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두 번째로 잠에서 깬 뒤 벽시계를 봤다. 낮 열두 시 십오 분. 날이 흐린지 회색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인색했다. 첫 번째 기상 후에 마셨던 술 때문에 머리가 아프고 속이 아렸다. 책상 위에 놓인 진통제 약병에는 딱 두 알이 남아 있었다. 생수와 소주 사이에서 잠깐 망설이다가 생수로 약을 넘긴 뒤 소주로 입가심을 했다. 입가심이 반병 넘게 이어지자 이번에는 위가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위장약을 찾기가 귀찮아서 그냥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쿨렁, 하고 몸이 진동하며 기다렸다는 듯 현기증과 구토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현기증이 찾아올 때면 항상 하던 식으로, 등을 바닥에 붙이고 누워 두 다리만 침대 위로 올렸다. 천천히 머리로 피가 몰리면서 현기증이 조금씩 가셨고 다시 두통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머리를 뒤로 곧추세워서 방안을 둘러보았다. 침대 하나, 책상 하나, 의자 하나, 그리고 TV 한 대가 전부 거꾸로, 마치 내가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뒤집혀 보였다.
똑똑, 하고 작은 노크소리가 들렸다. 잘못 찾아 온 사람이거나, 방세를 달라는 총무일 테니 문을 열어줄 필요는 없었다. 눈을 감고 가버리길 기다렸다.
한 번, 두 번……. 열네 번, 열다섯 번.
결국 천천히 일어나서 문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이미 짜증은 가라앉았고 약간은 겁이 나고 있었다.
문을 한 뼘만큼 열자 정장을 입은 키가 작고 목이 뻣뻣한 남자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나를 보더니—러닝셔츠, 충혈된 눈, 붉어진 얼굴, 삼일 간 감지 않은 머리, 보름 간 깎지 않은 수염—오히려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김서권씨죠?”
“그런데요.”
그 뒤에 서 있는, 역시 양복을 입은 키 큰 노랑머리의 서양 남자가 나를 보며 눈인사를 해왔다.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저희랑 잠깐 좀 같이 가주실 수 있을까요?”
“예?”
“저는…….”
남자는 품에서 신분증을 꺼내 보였다. 누구나 다 아는 월계관 모양의 그 표식이 있었다.
“유엔에서 왔습니다.”
노랑머리가 깊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작은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 안을 들여다보려다가 그만두었다. 괜히 시도했다가 되지도 않고 두통만 더 도지면 재미없으니까.
내게는 두 가지 선택권이 있었다. 이들을 따라가느냐, 아니면 한참 옥신각신 한 뒤에 끌려가느냐.
나는 후자를 택했다. 그래서 그만 러닝셔츠에 반바지 바람으로 벤츠에 오르게 됐다. 벤츠 뒷자리는 남자 셋이 탔는데도 넉넉했다.
내가 휘두른 주먹에 코를 얻어맞았던 노랑머리는 티슈로 코피를 닦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또 씩 웃었다. 나는 그저 몸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왜 갑자기 이러십니까?”
나는 신경 써서 존댓말을 했다.
“지금까지는 뭣도 없더니……. 어딜 가는 거예요?”
털끝 하나 건들 수 없었던 키 작은 남자는 나직이 대답했다.
“좀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창밖을 보며 말을 이었다. “다 왔습니다.”
나도 고개를 빼고 창밖을 봤다. 차는 서울대학교 정문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신림동 고시촌에서 서울대는 당연히 가깝다.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 들어, 몸을 뒤로 눕히고 잠시 벤츠의 승차감을 즐겼다.
한밤 중 홍두깨 같은 이 상황에 대해 혹시 짚이는 걸 말해보라면 할 말은 별로 없다. 나는 천리안이라는 것 밖에는.
물리학 연구소의 조교 사무실에 잠시 앉아있는데, 조교가 숨을 몰아쉬며 달려와 내게 포장된 꾸러미 하나를 내밀었다. 나이키 셔츠와 바지, 운동화, 모자 등이었다. 심술을 부려볼까 하다가, 나이키 운동화를 또 언제 신어보랴 싶어 그냥 받았다.
여기는 외국 사람들이 많았다. 엄청나게 다급하면서도 상당히 힘 있는 자들이 분명했다. 서울대학교 연구동 하나를 갑자기 전세 낼 수 있으려면 그래야 하지 싶었다. 아까 코피를 흘렸던 양키가 교수쯤 되어 보이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 시선을 느꼈는지, 슬쩍 이쪽을 보고는 다가왔다.
“두 유 리멤버 미?”
초등학생도 다 알아먹을 정도로 그가 천천히 말했다. 나도 천천히 대답했다.
“애스홀.”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고 가버렸다. 역시 똥구녕으로는 모자란가. 선오브비치라고 할 걸 그랬나.
나는 나이키로 온 몸을 도배한 채, 누군가를 붙들고 이야기를 하거나, 바쁘게 오가거나, 모니터에 잔뜩 띄워놓은 도표를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들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아무도 내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봐들, 지금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게 나 아냐?
정말 그런 거 아냐? 모두 날 봐줘야 하는 거 아냐? 내가 어떤 마음인지, 당신들이 바라는 걸 할 수 있는지 아닌지 신경 써줘야 하는 거 아냐? 오늘 아침은 먹었는지, 요즘 고민은 없는지, 고질병인 편두통은 좀 나았는지 물어봐야 되는 거 아냐?
나는 종도라는 섬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전라남도 무안의 서쪽에 지도라는 큰 섬이 있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서쪽으로 수도와 재원도, 갈도, 부남도가 연이어 있고 그 다음에 종도가 있다. 사실 우리 섬에서 서쪽으로도 섬이 몇 개가 더 있는데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 섬이 종도가 됐다. 막내도 아닌데 말자나 종숙이가 있는 것과 비슷했다.
아무튼 오백 가구 쯤 되는 섬의 어른들은 주로 고기를 잡거나 김 양식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고, 아이들은 아무것도 안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할 게 없었다. 물론 해안가에 나가 갈매기에게 돌도 던지고 학교 운동장에서 바람 빠진 공도 찼지만 뭔가를 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진 않았다. 그냥 몸은 움직이고 입은 나불대는데 가만히 있는 느낌이었다. 요즘 애들은 아마 절대 알 수 없을 느낌이랄까.
