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국(地國)은 땅 밑에 있다. 그 이름이 의미하는바 그대로. 유사 이래로 - 어쩌면 유사 이전에서부터, 인간은 언제나 땅을 내려다보며 기도를 드렸다. 땅속도 하늘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것이 없다는 것이 알려진 후에도, 사람들은 지국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면 무슨 그런 당연한 질문을 하느냐는 얼굴로 땅을 가리킨다. 지국은 어느 시대에든 땅 밑에 있었다. 천옥(天獄)이 어느 시대에든 하늘에 있었던 것처럼.
모든 태어나는 이들은 땅에서 태어난다. 모든 살아가는 이들은 땅에서 살아간다. 모든 죽은 이들도 땅으로 돌아간다. 땅은 삶의 근원이며 터전이며 종착역이다. 어머니들은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땅에서 가까운 곳에서 태어나도록 깊은 지하실에서 해산을 하고, 죽은 자를 보내는 이들은 사랑하는 이들이 조금이라도 더 지국에 가까이 갈 수 있도록 가능한 한 무덤을 깊게 판다. 일상에 지친 사람들은 가끔씩 지하로 여행을 떠난다. 그들은 토굴 속으로 들어가 깊고 어두운 땅속을 몇 시간이나 바라보다가 올라오곤 한다.
왜 사람들이 지하를 동경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건 왜 사람들이 사랑을 하는지, 미워하는지, 외로움을 타는지, 싸우는지, 전쟁을 하는지 묻는 것과 같은 우문(愚問)이다. 옛날에 한 하강전문가가 그 질문에 명쾌한 대답을 내놓았고, 아직 누구도 그보다 현명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땅이 그곳에 있으니까." 나에게 물어봐도 그 이상 가는 대답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하강자(下降者)다. 여러분들이 익히 아시다시피, 하강자란 지하미로를 탐사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지하미로를 처음 발견한 사람들은 2백 년 전쯤에 살았던 이름 없는 광부였다. 물론 지하미로가 파묻혀 있지 않았던 시대도 있었을 것이고 그 이전에는 직접 팠던 사람도 있었겠지만, 그저 기록에 남아 있기로는 그렇다. 한 광부가 굴을 파던 중에 지하로 통하는 오래된 길을 발견했다. 그는 처음에 그것이 고대 왕의 무덤일 거라고 생각했다. 왕들은 곧잘 그런 짓을 하니까. 광부들이 패물을 파낼 꿈에 부풀어 몇 달 동안 흙과 돌을 들어내며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결국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소문을 들은 왕이 조사반을 보내어 길을 모두 들어내었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 뒤로도 그와 비슷한 '길'을 여기저기에서 찾아내었다. 길은 긴 것에서부터 짧은 것, 좁은 것에서 넓은 것,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에서부터 완만하게 내려가는 것, 수십 골로 갈라지는 것에서부터 한 길로 이어진 것까지 제각기다. 길은 어느 한 시대에 만들어진 것도 아니었고, 어느 한 나라에서 만든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대부분 미완성이라고 볼 수 있으며 파다가 중지한 듯한 흔적에서 끝난다. 그리고 하나같이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그 어느 곳으로도 이어지지 않는다.
지하미로가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박해받던 종교인들의 은신처였다든가, 방공호였다는 설도 있고, 무덤이었는데 도굴꾼들이 안에 있는 것을 모조리 훔쳐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혹자는 그것이 전 세계에 걸쳐, 유행처럼 번진 일종의 종교행위였을 거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저 깊은 지하 어딘가에 살고 계실 신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기 위해 땅을 파 내려갔을 것이다. 지국(地國)을 향해서.
* * *
그 길은 '나락(奈落)'이라는 이름이 붙은 길이다. 사람들은 새 길을 발견할 때마다 지금까지 지어진 것 중에서 가장 깊어 보이는 이름을 붙이고 싶어한다. 어떤 길의 이름은 '세상에서 가장 깊은 길'이다(물론 그게 가장 깊은 길은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길보다 깊은 길' 같은 이름도 있다. '나락'은 그나마 잘 지어진 축에 속한다.
그 길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이 길이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에 가장 깊은 길일 거라고 말했다. 모든 사람들이 새 길을 발견할 때마다 같은 말을 하기 때문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나락'으로 내려갔다 온 사람들이 간혹 치를 떨며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이 길이 세상에서 가장 깊은 길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리고 아무도 모를 거다."
