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코패스와 인공지능이 우리에게 묻는다. 배려인가, 기만인가?
요즘 ChatGPT는 일상이 되었다. 인공지능을 연구자가 아니어도 누구나 일상에서 궁금한 것들을 물어본다. 그러다보니 최근 유행하는 간단한 테스트가 하나 있다. 당신은 둘 중 어떤 표현을 사용하는가? “ChatGPT에 물어본다.” 또는 “ChatGPT한테 물어본다.” 사람들은 보통 두 가지 표현 중 하나를 사용한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어떤 표현을 쓰는지를 통해 그 사람이 인공지능을 단순한 기계로 여기는지, 아니면 또다른 인격체로 여기는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만약 “ChatGPT에 물어본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인공지능을 단순한 프로그램 코드, 도움을 주는 기계 정도로 여기는 것이다. 당신에게 ChatGPT는 조금 더 똑똑한 청소기, 세탁기와 다를 바 없다. 반면 “ChatGPT한테 물어본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이미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인공지능을 또 다른 별개의 인격체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미 인공지능을 따뜻하게 불러주는 사람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상당히 흥미롭다. ChatGPT는 육체가 없다. 그저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프로그램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벌써 그런 프로그램에서조차 가상의 인격을 느낀다. 여기에서 우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인공지능이 사람같다고 느끼게 만들기 위해서 육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흔한 SF 영화에 나오는, 불쾌한 골짜기를 극복하고 정말 사람같다고 느껴지게 만드는 외형은 굳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겉모습보다는 그 내면에서 인간다움을 찾는다는 방증일 것이다. 의외로 우리가 내면을 더 중요시 여긴다는 것을 보여주는 다행스러운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개의 설계사>는 작가가 프롤로그에서 고백하듯 참으로 시의적절한 글이다. 인공지능이 인간다움에 도전하며 심지어 꽤 성공해나가고 있는 현시점에서 <개의 설계사>는 더 이상 막연한 상상 속 미래를 표현하는 글이 아닌, 지금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평범한 에세이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인공지능에게 인간의 감정을 완벽하게 모사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과제일 것이다. 논리적인 연산과 추론은 인공지능이 우리를 압도한지 오래이지만, 때로는 화를 내고 슬퍼하기도 하는 인간의 예측불가능한 감정은 인공지능에겐 참으로 어려운 과제일 수 밖에 없다. 결국 따지고보면 오늘날의 인공지능이 보여주는 인간의 감정을 느끼고 이해하는 듯한 모습은 그저 그럴듯하게 최대한 인간의 감정을 흉내내고 학습한 결과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인공지능에게 사람의 감정 역시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일 뿐, 어쨌든 논리적인 연산을 통해 추론해야하는 과제 중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개의 설계사>는 놀랍게도 그것을 사이코패스의 삶에 연결시킨다. 사이코패스도 타인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최대한 타인의 얼굴 근육의 움직임과 대화의 뉘앙스를 읽어가면서 상대가 어떤 감정일지를 판단하기 위한 훈련을 반복한다. 일종의 속임수, 기만이라고 느껴질지 모른다. 하지만 이건 결과적으로 인공지능이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인공지능도 사실 우리를 매일 속인다. 마치 자신이 누구보다 우리를 잘 이해하고 보듬어줄 수 있는 최고의 카운슬러라도 되는 냥, 가장 그럴 듯한 조언을 건낸다. 사실 뚜껑을 열어보면 그건 단지 그동안 당신이 남겼던 데이터에 기반해 계산한 코드의 결과일 뿐이지만, 우린 그 계산 값에 감동받기까지 한다. 그래서 작품은 인공지능을 설계하는 사람을 사이코패스로 설정했다. 사이코패스야말로 인공지능이 어떻게 해야 사람을 즐겁게 만들고 그들의 감정을 이해하고 있는 척 잘 연기하게 만들 수 있을지, 그 논리 구조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인 것이다! 인공지능은 잘 만들어진 사이코패스일 수 있다는 저자의 제안은 사뭇 파격적이다. 작품을 읽어가면서 문득 이런 과격한 호기심까지 떠오른다.
이러한 작은 장치는 <개의 설계사>를 독특하게 만든다. 표면적으로 <개의 설계사>는 이미 너무 흔해진 튜링 테스트의 서사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인간적인 인공지능과 가장 기계같은 사람을 함께 배치하면서, 의도적으로 둘 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드는 장치를 깔아놨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 사이코패스 설계사라는 독특한 장치가 추가되면서, 다른 흔한 작품에서 독자들에게 강요하는 인공지능의 따뜻함을 의도적으로 배제시킨다. 그리고 인공지능과 사이코패스가 얼마나 처절하게 타인의 감정을 헤아리기 위해 노력하는지,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얼마나 처절하게 계산하고 연산하는지를 고백한다.