그래도 시간은 흘렀다. 나는 당시 국민학교 오학년이었다. 그리고 체육 과목은 정규 교과 과정에 따라 물구나무서기를 할 시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담임선생이 다음 주에는 물구나무서기를 한다고 하자 열여덟 명의 반 아이들은 전부 나를 보며 웃었다. 우리는 오년 동안 같은 반이어서 서로를 너무나 잘 알았고, 지금 현재 반에서 물구나무서기를 못하는 사람은 유일하게 나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좁디좁은 섬 학교에서는 심지어 담임도 그걸 알고 있었다.
“서권이만 하자. 서권이 하면 다 하는 거잖아.”
애들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촌놈촌년들.
그렇다. 내 운동 신경은 별 볼일 없다. 체격도 작은 편이고 잔병치레도 많다. 그런데 다들 하는 걸 나 혼자 못할 만큼은 절대 아니다. 그러니까 남자 애들 열 명 중에 달리기로는 한 일곱 번째 쯤은 되고 싸움도 그 정도 한다. 그러니까 매사에 꼴지는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물구나무서기는 절대로 되지 않았다. 정말 간단한 것이었다. 두 사람이 짝을 지어 일점 오 미터 정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본다. 그러면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향해 하나, 둘, 그렇게 두 발 걸은 뒤 두 손으로 땅을 짚고 관성을 이용해서 몸을 뒤집어 올린다. 그러면 나머지 한 명이 재빨리 팔을 뻗어 다리를 잡아준다. 잠시 그러고 있다가 다리를 놔주면 끝.
여자 애들도—치마를 안 입었을 경우—다 한다.
결국 다음 주 체육시간에는 내가 물구나무서기에 성공하면 나머지 시간에는 편을 갈라 축구를 하기로 했다.
내가 성공하면.
나는 무거운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어머니가 김발을 손질하시다가 물었다.
“서권이 너 혼자 물구나무서기 못한대며?”
하여튼 더럽게 좁은 섬.
“다들 하는 걸 왜 못하는디?”
엄마의 웃는 얼굴이 더 얄미웠다.
“못 하는 거 아녀! 엄만 알지도 못하면서 왜 그려!”
“그럼 뭐여. 할 수 있어?”
“하면 되지 그게 뭐가 어려워서 못하겄어. 엄마는 못할 거 아녀. 뚱뚱해갔고.”
당시 나는 엄마한테 꽤 반항적인 아이였다.
“서권아.”
나는 할아버지가 광 앞에 앉아 숫돌에 칼을 갈고 있는 것도 몰랐다가 날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다음 주에 할아버지 생일날 그거나 한 번 뵈줘 봐라.”
“뭘요?”
“물구나무서기. 생일 선물이다 생각허고.”
“예.”
나는 젊었을 적 도내 씨름 대표선수였다는 할아버지한테는 무척 공손한 아이였다.
“이 김창순이 손자가 섬에 애들 다 하는 걸 못하면 쓰냐? 내가 동네 사람들 다 모아놓을 테니까 그 앞에서 해라 알겄냐?”
“네.”
엄마가 토를 달았다. “아빠도 와서 보라고 해야 쓰겄다. 그자?”
이때까지만 해도 두 분의 말씀을 백퍼센트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물구나무서기 하는 것 따위를 일부러 보러 올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리고 광주에서 건어물 가게를 하는 아빠가 그거 보겠다고 가게 문을 닫고 온단 말인가?
이틀이나 지나서야 이번 할아버지 생일에는 환갑잔치라는 걸 한다는 걸 알았다.
이십 대 초반에 나는 대학도 중퇴했고 특정한 직업도 경력도 없는 상태였어도 꽤 잘 나가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때는 최소 하루에 한 번은 투시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드물게는 하루에 두 번이 되기도 했는데, 그런 날은 대박이 터지는 날이었다.
나는 물론 포커 판에 있었다.
알려진 사람들 사이에서는 소심이로 불렸다. 나는 패가 좀 좋으면 끌려가는 척, 버티는 척, 실제 포커를 쳤고, 조금이라도 아슬하다 싶으면 바로 죽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다가 판이 커진 결정적인 순간에—사실 이 때를 포착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투시를 해서 손에 들려있거나 바닥에 엎어진 카드들을 단번에 쓱 읽었다. 그리고 그 판을 쓸었다. 나는 전문꾼들보다야 못했지만 고만고만하게는 쳤기 때문에 투시를 하면 거의 따는 편이었다. 물론 많이 따는 건 불가능했다. 하루에 확실히 할 수 있는 투시는 한 번 밖에 없으니까.
포커 판에서 손을 뗀 건 보원거사라는 점쟁이 덕분이었다. 그는 며칠 연속해서 내가 자주 가던 하우스에 얼굴을 보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묘하게 쳐다보는 걸 느끼고 있었다. 어쩐지 뒤가 찝찝해서 하우스를 옮겨야겠다고 맘을 먹고 있을 무렵, 화장실에서 그와 만나게 되었다.
“결국 천리안이더구먼.”
내 옆에서 나란히 소변기 앞에 선 그는 무심결인 듯 그렇게 말했다. 이미 싸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정말 오줌을 지릴 뻔했다. 그때까지 내 능력을 농담으로라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고 우연 이상으로 보이게 한 적도 없었다. 거기에 대해서는 아주 철저했기 때문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 그를 힐끗 쳐다봤다.
“천리 밖을 보는 사람인데 내 물건 볼까 무섭네.”
나는 애써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낮에 한 번을 써먹었기 때문에 가능성은 낮았지만, 나는 어느새 홀린 것처럼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날 두 번째로 놀라서 입을 벌리며 얼어붙었다. 보원거사는 내 표정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는 이미 내가 볼 것을 봤다는 걸, 아니 못 볼 것을 봤다는 걸 알았다.
“처녀 거기를 총각이 그렇게 막 봐도 되나?”
