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지하철에서 무가지를 읽다가 스위스 제네바에 괴질(怪疾)이 돌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초기증상은 독감과 비슷해 두통과 발열증상이 있지만 몇 시간 만에 혼수상태에 빠지고 여섯 시간 안에 온 몸의 조직이 괴사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국제면 한 귀퉁이에 조그맣게 실린 그 기사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 박스기사는 인류역사상 가장 기괴한 재앙의 시작을 알리는 경고였다.
그는 예고도 없이 내가 일하는 현장에 불쑥 찾아와 나를 당황하게 했다. 육년만의 재회였지만 나는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해 입을 우물거리고만 있었다. 스승이 제자를 몸소 찾아왔으면 응당 반갑게 맞이하고 먼저 찾아뵙지 못해 송구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도 반갑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가 나를 찾아온 의도를 전혀 짐작하지 못해 혼란스러웠고 조금은 가증스럽기까지 했다. 그는 이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먼저 손을 내밀었다.
“잘 지냈냐. 제약회사 피엠이라니, 조금 뜻밖이구나.”
나는 은행잎 추출물로 만든 순환 개선제의 설명 자료들을 서둘러 서류가방에 챙겨 넣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프로젝터를 통해 스크린에 비춰지고 있는 지역별 매출현황과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수십 명의 영업사원들이 나를 더욱 부끄럽게 했다.
“로비로 가시죠. 여기는 좀 시끄러워서.”
그는 몇 년 사이에 눈에 띄게 노쇠해진 모습이었다. 머리는 더 하얗게 셌으며 손가락은 말라서 부서질 것 같았다. 호텔 로비에서 그와 마주 앉아 있으니 좀 전의 수치심이 약간 수그러들 뿐 아니라 한 때 신처럼 숭배했던 그와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생각에 목에 힘까지 들어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굽실거리고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내가 그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승자였고 나는 그를 따르는 무리에서 이탈한 낙오자일 뿐이었다.
“사실 뒤에서 네가 피티하는 걸 들었다. 잘하더구나. 항상 그렇게 영업사원들한테 <강의>하는 거냐?”
“강의랄 것도 없어요. 제품 설명하고 실적보고하고 몇 가지 팁 알려주고 끝이에요. 그리고 영업사원들한테는 한 달에 한 번 워크숍 할 때만 해요. 평소에는 마케팅 플랜 짜고 의사들 만나고 그러죠.”
“연봉도 꽤 받겠구나.”
“작년에는 괜찮았는데 올해는 제가 맡은 제품라인이 죽을 쑤고 있어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그래, 그렇구나.........일단 내 명함 한 장 받아라.”
그가 내민 명함에는 뜻밖에도 국제생화학방어연구소 수석연구원이란 직함이 찍혀 있었다. 나는 온몸이 찌릿하고 긴장했다. 그가 지방의 워크숍 장소까지 쫓아와서 새로운 직함을 내민 걸 보면 분명 스카우트 제의였다.
“여기 뭐 하는 곳입니까?”
“유엔에서 만든 생화학연구소다. 신종 생물학 무기에 대한 방어체계를 연구하는 곳이지. 생긴 지는 꽤 되었는데,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교수님 학교 그만두셨어요?”
“강의는 안 하지만 교수직을 그만 둔 건 아니고.......요즘은 이쪽 연구소 일에 전념하고 있다. 말하자면 겸직하는 거지.”
“학교 연구실은요?”
“학교 쪽은 재현이가 맡아서 하고 있다. 뭐 워낙 똘똘한 놈이니까 별로 신경 안 쓰고 있다.”
재현에 대한 칭찬에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사실 최 교수의 총애를 받는 건 언제나 내 쪽이었고, 재현은 언제나 내 그늘에 머물렀던 존재였다.
“바쁘신데 뭐 하러 여기까지 오셨어요? 설마 저보고 다시 공부하라는 말씀은 아니시죠? 전 지금 하는 일이 좋아요.”
“직업에 귀천은 없다만, 네 재주가 사장되는 거 같아서 보기 안 좋구나. 솔직히 회사 수준도 그렇고.”
“뭐 지금 회사가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가끔 다국적 제약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거든요. 아직은 경력관리 차원에서 거절하고 있는데, 내년 정도에 옮겨 볼까 생각중이예요.”
“널 학교로 다시 불러들일 생각은 없다. 생방연구소에 태스크포스가 생겼는데, 딱 네 생각이 나더라.”
나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는 학교에서 나를 쫓아낸 것도 모자라 이제 나를 조롱하고 있었다.
“그럼 임시직이잖아요? 교수님, 전 이제 몇 년 만 있으면 억대 연봉을 받을지도 몰라요.”
“그래봐야 약밥 먹는 거 아니냐. 의사들한테 간 쓸개 다 빼줘야 되고.”
“교수님!”
어찌나 크게 소리를 질렀는지 최 교수도 움찔하며 커피를 흘렸다. 그는 냅킨으로 탁자를 닦으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한테는 항상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사실 너한테 부족한 자리라서 네가 안 올 줄 알았다.”
“근데 왜 여기까지 찾아오셨어요?”
최 교수는 한참 뜸을 들였다. 커피에 젖은 티슈가 앙상한 주먹 속으로 숨었다.
“네가 꼭 와줬으면 좋겠다. 기대는 안 하지만......”
그는 반도 마시지 않은 커피 잔을 남겨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가 사라질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고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차는 어둠과 천둥과 빗발을 헤치고 힘겹게 앞으로 나아갔다. 좌우로 움직이는 와이퍼 사이로 언뜻언뜻 시은의 얼굴이 어렸다. 내비게이션은 정신 빠진 운전자를 원망하지 않고 경로를 계속 수정했다. 차는 서울이 아니라 과거로 달려가고 있었다.
