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FI

사랑, 그 어리석은

소설가

2010년 2월 통권 53호




‐ 알파벳 시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성별을 알 수 없는 금속성 기계음이 선언한다.

‐ 입국, 심사, 시작합니다.

나는 빨간 불이 반짝거리는 화면에 손바닥을 갖다 댄다. 기계가 삐빅, 하고 내 손을 읽는다.

‐ 이름.

기계는 질문하고 손가락의 지문과 손바닥의 장문(掌紋)으로 내 신체정보를 읽어 들여 스스로 자기 질문에 답변한다.

‐ 연령.

‐ 성별.

‐ 출생, 연, 월, 일.

‐ 개인 식별 번호.

나는 기계가 혼자 문답 놀이를 하는 것을 지켜본다. 기계가 갑자기 묻는다.

‐ 이상, 신상, 정보, 정확합니까?

나는 간단하게 대답한다.

“예.”

기계가 다시 혼자서 문답 놀이를 시작한다.

‐ 혈액, 견본, 확인, 완료.

‐ 유전자, 정보, 확인, 완료.

‐ 지문, 장문, 정보, 확인, 완료.

‐ 안면, 인식, 확인, 완료.

‐ 입국, 목적.

‐ 인권, 복지, 실태, 연구.

‐ 정확합니까?

기계가 다시 문답 놀이에 돌연히 나를 끼워 넣는다. 나는 대답한다.

“정확합니다.”

기계가 말한다.

‐ 72시간 적응기, 시작합니다.

나는 기다린다.

기계가 반복한다.

‐ 적응, 기간, 진행 중입니다.

나는 기다린다.

브로커는 틀림없다고 했지만, 조금씩 초조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앞으로 72시간을, 이 플라스틱 상자 속에서 살면서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 말이 좋아서 ‘적응기’지 결국은 신원 조회가 목적인 것이다.

‐ 적응, 기간, 진행 중입니다.

나는 빨간 불이 반짝이는 화면을 들여다본다.

지금 이 기계가 처리 중인 정보는 그 어느 것도 내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으로 불안해하는 건 아니다. 믿을 만한 브로커한테서 정당한 값을 주고 산 정보다. 그러니까 뭐 하나라도 틀어지면 내 잘못이라기보다는 그 브로커 탓인 거다. 불법이라고? 그건 나도 알지만, 이런 짓도 다 이유가 있어서 하는 거다. 

그러니까 나한테 정말로 중요한 건 그 이유다. 돈 때문이냐고? 천만에. 그런 저질스럽고 세속적인 이유였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다. 나는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다. 사실은 저 멍청한 기계가 아니라 진짜 사람이, 내 말을 알아듣고 나를 이해해줄 만한 인간이 입국 심사대에 앉아 있었다면 나는 주저 없이 당당하게 진짜 입국 목적을 밝혔을 것이다. 사랑 때문이라고. 나는 사랑하는 여자를 찾으러 왔노라고.

그러나 저 멍청한 기계가 그걸 이해할 리 없다.

나는 여전히 빨간 불이 꺼지지 않는 화면을 들여다본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하늘이 정해준 인연이니 평생을 같이 할 짝은 만나는 순간 알아볼 수 있다느니 하는 얘기들을 믿지 않았다. 그런 건 혈액형 점이나 별점 따위를 좋아하는 무뇌충 같은 여자들이 퍼뜨린 헛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를 처음 만난 순간 그런 이야기들이 사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게다가 그녀와의 만남은 순전한 우연에 의지하지 않았다. 무려 국가가 정해준 공식적인 인연이었다는 거다. 이런 점에서 내가 겪은 모든 일들, 그 말로 할 수 없는 고생과 공개적인 모욕의 모든 책임은 근본적으로 알파벳 시티에 있다고 해야겠다. 이걸 당국에다, 그리고 법정에서 몇 번이나 설명했는데도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받아들여지기는커녕 즉시 추방 및 재입국 영구금지 판결이 내려진 건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웃기는 일이다. 이 모든 걸 겪은 뒤에, 이번엔 진짜로 감옥에 갈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사실 자체가 내 사랑의 깊이를 증명해주지 않느냐고 나는 주장하고 싶단 말이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찬찬히 설명하자면 이런 거다. 그녀는 처음 알파벳 시티에 도착했을 당시 나의 ‘상담자’였다. 내가 그녀를 선택한 게 아니고, 처음 이주하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미치지 않고 적응할 수 있도록 알파벳 시티 당국에서 배정해주는 안내인 겸 보모 겸 온라인 친구 같은 것이다. 

그녀와 나의 인연은 그래서 원래는 내가 도착한 후 15일간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15일이 지난 후에도 나와 연락을 끊지 않았다. 그 자체가 그녀 또한 나를 사랑한다는 증거가 아니냐 말이다. 물론 이주자가 최초의 ‘상담자’와 계속 친구로 지내거나 ‘상담자’가 초기 적응 기간이 끝난 뒤에도 가끔 안부 확인을 하는 건 흔한 일이라고들 하지만, 나에 대한 그녀의 관심과 배려는 그렇게 흔한 차원이 아니라는 걸 이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를 못 하는 모양이다. 내가 상담이라는 걸 처음 해보는 초짜도 아니고, 이래봬도 각 잡고 진지한 정신과 진료에 이런저런 약물 치료까지 산전수전 다 겪어봐서 이제는 웬만한 삼류 대학 나온 정신과 의사보다 내가 더 잘 아는 수준까지 됐기 때문이다. 애초에 알파벳 시티까지 흘러 들어오게 된 것도 결국 이 모든 상담이 실패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지막으로 택한 곳이 아니었냐 말이다. 그리고 그 최종 선택지에서 나는 일생일대의 ‘상담자’를, 내 평생의 반쪽을 드디어 만난 것이다.


