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소설을 선보인 지 어느새 30년이 된 작가가 지금도 여전히 신선한 글을 내보이며 자신의 주특기를 자랑할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나는 연기나 노래에 비해 소설은 오랜 시간 이어 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분야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연기는 나이가 들면서 그 나이에 맞는 모습을 보여 주면 성숙해질 수가 있다. 노래는 반대로 옛 모습을 그대로 갖고 있는 것이 미덕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소설은 새로운 내용, 독특한 생각을 선보이는 것에 초점을 둘 때가 많다 보니, 세월이 흘러도 새롭기가 쉽지 않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같은 방식으로 10년 전이나, 10년 후나 똑같게 노래를 부르면 칭송받지만, 처음으로 놀랍고 독특한 생각을 선보였던 작가는 같은 생각을 두 번째로 내비치기만 해도 더 이상 놀랍고 독특한 생각이 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현대 한국 SF의 시조 격이라고 할 수 있는 듀나가 여전히 『찢어진 종잇조각의 신』같은 책을 내서 보여 준다는 점은 굉장히 놀랍다. 이 책에 실려 있는 단편 소설 중 꽤 많은 이야기들이 요즘 젊은 작가들이 보여 주는 새롭다고 하는 SF들 못지않게 새로운 느낌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듀나 SF다운 산뜻하고 깔끔하게 정리된 힘도 든든하다. 말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요즘에는 도리어 농담처럼 쓰이는 말이 거장이라는 단어인데, 『찢어진 종잇조각의 신』은 그야말로 거장이라는 말에 어울린다는 생각이 바로 드는 책이었다. 『태평양 횡단 특급』이나 『면세구역』 같은 20여 년 전에 나온 듀나 작가의 대표작 SF 단편집을 읽고 감동을 받아 그 비슷한 것을 읽고 싶어졌을 때, 20년 후에 나온 이 책을 집어 들어도 전혀 후회하지 않을 정도의 소설들이 모여 있었다.
이 책에서 가장 훌륭한 소설이라고 내가 느꼈던 단편을 하나만 고르라면 오늘은 “큐피드”를 꼽아 보고 싶다. “큐피드”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누구와 진정한 사랑에 빠져 잘살게 될지가 저절로 눈에 보이는 이상한 힘을 가진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신비한 이야기이고 운명과 삶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내용으로 끌어갈 수도 있는 소재다. 이 비슷한 소재는 1990년대에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앤솔로지 형태의 TV 단막극 시리즈에서도 종종 다루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도 MBC의 『환상여행』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남은 목숨을 다들 알게 되고, 그러자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은 그냥 막 산다는 등의 이야기를 한 편짜리 TV 극으로 보여 준 적이 있었다.
죽을 날이 언제인지 미리 정확히 알게 된다는 이야기에 비하면 사랑의 대상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는 이야기는 훨씬 더 밝은 느낌이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소재가 될 수도 있을 법한 소재다. 실제로 듀나의 소설에서도 초반은 경쾌하고 우스꽝스럽게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이 흥겨운 분위기는 끝까지 별로 처지지 않는다. 일관성은 뚜렷하고 재미난 어투로 신기한 이야기를 꺼내 준다는 그 발 빠른 흐름대로 즐겁게 이야기를 즐길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중반에는 이야기가 조금은 더 심각하게 꺾인다. 그리고 그 때문에 생기는 정서를 활용해서 한 부분에서는 처절하고 답답한 느낌도 슬쩍 집어넣는다. 그 결과 이야기는 좀 더 폭넓고 다채로워진다. 독자에 따라서는, 인생을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운명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삶에서 발버둥 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사람들에게는 각자 서로 다른 삶이 펼쳐지고 무슨 이유로 각기 그 삶을 따라가면서 살고 있는 것인가? 하는 진지한 삶의 밑바탕에 대한 고민을 잠깐 해 볼 기회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책 말미에 적힌 듀나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이 이야기는 가상현실을 주제로 하는 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아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 사실을 알고 이 이야기를 다시 처음부터 읽으면 소설 속에 퍼져 있던 이런 골치 아픈 삶의 생각할 거리들이 조금은 더 선명하게 와닿는 느낌이 든다. 그러니까 이 소설 속 세상에 나오는 사람들은 사실은 사람이 아니라 컴퓨터 프로그램이 작동시키고 있는 게임 속의 등장인물들인 것이고 누가 누구를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누가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무슨 행동을 하는지, 등등은 인공지능의 계산 결과로 나타난 모습일 뿐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야기의 주인공인 “나”라는 등장인물 역시 한 인물을 나타내고 있는 인공지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누가 누구와 사랑으로 연결될 운명인지 아닌지 하는 것은 게임을 운영하면서 갖고 놀고 있는 사람이 그냥 심심해서 그렇게 정해 놓았기 때문에 이뤄지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조건을 정해 놓은 것이 어떤 오류나 조작으로 인해 주인공에게만은 뻔히 보이는 상황이라고 봐야 한다.