'나락'은 아직 아무도 끝까지 내려가 본 적이 없는 길이다. 나락은 인공으로 만들어진 자연굴이다.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어떤 길은 한 사람이 겨우 빠져나갈 수 있을 만큼 좁다. 어떤 길은 사방으로 갈라지는데 길 한번만 잘못 들면 방향을 잃는다. 결이 칼처럼 날카로운 절벽도 있다. 나도 여러 번 도전해보았지만, 결국 천장과 바닥이 칼처럼 삐죽이 솟은 15루트에서 포기하고 말았다. 길을 만들어놓고 내려갈 수 없게 만들어놓는 이유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길이 대피소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적의 침입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무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부장품들을 도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라고 한다(성공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어떤 사람들은 아무나 쉽게 지하로 내려가 신을 만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는데, 그 편이 설득력이 있다.
"그러니까, 내 말 알아들었지?"
민석은 잔뜩 흥분해서 떠들고 있었다.
"내려가는 새로운 길이 발견되었어. 왜 14루트 끝에 있던 호수 있지. 대학 발굴팀이 호수바닥에서 뭐 동전부스러기라도 건질까 해서 잠수해 봤더니, 호수 안에 17루트로 통하는 길이 있더라는 거야. 그 길로 가면 그 끔찍한 15루트와 16루트를 지나지 않아도 돼. 드디어 길이 열린 거라고."
"발굴협회에서 초하(初下: 처음 내려가는 것)를 할 하강자를 모집하고 있어. 이건 흔치 않은 기회라고. 윤형……."
민석은 애원했다.
"내려가자."
나는 아내가 찌개를 들고 와서 조용히 상에 앉는 것을 보고 있었다. 아내는 의자에 앉은 채로 내가 전화를 끊기를 얌전히 기다렸다. 전화기 저편에서 잠시 침묵이 감돌다가 조심스럽게 목소리가 이어졌다.
"왜 그래?"
왜 그래. 온갖 가지 의미가 들어 있는 말이었다.
"너 왜 그래? 저번 하강 때도 안 가겠다고 하더니. 요새 무슨 일 있어? 예전 같으면 네가 더 난리였을 텐데. 이제 하강은 안 할 셈이야? 은퇴한 거야?"
아냐. 이따 다시 전화 할게, 하고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아내의 시선이 불편하게 내 손 위에 꽂혀 있었다.
"갈 거지?"
아내가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아내가 입을 연 순간까지는 조금 망설이고 있던 중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나도 죄지은 사람처럼 조용히 앉아서 밥을 먹었다. 아내는 차를 내왔고, 내가 차를 다 마신 뒤에야 입을 열었다.
"왜들 그렇게 내려가는 거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그런 질문에는 대답할 말이 없다.
"땅속에는 아무것도 없어."
하늘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나는 세상이 둥글다는 것도 알고 있다. 지금은 간단한 계산만으로도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옛날 사람들은 그 사실을 밝혀내기 위해 세상을 한 바퀴 돌아야 했다. 그들은 세상의 반대쪽에서 사람들이 거꾸로 매달려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이 그런 괴상한 사실을 믿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래에 뭐가 있어서 그렇게 파고 내려가는 거야? 땅속에 지사(地使)라도 살아?"
나는 창 밖을 내다보며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반쯤은 반항심에서, 반쯤은 무의식중에 대답했다.
"……응."
"봤어?"
"응."
아내는 적당히 해, 라든가 드디어 미쳤구나, 라든가 농담은 집어 쳐 따위의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그렇겠지. 지사가 땅속이 아니면 어디에 살겠어."
하강자들은 누구나 땅속에서 지사를 보았다고들 한다. 낚시꾼들이 인어를 낚았느니 하는 말과 비슷한 것이다. 동굴박쥐, 바람이 좁은 굴을 지나며 내는 피리소리, 저산소증과 탈수증, 피로가 겹쳐 보게 되는 환각, 환청. 땅속에서 지사를 볼 수 있는 방법은 많다. 내가 본 것은 그저 평범한 종류였다.
그날 나는 동료들과 한참 떨어져 혼자 하강하고 있었다. 그 길은 최근 지진으로 반쯤 내려앉아 있었다. 관리청에서는 길을 폐쇄한다는 결정을 내린 지 오래였고, 나는 다시는 이 길을 볼 수 없다는 생각으로 조급해하고 있었다. 게다가 나는 막 흙에 묻혀 있던 길을 발견한 참이었다. 좁은 길을 얼마나 내려갔을까. 문득 저 아래에서 하얀 것이 흔들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처럼 보였다. 손에는 지팡이 같은 것이 들려 있었고, 머리에는 다섯 개의 탑이 솟은 관을 쓰고 있었고, 긴 천으로 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가 손을 들어 나를 향해 손짓했다. 나는 뭣에 홀린 것처럼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치며 허겁지겁 땅을 굴렀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건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지사도 아니었다. 누군가 벽에 횟가루로 그려놓은 그림이었고, 그게 내 헤드랜턴 불빛에 비쳐 흔들리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그래, 지사가 당신 보고 뭐래?"
