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티 해븐의 뒷골목은 복잡한 미로에 가까웠다. 사잇길과 막다른 골목, 더러운 오물이 통행을 방해하는 등의 환경 여건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골목에 10분도 채 머물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골목에도 사람들은 살고 있었다. 도시의 이면에 속하는 집단, 그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에 속하는 대여섯 명의 아이들.
"오늘 몇 건이나 했어?"
"별로."
"하긴 단속이 점점 심해지고 있지?"
"저쪽 구역에서도 어제 한 명 잡혀갔대."
총알 구멍이 나 있는 상의나 낡고 빛 바랜 군복 바지, 사이즈가 틀린 신발과 맨발, 각양각색의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오늘의 전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각지에서 모인 만큼 성격도 모두 달랐고 그만큼 별명도 다양했다.
한쪽 구석에서 카드로 묘기를 펼쳐 보이는 활달한 소년의 별명은 럭키. 그 옆에 웅크리고 앉아 럭키에게 카드 묘기를 가르쳐달라 떼를 쓰는 소년은 브래그다. 브래그는 덩치에 걸맞지 않게 정보 수집에 능했다. 거리에 있을 때도 발이 넓어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소문이 제일 많기로 소문난 녀석이었다. 검증할 수 없는 그의 소문은 모두를 즐겁게 해주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단점이라면 그의 말 중에 절반쯤은 과장이라는 것 정도.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아이는 허밋이다. 허밋은 이 도시에서 도서관의 지리를 가장 잘 아는 녀석이었다. 오늘도 여전히 낡아 헤어지기 직전의 책을 소중한 듯 끌어안고 읽고 있다. 그가 앉아 있는 곳의 가장 높은 자리에는 한 소년이 모자를 덮어쓰고 누워 있었다. 그 곁에는 자신의 머리통만한 기계를 주물럭거리는 소년의 모습이 보인다. 테크니컬. 줄여서 테키라는 별명을 가진 이 소년은 기계 해체와 조립은 어느 누구도 자신을 따를 자가 없다고 스스로 자부했다.
"떴어, 대장!"
골목 어귀에서 망을 보던 님블이 달려오며 소리쳤다. 눈이 좋고 다리가 튼튼한 그는 망보기의 전문으로 님블이라는 별명답게 재빠른 발을 가진 아이였다. 귀신 같은 솜씨로 거리 골목을 누비며 가디언들의 손아귀를 벗어난 전적이 있는 님블. 그가 외친 소리는 해븐의 가디언이 근처에 나타났다는 말이었다. 가디언이란 시티 해븐의 경찰 같은 조직이지만 여타의 치안 쪽에는 손대지 않고 단지 고아들만을 잡아들이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어 키즈 헌터라고도 불린다.
주변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지고 줄곧 누워만 있던 한 소년의 손이 위를 향해 올라갔다. 그러자 나머지 아이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고 손을 든 소년을 바라보았다.
“님블은 적들을 교란시키고, 5분이야. 5분 뒤면 무슨 일이 벌어져도 너도 철수 해. 브래그는 럭키와 같이 다른 지역 아이들에게 전해. 테키, 가디언들이 이동할 위치를 예측할 수 있겠지?”
“맡겨줘, 대장.”
자신의 머리보다 더 큰 고글이 달린 비행모자를 눌러 쓴 테키는 재빠르게 도시 지도를 펼치고 몇 개의 지점을 찍어 보였다.
“여기서 시작되었다면 여기, 여기, 여기.”
테키는 몇 개의 지점을 찍어 보이고 재빠른 손놀림으로 고물 핸드컴의 자판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앞으로 10분 안에 여기와 여기로 좁혀질 가능성이 커. 그러니 우리는 이 루트를 타고 움직여야만 해.”
“좋아. 다들 들었지? 움직여!”
손짓만으로 그룹을 통솔하는 자그마한 체구의 사내아이. 행동거지로 보아서는 리더인 듯 보이나 체구나 몸매, 나이로 보아서는 그렇게 여겨지지 않았다. 뒷골목에서 그를 지칭하는 이름은 와이즈. 힘보다는 머리를 써서 위기를 넘기는 능력 탓에 캘빈이라는 본명보다 더 알려진 이름이다. 그가 이끄는 그룹 중 어느 누구도 가디언에게 잡힌 전적이 없다는 점이 그의 능력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명령이 떨어지자 아이들은 네온사인을 등 뒤로 하고 일사불란하게 개구멍으로 튀기 시작했다.
문명을 수십 세기 전으로 돌려놓아버린 대 재앙 후 인류는 극도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 생존을 위한 전투를 벌여야만 했다. 겨우 몸을 추스른 나라들은 하루하루를 간신히 연명할 수 있었다고 하나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부족한 에너지였다.
에너지를 둘러싼 이권 다툼은 끊이질 않았다. 결국 유럽대륙과 북미대륙 간에 차세대 에너지원을 둘러 싼 전쟁이 벌어졌고, 이 전쟁은 지구 전체로 번져나갔다. 결국 몇몇 거대한 대륙들은 또 한번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고 동시에 차세대 에너지원의 개발도 막막해져 버렸다.
전쟁이 남기고 간 상처는 무시무시했다. 이전의 대 재앙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잔혹한 상처를 남겨 버린 것이다. 대 재앙 이후 1/10도 채 남지 않았던 인구의 수는 전쟁 후 1/3로 감소해버렸다. 에너지 생산 시설은 거의 파괴되어버렸고 복구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인류는 다시 한번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지고야 말았다.
