피숍에서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하늘은 금방이라도 눈을 뿌릴 듯 한 기세의 구름으로 가득 채워졌지만 지난 삼일동안 계속 그런 기세만 보였을 뿐 눈이나 비는 오지 않았다커피맛을 투덜거리며 앉아있기에는 30분이 너무 길고 지루하게 느껴졌다다시 스크롤을 펼쳐 에이프릴과 이야기나 나눌까 생각 할 때쯤 텅 빈 커피숍 안으로 누군가 들어왔다검은색 외투와 목도리를 한 지수였다지수는 자신의 커피를 들고 내 맞은편에 와 앉았다.

한 대리님 기다리세요?”

나는 대답 없이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그런 내 시선을 눈치 챘는지 지수가 말했다.

어차피 직원들은 거의 다 퇴근 하고 없어요알바생들이나 자원봉사자들은 몇 있지만여기 앉아 있는 거 누가 본다고 해서 곤란한 일은 없어요.”

지수는 양손으로 머그컵을 감싸 쥐고 커피 잔의 온기를 느끼려고 하는 자세마냥 어깨를 움츠린 채로 앉아 있었다

의체 시스템은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기온에 적응하는 능력이 뛰어나다의체시스템의 활동을 위해 적정한 기온과 체온을 유지하고 주변의 환경에 반응하는 능력은 갖고 있지만 인간처럼 추위나 더위라는 개념은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지수의 지금 동작은 자신이 인간처럼 추위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 하에서 이루어지는 행동이다아니실제로 추위를 느끼지 못하더라도 인공인격체는 주변의 인간들과 교류하기 위해 그런 판단을 내린다그녀의 손에 들린 커피 만해도 그렇다애초에 몸에 내장된 핵전지 만으로 인공인격체는 600년 이상을 생존 할 수 있다합성유기체로 이루어진 의체의 미용을 위한 정비를 포기하는 불편을 감수하면 그보다도 더 오래 정비 없이 생존이 가능하다그들이 음식을 먹는 것은 어디 까지나 행위의 가치에만 초점이 맞춰 진 것이다식사를 하며 나누는 대화나 차를 마시며 이루어지는 사교활동에서 소외 받지 않기 위해 인공 인격체들은 적정수준의 미각 센서와 2리터 정도의 물과 음식이 들어 갈만한 인공장기를 갖추고 있다그것의 대부분들은 소화되지 않고 그대로 버려지지만 말이다.

여기 사장이 바뀌고 난 다음에 커피 맛이 변했어요.”

지수가 말했다.

안 좋은 쪽으로 변한 것 같은데?”

지수는 웃으며 목도리를 매만졌다.

맞아요.”

지수는 들고 있던 핸드백에서 문고판 사이즈의 작은 책 한권을 꺼냈다한 대리가 올 때까지 읽고 있을 요량인가보다데이지 문고에서 나온 로맨스 소설이다.

하루에 보통 몇 권정도 읽어?”

대중없어요대여섯 권아니면 쉬는 날에는 더 많고요.저는 인간보다는 읽는 속도가 빠르니까요.”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그녀에게 하려던 질문을 하기에 지금이 적절한 때인가를 생각해보았다어느 시점이건 부적절하긴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동시에 양자두뇌 조사관이라는 내 직책에 따르면 언제든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나는 잠시 질문을 미루기로 하고 편안한 자세로 고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기로 했다감각이나 신체적 능력이 인간보다 뛰어나기에 인공인격체들의 동작에는 군더더기가 없다그들은 한 자세로 오래 앉아 있는 것이 불편해 몸을 뒤척이거나 주변에 주의를 빼앗기는 일도 없고 인간들처럼 나쁜 자세를 취하는 버릇도 없다허리를 곧게 펴고 앉은 그녀는 시선을 책 쪽으로 내리깔고 오직 페이지를 넘길 때에만 가늘고 곧게 뻗은 손가락을 움직였다직업적인 버릇 때문에 동공의 움직임을 유심히 보는 버릇이 있는 나는 그녀의 눈이 문단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것이 아니라 글을 한 줄씩 읽고 있음을 깨달았다때로 그녀는 문장을 입속으로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지수가 책 읽는 것을 방해하고픈 마음이 없어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커피숍안에는 음악이 흐르고 있었는데 가만히 집중해서 듣다보니 몇 세기는 지난 옛날 노래였다하지만 나 역시 어린 시절에 좋아했던 노래라 박자에 맞춰 의자의 팔걸이에 올려놓은 손가락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I never really cared until I met you, And now it chills me to the bone......’

그냥 머릿속으로만 따라 부른다는 게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 나왔다나는 흠칫 놀라 지수를 바라보았다그녀도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추고 내게 눈을 고정 하고 있었다.

나는 작은 소리로 미안.’이라고 중얼거린 다음에 다시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이 노래 제목이 뭐였죠?”

오래된 노래야. Heart의 Alone일걸.”

지수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다시 책으로 눈길을 돌리는가 싶더니 이내 책을 덮었다그녀는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은 채 눈을 감았다노래가 다 끝나갈 때쯤에야 그녀는 피식 웃음 지었다.

가사가 되게 유치해요.”

당연하지남의 연애는 다 유치해보여.”

조사관님도 그랬어요?”

무슨?”

결혼하셨잖아요부인하고는 어땠어요어디서 처음 만났어요연애는 몇 년 정도 하신거에요?”

대출실에서 본 이후로 시든 꽃잎 같던 표정에 생기가 돌았다호기심은 양자두뇌의 구조상 자연스러운 본능이다하지만 이런 식으로 인간의 사생활에 관심을 갖는 녀석은 처음 본다.

나는 잠시 침묵으로 거부의 의사를 밝혔지만 지수는 물러서지 않았다그녀는 여전히 무릎위에 올려놓은 가방에 양손을 올려놓고 몸을 내 쪽으로 기울인 채 내 눈을 들여다보고 있다.

알았어지금부터 듣는 것들은 로그에 남기지마.”

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내를 만난 것은 상해에 주둔한 원정군 통합병원에서 무릎 수술을 받고 난 다음이었다수술 후 회복을 기다리던 나는 모든 것에 무료함을 느끼고 있었다수용소를 나온 후로는 단 한 줄의 문장도 읽을 수 없었다그것은 수술동의서와 인공관절교체에 관한 만테크닉스의 설명서도 마찬가지였다신문과 방송 모든 것에서 눈과 귀를 닫고 한 달을 보냈다전쟁이 끝나간다는 소식도 옆 병상에 누워있던 병사를 통해서 들었다

남중국군은 베트남과 라오스에서 완전 철수하기로 하고 대한연방군은 인도네시아를 연방 부속국에서 군사보호령으로 격하 시키는 선에서 양보하는 것으로 2년간의 전쟁이 마무리 되가는 중이었다생애 가장 길고 지루한 시간이 찾아왔다귀국선을 탈 날짜는 하염없이 미루어지고 있었다듣기로는 상해에 주둔중인 해군도 완전히 철수한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무엇도 확실한 것은 없었다병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읽는 것조차 못하니 병상에 누워있으나 관에 실려 전사자 유해보관소의 냉동고에 누워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신세였다차라리 관에 실리는 쪽이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로는 지름길이었다

