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형광등을 켜 놓은 채로 깜빡 잠이 들었던 나는 허기를 느끼고 잠에서 깼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등허리가 허전했다. 이상한 예감에 주위를 둘러보니 평소와 시야가 확연히 달랐다.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아니, 실제로 나는 허공에 떠서 내 자신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옷도 벗지 못하고 침대 위에 웅크려 잠이 든 내가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며 앓는 소리를 내고 있다.
이거 혹시 말로만 듣던 유체이탈인가?
두려우면서도 신기한 마음에 자신의 모습을 관찰하다가 무심코 벽에 걸린 거울을 봤을 때 나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비명을 질렀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거울에 가까이 다가가 내 모습을 살폈다. 나는 거의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아져 있었다. 등에는 날개가 돋아났으며 여섯 개의 다리는 실처럼 가늘었고, 주둥이가 뾰족한 것이 흡사 모기를 연상시켰다. 그렇다. 나는 그 순간 모기가 되었던 것이다.
처음엔 현실감이 넘치는 꿈을 꾸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내가 달리 어떤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었겠는가.) 힘차게 날개를 휘젓자 보다 날렵하게 비행할 수 있었다. 비록 모기가 되었지만 허공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기분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짜릿했다.
그렇게 한참을 날아다니던 내가 안착한 곳은 침대 위에서 잠이 든 내 진짜 몸이었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목덜미에 앉자 나는 참을 수 없는 목마름을 느꼈다. 거의 본능적으로 뾰족한 주둥이를 피부에 찔러 넣고 피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맙소사. 내 피가 이렇게 맛있었나? 나는 배가 빵빵해지도록 정신없이 흡혈을 했다.
쇳덩이 같은 손바닥이 날아든 것은 그때였다. 잠결에 휘두른 손은 모기인 나의 몸을 정통으로 때렸고, 나는 피를 빨던 채로 납작해져서 힘없이 날개와 다리를 꿈틀거렸다. 전신에서 생명의 기운이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꿈인 줄 알았지만 그때 내가 느낀 감각은 진짜 죽음에 가까웠다. 한 많은 인생 결국 이렇게 가는구나, 하며 의식을 잃기 직전 나는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정신이 몽롱하긴 했지만 원래 몸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휴, 역시 꿈이었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쉰 순간, 나는 내 손바닥에 들러붙어 죽어가는 모기를 한 마리 발견했다.
“거 참 신기하네.”
이런 우연의 일치를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학교 강의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기가 무섭게 하루 종일 방안에 틀어박혀 온라인 게임에 몰두하다보면, 식사를 거르거나 밤을 새는 경우가 많았다. 불규칙적인 생활습관 탓에 몸은 쇠약해져 갔고, 만성적인 피로에 시달렸다. 자취를 시작하면서 그런 생활을 몇 개월째 반복하고 있으니 이상한 꿈을 꾸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게다가 잠들기 전 사용했던 헤드셋이 고장 나 머리에 가벼운 감전을 당했는데 어쩌면 그게 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묘한 경험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신 뒤 다시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을 때, 나는 또 한 번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다른 종류의 생물이 되어 눈을 떴다. 이번에는 바퀴벌레였다.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나서 기어가다가 내 방 쓰레기통과 맞닥뜨렸다. 그 안에서 먹다 남은 양념치킨 소스를 찾았을 땐 정말이지 신대륙이라도 발견한 기분이었다.
나는 정신없이 그것을 핥아먹다가 실수로 끈적끈적한 소스에 발을 빠트렸다. 낭패라고 생각하며 빠져나오려고 여섯 개의 다리를 재게 놀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유사에 빠진 것처럼 내 몸은 더욱 신속하게 소스의 늪에 빨려 들어갔다. 그렇게 30분가량 사투를 벌이다 기진맥진할 무렵 저도 모르는 사이에 원래의 몸으로 돌아왔다. 미처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쓰레기통을 열어보니 실제로 바퀴벌레 한 마리가 소스 통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거미줄에 걸린 파리가 됐을 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정신이 아찔하다. 득달같이 달려든 거미가 내 몸에 가위처럼 거대한 집게 턱을 박아 넣고, 체액을 쭉쭉 빨아먹을 때의 고통과 공포란.
이쯤 되니 잠드는 게 무서웠다. 나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 생각에 잠겼다. 대체 왜 자꾸 이런 꿈을 꾸는 걸까? 아니 이게 꿈이 맞기나 한 건가? 혹시 정신병이 아닐까? 어쩌면 그간 생각 없이 살며 몸을 혹사시킨 대가를 이제야 치르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물두 해를 살면서 세상에 이런 기괴한 증상이 존재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 나는 잠을 포기하고 컴퓨터를 부팅시켰다. 그리고 인터넷 검색을 통해 꿈과 관련된 자료를 닥치는 대로 찾았다.
밤새 검색 엔진을 여러 번 바꿔가며 할 수 있는 모든 검색을 해 보았지만 내가 얻은 소득이라곤 상식의 범주를 넘어서지 않았다. 그나마 내 증상과 가장 비슷한 것이 자각몽(自覺夢)이었다. 이것은 수면자 스스로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채로 꿈을 꾸는 현상이다. 꿈의 내용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긴 하지만 진행되는 과정을 완전하게 장악하지는 못한다고 한다. 하지만 내 경험을 단순히 자각몽으로 치환하기엔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우선 나는 벌레가 되면 그것이 가진 욕구를 내면화해 버린다. 또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벌레의 몸을 완전히 장악한 상태에서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 예를 들면 모기가 되었을 때 흡혈의 욕구를 느껴 내 자신의 피를 빨아먹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추측하기로 이 증상엔 시간제한이 있었다. 어떤 벌레가 되든 30분이 지나면 나는 그곳에서 이탈하여 원래의 내 몸으로 돌아왔다.
무엇보다 만약 이게 꿈이라면, 꿈속에서의 사건이 내 손에 들러붙어 죽은 모기나 소스 통에 빠진 바퀴벌레처럼 현실에서 구체적인 증거로 남은 점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여기까지 추측하자 어쩌면 30분간 진짜로 벌레가 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몸서리를 치며 유명 포털사이트 의학상담 게시판에 들어가 내 증상을 가감 없이 설명했다. 여기서 납득할만한 대답을 듣지 못한다면 내키진 않지만 정신병원 수면클리닉이라도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의학상담 게시판 외에도 장문의 상담 글을 복사해 서너 군데 수면 관련 커뮤니티에 올리고 나니 창밖에서 먼동이 텄다. 다행히 오늘은 토요일이라 학교엔 가지 않는다. 새벽부터 일어나 밤을 거의 꼬박 새운 터라 눈꺼풀이 무거웠다. 하지만 잠을 자기가 영 마뜩치 않았다. 나는 온라인 게임에 접속해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몹(mob)을 사냥하며 시간을 보냈다.
2.
게임을 하다가 밤을 새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졸음을 참아가며 억지로 하는 게임은 좀처럼 흥이 나지 않았다. 마음먹기에 따라 같은 행동도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는 점이 새삼 아이러니했다. 나는 적당히 경험치를 쌓은 뒤, 정오 무렵 게임을 종료했다. 몸이 피곤해서 그런지 만사가 귀찮았다. 시간이 제법 지났으니 이제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침대에 몸을 뉘였다. 그러나 잠이 들자마자 나는 암컷 곱등이가 되어 하수구 구멍을 기어 다녔고, 수컷 곱등이에게 강제 교미를 당한 직후 깨어났다. 이번에도 잠든 지 30분 만이었다. 나는 분노에 휩싸여 집안에 존재하는 모든 수챗구멍에 락스를 털어 부었다. 사정이 이쯤 되니 극도로 피곤한 와중에도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느꼈다.
