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명훈 작가의 단편집 <안녕, 인공존재!>의 세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는 어딘가 좀 다른 세상이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그것은 21세기 현재보다 중세 시대를 더 닮았다. 중세 신학자의 신(神)의 존재론적 증명이 언급되고, 태양과 행성들은 투명하고 거대한 천구에 붙어 지구 주위를 돌며, 심령으로부터 과거를 읽어내는 고고심령학자가 등장한다.
첫 번째 단편 <안녕, 인공존재!>에서 항공우주국에 근무하는 이경수는 신우정이 다니던 회사 연구소로부터 사전만 한 상자를 건네받는다. “그 안에는 한 손에 쥘 수 있을 만한 동그란 돌멩이 하나와 충전기 따위의 부속품들이 들어 있었다.” 건네준 직원은 “기능이 없어요. 이 프로젝트 제품은 기능성 제품이 아니고, 말하자면 존재성 제품이었어요.”라고 말한다. 신우정은 이경수와 한때 연인 관계였으나 친한 친구로 남은 사이였다. 유서도 남기지 않고 자살한 신우정이 “입출력장치가 아예 하나도 없는” 이상한 전자제품을 이경수에게 남긴 것이다. 제품 설명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본 제품은 데카르트(1596~1650)의 ‘방법론적 회의(懷疑)’ 공법으로 디자인되었습니다. 데카르트는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이라는 특정형태의 존재를 최초로 추출해낸 프랑스 철학자입니다. ... 방법론적 회의 공법은 감각기관의 정확성을 하나씩 의심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 진짜 존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감각기관을 확장시키기 위해 고안된 모든 디바이스를 차단해야 합니다. ... 본 제품은 DubitoTM 회로라는 회의(懷疑) 회로를 통해 데카르트의 존재 추출법을 반복 시행하여 순도 높은 결정형태의 존재, CogitoTM를 추출해냅니다.”
<서양 철학사>를 쓴 버트런드 러셀에 따르면, 데카르트는 철학의 확고한 기초를 세우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 의심할 수 있는 대상은 전부 의심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감각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여기 실내복을 입은 채 난롯가에 앉아 있는 상태를 의심할 수 있을까? 그렇다. 나는 가끔 사실은 옷을 벗은 채 침대에 누워 자면서 여기 앉아 있는 꿈을 꾸곤 했다. ... 만약 악령이 존재한다면, 내가 본 모든 대상은, 쉽게 믿어버리는 나의 성향을 이용해 악령이 함정에 빠뜨리려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리라. 그런데도 내가 의심하지 못하는 대상은 남는다. 그러니까 악령이 아무리 교활하다 해도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를 기만하지 못할 터이다. 여기서 나는 신체일 리는 없는데, 신체는 환상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유는 신체와는 다른 존재이다.”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다다른다. “내가 모든 것이 거짓이라 생각하고 싶어 하는 동안에도, 그렇게 생각한 무엇으로서 나는 반드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이 참된 주장은 너무 강하고 확실해서 회의론자들이 아무리 허황된 가정으로 뒤집으려 해도 뒤집지 못한다. 따라서 이 명제를 그토록 찾아 헤매던 철학의 제일 원리로서 주저 없이 수용하겠다.”