나는 멍한 기분으로 그림을 올려다보았다. 그림의 옆에는 하강자들의 기호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 내려가라.
"당연히 그렇게 말하겠지. 유령들이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원하는 건 하나밖에 없잖아? 얼른 죽으라는 거지. 저승으로 내려와서 죽으라는 거잖아."
아내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내게 달려들어 주먹을 날렸다. 다행히 딱히 아프지 않은 주먹이었다. 아내는 내 머리, 가슴, 어깨 할 것 없이 마구잡이로 한참을 패더니, 내 품에 쓰러져 울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 미안한 마음에 아내를 안았다.
"가. 어서 가버려. 부탁이니 이젠 다시는 돌아오지 마."
나는 그곳에서 병을 얻었다. 올라오는 도중 헤드랜턴이 꺼졌고, 나는 그 안에서 길을 잃었다. 동료들이 내가 먼저 돌아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구조가 늦었다. 나는 사흘 만에 구조되었고 발견되었을 때에 폐수종으로 죽기 직전이었다. 올라온 뒤에도 폐는 낫지 않았다. 의사는 다시는 지하에 내려가지 말라고 했다. 그랬다간 금방 죽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내려가지 않으면 그보다는 조금 더 오래 살 거라고 했다.
그림을 보러 뛰어 내려간 것을 후회해본 적은 없다. 내가 후회하는 것은 하나뿐이다. 어차피 다시 지하로 갈 수 없게 될 것이었다면, 왜 그때 더 깊이 내려가지 않았을까. 왜 구조를 기다리며 사흘을 낭비했을까. 그게 마지막 하강인 줄 알았다면.
* * *
'나락' 입구에는 눈도 제대로 뜰 수 없는 모래바람이 불고 있었다. 여기에서는 언제나 바람이 분다. 바람 때문에 지표의 흙은 다져질 틈이 없다. 제대로 압력에 눌리기도 전에 바람이 쓸어가 버리기 때문에. 산은 이쪽에 나타났나 싶으면 다음날이면 저쪽에 나타난다. 지상에 세워진 건물은 잠깐 방심하는 사이에 모래에 묻혀버린다. 바람이 부는 건 세상이 미친놈마냥 돌고 있기 때문이다. 극지방의 중력이 낮은 이유도 세상이 극점을 축으로 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괴상한 사실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데도 역시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길은 처음에 사람이 발을 들여놓으면 허한 소리를 내며 운다. 바람이 길을 통과하며 내는 소리다. 얼음처럼 차가운 습기가 몰려오고, 동굴박쥐와 풀 이끼들이 첫인사를 한다.
그 시간이 지나면 고요가 찾아든다. 땅속에는 시간도 소리도 없다. 적막 속에 잠겨 있노라면 영혼에도 고요가 찾아든다. 지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졌다는 해방감. 어머니의 품속에 안겨 있는 듯한 안락함. 이 길이 영원히 이어졌으면 하는.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곳까지 이어져 내려가기를 바라는 소망. 지반이 무너지거나 가스가 새어나와 목숨을 앗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는다. 한편으로, 그런 것에는 어떤 의미도 없었다.
생명의 신비란 오묘한 것이라, 그 어둠 속에서도 가끔 살아 있는 것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헬멧의 헤드랜턴을 움직이면 눈도 색깔도 없는 하얀 동물들이 인간의 기척을 느끼고 돌과 돌 사이로 숨어들어간다. 완전한 적막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움직임은 수면에 떨어진 돌처럼 영혼을 일깨운다.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고 우리도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는 이 길이 마음에 들었다. 모든 길에는 고유한 목소리가 있다. 어떤 길은 오만하다. 어떤 길은 성깔이 있다. 어떤 길은 수줍어하고, 어떤 길은 허영심이 강하다. 호수 뒤에서 나타난 길이 내는 소리는 하나밖에 없었다. "깊이. 더 깊이."
이 길을 판 사람은 어떻게 하면 적은 노력으로 더 깊이 팔 수 있을까 하는 생각밖에는 하지 않았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암반이 무른 곳을 택했다. 길은 중간 중간 인부나 장비를 쉬게 하기 위한 공간을 마련한 것을 제하면 대부분 두세 사람이 겨우 빠져나갈 정도로 좁고, 대부분 수직으로 파여 있다. 수평으로 이어지는 길은 길을 늘리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아래로 팔 수 있는 지점을 찾아 여기저기 헤맨 것이다. 이 길이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기적이었다.