그때 문득 의학상담 게시판에 올렸던 글이 떠올랐다. 나는 컴퓨터를 부팅시키고 게시판에 들어갔다. 내가 새벽에 올린 게시물의 조회 수는 12였다. 그 사이 댓글이 몇 개 달려 있었다. 나는 게시물을 클릭한 뒤 모종의 기대감을 가지고 스크롤바를 가장 아래로 내렸다.
-이 님도 관심 끌고 싶은가 보네. 레알 낚시 글… ㅋㅋ…
-저도 본드 두 통 불고 비슷한 증상을 겪은 적 있어요.
-뭐 살다보면 벌레가 될 수도 있는 거죠. 너무 걱정 마시고, 힘내세요. 병신새끼야.
-카프카 <변신>읽고 개드립 치시긴…
-이모 여기 병신 하나 추가요.
댓글을 보는 순간 짜증과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반응은 아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잘 때마다 벌레가 된다는 내용의 글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괜한 짓을 한 것 같다. 나는 반쯤 체념한 상태로 다른 커뮤니티에 들어갔다. 그곳에서도 자극적인 악플만 몇 개 달려 있을 뿐이었다. 댓글을 꼼꼼히 읽어 봤지만 예상대로 도움이 되는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그 밖의 다른 곳들도 마찬가지였다. 기운이 쭉 빠졌다. 이쯤 되자 정신과 의사라도 내 말을 믿어줄까 의심스러웠다. 그래도 일단 병원을 찾아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인터넷 창을 닫기 전에 습관적으로 메일함을 확인했다. 새 메일이 한 통 도착해 있었다. ‘당신은 꿈의 여행자’라는 제목의 메일이었다.
“뭐야 이건?”
스팸메일인가 싶었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지우기엔 제목이 담고 있는 의미심장한 뜻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보낸 시간을 확인하니 아직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나는 인터넷 종료버튼을 누르려던 마우스 포인터의 방향을 바꿔 메일을 클릭했다. 의외로 장문의 글이었다. 영어로 된 전문 아래 한글 번역이 되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MAC대학교 석좌 교수 스티브 놀란이라고 합니다. 귀하는 8월 11일 오전 6시 30분 경 AT의학상담 공개게시판에 수면 장애에 관한 상담 글을 남기셨습니다. 놀랍게도 잠이 들면 30분간 다른 종(種)의 생물이 된다는 내용이었죠.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는 그 글을 읽는 순간 뛸 듯이 기뻤습니다. 귀하의 증상이 제 연구에 지대한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는 확신 때문입니다.
실례가 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으나 이것은 몹시 획기적인 사건이기에 염치 불구하고 한 가지 제안을 할까 합니다. 하지만 저의 제안이 귀하에게 결코 손해가 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장담합니다. 또한 결과에 상관없이 충분한 금전적 보상도 해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그 전에 제 소개를 잠깐 하자면, 저는 2012년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이며, 세계과학협회(WIS)의 사무총장직과 그 밖의 요직을 역임하였고, 지금은 대학에서 다차원이론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지난 12월엔 사이언스지에 '다차원이론에 관한 제3의 견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과학과 정신의 상관성을 규명하였습니다. 논문의 잠재적 가치를 알아본 정부는 국가차원의 지원을 약속하였습니다. 연구는 더욱 더 가속화 되었죠.
저에겐 36명의 조교가 있습니다. 그들은 세계 각지의 정신의학관련 사이트에 올라오는 모든 종류의 게시물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 합니다. 차원연구의 표본이 될 만한 인재를 찾기 위해서죠. 가능성 있는 글을 찾아낸 경우, 작성자가 지금껏 인터넷에 올린 모든 글을 분석하여 글의 신뢰도를 측정합니다. 그리고 총 10단계의 신뢰도 테스트 중 7단계를 통과한 작성자에게 이 메일을 보냅니다. 전 세계적으로 하루에 수천 건의 문서를 분석하지만 그 중 메일을 보내는 경우는 한두 차례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저희는 귀하의 글이 일종의 장난이거나 혹은 정신질환의 한 병변일지 모른다는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 메일은 무시하십시오. 하지만 그것은 굉장히 실망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표본을 구하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귀하의 글이 사실이라는 믿음을 전제로 상기한 바와 같이 한 가지 제안을 드리겠습니다. 만약 수락하신다면 귀하는 미국 MAC대학에 설치된 차원연구팀으로 와서 신체변화에 관한 표본연구 대상이 될 것입니다. 기간은 1년 정도로 예상하고 있으나 귀하의 의지에 따라 어느 정도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인체에 해가 되는 실험은 아닙니다. 제가 관심을 두는 것은 오직 뇌파변화에 따른 신체의 반응도 측정입니다.(물론 실제 연구는 이보다 좀 더 복잡합니다만.) 연구는 감기약을 먹는 것보다 더 안전한 방법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만약 실험 과정에서 불합리한 점이 있다든가 혹은 중도에라도 마음이 바뀐다면 언제든 실험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실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런 일은 결코 없어야 하겠지만 말이죠- 덧붙여 연구에 대한 보상 문제에 관해선 틀림없이 만족스러우실 거라 장담합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조교를 통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한 가지 더, 만약 꿈을 통해 벌레가 되는 과정이 지속된다면 귀하의 심리적 부담감이 굉장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전 그간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귀하의 상태를 호전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저 몇 마디 조언만으로도 말이지요. 그러기 위해선 귀하의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미리 말씀드리고 싶군요. 그럼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믿으십시오. 이것은 모두 사실입니다.
프로이드는 정신분석이란 용어를 가장 처음으로 도입한 인물입니다. 그는 인간의 육체란 무의식에 의하여 좌우된다고 믿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가 정신병 환자들을 치료하는 방법 중 하나는 환자들이 자유롭게 쏟아내는 무의식의 퍼즐을 맞추어 그로부터 병의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일명 자유연상법이라고 하지요. 뜬금없이 웬 프로이드냐고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귀하의 증상은 정신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우실 겁니다. 잠이 들 때마다 벌레가 되는 것이 정신적인 문제 때문이라고 한다면 누구라도 그렇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편견이 빚는 작은 오해일 뿐입니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귀하도 세상에서 일어나는 기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기적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그것은 다른 차원에선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법칙일 뿐이죠.
쉽게 말해 우리가 가끔 경험하는 기적은 정신적인 통로로 인간의 육체가 전혀 다른 차원에 잠깐 동안 머물게 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실례를 들자면, 몇 년 전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모 초등학교 앞에서 트럭에 깔린 아이를 구하기 위해 그 어머니가 트럭을 들어 올린 경우가 실제로 있었습니다. 현재까지 인간이 들어 올린 가장 무거운 바벨이 0.5톤이 채 안 되는 시점에서 평범한 아이 엄마가 트럭을 들어 올린 다는 것은 말 그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났고, 사람들은 그것을 기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가 트럭에 깔린 것을 본 어머니의 머릿속에선 그 어느 때보다도 맹렬한 생각의 폭풍이 휘몰아칩니다. 그 와중에 현실 세계와 힘의 차이가 100배나 나는 어느 낯선 차원의 통로가 열리게 되는 것이죠. 그녀는 다른 생각은 할 겨를도 없이 트럭으로 달려가 평소 낼 수 있었던 힘보다 100배 강한 힘으로 트럭을 들어 올립니다. 이윽고 차원의 문이 닫히고 그녀는 다시 평범한 여인으로 돌아오죠.