종전 후, 자국의 에너지원을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여 일부 국가들은 협정을 체결하기도 하였다. 어떠한 에너지원을 사용하던 간섭 받지 않다는 조항이 협정의 핵심이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에너지원은 점차 바닥나기 시작했고 결국 풍력이나 화력, 수력 등을 이용한 자가발전으로 되돌아가는 나라들도 생겼다. 그러나 단 한 곳. 전 세계적인 에너지 고갈 현상에도 불구하고 불야성을 자랑하는 도시가 있었다.
매일 밤 찬란한 빛을 뿌리며 미미르의 샘처럼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유혹의 색들로 가득한 땅. 지도상의 지명은 따로 존재하나 아무도 그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 곳. 지옥 같은 이 땅에 남겨진 유일한 천국이라는 의미로만 불리는 도시, 시티 해븐.
이 도시에서 삶을 영위하는 이는 겨우 3천에 불과했지만 찾는 이는 하루 수만에 달했다. 시티 해븐에서도 광장 쪽에 자리잡은 거대 호텔 해븐스 도어의 앞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하루 숙박료가 중산층 가정의 3달 생활비와 맞먹는다는 십성급 호텔도 체크인을 하려는 고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런 고객들 중 한 사람인지 한 여인이 남편과 함께 호텔을 향해 걷는 모습이 보인다. 화려한 모피코트를 몸에 두르고,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값비싼 액세서리를 걸친 여인은 오랜 기다림에 짜증이 난 듯 불평불만을 늘어놓고 있었다. 여인이 한 눈을 파는 듯 보였다 싶을 때, 어둠 속에서 검은 인영이 튀어나와 쏜살같이 거리를 가로질렀다. 동시에 비명소리가 거리를 울렸다.
"꺅! 소매치기야!"
그러나 검은 인영은 사라진 지 이미 오래였다.
여인은 소매치기를 잡아달라 도움을 요청해 보았지만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무심 그 자체였다. 이런 일은 흔하디 흔해 아무도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 일처럼 보였다. 사건이 일어난 지 20여분이 지나서야 해븐의 경찰들이 도착하였다. 경찰들은 여인의 울먹이는 하소연에도 불구하고 시큰둥한 표정으로 경위서를 작성할 뿐인 광경은 더더욱 흔했다.
완벽에 가까운 해븐이었지만 문제는 있었다. 전쟁이 인류에게 선사한 선물. 바로 전쟁 고아의 존재였다. 따스한 불빛과 먹을 것을 찾아 해븐으로 몰려든 아이들. 변경의 폐허에서 굶어 죽기보다는 소매치기나 도둑질로 생활을 영위하더라도 사는 것을 택한 것이다. 갈 곳을 잃은 아이들에게도 해븐은 이름처럼 천국과 다름없는 곳이었다.
처음은 소수였기에 별 말 없이 지켜보았다. 오히려 아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수용소를 짓기도 하고 보호에 나섰으나 그것도 곧 한계에 다다랐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아이들의 홍수와 불만을 표출하는 고객들의 분노를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두 손을 들어버리고 말았다. 해븐은 결국 어쩔 수 없는 정책의 일환으로 시민권과 방문권이 없는 자들을 도시 밖으로 추방하기 시작하였다. 어리다고 해서 예외는 없었다. 어찌 보면 눈물도 피도 없다고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해븐은 서비스를 위하여 존재하는 도시였다. 도시는 점점 깨끗해져 갔고 먼지 하나 없는 파라다이스로 유지될 수 있었다.
고아들을 놓쳐버린 가디언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그러한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사소한 일상을 이어갔다. 자정을 넘긴 시간이어도 수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오가고 있었다. 각양각색의 복색차림인 사람들 사이로 느긋하게 걸어가는 소년의 모습도 보였다. 한 14-5세쯤 되었을까? 두툼한 코트와 단정하게 빗어 올린 머리가 잘 어울렸다. 소년은 뭐가 그리 신기한 지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흡사 부잣집 도련님이 부모님의 눈을 피해 몰래 밤놀이를 나온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해븐의 밤거리는 소년의 호기심을 만족시켜줄 만큼 화려한 곳이었다. 인공적으로 조형된 현대적 분위기의 건물들 사이로 어지러이 돌아가는 현란한 조명과 네온사인. 중앙 대로를 따라 길게 늘어선 화려한 호텔들과 카지노 장. 밤낮을 가리지 않고 형형색색의 물을 뿜어 올리는 분수대와 거리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놀이꾼들의 흥겨운 퍼포먼스.
소년의 모습이 그러한 모습이 눈에 띄었는지 경찰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마도 아이 혼자서 돌아다니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거다. 다소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내키지 않던 걸음을 옮기던 그는 뒤이어 다행이라는 얼굴을 하고 걸음을 돌렸다. 소년이 당연하다는 듯한 발걸음으로 한 호텔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밤놀이를 마치고 부모에게로 돌아가겠거니 라고 생각했으리라.
손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도어맨이 문을 떠난 틈을 노려 소년은 재빠르게 호텔 문 안으로 들어갔다. 라운지는 한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열대 기후와 다름 없는 기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도시의 중심부에 세워진 해븐 타워에서부터 도시의 말단부에 이르기까지 인공지능 컴퓨터에 의하여 통제되는 최첨단의 ‘오리진’ 시스템. 단 1mm 혹은 1초의 어긋남이나 1w의 전력낭비를 허용치 않는 정교한 중앙 전력 공급 시스템으로 해븐의 모든 실내는 동일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마도 엄청난 양의 전력이 소모되었을 것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해븐에는 사유 재산인 건물은 한 채도 없었으며, 모든 건물은 도시의 소유였다. 즉, 다시 말해서 하나의 도시가 국가인 셈이기도 하다. 국가가 모든 것을 통제하고 시민에게 필요한 것을 무상으로 공급해주는 그런 이상적인 국가 말이다.
