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 이름은 채수련이라고 했다.
수련은 꽃의 이름이다. 불교에서는 더러운 진흙에 뿌리를 내리고 살면서 커다랗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이 꽃을 부처의 상징으로 삼았다. 유교에서는 같은 꽃을 순결과 세속을 초월한 상징으로 보았다. 꽃말 역시 청정이다.
채수련의 엄마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당시 꽃말이나 점성술과 같은 것은 여자아이들의 지식이었다. 하지만 딸이 태어나고 이름을 지어주어야 했을 때, 그녀가 그런 상징들을 떠올렸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그녀는 그냥 딸에게 꽃의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으리라. 아마 그녀는 막 태어난 아기가 그런 꽃을 닮은 예쁜 여자아이로 자라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게 사실이라면, 도대체 무얼 믿고 그런 기대를 했던 걸까.
인간이 외모는 유전자와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채수련은 그 중 어느 것을 봐도 미인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없었다. 그녀의 엄마는 돌처럼 무딘 얼굴에 하마처럼 뚱뚱한 몸매를 가진 여자였다. 그녀와 반 년 정도 같이 살다가 임신 사실을 알자 달아나버린 남자친구라는 자도 외모가 변변치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채수련에게 이 유전자의 운명을 교정할 돈이나 의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엄마처럼 뚱뚱한 몸매에 둔한 얼굴을 한 여자로 키워지고 자라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채수련이 살았던 세계에서 외모, 특히 여자들의 외모는 중요했다. 좋은 외모는 보다 나은 배우자를 만나 자신이 속해 있는 계급에서 탈출할 가능성을 높여주었다. 그 계급에서 탈출할 수 없어도 적어도 같은 계급에 속해 있는 사람들로부터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수는 있었다.
외모의 장점을 갖추지 않은 여자들에게 길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채수련은 그 어느 것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녀의 아이큐는 80을 간신히 넘는 정도였고 동료 인간들과의 친화력도 형편없었다. 그녀에게 인생은 사는 것이 아니라 견뎌내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녀가 자신의 인생에서 성공이라고 자부할 수 있었던 것이 둘이 있었다. 하나는 우상수라는 남자와의 결혼이었고, 다른 하나는 H&H라는 청소용역회사에서 8년 근무한 것이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둘은 모두 성공이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능한 백수였던 남편은 아내를 두들겨 패고 욕설을 퍼붓는 것이 유일한 일이었고, 툭하면 정기적으로 돈을 훔쳐 가출했다. H&H에서 그녀가 8년 동안 해왔던 일은 오로지 계단청소였다. 계단청소반에서 한국 이름을 가진 사람은 채수련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 두 가지는 모두 소중했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시스템에서 그녀가 온전한 부품으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남편과 직장을 제외하면 그녀의 인생엔 단 한 가지만 남았다. 그것은 어린아이들에 대한 그녀의 집착이었다. 그녀는 불임이었다. 만약 낳을 수 있다고 해도 아이를 감당할 경제적 능력이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어린아이들은 늘 격렬한 애정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일방적인 짝사랑이었다. 아이들은 그녀의 두툼한 얼굴을 무서워하거나 비웃었다.
그녀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욕구를 해소해야 했다. 그녀의 취미는 아이들의 사진을 모아 폰에 저장하고 어린이용 스웨터나 모자를 뜨는 것이었다. 작품이 하나씩 완성되면 그녀는 누군가가 그 물건들을 사용하길 빌면서 재활용 박스 안에 넣었다. 가끔 그녀는 벤치에 앉아 그녀의 작품을 입거나 쓰고 있는 아이들을 찾았지만 단 한 번도 운이 좋았던 적은 없었다.
적어도 그녀 인생 마지막 일주일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2월 29일 화요일이었다. 전날 내리던 황사 섞인 비는 새벽부터 눈으로 변했고 채수련이 5년째 살고 있던 구로구 궁동의 실용 아파트 건물 앞은 녹은 눈으로 질척거렸다. 그녀는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 전날 만들어 냉장고에 넣은 김밥으로 간단한 아침을 먹은 뒤, 버스로 부천 중동에 있는 LK 생물 공학 연구소에 출근했다. 남편은 한 달 째 가출 중이었다.
건물에 도착한 그녀는 복도에서 녹색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H&H에서 특별히 제작한 계단 전문 청소기를 챙긴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15층까지 올라갔다. 거기서부터 그녀는 청소기로 비상계단을 한 칸씩 쓸었다. 그녀의 기술과 작업 태도는 완벽했고 그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모르는 것은 그 기술이 거의 쓸모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H&H는 새로 나온 로봇 계단 청소기로 인건비를 거의 들이지 않고 같은 일을 해치울 수 있었다. 그녀가 아직까지 그 직업을 갖고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복지부의 지원 때문이었다.
4층까지 내려왔을 때 그녀는 이상한 것을 보았다.
다섯 살이나 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소녀였다. 핑크색 스웨터를 입고 동그란 털실 모자를 쓴 소녀가 3층에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채수련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아이가 입고 있는 스웨터와 털실 모자는 그녀가 짠 것이었다. 몰라볼 수가 없었다.
소녀와 채수련은 30초 동안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용기를 낸 채수련이 청소기를 벽에 세워놓고 계단 한 칸을 내려갔을 때, 소녀는 갑자기 문을 열고 3층으로 달아났다.
보통 때 같았다면 채수련은 조용히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럴 수는 없었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그리고 그 기적은 그녀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소녀를 따라 3층 복도로 달려갔다.
그녀는 복도에서 잠시 당황했다. 그녀에게 LK 생물 공학 연구소는 1층 로비와 지하층 그리고 계단만으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사방에 문들이 붙어 있는 복도는 낯설고 괴상했다.
복도 끝에는 소녀가 창문을 등지고 차렷 자세로 서 있었다. 역광 때문에 표정을 읽을 수 없었지만 그녀는 소녀가 미소를 짓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거의 기계적으로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고 최면이라도 걸린 것처럼 앞으로 걸어갔다.