사실 이런 식으로 차원이론에 접근하는 과학자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제가 처음이며, 유일합니다. 간단한 과학상식을 통해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1차원을 ‘선’으로 표현합니다. 1차원에 존재하는 것들이 2차원인 ‘면’에서 벌어지는 일을 경험하게 된다면 아마도 그것은 굉장한 기적이 될 것입니다. 2차원에서 당연한 법칙이 1차원에선 그렇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3차원과 4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우리가 모르는 더 많은 차원 -약간 다른 개념이지만 초끈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세계를 16차원, 혹은 26차원까지 보는 과학자들도 있다- 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공간이 달라지면 그에 적용되는 법칙도 달라지 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차원의 문은 결코 호락호락 하지가 않아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을 노력해봤자 그 근처에도 갈 수 없습니다. 여인의 경우 극한에 다다른 정신적 압박감이 열쇠가 되긴 했지만 그것은 겨우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죠. 아무나 다른 세계에 들어설 수는 없는 겁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것을 마음대로 열고 닫을 수 있었던 사람도 있습니다. 그건 예언자 노스트라다무스입니다.
그는 16세기 사람이지만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출현, 제2차 세계대전, 베를린 장벽, 중국의 문화대혁명, 쿠바 사태, 오스왈드의 케네디 암살, 우주 왕복선 참사, 찰스 왕세자와 다이에나비의 이혼, 다이애나 비의 사고사, 그리고 에이즈, 소아마비, 지구 온난화까지 모두 예언했습니다. 미래의 일을 알 수 있는, 혹은 그 자체로 미래인 차원의 문을 발견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역사적, 과학적인 고증을 거친 후 내린 결론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일찍 깨달은 사람들은 차원의 문을 발견하기 위해 정신수양에 평생을 바칩니다. 많은 이들이 실패하지만 그 중엔 간혹 성공하는 사람들도 나오죠. 그리고 차원의 비밀을 알게 된 사람들을 가리켜 우리는 ‘득도’했다고 합니다. 개인차에 따라 서로 다른 차원의 문을 발견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기독교에서 체험하는 기적도 그런 범주의 것입니다. 불교나 그 밖의 모든 종교에서 벌어지는 이적은 차원의 문을 발견한 노련한 정신수양가의 수법이죠. 저는 그것을 과학적으로 규명한 최초의 과학자입니다.
물론 이는 대단한 수양을 필요로 합니다만 아주 가끔씩 어떤 사람들은 그런 특별한 노력 없이도 복권에 당첨되듯 차원의 문을 발견하곤 합니다. 귀하께서도 그런 케이스일 거라 사료됩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30분간 다른 육체에 들어갈 수 있는 차원에 발을 들여놓으신 겁니다. 귀하가 발견한 차원의 문은 꿈인 셈이죠. 대단히 희박한 경우입니다. 어쩌면 헤드셋의 고장으로 감전을 당한 것이 원인일 수도 있고요. 하지만 감전을 당한 모든 사람들이 차원의 문을 발견하는 건 아니라는 점에 비춰봤을 때, 귀하와 같은 사람은 아마 전 세계에서 열 명도 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일단 차원의 문을 발견했다면 그것을 통제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우선 벌레가 된다는 강박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원하는 대상에 집중하십시오. 통제가 가능해 진다면 벌레가 아닌 인간의 육체인들 들어가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모든 것은 정신의 문제이며,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설마 하는 생각으로는 강박증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능력에 잡아먹히고 말겁니다. 그러니 믿으십시오.
그럼 회신 기다리겠습니다. 행운을 빕니다.
3.
교수가 보낸 메일을 읽고 나니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차원의 문? 득도? 노스트라다무스? 이거 사기꾼 아냐? 나는 인터넷으로 MAC대학 홈페이지에 들어가 스티브 놀란이라는 교수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찾아봤다. 그리고 물리천문학부 카테고리에서 초빙석좌교수라는 직함을 가진 스티브 놀란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진 아래 적힌 이메일주소가 내게 보낸 것과 같았다. 이메일을 보낸 아이피 주소를 해킹하여 알아낸 주소 역시 미국이었다.
사실을 확인하자 터무니없는 궤변이라고 생각했던 것에 조금씩 믿음이 생겼다. 돌이켜보니 그의 주장엔 나름의 논리가 있었다. 게다가 믿음 하나로 꿈의 메커니즘을 통제할 수 있다는 말은 사실 솔깃했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 아닌가. 나는 컴퓨터를 끄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메일에 적힌 내용대로 부디 이번에 잠들면 벌레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눈을 감았다. 피곤한 탓인지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게 펼쳐진 복도의 한 구석에 서 있었다. 고개를 숙이자 잠들기 전 입고 있던 반바지에 면티가 보였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지금까지와는 뭔가 다르다. 복도의 오른쪽 벽에는 호수가 적히지 않은 문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섰다. 왼쪽은 탁 트인 베란다였는데 희뿌연 안개에 휩싸여 있어 그 너머를 내다볼 수는 없었다. 나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리듯 앞으로 걸어갔다.
문들은 모두 같은 모양이었다. 문틈 사이로 희미한 빛 무리가 뿜어져 나왔다. 문마다 빛의 세기가 달랐는데 어떤 문은 그 중에서도 특히 강렬한 빛을 발산했다. 그런 것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한참을 걷다보니 층계참이 나왔다. 복도에서 갈라져 들어간 부분에 위층과 아래층으로 연결된 계단이 보였다. 어쩔까 생각하고 있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용케도 여기까지 왔군요.”
나는 흠칫 놀라 목소리가 들린 쪽을 쳐다봤다. 이제 보니 한쪽 구석에 어떤 남자가 배경처럼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검정색 정장 차림에 나이는 삼십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누구세요?”
꿈인 줄 알았는데 누군가 말을 걸어오자 긴장이 됐다.
“당신과 같은 꿈의 여행자입니다.”
나와 같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그렇다면 이 남자도 나와 같은 증상을 가지고 있다는 건가? 동지가 있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적잖이 안심이 됐다.
“여기는 어디죠?”
“이곳은 꿈과 꿈이 만나는 경계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17차원의 임계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쉽게 말한다면서 어렵게 말하는 재주를 가진 남자다. 내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남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한마디로 당신의 꿈속이라는 뜻입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면 될 것을. 하지만 꿈이라기엔 지나치게 생생한 현실감이 느껴져 기분이 나빴다. 나는 지금까지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물었다.
“여기서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여기 있는 문들 중 아무거나 골라서 열면 됩니다.”
의외로 싱거운 대답이었다.
“그게 끝이에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는 수많은 문들은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의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곳을 통해 타인의 몸을 여행하는 거죠. 하지만 문을 열기 전까지는 몸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없어요.”
그는 옆에 있는 문에 손을 대고 말을 이었다.