주조직적합성복합체(MHC)라는 유전자는 척추동물이 본능적으로 배우자를 선택하는데 영향을 준다고 한다. 내가 최 교수의 집에서 시은을 처음 보았을 때, 나의 MHC는 ‘바로 저 여자라구!’하고 외치고 있었다. 시은의 섬세한 실루엣과 불안한 눈동자는 나의 심장을 마구 뛰게 만들었다. 물론 그 순간에도 나의 대뇌피질은 시은에 대한 욕망을 억누르며 논리적인 사고를 진행하고 있었다. 최 교수는 나의 논문 심사 과정은 물론이고 나의 미래를 전부 지배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눈 밖에 난다면 그 동안 참았던 굴욕적인 조교생활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은근히 믿는 구석이 있었다. 나는 그의 수제자였다. 최 교수가 나에게 보내는 전폭적인 신뢰와 지지를 감안하면 시은과의 사랑이 불가능하지도 않을 것 같았다. 아버지는 자신이 믿는 남자에게 딸을 넘겨주기 마련이니까. 시은과의 관계가 점차 깊어지면서 이런 나의 기대감은 점차 자신감으로 바뀌어갔다.
하지만 모든 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최 교수는 자식에 대한 사랑과 제자에 대한 믿음 사이에 분명히 선을 긋고 있었다. 그가 시은과 나 사이의 관계를 알아차렸을 때 보인 반응은 관대함이나 흐뭇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
존스 홉킨스에서 학위를 받고 대한민국 생화학계를 좌지우지하는 최 교수로서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국내 삼류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고학생이 사윗감으로 가당치도 않았을 것이다. 최 교수는 나에게서 시은을 떼어 놓았을 뿐 아니라 과학자로서의 경력도 포기하게 만들었다. 학교에서 나온 뒤로 입사지원서를 들고 이 곳 저 곳을 기웃거리다 겨우 작은 제약업체에 영업사원으로 취직이 되었다. 신약개발 능력은 없지만 특허기간이 만료된 제네릭 약품을 영업사원들이 발로 뛰며 팔아서 그럭저럭 먹고 사는 회사였다. 부족한 주변머리로 영업하는 것도 쉽지 않아서 쫓겨나기 일보직전까지 몰렸지만 학교에서의 경력을 눈여겨본 마케팅 임원의 배려로 프로덕트 매니저가 될 수 있었다. 피엠 쪽은 적성에 맞아서 그런대로 잘 적응하고 있는 중이었고 나름대로 전직 계획까지 세워놓았다. 배신자의 부름에 응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국제생화학방어연구소는 서울 교외의 한적한 도로변에 자리 잡은 오 층짜리 콘크리트 빌딩 안에 있었다. 널찍한 주차장에는 차들이 별로 없었다. 소총을 든 군인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어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들은 나를 별로 제지하지 않았고 신분증 검사도 하지 않았다. 다만 체열 측정기를 한 번 들이댔을 뿐이다.
일층에서 기다리고 있던 최 교수는 반갑게 맞아주었지만 나는 별로 기분이 좋지 못해 고개만 끄떡하고 인사했다.
“교수님의 제안을 아직 수락한 건 아닙니다. 그냥 한 번 둘러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사실 내 자신도 왜 연구소에 찾아왔는지 몰랐다. 오후에는 아산병원 혈액내과 교수와 미팅이 잡혀 있어서 일정이 빠듯했다. 어쩌면 최 교수가 시은의 소식을 전해줄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은연중에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그래. 일단 올라가자. 보여줄 게 있다.”
최 교수의 개인 집무실은 학교에 있을 때보다 무척 협소했다. 책상 위에는 노트북 한 대 올려놓을 공간밖에 없었다. 나머지 공간은 문서와 책으로 빽빽하게 차 있었다. 그는 노트북 바탕화면의 폴더를 열고 동영상을 하나 실행시켰다. 화질이나 화면의 흔들림으로 보아 소형 캠코더나 핸드폰으로 촬영한 것 같았다. 병원 같은 곳에 침대가 놓여 있고 환자로 보이는 여자가 누워 있었는데 두터운 벨트로 가슴부위와 다리부위가 고정되어 있었다. 여자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요동을 쳤고 병상이 불안하게 들썩거렸다. 여자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자 끔찍한 형상이 드러났다. 피부는 칙칙한 흙빛이었고 코와 입술이 문드러져 있었으며 치아가 군데군데 빠져 있었다. 오른쪽 뺨은 괴사가 상당부분 진행되어 광대뼈가 슬쩍 보일 정도였다.
“한센병(나병)인가요?”
최 교수는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신종전염병이야. 감염이 되면 두 시간 내로 두통, 발열, 오한이 나면서 인플루엔자와 비슷한 증상을 보이지. 하지만 초기증상은 겨우 세 시간에서 여섯 시간 정도만 지속되고 곧바로 혼수상태에 빠지게 돼. 맥박은 느려지고 호흡은 약해지지. 몸 상태가 아주 허약한 환자는 이 단계에서 사망해. 하지만 사망하는 게 당사자에게는 행운이야. 네 시간에서 여섯 시간 정도가 지나면 감염자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나게 되는데, 뇌의 전두엽 부분이 크게 손상되어 기억력과 사고력이 크게 떨어지고 이상행동을 하게 돼. 또 시간이 지날수록 면역체계가 파괴되면서 피부가 썩게 되지.”
“끔찍하군요.”
“우리연구원들은 감염자들을 ‘살아있는 시체’라고 부르지.”
“감염경로는요?”
“경피감염(經皮感染)인데, 주로 감염자에게 물렸을 때 발병하게 돼.”