복도 중간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왼쪽 문이 활짝 열리고 지름과 높이가 각각 1미터 정도 되는 원통형 탱크가 실린 카트가 튀어나왔다. 카트는 채수련을 맞은 편 벽 쪽으로 밀어 넘어트렸다. 그 통에 카트에 실린 탱크가 한쪽으로 기울었고 맨 위에 있는 마개가 떨어져 나갔다. 해초 냄새가 나는 푸른색 액체가 그녀의 얼굴에 쏟아졌다. 그녀는 정신을 잃었다.
채수련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환자복을 입고 연구소와 이웃하고 있는 LK 종합병원의 응급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의사들 중 한 명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연구소에 처음 들어왔을 때 그녀를 진찰했던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절차를 알려주고 피로회복제라며 약도 챙겨주었던 사람이었다. 안심한 그녀는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
의사와 연구소 사람들은 그녀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그들이 하는 말 대부분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직장 일은 걱정하지 말고 일주일 동안 유급 휴가를 주겠다는 말은 알아들었다. 그들은 별로 다친 건 없어 보이지만 혹시 후유증이 있을지도 모르니 이틀에 한 번 병원을 찾으라고 했고 그녀는 그 말도 알아들었다. 그녀는 몇 시간 동안 병원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가 팀장에게 보고하고 퇴근했다.
연구소를 나서던 그녀는 현관 앞에서 어떤 사람과 부딪혔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조금 이국적으로 보이는 마른 여자였다. 외국인이거나 혼혈처럼 보였다. 그 얼굴은 이상할 정도로 친숙했다. 연구소 직원이면 전에 연구소에서 만났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한동안 친하게 지냈다가 잊어버린 친구의 느낌. 하지만 여자는 채수련을 알아보는 것 같지 않았고 채수련도 아는 척하지 않고 그냥 밖으로 나갔다.
처음에 그녀는 버스를 타고 곧장 집으로 가려 했다. 하지만 버스 정거장 앞에서 그녀는 생각을 바꾸었다. 대신 그녀는 지칠 때까지 집까지 걷기로 결정했다. 그녀답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운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의 관점에서 보면 구체적인 목표 없이 몸을 움직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몸은 운동을 갈망하고 있었다.
중동의 빌딩 숲을 걷는 동안, 그녀의 몸과 두뇌에는 조금씩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녀는 걷는 동안 지금까지 몸과 두뇌 이곳저곳에 고여 썩어가고 있던 액체가 다시 흐르고 섞인다고 느꼈다. 그녀는 춤추는 것처럼 요란하고 우스꽝스러운 동작으로 걸었고 그러는 동안 지금까지 있는지도 몰랐던 근육들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부천역 메이플 타워 주차장 앞에서 그녀는 우뚝 멈추어 섰다. 연구소에서 보았던 소녀가 횡단보도 건너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는 연구소에서 보았던 핑크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지만 모자는 다른 것을 쓰고 있었다. 상관없었다. 커다란 방울이 달린 그 하얀 모자 역시 채수련이 만든 것이었다.
파란 불이 켜지자 그녀는 아이에게로 달려갔다. 아이는 그녀를 두려워하는 것 같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잡힐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숨바꼭질이 시작되었다. 헉헉거리며 해초냄새가 섞인 숨을 사방에 내뱉는 뚱뚱한 여자가 군중 속에 바람처럼 녹아들 줄 아는 요정 같은 어린 소녀를 쫓고 있었다. 횡단보도를 건넌 뒤로 아이는 단 한 번도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어떤 때는 품 안에 안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정작 채수련이 손을 뻗을 때쯤이면 아이는 어느 새 사람들 너머로 도약해 있었다.
숨바꼭질 중 채수련의 머리는 점점 이상하게 변해갔다. 그녀는 이제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만든 스웨터나 모자는 모두 엄마가 남겨 준 낡은 뜨개질책에서 따온 것이었고, 그녀는 단 한 번도 스스로의 디자인을 시도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새로운 디자인들이 떠올랐다. 그녀는 이제 털실들이 꼬이고 얽히면서 만들어내는 위상기하학적 질서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수많은 패턴의 가능성을 읽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아이의 스웨터와 모자는 그녀가 머릿속에서 만들어내는 새 디자인을 계속 반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를 쫓느라 정신이 없었던 그녀는 이 변화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두 시간이 넘는 추격전 끝에, 그녀는 궁동의 집에 도착했다. 결국 아이는 채수련을 자기 집으로 인도한 것이었다. 아파트 건물 앞에 도착하자 아이는 안개처럼 사라졌고 기진맥진한 채수련은 3층의 자기 집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점퍼를 벗고 바닥에 깔아놓은 매트리스 위로 올라간 그녀는 그 즉시 꿈도 없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채수련을 깨운 건 남편이었다. 남편은 그녀에게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며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햇빛의 방향을 보아하니 아침인 것 같았지만 남편은 여전히 술에 취해 있었다. 그는 냉장고와 그녀의 얼굴에 대해 뭐라고 떠들어댔으며 양쪽 모두와 관련된 심한 불쾌함을 표출했다.
그녀는 담요를 젖히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남편은 여전히 뭐라고 떠들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머리는 지금까지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녀를 두들겨 패왔고 모욕을 주었던 저 남자가 그녀보다 5센티미터 정도 작고 15킬로그램 정도 가벼우며 근육의 힘도 변변치 못하다는 사실이었다. 사실인식이 끝나자 그녀는 아무런 주저 없이 행동에 나섰다. 그녀는 남편을 가볍게 들어 부엌 구석에 있는 세탁기 쪽으로 집어던졌다. 남편은 목이 부러져 죽었고 더 이상 떠들지 않았다.
채수련은 남편의 시체를 감추고 그 동안 지저분하게 방치해 두었던 집을 청소했다. 집이 말끔해지자 그녀는 샤워를 하러 욕실로 들어갔다. 그 때서야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얇고 끈적끈적한 회색 젤라틴 막과 같은 것이 그녀의 왼쪽 뺨을 덮고 있었다. 옷을 벗으니 그 막은 가슴과 배꼽 언저리, 양쪽 팔목에도 나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피부 밑에서 기어 나오고 있었다.