상해와 하이난의 전사자 유해보관소는 빈자리가 없었다그곳은 24시간 풀가동되는 냉동식품 공장 같았다개전초기의 병력수송보다 종전 뒤의 전사자 유해 수송에 더 많은 자원이 소모되고 있을 정도였다같은 수용소에 있던 육군대위 하나가 병원에서 사망하게 되었다수용소에서 얻은 폐렴 때문이었다그는 내가 있던 막사의 옆 동에 있었다종종 그와 식사시간에 그릇과 수저를 먼저 차지하기 위해 미묘한 신경전을 벌여야 했던 수치스러운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의 유해가 본국으로 송환되는 날나는 훙차오 공항으로 영송식에 참석하러 나갔다몇 년 만에 입는 예복의 상의는 갑갑하고 바지는 헐렁했다그늘하나 없는 활주로 한구석에서 수송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슬슬 밀려오는 더위 때문에 모자를 벗고는 싶었지만 주변의 육군장교들은 모두 시신이 화물 관리소에서 나오길 기다리며 부동자세로 서있었다마침내 관을 실은 트레일러가 수송기 쪽으로 다가왔고 운구를 맡은 책임장교는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엄숙하고 절도 있는 경례로 유해를 맞이하였다트레일러에서 유해가 담긴 관을 내려 일곱 명의 육군 장교들과 내가 관을 들게 되었다관을 들고 있는 이들중 생전에 그와 같은 곳에서 생활했던 이는 내가 유일했다냉매팩으로 채워진 관의 무게는 생각 보다 가벼웠다관 자체의 무게를 제외해도 여덟사람이 나눠드는 한사람의 무게가 이리도 가벼웠던가 놀라울 정도였다관이 수송기에 실리고 난 다음 나는 잠시 공항 라운지를 배회하다가 시내로 가는 택시를 잡아탔다운구를 위한 영송식에 참여하며 받은 외출증의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달리 목적지도 없던 나를 택시기사가 내려준 곳은 상해미술관 앞이었다폭격에 대비하기 위한 대공포대와 보호구조물로 뒤덮여있던 이 수세기전의 영국식 건물은 종전에 대한 설레임 때문인지 그날만큼은 반짝거리는 느낌이었다잠시 늦봄의 때 이른 더위를 피할 생각에 미술관 안으로 들어간 나는 슬슬 피어오르는 무릎의 통증 때문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아내를 처음 만난 것은 회랑을 절룩거리며 돌아다니던 그때였다그녀는 뭉크의 그림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었다주저앉은 채로 무릎에 고개를 묻고 훌쩍거리며 우는 소리는 회랑의 반대편에서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나는 그대로 그녀의 앞을 지나치려다가 그림 앞에서 멈춰 섰다그것은 죽음과 소녀였다오슬로에 있어야 할 그림이 왜 전쟁중인 상해에 와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잠시 그림 앞에 멈춰서 있다가 발걸음을 돌렸다그러다 고개를 든 그녀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때 그녀의 얼굴은 정말 볼만했다눈물과 콧물로 뒤범벅이 된 얼굴은 녹아내린 눈화장으로 얼룩져 있었다나는 잠시 숨을 멈추고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이대로 발걸음을 계속 옮긴다면 그녀와 나는 영원히 다시 만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무얼 어찌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서있던 나는 그녀의 코에서 흘러내린 콧물이 손등까지 길게 이어진 것을 본 순간 내가 손수건을 갖고 왔던가 생각 하게 되었다예복은 온통 흰색이라 주머니에 무언가를 넣고 다니기에 적합한 옷이 아니었다하지만 나는 병원에서 받은 외출증과 함께 손수건 한 장을 상의의 주머니에 넣어두고 있었다나는 말없이 손수건을 꺼내어 그녀에게 건네주고 뒤돌아섰다그것으로 그녀와의 만남이 마지막이 될 거라 생각했다

적어도 위병소에서 내 외출증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까지는 말이다아마도 병원을 나오면서 위병소에 보여준 외출증을 다시 주머니에 넣을 때 주머니 안에 있던 손수건의 접힌 부분 속으로 들어갔던 것일지도 모른다.

외출증 분실문제는 간단한 경위서에 서명하는 정도로 끝났지만 이야기는 계속되었다일주일 뒤 나는 행정병으로부터 편지 한통을 건네받았다소인이 찍히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누군가 직접 위병소에 맡긴 것이었다봉투 안에는 내 손수건과 편지 한 장이 있었다손수건은 깨끗했지만 마스카라 자국과 립스틱의 흔적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나는 편지를 읽어보려 했지만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정신과 전문의는 장기간의 스트레스로 인한 일시적인 난독증이라고 설명했지만 나는 그 설명을 이해하기 힘들었다의사조차도 자신이 무슨 소릴 한 건지 이해가 안가는 표정이었다

그녀의 편지는 수십 년간 써온 모국어로 된 문장이었음에도 그것은 해독 불가능한 상형문자처럼 보였다어떤 글자는 너무나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고 또 다른 글자는 뒤틀려 있었다그들은 마치 지옥에서 피어오른 유황의 아지랑이처럼 꿈틀대며 내 눈을 찌를 것 같았다편지를 몇 번이고 읽어보려 시도하다가 포기한 나는 결국 그날 밤 편지를 옆 병상에 누운 해병대 병사에게 건네어 읽어 달라고 부탁했다다낭 상륙작전 중에 125밀리 포탄이 옆에서 터지는 바람에 한쪽팔과 몸의 절반이 날아갈 뻔했던 그는 신체와 장기의 절반을 만테크닉스의 의체로 교체 받고 병원에서 귀국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해병은 편지를 조심스럽게 펼쳐든 다음 내게 읽어주었다그는 이것이 자기가 상해에 와서 처음으로 읽어보는 편지라고 했다편지의 내용은 짧고 간결했다.

손수건은 몇 번을 빨아봤는데도 자국이 안 지워지네요죄송해요그리고 고마워요.

그리고 그 밑에는 그녀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있었다비록 종전의 기대감이 흐르고 있지만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해에서 홀로 돌아다니는 고국의 여자가 낯설었다폭격의 위험속에서도 오슬로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상해 미술관에 걸려있던 죽음과 소녀도 낯설고 이상했다읽을 수 없는 편지와 마스카라자국이 지워지지 않은 손수건도 이상했다편지를 읽어준 해병에게 부탁하여 공중전화의 버튼을 대신 누르게 하던 나 자신도 이상했다.

전화를 받은 그녀의 목소리는 힘이 없고 가라앉아 있었다여자에게 처음 전화를 걸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만나고 싶다는 말은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지 머릿속에서 떠오르지 않았다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난 다음에 그녀와 나는 약속 시간을 정했다통화를 마쳤을 때 내 얼굴은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간호장교는 내 얼굴을 보고는 급하게 담당 군의관을 호출하려 할 정도였다.

그녀와 만날 약속일이 다가 오면서 내 고민은 하나둘 커져갔다그중 가장 중요하면서도 사소한 문제는 내가 약속장소에서 그녀에게 연락을 취할 링커가 없었다는 점이다내 링커는 다낭에 정박중인 강습상륙함의 침실 안에 있었다병원으로 보내진 내 개인 비품들 중에 그 것만 빠져 있었다

공중전화를 이용한다고 해도 문제는 여전했다그녀의 전화번호를 외운다 하더라도 문제는 공중전화의 버튼을 맞게 누를 자신이 없었다그렇다고 옆 병상의 해병을 거기까지 끌고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해병은 인내심을 가지고 (오랜 수술과 병원생활을 통해 유일하게 늘어난 것이 그 인내심이라고 했다.) 나에게 그녀의 전화번호를 누르는 연습을 시켰다머릿속에 외운 숫자와 맞는 번호의 버튼을 누르는 방식이 아니라 눌러야 할 버튼의 위치와 순서를 외우는 것이었다열세자리의 번호를 누르기 위한 연습은 이틀이나 걸렸다공중전화부스 한 칸을 둘이서 차지하고 몇 번이고 되풀이하며 연습했다그녀와 약속한 하루 전날 밤에야 나는 전화버튼 누르기를 완전히 익힐 수 있었다내가 열세개의 숫자로 된 전화번호 버튼을 정확하게 누르자 나보다 더 기뻐 한 것은 내게 편지를 읽어주고 버튼 누르기를 연습 시킨 해병이었다그는 다음날 아침 내가 외출을 위해 정복을 갈아입는 동안 종이 위에 전화번호 버튼 의 배열과 같은 열두 개의 사각형을 그려 놓았다그날의 내 외출은 병원 당직장교의 허가보다도 내 옆 병상의 해병 손에 달린 셈이었다내가 종이에 그린 키패드에 전화번호를 정확하게 찍자 그는 웃으며 잘 다녀오라는 인사와 함께 경례를 붙였다

나는 병원으로 돌아오면서 그를 위해 성인잡지 몇 권을 사오겠다고 했다성인 잡지를 구분하는 것은 글을 읽지 못하게 된 나에게도 간단한 일이었다표지에 옷을 적게 입고 있는 여자사진이 있는 잡지만 골라오면 된다.

