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FI

멜론, 웜홀 그리고 철학자 <1부>

2026년 3월 통권 246호

<1부>


0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유명한 말을 남긴 르네 데카르트. 그는 17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과학자로, 근대 철학의 출발점이라 여겨지는 인물이다. 


데카르트는 스무 살에 법학을 전공해 대학을 졸업했지만, 전공을 살리지 않고 군인의 길을 택한다. 군대를 따라 유럽을 여행하며 세상을 직접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1619년의 추운 겨울날, 신성 로마 제국의 새 황제 즉위식을 구경한 뒤 부대로 복귀하던 스물세 살의 데카르트는 독일의 한 작은 마을에 머물게 된다.



1


‘눈이 많이 오는군.’

창밖을 내다보던 데카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 눈이라면 내일도 이 마을을 벗어나기는 어려울 터였다. 그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피어올랐다. 매서운 날씨 탓에 며칠째 이 여관 2층 방에 머물고 있지만, 사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날씨를 핑계 삼아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하루 종일 사색할 수 있다는 게 그에게는 더없이 흡족했다.


난로로 지펴진 방안은 따뜻하고 아늑했다. 여관에서 나온 저녁도 맛있었고, 당장 걱정할 일도 없었다. 데카르트는 행복한 미소를 지은 채 푹신한 침대 속으로 파고들었다.

방안은 깜깜했고, 난로에서는 타닥거리는 소리가 났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밤이었다.



2


은하 문명, 그러니까 소련의 물리학자 카르다쇼프가 제안한 3단계 문명을 부분적으로 이룩한 이 시점에서, 인류의 가장 큰 자산은 단연 웜홀이다. 웜홀은 항성계 간 물자와 인력을 안정적으로 연결하며, 우주 곳곳에 흩어져 있는 인류 사회를 하나의 문명으로 묶는 기반이 되고 있다.


웜홀 덕분에 인류는 수많은 이득을 얻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장점은 나 같은 사람에게도 제법 괜찮은 일자리가 주어졌다는 점이다. 나는 웜홀 관리자로 일하고 있다. 관리자가 되기 전에는 웜홀 건설 현장에서 작업자로 일했었다. 현장 일도 그럭저럭 재미는 있었지만, 나이가 들수록 몸을 쓰는 일이 점점 버거워졌다. 그러다 십여 년 전, 회사에서 현장을 잘 아는 관리자가 필요하다며 나를 사무직으로 전환해 주었다.


관리자로서 나의 역할은 웜홀 건설 현황을 파악하고, 현장에 문제가 생기면 필요한 조치를 취해 주는 것이다. 현장 작업자들은 모두 숙련된 사람들이고, 대부분의 대응 과정도 자동화되어 있어 실제로 문제가 생길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박 선생은 웜홀 관련 석사 학위 소지자라는데, 작업자들보다 한창 젊고 붙임성이 없는 편이다. 그래서 작업자들은 대부분 나에게 연락하는 쪽을 선호한다. 덕분에 박 선생은 근무 시간 내내 방해받지 않고 책을 읽는다. 슬쩍 보니, 지금도 무언가를 메모해 가며 책에 집중하는 중이다. 


하지만 나는 전혀 불만이 없다. 웜홀 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시절에 비하면 몸도 훨씬 편해졌고 연봉도 올랐으니, 이 자리를 얻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무엇보다 매일 오후 이렇게 느긋이 간식을 먹을 시간까지 생겼으니 말이다.


“박 선생, 멜론 먹을래?” 


나는 조각조각 잘린 멜론이 가득 담긴 플라스틱 용기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박 선생은 책에서 눈을 떼고 통을 바라보았다. “…아니요.”


“정말 안 먹어? 홋카이도산인데.”


“괜찮아요. 드세요.” 그녀는 책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나는 개의치 않고 용기의 뚜껑을 열었다. 박 선생은 원래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튼, 다시 웜홀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웜홀을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우리 우주는 1개의 시간 방향과 3개의 공간 방향을 가진 일종의 시공간 덩어리다. 물리학에서는 공간의 차원에 따라 0차원은 점, 1차원은 끈, 2차원은 막으로 설명하는데, 이러한 공간 구조를 통틀어 ‘브레인’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사는 우주는 세 개의 공간 방향을 가지므로, 이를 3-브레인이라고 한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물질과 에너지는 시공간을 휘게 만든다. 따라서 물질과 에너지의 분포를 적절히 제어하면 브레인을 찢을 수 있다.


따라서 웜홀은 다음과 같이 만들면 된다.