“감염자에게 물린다고요? 무슨 뜻이죠?”
“감염자의 이상행동 중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지. 이성적 사고는 마비되고, 한없는 식욕만을 추구하게 돼.”
“설마........사람을 먹고 싶어 한다고요?”
“실제로 먹는 경우도 있었지.”
그 때 내 머릿속에서 익숙한 단어 하나가 떠올랐다. 하이티의 전설과 죠지 로메로 감독의 영화, 그리고 수없이 많은 게임과 만화에서 보아온 그 말.
“좀비.”
“정부에서는 좀비라는 표현을 쓰지 못하도록 했어.”
“왜요? 더 이상 적당한 말이 없을 거 같은데요.”
“감염자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서지. 그들은 치료의 대상이지 영화에서처럼 학살의 대상이 아니야. 이 신종 질병의 이름은 다발성 대사장애 및 이상식욕증후군(Multiple metabolic disorder and hyperphagia syndrome)이야. 보통 줄여서 메다스(MEDHAS)라고 불러.”
“지금까지 연구 성과는 어떤가요?”
“아직 감염자의 시신이 도착하지 않아서 아무 것도 못하고 있어. 처음 접하는 질병인데다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학교에서 하던 연구와는 좀 동떨어졌군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겠는데요.”
“넌 그냥 예전처럼 옆에서 날 도와주면 좋겠다.”
“제가 왜 교수님을 도와드려야 되죠?”
“빠른 시일 내에 메다스 백신을 개발하지 못하면 인류문명은 여기서 끝나는 거야. 네가 팔고 있는 은행잎 추출 순환 개선제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될 거다.”
생화학방어연구소에서 일하게 되면서 남들이 모르는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메다스가 유럽 일부와 아프리카 전역에 급속도로 퍼지고 있다는 것과, 세계 각국 정부가 공조하여 언론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 정부는 인터넷에서 ‘좀비’, ‘메다스’, ‘괴질’과 같은 키워드로 검색되는 뉴스를 모조리 삭제해버렸으며, 국내에서 발생한 감염자들을 비밀리에 격리 수용시켰다. 하지만 언제까지 국민들을 속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해외 사이트에서는 이미 정체불명의 전염병에 대한 음모론들이 둥둥 떠다니고 종말론자들이 더욱 기승을 부렸다. 브라질에서는 영혼이 구원받을 수 없는 좀비가 되는 것을 우려하여 신흥종교 신자들 2백여 명이 집단 자살했다. 우리는 시한폭탄처럼 파멸을 향해 가고 있었다.
감염자의 시신은 화생방호복을 입은 군인들이 지퍼가 달린 바디백에 넣어가지고 왔다. 옷차림으로 성인남성이었다는 걸 추측할 수 있었으나 나이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상피조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괴사가 심했고 한쪽 눈알이 빠져 있었다. 이마에는 구멍이 나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것이 사인(死因) 같았다. 나는 발포명령이 내려졌는지 알고 싶었지만 군인들은 시신을 삼층까지 옮겨주고 도망치듯 사라져 버렸다. 어차피 군대의 감염자 학살은 시간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마다 해부팀장이 메스를 들고 절개를 시작했다. 양쪽 귀 뒤에서 사타구니까지 Y형으로 절개를 하고 피부를 벗겨냈다. 뼈와 근육과 내부 장기들이 드러났다. 그다음 갈비뼈를 하나씩 잘라내고, 폐와 심장, 위, 소장 등 내부 장기를 하나씩 조심스럽게 꺼냈다. 시마다 팀장이 해부를 하는 동안 다른 연구원들은 계속 사진을 찍고 기록을 했다. 나는 상피조직을 조금 잘라서 보관용기에 담았다. 시마다 팀장으로부터 내일 오전에 병리해부소견을 발표하겠다는 말을 듣고 해부실을 나왔다.
최 교수와 나는 메다스의 병원균을 찾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최 교수는 메다스의 병원균이 광학 현미경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세균이 아닌 바이러스로 추측하고 있었다. 바이러스를 찾기 위해서는 원심분리를 이용한 정제과정을 거쳐야 했다. 우리는 감염조직에 완충용액을 더해 원심분리관에 넣고 3천5백 rpm의 속도로 회전시켰다. 5분 정도 회전시키자 감염조직은 세포 찌꺼기와 맑은 용액으로 분리되었다. 나는 윗부분의 맑은 용액만 건져내어 다시 2만 rpm의 맹렬한 속도로 회전시켰다. 바이러스처럼 미세한 물질이라도 이렇게 고속으로 회전시키면 밑으로 가라앉는다. 우리는 가라앉은 찌꺼기를 다시 여러 번에 걸쳐 원심분리하여 순수한 메다스 바이러스를 추출했다.
전자현미경으로 메다스 바이러스를 관찰한 우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은 폴리오바이러스처럼 구형도 아니었고 담배모자이크바이러스처럼 길쭉하지도 않았고 박테리아 파지처럼 인공적인 모습도 아니었다. 바람 빠진 풍선이나 뭉개진 찰떡처럼 흐물흐물한 무정형이었다. 우리는 오후 내내 바이러스의 유전정보를 추출하려고 했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생물이 있을 수가 있죠?”
“어차피 바이러스는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에 있는 놈이니까. 하지만 유전정보가 없다는 건 정말 놀랍군.”
“껍질이 처음 보는 단백질이라는 것두요.”
“정리해보면, 메다스 바이러스는 첫째 유전정보가 없다. 둘째 코팅이 미지의 단백질이다, 셋째 그럼에도 숙주 내에서 증식할 수 있다는 것이군.”
“프리온이나 바이로이드로 보아야 할까요?”