“이 문 너머엔 당신의 이웃이 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유명 연예인이나 정치가가 있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문을 열기만 하면 당신은 그들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30분이 지나면 원래 몸으로 되돌아가는 거지요.”
“꼭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가야만 돌아갈 수 있는 건가요?”
“아뇨, 벌레의 몸에 들어가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어요. 그런 미물의 경우는 굳이 이곳을 찾지 않아도 숙달이 되면 직접 원하는 몸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나는 몸서리를 치며 말했다.
“벌레는 싫어요!”
그러자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게 싫으면 동물도 가능해요.”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요.”
나는 관자놀이를 지압하며 다른 질문을 했다.
“어젯밤부터 30분 이상 지속해서 잠을 못자고 있어요. 피곤해 죽을 지경이에요. 잠을 푹 자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초면인 주제에 잘도 그런 것을 묻는다고 생각했지만, 왠지 나와 같은 증상을 가진 이 남자라면 해법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예상대로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건 간단합니다. 당신이 여기 머무는 동안 당신의 육체는 수면을 취하죠. 당신이 잠들고 싶은 시간만큼 이곳에 머물다가 깨고 싶을 때 문을 열면 됩니다.”
그의 말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렇게 지루한 곳에서요?”
“지루하다고요? 그럴 리가…”
남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층계 위에서 영화배우 K양이 내려왔다. 그녀는 영화제 시상식에라도 참석하는 듯 가슴이 깊이 파인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날 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텔레비전에서 보던 모습과 똑같았다. 나는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손을 뻗어 그녀를 만지려고 했다. 하지만 내 손은 그녀의 몸을 그대로 관통했다.
“무의식에서 불러낸 거라 만질 수는 없어요.”
그의 말에 나는 적잖이 실망했다. 눈앞에 K양이 있는데 만질 수 없다니. 어느새 그녀는 카메라를 든 기자들 앞에서 멋진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옆에서 남자가 말했다.
“너무 그럴 거 없어요. 이 공간에 온 것만으로도 당신은 행운아예요.”
“별로 안 그렇게 느껴지는데요.”
내가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24시간 동안 깨어 있을 수 있다는 게 요즘 같은 경쟁사회에서 얼마나 이득이 되는지 모르는 겁니까?”
“그래봤자 구경꾼에 불과하잖아요.”
남자는 내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볼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굉장하죠. 특히 이런 꿈속에서라면. 인간은 깨어 있을 땐 두뇌의 10퍼센트밖에 사용할 수 없지만 꿈속에선 아니거든요. 당신의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모든 정보를 이곳에선 실체화 할 수 있어요. 당신 최근에 읽은 책이 뭐죠?”
나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대답했다.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요.”
“당신 앞에 있는 그거요?”
남자가 내 맞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 눈앞에는 며칠 전 읽었던 소설책이 둥실둥실 떠다녔다. 내용을 확인하고 싶다고 생각하자 페이지가 저절로 넘어가며 책에 인쇄된 글자를 보여주었다. 내가 읽었던 내용 그대로였다.
놀라는 나를 보며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어때요? 이젠 조금 괜찮은 곳이란 생각이 들어요?”
그렇다 뿐이겠는가. 이런 게 가능하다면 꿈의 경계는 그야말로 낙원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남자의 거들먹거리는 말투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수긍하는 대신 표정을 감추고 지나쳐온 문을 돌아봤다.
“이 문에서 나오는 빛은 뭐죠?”
내 생각을 모르는지 남자는 착실히 대답했다.
“그건 문의 주인이 느끼는 감정을 대변하는 겁니다. 빛이 강렬할수록 문 너머의 사람도 어떤 감정의 극단을 달리고 있다는 뜻이지요. 저런 문은 안 여는 게 좋아요.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 가능성이 크거든요.”
그 말에 호기심이 생겼다. 나는 아까부터 유난히 강한 빛을 뿜어대는 문 앞으로 걸어갔다. 남자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골치 아픈 일이라고 해 봐야 어차피 30분 아닌가. 나는 만류하는 남자를 뒤로하고 문을 열어젖혔다. 눈부시게 강렬한 빛이 시야를 뒤덮었다.
4.
눈을 뜬 곳은 비좁고 밀폐된 방안이었다. 차가운 콘크리트 벽이 사방을 빈틈없이 가로막고 있었다. 천장에 달린 알전구는 꺼진 상태였지만, 머리맡에 난 손바닥만 한 창문으로 노란 햇살이 비춰들어 방안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나는 레이스가 달린 원피스 차림에 작고 앙증맞은 빨간 구두를 신었다. 눈에 보이는 것들로 추측하건대 이번에는 여자아이의 몸에 들어온 것 같았다. 층계참에 서 있던 남자의 말 대로였다. 뭐가 됐든 벌레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묘한 위화감이 심장을 두드렸다. 뭔가 내 몸을 꼼짝 못하도록 결박하고 있었다. 손목과 발목에 강한 압박감과 더불어 불쾌한 통증이 느껴졌다. 입에 물린 재갈에서 기분 나쁜 맛이 났다.
한쪽 벽에 기대어 앉아 있던 나는 당혹감을 느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실내는 단순한 구조였다. 세간이라곤 내 왼편에 있는 낡은 침대와 비키니 옷장이 전부였다. 맞은편에는 출입구로 보이는 두꺼운 철문이 굳게 닫혔다. 대체 여기가 어디고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뒤늦게 비키니 옷장 옆에 있는 여행용 가방에 눈에 들어왔다. 지퍼가 반쯤 열렸고, 그 안에서 사람의 손가락처럼 보이는 것이 삐져나왔다.
순간 심장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본능적으로 이곳에서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찌나 단단히 묶였는지 나는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힘들었다. 간신히 몸을 뒤틀어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자 먼 곳에서 회색 건물의 상단부와 거기에 걸린 간판이 시야에 들어왔다. 각도 상의 한계로 반쯤 잘려나간 주황색 간판에는 ‘동산’이라고 쓰여 있었다. 피처럼 붉은 얼룩이 묻은 창문의 사각 틀은 극단적으로 비좁아 묶인 상태가 아니라도 저곳으로 빠져나가긴 어려울 것 같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 밖에서 뭔가 다가오는 소리가 났다. 겁에 질려 문을 쳐다보고 있자니 발소리는 문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어떤 남자가 통화하는 듯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사장님 그깟 돈이 대숩니까? 예원이 걱정도 안 되세요? 자꾸 그렇게 나오시다가 제가 열 받아서 예원이 확 죽이면 사장님이 책임질 거예요? 아, 살아 있어요. 그러니까 제가 지금 얼굴 보여준다고 하잖아요.”
남자의 목소리 중간에 쇠 마찰음이 들리며 철문이 열렸다. 얼굴에 케로로 가면을 뒤집어 쓴 남자가 왼손에 휴대폰을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카메라가 달린 부분으로 날 촬영했다. 영상통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액정 화면속의 중년 남자는 내 얼굴을 보더니 비명처럼 울부짖었다. 그것을 본 케로로 가면은 만족스럽다는 목소리로 다시 전화를 받았다.
“자, 이제 확인하셨으니까. 돈 주셔야죠. 계좌번호 부를게요. 3시까지 10억 쏴주시면 아이는 아무 일 없이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겁니다.”
계좌번호를 부른 뒤 전화를 끊은 남자가 한심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살려뒀다 나중에 골치 아플 일 있나?”