그만큼 길도 위험했다. 줄사다리를 쓰지 않고는 내려갈 수 없는 길이 많다. 사다리란 그냥 늘어뜨려서는 수직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사다리에 매달리게 되면 사람의 무게 때문에 줄이 움직인다. 줄이 움직이면 떨어질 가능성도 높거니와 암반에 쓸려 줄이 상하게 된다. 보통은 가장 먼저 내려가는 사람이 사다리를 벽에 고정시키는 작업을 하는데, 벽이 물러서 그것도 잘 되지 않았다.
승준이 제일 먼저 사고를 당했다. 내가 줄사다리를 잡고 있는데 사다리가 갑자기 활처럼 휘며 솟구쳤다. 드르륵 하며 벽을 긁는 소리가 나더니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려가 보니 승준이 발목을 잡고 끙끙거리고 있었다. 피가 흥건했다. 넘어지면서 날카로운 바위가 피부를 찢어놓은 모양이었다. 우리는 지팡이를 부러뜨려 부목을 대었다.
"농담이 아니니까 내려가."
승준은 말했다.
"좀 쉬었다가 나 혼자서 올라갈 테니까. 나중에 나 때문에 하강을 망쳤느니 뭐니 하면 가만 안 두겠어."
하강자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은 체력이 아니라 계산력이다. 하강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하강할 때가 아니라 하강을 끝내고 돌아갈 때이기 때문이다. 같은 길이라도 내려가는 길과 올라가는 길은 다르다. 하강자는 자신이 지나온 길을 머릿속에서 역순으로 그려볼 줄 알아야 한다. 하강이 어려운 이유는 그래서다. 부상의 위험은 늘 있는데, 부상자를 데리고 올라가는 게 난관이다. 부상 그 자체보다 부상을 입고 올라가는 과정에서 상처가 악화된다.
체력의 한계까지 내려간다는 것은 올라가지 않겠다는 의미와 같다. 체력의 한계를 미리 예상하고 그 이전에 하강을 끝내야 한다. 올라갈 길을 예상하고 유적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로프를 걸어놓고 발판을 만들며, 길을 닦으며 내려가야 한다. 무엇보다도 어려운 일이다.
승준을 끌고 올라가기 위해 두 명이 남았다. 내려가던 중 또 한 명이 길 사이에 끼어 전신타박상을 입는 바람에 또 두 명이 남아야 했다. 누가 남을지 서로 눈치를 보고 있는데 민석이 내게 슬쩍 말을 건넸다.
"네가 남는 게 어때?"
"왜?"
나는 날카롭게 물었다.
"너 아까부터 기침이 심해. 오랜만에 하강하는 건데 너무 무리하는 것 같아. 이쯤에서 쉬는 게 어때?"
"싫어."
나는 민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했다. 어린애가 식탁 앞에서 엄마한테 '싫어. 난 양파는 안 먹어.' 하는 말이나 비슷하게 들렸을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딴청을 피웠다. 동료들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려가고 싶은 건 누구나 마찬가지야. 누군 부상자 업고 올라가는 게 편한……."
한 명이 나서서 막 싸움이 일어나려는 것을 말렸다.
"좋아. 좋아. 양보해주자고. 이 친구 오랜만이잖아. 내가 이쯤에서 기권하겠어. 솔직히 올라갈 생각을 하니 정신이 아득해."
결국 나와 민석과 문혁이 남아서 하강을 계속했다.
지하란 숨을 쉬기 힘든 곳이다. 산소는 가벼운 기체다. 내려갈수록 산소는 희박해진다. 보통 사람들뿐 아니라 경력 있는 하강자들도 지하병(地下病)이라 불리는 각종 증상을 일으킨다. 내 기침이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고 하강자들은 보통 자기가 그만두겠다고 하지 않는 이상 기침을 하고 있든 경련을 일으키고 있든 내려가는 것을 용인해준다. 결국 어디까지 내려갈지는 자신이 선택할 문제기 때문이다.
하강을 한 지 25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우리는 잠도 자지 않고 거의 먹지도 않았다. 잠을 자지 않은 이유는 산소가 부족한 곳에서 까닥 잘못 잠들었다간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먹을 것을 아낀 이유는 올라갈 때가 훨씬 힘들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많이 내려왔어."
문혁이 기침을 하며 말했다.