상해는 수백년의 역사가 쌓아올린 다양한 색상의 퇴적층으로 이루어진 도시였다강력한 부와 번성을 자랑하는 초현대식 고층빌딩가가 있는가 하면 극단적인 빈곤과 고통으로 퇴비처럼 썩어가는 빈민가가 있었다어떤 시기에는 그 경계선이 명확하게 구분 될 정도로 뚜렷한 명암 차이를 보였지만 독립공화국 선포 이후로 상해는 경계선이 모호한 도시가 되어버렸다세계금융계의 맥박을 쥐고 흔드는 금융가는 다운타운과 뒤섞이고 있었고난징시루는 난민들의 캠프와 뒤섞이고 있었다페라가모 수트를 입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임시수도 앞에 줄지은 난민들 사이를 걸어 지나쳐야만 하는 거리가 된 것이다도로의 곳곳에는 UN군과 한국군의 장갑차와 무장 병력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그리고 그들의 뒤로는 상해는 안전합니다.’라는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가 나부끼고 있었다전에는 인민광장이라는 이름이었으나 지금은 독립광장이 된 곳에서 그녀와 나는 만나기로 했었다외출증을 받고 병원 밖으로 나오려면 어쩔수 없이 예복을 입고 나와야 했기에 나는 어디 편하게 앉을 곳도 못찾고 광장 주변을 서성일 따름이었다

나는 분수대 주변을 얼쩡거리다가 같은 현병에게 두 번의 검문을 받으며 약속 시간을 기다렸다약속된 시간에서 10여분이 지나고 난 다음에야 나는 광장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그녀를 발견 할 수 있었다미술관에서 보았을 때와 사뭇 다른 분위기 때문에 첫눈에 그녀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뭉크 그림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펑펑 울던 여자와 푸른색 원피스를 입고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쓰고 깡총거리며 뛰어오는 여자가 동일인으로 보일 리는 없지 않은가

식사를 하는 내내 그녀는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학교이야기상해에 온 첫날 게스트 하우스의 주인과 싸운 이야기검문을 하던 헌병으로부터 전화번호를 알려달라는 청을 받았던 이야기 등등하지만 그 속에는 그녀가 왜 상해로 왔는지어쩌다가 그날 상해 미술관에서 울고 있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상점가를 거닐며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말했다대학교를 다니던중 자원입대 했고부상당해서 지금은 병원에 있다곧 귀국선을 탄다그뿐이었다나라는 사람을 설명할 이야기가 그렇게도 없나 그때는 약간 한심하게 느껴졌지만그때보다 나이를 한참 더 먹은 지금도 마찬가지인걸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인가보다해질녘에 간단하게 술 한 잔 한 다음 나는 오랜만에 힐을 신어 발이 아프다는 그녀와 함께 호텔로 향했다.

침대위에 엎드린 채로 나는 앉아 있는 그녀의 등을 바라보았다그녀는 담배를 피우며 창밖의 야경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고 나는 그녀의 하얀 등만 바라보고 있었다뻗어 닿으면 손까지 얼어버릴 것 같은 창백한 등이었다나는 손바닥을 펴 그녀의 등에 갖다 대었고 한동안 그렇게 그녀의 등을 어루만졌다.

나는 그녀가 묵고 있는 게스트 하우스 앞까지 바래다 준 다음 근처에 문을 연 서점을 찾느라 한참을 헤맸다자정까지는 병원으로 돌아가야 했다하지만 잡지를 살 마땅한 서점이 없어서 결국 편의점에서 성인잡지 몇 권을 급하게 골라 봉투에 챙겼다거리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감지한 것은 그때였다멀리서 또는 가까운 곳에서 구급차 소리가 들려왔고군용 장갑차들이 빠르게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나는 병원으로의 발걸음을 서두르기 위해 택시를 잡아탔다운전기사에게 영어로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그는 오히려 스페인어로 대답하고 있었다상해에서 스페인어로 말하는 택시기사의 차를 타게 되다니.

택시가 병원에 도착할 때 까지 나는 스페인어의 긍정어와 부정어를 배우고 몇 가지 인사말을 배웠다하지만 한밤중에 일어난 소동의 정체는 알 수 없었다.

내가 택시에서 내리기전 기사는 잔돈을 손에 쥐어주며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스타 루에고!”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의 쾌활한 인사와 어울리지 않았다이미 병원으로 들어가는 진입로는 바리케이트가 쳐지고 UN군의 장갑차로 막혀 있었다내가 내린 택시 뒤로는 한국군의 장갑차가 택시에게 당장 길에서 비키라며 확성기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거리는 헌병들과 무장한 한국군으로 가득 차 있었다군인들은 소란에 놀라 거리로 나온 주민들을 거칠게 인도로 밀어 올려 보냈다지휘차량으로 보이는 UN군 장갑차에서 확성기로 나오는 방송은 중국어영어불어일본어한국어로 반복되었다구급차가 지나갈 길을 확보해야 하므로 차도로 내려오지 말고 모두 인도위에 있으라는 내용이었다몇 군데에서는 이미 군인들과 시민들이 거칠게 몸싸움을 하는 중이었다나는 헌병에게 외출증을 보인 다음에야 겨우 병원 앞까지 갈수 있었다나를 안내하는 병장 역시 소란의 원인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나는 병원의 당직실에 들어서서야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바쁘게 단말기를 조작하던 당직병은 생존자 명단에 내 이름을 체크 하며 말했다.

폭탄차량이 병원 앞에서 터졌습니다본관 병동과 서쪽 병동이 피해를 입었는데 지금은 생존자 수색중입니다몇이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서쪽 병동은 내가 있던 퇴원 대기 환자들의 회복병동이 있던 곳이었다

다음날날이 밝자 본격적으로 피해의 규모가 집계되기 시작했다폭탄은 식자재 납품 차량과 함께 들어 온 것이었다그것은 본관과 서쪽 병동이 마주 하는 코너의 주차장에서 폭발했다본관병동의 일부와 서쪽병동의 사실상 전부가 파괴되었다내게 편지를 읽어주었던 해병의 유해는 휴게실에서 일부 발견되었다만테크닉스의 로고가 새겨진 의체의 일부는 병동밖 정원에서 발견되었다.

일주일 뒤 나는 다시 훙차오 공항에서의 전사자 영송식에 나갔다귀국선을 타지 못해 대기 병동에서 하릴 없이 누워만 있던 600여명의 병사들은 최악의 격전지였던 다낭과 하이난에서 살아 돌아온 이들이었다관에 실려 가는 게 고향으로 돌아가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어느 병사의 농담처럼 된 것이다수백구의 시신이 냉동 포장되어 급히 제작된 관에 담겼다상하이와 하이난의 연방군 통합병원은 아시아 최대의 장의업자 양성소가 되었다

종전 후 나는 만테크닉스에서 나와 같이 남중국 원정군에 복무했던 예비역을 만난 적이 있다기술개발부의 이사였던 그는 자신이 상하이에서 처음 선보인 전사자 컨테이너를 최초로 고안했었노라고 자랑한 적이 있었다. ‘전사자 컨테이너는 5개의 관을 한열에 싣고 그 위에 네 열을 더 쌓는 방식으로 수송기의 적재 중량을 최대한 활용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일종의 대형 카세트였다한 개의 카세트는 총 25개의 관을 묶었고그렇게 만들어진 하나의 카세트에는 대형 연방기가 걸렸다

그해 여름에 나는 외부 활동이 가능한 환자라는 이유로 모두 일곱 차례의 영송식에 나갔다죽어서야 고향으로 갈수 있던 전우들을 먼저 보내며 나는 상해에 그렇게 남겨져 있었다.