나는 그를 목이 지나치게 쉰 노인네로만 생각했지 여자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중에 들은 바로 그녀가 보원산에서 공부를 마치고 처음 깨달은 것은, 자신이 기가 막히게 좋은 사주를 타고 났다는 것이었다. 남자였다면.
아무튼 우리는 그렇게 서로 비밀을 텄고, 며칠 후부터 나는 그의—그녀는 자신을 남자로 여겨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점집으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 이년 가까이 우리는 괜찮은 콤비를 만들어 일했다. 그는 종로 후미진 곳에 점집을 차려두고 있었는데 꽤 장사를 잘했고 발도 넓었다. 나는 그냥 도령이라 불리며 손님을 안내하고 차를 날랐는데 보원거사의 신호에 따라 손님의 안주머니나, 핸드백 속을 들여다봐뒀다가 골방에 들어가 송신기에 대고 내용물을 말했다. 그러면 세운상가에서 산 콩알만 한 수신기를 귀에 넣고 있던 보원거사는 손님에게 이렇게 농을 걸곤 했다.
“백만 원짜리 수표를 다섯 장이나 갖고 오셨네. 우리 집에 다 두고 가실랑가?”
그 순간 손님은 보원거사의 포로가 되는 것이었다. 정말 다 두고 가기도 했다.
지갑 속을 보는 것 외에는 내게 아무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를테면 나는 회사의 비밀 금고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광맥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아니면 누군가의 뇌 속에 종양이 들어있는지 등을 알아낼 수도 있었으나 보원거사는 내가 절대 그런 것을 하게 하지 않았다. 중요한 정보는 보원거사가 산통을 흔들어서 화려하면서도 모호한 언변으로 제공했다. 처음에는 어쩐지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결국 나중에 알게 된 건 보원거사가 내게 심한 질투를 느끼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천기는 누설할 사람만 누설하는 거야.”
삼십 대 무렵이 되자 내 투시 능력은 이틀에 한 번도 버거워졌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가능했는데 언제 되느냐를 예측하기가 힘들었다. 나이 탓도 있었겠지만 그 무렵부터 내가 술을 많이 마시기 시작한 것도 영향을 끼쳤다.
나는 어느 날 술기운을 빌어 보원거사와 말싸움을 벌이다가 그가 목숨처럼 아끼는 산통을 깨뜨린 뒤 곧바로 점집에서 나왔다. 홀가분하다는 생각 밖에는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까지 모아 놓은 돈으로 작은 집과 상가 건물을 샀다. 상가 건물의 임대료만으로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한 그것이, 내 경제활동의 마지막이었다.
천리안을 이용해서 뭔가 일을 한 건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의 천리안 능력은 따지고 보면 정말 보잘 것 없었다. 나는 언제 볼 수 있을지도 몰랐고, 어디를 봐야 할지도 몰랐고, 본 것을 잘 써먹을 능력도 없었다. 결국에는 지갑 속을 들여다보는 도령 역할 밖에 할 수 없다는 걸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미래를 보거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능력 같은 게 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면 보원거사가 얼마 후에 나를 팔아먹으려 했다는 것도 알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천리안을 빼고 나니, 나는 참 쓸모없는 사람이었다.
종도에는 돼지와 메기와 장도리가 살고 있었다. 이웃에 사는 친구들이었는데 하나는 뚱뚱했고 하나는 입가에 털 한 오라기가 났고 또 하나는 머리가 짱구였다. 나는 좀 말랐었기 때문에 얍실이라 불렸다. 촌놈들.
아무튼 내가 할아버지 환갑 잔칫날 물구나무서기를 해야 한다고 난리 바가지를 피웠기 때문에, 이 친구들도 덩달아 조금 긴장했다. 그것이 얼마나 뻘쭘할 것인가—게다가 실패할 경우 얼마나 큰 웃음거리가 될 것인가—를 상상했기 때문에 그들은 긴장했다. 그들의 긴장을 본 나는 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니가 잡아 줘.”
“니가 잡아라 임마.”
“그럼 니가 잡음 되겄네.”
“내가? 돌았냐?”
이쯤에서 나는 찔끔 눈물을 흘렸다. 하는 수 없이 친구들은 가위 바위 보를 했고 얼굴이 해쓱해진 장도리가 나를 잡아 주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휴일인데도 우리는 무척 우울했다. 좁은 내 방에 모인 네 명은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우리 중에 그나마 머리가 제일 잘 돌아가서 리더 역할을 했던 장도리는 똥을 싸는 얼굴로 한참 방바닥만 보다가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냈다.
“너희 집에 빨간 이불 있냐?”
“뭔 소리여 시방?”
“빨간 이불, 레드 카펫.”
“그게 뭐여?”
“빙신들아 한숨 그만 쉬고 잘 생각혀 봐.”
장도리의 논지는 이것이었다. 이왕 할 거라면 그럴 듯하게 보이게 하자. 뭔가 의미를 잔뜩 붙여서 정말 중요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자. 우리는 다행히도 이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담임 때문에 여름방학 때 <톰 소여의 모험>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톰 소여는 심부름으로 담장에 페인트칠을 하고 있었는데 뭔가 중요한 일을 하는 것처럼 꾸며서 결국 다른 친구들에게 일을 넘긴다. 게다가 그 대가로 돈까지 받는다!
“돈을 받자고?”
“안될 건 뭐여.”
나는 어디서 본 것은 있어서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곳 주위에 끈을 둘러 접근금지선으로 사용하자고 했다. 박수가 쏟아졌다.
“불꽃놀이 같은 것도 할까?”
“등신아 폭죽이 얼마나 비싼데 그걸 어떻게 사냐?”
팔십 년대에는 그랬다.
“프랑카드 있잖여. 그거 하나 만들어가지고 이렇게 걸어두면 어뗘.”
“뭐라고 써서?”
“얍실이 물구나무 성공 기원.”
“너 말 잘혔다!”
장도리가 벌떡 일어섰다. 그의 두 눈은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는 게 바로 그거여. 지금 우리가 하려는 건 얍실이 물구나무가 아니란 거여!”
“그럼 뭐여?”