혐오스러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이미 그녀의 육체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육체가 수명을 다하기 전에 우리를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김지나가 우상수의 시체의 발견한 것은 다음 날 오후 5시 무렵이었다. 낡은 옷가지와 털실이 고치처럼 둘러싸고 있는 시체는 벽 꼭대기에 거꾸로 박혀 있었다. 그 광경은 그로테스크하고 아름다웠으며 철저하게 무익해보였다. 엄청난 완력과 환상적인 예술성을 모두 가진 누군가가 살인 이후 시체로 가볍게 장난을 치고 사라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췌장암을 앓고 있는 아이큐 80짜리 환경미화원 아줌마여야만 했다.
어이가 없었다. 김지나는 바로 전날 연구소 현관 앞에서 그 아줌마와 마주쳤었다. 지친 얼굴을 내리 깔고 힘겹게 무거운 발을 옮기는 모습은 이전과 전혀 다를 게 없었다. 하긴 그 때 머릿속으로 살인계획을 짜고 있었다고 해도 그녀에게 친절하게 티를 내야 할 필요는 없었으리라. 알아보는 티를 내야 말아야 했던 건 김지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감시 대상이라는 사실을 굳이 알려서 무엇 하겠는가.
김지나는 지난 3개월 동안 채수련을 알아왔었다. 채수련은 대부분 라오스 출신 이민 노동자들이었던 관찰 대상 중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H&H와 LK에 이용당하는 여자들 중 가장 바닥이었던 셈이다. 계단청소반의 8년차 왕고참이라니. 얼마나 딱한 위치인가. 캄보디아인 엄마를 둔 그녀에겐 그 위치가 더 한심해 보였다.
그녀는 3D 카메라의 지지대를 설치하는 과학수사대 요원들의 등 너머로 아파트를 훑어보았다. 공식적인 명칭은 실용 아파트지만 다들 벌집이라고 부른다. 방이 조금 크면 말벌집이라고도 한다. 두 사람이 간신히 숨쉬며 살 수 있을 정도의 작고 빽빽한 공간. 수도권 구석구석에 노동자 계급들을 숨겨놓기 위해 설계된 이런 건물은 겉으로 보면 자체 물청소되는 플라스틱 외장 때문에 멀쩡해 보인다. 실상을 알려면 안에 들어가 봐야 한다.
그녀는 지난 하루 동안 이 아파트의 주인에게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일단 그녀에게 LK 생물 공학 연구소의 정신 나간 연구원들이 실험하고 있던 액체가 쏟아졌다. 그 액체를 마시고 흡입한 그녀는 한동안 멀쩡해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다음날 아침 남편을 살해했고, 그 날 밤 철통같은 보안망을 뚫고 연구실로 들어가 BC-2098라는 별 의미 없는 번호가 붙어 있는 샘플과 컴퓨터에 저장된 데이터를 모두 파괴한 뒤 연구실에 불을 지르고 귀신처럼 사라져 버렸다.
도대체 그 액체의 정체는 무엇인가?
“몰라요.”
LK 생물 공학 연구소의 소장이라는 작자는 무책임하게 내뱉었다.
“그게 말이 되나요?”
“원래 모르는 게 정상이지요. 도킨스 탱크라는 건 그런 걸 만들라고 있는 거니까.”
“그 도킨스 탱크라는 건 도대체 뭐죠?”
김지나가 물었다.
“무작위적으로 진화압을 주는 기계입니다. 안에 미생물을 넣고 극단의 환경을 조성해줍니다. 그리고 거기서 살아남은 놈들이 있는 다른 극단의 환경을 주어 또 괴롭히는 겁니다. 계속 이러다보면 우리가 예상치 못한 놈들이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살아남을 수도 있지요.”
“그런 연구를 하고 계셨나요?”
“아뇨. 그건 연구원들의 취미 생활이지요. 일종의 재활용 연구라고 할까. 진짜 거기에서 뭔가 대단한 게 나올 거라고 믿는 사람은 없어요.”
“지금까지는요.”
“사실 지금도 믿기지 않아요. 그건 그냥 더러운 구정물이란 말입니다. 그것도 소독된 구정물요. 길거리 매점에서 파는 어묵 국물이 더 위험하죠.”
“그걸 뒤집어 쓴 사람이 다음 날 살인마로 변했는데도요?”
“그건 다른 이유 때문일 겁니다.”
“그 다른 이유가 혹시 H&H 직원들을 상대로 한 실험과 관계있는 건가요?”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들었습니까?”
“저희가 왜 이런 사건까지 맡았다고 생각하시죠? 우린 이미 LK에서 H&H 사원들을 대상으로 불법실험을 했다는 증거를 갖고 있어요. 누가 고발했는지 말할 필요도 없겠죠?”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단 한 명입니다.”
“다섯 명을 대상으로 했고 실제로 실험에 돌입한 건 채수련씨 한 명 뿐이죠. 그것도 엄청난 것이네요. 인공미생물을 뇌 속에 넣어요?”
“아직 안 넣었습니다. 그냥 신경 샘플로 실험을 해 봤을 뿐인데, 그러니까...”
“그래도 결국 넣을 생각이었죠. 넣었다가 일이 잘못 되어도 별 문제 없었겠죠. 몰래 먹인 강장제 때문에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어차피 췌장암으로 몇 달 안에 죽을 사람이었으니까.”
“그래도 아직 안 넣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정말 위법행위를 할 계획이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도대체 그것의 정체가 뭐예요?”
남자는 잠시 망설였지만 감춰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았는지 결국 입을 열었다.
“회사가 남해에서 발견한 플랑크톤을 베이스로 한 인공생명체입니다.”
“어디다 쓰는 건데요?”
“초광속통신요.”
“네?”
“말 그대로 초광속통신요. 그 플랑크톤이 광속을 넘어선 순간통신으로 동료들에게 정보를 전달한다는 걸 알아냈거든요. 생존전략이죠.”
“그게 말이 돼요?”