남자는 내 얼굴을 보며 3시에 입금 확인을 하면 너의 목을 졸라 죽이겠다는 이야기를 태연한 표정으로 지껄였다. 겁에 질려 그의 얘기를 듣던 나는 어느 순간 머리에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가물거리는 눈을 감았다 떴을 땐 내 방 침대 위였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은 한가로웠다. 하지만 내 심장은 불안하게 쿵쿵거렸다. 책상 위에 놓인 탁상시계는 오후 1시를 막 넘어서고 있었다. 나약한 아이의 몸에서 느껴지던 두려움이 미열처럼 눈가를 떠다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침대에 누운 채 잠시 생각해 봤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그 아이는 유괴사건에 휘말린 게 틀림없다. 나는 내가 가진 이상한 능력으로 그 사건을 훔쳐본 것이다.
경찰에 신고해야 된다는 생각에 휴대폰을 집어 들었지만, 따지고 보니 난 그곳이 어딘지도 몰랐다. 그때 머릿속에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아이의 몸에 들어갔을 때 창문을 통해 보이던 낯익은 광경. 나는 옥탑 방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봤다. 맞은편에 있는 회색 건물의 6층에 ‘우리 부동산’이라고 적힌 주황색 간판이 보였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납치 사건이 벌어진 장소는 이 근처가 분명했다. 나는 회색 건물과 내가 사는 옥탑 방 사이에 밀집한 주택가를 둘러봤다. 하지만 다들 비슷하게 생겨 그곳이 어느 집인지 집어내기가 어려웠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보단 직접 내려가서 살피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나는 신발을 대충 꿰어 신고 자취방을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며 시간을 확인하니 1시 10분이었다. 3시가 되면 놈은 계좌에 돈이 들어왔는지 확인할 것이다. 아이의 부모가 놈의 지시를 제대로 이행한다면, 쓸모를 다한 아이는 여행용 가방에 담긴 시체처럼 죽게 된다.
마음이 급했다. 주택가로 들어선 나는 골목을 뛰어다니며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찰나의 기억에만 의존해 집을 찾아내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어느 장소에서 간판을 올려다봐도 거기가 거기 같았다. 한참을 헤맨 끝에 얼추 비슷한 장소를 찾아냈다. 파란 대문 집 앞에서 회색 건물을 올려다보니 아이의 몸에 들어갔을 때 봤던 것과 상당히 흡사한 각도였다. 담 너머로 고개를 내밀자 널찍한 마당과 단층짜리 양옥이 보였다. 집의 하단부에 반 지하로 이어진 듯한 작은 창문이 나 있었다. 창문에 묻은 붉은 얼룩이 기억속의 모습과 일치했다. 모든 정황이 이 집에 아이가 갇혀 있다는 것을 대변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초인종을 눌렀다. 목소리를 들으면 기억이 좀 더 분명해질 것이다.
곧 스피커를 통해 굵은 저음이 들렸다.
“누구세요?”
낯익은 목소리였다. 마음의 준비를 한다고 했는데도 당황해서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옥 장판 하나 구입하세요. 싸고 따뜻해요.”
“꺼져.”
“네.”
나는 담 아래 주저앉아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마른 침을 삼키고 휴대폰을 꺼냈다. 하지만 112번을 누르려던 나는 문득 치미는 불길한 예감에 손가락을 멈췄다. 경찰에 신고를 한다면 유괴범을 잡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무사히 구출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최악의 경우 놈이 아이를 볼모로 잡고 인질극을 벌일 가능성도 높았다. 무턱대고 신고를 하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 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쉼 없이 흘렀고, 어느새 2시였다. 하는 수 없다. 나는 고민 끝에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 거기 경찰서죠? 저 제가 방금 유괴사건을 목격한 것 같아서요. 어떤 남자가 어린 여자애를 꽁꽁 묶어서 집으로 옮기더라고요. 주소도 알아요. 대전시 유성구 월평동…”
경찰에 신고한 뒤 나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창문을 열고 방금 확인했던 집을 관찰했다. 경찰이 도착한 건 신고한 지 30분이 지나서였다. 어찌나 늦게 오는지 초조해 죽는 줄 알았다. 경광등을 번쩍거리며 도착한 경찰차에서 제복 경찰 두 명이 내렸다. 그 중 한명이 초인종을 누르자 잠시 후 어떤 남자가 집에서 나와 대문을 열었다. 다행히 내가 우려하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문 앞에 서서 대화를 나누던 그들은 함께 집안으로 들어갔다. 사정이 어찌됐든 이제 놈이 경찰에 체포당하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추측은 빗나갔다.
남자의 집에 들어갔던 경찰은 십여 분 남짓한 시간이 지나자 빈손으로 집을 나왔다. 그러더니 아무런 후속 조치도 없이 경찰차를 타고 떠났다. 어이가 없었다. 제대로 수색을 했다면 이런 결과가 나올 리 없었다. 나는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2시 45분. 이제 아이의 생명은 15분밖에 남지 않았다. 다시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다. 내가 방금 본 내용을 말하며 거칠게 항의하자 경찰관은 자신이 지구대에 확인해 본 뒤 연락을 주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매몰차게 흘렀고, 이제 5분 후면 3시였다. 나는 공구함에서 망치를 꺼내 들고 자취방을 뛰쳐나왔다.
그 집 앞에 도착한 나는 초인종을 누르며 대문을 발로 걷어찼다. 여기서 소란을 피운다면 놈도 쉽사리 아이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잠시 후 현관문이 열리며 어떤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긴 남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대문을 열었다.
“왜 남의 집 대문을 발로 찹니까?”
나는 숨을 씩씩 몰아쉬며 위협적으로 망치를 들어보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게. 지하실에 애 하나 가뒀지? 지금 당장 걔 풀어줘. 그럼 네가 도망쳐도 쫒지 않을 거야.”
정곡을 찔린 탓인지 남자는 안색을 굳혔다. 그런데 생각과는 다르게 남자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태연하게 말했다.
“경찰에 신고한 게 당신이군요?”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근거로 내가 유괴범이라는 거죠?”
“이 집 지하실에 애를 납치한 게 바로 네 놈이 유괴범이라는 증거다. 됐냐?”
그래도 남자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정말 그런 거라면 왜 경찰이 그냥 돌아갔을까요?”
“뭐?”
내가 반문하자 남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혹시 당신 머리에 문제 있는 거 아닙니까? 왜 멀쩡한 사람을 유괴범으로 모는 거죠? 이 집 지하실에 애가 납치돼 있다고요? 그것 참 이상하네. 이 집엔 지하실이 없는데 말이죠.”
그의 말에 놀란 나는 대문 너머로 마당 안을 들여다봤다. 한쪽 벽에 나 있던 반지하실 창문이 지금은 사라졌다. 급하게 시멘트로 바른 게 아니라 원래 창문 따윈 없었다는 듯 벽돌이 자연스럽게 그곳을 메우고 있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창문틀의 생김새나 심지어 거기에 묻은 얼룩까지 선명하게 기억나는데 내가 잘못 본 거라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내가 확신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꿈속에서 봤던 장면이 전부 현실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문이 없다는 걸 확인한 지금, 어쩌면 이 모든 사건이 내 착각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눈앞의 남자가 범인이라는 어떤 실재적인 증거도 나에겐 없었다. 내가 사는 옥탑 방 맞은편의 회색 건물이나 간판은 평소에도 자주 보던 것이니 꿈에서 그런 장면이 나온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쯤 되자 사건이 일어나긴 한 건지 의심이 들었다.