“프리온은 단백질 입자일 뿐이고 바이로이드는 RNA야. 이건 전혀 새로운 병원체야.”
“DNA나 RNA가 아닌 다른 형태로 유전정보를 전달하는 건 아닐까요?”
“그렇다면 지구상의 생물이 아니라고 봐야지. 아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어떻게 이런 일이.......”
최 교수는 낙담한 표정이었다. 최고의 생화학자이자 면역학자인 그도 인류의 지식을 초월한 미지의 병원균 앞에서는 무기력한 존재였다. 나 역시 한때 정신적 지주였던 최 교수의 절망에 감염되어 온몸의 기운이 빠지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회의실에서 열린 시마다 팀장의 해부결과 발표는 우리가 절망해야 하는 이유를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해부를 통해 병의 기전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익한 발견은 하지 못했습니다. 메다스 감염자는 턱 근육이 비정상적으로 두꺼워져 있고 턱뼈도 큽니다. 따라서 깨무는 힘이 정상인보다 훨씬 강할 것으로 보입니다. 심장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혈액 속의 적혈구는 모두 파괴되었고 혈소판만 그득한 끈적거리는 액체는 감염자의 신체에 아무런 이득도 주지 못합니다. 호르몬을 분비하는 내분비선은 모두 심하게 변형되어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폐, 신장, 위, 소장, 대장 모두 세포변형이 일어났고 제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감염자는 이미 오래전에 사망한 시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메다스 감염자는 어떻게 죽은 것과 다름없는 몸으로 균형을 잡으며 걸어 다니고, 살아있는 인간을 사냥하는 것일까요? 소화기능이 없는데 왜 그토록 인간을 먹으려 하는 걸까요? 정상적인 인간은 1개의 ATP를 분해하여 7.3킬로칼로리의 에너지를 얻습니다. 감염자들은 이러한 대사과정이 없는데도 어디서 에너지를 얻는 것일까요?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메다스 감염자는.........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알면 알수록 기괴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메다스였지만 연구원들이 넋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는 수석연구원인 최 교수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백신 개발 프로세스를 진행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바이러스의 독성을 약화시켜 생백신을 만들려고 했다. 약해진 메다스 바이러스를 주입하여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을 갖게 하면 감염자에게 물리거나 긁혀도 메다스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하지만 실험용 쥐를 대상으로 실험해 본 결과 메다스 백신은 전혀 예방효과가 없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해 일주일 이상 끙끙 앓았는데, 연구원들이 잠든 새벽에 홀로 실험을 하던 최 교수가 원인을 밝혀냈다. 최 교수는 아침에 일어난 연구원들 앞에서 초췌한 모습으로 충격적인 첫 마디를 내뱉었다.
“나는 메다스 바이러스가 지능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집단생활을 하는 개미나 꿀벌이 떼지능(swarm intelligence)을 가졌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돌연변이와 증식밖에 모르는 바이러스가 지능을 가졌다니 생화학계의 최고 지성이 망령이 들었거나 늘그막에 언어도단의 취미를 가지게 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 뜬금없이 아침부터 무슨 소립니까. 밤새 뭐하셨어요?”
버릇없는 라틴계 연구원이 짜증 섞인 악센트로 물었다. 최 교수는 밤새 만든 것이 분명한 슬라이드를 오버헤드 프로젝터에 올려놓고 설명을 시작했다.
“아시다시피 우리 몸의 면역세포인 킬러 T세포는 세포의 표면에 있는 주조직적합성복합체(MHC)가 내미는 암호로 세포가 건강한지 감염되었는지를 판별합니다. 건강한 세포는 자신의 단백질 조각을 내밀지만 감염된 세포는 바이러스의 단백질 조각을 내밀지요. 킬러 T세포는 세포가 내미는 신분증을 검사해서 선택적으로 감염세포를 죽이는 겁니다. 그런데 이 메다스 바이러스는 무척 교활한 놈입니다. 세포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MHC를 바꿔치기 합니다. MHC를 바꿔치기하는 과정은 무척 복잡한 유전자조작이 개입되는데 나중에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바꿔치기한 MHC는 세포가 감염되었는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암호를 킬러 T세포의 수용체에 제시합니다. 말하자면 메다스 바이러스는 위조신분증을 만들어서 T세포의 검열을 피해가는 겁니다.”
“그래서 메다스에 감염되어도 면역반응이 일어나지 않았던 거군요.”
“그뿐이 아닙니다. 세포 내에 침투한 바이러스는 핵공(nuclear pore)을 통해서 핵 속으로 들어갑니다. 핵 속에는 DNA가 있죠. 바이러스는 DNA를 변형해서 자신의 명령을 수행할 메신저 RNA를 만들죠. 바이러스의 명령을 받은 메신저 RNA는 핵공을 통해 빠져나온 뒤 리보솜에서 면역세포들을 공격하는 효소를 마구 만들어냅니다. 메다스 바이러스를 공격할 수 있는 것은 대식세포들뿐인데 바이러스는 이렇게 해서 유일한 적인 대식세포들을 모두 제거합니다. 군인들을 모두 죽였으니 침입자에게 남은 일은 이제 약탈뿐입니다. 바이러스는 자신이 원하는 단백질을 만들 메신저 RNA를 계속해서 내보냅니다. 리보솜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질들이 무한정 만들어집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이미 인간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세포와 조직의 변형이 진행됩니다.”
“백신은 면역반응을 유도하는 것인데 교수님 말씀대로라면 백신개발이 아무 의미가 없겠군요.”