그러나 천국이라고 하여 모든 점에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대체, 해븐은 왜 이런 곳에 있는 건지 모르겠다니까요.”
“그러게 말이에요. 따뜻한 남 캘리포니아 같은 곳에 있었으면 좀 좋아?”
“맞아요, 맞아. 더군다나 이 지역 날씨 좀 보세요. 매번 올 때마다 비 아니면 눈을 맞으며 와야 하다니. 어떻게 하루도 갠 날을 볼 수 없는지 원. 정말 구질구질하다 못해 처량맞기까지 하다니까요.”
“그뿐이면 말도 안 해요. 번개는 또 어떻고. 나는 하늘이 새하얗게 변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니까요? 율리케 시장은 왜 이런 곳에다 해븐을 지었나 몰라.”
“어머! 번개와 천둥이야 말로 해븐의 또 다른 상징이나 마찬가지니 익숙해지시는 게 좋을 거예요.”
도시의 관문을 통과하는 관광객들은 보통 이러한 불평불만의 대화를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날씨가 어떻던 간에 시티 해븐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어진 적은 없었다.
소년은 호텔 라운지의 통 유리 너머로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까만 색으로 물들인 화폭에 마구 흩트려놓은 듯한 회청색의 구름과 얼룩덜룩한 검은 점들. 그 사이로 간간히 뿌려지는 백색의 섬광과 성난 짐승의 울음소리. 시티 해븐이 쾌청한 날씨를 자랑하는 날은 1년 중 손에 꼽힐 정도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이미 더 이상의 소문거리도 되지 못했다.
우당탕-
소년은 재빠르게 몸을 숨겼다. 거리에서 살아온 오랜 본능이 시키는 대로 따른 결과였다. 그러나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소란이 일어난 곳을 보았다.
누더기 코트를 걸치고 산발이 된 머리를 한 노인이 관광객 중 한 명을 잡고 횡설수설하고 있는 광경이었다. 호텔 종업원이 비명을 지르는 관광객에게서 노인을 떼어놓았다. 이와 같은 상황에 익숙한 지 넌더리가 난다는 기색으로 노인을 부축하고 정중히, 그리고 거부할 수 없는 태도로 호텔 밖으로 밀어 내었다. 자신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에 대한 인식조차 없는 듯 노인은 호텔 밖에서 조차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순찰하던 경찰이 사라졌음을 확인한 소년은 재빠르게 호텔을 빠져 나와 거리로 숨어들었다. 안전해진 것을 확인하자 소년은 위장복을 벗어버리고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자그마한 체구에 평범한 얼굴, 그러나 길거리에서 살아온 노련함을 담은 눈동자. 소년은 바로 와이즈였다. 키즈 헌터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에 긴장이 풀린 순간 강철 같은 힘이 그의 손목을 꽉 쥐었다. 아뿔싸. 들킨 건가!
“헤헤, 꼬마야. 너는 저게 무언지 아냐?”
그러나 그의 등 뒤에서 들려온 소리는 가디언의 것이 아니었다. 안도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더불어 미치광이 노인네에게 잡혀버린 이 순간에 대한 짜증이 울컥 솟았다. 기가 막혔다. 천하의 와이즈가, 키즈 헌터조차 어쩌지 못한 그를 미치광이 노인이 잡다니. 그러나 노인의 힘은 의외로 강했다. 결국 와이즈는 버둥대길 그만두고 노인이 말한 ‘저 것’이 무엇인지 쳐다보았다. 그가 가리키고 있는 것은 시티 해븐의 중앙에 자리잡은 해븐스 타워였다. 이 도시의 심볼인 동시에 중추 핵인 기관 오리진이 설치 된 장소.
“뭐긴 뭐예요. 해븐스 타워잖아요?”
“아니야! 저건 안테나다!”
그는 곧이어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단어들을 내뱉으며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말이야? 뭐? 무동조기간?’
그 외에도 뇌파와 리듬이라느니 하는 말들은 테키나 좋아할 법한 용어였다. 그 녀석은 어려운 말을 좋아하니까.
“사람은 건전지야, 전기를 담은 건전지. 지구 안과 바깥에 엄청나게 큰 자석이 있지! 자석! 자석을 자꾸 붙여놓으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뻥! 터져! 뻥!”
노인은 자신의 이마를 와이즈의 이마에 맞부딪쳤다.
“사람 머리로 다리를 놓을 수 있지! 이렇게!”
“이 미치광이 노인네가! 저리 가요!”
더 이상 미친 노인을 상대할 시간이 없었던 그는 노인을 밀치고 어둠 속을 내달렸다. 그의 뒤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노인을 남겨두고.
“런던 브릿지, 폴링 다운~ 폴링 다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었더라? 그래 저거 저거는 안테나야, 사람 잡아 먹는 거대한 안테나! 나쁜 안테나!”
“아아, 그 노인네?”
“그 노인네 봤구나?”
럭키와 브레그의 입에서 동시에 나온 말이었다.
“뭐, 과학자라나? 전쟁 전에 꽤 유명했다고 사람들이 그러던데.”
“과학자?”
“뭐 전기랑 지구랑 어떻고 하던데 난 잘 모르겠고, 뭐 그 노인네 연구가 풀리지 않자 저렇게 미쳐버렸대. 그런데 웃기게도 시에서 내쫓지도 않고 배 고프면 밥도 주고 잘 곳도 마련해주고 그러더라고. 저 할아버지 해븐의 시장하고 친인척 관계라도 되는 거 아니냐는 소문도 있어.”
“부럽다. 나도 시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하면 좋겠네~”
“왜 수용소에 들어가면 밥도 주고 재워준다잖아? 잡혀보지 그래?”
“이 자식!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말아! 거기 가면 다 죽는대!”