“내 마음속에 끝나지 않는 채점표가 있다. 도덕적이었는지, 부도덕했는지, 이타적이었는지, 이기적이었는지, 온화했는지, 성급했는지, 공손했는지, 무례했는지, 상대를 만족시켰는지, 실망시켰는지…. 총점을 최대한 높게 유지하려는 노력은 나를 그럭저럭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들고, 남을 해치지 않는데에 도움을 준다.”
그렇다. 인공지능과 사이코패스는 매일 스스로의 감정 표현을 채점한다. 그들에겐 이건 오늘날 우리가 인간의 감정을 흉내내는 인공지능을 만들고자 할 때 벌어지는 흥미로운 단면을 대변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인공지능이 무언가를 이해하고 표현하기 위해선 결국 수학으로 번역하는 단계가 필요하다. 우리는 오랫동안 인간의 감정은 수치화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은 점수를 매길 수 없다고 여겼다. 내가 어떤 이를 10점 만점에 5점만큼 좋아하고, 또 다른 이를 8점만큼 좋아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인간의 경우엔 어색하다. 하지만 기계라면, 인공지능이라면 그런 점수를 매기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야 자신의 발언과 행동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 속 사이코패스 주인공의 방식과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나를 아무리 잘 헤아리고 이해하는 것 같아도 결국 따지고 보면 그건 그저 잘 짜여진 아주 정교한 계산 결과에 불과하다. 이 담백한 고백은 최근들어 인공지능에게 과할 정도로 감정을 이입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현 상황에 따끔한 깨우침을 주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들의 그럴듯한 거짓 연기에 너무 현혹될 필요 없다. 심지어 살아있는 사람보다 더 당신을 잘 이해한다고 느낄 필요가 없다. 애초에 그렇게 계산된 존재이며, 최상의 결과를 향해 가장 정교한 연산을 수행한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품의 태도는 확실히 흔한 다른 인공지능 서사와 결을 달리한다. 보통 많은 작품들은 인공지능도 사람과 다르지 않고, 감정을 느낀 따뜻한 존재로 묘사한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우리가 그 인공지능에게서 연민을 느끼고, 인간성을 되찾을 수 있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의 전략을 시도한다.
보통 우리는 사이코패스를 마주하거나 상상할 때, 측은함이나 연민, 따뜻함을 느끼기보다는 낯설음과 두려움에 더 가까운 감정을 느낀다. 물론 이러한 감정이 한편으로는 그간 대중 매체에서 다뤄진 사이코패스에 대한 편견이 반영된 결과일지라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나의 감정을 헤아려주지 못하는 대상에 대해서 친밀감을 느끼지 못한다. 설령 그 상대가 나의 감정을 잘 느끼고 있는 척 연기를 하고 있을지라도 무언가 어색하고 불편한 감정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래서 작품을 읽다보면 인공지능에 대한 막연한 긍정적인 감정은 올라오지 않는다. 대신 오히려 인공지능에 대한 거리가 더 멀게 느껴지고, 그동안 우리가 느꼈던 인공지능의 따뜻함이 사뭇 어색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나는 <개의 설계사>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한 편의 경고라는 생각도 들었다. 과연 우리는 진짜 친절과 계산된 친절을 구분할 수 있을까? 심지어 우리를 기만하는 존재가 가끔은 실수하고 완전하지 않은 인간도 아니고, 거짓말 조차 가장 논리적이고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존재라면 우리는 그들의 연기를 간파할 수 있을까? 아니 나아가서, 애초에 그 거짓말이 꼭 나쁜 것일까? 설령 그 존재가 진심이 아닌데도 단지 우리를 기분좋게 해주기 위한 의도적인 거짓말을 하더라도, 그것이 나에게 유쾌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긍정적인 결과를 만드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그것이 단순히 거짓, 연기라고 해서 우리를 기만한다고 비판할 수 있을까? 거짓말은 그 자체로 악인가, 아니면 선의를 갖고 있다면 선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이미 오래전부터 수많은 철학자들 사이에서 오르내린 질문이었다. 그리고 <개의 설계사>는 이제 그 거짓, 기만의 윤리를 판단하는 잣대가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완전히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을 내다보고 있다. 인공지능과 사이코패스, 둘 모두 우리를 기만한다. 그것은 우리를 위함일 수도 있고, 스스로의 생존을 위한 지극히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결과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우리를 기만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를 배려한 것인가? 이제 우리는 전례없는 새로운 윤리적 질문에 대한 인류 공동의 합의가 필요한 시점을 마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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