의심하는 가상 자아에서 발생하는 CogitoTM는 무엇에 활용될 수 있는가? 제품 설명서에 따르면, “중세 유럽의 일부 신학자들은 의심하는 자아로 인해 추출되는 인식론적 존재를 활용하여 신의 존재를 증명해낼 수 있었습니다. CogitoTM는 바로 이 과정을 위한 원재료로 사용될 수 있을 만큼 순도 높은 존재 결정체입니다.” 중세 신학자 중에 신의 존재 증명으로 유명한 사람은 성 안셀무스(1033~1109)이다. <서양 철학사>에서 러셀은 이렇게 말한다. “데카르트가 뒤에 이어받은 성 안셀무스는 최고 완전한 존재로 정의되는 신에게서는 본질이 실존을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 신은 다른 완전한 것들을 전부 소유한 존재로서 실존하지 않기보다는 실존해야 더 완전하며, 신이 실존하지 않는다면 최선의 가능한 존재가 아니라는 결론이 도출된다는 근거를 제시한다.” 그러니까 신은 최고 완전한 어떤 것인데,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존재하는 것이 더 완전하므로 신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철학자 칸트(1724~1804)는 신의 존재론적 증명에 대해 존재는 술어가 아니라고 맞섰다. “존재는 사물의 개념에 아무것도 더하지 않는다. ... 현실의 백 탈러는 가능한 백 탈러보다 조금도 더 많이 포함하지 않는다.” 러셀에 따르면, 근대 이후 신학자들은 더는 존재론적 논증에 의존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출력하지 않는 CogitoTM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제품 설명서에 따르면 CogitoTM는 대규모 존재폭발을 일으킬 수 있다. “이는 CogitoTM의 순도가 대단히 높아 그 어떤 외부자극과도 격리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 가능한 현상으로, 고체상태의 물체가 기체로 변하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상태변화가 아니라, 극미량이나마 물질의 일부가 어떤 잔류물이나 잔류 에너지를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리는 순수한 형태의 소멸현상 입니다. 이때 CogitoTM와 CogitoTM를 둘러싼 물리적 외피 사이에는 미세한 인과관계의 단절점이 발생합니다. 이 미세한 인과관계의 단절점을 향해 주변 우주가 급격하게 수축하면서 측정할 수 없을 만큼 짧은 순간에 대폭발이 일어납니다.” 때로 존재는 사라짐으로써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경수는 신우정이 남긴 그 돌을 우주로 날려 보냈다. “존재를 우주로 떠나보낸 줄 알았는데, 존재의 남은 부분이 내 안으로 더 깊이 파고들어왔다. 예상한 대로 존재가 머물다 사라진 자리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마음속에 난 구멍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도, 그 존재를 증명하기도 어렵겠지만, 구멍을 안고 사는 사람 주변의 우주를 급격하게 수축시키기도 할 것이다.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맞다면, 그 과정에서 구멍은 메워질 것이고. “존재에 실수가 발생한 지 몇 분 뒤에 지구에서는 목성만 한 크기의 대폭발이 관측되었다. 존재폭발이었다. 우주에서 완전히 사라진 순간, 존재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 힘으로 스스로를 증명했다.”
버트런드 러셀 얘기 하나 더. 단편집의 세 번째 단편인 <크레인, 크레인>을 읽으면서 버트런드 러셀(로 생각되는 사람)의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많은 사람들이 구매했지만 읽지 않은 책으로 유명한 스티븐 호킹(1942~2018)의 <시간의 역사>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느 유명한 과학자(버트런드 러셀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가 천문학에 관한 공개 강연을 한 일이 있었다. 그는 지구가 태양 둘레를 돌고, 또 태양은 우리 은하라고 하는 광대한 별의 집단의 중심 둘레를 돌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였다. 강연이 끝나자 한 자그마한 노부인이 뒷좌석에서 일어나서 하는 말이 ‘당신이 한 이야기는 엉터리예요. 우주는 큰 거북 등에 얹힌 납작한 널빤지라구요.’ 그 과학자는 넌지시 웃으면서 ‘그 거북이가 올라탄 것은 무엇이지요?” 하고 되물었다. 노부인은 말했다. “젊은 양반, 참 똑똑도 하시군요. 그렇지만 이건 밑바닥까지 전부 거북이란 말씀이에요!” 거북이가 층층이 쌓여 있는 우주의 모습처럼 기묘한 우주의 모습이 <크레인, 크레인>에 등장한다. 거북이 대신 크레인이긴 하지만.
배명훈의 소설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기묘하게 뒤섞여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천동설 지지자들이 지동설 지지자들의 폭압에 맞서 싸우기도 하고(<엄마의 설명력>), 천오백 년 전의 두루마리에서 휴대폰 매뉴얼을 발견하기도 하며(<매뉴얼>), 공룡과 옛날 귀신과 외계인이 뒤섞여 있기도 하다(<누군가를 만났어>). 토머스 홉스(1588~1679)의 <리바이어던>을 연상시키는 단편 <변신합체 리바이어던>에서는 무려 52만 대의 로봇이 변신 합체하여 외계 종족과 맞선다. 배명훈의 세계 창조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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