여름이 다 지나기 전 남중국과의 평화 협정이 맺어지고 곧 종전이 올 것이라는 기대를 배반하고 한국군은 대만을 침공 하였다명목상으로는 한반도-상해-하이난을 잇는 군 보급라인을 안정시키기 위한 임시작전이었다고는 하지만 보급라인 안정화를 위한 임시작전에 왜 새로 당선된 대만 총통을 특수부대가 암살했냐고 묻는 질문에 답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몇 번의 기대와 배반이 반복되던 끝에 가을이 되어서야 귀국선을 탈수 있었다나는 집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글을 읽지 못했고 그녀를 머릿속에 떠올리지 못했다그날밤 내 손에 닿았던 그녀의 등이 주던 서늘한 촉감은 아직도 손 끝에 남아 있는 듯했지만 나는 그녀를 다시 찾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것은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어느 날 나는 문득 상해 미술관에서 본 뭉크의 그림이 떠올랐고그때 그것이 왜 전쟁중의 상해에 있나 하는 의문을 가졌었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컴퓨터 앞에 앉아 뭉크의 죽음과 소녀에 관련된 기사들을 코스모 넷을 통해 검색하기 시작했다몇십 가지의 기사가 연달아 나왔다남중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상해미술관은 근대 미술가의 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다뭉크의 그림은 그 기획전에 대여된 그림이었다전쟁이 발발하자 노르웨이 정부와 오슬로 미술관은 상해공화국 정부에 뭉크의 그림을 즉시 반환해달라고 요청하며 특별기와 호위할 병력까지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그러나 당시 상해를 점령한 한국군은 전시이니만큼 안전을 보장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반환요청을 거절했다전쟁 기간 중 그림의 반환 요청은 노르웨이와 상해공화국대한연방을 오가며 외교적 채널과 보험회사의 법적 소송을 오갔지만 딱히 결론이 나지 않았다결국 그림은 그대로 미술관에 걸린 채 중국군의 로켓 공격 속에서 일 년여의 시간을 견뎌내었다한 애호가가 자비로 그림을 안전하게 보관할 금고를 대여해주겠다고 한국군에게 제안했지만 그 요청은 예술작품은 갤러리에 걸려 있을 때 그 생명을 얻는 것이라는 미술관장의 고집에 부딛혔다심지어 그는 인터뷰 중에 신께서 그 창조물인 인간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의 정수를 포화로부터 지켜 주시지 않겠느냐.’는 소릴 했다가 보험회사 담당자로부터 뭉크는 신에게도 버림받았다신께서 그런 그의 작품을 포화 속에서 지켜줄리 있는가.’라는 막말 세례를 받았다이 신이 버린 뭉크’ 말싸움은 한동안 언론의 가십란을 오가며 독자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날 상해 미술관에 걸린 죽음과 소녀에 대한 의문을 푼 순간 나는 또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죽음과 소녀에 관한 기사는 내가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이후로 처음 읽은 글이었다의사조차도 의심에 찬 목소리로 말하던 스트레스성 난독증은 그렇게 갑자기 사라졌다이유 없이 와서 이유 없이 사라졌다나는 그 등장과 소멸방식이 마음에 들었다다시 글을 읽을 수도 있었고 쓸 수도 있었다쓸 것도 읽을 것도 없는 생활이었지만 말이다

그제야 나는 그녀가 남긴 편지를 다시 꺼내어 보게 되었다이미 상하이에서 옆 병상의 해병이 읽어준 적이 있는 짧은 편지였지만 그녀가 직접 쓴 글을 다시 읽어보고 싶었다.

나는 구겨진 그녀의 편지를 다시 펼쳐 읽었다편지의 내용은 내가 기억하던그리고 해병이 읽어준 내용과 달랐다그러나 그녀의 이름과 전화번호만은 똑같았다.

나는 반갑 정도 줄담배를 피운 다음 그녀에게 전화를 하기로 했다.

 

편지의 내용이 달랐다니요그게 무슨 말이에요?”

하여튼 그 뒤로 연락하게 되어서 계속 만나게 되었어그러다 결혼까지 한 거고.”

그건 제 질문의 답이 아니잖아요.” 

나는 금방이라도 화를 낼 것 같은 얼굴을 한 지수를 보며 빙긋이 웃고는 한 대리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한 대리 왔다어서 가자.”

레지던스로 가는 내내 지수는 말없이 불만에 가득 찬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M-Port에서 정비를 받는 동안 다운로드 받은 그녀의 데이터들을 미네르바로 보내고 나서 나는 잠시 시간이 비어 그녀가 모아 놓은 책들을 들춰보고 있었다책들은 그것들이 쌓여있는 위치만큼이나 그 종류도 종잡을 수 없이 다양했다소설들은 적어도 로맨스물이라는 특정 취향에 따른 것들이 많았지만 그 외의 비소설들은 도무지 취향이나 관심분야를 특정 지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지수는 하드디스크에 포르노를 차곡차곡 쌓아두는 중독자처럼 책을 모으고 그것들을 읽고 있었다.

스크롤로 미네르바의 에이프릴이 화상 통화를 요청하는 메시지가 떴다.

화면으로 보이는 에이프릴의 머리는 금방 감은 듯 물기로 젖어 있었다.

또 연구실에서 잔거야?”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며 에이프릴은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과 의 애매한 중간 발음을 내뱉었다.

급한거야아니면 머리 말리고 올 시간은 충분히 있잖아.”

에이프릴은 음성마이크에 대고 말하지 않고 키보드를 직접 두들겨 문자메세지를 보냈다.

-[사월이 미네르바 마이티스!!! 꺄오 ^o^)/ ] 거기는 지금 저녁이지에이프릴 옆에 있어?

, DM중이야왜 그래?”

-[사월이 미네르바 마이티스!!! 꺄오 ^o^)/ ] 아까 보내준 덤프 열어봤어충민씨가 마킹하라고 했던 부분 말이야로그가 지워졌어.

?!”

내 목소리가 너무 컸는지 한 대리와 지수가 나를 동시에 돌아보았다나는 헤드셋의 마이크 부분을 입가에 바짝 갖다 붙이고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머리 말리고 나서 스캔그래프 다시 보내줘 봐.”

-[사월이 미네르바 마이티스!!! 꺄오 ^o^)/ ] 알았어복구 해보려고 했는데 안 될 거야아마그 부분만 레코드 오프 모드였는지도 몰라인덱스는 있는데 인스턴스가 없는걸 보면기록된 로그를 지운 게 아니라 아예 메모리에 넣지 않은 거겠지. STM, LTM, 가비지 콜렉터모두 흔적이 없어.

 

나는 소파에 몸을 묻으며 신음소리를 냈다덤프 된 메모리에서 데이터의 특정부분이 사라지는 이유는 몇가지다전송과정의 오류로 일어난 손실이거나 M-Port의 조작자가 고의적으로 지운 경우한 가지 더 꼽아보자면 양자두뇌가 고의적으로 지운 경우다마지막의 경우가 가장 골치 아프다양자두뇌로부터 대답을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물론 그것이 내일이긴 하지만 말이다이제 나는 딸아이의 가방에서 콘돔과 담배를 발견한 아버지처럼 팔장을 끼고 자리에 앉아 지수가 정비를 마치고 M-Port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서관에서의 활동 로그를 왜 지웠냐는 질문에 지수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어떤 변명을 할 것인가시스템상의 오류라는 핑계를 댈 수도 있다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은 당연히 알 것이다간파될 거짓말을 해야 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까지 중대한 규정 위반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그것도 창조주나 다름없는거의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양자두뇌사고조사관을 버젓이 곁에 두고서 말이다정비를 끝낸 한 대리는 손을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고 지수는 방에서 옷을 입고 나왔다옷이라고는 해도 무릎을 겨우 가릴 정도의 커다란 긴팔셔츠 한 장이 전부였다.

집에서는 옷을 항상 그렇게 입어?”

정비가 끝나면 여긴 제 개인 공간이에요.”

개인이라고 말할 때의 인자는 사람인 자라는거 알지?”

지수는 빙긋이 웃으며 얼굴을 내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한 대리님 가고나면 마저 이야기 해 주셔야돼요.”

인공인격체는 성대를 울려 말을 하지 않는다기본적으로 호흡을 필요로 하지 않기에 그런 것이다내 귀에 속삭이는 지수의 목소리에는 숨결이 없다다만 희미한 라벤더 향이 났을 뿐이다그들의 몸이 호흡하는 것처럼 보일 때는 자신을 인간처럼 보여야 할 필요가 있을 때뿐이다.