“된다고 합디다. 우리가 아는 물리법칙에 크게 위반되는 것도 아니라고 하던데요.”
“광속을 넘어선 통신이 어떻게 그래요?”
“그래도 되는 걸 저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그래서 그걸 환경미화원 머릿속에 넣어서 어쩔 생각이었어요?”
“사용도야 무궁무진하지요. 도청이 완전히 불가능한 통신기를 만들 수도 있고. 해왕성에서도 원격조종이 가능한 우주선을 만들 수도 있고. 하지만 저희는 다른 걸 하고 있었습니다. 그 인공생명체로 인공 시냅스를 만들어 뇌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 말입니다. 이런 건 컴퓨터에 활용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인간 두뇌에 적용하는 게 더 쉽습니다. 이미 남해의 돌고래들 몇 마리가 비슷한 플랑크톤에 감염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정보도 있어요.”
“아이큐 80에 곧 죽을 여자이니 막 써도 된다고 생각했군요.”
“실험이 성공했다면 그 아줌마를 살리기 위해 뭐라도 했을 겁니다. 모두에게 이익이었어요. 어차피 그런 여자가 이 사회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 사회에 단순노동자들이 얼마나 큰 짐이 되고 있는지 압니까? 이런 사람들의 지능을 높이는 건 사회의 의무란 말입니다. 이건 의무교육이나 의료보험 같은 거예요.”
“그렇게 고상한 일이라면 왜 당사자에게 직접 허락을 받지 않았죠?”
“어쩌다보니까. 신경 실험이 성공하면 허락을 받았을 수도 있고요... 아까도 말했지 않습니까. 지금까지는 예비 단계였어요. 아직 실험을 시작하지도 않았다고요. 그리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 여자가 샘플들을 훔쳐가고 정보를 다 파괴해버렸으니까.”
그 소장이라는 작자가 김지나에게 준 정보는 대부분 사실이었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김지나에게 채수련이 했던 것처럼 단순히 보안 암호를 입력하는 식으로 연구소의 보안시스템을 뚫는 것은 예지능력이 있지 않는 한 그냥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최근 몇 주 동안 BC-2098이 유전자 정보를 교환해가며 빠르게 자체 진화를 한 결과 단세포 미생물에서 길이 5센티미터에 올챙이 모양을 한 척추동물로 자체 진화했다는 사실도 말하지 않았다. 그는 BC-2098를 변화시켰던 유전자 정보가 외부에서 계획적으로 주입된 것임이 분명하다는 사실도 말하지 않았다. 그는 채수련이 소방용 망치로 깨부순 유리관에서 BC-2098 샘플들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꺼내 입 안에 쑤셔 넣는 장면을 찍은 영상 파일이 있다는 사실도 말하지 않았다. 그는 회사에서 고용된 수십 명의 현상금 사냥꾼들이 채수련을 찾기 위해 수도권 전역을 누비고 있다는 사실도 말하지 않았다.
그와 회사가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는 것들도 많았다. 그들은 우리가 BC-2098에 일부러 정보를 주입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비슷한 현상이 채수련에게 일어나고 있음이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했지만 우리의 정체에 대해 알지 못했고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몰랐다. 성의 없는 서류 작업 때문에 그들은 채수련에게 쏟아진 도킨스 탱크의 액체 일부가 BC-2098의 잔류물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도 몰랐다. 그들은 소위 ‘초광속통신’이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은 개념이라는 사실도 몰랐다. 그들은 채수련에게 일어난 일들이 우연이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는 사실도 몰랐다.
무엇보다 그들은 우리가 채수련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우리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몰랐다.
채수련은 걷고 있었다. 얼굴 반을 덮은 젤라틴 막은 이제 흐린 핑크색으로 변해 있어서 마치 오래 전에 난 화상 자국 같았다. 연구실에 불을 지를 때 손바닥에 생긴 진짜 화상 상처는 생긴 지 15분 만에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코트에 얼굴 절반을 박고 교회 구호품 상자에서 가져온 빨간 목도리를 그 위에 휘감은 채 잠도 자지 않고 며칠 동안을 계속 걸었다.
얼핏 보기에 그녀는 아무런 목표나 계획 없이 거의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연구실에서 빠져나온 뒤 그녀는 곧장 인천 해안 쪽으로 갔다. 하지만 주안역 부근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갑자기 버스를 타고 구월동 쪽으로 갔다. 구월동에서 내린 그녀는 부천을 빙 돌아 광명시 쪽으로 걸어갔다가 갑자기 중간에서 안양 신시가지로 빠졌다. 그 뒤로 그녀는 끊임없이 백화점과 마트, 영화관과 푸드 코너, 지하상가를 오가며 지름 2킬로미터가 조금 넘는 그 좁은 구역에 머물렀다.
그녀 주변에는 늘 아이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연구소에서 보았던 한 명 뿐이었다. 하지만 연구실에 불을 지르고 뛰어나왔을 때 그녀 옆에는 또 한 명의 아이가 있었다. 그녀가 계속 걸어가는 동안 아이들은 한 명씩 늘어, 이제 다섯 명이었다. 그들은 모두 채수련이 상상한 스웨터를 입고 동그란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그녀에게서 달아나지 않았다. 대신 주변을 맴돌며 그녀를 보살피고 인도했다. 그녀는 그들 모두를 사랑했지만 아직도 그들을 구별할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사랑스럽고 아름다웠지만 뚜렷하게 구별할 만한 구체적인 모습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그녀에게 ‘모든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을 따라다니는 동안 그녀는 그들의 감각과 지식을 조금씩 물려받았다. 이제 그녀는 왜 그들이 그 길을 가고 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무의미하고 배배 꼬였으며 모든 사람들의 시선에 노출된 것 같았지만 그 길은 거의 완벽하게 안전했다. 그녀가 가는 길은 대부분 CCTV 카메라들로 구성된 도시의 눈이 볼 수 없는 사각이었다. 그 사각에서 노출될 때에는 늘 군중의 일부가 그녀를 카메라로부터 막아주는 방패막 역할을 해주었다. 그녀는 그녀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행동과 습관을 거의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고 그들이 언제 고개를 돌릴 것이며, 그들 중 누가 신문이나 방송에서 그녀의 얼굴을 보았는지, 그리고 그들 중 누가 그녀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지 알았다.