그녀를 만나기 전의 내 인생은 엉망진창이었다. 불행한 가정사 ‐ 폭력적인 알코올중독자 아버지와 집착적 수동공격형 성격의 어머니가 나의 어린 시절에 남긴 지울 수 없는 상처들은 평생 어디를 가나 내 발목을 잡았다. 뒤틀린 부모와의 관계 때문에 나는 언제나 사람들을 경계했고, 인격이 형성되는 어린 시절에 타인에 대한 적절한 신뢰를 형성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성인이 된 후에도 다른 사람들과 장기적으로 의미 있는 깊은 관계를 맺지 못했다. 이 때문에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한 곳에 오래 발을 붙이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나는 본래 사회에서 규정한 조직이라는 곳에 네에, 하고 적응하는 성격이 못 된다. 조직이란 어디나, 새로 들어오는 사람을 단지 새로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차별하고, 게다가 힘없고 빽 없는 나 같은 사람들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이 있어도 밑바닥에서 쓰레기나 줍도록 강요하는 비효율적이고 억압적인 곳이기 때문이다. 나처럼 내 능력을 충분히 자각하고, 게다가 비효율이나 부정부패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은 발붙일 데가 없는 것이다.

가까운 예로 내가 알파벳 시티까지 쫓겨 가기 직전에 일했던 회사를 들 수 있다. 아니 사실은 회사라고 하기도 좀 웃긴다. 사원이라고 해봐야 다 합쳐서 열 명도 안 되니 말이 좋아 ‘문구류 수입․ 판매회사’지 동네 문방구점이나 다를 게 없는 곳이었다. 거기서 품질 관리인지 재고 관리인지 하여간 뭔가 관리한다는 그 여자, 자기 말로는 경영학과 나왔다지만 일하는 꼴을 봐서는 고등학교나 제대로 나왔는지 의심스러웠는데, 그래도 손톱만한 사무실에서 자기는 상사고 나는 부하직원이라고 굉장하게 행세를 해 대다가 제품번호 몇 개 잘못 입력된 거 지적해줬더니 금시로 풀이 죽어서는 그 뒤로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내 뒤를 졸졸 따라 다녔다. 꼭 내가 복도에 혼자 나와 있을 때만 따라와서 말을 거는 수작하며, 할 말이 없으니까 괜히 금연 건물이 어쩌고 해대면서 건강을 위해 담배 피우지 말라는 뻔한 얘기나 끄집어내서 땍땍거리는 게 누가 봐도 내 관심을 끌려고 애쓰는 모양새였는데, 그게 귀여워서 나도 좀 친하게 대해줬더니 이게 사장한테 대뜸 성희롱입네 하고 일러바친 거다. 아니 자기가 먼저 복도에 아무도 없는 거 확인하고 은근슬쩍 다가와서는 얼굴을 바짝 들이댔으면서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고. 그리고 서로 호감을 느끼는 사이라면 키스하면서 남자친구가 가슴 정도 만질 수도 있는 거 아닌가? CCTV에 제가 먼저 다가와서 말 걸고 수작부리는 것부터 모두 다 찍혔는데 도대체 어째서 그 덜 떨어진 여자는 그게 전부 내 잘못이라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사장이 그 여자뿐만 아니라 나까지 잘라버렸다는 점은 말할 것도 없고, 억울한 마음을 누를 길이 없어서 법정까지 가서 당당하게 시시비비를 밝혔는데도 전부 내 잘못이라는 판결이 나온 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비효율적이고 정당하지 못하며 억압적인 사회라는 조직의 본성을 드러내는 일화인 것이다. 

그렇다, ‘일화’일 뿐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내 인생은 이런 재수 없는 일화들로 뒤덮여 있다. 상식 있는 사람이라면 딱 보고 아 저건 저 꽃뱀 같은 년들이 이 남자를 호구로 아는구나, 라고 곧바로 판단이 설 만한 사건들인데 단지 내가 돈이 없고 빽이 없어서, 부모는 가난한데다 각자 자기 방식대로 제 정신이 아니라서 하나 있는 자식은 안중에도 없기 때문에 이 나이가 되도록 매번 그 고생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그나마 내가 지고서는 못 사는 성격이라 할 수 있는 한 법정까지 가서 시시비비를 가렸기 때문에 이 정도지 가만히 시키는 대로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성격이었다가는 벌써 등골 다 뽑아 먹히고 어디 아무도 모르는 야산 같은 곳에 파묻혔을 것이다.

그래서 알파벳 시티에 일반적인 입국 신청이 아닌 《망명》신청을 해서 입국 허가가 났을 때는, 기쁘다기보다는 드디어 나도 살면서 단 한 번 정당한 대접이라는 걸 받아보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어딘가 허탈한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알파벳 시티는 본래 인권 보호 목적으로 세워진 초국적적 인공 도시국가다. 그러나 지금은 돈 많고 심리학 좋아하는 미국 사람들의 실험실로 더 자주 애용되는 것 같다. 상당히 특이하게 조성된 사회 환경 때문인데, ‘주로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심각한 물리적 정신적 폭력에 노출된 이력이 있는 개인을 우선적으로 수용하여 개별적으로 보호한다’라는 설립 이념에 따라 이곳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물리적인 직접 접촉은 금기시되고 인간관계는 모두 간접적으로, 그러니까 대부분 컴퓨터 화면상의 메신저나 텍스트 송수신기 화면의 문자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직접 만나서 얼굴을 보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고, 심지어 전화로 목소리를 듣는 것조차 예외적인 사건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사람이 다른 사람 하나와 접촉하려면 엄청난 양의 문자가 떠다닌다고 해서 ‘알파벳 시티’라는 별칭이 붙었다가, 그게 이제는 정식 명칭으로 굳어져버린 것이다. 

물론 일각에서는 이곳의 원래 명칭이 ABC (Amnesty Bulwark City)였기 때문에 생긴 별명이라고도 하지만 ‘사면 보호 도시’라니 내가 보기엔 영어로 말이 안 되기 때문에 뭘 모르는 인터넷 호사가들이 지어낸 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알파벳 시티에서 정말로 보호하려는 건 사면이나 특사가 아니고 사람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인권이라는 건 곧 개개인이 인간답게, 즉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권리니까, 어떤 사람이 예를 들어 한번 크게 물리적 정신적으로 피해를 입어서 남을 믿지 못하게 되고 사회 조직이라는 사람들의 집단에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적응해서 살 수가 없는 상태가 되면, 여태까지 다른 곳에서는 그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여러 가지 방법을 써서 그 사람을 사회 조직에 적응시키려고 애썼다. 그러나 알파벳 시티에서는 본인만 행복하면 적응 같은 거 안 하고 그냥 혼자 살게 내버려둔다, 이거다. 타인이랑 물리적 접촉을 안 하면 최소한 신체적인 폭력이 일어날 가능성은 사라지니까. 그리고 정신적 폭력을 당해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훼손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 모든 의사소통은 문자로만 해서 증거를 남기는 거다.