"난 벌써 체력이 바닥이야. 슬슬 올라갈 자신이 안 생겨. 이제 그만 올라가야 해."
민석이 마찬가지로 기침을 하며, 마찬가지로 기침을 하고 있는 나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생각해? 내 계산으로도 이미 한계 이상은 내려왔어. 어려운 길을 너무 많이 지나 왔어. 확보도 많이 안 했고. 올라가는 데엔 평상시보다 시간이 더 걸릴 거야."
나는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지금까지 우리가 내려온 길이 막막한 어둠 속에 떠올라 있었다. 현기증이 일었다. 나는 얼른 아래를 보았다.
"둘이 올라가. 난 좀 더 내려가 볼 테니까."
작은 소요가 일었다. 민석과 문혁이 얼굴을 마주보았다.
"혼자서는 못 내려가."
"전에도 많이 해봤어."
"그거야 닦은 길일 때지. 초하(初下)를 혼자 하는 경우는 없어."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위를 올려다보았다가는 기절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검은 길이 죽음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 금세라도 하얀 이빨을 들이대고 나를 집어 삼킬 것만 같았다.
"어쨌든 난 내려가겠어. 올라갈 생각이면 둘이 올라가."
민석과 문혁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문혁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올라가는 시간을 최소 두 배로 잡는다고 해도 이틀은 걸릴 거야. 만 삼일을 새는 거야. 자신 있어?"
"어쨌든 난 내려가겠어."
나는 거의 듣지도 않고 대답했다. 민석이 어깨를 들썩하며 말했다.
"조금만 더 내려가 보자. 지금까지 내려온 거리로 봐선, 어차피 길이 더 이상 이어지진 않을 거야. 여기까지 와서 끝을 보지 않았다는 건 창피한 일이야."
민석의 말이 맞다. 땅은 내려갈수록 단단해진다. 지압이 땅을 강철보다 단단하게 만든다. 사람의 기술로는 - 당연히 고대의 기술로도 - 어느 이상 파 내려갈 수가 없다. 길이란 한계가 있다. 설사 그 강철 같은 땅을 뚫었다고 해도 한계는 어차피 온다. 중력 때문이다. 중력이 거대한 돌처럼 등에 얹힌다.
"괴물 같은 자식들. 힘이 남아도나 보군."
문혁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말했다.
"나중에 죽겠느니 어쩌니 하기만 해봐."
"안 해."
'그러니까. 양파는 안 먹는다고.' 나는 또 그 비슷한 말투로 말했다.
문혁은 10분을 더 하강한 뒤에 올라왔다. 베이스캠프에서 무전이 온 뒤였다. 우리는 문혁이 올라가고 싶어서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설마."
"농담이 아냐. 베이스캠프에 방금 약한 지진이 있었다는데."
나는 본능적으로 아래를 보았다. 길의 끝이 아직도 보이지 않았다. 문혁은 비장한 얼굴로 우리 둘을 보고 있었다.
"우리 왔던 길 기억나지? 암반이 형편없이 물렀어. 길이 무사하리란 보장이 없어."
민석이 나를 돌아보았다.
"올라가야 해."
"둘이 올라가."
"너 왜 이러는 거야?"
민석이 내 멱살을 잡았다.
"너 혼자만 영웅이 되고 싶어서 이래? 누군 내려갈 줄 몰라서 안 내려가는 줄 알아?"
나는 심하게 기침을 했다. 민석이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놓았다.
"합당한 이유를 대봐. 그럼 같이 가줄 테니까."
"약한 지진은 보통 한 번으로 끝나."
"다른 이유."
"위험하긴 마찬가지야(기침). 올라가는 데 이틀은 걸릴 거고, 지진이 올 거면 어차피 우리가 길속에 있는 동안에 올 거야. 그러느니 내려가겠어. 이건 정말로 내가 내려간 것 중에 가장 깊은 길이야. 역사에 남을 길이라고. 지진 때문에 암반이 약해져서 다시는 내려오지 못하게 되느니,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내려가겠어."
되는대로 한 말이었다.
그래도 대충 '합당한 이유'로 들린 모양이었다. 민석이 머리를 잡고 고민하다가 문혁에게 말했다.
"내려가자."
"농담하지 마."
"정말로 길은 금방 끝날 거야. 초하를 혼자 시킬 순 없어."
"죽을 거면 혼자 죽으라고 해. 난 올라가겠어."
민석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문혁은 장비를 나누기 시작했다.