“그걸 어떻게 알아? 수양 부모를 찾아준다는 소리도 있던데?”
“그걸 믿어? 믿냐고?”
럭키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어깨만 으쓱거렸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행위. 그만큼 수용소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고 어느 누구도 진위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대장, 떴어!”
“아 놔, 몇 일 지나지도 않았는데 왜 또!”
님블의 말에 럭키는 짜증을 내며 무거운 엉덩이를 들었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소지품을 챙기고 테르가 알려주는 방향을 기억하는 등 분주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다들 알지? 행운을 빈다.”
아이들은 와이즈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어둠과 구멍 속으로 여느 때와 같이 사라져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루트를 통해 달아난 곳에는 이미 가디언들이 퇴로를 차단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와이즈는 숨을 몰아 쉬면서 앞을 쳐다보았다. 마치 아이들이 이쪽으로 올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 것처럼 빼곡하게 들어 찬 검은 유니폼의 사람들.
“앗! 어쩌지? 이미 앞에!”
어떻게 눈치 챈 걸까? 와이즈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의 손에는 일명 건독이라고 불리는 광전자 건이 들려있었다. 세간에는 건독이 살상용이 아닌 범죄자 진압용으로 사용하는 기절 전용의 총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그것은 일부만 알려진 이야기일 뿐. 대인 살상용으로도 손색이 없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리더로 보이는 인물이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너희들은 포위되었다. 반항할 생각은 버려라. 순순히 포기하면 무력을 행하지 않겠다."
"개소리 마! 너희들에게 잡혀간 친구들이 돌아온 적 없어! 잡히면 죽는다는 거 다 알아!"
"어디서 들었는지 몰라도 헛소문이다. 얌전하게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리더가 손짓을 하자 가디언들이 꼬마들을 잡기 위하여 앞으로 나섰다. 꼬마들은 제각각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뛰었고, 상황은 금새 아수라장이 되었다.
쾅! 푸른색의 빛 줄기와 함께 근처 담장의 일부가 산산조각 나 버렸다.
“도망가면 사살할 것이다.”
가디언의 리더는 담담하게 말하였지만 아이들은 그 말에 서린 한기를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누구도 움직이지 못하고 눈치를 보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얼굴에 이젠 끝이라는 절망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와이즈가 앞으로 나섰다.
"우리를 죽이면 '고객'들에게는 뭐라고 해명할 건데? 그들이 좋아할까?"
"호오라, 네가 와이즈로군. 질문따윈 안 받지만 대답을 해주도록 하지. 너희들의 존재를 너무 과신하는 것 아닌가? 이 도시에서 전쟁고아 따위 아무도 지켜보지 않아. 지금 이 자리서 너희들 모두를 말살한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할 것 같은가?"
"......"
이미 아는 사실이었다. 전쟁고아라는 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는 암적인 존재. 거리를 더럽히고 단물을 빼먹고 사는 존재로 여겨지는 것쯤은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아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살아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라는 건가? 벌레 같은 목숨이라도 이어가야 하는 게 옳은 진리가 아니었던가?
“선택은 네가 달렸다. 부하들을 다 죽일 텐가, 아니면 새로운 생활을 제공할 텐가?"
와이즈는 슬쩍 눈치를 살폈다.
"새로운 생활이 뭔데?"
가디언의 리더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와이즈를 비롯한 아이들을 훑어보았다. 그의 눈은 선글라스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말투로 보아 지루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런 대화는 정말 부질없는 일이지만, 피 흘리는 것보다야 낫겠지. 좋다. 이야기 해주마.”
아이들은 침을 삼켰다.
“너희들은 이제 정부지원 건물에 수용될 것이다."
수용된다는 말에 아이들은 겁을 먹고는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닥쳐! 조용히 못해?"
사내는 좌중을 둘러보며 눈을 부라렸고 아이들은 다시금 조용해 졌다.
"계속하지. 그 곳에는 한 달에 한번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부부들이 찾아온다. 아이를 입양하기 위해서 찾아오는 것이다. 너희들은 입양을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이다. 수용소라고 해서 언제까지 있을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이 정도만 말해도 알 터, 굳이 길게 설명하고 싶지는 않군. 이제 선택할 시간이다. 어쩔 텐가? 순순히 함께 가던지, 아니라면 어쩔 수 없이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사내는 말을 마치고 와이즈를 바라보았다.
와이즈는 가타부타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테키도 말없이 대장을 응시했다.
어차피 저들의 말은 입 발린 달콤한 사탕 같은 소리일 뿐이다. 거리에서 굴러먹던 직감은 저 자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위기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설령 사실일지라도 그건 모두와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모험이라는 것쯤은 안다. 어차피 모두가 탈출에 성공할 리는 없다. 그래도, 그래도 일부만이라도 달아날 수 있을 것이다.
"어쩔 거야, 대장?"
"글쎄."
와이즈와 테키 사이에 시선이 오고 갔다. 테키의 손이 가디언 모르게 슬쩍 움직였다. 그게 신호였다는 듯이 아이들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비산한 아이들. 덕분에 방심하고 있던 경찰들은 뒤늦게 허둥지둥 아이들을 쫓기 시작했다.
"잡아라! 한 놈도 놓치지 마!"
등 뒤로 들려오는 성난 외침을 무시하고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쳤다. 일부의 아이들이 마비광선에 당해 하나 둘 쓰러졌다. 어째서인지 그들은 살상용 붉은색 버튼을 누르지 않고 푸른색 마비광선으로 아이들을 산채로 사로잡는 모습을 보였다. 어쩌면 그들의 말이 사실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잠시 뿐이었다. 당장은 도망가는 것. 그것 만이 전부였다.