“아, 그러니까…”
대꾸할 말을 찾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경찰서였다. 전화를 받자 경찰은 집 안을 수색했지만 신고 받은 내용과 달리 남자에게서 별 다른 혐의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말하며 되레 나에게 화를 냈다. 그는 조만간 허위신고에 대한 즉결심판 출석 요구서를 받게 될 거라고 말했다. 나는 죄송하다고 거듭 사과한 뒤 전화를 끊었다. 이제 내가 할 행동은 하나였다.
“미안합니다. 제가 착각을 한 것 같네요.”
남자는 그제야 안색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 하나만 물읍시다. 대체 왜 날 유괴범이라고 생각한 거죠?”
사실대로 말했다간 그날로 정신병원 신세일 것이다. 나는 끝까지 착각했다고 우겼다. 하지만 남자도 집요했다.
“황당한 이유라도 좋으니 말 해봐요. 나한테 그 정도 알권리는 있는 것 같은데 말이죠. 사실 내가 무고죄로 고소해도 그쪽은 할 말 없는 거 아닌가요?”
나는 하는 수 없이 나는 적당한 이유를 지어내기로 했다. 어젯밤에 우연히 창문을 내다보던 중 어떤 남자가 여자 아이를 그 집으로 옮기는 모습을 봤다고 둘러댔다.
“전 그게 납치사건이 아닐까 의심한 끝에 경찰에 신고를 하게 된 거죠. 그때 어두워서 제가 잘못 본 것 같아요.”
기지를 발휘한 것 치고는 제법 그럴싸한 대답을 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빼 내 목덜미를 만졌다. 그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방심하고 있던 나는 목덜미에 따끔한 느낌을 받고 뒷걸음질을 쳤다. 그가 손가락에 낀 반지에 작은 침이 솟아 있었다.
“뭐하는 거예요!”
“그런 이유가 아니잖아요. 더 솔직해져 보는 게 어떨까요?”
“무슨…”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아이를 납치한 건 어젯밤이 아니거든. 게다가 보통 사람은 그 장면을 볼 수 없어. 투명하게 만들어서 데리고 왔으니까. 그러니 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야. 내 생각에 넌 차원의 문 능력자인 것 같아. 행동이 어수룩한 걸로 봐서 능력을 발견한 건 최근이지?”
화들짝 놀라서 남자를 쳐다봤다. 그때 이질적인 공간의 일그러짐이 시야의 가장자리에 들어왔다. 그쪽을 쳐다보자 집의 하단부에 벽돌이 사라지고 창문이 드러났다.
“설마 너도…”
순간 달아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약물의 반응속도는 내 생각보다 빨랐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흐려지는 의식 너머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숨 자고 일어나서 다시 얘기해 보도록 하지.”
5.
잠이 들기가 무섭게 나는 예의 그 복도에서 눈을 떴다. 허둥대며 달려가 층계참에 도착했다. 전과 같은 곳에 정장 차림의 남자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도와주세요.”
“무슨 일이 있나요?”
남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내가 방금 일어난 일을 설명하자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굉장히 골치 아픈 일에 휘말렸군요.”
그랬다. 나는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떠올렸다.
“그 놈의 몸에 들어가는 문을 알려주세요.”
하지만 내 말에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도와주고 싶지만, 아까도 말했다시피 이 많은 문들 중에서 한 사람을 찾아내는 건 불가능해요.”
“젠장.”
나는 초조하게 층계참을 서성였다. 이렇게 된 이상 아무 문이나 열어서 타인의 몸에 들어간 뒤 경찰에 신고를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놈의 능력을 돌이켜 보면 이런 시도는 또 다시 무위로 그칠 가능성이 높았다. 경찰이 헛걸음을 하는 사이, 놈은 나와 아이를 해치우고 유유히 달아날 지도 몰랐다. 결국 남은 방법은 내가 직접 놈과 상대하는 것인데, 그것도 갓난아기나 식물인간의 몸에 들어가 30분간 꼼짝 못하고 누워만 있게 된다면 소용없는 일이다. 설상가상으로 문을 열었는데 제주도에서 눈을 뜬다면? 그렇지만 지금 상황에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근처에 있는 문고리에 손을 뻗었다. 그때 불현듯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남자를 보며 발작적으로 외쳤다.
“그럼 혹시 전에 들어갔던 문을 열면 납치당한 아이의 몸에 다시 들어갈 수 있는 건가요?”
“그런 거라면 가능하죠. 하지만 묶인 아이의 몸으로 뭘 하려고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남자를 향해 나는 말했다.
“전에 그랬잖아요. 미물의 경우엔 굳이 문을 거치지 않아도 조종을 할 수 있다고. 아이의 몸에 들어가서 다시 벌레를 이용하는 게 가능할까요?”
남자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생각대로만 되면 승산이 있을지도 몰라요. 제가 어릴 적에 동네에 살던 건달이 귀에 벌레가 들어갔는데, 그 덩치 큰 남자가 맥을 못 추더라고요. 30분 정도 시간을 끌면 제가 깨어날 테니 그 뒤는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예요. 문제는 어떻게 벌레를 장악하느냐는 건데…”
나는 남자의 눈치를 살피다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려운 부탁이라는 건 알지만 저 대신 아이의 몸에 들어가 주시면 안 될까요?”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돕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어요. 우리가 꿈의 경계를 공유한다고 해서 의식구조까지 똑같아지는 건 아니거든요. 당신이 발견한 문을 내가 연다고 해도 그 아이의 몸에서 눈을 뜨진 않을 거예요. 당신과 나는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연결된 세계가 달라요.”
“그걸 어떻게 알죠?”
남자는 혀를 찼다.
“설마 내가 지금껏 꿈의 경계에서 만나 사람이 당신 하나뿐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러면 어떡하죠? 전 벌레를 다루는 방법을 몰라요.”
남자는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중요한 건 믿음이에요.”
“네?”
“의심을 버리고 당신 자신을 믿는다면 할 수 있을 겁니다. 무의식에서 원하는 것을 불러올 때와 비슷한 느낌으로 벌레를 탐지하고 육체를 점유하는 거죠. 겨우 이메일 한통을 읽고 이 장소를 찾아낸 당신이라면 아마 가능할 거예요. 물론 이건 모험이죠.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나가는 게 가장 좋겠지만 지금 상황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네요.”
순간 등줄기를 타고 전류 같은 것이 흘러내렸다.
“설마…”
이메일을 보낸 게 이 남자였던 건가? 남자는 내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말을 이었다.
“더 얘기하고 싶지만 시간이 많지 않아 보이는군요. 저도 최대한 방법을 찾아볼 테니 지금은 행동하는 게 우선입니다.”
그의 말대로 이 이상 시간이 흐르는 건 위험했다. 내가 정신을 잃은 동안 놈이 내 몸에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처음 들어갔던 문 앞으로 걸어갔다. 마음을 굳게 먹고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눈부시게 환한 빛이 내 몸을 뒤덮었다.