쉽게 말하자면 인간관계에 있어 남을 기분 나쁘게 하는 일이 다른 곳에서는 그냥 복잡한 상황 때문이라거나 처신상의 실수 정도로 넘어가지만 여기서는 범죄라는 얘기다. 이곳의 인간관계는 전부 문자로 이루어지니까, 의사소통 도중에 저 자식이 나를 기분 나쁘게 했다, 하면 그 문제의 의사소통 내용을 전부 갈무리해서 법원으로 온라인 송신해버리면 평가 위원회에서 내용을 검토해서 범죄성이 증명되면 경찰이 잡으러 오는 것이다. 단지 나를 기분 나쁘게 했기 때문에! 더럽고 치사하고 엿 같고 구역질나는 일을 하루에도 열두 번씩 겪으면서 살아야 했던 나 같은 사람에게는 천국이 아닐 수 없다. 모두들 내 기분을 존중하고 모든 사람이 나를 행복하게 해줘야 한다는 사실이 법적으로 보장된다니 정말 좋은 나라가 아닌가.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원칙도 사람이 만든 것이라 빈틈이라는 게 있다. 그러니까 나쁜 놈들이 그 원칙을 180도 돌려서 아무 죄도 없는 사람한테 역이용할 가능성도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다. 정말이지 이곳에서까지, 더구나 내가 사랑하는 여자한테 이렇게 비참하게 뒤통수를 맞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내가 뭔가 털끝만큼이라도 잘못한 게 있다고 느꼈다면 남자답게 추방이건 입국 금지건 정정당당히 받아들이지 지금 이런 식으로 거짓 생체 정보를 돈 주고 사서라도 다시 한 번 입국 기회를 얻으려는 시도 따위는 안 했을 것이다.

빌어먹을 신원 조회는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걸까?


그녀는 처음부터 나라는 사람한테 관심을 보였다. 이미 말했지만 상담이라는 거 이제는 웬만한 정신과 의사 뺨칠 정도로 해본 나다. 보통 정신과 의사나 심리학자는 내담자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쉽게 말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관심이 하나도 없으면서 내가 어디가 이상한지 그것만 찾아내려고 꼬치꼬치 캐고 든다 이거다. 그러나 그녀는 달랐다. 처음 대화할 때부터 그녀는 나에 대해서, 내 삶과 나의 세계관과 나라는 인간의 장점과 특성에 대해서 알고 싶어 했다. 그것은 직업 상담자가 흔히 하는, 내가 분명 어딘가 잘못됐다고 지레짐작하고 캐고 들려는 태도가 아니라, 진실하고 따뜻한 인간적 관심이었다. 그리고 내가 나 자신을 열수록 그녀도 또한 자기 자신을 내보였다. 

놀랍게도 그녀는 나와 매우 비슷하게 힘든 어린 시절을 겪었다. 아버지는 전쟁에서 죽었고 어머니 혼자 그녀를 키웠는데, 그녀는 어머니가 자신을 ‘보호’하려 했다고 말했지만, 아마 내 어머니와 비슷하게 몹시 집착하는 성격인 것 같았다. 그러다가 그녀가 살던 지역을 점령한 군부대의 대장이 그녀의 어머니를 첩으로 들이면서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삶이 조금 편해졌지만, 그녀가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그 군부대의 대장이 그녀에게도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그녀로서는 다행히도, 계속된 전쟁으로 인해서 그 군부대는 대장과 함께 몰살되었다. 그러나 새로이 그 지역을 점령한 점령군의 대장은 전 대장의 첩이었던 그녀의 어머니를 반역자로 몰아 처형해 버렸고, 그녀까지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했다가 간신히 탈출하여 여러 인권 단체의 도움으로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 이제 이곳에 온 지도 4년이 돼 가요. 어머니가 여전히 보고 싶고, 한 방에 사람이 같이 있어서 얼굴 맞대고 이야기 나누던 시절이 가끔 그리울 때도 있지만…, 세상에 좋은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어머니를 쏘아 죽인 군인들이 총을 들고 나를 죽이러 다가오던 때의 그 공포감에 비하면 차라리 혼자서 조금 외로운 편이 나아요.

그녀는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 그리고 사실은 그렇게 많이 외로운 것도 아니에요. 이렇게 메신저로, 문자 송수신기로 함께 이야기를 나눌 친구들이 언제나 있으니까요 

그 수줍게 웃는 이모티콘에서 나는 그녀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무서운 일을 겪어 한 번 크게 상처를 입은, 나와 비슷한 처지인 것이다. 우리는 첫 대화부터 서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도 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아버지는, 전쟁 때문은 아니지만 사고로 죽었고, 어머니는 그녀의 어머니와 비슷하게 인생의 모든 기대와 희망을 나에게 걸고 들볶아댔다고 말했다. 그녀는 물론 이해해 주었고, 나는 놀라고 감동했다. 이런 얘기는 남들한테 잘 안 하는 편인데, 얼굴도 모르는 여자한테 이렇게 속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게 된 건 기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결정적으로 그녀의 마음을 확인하게 된 것은 사랑과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였다.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그녀는 또다시 (이모티콘을 통해) 수줍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 남자친구를 사귀어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 남자랑은 손을 잡아본 적조차 없는 걸요. 어렸을 때 고향에서 본 남자들은 모두 군인이었고, 우리나라는 항상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총 든 군인에게 함부로 가까이 가는 건 위험했으니까요. 그리고 이제는 여기 와 버렸으니까…

그녀는 다시 수줍게 웃었다.