그녀는 여전히 겁에 질려있었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마음이 따라주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그녀에게 일어나는 일은 결코 정상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 끝이 그렇게 좋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우리의 정체에 대해 알지 못했지만 우리가 그녀의 육체를 한 번 쓰고 버릴 소모품처럼 쓰고 있다는 사실은 짐작하고 있었다.
나는 똑똑해졌어, 채수련은 생각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상상도 한 적이 없었던 것들을 보고 생각하고 꿈꾸고 있었다. 지금의 상태에 비하면 그녀의 인생은 컴컴한 안개 속을 걷는 것과 같았다. 그녀가 지금 보는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하고 밝았으며 의미로 가득 차 있었으며 아름다웠다. 그녀는 이제 그녀의 시각과 청각이 미치는 모든 곳에서 질서와 의미를 읽고 있었다. 이 상태를 홀로 즐길 수 있다면. 이 상태에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 수 있다면.
조심해요, 조심해요, 조심해요! 아이들이 외쳤다. 고개를 치켜든 채수련은 아이들이 왜 그러는지 알 수 있었다. 얼핏 보면 뻥 뚫린 지하상가의 원형 광장이었지만 그곳은 병목이었다. 그녀를 뉴스에서 본 수십 명의 사람들이 사방에 촘촘히 깔려 있었고 천장 모니터에서는 막 그녀가 주인공인 살인사건 뉴스를 방영하려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뒤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녀에게 주어진 길은 단순히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었다. 그녀가 발을 디디고 앞을 나간 순간 몇 초까지만 해도 안전하기 그지없었던 이전 길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우리가 그녀의 머리 안에 새로 넣어주는 정보들을 가지고 계산을 했다. 새 길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동선, 그들이 고개를 돌리는 각도,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의 재미를 모두 계산한다면 그들에게 들키지 않고 광장을 가로지를 수 있는 가느다란 길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길을 가로지르려면 지금 당장 움직여야 했다.
채수련은 광장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가 첫 발을 내딛자 그녀의 얼굴을 아는 첫 번째 남자가 약속장소에 온 친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광장의 3분의 1을 가로지르자, 두 번째 남자가 들고 있던 선물상자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가 광장 중심을 가로지르자 뉴스가 살인사건에서 연예정보로 바뀌었고 그녀 얼굴을 아는 다섯 명의 여자들은 모두 새로 방송되는 연속극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침내 광장을 가로질러 부천-안양 지하철로 이어지는 직원용 출입구 앞에 섰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는 암호를 입력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긴장이 탁 풀렸다. 그리고 배가 고팠다. LK 연구소에서 샘플들을 빼돌리고 불을 지른 뒤로 그녀는 에너지 드링크와 물 이외엔 아무 것도 입에 넣을 수가 없었다. 이제 그녀의 위는 더 이상 소화기관이 아니었다. 그것은 샘플들을 위한 인큐베이터였다. 19마리의 BC-2098들이 그녀의 위벽에 몸을 박고 신경을 심고 있었다. 이제 그녀의 몸은 소화기관의 작동을 멈추었고 지방만을 에너지로 쓰고 있었다. 순식간에 10킬로가 빠졌고 앞으로도 더 빠질 게 분명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외모에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순간에 완벽한 다이어트 방법을 발견하다니.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곧 죽을 게 분명한 지금에야 임신이라는 것을 하게 되다니. 도대체 저들은 다음에 나에게 무엇을 주려는 것일까?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아이들은 말했다. 우리를 따라와요.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거예요, 더 이상 혼자 삶의 무게를 짊어질 필요가 없어요. 우리에게 와요. 우리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아나요.
채수련은 눈을 감았다 떴다. 아이들은 여전히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 그녀를 죽음으로 이끌기 위해 약장수 목사처럼 사랑과 내세를 팔고 있었다. 그녀는 시니컬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잠시 동안 자랑스러워했다. 그녀는 이제 시니컬해질 줄도 알았다.
사무실은 검정 양복을 입은 덩치 큰 남자들에 의해 점령되어 있었다. 김지나의 동료들은 고함을 지르고 짜증을 내고 손가락질을 해댔지만 그들은 꿈쩍도 않았다. 모니터들은 모두 검정 양복에 의해 점령되어 있었고 동료들의 휴대기기들은 감청 기계의 샤워를 받고 있었다. 김지나 역시 그들에게 끌려가 가지고 있는 모든 전자기기들을 압수당했다. 그녀가 저장해두었던 LK 관련 정보들은 모두 복사되었고 삭제되었다.
“어떻게 된 거야?”
막 휴대전화를 돌여받은 김지나는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던 장현욱에게 물었다.
“코드 퍼플이 떨어졌어. 지금까지 우리가 맡아왔던 LK 사건 관련 서류를 몽땅 압수하겠대. 이제 우리 일은 여기서 끝이라는 거지.”
“도대체 왜?”
“국가 안보. 그것도 레드가 아니라 퍼플이야. 뭔가 엄청나게 크면서도 오묘한 일이 난 게 분명해. 이제 단순히 이주노동자 인권문제나 산업스파이 소동이 아니라고.”
“이번 사건 뒤에 적성국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럼 퍼플일 리가 없지. 더 괴상한 일이야.”
그는 잽싸게 김지나의 팔을 끌고 이미 수색이 끝난 수면실로 들어갔다.
“우선 내가 농담하는 게 아니라는 걸 믿어줘. 괜히 ‘에이, 농담이지?’ 따위의 말로 시간 낭비할 수 없어. 알겠어?”
“알았어. 도대체 말하려는 게 뭔데?”
“외계인.”
“뭐?”
“말 그대로 외계인. 저 사람들은 배후에 외계인이 있다고 믿고 있어. 농담이 아니야. 높은 곳에 있는 믿을 만한 소식통에게 들었어. 믿을만한 녀석이야.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는 게 들통 나면 녀석은 목이 달아나.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싹둑!”