틈을 노려 와이즈와 테키도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른 아이들의 탈출을 우선순위로 두어야만 하는 둘에게 도망가기란 쉽지 않았다. 적당히 모두가 빠져나갔다고 생각되었을 때 둘은 숨이 목 끝까지 차 오를 정도 전력을 다해 달음박질쳤다. 저들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골목 어귀를 돌아갈 수만 있다면 비밀통로를 통해 달아날 수 있으리라. 도시의 뒷골목을 샅샅이 아는 자신들을 잡기는 쉽지 않으리라 믿으면서.
그러다 와이즈는 짙푸른 광선이 테키를 겨누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와이즈의 눈이 일순간 흔들렸다. 그러나 흔들림은 찰나, 그는 어느새 테키의 앞을 가로막았고 더불어 온몸이 부서지는 고통이 엄습했다.
"와이즈!"
'가, 너라도 달아나, 테키......'
와이즈의 눈빛을 알아들은 테키는 눈물을 머금고 달리기 시작했고, 곧 시야에서 테키의 금발머리가 사라졌다. 동시에 와이즈는 서서히 정신의 끈을 놓치고야 말았다.
눈을 뜬 곳은 어둠침침한 방. 와이즈는 하얀 커버로 뒤덮인 침대에 누워있었다.
'잡힌 건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조차 못하는 상황임에도 마음은 담담했다. 어차피 벌어질 거라면 빨리 벌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뿐이었다.
"대장!"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행이다. 깨어났네."
"브래그?"
"응 나야. 대장이 오랫동안 정신을 잃고 있어서 걱정했어."
"너도 잡혔구나."
"재수가 없었지, 뭐."
"다른 애들은?"
"몰라 몇몇은 잡혔는데 다들 뿔뿔이 흩어졌어."
"여기는 어디일까?"
"수용소래. 우리 같은 고아들을 가두어 두는 곳."
와이즈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여기서 양부모를 만나는 아이들도 있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면 도시 밖으로 추방된다고 해."
'그들이 한 말이 진실이라는 이야기인가?'
그 때 문이 열리면서 하얀 제복을 입은 사내가 들어왔다.
"깨어났군. 자, 꼬마. 정신을 차렸으면 어서 일어나."
와이즈와 브래그는 명령대로 주춤주춤 일어났다. 사내는 더 이상 할 말은 없다는 듯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따라 나오라는 의미인가? 와이즈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의 말을 따르기로 하였다. 두려워하는 브래그를 데리고 그를 따라 방을 나섰다.
밖으로 나온 그들이 처음 본 광경은 허물어질 듯이 금이 가 있는 복도. 형광등 하나 제대로 달려있지 않아 어둠침침하기만 한 복도였다. 둘은 멀어져 가는 사내를 쫓았다.
사내가 인도한 곳은 침실로 보이는 곳이었다.
각 구석에 놓여진 낡은 철제 침대에는 헤어진 시트가 덮여있었을 뿐 방안에 별 다른 가구는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앞으로 너희들이 묶을 방이다. 기상 시간은 오전 7시. 취침 시간은 저녁 10시. 중간에는 정해진 일과가 있으니 따르는 게 좋을 거다. 식사는 8시. 1시. 7시. 시간을 어기면 굶어야 한다. 식당은 복도 왼쪽의 큰방이다. 알겠나?"
"......"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란을 피울 시에는 독방에 가둔다. 그리고 입양의 우선 순위에서 멀어진다는 사실을 명심하도록. 너희 같은 쓰레기들을 보살펴주는 시장님에게 고마워 하는 게 좋을 거야."
기계적인 목소리로 할 말을 다 한 사내가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여기저기 틈이 갈라진 벽. 녹슨 경첩과 칠이 벗겨진 나무문. 하루 세끼 식사라고는 하지만 맛은 고사하고 양도 부족한 실정이며 침대가 4개뿐인 방 하나에 그 배 이상의 인원이 몸을 웅크리고 새우잠을 자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이곳의 하루는 정해진 시간에 시작되고 정해진 일과를 마친 후 정해진 시간에 끝이 난다. 어떻게 보면 따분하기 짝이 없는 생활이었으나, 어른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주면 매도 굶주릴 걱정도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어째서 외부에 이런 수용시설이 알려지지 않았는지, 아무도 이런 건물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지. 더욱이 이런 수용소가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들은 뒤로는 궁금증은 무럭무럭 커지기만 했다.
가디언의 리더였던 사람의 말대로 한 달에 한번 정기적인 어른들의 방문은 있었다. 그러나 와이즈는 말만 들었을 뿐, 실제로 본 적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가디언을 가장 속 썩이던 이글 아이의 리더였으니 당연한 일. 그는 요주의의 인물로 낙인 찍혔기에 행운이 찾아올 리 만무했다.
와이즈는 하루 종일 따라다니는 감시의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수용소 내의 생활에 익숙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식당에서 밥을 먹던 그에게 한 아이가 다가왔다. 아니 아이라고 하기엔 그 체구가 어른만했다. 제법 근육이 잡힌 팔과 다리, 몸을 보면 운동선수와 비견될 만 했지만, 아직 앳된 기가 남아있는 얼굴 윤곽으로 보아 약 15-6세의 소년 정도로 짐작되었다.
"네가 이글 아이의 대장이냐? 나는 3구역 그리핀의 대장, 렉스다. 이름은 들어봤겠지?"
와이즈는 고개를 돌려 렉스라고 소개한 자를 보았다. 덩치가 큰 것으로 보아 한 가닥 힘으로 대장을 해먹은 놈 같았다. 뻔했다. 수용소 내부의 아이들을 부릴 수 있는 최고 권력인 대장 자리를 염두에 두었다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어쭈? 네가 밖에서 잘나갔다고 해서 여기서까지 대장인 줄 알면 안되지. 어때? 내 밑으로 들어오면 좀 더 편하게 해주지."