“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바이러스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백신개발이 답보 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감염자들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메다스에 대해 쉬쉬하던 언론들도 앞 다투어 선정적인 동영상을 내보냈다. 전 세계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감염자의 수가 폭증해 눈만 뜨면 감염자 그래프가 달라져 있었다. 질병관리본부는 언론과 인터넷에 메다스 국민행동요령을 발표했는데, 가족 중 감염증상을 보이는 자가 있으면 일단 방안에 격리시키고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신고전화로 연락하면 메다스 응급요원들이 출동하여 감염자를 수용시설로 이동시킨다고 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는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감염자들을 소각로에 몰아넣고 태워죽이고 있다고 고발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기자회견을 통해 이는 사실이 아니라며 감염자 수용시설을 공개했지만 경찰에는 감염자가 납치된 뒤 사라졌다는 실종신고가 계속 접수됐다. 이런 의혹과 관계없이 군인들은 길거리에서 활보하는 감염자들을 쏴 죽였다. 질병관리본부와 공익광고협의회는 가족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감염자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나기 전에 격리하고 신고하라고 홍보했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면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것이 한편의 희극처럼 보였다.
메다스 바이러스에 대해 알면 알수록 백신 개발은 더 요원해보였고 연구원들은 하나둘 가족에게로 돌아갔다. 그들은 가망 없는 연구에 매달리느니 가족들과 함께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는 편을 택했다. 난 어머니가 지난해에 자궁암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돌보아야할 가족이 없었고 더 이상 은행잎 성분이 어쩌니 하면서 싸구려 카피약을 팔기 싫었다. 사제 간의 정이나 의리 따위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최 교수는 자신의 곁에 남아준 것을 고마워했다.
우리가 불쌍한 실험용 쥐들을 이백 마리 정도 희생시켰을 때였다. 나는 해부팀 사무실에서 시마다 팀장과 메다스 감염자의 불가사의한 생리현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밖에서 들려오는 통곡 소리를 들었다. 이야기를 멈추고 가만히 들어보니 최 교수가 우는 소리 같았다. 나는 복도로 나와 울음소리를 따라갔다. 최 교수는 휴게실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손에 쥐고 엉엉 울고 있었다. 입에서는 침이 흘러내리고 콧물과 눈물이 범벅이 되어 볼썽사나운 모습이었다.
“교수님, 무슨 일이세요?”
나는 손수건을 꺼내 그의 입과 코를 닦아 주었다. 그는 거의 정신이 나간 것처럼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시은이가.........시은이가.........우리 딸........”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묻지 않아도 교통사고를 당했다거나 건강검진에서 종양이 발견됐다거나 하는 평범한 비극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메다스는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었거나 죽은 것과 같은 상태로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최 교수의 들썩이는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뒤따라 들어온 시마다 팀장은 대충 눈치를 채더니 조용히 나가버렸다. 한참 만에 최 교수를 진정시키고 수면제를 먹여 겨우 잠들게 한 후 실험실에 돌아와 혼자서 맥주를 마셨다. 술기운이 오르자 그녀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이 먹먹해졌다. 최 교수가 방해하지 않았다면 시은과 나는 짧은 시간이나마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날 저녁 나는 최 교수에 대한 원망과 자식을 잃은 노인에 대한 연민 사이를 오가며 맥주 다섯 캔을 비웠다.
최 교수는 시은의 죽음으로 연구에 의욕을 잃어버리기는커녕 복수심에 불타 더욱 맹렬히 백신개발에 매진했다. 먹지도 자지도 않고 연구에 매달리는 그를 지켜보며 나는 무언가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에 초조해지고 있었다. 학교에 있을 때 최 교수는 직접 실험에 참여하는 적이 거의 없었다. 그는 항상 유력한 인사들을 만나러 다니기에 바빴고 연구와 논문작성은 조교들 몫이었다. 최 교수가 쭈글쭈글한 손으로 손수 실험기구를 만지고 현미경을 조작하는 모습을 보니 조금 애처로운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어느 순간 나도 그의 연구의지에 동화되어 밤낮으로 메다스에 매달렸다.
그날 나는 최 교수가 만든 일흔 두 번째 백신을 실험용 쥐에 주사하고 인터넷으로 과학저널을 뒤지며 잠시 망중한을 즐기고 있었다. 마우스 옆에는 원두커피가 가득 담긴 머그잔이 좋은 향기를 풍겼다. 갑자기 <메다스 재앙의 시작은 쎄른(CERN : 유럽원자핵공동연구소)이었다>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가 눈에 띄었다. 기사의 필자는 제네바에 머물고 있는 미국의 물리학자였는데, 메다스의 병원균이 입자충돌실험 때문에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나는 기사를 읽다가 놀라서 커피를 쏟을 뻔했다.
“교수님! 교수님!”
“뭐 때문에 호들갑이냐.”
최 교수는 코마에 빠져 죽은 듯이 누워있는 실험용 쥐를 암울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교수님! 드디어 메다스 바이러스의 정체를 알아냈습니다.”
“메다스 바이러스가 얼마나 해괴한 미생물인지는 이미 충분히 확인했다.”
“네. 해괴하죠. 왜 그놈의 바이러스가 그토록 괴상한지, 감염자들은 왜 그렇게 상식 밖의 증상을 보이는지 알아냈습니다. 방금 미국인 물리학자가 쓴 기사를 읽었는데요, 모든 사태의 출발점은 제네바의 강입자충돌기였습니다.”
“쎄른(CERN)의 거대강입자충돌기(Large Hadron Collider)말이냐? 세계에서 가장 큰 입자충돌기?”
“맞아요. 물리학자들에 따르면 두 입자가 플랑크 거리까지 근접하게 되면 시공간이 왜곡되면서 다른 우주로 가는 구멍이 생길 수 있습니다. 쎄른의 입자충돌실험이 미니 블랙홀과 웜홀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셨죠? 물론 입자충돌기가 만들어내는 웜홀은 너무나 작고, 순간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세상에 별 영향을 주진 못하겠지만, 바이러스처럼 미세한 존재라면 웜홀을 통과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 아마 메다스 바이러스는 그 구멍을 통해서 온 다른 우주의 생명체 같아요.”