첫째, 브레인을 찢는다.


둘째, 찢어진 틈을 굴처럼 만든다.


셋째, 굴의 양쪽 입구에 시공간 차이를 발생시킨다.


이제 앨리스가 토끼 굴에 뛰어들듯 웜홀 속으로 뛰어들면, 전혀 다른 시공간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


뭔가 가득가득한 지구보다야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브레인을 다루는 편이 훨씬 수월하므로, 웜홀 건설은 대개 그런 장소에서 이루어진다. 나 역시 지금 광활한 우주에 떠 있는 우주선 위에서 이러한 작업을 처리하고 있다.


물론 세부적인 기술이 좀 필요하다.

예를 들면 웜홀의 붕괴를 막기 위해 웜홀 전체에 음의 에너지를 지닌 물질("네거티움")을 바른다던가, 작업자의 중력이 웜홀과 브레인, 그리고 다른 시공간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특수 제작된 작업복을 입어줘야 한다는 것 등이다. 이 작업복에 이상이 생길 경우 타임 패러독스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작업복 착용은 필수다.


고장 난 작업복을 관리하는 것도 관리자의 업무 중 하나다. 이전 타임에 작업복 하나에 구멍이 난 것을 발견해 사무실 한쪽에 걸어 두었다. 바로 저기에.


…이런, 어디 갔지?


작업복이 없어졌다. 

나는 황급히 작업복이 걸려 있던 옷걸이로 다가갔다.


“뭐 찾으세요?” 주변을 뱅뱅 도는 나를 발견한 박 선생이 물었다.


“박 선생, 여기 있던 작업복 못 봤어요?”


“아까 김 반장님이 가져가셨어요.”


“김 반장? 585호 웜홀 작업 중인 그 김 반장?”


“네. 그분이요.”


다행이다. 김 반장이 작업하고 있는 웜홀은 규모도 크지 않고, 용도도 중요하지 않은 쓸데없는 웜홀이다. 그렇다 해도 구멍 난 작업복을 입고 현장에 나가는 것은 원칙에 어긋나므로, 내게는 김 반장에게 작업복을 갈아입게 할 의무가 있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달달한 멜론 한 조각을 입에 물고, 나는 김 반장에게 통신을 시도했다. 작업자들은 두 손이 자유롭지 않은 경우가 많아 종종 응답이 늦어지곤 하지만, 다행히 김 반장은 곧바로 통신을 받았다.


“어어, 안 선생. 무슨 일이야?”


김 반장의 목소리 너머로 비가 세차게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김 반장, 사무실에 걸려 있던 작업복 입었어?”


“응. 내 작업복은 빨아 놓고 아직 안 말랐길래 잠깐 빌려 입었지.”


“아이, 그거 구멍난 작업복인데. 좀 물어보고 입지.”


“그랬어? 몰랐네.”


“585호 웜홀이지? 정상적인 거 지금 하나 갖다 줄게.”


“그래, 고마워. 그런데 자네 뭐 먹고 있나?”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긴. 뭔가 씹히는 소리가 들리는데.”


“홋카이도산 멜론인데. 맛 좀 보겠어?”


“그럼 나야 좋지.”


통신을 끊은 뒤, 나는 옷 위에 관리자용 작업복을 걸쳐 입었다. 그리고 여분의 작업복 하나와 중력 간섭을 막을 수 있는 원통형 텐트를 챙겼다. 마지막으로 멜론 통을 한쪽 팔과 옆구리 사이에 끼운 채, 나는 사무실을 나섰다.



3


웜홀의 입구가 모여 있는 곳은 우주선 복도를 따라 끝까지 가서, 맨 끝에 있는 커다란 문을 열면 나온다. 그곳은 커다란 벽이 있는 홀인데, 벽에는 마치 원통 미끄럼틀의 입구처럼 동그란 구멍들이 빼곡히 뚫려 있다.


입구 관리자에게 용건을 말하자, 그는 간단히 기록을 남긴 뒤 나를 585번 웜홀 입구로 안내했다. 관리자는 내가 가져온 물건들을 커다란 비닐 주머니에 넣게 했다. 그 주머니를 들고 웜홀 안으로 뛰어들자, 몸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각과 함께 시야가 뒤틀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비가 세차게 쏟아지는 잔디밭 위에 서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21세기 초반의 대학 캠퍼스처럼 보였다. 습한 데다 밤이었지만 공기는 따뜻했다. 봄인 듯, 벚꽃잎들이 비를 맞으며 잔디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간간이 우산을 쓴 대학생들이 곁을 지나갔다. 저 앞, 지붕 아래 벤치에 네거티움 페인트통을 옆에 둔 채 앉아 있는 김 반장이 보였다.