"됐어. 길은 다 닦아놨으니까. 캠프에 연락해서 사람을 내려 보내라고 하겠어. 길을 닦아놔서 훨씬 속도가 빠를 테니까 곧 합류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올라간 다음에 시간이 남으면 너희를 구조하라고 일러둘게."
문혁은 배낭을 메고 로프에 매달리며 말했다.
"누가 내려오려 할지는 모르겠지만."
민석은 문혁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녀석이 다 풀어놓은 짐을 다시 배낭이 무겁지 않은 배치로 쌌다. 민석이 하나 남은 무전기를 내게 내밀었다.
"갖고 있겠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무거워서 싫어."
민석은 무전기를 자기 허리에 찼다. 다시 기침이 몸을 뒤흔들었다. 나는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두 시간을 더 내려갔지만 길은 끝나지 않았다. 대신 지금까지 내려온 길과 완전히 다른 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두 개의 길이 합쳐진 것으로, 이전에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이미 있는 길을 다른 시대에 다시 이어 내려갔거나, 혹은 서로 다른 곳에서 파 내려간 길이 우연히 서로 만난 것이다.
그 길은 지금까지 내려온 길과 완전히 다른 길이었다. 그뿐 아니라, 내가 지금까지 보아 왔던 그 어떤 길과도 달랐다. 길의 폭, 벽을 다진 방법, 파 내려간 방법, 지지대를 세운 방법, 동물의 배설물과 화석. 그런 것들을 보면 길을 만든 시대와 나라를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 길이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길은 높이와 폭이 각각 1미터 20센티미터 정도의 매끈한 아치형 통로였고, 너무나 매끈하게 뚫려 있어 길이라기보다는, 애초에 땅이 그렇게 생겨먹었던 것처럼 보였다. 사방이 벽돌로 메워져 있었는데 벽돌은 기계로 끊어낸 것처럼 정확한 크기를 하고 있었고, 벽돌과 벽돌 사이는 결이 고운 진흙으로 메워져 있었다.
"뭘 보고 있어?"
내가 물었다. 민석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마른 낙엽 같은 것을 주워들고 보고 있었다.
"개구리 화석. 개구리가 어디에 살지?"
"땅 위에."
내가 대답했다. 민석이 어깨를 으쓱했다.
"봐. 옛날엔 아마 이 길이 지상까지 이어져 있었을 거야. 윗부분은 마모되어 없어지고, 지하에 묻힌 부분만 남아 있었는데, 다시 다른 곳에서 땅을 파기 시작하다가 우연히 서로 만나게 된 거야. 기막히지 않아?"
유명한 일화가 있다. 전설로만 알려진 도시가 진짜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한 부자가 무턱대고 땅을 파내려갔다. 그는 땅 속에서 양파껍질처럼 층층이 쌓인 아홉 개의 도시를 발견해내었다. 도시 아래에 도시가 있었고 또 그 아래에 도시가 있었다. 도시와 도시의 간격은 겨우 수백 년에 불과했다.
"지금까지 내려온 게 석기시대에 판 굴이라면 이건 예술작품이라고 불러도 되겠는데. 뭐, 건축 기술이 늘 발전하는 건 아니라고 해도……. 그렇다고 해도 굉장해. 길도 매끈하고. 복잡하지도 않아. 이 길을 만든 사람들은 내려가는 걸 별로 신성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야. 이것 봐. 아치 양쪽이 정확히 비율이 같아."
길은 몸이 낄 염려는 없었지만, 똑바로 설 수도 없고, 몸을 돌리기도 어려웠다. 내려가려면 기어갈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인간은 네 발로 걷도록 진화되지 않았다. 옛날 사람들이 몸이 작았던 건지 아니면 발로 걷지 않는 이동수단을 알고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해할 수가 없어."
한참 살펴보던 민석이 말했다.
"폭이 좁을 수는 있어도 높이가 낮을 수는 없어. 대체 무슨 수로 공사를 했을까? 허리를 이렇게 굽히고 들어가야 하잖아. 그런 상태로 오랫동안 작업을 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
내 머릿속에 괴상한 생각이 떠올랐지만, 말했다간 비웃음을 당할까봐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기계를 써서 작업했다면, 얼마든지 가능했겠지. 아니면, 원래부터 땅에 구멍이 뚫려 있었거나. 아니면, 원래부터 가로 세로 1미터 20센터미터인 거대한 사각 파이프 같은 길을 다른 데서 만들었다가 기중기로 땅 속에 집어넣는다면. 2, 3천 년 전에 말이지. 그리고 이동이야 뭐, 작은 자동차 같은 것에 앉아서 내려가면 이 정도 높이라도 상관없겠지. 2, 3천 년 전에 말이지.