‐ 이곳에서 계속 지내면, 사랑을 하거나 결혼을 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여기가 편해요. 나중에 생각이 바뀌면 떠날 수도 있고, 아직은 생각할 시간이 많이 있으니까요….

그렇다. 그녀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많이 있었다. 그녀는 겨우 스무 살인 것이다. 열여섯 살에 전쟁 중인 나라를 탈출하여 알파벳 시티로 온 이래, 지난 4년간 남자는커녕 다른 인간이 같은 방 안에 있었던 적조차 없는, 몸도 마음도 티끌 한 점 묻지 않은 깨끗한 숫처녀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방금 나를 자신의 첫 남자로 받아들인다고 고백한 것이다. 생각이 바뀌면 떠날 수 있다는 것은, 즉 이제 생각을 바꿀 만한 사람을 만났으니, 나와 함께 떠나겠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나를 사랑하고, 나와 결혼해서 이 비인간적인 플라스틱 벌집을 떠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 보겠다는 비밀스러운 고백이 아니겠는가. 스무 살, 아직 사랑을 알지 못하는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진심을 드러내버린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고백을 받아들여, 그녀를 구원하여 함께 탈출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이름과 통신망 공급자 주소로 그녀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도 나이 헛먹은 게 아니라서 이런 전자 통신망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정도는 안다. 조금 더 복잡한 것은 그녀의 개인행동 반경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말한 대로 이곳은 직접적인 대인 접촉이 금지되어 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개인이 자기 거주 공간 밖으로 나가는 상황 또한 철저하게 제한되고 통제되어 있다. 관공서를 제외하면 대체로 ‘공공장소’란 존재하지 않고, 건물 안이나 건물과 건물 사이의 통로, 그리고 거주지 근방의 길거리에는 개개의 입주민을 위한 이동 통로가 분리되어 있는 게 보통이며, 야외 활동이 필요한 경우에는 며칠 전부터 관할지역에 신청을 해서 허가를 받는다. 

모든 의사소통이 문자로 이루어지고, 그 문자는 종이에 물리적으로 적힌 게 아니라 전자신호로 변환되어 통신망으로 송수신이 된다는 알파벳 시티의 특성은, 바꾸어 말하면 특정 정보가 어느 통신망을 거쳐 어느 서버에 저장되는지 알아내고, 그리하여 원하는 통신망의 서버에 접속하는 방법을 알게 되면, 알파벳 시티의 모든 거주민들 사이에서 일어난 거의 모든 의사소통 내용에 접근할 권한을 가지게 된다는 뜻이다. 

그녀는 이틀에 한 번 삼십 분씩 식물원에서 산책을 한다고 했다. 그것이 신호였다. 산책 시간, ‘산책’이라는 사건이 되풀이하여 일어나는 해당 분기의 모든 날짜, 그리고 산책 경로가 신청서에 명기되어 있었다. 그 신청서는 그녀가 거주하는 구역의 관할 사무소로 송신되어 저장되었다. 결코 쉽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일단 목표가 정해진 이상 나머지를 해결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 시간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지만, 오래 공을 들일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나는 그녀를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내가 알아내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물리적 전자적 장벽을 뚫고, 내가 자신을 만나러 와 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믿고, 나를 믿고 그녀는 살짝 자신의 사생활 정보를 흘린 것이다.


처음 그녀를 발견했을 때 나는 일부러 접근하지 않았다. 그녀를 본 순간 피가 얼굴로 몰리고 심장이 쿵쿵 소리 내는 것을 들을 수 있었고, 마음만은 달려가 그녀와 뜨겁게 포옹했지만, 나는 자신을 억제하고 그저 멀리서 지켜보았다. 그것은 이미 4년이나 타인과의 접촉 없이 살아온 그녀에 대한 나의 최소한의 배려였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갈색 피부는 식물원의 인공 햇살 아래 윤기가 흘렀고, 검은 머리카락은 물결치듯 굴곡이 져서 허리까지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커다랗고 검은 눈은 사랑스러웠고, 갸름한 얼굴은 평온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그녀가 한쪽 다리를 조금 전다는 사실은 내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그녀가 나처럼 상처 입은 영혼이라는 사실에 대한 물리적인 증명으로서, 그녀와 나의 영적인 결합을 더욱 공고하게 해 줄 뿐이었다. 그녀는 가볍게 다리를 절면서, 때때로 눈을 감고 인공 태양열을 음미하며 천천히 식물원을 한 바퀴 돌았다. 다리 때문인지 그녀의 걸음은 무척 느렸고, 삼십 분이나 그녀가 그저 절룩거리면서 걷기만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나는 답답해졌다. 언젠가 그녀도 나와 함께 걷게 되면, 나의 부축을 받고 조금은 더 빨리 걸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나의 도움을 받아, 그녀도 내 걸음걸이에 보조를 맞출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다.

삼십 분이 지나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고 난 후에도 나는 잠시 동안 식물원에 남아 있었다. 주위에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고 감시 카메라를 피해서 식물원을 빠져나가 내 개인 이동 통로까지 도달하는 경로를 짜야 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녀가 있던 자리의 흔적, 그녀가 음미했던 인공 햇살, 그녀가 걸었던 땅을 조금 더 가까이서 느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날 저녁 나는 메신저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녀는 반가워했다. 지난 며칠간 내가 통신망 접속과 이런저런 정보 수집으로 바빴기 때문에, 우리는 제대로 대화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

그녀가 내게 안부를 물었다. 나는 잘 지낸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의 안부를 물었다. 그녀도 잘 지낸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기대하던 본론으로 들어갔다.

‐ 오늘 식물원에서 산책하시는 모습을 봤어요. 머리카락이 길고 무척 아름답더군요. 머리가 길다는 얘기를 왜 안 했죠? 전 머리를 길게 기른 여성은 매우 여자답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녀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갑작스런 칭찬에 당황한 것이리라.

‐ 머리카락만이 아니에요. 당신은 무척 아름다워요. 갈색 피부도, 크고 검은 눈도, 정말 매혹적이에요.

‐ 나를 봤어요? 식물원에서?