렉스는 두 주먹을 쥐고 우드득 소리를 내었다.
와이즈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식판을 내려다 보았다. 보잘것없는 반찬과 터무니없는 양이긴 했지만 이마저 놓치면 한끼를 굶어야 한다. 와이즈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녀석은 말보다 주먹이 더 가깝다는 것을 안다. 자리에서 일어서 렉스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호라, 이제 내 말에 따를 생각이 들었나 보군. 네 녀석이 머리가 좋다는 말은 들었다. 내 오른팔로 삼아주지.”
"무식하게 힘만 센가 보지? 렉스라는 별명은 누가 지었는지 몰라도 잘 지었는걸."
"이, 이 쥐방울만한 게!"
말과 동시에 주먹이 허공을 향해 솟구쳤다. 솥뚜껑 만한 크기의 주먹. 한 방만 맞아도 골로 가버릴 것 같은 위력적인 주먹이었다.
퍽-
"놀고 있네."
모두의 예상을 깨고 바닥에 뻗어있는 것은 렉스였다. 머리에서 붉은 피가 흐르고 우그러진 식판이 나뒹굴고 있는 모양을 보아 정통으로 머리를 찍힌 듯 했다.
다들 멍하니 와이즈를 바라보았다.
"아깝게 밥을 버렸군. 젠장 오늘 점심은 굶어야 하나?"
별 일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린 와이즈의 뒤로 야채 찌꺼기와 소스로 범벅이 된 렉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정신을 잃은 채 볼썽사납게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이 일로 와이즈는 독방 신세가 되었다.
단순히 독방에 감금되는 정도라면 괜찮았겠지만, 어디나 그렇듯이 남을 괴롭히기를 즐기는 인간은 하나씩 있는 법. 독방 전문 간수인 조드가 그런 자였다.
"너라는 놈을 한번 손봐주고 싶었는데 마침 하늘이 도왔군. 스스로 일을 저지르다니 말이야. 네 녀석을 얌전하게 만들라고 소장님께서 친히 부탁하셨단다."
조드는 눈빛을 빛내며 즐거워했다. 손에는 검푸르게 기름칠이 되어 있는 채찍이 감겨있었다. 가혹한 매질이 시작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와이즈의 등은 흘러내리는 피로 채찍질 자국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신음소리 한마디 없이 견디어냈다.
"지독한 놈, 네가 어디까지 버티나 보자."
채찍은 독사의 이빨처럼 등을 파고들었고 골수를 파고드는 아픔은 머리 속을 하얗게 비웠지만 와이즈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러나 이제 겨우 15살의 소년. 결국 의지를 배반하고 비집고 나오는 신음소리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가물가물해지는 의식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쳐보았지만, 조드의 치 떨리는 중얼거림을 들으며 결국 기절하고야 말았다.
"지독한 놈, 네 녀석도 콘레이만큼이나 끈질기군. 퉷- 재수 없어."
그 후 와이즈는 일주일간 독방 신세를 진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자유롭게 된 날, 그는 담 근처에 쭈그리고 앉았다. 매서웠던 고문의 흔적이 남아 운신이 자유롭지는 못했지만 이렇게 햇살을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다.
브래그가 다가왔다.
"렉스는?"
와이즈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브래그도 굳이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항상 떠벌리기 좋아하고 과장된 이야기로 모두들에게 사랑 받던 모습도 많이 사라져있었다.
"나쁜 놈들. 렉스는 가만 두고 대장만 잡아다 가두었어. 마치 노렸다는 듯이 말이야. 렉스 자식 떵떵거리면서 대장행세를 하고 있다고."
이미 예상한 일이었다. 어쩌면 렉스는 소장의 명령에 따라 시비를 건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야만 자신을 괴롭힐 건수가 생길 테니까.
"얼마나 거들먹거리는지. 거기다가 약한 아이들만 골라서 괴롭히고 말이야. 다들 렉스만 보면 슬금슬금 피해. 대장! 녀석을 손봐주는 게 어때?"
"아, 소장이 이번에 걸리면 가만 안 둔다고 했지. 쳇- 밖에 있을 때가 좋았는데. 다른 녀석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혹시 콘레이라는 이름 들어봤어?"
뜬금없이 묻는 말에 브래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콘레이. 콘레이라…...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인데."
"그래! 콘레이! 앗, 그 이름은 여기서 금지라던데 어떻게 알아낸 거야?"
"금지?"
"쉿- 큰 소리 내지마. 콘레이라는 녀석, 아마도 여기서 탈출에 성공한 놈일 거야. 감시원들이 쉬쉬하는 이름이고 말하면 끌고 가서 개 패듯이 팬다더군."
와이즈는 눈을 들어 하늘에 떠있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태양은 담 안이나 밖을 가리지 않고 여전히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와이즈는 빛이 부신지 눈을 감았다. 탈출이라? 탈출이라……
그 후로 와이즈에게 수용소 내부의 생활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렉스의 괴롭힘은 끊이지 않았고 사사건건 물고 늘어졌다. 더불어 감시의 눈초리는 점점 더 심해졌다. 사소한 잘못에도 구타와 폭행이 이어졌으며 툭하면 독방 행이었다. 와이즈는 점점 더 야위어져만 갔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죽지 않았고 점점 더 야수의 것처럼 점점 더 살기를 띠어 갔다. 더욱이 조만간 양부모를 찾지 못한 아이들은 도시 밖으로 추방당할 것이라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런 가운데 와이즈의 마음 속에는 한 가지 계획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브래그, 자니?"
"아니, 왜?"