만약 이야기를 더 파고들어서 하나의 가능성에 멈춘다면 이 이야기는 전지전능한 세계의 창조자가 왜 세상에 악을 방치해 두느냐는 오래된 신학과 철학 문제에 대한 재치 있는 답이 될 수도 있다. 이 세상의 창조자가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면 왜 아무 이유 없이 나쁜 사고나 악한 사건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세상에 그냥 두는 것일까? 수없이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제2차 세계대전 같은 전쟁은 도대체 왜 일어나야 했는가? 그 사건을 보고 후대의 사람들이 무슨 교훈을 얻으라고 일부러 그런 막대한 희생이 일어나도록 한 것일까?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창조자라면 그렇게 큰 희생을 벌이지 않고도 사람들이 좋은 교훈을 얻게 하는 더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옛 철학자들은 이 문제의 답으로 자유의지를 제안하기도 했다. 세계의 창조자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길을 자유롭게 선택할 자유를 주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의 선택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 시대에 사람들이 전쟁을 선택하고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면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에게 자유의지를 주면서도 동시에 수천만 명의 죄 없는 희생자들이 자신의 삶을 이어갈 자유는 빼앗지 않는 방법은 전혀 없었던 것일까? 만약 그런 방법을 절대 찾을 수 없어서 죄없는 전쟁의 희생자들을 그대로 운명 속에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면, 그것을 두고 전지전능하다고 할 수 있을까?
듀나의 소설에서 상상해 볼 수 있는 답은 이런 고민을 깨뜨린다. 그냥 세상의 창조자가 세상을 만들기는 했지만 모든 문제의 답을 알고 있지도 않고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보자는 것이다. 아마 게임을 하는 수많은 사람처럼 세상의 창조자도 그냥 재미 삼아 심심해서 세상을 만든 것이고 그러다 보니 이런저런 일이 예상 밖에 그냥 벌어지는 것이며 그에 대해 어찌할 방법도 없는 것이다. 가만 보면, 무엇을 만든 창조자라고 하더라도 꼭 그것에 대해서 완벽히 알고 있고 마음대로 잘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르긴 해도 중세 시대 영국에서 처음 축구라는 스포츠를 개발한 사람보다는 손흥민 선수가 더 축구를 잘할 것이고, 고대 중국에서 처음 바둑 두는 방법을 개발한 사람보다는 이세돌 선수가 바둑을 더 잘 둘 것이다. 세상을 만든 창조자를 만난다고 해서 그 창조자가 우리가 세상에서 발굴한 모든 문제의 답을 갖고 있다고 단정할 이유는 없다는 뜻이다.
정말 멋진 점은 듀나의 소설이 이런 깊은 구덩이 같은 생각에 전혀 빠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듀나의 소설에서는 이런 감각을 그저 이야기를 감싸고 도는 어떤 냄새 같은 분위기로만 뿌려 놓는다. 그리고 그 속에서 심각해 빠진 고민 대신 재미난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듀나는 듀나다운 짧은 서술로 소설 속 인물들의 면면을 보여 주는데 그러면서도 다들 그 얼굴을 한 번 실제로 보고 싶을 정도로 생동감이 있다. 이런 것은 그야말로 거장의 키보드 때리는 손길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래서 사상사를 다루는 딱딱한 책이 아니라 시트콤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멜로물 같이 이야기가 속력을 잃지 않고 흘러간다.