“그건 아직 모르겄는디, 아무튼 그걸 빨리 생각해 내야 혀.”
“좀 있으면 만화영화 할 시간인디.”
결국 우리는 마루로 나와 만화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저녁까지 얻어먹은 뒤 우리 넷은 그저 하릴없이 밤길을 걸었다. 나는 마음이 별로 가벼워지지 않았고, 그건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래도 장한 놈들이었다.
나는 조용히 우리들의 발소리를 들으며 걷다가 물었다.
“물구나무를 서면 어뗘?”
“뭐가 어뗘?”
“어떤 느낌이 드냐고. 니들은 물구나무를 슬 줄 아니까 알거 아녀. 난 모르잖여.”
모두들 조용했다. 물구나무를 서면 어떤가. 아무도 거기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세상이 거꾸로 보여.”
“맞어. 얼굴이 뜨거워지면서 세상이 완전히 딴 세상처럼 뒤집혀.”
“그니께……”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내가 하려는 게 두 발 걸어가서 다른 세상을 보는 거여?”
모두들 입을 다물고 조용히 내 말을 음미했다. 확실히 거기에는 뭔가가 있었다.
그러나 열두 살짜리 머리들로는 더 이상 생각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집으로 돌아가 염소 새끼들같이 잠을 잤다.
말한 적이 있었던가? 내가 천리안을 사용할 때는 상이 거꾸로 보인다.
노랑머리를 처음 만난 건 십 오년 전이었다. 나는 그때 정말로 영문도 모르고 안기부에 잡혀가 하루 묵었다가 곧바로 미국으로 끌려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당시에 나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들어오는 임대 수익으로 놀고먹는 처지였는데다가 가족도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갑자기 끌려간대도 별다른 큰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었다.
참, 어머니는 내가 열아홉 살 때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그 몇 년 전에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어디 계신지도 잘 모른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이혼하고 울화병으로 돌아가시다시피 하셨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와 연을 끊었다. 내가 섬에서 뭍으로 나온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직후였다.
아무튼 미국에 가서는 칼텍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부지 내의 어느 건물에 계속 머물렀다. 미국인들은 어떻게 알았는지—물론 나중에는 보원거사가 날 팔아먹은 거라는 걸 알게 됐지만—내가 천리안을 갖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태도가 좀 묘했다. 그들은 내게 신기한 무엇인가가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어 했지만, 그런 게 있을 수 있다는 걸 무척 불편해하기도 했다. 그들은 평생 말이 되는 것만 믿어온 과학자들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서 대략 육 개월을 머물며 나는 여러 가지 실험에 참여했다. 기특하게도 그들은—이런 경우에 원래 그러는지는 몰라도—내게 상담원 겸 변호사 하나를 붙여주고, 내 의사에 반하는 실험은 하지 못하도록 스스로 제동을 걸었다. 따라서 나는 가끔 엑스레이를 찍거나 피 검사를 하는 외의 모든 의학적 실험은 반대했고 천리안을 사용하는 실험에만 응했다.
카드 뒷면을 읽는 것이나 벽 너머를 보는 실험은 한두 번으로 끝났다. 이들의 태도에서 나는 이들이 전에도 나와 같은 사람을 실험한 적이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런 질문을 하면 ‘노’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열 개 중 아홉 개는 어떤 실험인지도 모르고 참여했다. 대부분은 내 몸에 전극을 잔뜩 붙인 상태에서 무언가를 보고 묘사하는 것이었다. 내가 무얼 보는 건지는 잘 알 수가 없었다. 때로는 어떤 바위나 나무를 보기도 했고 황량한 벌판을 보기도 했다. 구소련의 무기 창고 같은 곳을 들여다 본 적도 있었다. 이왕이면 그런 종류의 일을 많이 하고 싶었지만, 그런 실험은 드문 편이었다.
이때 나는 상당히 들떠 있었다. 이들은 능력의 유무를 판단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 있다는 건 이미 검증된 상태에서 그 한계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 마침내 내게도 기회가 왔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대단한 뭔가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나도 대단하고, 앞으로 무한히 중요한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공인된 검증 기관에서 확인받을 수 있는 거라 생각했다. 포커 판의 소심이나 점집의 도령이 아니라 의미 있는 뭔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해부학적 실험을 제외하면 나는 정말 최대한 열심히 실험에 응해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실험실의 문이 닫히고 연구진들이 몽땅 철수했다. 그리고 내 통역은 이렇게 말해주었다. 집으로 가랍니다.
나는 육 개월 내내 실험 과정을 참관했던 노랑머리 정부기관원—바로 지금도 내 곁에 있는—을 붙들고 물었다. 날 그냥 보내면 안 되잖아. 난 천리안이 있잖아. 그건 너도 알잖아. 많이 봤잖아. 난 특별하잖아.
하지만 노랑머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돌아가면 너희 정보기관에서 자세한 얘기를 해 줄 거야. 일단 돌아가.
그래서 나는 일단 돌아왔다. 물론 강제로. 그리고 곧바로 안기부 지하 회의실로 끌려갔는데 나를 마주보던 안기부 직원의 손에는 달랑 인쇄용지 두 장만 들려있었다. 그는 ‘나와 관련된 모든 실험 결과가 유의미하지 않다’는 결론이 내려져 있다고 말했다. 결국 난 의미 없는 인간이라는 소리였다.
거기서 일체의 내용을 함구하겠다는 서류에 지장을 찍은 뒤, 나는 다시 작은 내 집으로 돌아왔다.
이야기가 거기까지였다면 참 허탈하고 서글펐을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가 더 있다.
칼텍에 오래 머물면서 나는 거기 있던 몇몇 한국 유학생들과 인연을 맺었다. 물론 지시 내려진 대로 나는 거기서 실험을 받고 있는, 혹은 천리안을 가진 사람이라는 건 밝히지 않았고, 나를 그저 한인 타운에서 부동산업을 하며 대학의 문화 강좌에 다니는 사람으로 소개했다. 그리고 그중 어느 여학생과 조금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 학생에게만은 한국의 주소를 몰래 알려줬다.