“물리학자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괴물을 불러들였다는 이야기구나. 실생활에 도움도 안 되는 뜬구름 잡는 연구를 하면서 예산을 펑펑 쓰더니 결국 인류를 멸망에 이르게 했어. 난 예전부터 잘난척하는 물리학자들이 싫었다. 세상에 과학자들은 자기들밖에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니까.”
“어쩌면 메다스 바이러스의 고향 우주는 전혀 다른 물리법칙이 적용되고, 전혀 다른 형태의 생물들이 살고 있을지도 몰라요. 메다스 바이러스가 우리들에게 이상하게 보이는 건 당연한 거죠.”
“그 게 사실이라면 지금의 방식으로는 백신을 만들 수 없을지 몰라.”
“백신은 면역반응을 유도하는 것인데, 인류의 면역체계가 메다스에 적응하려면 수십만 년의 세월이 필요하겠죠.”
“이제부터 화학실험을 해야겠군. 인체에 큰 해를 주지 않으면서 메다스 바이러스의 증식을 막는 물질을 찾아야 해.”
최 교수는 메다스 바이러스의 기원과 새로운 연구방향을 발표했지만 그의 연구에 동참하겠다는 연구원은 거의 없었다. 가장 핵심적인 두뇌들은 이미 고국으로 돌아가 버렸고 남아있는 몇몇 석사급 연구원들도 가족들 성화에 짐을 싸고 있었다. 교토에 살고 있던 가족들이 감염자들에게 몰살당한 시마다 팀장만이 끝까지 남아서 바이러스를 격퇴시키겠다며 최 교수의 손을 잡았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시마다 팀장은 메스를 든 사무라이처럼 비장해보였다.
메다스 바이러스라는 막강한 적에 맞서는 아군은 겨우 세 사람이었다. 최 교수는 혼자서 플라스크를 씻으며 실험을 하고 나는 관용차를 몰고 감염자들이 활보하는 위험한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며 실험장비와 약품을 구해왔다. 세끼 식사는 중국음식이나 피자를 배달시켜 먹었는데 나중에는 식당들이 모두 문을 닫아서 라면으로 때워야 했다. 잠은 휴게실의 간이침대에서 자고 목욕 대신 수건에 물을 적셔 몸을 닦았다. 시마다 팀장은 화학치료제의 부작용으로 죽어간 쥐들을 해부하며 최 교수의 화합물들이 치료제보다 독극물에 가깝다며 투덜거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탐색해야 할 후보물질이 생각보다 훨씬 광범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요. 후보물질을 발굴하기도 전에 세상이 끝나버리겠어요.”
시마다 팀장이 지친 얼굴로 말했다. 브리핑 시간이면 오십 명의 연구원들이 북적거리던 중앙회의실에는 최 교수와 나, 시마다 팀장 세 명 만이 패잔병들처럼 의자에 기대고 앉아있다. 가장 지쳐있는 것은 최 교수였다. 그는 실험 도중에 미세한 유독가스를 많이 마셔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메다스 바이러스가 화학물질에 대한 내성이 강해서 어지간한 독성에는 죽질 않아. 메다스 바이러스를 죽일 정도의 독성이면 인체에도 치명적인 해를 주게 되고........”
“식물성분을 시험해보는 건 어떨까요? 보통 신약 개발할 때 많이 쓰잖아요?”
“식물성분도 후보물질이 너무 많다는 게 문제지. 가장 큰 문제는 인원이야. 우리 셋이서 수십만 종의 물질을 하나씩 테스트하는 건 무리야.”
회의가 절망적인 침묵 속에 빠져 있는데, 창 밖에서 들려오는 뻥-뻥-하는 소음이 정적을 깼다. 최 교수가 신경이 거슬린 듯 말했다.
“밖에 누구야? 시끄럽게.”
“제가 보고 오겠습니다.”
나는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연구소 입구에서 보초를 서던 군인들이 텅 빈 주차장에서 축구공을 차며 놀고 있었다. 주차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공을 서로 넘기는 것이 족구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날아가는 축구공을 보다가 메다스 바이러스의 독성을 억제할 수 있는 하나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버키볼을 치료제로 쓰자고?”
최 교수는 이마에 주름을 만들었고 시마다 팀장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조금 엉뚱한 발상인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적에게는 조금 색다른 무기를 써볼 필요가 있었다. 1996년 세 명의 과학자에게 노벨화학상을 안겨준 벅민스터풀러렌(buckminsterfullerene)은 육십 개의 탄소원자로 이루어진 축구공 모양의 동소체다. 과학자들은 그냥 버키볼이라고 부른다. 축구공처럼 생겼으니까.
“버키볼은 지름이 1나노미터밖에 안되니까 바이러스에 들러붙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버키볼 속에 바이러스를 죽이는 약품을 넣어도 되고요.”
“버키볼을 약품 전달 매체로 쓰자는 아이디어는 오래전부터 있었지. 하지만 어떻게 실험에 쓸 버키볼을 구하지?”
시마다 팀장이 팔짱을 낀 채 회의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레이저 사출장치를 쓰면 됩니다. 흑연 표면에 레이저를 쏘아서 탄소 증기를 발생시킨 다음에 비활성기체 속에서 응축시키면 대량으로 버키볼을 만들 수 있죠.”
최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백금 표면에 버키볼 골격을 만들고 그 위에 비균질원자를 장착하는 방식으로 제조하면 거의 100% 수율로 제조할 수 있어. 스페인 과학자들이 고안해낸 방법이지.”