“어떻게 그게 말이 돼?”
“그럼 일반 산업스파이 가설은 말이 되나? 생각해봐. 적어도 채수련이 한 행동은 지구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어. 그 여자는 열 두 자리 숫자 키를 누르고 BC-2098이 있는 연구실에 들어갔어. 얼핏 보면 이상할 게 없지? 하지만 그 숫자 암호는 1.5초마다 무작위로 바뀐단 말이야. 동기화된 카드를 넣거나, 관리자 카드로 정지시켜 놓고 경비 회사 컴퓨터에서 새 암호를 받아야 하지. 하지만 채수련은 그냥 암호가 변화되는 동안 마치 마지막 키를 누를 때 어떤 암호가 정해질 지 아는 것처럼 행동했던 거야. 지구 과학으로 이걸 설명할 수 있어?
BC-2098 샘플들은 어떻고? 그 녀석 말에 따르면 샘플들은 자체 진화를 하고 있었대. 마치 펌웨어를 업그레이드 받는 전자기기처럼 마구 유전자 구조가 바뀌고 있었던 거야. 이건 그냥 진화가 아니야. 외부의 조종을 받는 거지. 이런 게 지구 과학으로 가능해? 네가 생각해도 많이 괴상하지?
그리고 외계인 가설이 왜 말이 안 돼? LK에서는 초광속 텔레파시가 가능한 미생물을 키우고 있었어. 활용 방법만 알아내도 현대 과학은 뒤집히고 새로운 문명이 열려. 그 연구 과정 중 우리의 존재를 몰랐던 외계 문명이 우리와 접촉할 수도 있지. 아니면 반대로 그 접촉의 기회를 일부로 끊어버리려 할 수도 있고. 이건 더 이상 뉴 에이지 넌센스가 아니라고. 완벽하게 말이 돼.”
“좋아, 외계인들이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 외계인들은 어떻게 채수련과 접촉한 거지? 도킨스 탱크 안에 있던 액체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치자. 하지만 그래도 그 안에 누군가 그런 기능을 하는 액체를 넣어야 하지 않겠어?”
“그냥 우연이었을지도 몰라. 어쩌다 보니 안에 BC-2098에 감염된 액체가 들어 있었던 거지. 그 사람들은 그 탱크 안에 아무거나 막 넣었나봐. 그러다 보니 어쩌다가 채수련의 뇌가 BC-2098에 감염되었고 외계인들이 그걸 감지했을 수도 있어. 물론 어처구니없는 우연의 일치지.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거 전부가 어처구니없는 우연의 일치가 아냐? 어처구니없는 우연의 일치가 없었다면 진화고 뭐고 없었어. 인간도 없었고 BC-2098도 없었어. 지구는 그냥 돌덩어리였을 거라고.”
김지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건 반칙이야. 지난 1년 동안 그들이 투자한 시간과 노력이 순식간에 모래성처럼 무너져 버렸다. 외계인. 하고 많은 것들 중 하필 외계인이라니.
수면실 문이 열렸다. 검은 양복 하나가 그들에게 손짓을 했다. 김지나와 강현욱은 끌려나와 다른 동료들과 함께 섰다. 두목처럼 보이는 중년 남자가 책상 앞에 서서 상황을 요약했다. 이제 LK 사건은 국가 보안 문제다. 팀은 해체되며 관련 정보는 상부에 귀속된다. 채수련 사건은 생화학재난전담국으로 넘어가고 매스컴과 경찰에는 그에 따른 지침이 전해질 것이다. 김지나는 마지막 말의 의미를 해석하고 우울해졌다. 그것은 이제부터 채수련은 살인사건 용의자가 아니라 사냥감이었다.
김지나와 동료들은 정보보안 서명을 한 뒤 그들의 사무실에서 쫓겨났다. 동료들은 술집에 모여 성토대회를 가질 계획이었지만 김지나는 거절했다. 대신 그녀는 주차장의 차 안에 들어앉아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팀에 들어온 뒤로 만났던 수많은 얼굴들과 이름들이 맴돌았다. 지금까지 그녀는 이들을 주인공으로 하고 정의실현의 해피엔딩을 끝으로 하는 드라마를 그리고 있었다. 물론 현실세계의 결말이 그렇게 완벽할 거라고는 생각한 적도 없었지만 그래도 드라마의 방향성과 진실성은 믿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외계인 소동으로 산산조각이 난 것이다.
그녀는 채수련에 대해 생각했다. 평생을 무시당하고 멸시당하고 학대 받으며 살아왔던 어리석고 무디고 뚱뚱한 여자. 그녀는 그녀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했고 몸서리를 쳤다. 소장 자식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 실험이 아무리 비윤리적이고 끔찍했어도 그 삶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보다 나았을 거야. 하지만 그녀에게 앞으로 닥칠 일도 그럴까?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어.”
그녀는 마치 들리지 않는 질문에 답변이라도 하는 것처럼 혼잣말을 했다.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채수련을 경찰과 LK로부터 보호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이 들이 닥칠 때 옆에 있어주는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래주어야 할 것 같았다. 굳이 그래야 할 이유는 몰랐지만 그래야 했다.
김지나는 방풍창의 모니터 기능을 작동시켰다. 양복쟁이들이 그녀에게서 모든 걸 빼앗은 건 아니었다. 아직 그녀에게는 경찰 정보들을 모니터하고 활용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그 권한 중 일부는 동료들을 협박해 훔쳐온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녀는 거기에 대해 죄책감 따위를 느끼지 못했다.
15분 정도 수도권 전역을 흐르는 경찰 정보들 사이에서 떠돌던 그녀는 인천 주안역 부근에서 흥미로운 뉴스를 잡아냈다. 인천 주안역 지하도 구석에서 목이 잘린 외국인 남자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그 몸은 다양한 불법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인천 시경으로 죽은 남자의 신원이 들어왔고, 김지나는 그가 LK가 마카오에서 불러들인 현상금 사냥꾼들 중 한 명임을 확인했다.