그런데 그녀가 어느 날 서울의 집으로 날 찾아왔던 것이다. 우리는 석 달 연애를 한 뒤에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다 지난 일이다. 오래 전부터 우리는 별거 중이고 다시 재결합할 가능성은 제로다. 미안하지만 역시나 허탈하고 서글픈 얘기다.
칼텍에서 머물 때 노랑머리가 언젠가 나한테 물은 적이 있었다. 혹시 천리안을 이용해서 여자 알몸을 본 적이 있냐고. 물론 ‘노’라고 대답했다. 그건 치사한 질문이었다.
나는 능력을 깨닫기 시작한 십대 후반부터 그 당시까지 수천 명의 여자 알몸을 본 적이 있었다. 비난해도 할 수 없다. 당신에게도 나와 같은 능력이 있었다면 그러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이 얘기를 왜 하냐면, 어쩐지 아내가 나와 헤어진 것은, 내가 수천 명의 여자 알몸을 봤기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종도의 열두 살들은 결국 일을 벌였다. 그러니까 레드 카펫과 접근금지선과 ‘걸었노라, 짚었노라, 섰노라’, 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마련했던 것이다. 돼지는 무슨 용도인지는 몰라도 당일에 쓸 선글라스까지 준비했다.
그러나 진짜 일은 어쩐지 우리들 마음속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특히 내 마음 속에서. 나는 반 애들도 다 하는 물구나무서기를 한다는 게 지극히 별일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별일 아닌 것이,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행해진다는 건 완전히 다른 얘기라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것에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는 것은 ‘내가 하는 행위’ 때문이 아니라 ‘남들이 봐주는 행위’ 때문인 것이었다.
왜냐면 바로 그 후자로 인해 나는 자신감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일부러 본다는 것은 모두 무언가를 기대한다는 것이고 그 기대가 나를 시험에 들게 하기 때문이었다. 무언가가 시험대에 오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봐줄 가치가 생기고 내게는 해내야 할 가치가 생기는 것이다. 어쩌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일수록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쾌감은 더욱 커지는지도 몰랐다. 마치 추상화라는 그림이 더 비싸게 팔리는 것처럼.
다만 문제는 내게 추상화를 멋들어지게 그릴 능력이 있느냐 하는 것인데, 행사 준비와 별도로 진행되고 있었던 물구나무서기 연습은 참담할 지경이었다.
첫 연습을 시작했을 때는 하루 동안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나는 물론 두 손으로 땅을 짚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그걸 못한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두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순간 갑자기 온 세상이 휘청거리는 듯한 착각에 몸에서 힘이 쭉 빠지며 균형을 잃는 것이었다. 내 두 다리는 쭉 뻗은 장도리의 두 팔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맥없이 허우적거리다가 다시 지면으로 추락했다. 메기와 돼지는 진지하게—게다가 신이 나서—내게 팔굽혀펴기나 오리걸음을 시켜 팔다리 근육을 강화해주려 했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힘이 문제가 되는 것이라면 섬의 여자 애들은 다 뭐냐는 것을.
메기가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얍실이 진짜 가시내들보다 힘이 없는 거 아녀?”
장도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 우리 할머니가 그러는디 남자는 꼬추에서 힘이 나온뎌.”
돼지가 물었다.
“얍실이 혹시 꼬추가 없는 거 아녀?”
나는 다시 찔끔 눈물이 났다. 아이들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돼지에게 눈총을 주었다.
“내가 보기에 얍실이는 세상을 너무 있는 그대로만 보려는 거여.”
장도리의 논지는 그랬다. 내가 세상을 다르게 보기를 두려워하는 거라고, 지금 보이는 세상에서 벗어나는 걸 원하지 않는 거라고.
나는 항변했다.
“아녀. 나도 다르게 보고 싶어. 여기서 벗어나고 싶어. 근디 내 몸이 못 벗어나는디 어쩌겄어.”
“이 멍추야.”
장도리는 진중하게 말했다.
“이미 벗어났잖여. 두 걸음 걷는 게 괜히 그러는 줄 알어?”
당시에 나는 장도리가 얼마나 중요한 말을 했는지 깨닫지 못했다. 장도리 본인도 몰랐을 것이고, 물론 돼지나 메기도 몰랐을 것이다. 이 말 속에서 내가 어떤 의미를 발견하고 그걸 실제로 적용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몇 년이 더 걸렸다.
하지만 우습게도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한 말이었다. 나는 사흘이 지나서야 간신히 열 번에 한 번 정도는 성공할 수 있게 되었다. 단기간의 근력 운동은 팔다리만 후들후들 떨리게 했을 뿐 도움이라기보다 방해에 가까운 효과를 나타냈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나서는 다섯 번에 운이 좋으면 두 번 정도를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연습을 해도 성공 확률은 40퍼센트를 넘지 못했다. 딱 그 상태에서 그날이 왔다.
노랑머리와 키 작은 남자는 나를 공학관의 끄트머리에 있는 별채로 데리고 갔다. 나이키 스포츠 룩으로 캠퍼스를 걸으니 마치 다시 대학생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들이 안내하는 대로 긴 복도를 따라 몇 개의 밀폐문을 지나자 밖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커다란 공간이 나왔다. 나는 입을 딱 벌렸다. 그 안에는 엄청나게 복잡한 기계가 몇 사람이 들어갈 정도의 작은 공간을 남기고 가득 차있었다. 마치 폐차장과 고물상을 합쳐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다만 모든 것이 녹슨 데 하나 없이 반짝거린다는 게 다를 뿐이었다.
“지금부터 잘 들어주십시오.”
키 작은 남자가 전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입을 열었다.
“대형 운석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한 달 전에 미국에서 발견했죠. 속도가 굉장히 빨랐고 궤도가 태양 뒤였기 때문에 발견이 늦었는데, 당시만 해도 우려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태양의 뒤쪽으로 그냥 지나가는 궤도였으니까요.”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그를 쳐다봤다.
“그런데 이 주쯤 전에 운석이 방향을 바꿨습니다. 그러니까 태양 가까이로 타원을 그리며 휘기 시작했어요. 태양의 인력에 끌어당겨진 겁니다.”