소등 시간이 지난 후라 모두가 잠든 밤.
와이즈는 옆자리 침대의 브래그에게 말을 걸었다.
"나. 탈출할 거다."
"뭐?"
브래그는 깜짝 놀란 듯 보였다. 와이즈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한 거야?"
"어차피 새장 속의 새는 길들여지기 마련이야. 난 길들여질 수 없어. 난 자유롭고 싶어. 그리고 어차피 도시 밖으로 추방당하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어. 이러나 저러나 죽기는 마찬가지잖아. 도박을 하는 수밖에."
"가능할 거라고 봐?"
파랗게 질린 얼굴로 브래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소리 낮춰."
그제야 누가 들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브래그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쩌려고?"
"계획이 있어. 어때, 같이 갈래?"
"......."
"강요하거나 하지 않아."
"모르겠어. 지금과 거리에 있을 때 어느 쪽이 더 좋은 건지. 그리고 추방당하기 전에 양부모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고, 또 추방이라는 것은 헛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어. 난... 난 자신이 없어."
"그래, 이해해. 여기서는 적어도 굶주리지는 않으니까."
그랬다. 배고픔에 지쳐 울면서 잠들기가 몇 날 밤이던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하늘을 원망하고, 다음은 전쟁을 일으킨 자를 증오하고, 결국은 일찍 죽어버린 부모를 저주했던 얼마나 많았던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만 빼고는 그다지 나쁘지 않은 생활이었다. 적어도 브래그에게는.
"정말 계획은 있는 거야?"
"그래. 하나만, 하나만 맞아 떨어져 주면”
와이즈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갓조차 씌워져 있지 않은 낡은 전구만이 외줄에 매달려 흔들거리고 있었다.
“승산은 있어."
“……생각해볼게.”
브래그는 선뜻 답변하기 어려웠고 와이즈는 이해했다.
둘은 침묵 속에서 그렇게 어두운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대장. 내가 소장한테 밀고할거라는 생각 안 해봤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믿는다고 말하면 웃을래?"
자신을 믿어준다는 말에 브래그는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와이즈는 자신보다 뛰어난 머리와 행동력을 지닌 대장이었다. 그의 말은 언제나 옳았고 한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그가 말하는 곳에는 언제나 먹을 것이 있었고 조금 춥기는 해도 마음 놓고 잘 수 있는 장소가 있었다. 그런 그가 자신에게 믿는다 라고 말한다. 브래그는 가슴 한 켠이 뿌듯해짐을 느꼈다.
“고마워, 대장.”
"자자. 좋은 꿈 꿔."
"대장도."
둘은 돌아누워 잠을 청했다.
결국 브래그도 합류하기로 하였다.
둘은 은밀하게 사전 교섭을 벌여 동료들을 더 끌어 모았다.
와이즈가 세운 작전은 혼란을 유도한 후, 그 틈을 타 재빨리 동쪽의 낮은 담을 넘어 슬럼 가의 뒷골목을 빠져나가는 계획이었다. 사전 발각을 두려워한 아이들도 있었으나 다행히도 수용소 측은 낌새를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여 계획을 검토하고 변수를 측정해서 미리 없애버렸다.
시간은 점점 흘러갔다.
와이즈와 브래그는 마지막 사전 점검까지 꼼꼼하게 점검했다.
드디어 결행 시간. 저녁식사 시간의 식당 안, 모두가 질서정연하게 식판을 받아 묵묵히 밥을 먹었다. 오늘도 여전히 렉스가 다가와 시비를 걸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애써 상대하지 않으려고 무시했던 와이즈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일부러 렉스의 비위를 거슬리는 말만 골라하여 화를 돋구었고 결국 완력싸움으로 번졌다.
아이들도 패를 나누어 응원을 하는 분위기였다가 종내 집단 싸움으로까지 커져버렸다.
놀란 수용소의 직원들이 달려와 진압을 시도하기 시작했을 때 멀리서 외침이 들려왔다.
"불! 불이다!"
라는 외침과 함께 소란은 시작되었고 어느 누구도 짐작하지 못한 탈출의 서막이 올랐다.
다들 놀라 뛰어나가 보니 서서히 밤으로 물들고 있는 건물의 서쪽부분에서 검은 연기와 더불어 새빨간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건물의 서쪽은 목재를 보관하거나 작업하는 곳이었기에 불길은 순식간에 겉잡을 수 없으리 만치 크게 번졌다. 사람들은 우왕좌왕 불을 끄기 위해서 분주한 몸놀림을 놀렸다. 감시 체계가 무너진, 아니 자세히 말하자면 살기 위해 발버둥쳐야 하는 상황인 지금 누구도 재빠르게 동쪽의 담으로 향하는 일단의 무리를 눈여겨보는 이는 없었다.
하나가 된 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무리는 재빨리 줄사다리를 담 위에 걸고 하나 둘 올라가기 시작했다.
경비병들도 불길을 잡느니라 여념이 없었고 구석진 곳의 담이라 그런지 생각했던 것보다 쉬웠다.
"자, 이제 이 담만 넘으면 자유야!"
브래그의 들뜬 목소리에 아이들의 얼굴도 점점 밝아졌다. 자유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이 기다리고 있다. 이 담만 넘으면!
"어, 그런데 와이즈는?"
동시에,
"삐익- 탈출이다!"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서치라이트가 켜지고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일행은 순식간에 포위 당했다.
"쳇- 들켰나! 모두들 빨리 넘어!"
라는 브래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도 전에 일제히 발사된 붉은 색 광선에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하나 둘 땅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와이즈는 음습하고 습기 찬 하수구를 따라 걷고 있었다. 눈물이 쉴 새 없이 뺨을 타고 흘렀다.
'미안, 미안해.'