한 대리가 레지던스의 문을 나서는 것과 거의 동시에 스크롤로 에이프릴의 메시지가 들어왔다지수의 오늘자 두뇌활동 로그 데이터가 전송된 것이다로그의 그래프는 특정 지점에서 끊어졌는데 그것이 오늘 내가 마킹하라고 일러두었던 지점이라는 것은 다시 확인 해 볼 여지가 없었다.

그거 내려놓고 M-Port에 앉아.”

맥주캔을 들고 부엌에서 나오던 지수는 멈춰 서서는 내 얼굴을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왜요일일정비는 끝났잖아요데이터가 누락 된 게 있나요?”

누락이 아니라 고의적으로 기록 하지 않은 거지.”

그게 그거네요.”

지수는 사뿐거리는 걸음으로 내 앞에 다가와 맥주캔을 내밀었다.

드세요시원해요.”

나는 잠시 손을 들어 그녀가 들고 있는 맥주캔을 집어 던질까 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프라임 오더, M-Port에 앉아.”

 

데이터 링크를 지수의 목뒤에 꽂으며 나는 잠시 지독한 성도착 범죄자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죄책감을 느꼈다메인 체어에 앉은 지수는 셔츠가 말려 올라가 음모가 훤히 보일 정도였다나는 셔츠자락을 끌어내리고 그녀의 다리를 가지런히 펴준 뒤 지수를 내려다보았다지수는 메인체어에 반듯이 누운 자세로 눈동자만으로 내 움직임을 쫓고 있었다메인체어 위의 모니터에 그녀의 두뇌 활동 그래프가 그려졌다잠시 연결 상태와 기록 모드를 확인 한다음 나는 의자를 끌어다 그녀의 머리 맡 옆에 앉았다지수는 마치 연쇄 살인마의 제물이 되려는 무고한 여인처럼 몸을 결박 당한채로 누워있는 모양이었다몰론 그녀의 몸을 결박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그녀의 움직임은 프라임 오더를 받기 위해 양자두뇌에서 제어하고 있는 것이다영화에서 대충 이런 분위기라면 한 대리 같은 이가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와 내 머리에 총알을 박을 것이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 노력 하며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본론부터 바로 들어가자오늘자 오후 4시 37분 전후의 5분간 도서관 대출실에서의 활동기록이 존재 하지 않아기록을 하지 않은거야아니면 기록한 것을 지운거야?”

지수는 대답 없이 잠시 침묵을 지켰다모니터에는 그녀의 두뇌 활동 그래프가 단오날 그네처럼 춤추고 있었다.

거짓말 하려고 머리 굴리지 마.”

거짓말 하려는 게 아니에요이유를 찾는 거라고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그녀가 대답했다.

그 이유가 어디 있지어쩐지 오늘자 데이터에는 없을 거 같은데?”

내가 스크롤에 저장된 이전 데이터를 가져오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 하자 갑자기 지수의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모니터의 그래프는 모니터 밖으로 뛰쳐나올 듯이 솟구치고 있었고 몇군데 시스템에서는 알람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무슨 짓이야?”

부탁이에요이런 상태로 말하고 싶지 않아요제가 말할 기회를 주세요.”

기록을 누락 시키는 순간에 이미 기회를 잃어버렸다는 거 몰라?”

이런 말을 하고 있자니 어쩐지 더스틴 호프만을 치과의자에 묶어 놓은 로렌스 올리비에가 된 기분이었다그 영화 제목이 뭐였더라?

그녀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단지 표정만 그런 것이다인간형의체에는 안구의 건조를 막기 위한 눈물샘이 존재하기는 한다하지만 저장된 눈물의 양은 그저 안구의 건조를 막기 위한 양 뿐이다눈물이 안구 위를 덮는 것도 그저 안구표면이 건조해졌을때 만이다양자두뇌에는 눈물을 흘리는 기능이 없다지수는 스스로 몸을 일으키려는 듯 몇 번이고 몸을 움직여 보려 했지만 양자두뇌의 중앙부에서 그것을 프라임 오더로 강력하게 막고 있었기에 그저 발작환자의 경련과 같은 움직임만을 보이고 있을 뿐이었다센서가 망가져 식탁 밑을 헤매며 식탁 다리에 몸을 부딪히는 고장난 로봇청소기를 볼 때도 유쾌하면서도 안타까운 기분이 드는 법이다하물며 여자의 몸을 하고 거의 벌거벗겨진 채로 누워있는 인공인격체를 본다는 것이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다.

양자두뇌사고조사관들은 회사로부터 인간의 모습을 한 조사 대상에 대한 감정이입의 위험성을 주기적으로 강조 받는다지수가 그런 위험의 이면에 있는 틈새를 노리고 하는 행동일까 잠시 생각 해 보았다그런 것은 모니터의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나는 잠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담배가 피우고 싶다.

좋아일단 네 이야기를 들어보자만약 내가 의문을 가지게 되는 부분이 있다면 난 다시 데이터를 확인 해 볼 거야프라임 오더 해제.”

지수는 몸을 메인체어에서 튕겨 오르듯 일으켜 나에게 달려들었다.

 

그런데 꼭 이런 자세로 이야기를 들어야 해?”

왜요무거워요?”

지수가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의체를 구성하는 재질 중 합성 유기물질들은 대부분 인체를 구성하는 것들과 질량이 비슷한 수준이다 그러나 때로 골격의 일부에 티타늄이나 강화 합금이 사용되기도 한다지수와 같은 체형이라면 인간의 경우 보통 50kg대 초반의 몸무게이겠지만 그녀의 몸무게는 70kg정도에 달한다이나마도 그동안 의체 소재의 경량화 연구 덕분에 가능해진 것이다나는 무릎위에 앉아 있는 지수를 잠깐 들어 올리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소파에 몸을 반쯤 뉘인 내 위에는 지수가 안겨 있었다방안의 감시 카메라는 분명히 이 장면을 찍고 있을 것이다카메라에 담긴 영상을 의무적으로 제출할 필요는 없지만 이후의 비정기적인 감사나 특별 조사에서 이 영상이 외부에 공개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그것은 지수도 알고나도 아는 사실이다.

나를 곤란하게 하려는 거지?”

내 머리를 쓰다듬던 지수는 동작을 멈추었다.

아니면 스스로 곤경에 처하고 싶어하던가.”

지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도서관에서 만났던 성실한 사서도 아니고 아이처럼 구는 버릇없는 여자아이도 아니었다의체는 양자두뇌의 모든 감정과 활동을 전부 표현해내지 못한다인체와는 다른 점이 그런 것이다하지만 인공인격체가 소름끼칠 정도로 사람과 같이 행동하고 반응 할 때는 의외로 쉬운 결론을 내릴 수 있다자신의 모든 행동을 인간처럼 보이게 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결론이다지수는 지금 영혼을 상처받은 소녀를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지수가 몸을 일으키자 나는 다시 자세를 고쳐잡고 소파위에 앉았다지수는 내 앞에 서서 어찌 해야 할 바를 모르는 어린 아이처럼 벌벌 떨고 있었다.

그 여자를 처음 만난게 언제지도서관에서 만난건가그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기록을 누락 시킨거야?”

질문이 너무 많아요이야기는 하난데.”

복잡한 이야기로 만들려고 하니까 그렇지.”

시시한 이야기에요.”

잠시 낯선 이의 집안에 들어 온 것처럼 거실 안을 걸어 다니던 지수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인희씨는 리처드 애덤스의 소설을 찾아 달라고 했죠. ‘워터십 다운서가 정보를 검색하는 DB에서도 찾을 수 있었는데도 저에게 와서 찾아 달라고 했어요저도 사실은 몇 달전부터 저에게 말을 걸어주길 바라고 있었어요책 안에 박혀있는 데이터 침을 스캔 하는 것은 제 몸 안의 스캐너만으로도 충분했어요하지만 그러지 않았죠일부러 서가를 눈으로 쫓으며 책을 찾았어요계속 제 옆에서 따라다녔거든요인희씨가 제 옆에서 긴장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저와 몸이 닿을 때마다 움찔거리는 것도 느꼈고요그건…… 새로운 경험이었어요어떤 건지 아시죠저라는 존재에 대해서 그런 반응을 보이는 인간은 처음이었거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이쯤 되니 모양새가 정신분석의와 환자의 상담 같은 모양새가 되었지만 정작 소파에 누워 있는 것은 나였다.