그리고 나서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결말에는 그 나름대로의 장중함이 있다. 그래서 결코 장난스럽지만은 않다. 혹시 내가 처음부터 이 소설을 가상현실을 주제로 하는 내용이라는 것을 알고 읽었다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조커가 사는 집』이라는 가상현실 주제의 단편집에 이 소설이 실려 있기도 했다. 그러니 그 단편집으로 이야기를 처음 읽은 독자라면 그 느낌이 어떠했는지 알 것이다. 시간과 기억을 바꿀 수는 없으니 영원히 나로서는 체험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책에는 다른 SF 작가들도 쓰려면 쓸 수 있음직해 보이는 소설 같긴 한데, 듀나의 뛰어난 꾸며 놓은 솜씨 때문에 훨씬 더 좋아 보이는 소설도 몇 편 있다. 예를 들어 초단편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 “가거라, 작은 책이여”와 “완벽한 독자”라는 소설의 소재는 대체로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같은 소설을 읽거나 같은 영화를 보더라도 접하는 사람의 경험과 성격의 차이에 따라서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게 된다. 『사운드 오브 뮤직』은 재미난 영화이지만 유럽식 음악에 전혀 익숙하지도 못하고 영어도 모르는 조선 시대 사람이 그 영화를 본다면 우리가 그 영화를 보는 것보다는 훨씬 더 재미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어떤 특수한 소설이 있어서 어떤 사람들이 볼 때는 그저 그런 이야기이지만 다른 어떤 사람들이 볼 때에는 너무나 감동적인 이야기가 되는 그런 굉장히 격차가 큰 경우도 있을 수 있을까? 그런 이야기는 어떻게 해서 탄생할 수 있을까, 그런 이야기가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가거라, 작은 책이여”는 이 소재를 의외로 공포물로 연결했다. 자극적인 잔혹한 장면으로 사람의 눈길을 끌어 보려는 것은 많은 작가들이 택하는 방법이지만, 이 소설은 잔잔하면서도 다음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들도록 잘 쌓아 나간 이야기의 끝에 화끈하게 뒤집히는 마지막 장면을 배치해 둔 그 리듬이 말끔하다. “왜? 무슨 일이 있었길래?”라고 독자를 궁금하게 만드는 여운을 샘물을 파내듯 솟아 나오게 한다. 그에 비해 “완벽한 독자”는 꽤나 현실적이고 사회 비판적이고 또 문학적으로 진지한 이야기를 펴나가다가 터무니없이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갖다 붙였다. 그렇게 해서 이야기를 거의 버리듯이 끝을 내는데, 이런 것도 분량이 짧은 초단편에서만 맛볼 수 있는 독특한 맛이라고 생각한다.
듀나의 개성과 주특기가 잘 드러나 있는 소설로는 “도둑왕의 딸”도 빼놓을 수 없다. 어지간한 작가라면 10권짜리 장편 소설로 풀어 놓을 이야기를 단편 소설로 만들어 요점만 간단히 부려 놓는 그 태도는 그야말로 듀나답다.
이 소설 속에서 듀나는 인류의 문명이 사라질 정도의 미래와 고대 한반도의 가야 역사를 동시에 다루는 시간 여행 이야기를 쉴 새 없이 풀어 놓고 있다. 그런데 굽이굽이 “진짜 그럴 수도 있겠다” “그게 그럴 수도 있겠구나”하는 감탄과 함께 그 기괴하게 어울리는 풍경이 너무나 재미있다. 딱 넷플릭스 시리즈로 만들어지면 보고 싶은 느낌인데, 여기에 더해 수많은 시간여행 이야기의 주인공들을 두고 “과거로 가면 자기도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은 낙오자들에 불과했어요”라는 딱 서른세 글자로 시간여행 이야기들의 틀을 통째로 집어 던지는 박력도 대단히 훌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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