우리 세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어쩌면 메다스 바이러스를 퇴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심이 마음을 설레게 했다.
우리는 국내외 연구소에서 장비를 빌려서 백신 연구소를 버키볼 공장으로 개조하고 아침부터 밤까지 버키볼을 계속 만들었다. 탄소원자가 육십 개 있는 벅민스터풀러렌은 물론이고 원자 스무 개짜리, 스물여섯 개짜리, 일흔 개짜리, 일흔 두 개짜리, 일흔 여섯 개짜리, 여든 네 개짜리, 심지어 백 개짜리 버키볼도 만들어냈다. 우리는 정제된 바이러스가 들어있는 플라스크에 버키볼을 집어넣었다. 육십 개짜리는 잘 들러붙지 않았지만 일흔 개짜리와 여든 네 개짜리는 기가 막히게 들러붙어 바이러스를 꼼짝 못하게 했다. 반복된 실험을 통해서 버키볼 구조물 안에 독성물질을 집어넣지 않아도 바이러스의 증식을 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접착력이 가장 강한 여든 네 개짜리를 대량 생산하여 동물실험을 시작했다.
최 교수는 실험용 쥐를 왼 손에 꽉 쥐고 메다스 바이러스가 들어 있는 주사기를 가차 없이 찔러 넣었다. 하얀 꼬마는 발버둥을 쳤지만 노인은 주사기 실린더를 끝까지 밀어 넣을 때까지 녀석을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녀석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두 시간 정도 지켜보다가 코마에 빠지기 전에 얼른 버키볼을 주사했다. 녀석은 온몸을 뒤틀며 괴로워했지만 코마에 빠지지 않았고 점차 안정되는 모습을 보였다. 우리는 사십팔 시간 동안 녀석을 관찰했지만 녀석은 장하게도 괴물로 변하지 않았다. 건강한 모습으로 이리저리 상자 안을 오가며 먹을 것을 찾았다. 성공이었다. 우리는 바이러스에 감염시킨 뒤 시간에 따라 용량을 조절하며 반복실험을 했다. 코마가 시작되기 전에 충분한 양을 주사하면 바이러스를 이겨냈지만 코마에서 깨어난 뒤에는 아무리 많은 양의 버키볼을 주사해도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버키볼의 양이 부족하면 시간에 관계없이 메다스 증상이 진행됐다. 우리는 동물실험결과를 토대로 사람이 메다스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코마에 빠지기 전에는 버키볼 백만 개, 코마에 빠졌을 때는 3백 오십만 개 이상을 주사해야 한다는 것을 계산해냈다. 하지만 실제로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임상시험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버키볼 실험에 성공한 후에 나는 아주 달게 잠을 잤다. 자다가 시은의 꿈을 꾸었는데, 그녀는 펜션 창가에 기대어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은은 청바지에 하얀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나는 침대에 누워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은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뺨 색깔이 이상하다. 입술이 심하게 트고 검었다. 나는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얼굴이 반쯤 썩어 문드러졌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입 가장자리가 찢어지면서 시커먼 이빨들이 추하게 드러났다. 구멍 난 뺨 사이로 구더기 몇 마리가 들락거렸다.
나는 잠에서 깨어 간이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다. 속옷이 땀에 젖어 축축했다. 밖에서 요란한 총소리와 악-하는 비명소리, 괴물의 울부짖음 같은 것이 마구 뒤섞여 들려왔다. 나는 두려움이 일어 휴게실 문을 잠그고 귀를 쫑긋 세웠다. 총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고 비명소리도 신음소리로 바뀌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나는 휴게실 문손잡이를 붙잡은 채 한참을 서 있다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밖으로 목을 내밀었다. 복도에는 정적이 흘렀다. 나는 살금살금 까치발로 복도를 지나고 계단을 내려갔다. 1층에 내려오자 바닥에 핏방울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다. 머리털이 쭈뼛 곤두서는 것 같았다. 정문 앞에 군인 한 명이 방탄헬멧을 쓴 채 모로 누워 있었다. 나는 군인의 머리를 넘어가다가 놀라서 주저앉았다. 군인의 배에 구멍이 나 있고 내장이 핏물과 함께 길바닥에 쏟아져 있었다. 두 눈을 부릅뜬 채 절명한 군인은 연구소 앞을 지키던 보초병이었다. 처음 연구소에 왔을 때 내게 체열 측정기를 들이댔던 그 사람이다.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승강기 단추를 눌렀다. 최 교수의 실험실은 삼 층에 있었다. 단추가 먹통이었다. 나는 계단을 엉금엉금 기듯이 올라갔다. 복도에 핏방울이 점점이 이어져 실험실로 들어가 있었다.
“교수님!”
나는 실험실로 뛰어 들어갔다. 최 교수가 메다스 감염자의 머리를 필사적으로 밀어내며 저항하고 있었다. 감염자는 놀랍게도 연구소 가운을 입고 있다. 나는 흙빛으로 변한 피부색에도 불구하고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최 교수를 물어뜯고 있는 저 미치광이는 분명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기묘한 비현실감 때문에 멍한 느낌이었다.
“시마다! 그만 둬!”
나는 시마다 팀장을 등 뒤에서 끌어당기다 손목을 물렸다.
“아악!”
“영호야! 이미 정신이 나갔어! 머리를 깨!”