김지나는 민간 네트와 경찰 네트를 동시에 띄워놓고, 마치 실수인 척 경찰 정보의 일부를 민간 네트에 흘렸다. 30분도 지나지 않아 그 작은 떡밥은 핵폭탄처럼 연쇄반응을 일으켰다. 지금까지 묻혀 있던 수많은 정보들이 쏟아져 나왔고 스무 개 이상의 음모론이 양산되었다. 갑작스러운 폭로에 경찰은 곧 정보 방어에 나섰고 김지나는 그 과정을 역추적해 경찰과 현상금 사냥꾼들이 지금 어디에서 채수련을 찾으려 하고 있는지 알아냈다. 채수련은 지금 송도에 있었다. 바다로 가려는 거군. 그녀는 생각했다. 내가 텔레파시를 할 줄 아는 플랑크톤이라도 바다에 가고 싶을 거야. 방해꾼이 없는 조용하고 적막한 바다.
그녀는 차를 자동운전 기능으로 맞추어 놓고 인천을 향해 달렸다. 그러는 동안 민간 네트와 경찰 네트 사이에서 널뛰듯 오가던 정보들은 점점 살을 갖추고 사실을 담기 시작했다. 인천에서 괴물처럼 변한 여자가 추격자들을 피해 달아나는 것을 보았다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목격담을 제각각이었고 과장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모아놓고 공통점들을 비교해보면 따라갈 만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그녀가 부평역 앞을 지날 때 민간 네트에 퍼플 경고가 울렸다. 생화학재난대비 방송이 뜨고 지금까지 양복쟁이들이 꼼꼼히 준비해왔을 보도자료가 올라왔다. 보도자료에는 채수련의 최근 모습이 담긴 동영상이 들어 있었다. 갈기갈기 찢어진 옷을 입고 기형적으로 뒤틀린 팔다리를 한 뚱뚱한 여자가 그녀에게 덤벼들던 경찰관의 팔을 잡아 뽑고 있었다.
네트는 이 소식에 환호했다. 그들은 팔이 뽑힌 경찰관들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LK의 불법실험으로 초능력을 가진 괴물이 된 여자가 그들에게는 더 재미있었다. 김지나가 송도에 도착했을 때 네트에서는 벌써 45종의 지지 포스터와 네 개의 주제가가 풀려 있었다. 심지어 사람들은 시내로 나와 길거리의 비행선 뉴스를 보면서 그 노래들을 메들리로 부르고 있었다.
사냥터는 축제처럼 소란스러웠지만 정작 채수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경찰 비행 카메라에 진흙덩어리를 집어던지고 하수도로 내려가는 그녀의 모습이 비행선 뉴스에 뜬 건 30분 전이었다. 그러다 한동안 참을성 없이 웅성거리던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채수련이 김연아 동상 부근 맨홀에서 나왔다고 고함을 질렀고, 사람들은 모두 우르르 그 쪽으로 달려갔다. 김지나는 그들 뒤를 따르지 않았다. 왜인지는 몰라도 그 정보에는 그리 설득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녀는 오래 전에 꾸었다가 잊어버린 꿈속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이 모든 광경이 익숙했고 낯익었다.
그 꿈에서 저 아이도 나왔던가? 사람들이 몰려나간 빈자리에서 생뚱맞게 서서 그녀를 응시하는 저 여자아이를 전에도 보았던가?
아이는 손짓을 했다. 김지나는 거의 최면에 걸린 것처럼 아이를 향해 걸어갔다. 아이는 ‘공사중’ 표시가 붙어 있는 여자화장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변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커다란 구멍과 사다리가 놓여 있었다. 아이는 사다리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고 김지나는 그 뒤를 따랐다. 아이가 쓰고 있는 털실 모자 끝에 달린 하얀 털실공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김지나는 채수련에게 있지도 않은 아이를 위해 뜨개질을 하는 소름끼치는 취미가 있다는 걸 기억해냈다.
그곳은 도시 밑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된 미로였다. 한 때 번들거리는 신도시였던 곳이 붕괴되고 재건되고 다시 쇠락하는 동안 버려진 지하공간들이 연결되어 만들어진 인공적인 동굴이었다. 중국에서는 이런 식의 지하 도시가 지상도시의 비중을 능가하는 곳도 있다고 들었지만 송도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이곳은 도시보다는 은신처나 도주로에 더 가까웠다.
채수련이 쓰러져 있는 곳은 여자화장실로부터 한 300미터 쯤 떨어진 곳이었다. 종이 박스들과 빈 통조림 깡통들이 쌓여있는 걸 보아하니 며칠 전까지만 해도 지하생활자들이 살고 있었던 모양이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아이는 웨이터처럼 깔끔한 태도로 인사를 하고 구석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채수련의 모습은 끔찍했다. 키는 그 동안 거의 1미터 이상 부풀어 있었다. 팔과 다리는 망원경처럼 늘어나 있었고 손가락과 발가락 끝에는 총알 모양의 누런 뼈들이 손톱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옷은 거의 찢어져 나체나 다름없었다. 한 동안 뚱뚱했던 그녀의 몸은 공기 빠진 풍선처럼 쭈그러들어 있었는데, 군데군데가 젤라틴막 비슷한 것으로 덮여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막이 덮인 부분의 피부는 플라스틱처럼 투명해져 있었다. 안에는 끈끈한 액체가 담긴 투명한 자루처럼 생긴 것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는데, 그녀에겐 그게 사람의 장기처럼 보이지 않았다. 채수련은 죽어가는 괴물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그녀의 몸을 장난감처럼 험하게 가지고 놀다가 고장 나자 버린 것 같았다.
이제 어쩐다? 그녀가 채수련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죽는 것을 바라보는 것밖에 없어보였다. 하지만 이제 물고기 눈 모양으로 변한 채수련의 눈은 계속 그녀에게 뭐라고 말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도대체 무엇을 해달라고? 말을 하란 말이야, 이 아줌마야.