이를 악문 입술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난, 난 새장 속의 새가 되기 싫었어. 이 방법을 택한 나를 용서해 달라고는 하지 않겠어. 너희들을 기억하겠다고도 하지 않겠어. 난 살아남을 테니까, 그걸로 충분하니까."
와이즈는 뿌옇게 습기가 차 올라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주먹을 불끈 쥐고 달렸다. 자유를 향해서. 미래를 향해서, 삶을 향해서.
시티 해븐의 중심에 위치한 거대한 오벨리스크 안에 자리잡은 메인 센터 '오리진'. 이 건물이 도시를 움직이는 중추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쯤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최하층에 거대한 홀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그곳에 이 도시의 에너지원을 담당하는 메인 컴퓨터가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곳은 하얀 가운을 걸친 연구원들로 항상 분주했다. 액정 모니터에 떠있는 정보를 해독하고 입력하거나, 한쪽 벽면에 길게 나열된 빼곡한 대형 유리관을 들여다보면서 뭔가를 스크립트하는 연구원들. 모든 계기는 마더 컴퓨터에 연결되었고, 그녀는 얻어진 정보를 토대로 에너지원을 생산해 도시로 공급했다.
"내가 이겼어. 10달러 내놔."
"젠장, 뒤통수 맞을 줄 누가 알았겠어."
"인간의 본성이란 그런 거야. 위기감에 몰리면 철저하게 타락할 수 있는 게 바로 인간이라고."
"그래도 저 녀석은 리더였잖아. 동료를 팔아먹을 줄 누가 알았겠냐고."
"사실 나도 긴가민가했는데 왠지 그쪽으로 찍어보고 싶었어. 운, 아니 감이라고 할까? 덕분에 10달러 벌었으니 나야 이득이지만."
두 명의 연구원이 한가롭게 커피를 홀짝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한 명의 얼굴은 황당해하는 듯 보였고 다른 인물을 생선을 손에 쥔 고양이처럼 기쁜 얼굴이었다. 내기에 진 인물은 호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지폐 한 장을 꺼내어 건네주었다.
"땡큐~"
"이번 시뮬레이션은 변수가 발생하는 바람에 아슬아슬했어. 덕분에 구경하는 우리야 박진감 넘쳤지만."
"네가 만든 거라고 자랑하는 거냐, 지금?"
"하하-"
"그래도 덕분에 엄청난 에너지원을 뽑아냈으니 시장님께서 좋아하시겠는걸."
"저 녀석은 더 이상 재활용이 불가능하겠지?"
"뽑을 만큼 뽑았으니 곧 폐기 처분 될 거야. 신경 꺼."
"자, 다음 내기하자!"
"좋지, 이번 대상은 무엇으로 할건데?"
"렉스 어때?"
"그 녀석?"
"난 탈출한다에 걸지. 넌?"
"이봐, 그건 너무 광범위하잖아. 탈출할거면 어떻게 탈출하는지 방법을 제시해야지."
"아니야, 이 녀석은 주먹은 믿어줄 만 하지만 머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어쩌면 수용소내의 권력만 안겨주면 도망갈 생각을 버릴지도 몰라. 그 쪽에 걸어보는 건 어때?"
"그렇게 생각되면 네가 걸지 그래?"
"하하- 그런가? 그렇지만 남자는 초지일관! 나는 탈출한다에 걸겠어."
"뭐, 좋아. 좀 속는 기분이긴 하지만 그쪽에 걸지. 여전히 10달러?"
"ok~"
"그럼 데이터 생성 작업에 들어가 볼까? 뭐부터 시작할 거야?"
"우선 이 녀석에게 자신의 육체적 파워가 최고다라는 생각부터 심어주어야겠지?"
"이건 어때? 소장이 총애하도록 하는 거야. 너만 믿는다 라면서."
"어 그건 반칙 아니야? 내가 너무 불리해지잖아!"
"인간이 권력의 개가 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음... 호기심이 생기는군. 좋아. 시작하자고!"
의기투합한 두 남자의 미소 뒤로 투명한 유리관이 투영되었다. 그 안에 옅은 푸른색 액체 속에서 잠이 든 어린 소년, 와이즈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캘빈의 나신이 담겨있었다. 그 옆에는 15살의 나이답지 않게 거구의 몸을 자랑하는 렉스의 나신도 보였다. 둘은 행복한 꿈이라도 꾸는지 희열에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들의 유리관 뒤로 수백, 아니 수천의 아이들이 잠 든 컨트럴러의 모습이 보였다. 모든 컨트럴러는 희미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고, 잠든 아이들의 안구가 거세게 움직일 때마다 관을 타고 전류가 흘렀다. 이러한 방식이 가능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투명한 유리관, 드림 컨트럴러 때문이었다. 드림 컨트럴러. 일명 꿈을 꾸게 하는 기계. 인간의 뇌파를 증폭, 그것을 전류화 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한 율리케는 드림 컨트럴러를 통해 꿈을 전기에서 자기로 변환시키는 기술까지 접목하였다. 이러한 기술로 거대한 자기장의 성질을 띠게 된 오벨리스크는 천공의 자기장과 동조하여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이 형성되었고 이 것이 바로 시티 해븐의 에너지원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가장 안정된 뇌파는 바로 꿈에서 나오는 것이었기에 해븐은 고아들을 잡아들여 강제수면기계인 드림 컨트럴러에 집어넣은 것이었다. 시티 해븐은 아이들의 꿈을 토대로 만들어진 꿈의 도시였던 것이다.
컨트럴러 옆에 마련된 작은 액정 화면에는 거리의 뒷골목으로 무사히 나온 와이즈의 모습이, 탈출에 성공하여 감격의 울음을 터트리고 있는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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