"왜 그런 이야기 있지. 오랜 옛날에는."
"우리보다 훨씬 발달한 문명이 있었다는 것?"
민석이 웃었다.
"그렇게 발달한 문명은 아니었을 거야."
"왜?"
"생각해봐. 종교적인 이유에서 원시사회가 지하로 길을 뚫는 건 이해할 수 있는 일이야. 하지만 발달한 문명의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아무것도 없는 지하로 길을 뚫겠어?"
맞는 이야기였다.
우리는 기록을 남기기 위해 그곳에 좀 더 머물렀다. 사진 찍기에 좀 더 좋은 각도를 찾던 나는 먼지에 묻혀 있는 흔적을 보고 발을 멈췄다. 벽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일단 먼지를 털어내기 전의 사진을 찍은 뒤에 벽을 손으로 문질러 보았다.
하얀 그림이 먼지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나는 멍하니 벽을 응시했다. 한 손에 지팡이를 들고 드레스를 입은 하얀 사람의 그림을 그린 그림이었다. 내가 갇혀 있던 사흘 동안 꿈에서도 보고 눈을 뜨면 보고, 잠이 들기 전에 보았던 바로 그 그림이었다. 내가 눈을 떼지 못한 것은, 그 그림이 같은 그림이라서가 아니었다. 그건 다른 사람이 그린 그림이었다. 다른 사람이 같은 것을 그린 그림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완전히 다른 곳에서, 서로 다른 사람이 우연히 똑같은 그림을 그리는 일이 가능할까? 이 그림은 상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란 말인가? 무엇인가를 보고 - 이 그림의 모델이 될만한 무엇인가를 보고 - 그린 것이란 말인가? 무엇인가가, 이 그림을 닮은 어떤 것이, 실제로 존재한단 말인가?
"뭐야?"
민석이 다가와서 물었다. 내 옆에서 한참 그림을 보던 민석이 흥미로운 얼굴로 말했다.
"이거 굉장한 발견인걸. 길을 만든 사람이 그린 걸까, 아니면 먼저 왔던 하강자였을까? 하강자였다면 교양이 없는 녀석일세. 벽에 낙서를 해놓다니. 그런데 옆에 그려진 이 조그만 파란 동그라미는 뭐지?"
나는 벽을 더 걷어내었다. 벽에는 어느 나라의 것인지, 혹은 어느 시대의 것인지 모를 문자가 쓰여 있었다. 나는 그 가운데서 하강자의 기호를 찾아내었다.
- 내려가라.
내려가라. 이건 비겁한 일이다. 그림에게는 왜요, 하고 묻거나, 싫은데요, 하고 대답할 도리가 없다.
"내려가자."
내가 말했다. 민석이 나를 쳐다보았다.
"농담하지 마. 올라가서 새 길을 발견했다는 걸 알리는 게 먼저야."
"새 길을 눈앞에 두고 돌아가자는 거야?"
"네가 뭐라고 하던 둘이서 내려가는 건 무리야. 일단 돌아가서 길을 발견했다는 걸 알리고 팀을 다시 정비해서 와야 해."
"조금만 더."
나는 떼를 썼다.
"네 말로도 길이 금방 끝날 거라고 했잖아."
"그거야 내려가는 경우지. 수평이라면 길은 한없이 팔 수 있어. 상황이 달라."
"뒤에 다시 내려와 봤더니 정하(頂下 : 가장 낮은 곳)가 눈앞이었다면? 정하를 코앞에 두고 돌아가서 최초의 정복을 다른 팀에게 빼앗겼다고 놀림 받고 싶어?"
민석은 한참 나를 노려보다가 대답했다.
"조금만이다."
단조로운 좁은 길을 기어간다는 것은 생각보다도 더 힘들었다. 팔꿈치 신발과 무릎 신발을 준비했을 까닭이 없기에 한 시간이 지나자 팔꿈치와 무릎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땅을 짚을 때마다 죽을 것 같았다. 두 시간쯤 갔을까, 미세한 진동이 땅을 훑었다.
"돌아가야 해."
민석이 뒤에서 헉헉거리며 말했다.
"내말 들려? 이렇게 좁은 길에서 낙석이라도 떨어졌다간 꼼짝 못하고 생매장이야."
"조금만 더."
내가 콜록거리며 말했다.
"너 상태가 정상이 아냐. 아무래도 지하병인 것 같아. 더 있다간 위험해. 내 말 들려?"
"조금만 더."
"아까부터 대체 왜 이래? 너 올라갈 생각이 있긴 한 거야?"