그는 노랑머리 쪽을 언뜻 쳐다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은 지구에서 보자면 태양 뒤에서 지구 쪽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아마 태양 속으로 흡수될 거라고 예상됩니다. 그럴 경우 지구에 미칠 영향은 거의 없습니다. 태양을 스치듯 지나 지구 쪽으로 계속 다가올 확률도 있습니다. 이 경우에도 지구와 충돌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합니다. 다만 우리로서는 대비를 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크고 얼마나 무거운지, 모양은 대략 어떤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지금 그 얘기를 왜 나한테 하는데요?”
나는 바보가 된 듯한 심정으로 물었다. 키가 작은 남자는 여전히 차분하게 말했다.
“당신이 봐줘야 하니까요.”
“내가 그걸 어떻게 봐요?”
노랑머리가 영어로 짧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키 작은 남자는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볼 수 있어요. 예전에 칼텍에서 했다잖아요.”
“내가 언제 그런 걸!”
나는 더 말하지 못했다. 내가 본 어떤 장면들, 그러니까 묘사를 해주긴 했지만, 바다 속이나 사막이나 극지방이라고 생각했던 어떤 곳들이 꼭 지구라는 보장은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때 최면 유도로 당신이 본 몇몇 장소들은 태양계 너머에 있었습니다.”
키 작은 남자는 노랑머리가 한 말을 통역하고 있었다.
“최면 유도는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투시 확률이 낮아지니까요. 그런데 최근에 투시를 한 게 언제죠?”
빨리도 물어본다.
“요즘은 거의 안 하고 살았죠.”
“그럼 좋습니다. 우리는 내일 오전 중으로 준비가 됩니다.”
그런 말을 듣는 동안, 벌써 입술이 까칠하게 마르는 것 같았다. 이들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내가 어떠냐는 건 상관없이 그들이 준비되었느냐만 중요했다.
“15년 전 칼텍에서의 실험에서 밝혀낸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서권씨의 투시 능력, 정확히 말하면 뇌 시상하부에서 광자를 감지하는 능력이 증폭되는 순간은 산화물 상태의 베릴륨보다는 베릴륨-8이 자발적으로 핵분열을 일으켜 2개의 알파 입자가 생성될 때…….”
“그만하시죠.”
“네.” 키 작은 남자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하여간 10의 15승 분의 1초의 순간에 이루어집니다.”
“뭔 소린지 모르겠는데, 그럼 그 안에 내가 투시를 해야 한다는 거예요?”
“아뇨, 30초 정도 안에만 하면 됩니다. 다만 단 한 번 밖에 기회가 없다는 거죠. 왜냐하면 방사능 동위원소가 파괴되거든요. 이건 다……” 키 작은 남자가 손을 휘두르며 말했다. “일회용 장비인 거죠.”
“그럼 내가 실패하면요?”
마치 신호를 맞춘 듯, 둘 다 어깨를 으쓱했다.
“이만큼의 시설을 꾸미려면 또 한 달 정도가 걸립니다. 운석은 그 전에 지구와 충돌하거나 지나가겠죠.”
이들은 내게 시험대에 올라설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내 지론은 인생에서 그런 건 한 번이면 족하다는 것이었다. 아예 없는 게 제일 좋겠지만. 나는 계속 반항했다.
“이해가 안 가는데, 요즘 같은 세상에 왜 그런 걸 못 본다는 거예요? 무인우주선도 발사하고 인공위성도 많잖아요. 과학이 이렇게 발달했는데 나한테 이러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키 작은 남자는 이제야 조금 피곤한 얼굴이 되었다.
“당신한테까지 찾아온 걸 보면 모르겠습니까? 우리가 검토해 볼만한 다른 가능성이 남아있다면 당연히 해봤겠죠. 현대 과학으로는 태양 뒤에 숨은 건 볼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 주라는 시간 안에는.”
우리는 좋아서 너한테 나이키를 사준 게 아니라는 데는 할 말이 없었다. 그렇더라도 드넓은 우주에서 정확히 지구로 다가오고 있는 운석에 대한 황당한 설명에는 분명히 뭔가가 빠져있었다. 왜 내가 그것을 ‘보기'를 바라는 걸까. 내가 얼굴을 찌푸리고 있자 마침내 노랑머리가 한숨을 푹 쉬더니 입을 열었다.
“위 콜 잇 데쓰 갓.”
키 작은 남자가 노랑머리를 쳐다봤다가 나를 보고는 역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방향을 틀었습니다.”
“뭐요?”
“태양의 인력권 안으로 들어와서가 아니라 스스로 방향을 틀었다고요. 지구 쪽으로 향하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가 관측할 수 없도록 태양 뒤로 숨어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겁니다.”
빌어먹을.
그들은 내가 당연히 그날 밤은 서울대 안에 마련된 숙소에서 보내야 한다고 말했지만, 나는 당연히 우리 집으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고시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살았던 내 집은 여기서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한 시간 쯤 옥신각신을 거듭하자 그들도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결국 집 밖에 경호원을 배치하고 아침 여덟시에 다시 이쪽으로 데려 오겠다는 조건을 승낙함으로써 그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그들은 절대로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그건 두고 봐야 아는 일이었다.
오랫동안 비운 탓에 먼지가 가득 쌓인 텅 빈 집에 들어가서 한 시간 정도 소파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열쇠를 돌리는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뜻밖에도 아내였다.
나는 벌떡 일어나 소파에 앉았다. 아내는 내 쪽을—정확하게는 내 발치를—한 번 보고는 현관 옆에 작은 여행 가방을 내려놓은 뒤 손에 든 커다란 봉지를 들고 곧바로 주방으로 들어갔다. 소파에 얼어붙은 듯 앉아있던 나는 잠시 후 뭔가를 씻는 물 소리와 도마 위에서 칼이 움직이는 소리와 렌지를 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내는 밥을 짓는 중이었다.
무엇을 해야 할 지,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현관 옆에 놓인 아내의 여행 가방을 무심히 쳐다봤다. 아내가 어딘 가에 갈 때는 반드시 거기 머무는 날 수만큼 속옷을 챙겨 간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문득 아내가 며칠이나 머물기 위해 집에 왔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순간, 아내의 가방 속을 들여다보고 말았다. 속옷은 단 한 벌도 없었다.