대답 대신 그녀가 물었다. 나는 그녀가 식물원을 언급한 것이 기뻤다.

‐ 예, 거주하시는 구역 부근의 그 식물원에서요. 이틀에 한 번씩 산책을 한다고 말씀하셨잖아요.

‐ 하지만

그녀는 입력하다가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이어서 입력했다.

‐ 내가 산책하는 시간은 어떻게 알았어요? 아니, 그보다, 나를 봤다니, 직접 봤단 말인가요? 그건, 불법 아니에요?

‐ 그냥, 운 좋은 우연이었어요 

내가 대답했다.

‐ 오늘부터 그 식물원에서 일하게 됐거든요. 직접 본 건 아니고, 보안 카메라를 통해서 보고 있었어요.

그리고 나는 덧붙였다.

‐ 이제부터 산책할 때만큼은 외롭지 않을 거예요. 언제나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내가 곁에서 부축하고, 함께 걷는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녀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물었다.

‐ 나를 부축해요? 내가 걷는 걸…, 봤어요?

나는 황급히 대답했다.

‐ 걷는 모습도 아름다웠어요. 꼭 부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건 아니에요. 그냥, 그렇게 상상을 해 보라는 거죠, 내가 옆에 있는 걸….

그녀는 또다시 침묵했다. 그리고 물었다.

‐ 정말로 내가 걷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나는 확고하게 대답했다.

‐ 예. 당신은 아름다워요.

그녀는 한참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갑자기 접속이 끊어졌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접속하지 않았다.


그 날 밤 나는 산책하던 그녀의 모습을, 그녀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날, 어제 접속이 끊어진 것에 대해 사과라도 하듯, 그녀가 먼저 내게 말을 걸어왔다.

‐ 식물원에서 일한다고 하셨죠?

내가 그렇게 말했던가? 

‐ 예. 얼마 전부터 일하게 됐어요.

‐ 무슨 일을 하세요?

‐ 아, 제가 식물을 좋아해서요. 그냥 전반적인 관리 업무를 맡고 있어요. 아직 적응이 안 돼서 좀 낯설기도 하고 그래요.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빠른 속도로 입력했다.

‐ 시청에 문의했는데, 식물원은 모두 자동 무인 관리 체계로 관리되고 사람이 그곳에서 일하지 않는다는 답변을 들었어요.

‐ 아, 그러니까 제가 식물원에서 직접 일한다고 생각하셨어요?

그리고 나는 웃는 얼굴을 입력했다.

‐ 그 자동 관리 체계를 감독하는 일이에요. 결국은 다 사람 손이 닿아야 돌아가는 거니까요.

‐ 아, 그래요.

그녀가 납득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 그럼, 시 공무원으로 일하시나 봐요? 식물원은 시에서 관리하니까요.

시 공무원. 단어의 공식적인 울림이 마음에 든다.

‐ 예, 그렇죠.

그녀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물었다.

‐ 내일도 산책 나가시죠? 같은 시간인가요?

대답 대신 그녀는 엉뚱한 질문을 했다.

‐ 알파벳 시티 오신 지 한 달 정도 되셨죠?

그녀가 그걸 기억하고 있었던가. 나는 조금 감격했다.

‐ 예. 

그리고 나는 덧붙였다.

‐ 우리가 만난 지도, 한 달이 됐다는 뜻이죠.

‐ 알파벳 시티에서 거주한 지 일 년이 안 된 사람은 공무원 임용 자격이 없어요.

‐ 일반적으로는 그렇지만, 식물 관리처럼 전문화된 분야는

내가 답변을 다 입력하기도 전에 그녀가 내 말을 끊고 쏜살같이 입력했다.

‐ 앞으로는 내가 산책하는 거 감시하지 말아요. 나한테 다시 접근할 생각도 하지 말아요. 

나는 그녀의 말을 막고 반박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 다시 나한테 접근하면 고발하겠어요. 대화 내용은 전부 기록에 남아 있으니까, 개인 정보를 빼낸 사실이나 물리적 접촉을 시도한 사실을 당국에 고발하면 당신은 추방될 거예요.

그리고 통신은 끊어졌다.


대화로 오해를 풀어보려 했으나, 그녀는 나를 차단해 놓았다. 전자우편도 차단되었는지 보내는 즉시 도로 반송되었다.

고민 끝에 나는 문자 송수신기에 붙은 전화기를 들었다. 

새벽 두 시가 넘었다. 문자 송수신기는 보통 끄지 않으니까 전화기도 꺼져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그녀가 전화를 받을지는 미지수다. 그리고 이런 공격적인 접근 방식은 여러 모로 위험 부담이 높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어쩔 수 없다.

우려했던 바와는 달리, 그녀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연결음이 울리자마자 곧장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에요?”

목소리가 잠겨 있고 갈라지는 것으로 보아 자다가 받은 듯했다. 그 목소리가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을 뻔했다.

“자다 깬 목소리는 어딘지 섹시한 데가 있어요, 그거 알아요?”

“누구예요? 무슨 일이죠?”

“나예요. 또 누구겠어요?”

“나라뇨?”

나는 이름을 말했다. 

전화가 끊어졌다.

다시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들리지 않았다. 수신기가 꺼진 모양이다.

계속 다시 걸었다.

인공의 아침이 찾아와 도시에 조명이 들어올 때까지, 나는 그대로 앉아서 아무런 연결음도 들리지 않는 전화기에 그녀의 번호를 되풀이해서 자꾸자꾸 입력했다.


다음날 나는 정해진 시각에 식물원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 분이 지나고, 십 분이 지나고, 이십 분이 지나고, 마침내 정해진 시간 삼십 분이 모두 지나도록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그곳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이십 분이 더 지나자 어떤 나이든 여자가 들어와 힘겨운 걸음걸이로 천천히 산책을 하기 시작했다.

저 여자는 누구인가. 

왜 그녀가 아닌 건가. 

그녀는 왜 오지 않는가.