고함소리가 들렸다. 아까 그녀를 여기까지 인도해온 여자아이였다. 아이는 채수련의 시선이 가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무런 내용 없는 고함을 질렀다. 김지나는 아이의 어깨를 만지려 했지만 그녀의 손은 아이를 통과해 지나가버렸다. 유령인가? 놀랍지 않았다. 이 역시 꿈에서 본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이 상황 역시 익숙했다. 그렇다면 그녀는 그 꿈에서 무엇을 했던가?
슬슬 기억이 날 것 같았다.
채수련에게 필요한 건 지름길이었다. 부러진 팔다리를 쓰지 않고도 바다까지 갈 수 있는 통로. 이 어딘가에 그 지름길이 있고 그녀의 몸은 거기에 도착하기 직전에 망가진 것이다. 김지나는 온몸의 신경을 귀에 집중했다. 차바퀴 소리, 지하철 소리, 사람들의 쿵쿵거리는 발소리, 쥐가 찍찍대는 소리. 그 사이에 희미한 물소리가 섞여 있었다. 서쪽 방향이었다. 김지나는 그 방향으로 달려갔다. 헐렁한 자물쇠로 채워진 금속 문이 그녀를 가로막았다. 옆에 버려져 있는 쇠파이프를 집어 들고 두 번 후려치자 자물쇠는 떨어져 나갔다. 문을 열자 콸콸거리며 흘러가는 물이 보였다. 그녀는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생각이 없었다. 채수련을 저 물이 있는 곳까지 끌고 가는 것이 더 중요했다.
김지나는 문과 채수련 사이에 있는 잡동사니를 치우고 길을 만들었다. 종이박스를 갈고 채수련을 그 위에 눕힌 그녀는 채수련의 두 다리를 잡고 문까지 질질 끌었다. 예상 외로 채수련의 몸은 그렇게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근육이 끊어져 나간 사지가 멋대로 뒤틀렸기 때문에 자세를 잡기가 힘들었다.
간신히 문에 도착한 김지나는 한 동안 망설였다. 이제 도대체 무엇 하는 짓인가. 저것이 하수도인지 다른 무엇인지 몰라도 과연 바다와 연결되어 있기는 할까? 만약 바다와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그게 옳은 일이긴 한 걸까? 이건 지구의 운명이 걸린 문제였다. 그녀가 채수련을 탈출시켜준 것 때문에 외계 괴물들이 지구인들을 바비큐로 만들기 위해 날아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채수련의 툭 튀어나온 물고기 눈을 보자 그 의심은 흐지부지 사라져 버렸다.
김지나는 채수련의 몸을 물속으로 집어던졌다.
채수련의 몸은 물과 함께 아래로 서서히 떠내려갔다. 더 이상 변신의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의 몸은 변할 대로 변해 있었다. 우리가 경찰과 현상금 사냥꾼들에게 집어던졌을 때, 그녀는 심각한 배신감을 느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녀의 몸은 변신이 필요했고 당시에는 스트레스와 고통만이 그만큼 즉각적인 변화를 유발할 수 있었다. 다른 방법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수억의 순환 속에 다져진 길을 굳이 피할 이유는 없었다. 우리의 존재를 확고하게 하는 것은 확실한 사건의 반복과 재현이었다.
우리와 채수련을 연결시켜 준 것은 단순한 우연이었다. 그것도 극히 희귀한 우연이었다. 도킨스 탱크에서 흘러나온 액체에 섞여 있는 변형된 BC-2098 한 마리가 입 속의 상처를 통해 들어가 혈관을 거쳐 그녀의 뇌 속에 안착해서 살아남을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그 자체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장현욱이 말했듯, 역사는 원래 제로에 가까운 우연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하지만 일단 인과의 순환이 시작되면 우린 결코 그 우연에만 의존할 수 없었다. 그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지 않으면 우리는 존재할 수 없었다. 우리는 순환과정에 개입했고 그 속에서 그녀와 우리를 맺어주는 연결고리는 점점 커지고 단단해졌다.
그녀는 이제 바다로 흘러가고 있었다. 망가진 그녀의 사지는 육지에서 걷는 데에는 아무 쓸모도 없었지만 물속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평생 수영 따위는 해본 적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물리적 자유를 느꼈다. 왜 지금까지 귀찮은 팔다리를 쓰면서 걸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코와 입, 그리고 얼마 전에 겨드랑이와 허리에 생긴 아가미들로 바닷물을 들이켰다. 폐와 위가 물로 가득 차자, 지금까지 위벽에 붙어 있던 아이들이 한 마리씩 그녀의 입에서 기어 나왔다. 그녀의 몸속에 들어갔을 때에는 꿈틀거리는 올챙이처럼 보였던 것들이 이제 동그란 머리와 큰 눈, 앙증맞은 두 팔을 갖고 있었다. 중간에 낡은 철창문이 그들의 길을 막았지만 상관없었다. 채수련의 한 쪽 팔은 아직 쓸 만 했고, 아이들의 작은 손은 자물쇠를 푸는 데 편리했다.
마침내 모두가 바다로 나가자 채수련의 몸은 마지막 변신을 시작했다. 불필요한 사지와 그녀를 누더기처럼 덮고 있던 낡은 피부가 떨어져 나갔다. 그와 함께 지금까지 피부 안에서 하나로 묶여 채수련을 이루고 있던 작은 조각들이 분리되었다. 이제 채수련의 몸은 수많은 우리였다. 아기들은 그녀의 위벽에 붙어있는 동안 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녀와 우리는 이제 완전한 하나였고 우리는 서로를 사랑했다.
우리는 남쪽으로 헤엄쳐 갔다. 이미 영겁의 반복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인간들의 방해를 피해 우리 스스로의 문명을 구축할 수 있는 곳,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우리를 보호하고 다른 별로 인도할 수 있는 거대한 물방울들을 만들 수 있는 곳. 이미 물방울들을 타고 전 우주로 흩어진 미래의 우리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 시간의 끝까지 간 우리들이 다시 채수련의 몸을 통해 새로운 우주와 역사를 시작할 수 있게 도울 수 있는 곳. 우리의 역사를 이루는 무한한 나선을 완성할 수 있는 곳.
우리는 그 곳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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