나는 그만 퍼뜩 놀라 민석을 돌아보고 말았다. 민석이 당황하고 있는 내 눈을 보았고, 동시에 내 눈 속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 말았다. 민석이 한참동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더니, 얼굴이 불처럼 달아올랐다. 눈썹이 끝까지 치켜 올라간 민석이 소리를 지르며 내게 달려들었다.
"이 미친 자식, 어서 나와!"
민석은 내 다리를 잡아당겼고, 나는 거칠게 민석을 발로 찼다. 발로 찬 뒤에야 정신이 들어 친구를 돌아보았다. 민석은 피가 흐르는 입술을 붙잡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맘대로 해. 이 미치광이. 내려가고 싶으면 너 혼자 내려가!"
민석은 돌아서 나가기 시작했다. 민석을 따라 나가야 했다. 나가서 미안하다고 해야 했다. 이성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몇 걸음쯤 더 내려가는 게 뭐 그리 큰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10분 정도야 따라잡을 수 있을 거고, 민석을 붙잡고 사과하면 될 것이다. 몇 걸음을 더 내려간 뒤에는 또 몇 걸음을 더 내려갔다. 15분 정도는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20분 정도는……. 그러다 보니 이젠 어차피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방에서 굉음이 들린 것은 그때였다.
벽과 천장과 바닥이 다 흔들렸다. 천장에서 벽돌이 흙먼지와 함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몸을 굴렸다. 한참 뒤에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흙무더기 밖으로 나와 있었다. 나는 한참동안 기침을 한 뒤에 고개를 들었다. 살아 있었다. 하지만 의문이 생겼다. 민석도 그렇게 생각할까? 나는 벽을 손으로 파보았다. 소용이 없었다. 흙이 천장까지 쌓여 있었다. 판 만큼 다시 흙무더기가 쏟아졌다.
한참 뒤에야 저쪽에서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 살아 있어? 이봐!
민석이었다.
- 살아 있어.
나는 좀 확신하지 못한 상태로 대답했다. 침묵이 이어졌다. 민석도 나처럼 벽을 파낼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한참 뒤에 다시 민석이 벽을 두드렸다.
- 무전기가 닿지 않아.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 올라가서 구조대를 데리고 다시 오겠어. 꼼짝 말고 있어야 해. 알았어?
- …….
- 대답해!
- ……그래.
민석이 사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억눌려 있던 피로가 덮쳐왔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조금 쉬었다. 조금 앉아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동시에 기침이 같이 터졌다. 나는 한참 죽을 것처럼 기침을 한 뒤에 산소통을 입에 대고 몇 번 호흡했다. 그리고 다시 웃었다. 나는 제정신이었을까?
나는 어느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할지 알고 있었다. 방향을 틀 시간도 상황을 판단할 시간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바깥이 아니라 안쪽으로.
죽으려고 이미 작정했는데 의식하지 못하는 수도 있는 모양이다. 아니, 의식하고 있었다. 나는 올라갈 수가 없었다. 하강자는 자신이 내려온 길을 역순으로 계산할 수 있다. 올라가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내 체력이 얼마나 버텨줄지 예상할 수 있다. 나는 겨우 서너 시간 만에 내가 혼자 힘으로는 다시 올라갈 수 없는 지점을 지나버렸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내려가겠다고 밖에 말할 수가 없었다. 올라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얼굴을 가렸다. 나는 사기꾼이다. 올라가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여기까지 왔다. 동료들 모두를 속이고.
나는 잠시 쉬며 내려온 길을 머릿속으로 다시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갔다. 하강자들이 흔히 하는 놀이다. 민석이 캠프까지 갔다가 오는 데는 최소한 사흘이 걸릴 것이다. 이 길을 뚫는 데는 또 하루가 걸릴 것이다. 배낭에 있는 남은 식량은 둘째치고라도, 내가 이 안에서 사흘을 버틸 수 있을까? 이미 산소량은 지상의 반도 되지 않았다. 지하병은 갑자기 들이닥친다. 나는 하루 만에 사망할 수도 있었다.
나는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벽이 웃으며 속삭였다. '이제야 우리 둘이네.'
'그래.'
'이제 방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어서 와.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어. 자, 어서.'
길은 아름다운 여인처럼 요염한 자태를 흐느적거리며 유혹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흔히 보았다고 하는 지사란, 혹시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동료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아마 지금도 울고 있을 아내에게도.
- 내가 후회하고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
그때, 그것이 마지막 하강인 줄 알았더라면, 왜 더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을까. 왜 구조를 기다리며 시간을 낭비했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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