“김 반장!” 나는 손을 흔들며 김 반장에게 다가갔다.


“이거, 괜히 귀찮게 해서 미안한데.” 김 반장은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그런데 여긴 왜 이렇게 비가 와?”


“어떤 부잣집 아들내미가 실연을 당했다고 빗속에서 울고 싶다잖아. 비도 오면서 날씨도 춥지 않아야 하고. 거기에 운치도 있는 곳을 찾다 보니 21세기 대학 캠퍼스가 된 거지. 벚꽃까지 떨어지니까 첫사랑 생각도 나고 말이야.”


“이런 걸로 웜홀을 만들다니. 돈이 남아도나?”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도 시키는 대로 해야지, 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주머니에서 압축된 원통형 텐트를 꺼냈다. 텐트를 바닥에 내려놓고 버튼을 누르자, 텐트는 스스로 부풀어 오르더니 곧 김 반장이 들어갈 만한 크기가 되었다. 김 반장은 내가 가져온 주머니를 들고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주머니 안에 든 작업복 입으면 되는 거지?” 김 반장이 소리쳤다.


“응. 멜론도 하나 꺼내 먹어.”


“오케이.”


잠시 후, 김 반장은 옷을 다 갈아입고 입을 우물거리며 텐트 밖으로 나왔다.


“멜론 참 맛있네.”


나는 김 반장에게서 주머니를 받아 들고 텐트를 다시 압축시켰다. 이제 사무실로 돌아가면 된다.


“작업은 아직 많이 남았어?” 내가 물었다.


“거의 다 했어. 한 번 둘러보고 이상 없으면 끝내도 될 것 같아.”


“그럼 같이 돌아갈까?”


“좋아.”


그가 손전등처럼 생긴 장비를 들고 웜홀 입구 주변을 스캔하는 동안, 나는 벤치에 앉아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반쯤은 심심해서, 반쯤은 관리자로서 물어야 할 말 같아서 말을 꺼냈다.


“작업하는 동안 별일은 없었나?”


“없었지.”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아, 그러고 보니 이상한 남자를 하나 봤어.”


“이상한 남자?”


“아주 희한한 옷을 입고 있어서 처음엔 코스프레인 줄 알았어. 21세기 남자 옷차림이라고 보기엔 너무 치렁치렁한 긴 옷이었거든. 그런데 화장실이 급한 건지, 배가 아픈 건지, 길을 똑바로 가지 않고 왼쪽 옆구리를 부여잡은 채 대각선으로 가더라. 난 그냥 취객인가 했지.”


“그래서?” 


“난 벤치에 앉아서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어. 그런데 알잖아, 나 혼잣말 많은 거. 어차피 여기엔 들을 사람도 없고, 혼자 작업할 땐 영 심심하니까.” 그는 잠시 웃더니 말을 이었다. “기다리다 보니 또 혼자 중얼거렸지.”


“뭐라고?”


“‘안 선생은 언제 오나? 홋카이도산 멜론 먹어 보고 싶은데.’라고. 그런데 그 남자가 고개를 들어서 날 보더라고.”


“그 다음엔?” 가슴속에서 불안한 기운이 서서히 올라왔다.


“그게 다야. 남자는 다시 절뚝거리며 걸어갔어.”


“좋지 않아, 좋지 않아.” 나는 낮게 중얼거렸다.


웜홀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작업복을 입는다. 작업복은 네거티움으로 만든 미세 전자 회로로 코팅되어 있어, 다른 시공간에 들어온 사람이 그곳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모든 영향을 차단한다. 작업을 위해 우리끼리는 서로 소통할 수 있게 되어 있지만, 해당 시공간의 사람들은 우리를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 이곳에서 우리는 유령 같은 존재다.


그런데 누군가 김 반장의 목소리를 듣고 모습을 보았다니. 작업복의 구멍 사이로 그의 중력이 새어 나와 이 시공간에 영향을 미친 것이 틀림없었다. 누군가 그의 존재를 어떤 형태로든 눈치챈 것이다.


“한 번 확인해 봐야겠어.”


나는 사무실에 있을 박 선생에게 통신을 걸었다.


“박 선생. 거기 있어요?”


“네, 무슨 일이시죠?”