예상대로 아이의 몸에서 눈을 떴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벽을 타고 돈벌레 한 마리가 기어가는 게 보였다. 저런 걸로는 어림도 없다. 그때 위층에서 누군가 걸어 다니는 발소리가 불길하게 귓전을 울렸다. 불안한 마음에 흐트러지려는 정신을 애써 다잡았다. 그런 다음 온 신경을 집중해 눈을 감고 원하는 벌레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하지만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죽음에 한 걸음씩 가까워지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 순간 나는 전능한 시선이 되어 집안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게 되었다. 성공이었다. 나는 기쁜 마음을 억누르며 시선을 1층으로 옮겼다. 주방 싱크대 아래에서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는 나와 날 그렇게 만든 놈이 밧줄로 내 몸을 묶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날 찔렀던 반지는 싱크대 옆에 빼놓았다. 내가 원하자 반지가 투명해지며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링 속에 든 마취제가 바늘을 누르면 흘러나오는 구조였다.
나는 집 밖으로 시선을 돌려 마당을 샅샅이 훑었다. 그리고 곧 잔디밭 위를 날아다니던 수개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원하는 대상을 발견하자 마치 강한 자력에 이끌리듯 의식이 수개미의 몸으로 이동했다.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곤충 특유의 이질적인 감각이 전신을 뒤덮었다. 하지만 그런 것에 취해있을 겨를이 없었다. 나는 문틈으로 집안에 침입한 다음 유괴범의 위치를 확인했다. 놈은 내 손과 발을 묶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는 전속력으로 그의 귓구멍을 향해 날아갔다. 놈이 미세하게 몸을 뒤트는 바람에 하마터면 귓불에 부딪칠 뻔 했지만, 가까스로 방향을 틀어 놈의 귀로 들어갈 수 있었다. 운이 좋았다. 손가락이 들어와 날 빼내려 했지만 나는 기를 쓰고 귓구멍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놈이 고개를 흔드는지 굉장한 떨림이 느껴졌다. 나는 여섯 개의 다리로 단단히 몸을 지탱하고 연한 살점을 마구잡이로 물어뜯기 시작했다. 곧 처절한 비명이 놈의 내부를 쩌렁쩌렁 울렸다. 하지만 난 멈추지 않고 집게 턱을 정신없이 놀렸다.
어느 순간부터 물어뜯어도 더 이상 반응이 없었다. 아마도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다. 나는 다음으로 쥐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방금 수개미를 잠식했을 때보다 한결 수월했다. 또 다시 전능한 시선이 된 나는 제법 떨어진 곳 하수구에서 쥐를 발견했다. 쥐의 몸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곧장 그 집을 향해 내달렸다.
하수구 구멍을 통해 집안으로 들어서자 바닥에 쓰러진 채 경련을 일으키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 옆으로 내가 밧줄에 묶인 채 쓰러져 있었다. 나는 내 몸으로 다가가 밧줄을 이빨로 쏠았다. 손을 묶은 밧줄을 거의 끊었을 무렵 현기증이 일었다. 어느새 30분이 지났다는 뜻이었다.
시간이 지나 진짜 내 몸으로 돌아왔을 때, 약기운 탓인지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내 몸을 결박했던 줄을 풀어 놈의 몸을 묶기 시작했다. 밧줄의 매듭을 지으려는 순간 거실 벽에서 거대한 호랑이가 튀어나와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깜짝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하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 호랑이는 온데간데없었다. 놈이 자신의 능력으로 만들어낸 환상이었다. 동시에 놈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잔뜩 긴장해서 벽을 등지고 주변을 살폈다. 그때 왼쪽 옆구리에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휘청거리는 다리를 애써 지탱하고 반사적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내 주먹은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허공에서 놈의 지친 목소리가 들렸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네놈 짓이었구나. 날 이 정도까지 몰아붙이다니 제법이야. 하지만 네 운도 여기서 끝이다. 나 정말 화났거든.”
놈이 주먹을 휘두르는지 귓가에 바람소리가 들리고 명치에 강한 충격이 덮쳤다. 방어하지 않은 곳만 골라서 치는 바람에 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결국 관자놀이를 얻어맞고 바닥에 쓰러졌다. 놈이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주방 싱크대 위에 놓인 부엌칼이 서서히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이내 투명해졌다.
“원래는 적당히 구슬려서 같은 편으로 만들까 했는데 안 되겠어. 넌 너무 위험해.”
발소리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죽는 걸까? 아니다. 나는 싱크대 위에 놓인 반지를 쳐다봤다. 다른 생각은 할 겨를도 없이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반지를 집어 뾰족한 바늘을 내 팔에 찔렀다. 처음 그랬던 것처럼 약효는 금세 퍼졌다. 놈이 내가 뭘 하려는지 깨닫고 다가오는 순간 나는 그의 귀에 남아 있는 수개미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잠이 들었다. 모험은 성공이었다. 놈의 발소리가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나는 간신히 수개미의 몸을 장악할 수 있었다. 내가 다시 활동을 시작하자 놈이 멈칫거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좀 더 깊은 곳으로 이동했다. 중력의 반대방향으로. 그리고 마침내 도달한 어떤 정점에서 정체 모를 신경 줄을 물어뜯었다. 고통에 찬 비명과 몸부림이 느껴졌지만 이번에는 적당히 할 생각이 없었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그땐 정말로 내 생명이 위험해진다. 나는 내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쏟아 부어 놈의 내부를 파괴했다.
시간이 지나 원래의 내 몸으로 돌아왔다. 투명능력을 상실했는지 실체가 드러난 놈은 정신을 잃은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무리하게 능력을 사용한 탓인지 나 역시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코피가 끊임없이 흘러나왔고, 몸이 마비라도 된 것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들었다. 그렇게 누워 있자니 멀리서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현관문이 열리며 제복 경찰 둘이 집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와 유괴범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 중 상관으로 보이는 중년이 젊은 경찰에게 말했다.
“이 순경. 얼른 지하실 내려가서 애가 무사한지 알아봐.”
“네, 장경사님.”
이 순경이라 불린 남자가 지하실로 뛰어 내려가자 중년의 경찰이 내 앞에 쭈그려 앉았다.
“늦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이 경찰의 몸은 예전에 우연히 발견했는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이렇게 유용하게 써먹고 있지요.”
그의 말에 놀란 내가 눈을 크게 떴지만, 나는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아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릴 뿐이었다. 그때 지하실에서 젊은 경찰의 목소리가 들렸다.
“장경사님! 아이는 무사합니다.”
“좋아, 조심히 데려오라고.”
소리쳐 대답한 중년 경찰은 품안에서 볼펜과 메모지를 꺼내 뭔가를 적더니 내 주머니에 넣었다.
“몸이 회복되면 찾아오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6.
남자가 적어 준 것은 서울역 부근에 위치한 L병원의 주소였다. 병원에 도착한 나는 종이에 적힌 대로 504호 입원실을 찾아갔다. 문을 열자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방은 1인실인 듯 침상은 하나뿐이었고, 그 위에 누워 있는 노인이 보였다. 노인의 팔에 연결된 튜브를 통해 링거액이 흘러들고 있었다. 나는 머뭇거리며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잘 왔습니다.”
잠든 줄 알았던 노인이 입을 여는 바람에 흠칫 놀랐다.
“아, 안녕하세요.”
“미안합니다. 몸이 이래서.”
뜻밖에도 노인은 사지마비환자였다. 그는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나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나는 벽에 세워둔 접이식 의자를 펼쳐서 앉았다.
“할아버지가 이메일을 보낸 건가요?”
“맞아요. 내가 놀란 교수의 몸에 들어가서 보낸 겁니다.”