양자두뇌는 주변의 변화와 자신이 상대 하는 인간의 반응을 다람쥐가 도토리 모으듯이 열심히 수집한다반응이 온전히 자신에게 향한 것일 때 데이터는 훨씬 더 가치가 높아지기에 양자두뇌는 끊임없이 그 데이터를 축적하기 위해 행동한다.

나는 그녀의 혈압과 맥박두뇌 활동에 주의를 기울였어요미세표현 감지를 위해 모든 감각 센서들을 동원했죠그 결과 나는 결론을 내렸죠위험한 결론이긴 했지만 저에게는 가치가 있었어요.”

나는 위험이라는 단어에 관심을 두었지만 지수는 가치라는 단어로 위험을 덮고 있는 뉘앙스였다.

그래서먼저 말을 건 것은 누구였지?”

인희씨였어요며칠 뒤 도서관에서요. 2층에 있는 작은 정원이었죠저는 차를 마시러 잠시 나왔고인희씨는 담배를 피우러 나왔어요그러다 마주쳤는데 직원소개 게시판에서 제 사진을 봤다며 인사하더라고요장기 미반납자들에 대한 농담을 조금 하다가 대출중인 책이야기가 나왔는데 마침 제가 대여해놓았던 책이었죠직원대여는 3개월이었거든요저는 제가 그 책을 갖고 있으니 빌려주겠다고 했어요그래서 인희씨의 집에 가게 되었죠.”

한 진구 대리에게는 뭐라고 하고 나왔지퇴근 후에 집에 들어왔다가 다시 나간거야?”

지수는 잠시 침묵했다나는 그 침묵의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한 진구 대리와 당일의 활동 로그를 확인 해 보면 될 일이다.

도서관 직원에게 전해줄 물건이 있다고 얘기 하고 나왔어요.”

나는 신음소리를 내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갑자기 기저귀를 차고 요람에서 뒹굴고 있을 딸아이가 생각났다그래언젠가 이런 날이 다시 오겠지영원히 오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인희씨의 집에 갔더니 저녁식사가 준비되어 있었어요저녁은 사양 하고 책만 전해주고 나오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죠조사관님이 그 테이블 세팅 해놓은걸 봤어야 해요거기서 그냥 돌아 나온다면……그래서 저녁식사를 하고이야기를 나누다가……......”

말끝을 흐리는 지수를 바라보는 내 표정이 어땠을지는 짐작도 하기 싫다외박하고 돌아온 딸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표정은 아니었을까.

섹스를 했죠.”

이제 나는 어떻게 반응 할 것인가집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 던지며 나가너 같은 딸년 둔적 없다당장 내 눈 앞에서 사라져!’ 라고 외쳐야 하나다행이도 나는 그러진 않았다그저 헛기침을 하고 거실 한쪽에 쌓여진 책들로 시선을 옮겼을 뿐이다.

불편한 이야기 인가요?”

내가 고개를 젓자 지수가 손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체온이 조금 상승하고 맥박이 빨라졌어요.”

지수는 웃으며 내 옆에 앉았다.

다음날까지는 혼란스러웠죠하지만아시죠우리가 그런 혼란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아니저만 그런가요어땠어요다른 APO들은같은 라인의 다른 아이들도 보신 적 있어요?”

“ARX-30번대 시리즈가 너희랑 비슷하지.”

 

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잠시 말을 덧붙이려다가 참았다이 일과는 관련 없는 이야기다.

나는 얼른 몸을 일으켜 아까 지수의 손에 들려 있던 캔맥주가 놓여있는 스툴 쪽으로 갔다맥주캔을 따며 내가 말했다.

그래서마저 이야기 해봐그 뒤로도 계속…… 인희씨그 여자를 만난거야?”

지수는 웃음을 지었다씁쓸한 감상과 좋았던 날들에 대한 추억그리움이 담긴 웃음이었다지수가 인간의 미세표현을 분석하는 수준 정도는 안 되지만 인공인격체의 미세표현을 분석하는 실력은 나도 그럭저럭 갖춘 편이다.

세 번째 만났을 때날 사랑한다고 했어요거짓인지과장된 감정인지 구분할 정도의 능력은 있었죠나는 인희씨가 나를 위해 속삭여주는 말들과 나를 어루만질 때 느끼는 감정들은 모두 제 안으로 흘러들어 왔죠그녀는 진심으로 행복했어요나는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랐어요인간의 말로 가장 간단하면서도 광범위하게 표현 할 수 있는 말이 있었죠. ‘나도 사랑해.’ 그렇게 되었어요.”

갑자기 머릿속에서 이전까지는 내팽개쳐두었던 전선 한 가닥을 찾아낸 기분이었다그것을 어딘가에 연결한다 해도 불이 켜질지 말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얼마나 만난거지?”

짧았어요. 3개월이네요.”

왜 헤어진 거지네가 APO란걸 알렸어?”

지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그걸 알아차린 징후는 없었어요그래서…….”

지수는 한동안 말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더 갑작스러웠죠.”

침묵이 이어졌다나는 미지근한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고 그녀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지수는 무릎위에 올려놓은 양손을 맞잡고 손가락을 비비고 있었다인공인격체들은 동작에 군더더기가 없다그들의 모든 손짓과 표정은 의도된 움직임이며 모든 행동에는 그 이유가 존재 한다인간처럼 다리를 떨거나 손장난을 치는 무의미하고 습관적인 행동이란 존재 하지 않는다나는 이런 사소한 것들로 리포트를 다 채우는 방안을 슬슬 고려해보기 시작했다.

우리는 왜 눈물을 흘릴 수 없는 거죠?”

창밖으로 벗어나려던 내 시선을 지수의 말 한마디가 붙잡았다.

그녀는 묘하게 균형이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그런 기능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모든 이별은 갑작스럽게 찾아온다만남이 갑작스러운 것만큼이나 이별도 그런 것이다끝이라는 것에 징후가 있던가평평한 탁자의 면이 끝나갈 때 그 끝을 알리는 무엇이 존재한단 말인가탁자 위를 구르는 연필을 상상해보자영원히 자신을 몸을 받치고 있을 줄 알았던 탁자가 끝이 있음을 알아차릴 때는 그 몸이 떨어져 내릴 때이다추락의 과정에서야 비로소 탁자의 너비가 유한함을 알게 된다끝이 오고서야 징후들을 알아차린다사소한 말표정행동오해들을 되새기면서 그것이 끝을 알리는 징후였다고 여기게 된다그러나 이미 끝지점에서 발을 떼고 난 다음에는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모든 것들이 끝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하더라도 테이블의 끝에서 바닥으로 추락하는 연필의 입장에서는 그 변화가 여전히 갑작스러운 것이다변화는 늘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듯 보인다때때로 그것은 찰나의 순간과 같아서 그 지점을 통과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그것이 변화였음을 깨닫게 된다.

서재 안에서 나는 송 화정 특무관의 앞머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초안으로 보낸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모니터 속의 그녀는 늘 지쳐 보이지만 그것을 지탱할 힘이 있다는 자부심을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방금 미용실에 들러 세팅하고 온 듯한 완벽하게 아름다운 곡선을 흘리며 이마위로 떨어진 앞머리가 그 증거일수도 있겠다자신의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화정이 허리를 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시적인 데이터 플로우 오류로 보고할 건가요?”

설명 할 수 있는 가장 간결한 내용들만 옮겼습니다.”

어차피 조사관님의 회사 내부 문제가 되겠지만 일부러 찾아보려 한다면 비어있는 곳이 상당히 많지 않나요첫째로 윤지수는 담당정비사에게 알리지 않고 외부인과 접촉했어요접촉 사실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있지만 정비사에게 의도적인 거짓말을 해왔다는 점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요이렇게 되면 그누구죠아 한진규 대리 역시 좀 골치 아프겠네요담당 제품이 자신을 속이고 연애질에 몰두하는 동안 어떤 의심도 못했다는 건......”