늙은 여인의 답답한 걸음걸이를 보고 있자니 그녀의 절룩거리는 걸음걸이가 생각나서 더더욱 화가 치밀었다. 여자가 내 앞을 지나갈 때 나는 나도 모르게 뛰어나가 여자의 목을 조를 뻔했다. 그러나 순간 천정의 감시 카메라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자제력이 강하고 냉철한 사람이다. 그녀가 나를 바람맞히지만 않았어도, 이런 충동적인 행위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른 후, 여전히 끝없이 산책하는 늙은 여자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곳을 빠져나왔다.


식물원을 나와서 나는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그녀의 거주 공간이 있는 건물까지 가는 것은 쉬웠고, 건물 입구에서 그녀의 거주공간까지 단 하나밖에 없는 그녀의 전용 이동 통로에 접근하는 것은 그보다 어려웠다. 다행히도 건물주가 돈이 없었는지, 접근을 통제하는 보안장치는 생체정보 방식이 아닌 비밀번호 방식이었다. 기본적인 머리가 있고 무한한 참을성이 있으면 언젠가는 깨지는 방식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그녀는 모든 출입구에 같은 비밀번호를 사용했다 ‐ 식물원에서 산책을 시작하는 시각과 마치는 시각. 

그녀는 나를 초대하는 것이다. 식물원으로 초대했듯이, 이번에는 자신의 집으로 들어오는 문을 내게 열어주려는 것이다. 여자들이 흔히 하듯이 앙탈도 부리고 밀고 당기기도 해 보지만, 아무리 밀어내는 시늉을 해도 결국 그녀의 본심은 나를 자기 쪽으로 당기고 싶다는 것이다.

비밀번호를 알아내고 모든 문을 통과하여 그녀의 집 앞에 섰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비밀번호를 입력했고, 그녀의 집 현관문은 나를 향해 열렸다.

나는 그녀의 집 안으로 들어섰다.


집 안은 어두웠다. 그녀의 집 구조는 내가 사는 거주 공간과 정확히 좌우가 바뀌어 있다는 점만 빼면 완전히 같았다. 알파벳 시티의 모든 일반용 거주공간은 구조도 크기도 모두 같다. 그래서 나는 망설이지 않고 침실로 향했다.

침실에 들어서자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잠든 그녀의 얼굴을 식별해냈다. 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침실에는 그녀가 지금 잠들어 있는 침대와 머리맡의 작은 탁자, 그리고 작은 서랍장 하나 외에는 가구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나는 부엌으로 갔다. 간이식 식탁 의자를 최대한 소리 나지 않게 접어서 살짝 들고 침실로 살금살금 다시 돌아왔다. 그녀는 여전히 색색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나는 간이 의자를 그녀의 침대 앞에 펴고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녀가 깨어나 나를 보고 비명을 지를 때까지,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이 점이 내가 법정에서 몇 번이나 강조한 부분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녀의 침대 앞에 앉아서 잠든 그녀의 얼굴을 어둠 속에서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미국 물이 많이 튄 도시답게, 재판 또한 미국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니까 즉, 피고인 나도 또한 증인 자격으로 소환되어, 재판장과 배심원들이 보는 앞에서 쇼를 해야만 했다는 이야기다. ‘보는 앞’이라고는 해도, 나는 출입문이 봉쇄된 내 거주공간에 그대로 있었고, 모든 과정은 웹캠을 통해 각 배심원의 컴퓨터 화면으로 일방향 송신되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나는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검사의 모든 질문에 변호사가 미리 준비해준 대로 대답했다.

“피해자의 집에는 왜 들어갔습니까?”

“와 달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 연락은 언제 받았죠?”

“그녀를 집으로 찾아가기 전날입니다.”

“연락은 어떻게 받았습니까? 메신저, 문자 송수신기, 그리고 전화 통화 기록상에는 그런 내용이 전혀 없던데요?” 

“식물원에서 그녀가 남긴 쪽지를 발견했습니다.”

“그 쪽지에는 뭐라고 적혀 있던가요?”

“날짜와 시간, 그리고 출입문 비밀번호가 적혀 있었습니다.”

“피고는 그렇다면 피해자가 제공한 비밀번호를 이용해서, 원고가 지정한 날짜와 시간을 맞춰 피해자를 방문했다는 뜻입니까?”

“예.”

“그 쪽지는 어떻게 하셨죠?”

“없애 버렸습니다.”

“편리하군요?”

“이의 있습니다.”

내 변호인이 말했다. 재판장이 대답했다.

“인정합니다. 방금 검사의 발언은 기록에서 제외됩니다. 검찰 측은 요점이 있는 질문을 하세요.”

검사는 잠시 풀이 죽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곧 스피커를 통해 질문이 이어졌다.

“메신저와 문자, 전화 등 모든 공식적인 통신 기록상으로 피해자는 피고에게 더 이상 연락하지 말고 접근하지도 말라고 선언했습니다. 방문할 날짜와 시간을 지정하고 비밀번호까지 알려주는 행위와는 상반되지 않습니까?”

“공식 기록이 남을 걸 알고 그랬던 겁니다.”

내가 대답했다.

“직접 만나는 건 위법 행위니까요.”

검사가 재빨리 질문했다.

“그렇다면 위법 행위라는 걸 피고 본인도 인지하고 있었다는 말이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검사가 말했다.

“이상입니다.”

이번에는 스피커에서 변호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피고 본인도 타인을 직접 대면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물리적인 접촉을 시도하는 행위가 위법이라는 걸 알고 있었단 말입니까?”

“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변호사가 다시 물었다.

“그럼 왜 그런 일을 했습니까?”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대답했다.

“그녀가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고 싶었습니다.”

변호인이 물었다.

“피고는 알파벳 시티에서 거주한 지 얼마나 되셨죠?”

“한 달이 조금 넘었습니다.”

“그 전에는 어디에서 사셨죠?”

나는 출신 국가 이름을 댔다.

“그곳에서 태어나 자라셨나요?”

“이의 있습니다.”

검사가 소리쳤다.

“피고의 외국 생활 경험담이 당 재판과 무슨 상관입니까?”

재판장의 목소리가 물었다.

“무슨 상관이 있죠, 변호인?”

변호사는 막힘없이 대답했다.