“그럼 실험을 한다는 건…”
“당연히 거짓말이죠.”
“어째서 그런 말을 한 겁니까?”
속았다는 생각이 들자 저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전에도 말했지만 차원의 문 능력은 믿음의 여하에 따라 증폭되거나 혹은 감소되죠. 내가 만약 이메일에 사지마비로 병원에 누워 있는 환자라고 사실대로 말했으면 젊은이가 내 말을 믿기나 했을까요? 왜 번거롭게 놀란 교수의 몸에 들어갔냐고요? 혹시 젊은이는 이메일의 아이피 주소를 해킹해서 주소를 확인하지 않았나요?”
확실히 그랬다. 거기까지 예측한 노인의 안목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물었다.
“절 이곳으로 부른 이유가 뭐죠?”
“젊은이는 나와 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았으면 해서지요.”
“시행착오라뇨?”
노인은 담담하게 말을 받았다.
“나도 젊은이만한 나이에 능력을 발견했어요. 처음 타인의 몸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죠. 지긋지긋한 가난에 찌들어 있던 나는 능력을 이용해 돈을 긁어모으기 시작했어요. 이런 능력이 생긴다면 누구라도 범죄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어요. 젊은이가 만났던 유괴범도 처음부터 범죄자는 아니었을 겁니다. 능력이 인간의 사악한 본능을 조금씩 일깨운 거죠. 나 역시 타인의 몸에 들어가 몸의 주인이 가진 재산을 조금씩 빼돌렸죠. 그러다 그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이라뇨?”
“나와 같은 차원의 문 능력자들이요. 그들은 내가 저지르는 범죄를 이미 간파하고 있었어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들 중엔 범죄 현장에 남은 물건의 기억을 읽을 수 있는 싸이코 메트러가 있었죠. 그리고 몸을 거대하게 변화시키는 능력자도 있었고, 의지만으로 사물을 움직일 수 있는 염동력자도 있었습니다. 나보다 훨씬 더 강하고 능력에 숙달된 자들이었죠. 그들은 나에게 어리석은 짓을 그만 두라고 경고를 했지만, 나는 젊은 혈기에 어리석게도 그들과 맞서 싸웠어요. 결과는 보다시피 이런 처지가 되었죠.”
노인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능력을 악한 일에 사용하면 그만큼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겁니다. 나는 젊은이가 유괴범과 맞서 싸우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세상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차원의 의지는 우리 같은 범인이 파악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또 모르죠. 젊은이 역시 언젠가 자신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사악한 본능에 사로잡히게 될지도. 나는 그것을 경고하기 위해 젊은이를 이곳에 부른 겁니다.”
노인의 솔직한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무거운 책임감이 느껴졌다. 내 표정을 본 노인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아, 내가 너무 딱딱한 이야기만 했군요. 하지만 내 용건은 이게 다가 아닙니다. 그것뿐이라면 꿈의 경계에서 만나 얘기해 줄 수도 있었겠죠.”
“그럼 다른 용건이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맞아요. 나는 젊은이에게 내가 지금껏 능력을 사용하면서 터득한 비밀을 알려줄 겁니다. 타인의 몸에 들어갔을 때 시간을 최대한 연장시키는 법이라든가, 혹은 그들의 기억을 읽는 법, 아니면 원하는 사람의 몸속에 들어가는 법 같은 걸 말이죠. 그러기 위해선 젊은이는 내 몸속에 들어가서 내가 가진 기억을 읽어야 해요.”
“그런 게 가능한 가요?”
분명 꿈의 경계에서 만났을 때 노인은 원하는 사람의 몸에 들어가는 방법은 없다고 말했다.
“물론 그러려면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합니다. 상대와 신체의 일부분이 닿아있어야 하고, 또 그 상대가 동의를 해야만 가능한 방법입니다. 유괴범이 그런 걸 허락할 리 없으니 그땐 말해봤자 시간낭비였죠. 능력은 사용할수록 강해집니다. 젊은이도 언젠가는 스스로 터득할 날이 오겠지만, 나에게 비법을 전수받는다면 훨씬 기간이 단축될 겁니다. 물론 젊은이가 원하지 않는다면 내가 강제로 기억을 전수할 방법은 없어요. 말로 한다고 곧바로 알 수 있는 종류의 기술이 아니거든요.”
“저한테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이유가 뭐죠?”
“나는 젊은이가 능력을 온전히 터득해 세상을 좀 더 이롭게 만들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보면 내 지난날에 대한 반성인지도 모르고요. 내 머리맡에 있는 수납장을 열면 수면제가 있어요. 그걸 먹느냐, 안 먹느냐는 순전히 젊은이의 뜻에 달린 겁니다.”
조금 망설였지만 나는 결국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노인의 옆에 누워 그가 미리 준비한 수면제를 삼켰다. 노인이 내 손을 잡았다.
“지금부터 기억을 해방시켜 놓겠습니다. 내 몸에 들어가면 저절로 알게 될 거에요. 내가 아는 모든 지식을 말이죠. 한 가지 불행한 사실이라면 알아봤자 이제는 쓸 수 없을…”
노인의 말을 듣던 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깨어났을 땐 노인의 몸 안이었다. 상대와 신체의 일부가 닿은 경우엔 꿈의 경계를 거치지 않고 곧장 몸을 점유할 수 있는 것 같았다. 곧 노인의 기억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노인이 처음 내게 보낸 이메일의 내용은 그가 놀란 교수의 정신에서 빼낸 것으로 사실과 허구를 교묘하게 뒤섞어 놓았다. 놀라운 점은 그 이메일엔 능력자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각성 코드가 숨어 있었다는 점이다. 어쨌든 나는 짧은 순간 그가 가진 모든 지식을 습득하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것은 지식이라기 보단 숙달된 기술이자 감각에 가까웠다. 능력에 대한 세세하고 다양한 기술적인 방법이 생존본능처럼 생득적으로 머릿속에 각인됐다. 예상보다 노인의 지식과 경험은 방대했다. 아니, 단지 그런 표현을 넘어선 세월의 궤적이 노인의 내부에 존재했다.
나는 그 기억의 틈에서 한 가지 묘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타인의 몸에 들어갔을 때 본체가 죽으면 돌아갈 곳이 없어진 의식은 점유한 사람의 몸에 머물러 살게 된다. 반대로 타인의 몸에서 죽으면 나의 의식 역시 소멸된다.
노인은 어째서 진즉 이 얘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때 내 몸을 장악한 노인의 웃음이 들렸다.
“역시 초짜들은 다루기가 쉽다니까. 그동안 기다린 보람이 있어.”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노인이 나에게 접근한 진짜 이유가 뭔지. 지금까지 그가 약탈한 육체는 모두 다섯이었다. 시간이 흘러 나의 몸이 노쇠하면 노인은 또 다시 같은 능력을 가진 젊은 육체가 출현하길 기다릴 것이다. 오랜 세월 누적된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노인은 능력자의 출현을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순간 나 역시 그와 같은 존재가 되었지만, 내 육체는 하찮았다.
잠시 후 억센 손길이 내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의식이 서서히 흐려진다.
황태환은 1984년생으로 공포소설 창작집단 매드클럽에서 소설을 쓰고 있다. 한국공포문학 단편선 시리즈에 <폭주>, <살인자의 요람>을 수록하였다.
kikaki2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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