그건 한 진규 대리 입장에서도 변명의 여지가 있습니다양자두뇌의 활동 데이터가 모두 정비사에게 공개되진 않습니다양자두뇌가 접촉하는 대상이 인간일 경우에는 그 대상의 사생활정보 보호 문제도 있기 때문에 일부 데이터는 감춰지거나 볼 권한이 없습니다지수는 그여자 집에서 밤을 새고 온 적이 없었어요신데렐라처럼 늘 자정 전에는 들어왔죠문제가 있다면 지수 때문에 한 대리의 초과 근무 수당이 더 발생했다는 정도일까.”

만약에 그 여자가 생명윤리수호대 같은 단체의 일원이거나 그와 사상적으로 연관이 있었다면 어쩔 뻔 했어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그 부분 때문에 회사 보고 전에 미리 귀띔 드리는 겁니다제가 도서관의 대출기록을 뒤져 그 이인희라는 여자의 정보를 열람 할 권한은 없습니다그 때문에 특무관님의 도움이 필요한거죠.”

실은......”

화정은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말했다.

그 이인희라는 여자의 신원조회는 마쳤어요서른한 살독신이고 시간강사로 인하대에 나가고 있어요사상 조회에도 걸릴만한 것은 없고과격단체 활동경력도 없고요적어도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정보에서는 모두 안전해요.”

내가 잠시 멍한 얼굴로 말문이 막혀 있자 화정이 웃으며 말했다.

알아요알아요우리가 빨대를 하나만 꽂는 건 아니거든요.

내가 뭐라 말하려 하자 화정이 말을 막았다.

걱정 말아요에이프릴은 아니니까일단 이건에 집중해보죠

요약 해볼까요당신네 제품하나가 사소한 작동 오류를 일으켰어요크게 문제가 될 내용도 아니고 그냥 넘어갈수도 있는 말 그대로 사소한 오류지만 회사는 사소한 오류라도 책임지고 예방한다는 인상을 남기고 싶어하죠그래서 조사관님이 파견되었고요그래서 훑어보니오호라연애 스캔들이네요지수는 예쁘고 매력적이니까 그런 일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죠이 경우에는 상처받은 쪽이 양자두뇌라는 게 문제지만하여튼 그 대상이 되는 인간도 이미 신원 조회를 마쳤어요신의 피조물을 모방한 로봇이 인류를 정복하려한다고 외치는 망상에 빠진 테러리스트도 아니고 자유인민연합에 반감을 품은 극렬주의자도 아니에요그냥 해프닝이죠그렇게 보고하면 끝나요지수는 그 여자와 관련된 기억을 삭제하면 그만이고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면 되요아니 어쩌면 다른 직장으로 배치를 받을지도 모르겠네요이번일 자체가 그녀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이 될 거에요조사관님은 크리스마스를 편안하게 가족과 함께 보내시면 되고요그럼 여기서 질문 드릴게요.”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불필요한 위험을 무릅쓰고 이 일을 덮어두려는 진짜 이유가 뭔가요?”

화정은 모니터를 통해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먼저그 전에 저에게 하셨던 제안이 아직도 유효한지부터 궁금하네요.”

나는 대답했다.

 

캔의 바닥에 남은 맥주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털어 마시는 나를 보며 지수가 말했다.

이제 편지 이야기도 해줘요.”

무슨 소리야?”

제 이야기를 했잖아요이제 조사관님 차례에요.”

그런 약속 한 적이 없는데이야기를 주고받기로 한 약속.”

지수는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숙여 턱을 아래로 당기며 나를 쳐다보았다노려봤다는 이야기다

이상하지 않아요조사관님 이야기는 의문투성이에요부인은 상해에 왜 있었던 거죠엄연히 전시상태였던 상해에 가족도 없이 여대생 혼자 있었잖아요병원에서 해병이 읽어줬던 편지가 원래의 내용과 달랐다는 것은 뭐고요?”

안 물어봤어.”

왜 안 물어 봤죠?”

캔맥주를 마시면서 혀 끝으로 구멍을 핥는 습관은 위험한 것이다나는 간혹 그러다 혀 끝을 다치는 경우도 있다캔을 버릴 곳을 찾기 위해 잠시 두리번거리는데 지수가 다가오더니 내 손의 빈 캔을 홱 빼앗아버렸다.

같이 있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 했으니까.”

나는 맥주 때문에 트림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

의심 같은 거 해본 적 없으세요?”

너는질문을 하고 대답을 듣는 것은 내 일이니까 네가 대답해야 해그 여자가 너에게 접근한 의도를 의심해 본적 없어네가 감지할 수 있는 신체반응이나 미세표현들의 밖에 숨겨진 다른 의도나 감정들 말이야너희들이 수집해서 판단하는 정보가 반드시 옳다는 보장은 없어.”

사랑은 옳고 그름에 있지 않아요그건 믿음이죠. ‘눈과 귀에 아무증거 없어도’ 지속될 믿음이요인희씨는 내게 그런 믿음을 말했어요그걸 믿는다는 건 정말 바보 같은 짓이죠우린 그것들을 구분해 낼 줄 알아요영원히 같이 있고 싶다는 말을 할 때도 그 영원이 매분 매초라는 의미가 아니란 것도 알고요그 여자에게 남은 수명은 고작해야 60년 정도죠그나마도 그 염병할 담배를 끊었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겠지만그녀가 말한 영원은 아무리 길어야 100년도 못 넘을걸요난 1000년은 이 모습 이대로 있을 텐데왜 스스로도 못 믿을 말을 그렇게 확신에 차서 말했을까요왜 나를 안을 때 마다 그 여자의 심장은 그렇게 쿵쾅거렸을까요그리고 왜 3개월 만에 나를 몰랐던 사람처럼 대할까요?”

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갑자기 내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기에 적합한 사람인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나는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었다쌀쌀한 12월의 바람이 집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오늘 인희씨를 만났을 때 활동 기록을 누락 시킨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지?”

기억은 차고도 넘쳐요모든 것 하나하나요나를 처음으로 안아주었을 때나에게 처음으로 입맞춰주던 순간내 귀에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목소리원한다면 얼마든지 메모리에서 다시 불러낼 수 있어요적어도 내 메모리 안에서 그녀는 영원히 날 사랑하고 있어요.”

불합치 데이터는 더 이상 안 받겠다는 거야?”

내말에 지수는 곧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모욕을 당한 인공인격체에게는 흔한 반응이다.

조사관님저는 조사관님보다 더 오래 살거에요.”

아마도 그렇겠지?”

어쩌면 우리가 인간의 마지막을 보는 세대가 될지도 몰라요우리가 만났던 사람들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우리를 두려워하고 증오하던 사람들까지 모두 죽고 모두의 기억에서 잊혀지고 난 다음에도 우리는 생존해있을지 몰라요그리고 우리는 영원히 당신들을 기억속에 가져가는 거죠우리는 기억을 나눌수 있어요기억과 감정을 공유하고 그것이 세상에서 잊혀지지 않도록 영원히 보존 할 수 있죠설사 제 몸이 파괴된다 하더라도 저는 저의 데이터를 다른 양자두뇌에게 보내줄 수 있으니까요.”

인간들도 비슷한 일을 해네가 일하는데가 그런 일을 했던 흔적이지 않아?”

책은 불완전해요.”

그럴 거 같긴 하더라연애소설을 그렇게 읽어댔던 네가 실연 한 번에 이러는걸 보면네가 읽은 책 중에는 연애하다 깨진 이야기는 없었니?”

대부분은 다 결혼해서 잘 살던데요?”

넌 독서습관부터 바꿔봐야겠다.”

내가 빙긋이 웃자 지수도 미소 지었다.

기억을 지워주세요.”

지수가 말했다.

 

에이프릴은 스카프를 하고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마음에 들어이거 자기가 고른 거 아니지색깔 보면 알아.”

글쎄화면에는 그냥 칙칙한 녹색으로만 보이는데그런데 상당히 빨리 도착했네.”