“피고가 과거 경험상 외국 생활이 능숙하거나 적응이 빠르지 못하며, 알파벳 시티에서 거주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아 완전히 적응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싶은 겁니다.”

재판장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계속 하세요.”

변호인이 다시 내게 물었다.

“그곳에서 태어나 자랐습니까?”

“예.”

“이곳 알파벳 시티에는 친구나 가족이 있습니까?”

“아뇨.”

“상당히 외로웠겠군요?”

“예…,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요.”

변호인이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계속 물었다.

“피고가 태어나 자란 곳에서는, 남자가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면 어떻게 합니까?”

이 변호사, 국선 치고 꽤 쓸 만하다. 나는 대답했다.

“연락을 하고, 만나러 갑니다.”

“남자가 만나러 가나요?”

“예.”

“사랑하는 여성 쪽에서 만나러 와 달라고 부탁했는데, 남자가 가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나는 조금 웃었다.

“나쁜 놈이죠.”

변호인이 말했다. 아마도 배심원을 향한 변론일 것이다.

“이렇게 된 겁니다. 젊은 남녀가 만나 사랑에 빠졌고, 외국에서 혼자 쓸쓸하고 외롭던 피고는 지금 자신이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여성이 만나러 와 달라고 먼저 부탁하자, ‘나쁜 놈’이 되지 않기 위해서,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서, 위법 행위라는 걸 알면서도 위험을 감수한 겁니다. 그러나 본인 나름대로는 법적인 제한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사랑하는 여인까지 위법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을 견딜 수 없어서, 실제적인 신체 접촉만은 피했던 거죠. 단지 같은 방 안에서 얼굴을 마주 보았을 뿐인 겁니다.”

그리고 변호인은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

“피고는 알파벳 시티에서 거주한 지 한 달 됐습니다. 지금 이 상황이 미숙한 신입 거주민의 실수라고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아니, 그보다, 사랑에 빠지는 걸 위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알파벳 시티의 법률상으로는 피고가 피해자와 한 방에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위법이라 해야겠지만, 그 이유가 사랑이라면 쌍방 과실이고, 피해자는 공범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피고 자신도 위법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체포에도 순순히 응했습니다. 집행 유예와 시민교육 재수강 선에서 가벼운 처벌로 마무리 짓거나, 혹은 기어이 추방까지 간다면, 피고가 원하는 대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함께 알파벳 시티를 떠날 기회를 주는 것이 정당하다고 봅니다.”

변호사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사라졌다. 나는 스피커를 향해 싱긋 웃었다.

이번에는 스피커를 통해 검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해자 본인이 피고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는 것은 피고 측의 주장일 뿐, 이 법정에서 증빙할 수 있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나 피해자가 피고와 사랑에 빠졌는가 아닌가는 이 법정에서 어느 정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검찰 측은 피해자를 증인으로 소환하겠습니다.”

이어서 증인 선언을 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스피커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앉았다. 내 컴퓨터 화면으로는 그녀를 볼 수 없다는 것이 몹시 아쉬웠다.

검사가 의례대로 그녀의 이름과 주소를 물었고, 그녀가 대답했다. 이어서 검사가 사건 전날과 사건 당일 그녀의 행적을 물었고, 그녀가 대답했다. 검사가 그녀에게 나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는지, 식물원에서 내게 쪽지를 남겼는지 물었고, 그녀는 부정했다. 그리고 검사가 그녀에게 물었다.

“증인은 피고를 사랑합니까?”

“아니오.”

그녀가 분명하게 대답했다.

검사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증인은 피고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까?”

“무섭고, 불쾌합니다.”

그녀가 다시 분명하게 대답했다. 검사가 물었다.

“피고에 대해서 생각할 때면, 그 무섭고 불쾌한 감정이 느껴집니까?”

“예.”

“피고의 모습을 본다면, 똑같이 무섭고 불쾌한 감정이 느껴지겠습니까?”

“예.”

“증인은 그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피고의 모습을 보는 데 동의합니까?”

“예.”

그녀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지금 그녀 앞의 화면에는 내가 비추어지고 있을 것이다.

나는 황급히 스피커에서 물러앉았다. 웹캠과의 거리를 적절히 조절하고 렌즈를 똑바로 들여다보며 할 수 있는 한 따뜻하게 웃어 보였다. 소리는 내지 않고 입술만 움직여 ‘사랑해’라고 말했다.

스피커에서 검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화면, 정지시켜 주십시오.”

좋다. 내 웃는 얼굴이 그녀 앞에 정지 화면으로 떠 있다고 생각하니 만족스러웠다. 나는 다시 스피커 쪽으로 다가앉았다.

검찰 측에서 또 한 명의 증인을 소환했다. 동시에 증인 두 명을 소환하는 상황을 놓고 내 변호인이 뭔가 이의를 제기했으나 기각되었다. 소환된 증인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정신과 의사였다.

어디 출신인지 억양이 몹시 강해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발음으로 정신과 의사는 증인 선언을 했다. 검사가 의례대로 정신과 의사에게 자기소개를 부탁했고, 의사는 자신의 학벌과 연구 경력을 떠벌렸다. 의사가 말을 마치자 검사가 물었다.

“그렇다면 화면에 비친 피고의 모습에 대한 피해자의 신체 반응을 정신과 전문의 입장에서 해석해 주시겠습니까?”

정신과 의사는 또다시 그 외국 억양이 몹시 강한 말투로 떠벌리기 시작했다.

“이 화면을 보시면… 증인의 심장 박동이 현저히 증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교감 신경계의 작용이 활발해져서 아드레날린이 분비된 결과로… 또한 이 사진을 보시면… 사진의 이 부분 색이 변한 것으로 보아… 뇌로 가는 혈류량이 평소와 달리 증가하여… 혈압도 눈에 띄게 높아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이의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이 뭡니까?”

변호인이 짜증스럽게 끼어들었다. 재판장이 말했다.

“증인은 의료 전문가가 아닌 배심원들을 위해서 간단하게 정리해주시겠습니까?”

정신과 의사가 잘라 말했다.