“585호 웜홀 말인데요. 아무래도 구멍 난 작업복 때문에 중력 간섭이 있었던 것 같군. 내 생각엔 폐기하고 다시 처음부터 작업하는 게 깔끔할 것 같은데, 박 선생 생각은 어때요?”


“간섭으로 인한 영향이 큰가요?”


“취객 하나가 김 반장 목소리를 들은 정도인 것 같아요.”


“작업은 거의 끝났나요?”


“지금 마지막 점검 중.”


“그럼 제 생각에는 그냥 사용해도 될 것 같은데요. 확인해 보니, 어차피 일회용으로 쓰고 폐기될 웜홀이더라고요.”


나는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통신을 끊자, 어느새 다가와 옆에서 대화를 면밀히 듣고 있던 김 반장이 말했다. “다행이군. 빗속에서 작업하는 게 꽤 거추장스러워서 말이야.”


“그러게. 점검은 다 했어?”


“이 길 끝에 있는 임시 탈출용 웜홀만 한 번 보면 끝나.”


“그럼 같이 가지.”


나는 주머니를 어깨에 메고, 김 반장은 손전등을 든 채 남은 한 손으로 페인트통을 들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비만 내리던 날씨와 달리, 어느새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김 반장의 뒤를 따라 걸으며, 나는 그의 미적 감각이 꽤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고른 캠퍼스의 건물들은 마치 유럽의 오래된 건물들처럼 보였고, 길은 참 아름다웠다. 이런 곳이라면 실연을 당한 청춘 하나쯤은 눈물을 흘릴 법했다. 이 정도 낭만을 위해서라면 돈을 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부자라면 말이다.


길의 끝에는 붉은 기와지붕과 작은 창문들이 달린 반 목조 건물이 서 있었다. 창마다 따스한 노란빛이 희미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김 반장은 그 건물을 향해 손전등을 돌렸다.


“이런.” 김 반장이 말했다.


“왜 그래?”


“보이나?” 그는 손가락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시선을 돌리자, 임시 탈출용 웜홀 입구에 아직 네거티움이 도포되지 않은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작업이 덜 된 구석이 있었나 봐. 미안하지만, 마저 하고 가야 할 것 같아. 자네 먼저 돌아갈래?”


“어쩔 수 없지. 괜찮아.”


바로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눈앞의 2층 건물, 따스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작은 창문 너머로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보였다. 여기 있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었다.



4


첫 번째 꿈에서 데카르트는 어두운 거리를 걷고 있었다. 세찬 바람이 몰아치고 커다란 그림자들이 어른거리는 가운데, 그는 공포에 질려 몸에 힘이 빠졌다. 그는 휘청거리며 간신히 발걸음을 옮겼지만, 바람에 밀려 똑바로 걷지 못하고 왼쪽으로 기울어진 채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진 그는 신에게 기도를 드리고 싶다고 생각했고, 마침 눈앞에 대학 건물이 보이자 학교의 예배당으로 향하기로 했다.


그 길에서 그는 아는 사람 하나를 스쳐 지나쳤지만, 인사를 건넬 수는 없었다. 그대로 발길을 옮기자 이번에는 학교 잔디밭 옆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그 사람은 “무슈 N이 당신에게 줄 것이 있다”고 말했고, 데카르트는 그것이 외국산 멜론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5


“좋지 않아, 좋지 않아.” 나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사람들을 보며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저 사람들은 누구지?” 옆에 있던 김 반장도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사람들은 열 명 남짓으로, 대부분 어려 보였다. 이십 대 초반쯤. 그 사이에 나이가 지극한 여자가 한 명 서 있었다. 그때, 무언가가 머릿속을 스쳤다.


“584호 웜홀.”


“584호? 옆 웜홀이잖아.” 


“그래. 산학 협력으로 만든 웜홀이야. 저 사람들은 사학과 학생들이고, 나이가 있어 보이는 저 여자는 학과 교수야. 건설 기획 회의 때 저 여자를 본 적이 있어. 학생들을 데리고 견학을 온 거지.” 

나는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큰일이군. 가서 맞는지 확인해 보자.”


건물 2층 복도에 들어서자 사람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소리가 나는 쪽의 문을 살짝 열어 보니, 아늑한 방이 펼쳐져 있었다. 난로에서 새어 나온 희미한 불빛이 방안을 희미하게 밝히고 있었다. 내부는 어두웠지만, 교수의 한쪽 손에 들린 비닐 주머니 속 밝은 조명 덕분에 우리 눈에는 방안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교수가 다른 손에 들고 있는 주머니 안에는 웜홀의 편의 기능을 제어하는 동그란 리모컨이 들어 있었다. 내가 준 것이었다.