시즌에 맞추려고 특별배송으로 보낸 모양이야고맙다고 전해줘리포트도 다 읽어봤어이대로 승인하면 되는 거야?”

나는 아내가 타다준 밀크티 잔으로 손을 옮기다가 잠시 머뭇거렸다분명 소여물 맛이 날것이다.

내 권한이 아니니까상임 어드바이서께서 판단해주세요.”

자기가 몇 개의 규정위반을 묵인 했다는 사실은 잘 알지혹시라도 나중에 지수가 문제를 일으키면 이게 자기 책임으로 돌아갈 거란 것도 잘 알고어디보험은 들어 둔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았어승인은 해주겠어하지만 나도 별도의 의견서를 제출할거야충민씨 보험이 내 보험은 아닐 테니까.”

내가 잠시 말없이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자 에이프릴은 펜으로 카메라를 톡톡 두드렸다.

미안얼어붙었나 하고 잠깐 확인해봤어걱정 마지수는 HFP에서 제외시킬 거야친화대상에 대한 몰입도가 너무 강해얘를 위해서도 한동안 다른 환경이 좋을지 몰라미네르바의 내 연구실로 데려오고 싶어가능하다면.”

연구원으로 쓰겠다는 거야?”

에이프릴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다른 모니터에 떠있는 지수의 영상을 바라보고 있었다아까 그녀의 집에서 대화할 때 내 정장윗도리에 꽂혀 있던 핀카메라에 찍혀 있던 영상이었다에이프릴은 미소 지으며 손가락으로 모니터속의 지수의 머리를 쓰다듬는 시늉을 했다.

나 지금 소름끼쳤어.”

내말에 에이프릴은 폭소를 터뜨렸다.

 

광장 저편에서 나를 발견한 지수는 깡총거리며 달려왔다나는 코트자락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입에는 반쯤 타버린 담배를 물고 있었다빨간색 더플코트를 입고 있는 그녀의 손에는 작은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가까이서보니 그것은 비단향꽃무였다한겨울에 보는 보라색 꽃잎이 낯설었다.

이거요퇴근하는데 어떤 학생이 줬어요향기 좋죠?”

꽃다발로 내 얼굴을 후려칠 듯이 들이대던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조사는 다 끝나신 건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낮에회사에 보고도 했고한 대리는 왜 같이 안 왔어?”

크리스마스이브잖아요오늘도 늦으면 이혼 당할지 모른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광장을 잠시 둘러보았다극장이 있던 자리는 옛 대전쟁 때의 폭격으로 무너지고 그 자리에는 위령탑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이미 어둑해진 광장은 걸음을 바삐 서두르는 사람들과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마저 처리하기 위해 가판을 펼쳐놓은 제과점 사람들뿐이었다특별한 목적지 없이 지수와 나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조성화 부장님한테 인사도 못 드려서 죄송한데.”

괜찮아요제가 부장님한테는 조사관님이 미친 로봇들 잡으러 다니느라 바빠서 그런거라고 말씀 드렸어요.”

내가 웃음을 터뜨리자 지수가 말했다.

정말이에요부장님 그런 거 은근히 팬이에요.”

그런 거?”

드라마요. ‘양자두뇌형사Q’ 같은 거. ‘미안하지만 넌 [해고]!!’”

지수는 총을 쏘는 손짓을 하며 드라마의 대사를 흉내 냈다.

너도 그런 드라마를 봐?”

가끔요그 드라마 제작진 중에는 인공인격체를 직접 만나본 사람이 하나도 없나봐요남자친구가 여자인간과 바람을 피웠다고 살인을 하는 양자두뇌라니멍청해!”

지수는 말로만 툴툴거리는 것으로 성이 안찼는지 바닥의 삐져나온 포석을 발로 걷어찼다다행이 드라마에서처럼 땅이 푹 패고 포석이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런 것 충분히 견뎌내는데 말이죠그렇죠?”

걸음을 멈춰선 그녀는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대답해줘요.”

내가 잘한 건지 모르겠다.”

기억을 지우지 않은 거요?”

지수는 자연스레 내 팔짱을 끼었다나는 그녀가 무안해 하지 않도록 천천히 그녀의 팔을 빼내었다.

넌 우리보다 더 먼 미래를 보게 될 거야우리가 늙고 지쳐가고 서로 싸우고 증오하다가 이 땅에서 사라지는 모습도 보게 될 거야그사이에 많은 인간들이 너와 사랑에 빠지고 너를 배반하고 너에게 상처를 주겠지인희씨에 대한 기억을 지우지 않은 이유도 그거야너는 네 평생 그 여자가 왜 너를 떠났는지 이유를 모를지도 몰라내 편지에 무엇이 써 있었는지그때 상해에 내 아내가 왜 있었는지도너의 양자두뇌로 기억할 수는 있어도 왜 일어났는지 모를 일들은 앞으로도 많겠지하지만 중요한건 그 일이 있었다는 걸 기억 하는 거야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지수는 다시 내 팔을 붙잡고 팔짱을 끼었다묘한데서 고집을 부리는 녀석이었다.

나는 달로 갈 거예요.”

에이프릴 연락 받았어?”

회사에서 수속과정 밟는 시간이 좀 걸리긴 하겠지만내년쯤에는 저기에 있을 거에요.”

지수는 어느새 어둑해진 밤하늘 위로 떠오른 달을 가리켰다.

그리고인간들이 어떻게 사랑하고어떻게 미워하고서로에게 상처를 주었는지어떻게 속이고 어떻게 믿었는지 보고 기억할거에요그중에는 영원히 알 수 없는 일도 많겠죠?”

많겠지.”

잠시 침묵하며 광장의 끝에 도달하는 사이에 그녀는 Fly me to the Moon을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나는 그녀가 별들 사이를 누비고목성과 화성의 봄을 보게 되는 날이 언제일까 잠시 상상해 보았다아마도 나는 그 모습을 못 볼지 모르겠다.

광장의 끝에서 그녀와 나는 잠시 말없이 서있었다뺨에 무언가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익숙하진 않지만 매년 맞이하는 그런 느낌이었다눈이 내리고 있었다첫눈치고는 늦은데다가 함박눈이었다나는 잠시동안 지수의 눈에서 그녀가 느끼는 경이로움을 보았다빠른 속도로 눈의 궤적을 쫓고 눈의 결정들이 가진 육각형 속에서 서로 다른 아름다움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접 목격하며 그것들을 자신의 두뇌 속에 기록하느라 정신없는 모습이었다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알아요이게 제 첫눈이에요제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눈이라고요!”

그래오늘 저녁에 길 좀 막히겠다서둘러야겠는데?”

지수는 입꼬리를 일그러뜨리며 미소를 지었다저건 아내가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싫다고 투정부리는 나를 내려다보며 짓던 미소랑 비슷했다.

지수는 내게 성큼 다가와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이것도 기억할게요메리크리스마스.”

나는 그녀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어느 여름 방학 날을 떠올렸다모래사장위에 둑을 쌓던 나는 계속 밀려오는 파도에 둑이 허물어지자 쌓기를 그만 두고 그대로 바닥에 앉아 있었다들어오고 나가기를 반복하는 파도가 내 발가락을 간질이며 쌓아둔 둑의 흔적을 씻어내는 모습을 해질 때 까지 바라보았다한겨울에 나타난 이른 봄꽃의 향이 아직도 코끝에서 맴돌고 있었다.

 

집에 돌아오자 제일 먼저 나를 맞이한 것은 무언가를 태운 냄새였다.

아내는 시무룩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가리비 살을 태웠어.”

이미 차려진 저녁식탁 앞에서 그녀는 속상해 죽겠다는 얼굴로 서있었다나는 아내를 끌어안고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가리비 살들도 이제는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거야그 애들을 위해 같이 기도하자.”

아내는 웃음을 터뜨리며 내 가슴에 가벼운 주먹질을 했다

 

<>.

 

 

 



 


이재만은 현재 프리랜서 웹 기획자로 일하고 있다환상문학 웹진 거울에 독자단편 코너에 참여하고 있다.

cancercat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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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