“한 마디로, 증인은 피고의 얼굴을 보고 스트레스 반응을 보인다는 뜻입니다.”

검사가 다시 물었다.

“증인이 피고를 보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요?”

“예.”

검사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상입니다.”

이어서 변호인이 반박했다.

“스트레스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죠? 좋은 스트레스와, 나쁜 스트레스?”

정신과 의사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변호사가 다시 물었다.

“양쪽 다 어쨌든 스트레스니까, 인체의 반응도 비슷하겠죠?”

“기본적으로는 비슷하지만, 차이점이라면….”

변호사가 정신과 의사의 말을 잘랐다.

“그래서 비슷합니까, 안 비슷합니까? 예, 아니오로 대답해 주세요.”

정신과 의사가 조금 망설인 후 대답했다.

“예,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스트레스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증인의 피고에 대한 감정을 단정 짓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습니까?”

변호사, 잘 한다.

정신과 의사가 대답했다.

“신체 반응만으로는 그렇겠죠. 하지만 이미 증인은 피고가 무섭고 불쾌하다고 증언했고, 안면 근육의 반응도 그런 감정을 뒷받침합니다.”

“그게 어떤 반응인데요?”

“하악과 구륜근이 긴장되고 전두근 또한….”

“배심원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 주시죠.”

변호사가 말을 막았다. 정신과 의사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위협을 느끼고 표정이 굳어지는 겁니다.”

“증인이 느끼는 것이 위협적인 감정이라고 단정할 수 있습니까? 법정이라서 긴장했다거나 숨은 애정을 억제하려는 게 아니구요?”

정신과 의사는 잠시 생각한 후 단언했다.

“증인의 모든 신체와 안면의 반응이 ‘무섭고 불쾌하다’라는 증인의 발언을 뒷받침합니다.”

“하지만 다른 이유로 긴장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습니까?”

변호사가 물고 늘어졌다. 정신과 의사가 다시 말했다.

“증인이 피고의 얼굴을 본 순간의 신체 반응은 정직합니다. 증인이 말한 대로, 무섭고 불쾌할 때의 반응입니다.”

… 그리고 그것이 나의 죄목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에게서 사랑받지 못하고, 오히려 그녀의 감정을 상하게 했으며, 결과적으로 그녀가 무섭고 불쾌하다고 느끼도록 행동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직접 접촉, 가택침입, 그리고 식물원 불법 침입과 공공기관 정보망 침입 등등의 자질구레한 죄목이 추가되어 ‐ 즉각 추방 및 재입국 영구 금지라는 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죄목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감옥에 가는 것도 아니고 전기의자에 앉는 것도 아니니 즉각 추방 따위 공짜로 고향 돌아가는 셈 치고 가볍게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만 듣고, 다른 곳도 아닌 법정에서 나를 ‘무섭고 불쾌한 인간’이라고 낙인을 찍었다는 것이,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검사가 나를 기소하고 배심원들이 이 웃기지도 않는 죄목과 검사의 기도 안 차는 논리를 받아들여 판결을 내렸다는 사실이 나는 그야말로 불쾌했다. 가진 걸 다 털어서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여 재입국을 시도할 정도로 불쾌했다. 감정은 여자들만 있는 게 아니다. 내 감정도 감정이다. 나도 불쾌하다면 불쾌한 거다.

검사도 판사도 배심원도 필요 없다. 나한테는 그녀만 있으면 된다. 그녀 앞에서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면 그걸로 그만인 것이다. 그녀의 입에서, 무섭고 불쾌하다는 헛소리 대신 사랑한다는 진심 어린 고백을 받아내면 끝인 것이다.

그 방법도 이미 생각해 놨다. 사실 근본적으로 따지면, 일이 이렇게 된 건 모두 그녀가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진짜 남자가 어떤 건지 겪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그녀의 집을 처음 찾아갔을 때, 나는 그녀의 진심을 믿고 그녀가 자발적으로 나를 원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된 이상 그런 여유를 부릴 상황이 아니다. 무조건 그녀를 다시 찾아가서 진짜 남자라는 걸, 정말 평생 가도 잊을 수 없게 체험을 시켜줘야 한다. 처음에야 앙탈을 좀 부리겠지만, 남자라는 걸 제대로 겪어보고 나면 아마 정신이 번쩍 들어서 제 발로 나를 따라 나설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녀를 데리고 저 말도 안 되는 플라스틱 정신병원을 나오는 것이다. 

대체 한 나라의 법률이 자기 마음 자기도 모르는 어린 여자애의 변덕 따위에 휘둘리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노릇 아닌가. 그녀도 어차피 갈 곳 없는 피난민 처지이니 어디서 살든 마찬가지일 것이고, 게다가 나처럼 뒤를 봐줄 든든한 보호자가 자발적으로 나서준다면 감지덕지할 일이다. 그러니 일단 깔아눕힌 후 데리고 나오는 것이다. 데리고 나와서, 내 나라에서 제 정신 박힌 남자들이 하듯이 책임 딱 지고 결혼해서 내 여자를 만들면, 그 후로는 내 마누라 구워먹든 삶아먹든 내 마음이라고 내 나라 법에는 떡하니 나와 있는 것이다. 그게 사실 당연하고 논리적으로 맞는 이야기 아닌가.

나는 다시 빨간 불이 켜진 화면을 들여다본다. 이제 겨우 열일곱 시간이 지났다. 아직도 근 이틀이 창창하게 눈앞에 남아 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기계 목소리가 알파벳 시티의 거주민이 알아야 할 기본 사항을 지루하게 늘어놓는다.

지난 열일곱 시간, 그러니까 거의 하루 동안 처리된 신원 조회 정보에서 이상한 점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일단 첫 관문은 넘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나는 낙관적으로 생각해 본다. 저 기계가 갑자기 오류 메시지를 내뱉거나 경보음이 울리고 국경 수비대가 잡으러 오지 않는 한, 나는 일 분 일 초가 지날 때마다 계획 완수에 가까이 가고 있는 것이다. 일 분 일 초가 지날 때마다, 그녀에게, 가까워지는 것이다. 내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는, 순진한, 깨끗한, 나만의 그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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