나는 시마다의 명치를 발로 차서 넘어뜨린 후 복도로 도망쳤다. 시마다는 이제 나를 먹잇감으로 삼은 듯 했다. 두 팔을 늘어뜨리고 핏발 선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어기적거리며 걸어오는 것이었다. 나는 계단을 단숨에 뛰어 내려가 정문 앞에 버려진 소총을 집어 들었다. 총신이 아직도 뜨뜻했다. 배가 터진 시체와 정문을 번갈아 노려보며 시마다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짧지만 영원처럼 느껴진 순간이었다. 드디어 시마다가 비척비척 걸으며 나타났다. 그의 두 눈은 영민함으로 빛나던 시마다의 것이 아니라 고깃덩이를 본 야수의 것이었다. 나는 아무 거리낌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철컥철컥 쇳소리만 났다. 빈총이었다.
“이런.......”
나는 총을 거꾸로 잡고 시마다 팀장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퍽-하고 머리를 얻어맞은 시마다는 균형을 잃고 뒤뚱거리다 옆으로 넘어졌다.
“죽어라 시마다!”
나는 개머리판으로 시마다의 머리통을 연달아 내리쳤다. 녀석이 버둥거리며 내 다리를 마구 할퀴었다. 녀석의 머리통은 매우 단단해서 꿈쩍도 안했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퍽-하고 수박처럼 깨져버렸다. 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소총을 내려놓았다. 시마다의 깨진 머리에서 뇌수가 천천히 흘러나와 바닥을 적셨다. 녀석의 팔 다리가 축 늘어졌다.
나는 시마다가 저렇게 죽어서 불쌍하게 됐지만 교수를 구해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계단을 올라왔다. 하지만 실험실에 가보니 최 교수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출혈이 과다했거나 쇼크로 인한 사망일 것이다. 그는 두 눈을 뜬 채 실험대에 기대어 죽었다. 하얀 가운은 피에 물들어 적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실험대 위에서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인체를 대상으로 한 버키볼 치료제의 실험결과를 기록한 파일이었다. 그는 내가 휴게실에서 자는 동안 자신의 몸을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했던 것이다. 어쩌면 시마다 팀장도 자신의 몸을 가지고 혼자 실험을 하다가 용량조절에 실패해 코마에 빠졌는지도 모른다. 최 교수의 기록에 따르면 우리가 동물실험결과를 토대로 계산했던 치료제의 용량과 효과는 정확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임무를 완수하고 죽은 것이다. 나는 최 교수를 실험실 바닥에 편히 누이고 눈을 감겨주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 동안 울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메다스 감염 증세였다. 나는 서둘러 버키볼 치료제를 찾아보았지만 치료제를 담아두었던 용기가 텅 비어있었다. 최 교수가 동물실험과 임상시험을 하면서 마지막 남은 오십 도스를 모두 써버린 것이다. 버키볼을 만들기 위한 장치는 감염된 시마다 팀장이 난리를 치면서 심하게 부서졌다. 적어도 내가 좀비로 변하기 전에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절망적이었다. 내 몸은 열 두 시간 내에 좀비로 변할 것이다. 나는 편안히 잠들어있는 최 교수를 바라보며 내게 남겨진 마지막 일을 하기로 했다. 실험결과를 정리해서 전 세계의 과학자들에게 보내야 한다. 컴퓨터의 전원을 넣었지만 냉각팬 돌아가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나는 아까 승강기 단추가 먹통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조명스위치를 올려보았다.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변전소에 감염자들이 쳐들어갔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모나미 볼펜을 집어 들고 노트에 한자 한자 적어 내려갔다. 실험결과와 메다스 치료제에 대해서는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쉽게 적어야 한다. 이 노트를 발견할 사람이 과학자가 아닐 확률이 더 높기 때문이다. 메다스 바이러스의 특징과 동물실험 결과를 적고, 최 교수의 인체실험 결과를 첨부했다. 버키볼을 대량으로 제조하는 원리도 적어놓았다. 엔지니어들은 치료제를 대량생산하는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나는 크로스백을 열고 노트와 최 교수의 파일을 함께 집어넣었다. 중요한 실험 자료가 담겨 있는 USB메모리 카드도 넣어두었다.
온 몸이 타는 것처럼 뜨겁고 서 있기가 곤란할 정도로 어지러웠다. 나는 크로스백을 어깨에 대각선으로 메고 백의 앞부분에 검은 마커로 <메다스 치료방법>라고 적었다. 내가 죽더라도 누군가 가방을 발견한다면 살아남은 사람들은 희망이 있었다. 나는 최 교수 옆에 나란히 누웠다. 정신이 몽롱해지는 가운데 삶의 마지막 회한이 밀려왔다. 시은의 웃는 얼굴이 나를 괴롭게 했다. 어쩌면 최 교수가 우리 사이를 갈라놓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무 쉽게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자존심이 상처받는 것보다 시은을 포기하는 쪽이 쉬웠다. 나는 비겁한 남자였다. 좀 더 과격하고 순수하게 살지 못했던 청춘에 대한 후회가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정신이 아득해져오는 가운데 마지막 의문이 남았다. 내 삶에 의미나 가치가 있었을까?
그륵그륵.
눈이 떠졌다.
배가 고프다.
옆에 사람이 누워 있다.
목을 깨물었다.
뻣뻣하다.
맛이 없다.
밖에서 냄새가 난다.
신선한 살 냄새.
밖에 먹을 것이 있다.
계단을 내려가자.
밖에 사람들이 서 있다.
먹을 거다.
배고파.
“감염자다!”
“쏴!”
작대기가 번쩍했다.
오른팔이 없어졌다.
배고파. 배고파.
“박일병! 머리를 쏴!”
작대기가 번쩍했다.
넘어졌다.
하늘이 보인다.
움직일 수가 없다.
잠이 온다.
“야 조심해.”
“괜찮아. 이미 죽었어.”
“어라? 이 놈 가방을 메고 있는데.”
“안에 뭐가 들었어. 흠..............혹시 버키볼이라고 들어봤어?”
깜깜해졌다.
이제 배고프지 않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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