투시를 해버렸다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나 지난 뒤였다. 잠시 후부터는 고소한 밥 냄새와 매콤한 양념 냄새가 집안에 가득 차기 시작했다. 나는 가만히 소파에 앉아 있다가 식탁에 수저를 놓는 소리를 듣고 일어나 식탁으로 가서 앉았다. 아내는 다행히 이인분의 식사를 준비했다.
우리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천천히 수저를 들어 밥을 먹기 시작했다. 음식을 씹는 나지막한 소리와 수저가 그릇에 부딪치는 조그만 소리들이 한동안 우리 주위를 떠돌았다. 그리고 나는 어느 순간부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내는 나를 애써 외면하더니 결국 수저를 놓고야 말았다. 나는 식탁에서 일어서 아내 쪽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소리를 내어 펑펑 울었다.
아내는 내가 다시 소파에 누운지 한 시간쯤 지났을 때 가방을 챙겨들고 조용히 현관을 나섰다. 나는 아내에게 등을 보이고 누워 있었는데, 아내의 표정을 보고 싶어서 투시를 시도했지만 이번에는 실패였다. 한참 뒤에 일어나서 책상 서랍에 들어있던 포도주병을 꺼냈다. 아내는 집 안에 머무는 동안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가 가버렸다. 키 작은 남자 일당은 배려랍시고 아주 멍청한 수작을 부린 것이었다. 난 참기 힘들 만큼 화가 났다. 그래도 포도주병 하나를 다 비우자 조금씩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할아버지의 환갑 잔칫날에는 새벽부터 미친 듯이 비가 내렸다. 아침 일찍 우리 집에 모인 친구들과 나는 레드 카펫과 기타 준비물들을 옆에 두고 마루에 앉아 처마에서 주룩주룩 떨어지는 빗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앞마당은 온통 물구덩이가 됐으니 당연히 물구나무서기 행사는 취소였다. 우리는 안도하면서도 어쩐지 아주 조금은 섭섭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때 안방 쪽에서 막 잠에서 깨신 할아버지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서권아 앞마당은 다 젖었응게 마루에서 혀야 쓰겄다.”
“네.”
한창 때 벌교 쪽에서 주먹도 좀 쓰셨던 할아버지는, 본인이 한 얘기는 단 한 마디도 잊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넓은 마루 한 가운데에 특설 무대를 마련하기로 했다. 빨간 이불을 깔 자리와 그 주위로 접근금지선을 설치할 가상의 라인을 결정했다. 접근금지선은 돼지와 메기, 그리고 그날 우리 집에 올 사촌 동생들이 붙들고 있기로 결론 내렸다. 장도리가 갑자기 이불을 펴고 끝에 서서 두 팔을 뻗어 자세를 잡아보더니 내게 눈짓을 했다. 눈앞에 깔린 레드 카펫을 보자 나는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지만, 할아버지가 방에서 나오기 전 마지막 리허설 기회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얼른 자세를 잡고 두 걸음을 디뎌 몸을 뒤집었다.
꽈당.
나는 부엌에서 달려 나온 엄마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 순간 엄마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순간 내 얼굴에 떠오른 표정도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고 엄마도 말씀하신 적이 있다. 엄마는 걱정과 미안함과 동정과 절망과 모자간의 각별한 정이 섞인 복잡한 시선을 나와 교환한 뒤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내가 물구나무서기를 연습해 볼 기회는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아침이 지나자 이른 배로 출발했던 친척 어른들과 동네 노인들이 하나씩 집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사람 하나가 들어올 때마다 머릿속에서 피가 한 방울씩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할아버지는 기분 좋게 손님들을 맞으며 회포를 푸셨다. 이러다가 내 물구나무서기 행사도 그냥저냥 잊혀질 수 있겠다는 기대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우리가 집안 구석에 어정쩡하게 앉아서—이미 내 방은 이모들 차지가 되어 있었다—한두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조금 기분이 나아졌고 왠지 모르게 용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까짓거 하면 되잖아. 다섯 번에 두 번은 됐으니까, 이미 한 번 실패한 걸 빼고 나면 확률은 반반 아냐. 그리고 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게 나쁠 건 없잖아. 이유도 없이 나는 수십 명의 환호와 박수를 받으며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정말 손님들은 많이 왔다. 서울 사는 할아버지의 형제 자매들은 물론이고 큰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들, 고모들, 각각의 애들, 그리고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할아버지에게 큰절을 올리는 수십 명의 또 다른 할아버지들, 게다가 동네 어른들. 나는 어렸을 때 친하게 지냈던 사촌 형인 동구 형이 와준 게 제일 반갑고 힘이 됐다. 중학생인 동구 형은 완전히 어른 같았다. 나는 바쁘게 엄마 심부름을 하느라 점점 오늘 걱정거리가 있다는 것마저 잊어가고 있었다. 그때 장도리가 작은 목소리로 날 불러냈다.
“왜?”
“미안해서 어쩌냐. 갈도 애들이 왔단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갈도 애들이 왔다는 건 북한군이 탱크를 끌고 휴전선을 넘어왔다는 것과 유사한 말이었다. 그놈들은 꼭 일 년에 한두 번은 우리 섬에 와서 패싸움을 거는 악의 화신들이었다.
“그럼 어쩔라고. 지금 나만 두고 간다고?”
메기와 돼지는 미안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지금 마루가 미어터질 거 같은디 그걸 하겄냐? 너까지 가자는 말은 안 할테니께 할아버님 잔치 잘 도와드려라. 이?”
장도리는 갓 입대하는 청년의 표정을 지으며 내 손을 꼬옥 잡더니 나머지 둘을 끌고 번개같이 사라졌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잠시 멍하니 서있었다. 그 순간 뒤에서 할아버지의 커다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서권아! 서권이 어딨냐!”
“예!”
나는 할아버지에게 달려가면서 후들거리는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할아버지는 이미 인사치레로 받은 술 때문에 얼굴이 불콰하게 물들어 있었다.