방 가운데에는 침대 하나가 놓여 있었다. 교수와 학생들은 그 주위를 둘러싸고 토론을 벌이는 중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침대 위에는 한 남자가 누워 있었다. 밖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에 창문이 덜컹거렸다.


“그는 이 바람을 악령에 의한 것으로 생각했단다. 그렇다면 멜론의 의미를 유추해 볼 수 있는 사람?” 교수가 물었다.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고립된 상황에서 신선한 음식을 갈망했던 게 아닐까요?”


“좋은 추측이구나. 그런데 그 멜론에는 ‘그가 당시의 고립을 오히려 즐겼다’라는 해석도 있어.”


나는 어깨에 멘 주머니 속에 든 멜론을 괜히 한 번 쳐다보았다.


그때 김 반장이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자야. 내 목소리를 들었다던 사람.” 


“누구?”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


침대 위의 남자를 슬쩍 쳐다보니, 그는 어딘가 불편한 기색으로 얼굴을 찌푸린 채 잠들어 있었다.


나는 한 학생의 뒤에서 손을 들고 말했다. “저, 교수님?”


교수와 학생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았다.


“누구시죠? 우리 학생은 아닌 것 같은데요.” 교수가 물었다.


“웜홀 관리자입니다. 혹시 584호 웜홀을 이용하셨나요?”


“네, 맞아요. 무슨 일인가요?”


“아, 아닙니다. 잠시만요.”


나는 초조한 얼굴로 옆에 서 있던 김 반장을 재빨리 구석으로 끌고 갔다. “이거 큰일인데. 584호 웜홀이랑 간섭이 일어난 게 틀림없어.”


김 반장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언제부터? 이제 어떡하지?” 


“다 방법이 있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교수와 학생들은 다시 토론에 몰두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중력 간섭은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 보통 이런 경우에는 두 웜홀이 향한 목적지들의 시공간 차이를 찾아 분석한다. 원래는 분리되어 있어야 할 두 시공간이, 어느 순간 간섭으로 뒤섞이며 없던 현상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때 한 학생이 질문했다.


“그런데 원래는 눈이 오고 있어야 하지 않나요?”


창밖에는 분명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순간, 무언가가 머릿속을 스쳤다.


“저, 교수님?”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네?”


“비가 언제부터 오고 있었나요?”


“글쎄요. 지금까지는 안에만 있어서요.”


교수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제가 알기로는 이곳엔 눈이 오고, 첫 번째 꿈에서는 비는 내리지 않고 바람만 부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이미 첫 번째 꿈이 지났으니… 아마 비는 방금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것 같네요.”


“꿈이요? 584호 웜홀이 꿈으로 이어집니까?”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꿈이 핵심이죠. 데카르트의 꿈을 관찰하러 온 거니까요.”


“아아, 다행이군.”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차차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이 잡혀 왔다.


현상. 다시 말해 ‘우리의 의식이 경험하는 모든 것’이 브레인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미 밝혀진 지 오래다. 인간이 깨어 있을 때 보고 만지는 세계뿐 아니라, 기억과 감정 역시 마찬가지이며 꿈도 예외는 아니다. 말 그대로 이러한 모든 ‘현상’은 브레인에 존재한다.


인간이 ‘현상’을 어떻게 인지하는가는 또 다른 문제다. 감각은 인간이 외부 세계를 지각하는 여러 방식 중 하나에 불과하다. 어찌 되었든, 모든 현상이 브레인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웜홀은 브레인의 한 지점에서 다른 브레인의 한 지점으로 이동하는 구조이기에, 꿈을 포함한 모든 현상에 연결될 수 있다.


“자네, 584호 웜홀이 꿈으로 이어지는 걸 다행으로 알아.” 나는 김 반장에게 말했다. “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김 반장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 시말서 쓸 뻔했군.”


“그래도 585호 웜홀은 폐기하고 다시 작업해야 할 거야.”


“그건 괜찮네.”


“박 선생에게 연락해야겠어.”


나는 박 선생에게 통신을 걸기 위해 기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쾅.


밖에서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 바닥과 공기가 함께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와 김 반장, 교수와 학생들은 깜짝 놀라 일제히 몸을 굳힌 채 숨을 죽였다.


“이게 무슨 소리야?” 김 반장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이 소리를 단 한 번 들은 적이 있다. 예전에 현장에서 작업할 때였다.


“좋지 않아. 좋지 않아.”


이 소리는 브레인이 찢어질 때 나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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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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