“서권아 나한테 줄 선물 준비했지?”
나는 한참 만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그거 다섯 시 정각에 받을 테니께, 혹시 내가 까먹더라도 그냥 혀라. 이? 큰 소리로 손님들에게 한바탕 인사 잘 하고 혀야 된다. 알것냐?”
“…….”
“왜 대답이 없냐?”
“네.”
할아버지 주위의 어르신들은 열두 살 난 손자가 무슨 대단한 선물을 준비했나 보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할아버지는 내 눈을 지그시 보더니 그만 가보라고 손짓했다.
나는 십이 년 간 할아버지와 함께 살아온 탓에 할아버지의 그 눈빛이 뭘 의미하는 지 잘 알고 있었다. 그건 거역하면 죽음뿐이라는 뜻이었다. 언젠가 아빠가, 또 언젠가 작은 할아버지가 이런 눈빛의 할아버지를 거역했다가 초상을 치를 뻔했던 사실을 나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원망스러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황급히 사촌 꼬마 애들 둘을 불러 접근금지선으로 마련한 노란 끈을 주며 해야 할 일을 지시했다. 그리고 동구 형에게 달려가 여차저차 사정 얘기를 하고 물구나무서기를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동구 형은 마뜩찮은 표정으로 애매하게 웃더니 하여튼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다섯 시까지 어떻게 시간이 갔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그냥 어떤 몽환상태에 빠져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려 벽시계를 보자 어느 새 다섯 시였던 것만 기억난다.
나는 주섬주섬 일어나서 마루 한 쪽 구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을 몰아내고 거기 빨간 이불을 깔았다. 그리고 그 앞에 미리 준비했던 모금함을 놓은 뒤, 사촌 동생들을 불러 끈을 잡고 양쪽에 서게 했다. 그 다음 글자를 써 넣은 커다란 수건을 벽에 비닐 테이프로 붙였다. 동구형은 어느새 빨간 이불 앞에 나와 앉아있었다.
“걸었노라, 짚었노라, 섰노라……. 그게 뭐야?”
그게 뭔지를 설명하려 하니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심호흡을 한 뒤 이를 악물고 목이 터져라 외치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종도국민학교 5학년 1반 9번 김서권입니다. 제가 지금부터 할 것은 여러분께 물구나무서기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 손님들께서 저의 물구나무서기를 보는 동안 저한테는 완전히 다른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저는 두 걸음을 걸어서 제가 갈 수 없다고 생각했던 곳에 갈 것입니다. 그리고 몸을 뒤집어서 제가 볼 수 없다고 생각했던 세상을 볼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믿든 안 믿든 그게 제가 이것을 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여러분께 의미가 있든 없든 이것은 제게 큰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께서 저의 성공을 빌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렇게 그 전날 친구들과 만든 인사말을 읊었다. 그러나 내가 큰 목소리로 말한 단어는 아마 ‘안녕하십니까’가 전부였던 것 같다. 왜냐면 그 순간 우스꽝스런 복장을 한 아빠와 아빠 친구들이 대문을 들어오며 사물놀이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삽시간에 마루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일어서서 마당 쪽을 보며 박장대소를 하기 시작했다. 사촌 동생들은 노란 끈만 바닥에 남긴 채 어디론가 사라졌고, 사람들이 밀고 밟는 통에 레드 카펫에는 이리저리 주름이 지어졌다. 동구형은 어정쩡하게 서서 발뒤꿈치를 들고 역시 마당 쪽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할아버지 쪽을 보았다.
그런데 정말 기적처럼 수십 명의 손님들 사이로 난 좁은 틈으로, 나와 할아버지는 시선이 마주쳤다. 할아버지는 아빠가 준비한 엄청나게 성공적인 쇼에도 불구하고 내 쪽을 보고 계셨다.
그 순간 나는 두려웠을까? 아니다. 그때 나는 거짓말처럼 마음이 편안하게 가라앉았고 물구나무서기를 반드시 해야 할 이유와 자신감이 생겼다.
나는 주름진 레드 카펫 위로 한 걸음을 옮겼다.
집 앞에 세워진 벤츠에 오르자 노랑머리와 키 작은 남자는 이미 차 안에 타고 있었다. 그들은 내 푸석푸석한 얼굴과 잔뜩 부은 두 눈을 본 뒤, 입에서 풀풀 나는 술 냄새를 맡고는 바짝 얼굴을 굳혔다.
그들이 화를 내는 것이 고까웠지만 아무 말도 않기로 했다. 내 실패만큼 이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것도 없기 때문에 시간이 가면 되는 것이었다.
키 작은 남자가 기침을 몇 번 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조금 높은 톤으로 말했다.
“파출부를 부른 건 그렇다 칩시다. 돌려보내려고 했다가 그래도 서권씨 편의를 봐주려고 놔뒀습니다. 그런데 술은 좀 과한 거 아닙니까?”
나는 멍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었다.
“설마 뭔가 얘길 한 건 아니죠?”
키 작은 남자가 내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나는 한참 동안 대답을 못하고 있다가 간신히 조그맣게 말했다.
“내가 천리안이라는 건 꿈에도 모를 걸요.”
어제 봤던 그 시설 안에는 작은 의자가 놓여있었다. 나는 머리 양쪽에 전극을 연결한 채로 거기에 앉았다. 노랑머리는 내게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와 시각적인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여러 장의 사진들을 보여줬지만, 나는 흘끗 들여다본 뒤 가져가라고 손짓을 했다. 그런 것은 투시 초보 적에나 도움이 됐었다.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가상의 금성과 수성, 그리고 태양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리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나는 그때서야 한 가지를 깨닫고 있었다.
시험대에 올라야 할 이유는 언제나 하나면 족했던 것이다.
평소에 투시를 할 때처럼 나는 두 눈을 떴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금성을 향해 한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수성을 향해 또 한 발을 내딛었다. 마지막으로 태양에 두 손을 짚고 몸을 뒤집으며 태양 뒤를 들여다봤다.
결과는 어땠냐고? 물론 주름진 레드 카펫 위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할 때와 똑같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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