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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스로드’가 열어갈 더욱 다양한 과학문화

2025년 11월 통권 242호


올해는 광복 80주년의 해이다. 그리고 국립중앙과학관도 개관 80주년을 맞이한다. 암울했던 시기를 거쳐 새로운 희망을 가지던 때, 다른 무엇보다도 과학관부터 설립했다. 우리가 힘이 없어 겪은 어려운 시기의 원인과 이를 극복하는 동력을 과학기술에서 찾았다. 현재 우리나라 '과학의 날'은 4월 21일이다. 과학기술을 담당하는 정부 부처인 과학기술처가 설립된 날이다. 과학기술처가 출범한 것이 1967년이니, 곧 60주년 '과학의 날'을 맞이한다.


그런데 우리의 '과학의 날' 원조는 훨씬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3년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잡지 ‘과학조선’이 창간되고, 1934년 첫 과학의 날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린다. 당시 이름은 ‘과학데이’였고, 다윈이 세상을 떠난 날인 4월 19일을 기념했다. 민족대표 33인이 모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것처럼 각계 인사 31인이 모여 첫 과학데이를 기념하였다. 당시의 기록을 살펴보면, 여러 인사들이 모여서 대중에게 과학지식을 보급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 논의하였다. 이후 과학지식을 보급하는 기관을 설치하자는데 뜻을 모으고, ‘과학지식보급회’를 출범한다. 사회 저명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는데, 그 배경은 과학데이의 문구를 보면 어느 정도 이해된다. 자료가 남아있는 2회 과학데이의 포스터에는 ‘과학의 승리자는 모든 것의 승리자다.’라는 구호가 있다. 과학기술이 인류에게 새로운 시대를 열어줄 것이라는 희망과 함께, 우리나라의 독립과 부국강병 역시 과학기술에 기반되리라 생각한 듯 하다. 잡지와 기념일 등의 과학대중화 운동은 아쉽게도 핵심인물들이 구속되거나 친일파로 변절하며 막을 내린다. 그나마 ‘과학조선’은 1944년까지 명맥을 유지하였고, 1945년 해방 이후 곧바로 과학관 설립이 이루어진 것도 선조들의 과학을 향한 갈망과 몸부림 덕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과학데이와 과학지식보급회는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움직임이다. 지금의 과학의 날은 과학기술 담당 부처의 설립일을 기념하는 것이니, 다분히 정부 중심적이다. 물론 이외에도 많은 기념일이 정부의 관련 부처나 기관 설립일을 삼고 있으니, 과학기술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지만 일제 치하의 역사를 생각하면 아쉬움이 있는 것도 어쩔 수 없다. 과학지식보급회와 유사한 단체가 설립된 것은 과학기술처가 설립된 것과 같은 해인 1967년이다. 과학기술처와 함께 과학기술후원회가 만들어졌는데, 당시에는 학자를 비롯하여 많은 경제인이 과학기술후원회에 참여하였다. 과학데이 시절의 선조들이 그러했듯이, 과학기술후원회는 다양한 강연회와 과학서적 보급, 과학전시차 운영, 과학축제 등의 활동을 한다. 이것이 현재 한국과학문화재단을 거쳐 창의인재 양성으로 기능이 확대된 지금의 ‘한국과학창의재단’이다.


과학문화가 무엇인지 물으면 다들 떠올리는 것이 있다. 하지만 시대와 사회를 가로질러 존재하는 정의나 범위는 뚜렷하지 않다. 특히 국가마다 각자 다른 스타일을 갖고 발전한다. 다만 과학선진국들을 살펴보면 여지없이 과학문화 분야에서 앞서있으며, 많은 이들이 과학문화를 향유하고 있다. 과학기술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기술인에게는 국적이 있다는 말이 있다. 과학기술은 가치중립적일 수 있으나, 과학기술 정책과 투자는 정치, 경제와 온전히 떨어져 있지 않다. 과학기술이 정치나 경제와 같은 외적 요소에 영향을 받지 않고, 설령 위기가 오더라도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문화적인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 가령 경제적 어려움이 있어 과학기술 투자를 축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예산 운용 관점에서 나올 때, 전국민이 과학기술을 우선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인식을 강하게 갖고 있다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이가 과학기술을 좋아하고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를 자양분으로 많은 학자들이 나오고 큰 성과도 이룰 수 있다.


양자역학이 등장하며 전성기를 이끌었던 독일의 물리학은 도리어 정치·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꽃을 피웠다. 독일의 과학기술은 19세기말 상당한 재정지원이 이루어진다. 물론 이 때 뿌려진 토대가 기반이 되었겠지만, 1920년대 이후 독일은 저널조차 구하기 어려울 만큼 힘든 시기를 겪었다. 이 시기에 독일을 중심으로 양자역학의 시대가 열린 것은, 당시 사회가 갖고 있던 탄탄한 과학문화 덕분이다. 


우리의 과학기술 역사는 사실 짧지 않다. 오래 전부터 어느 나라보다도 발달한 천문학을 갖고 있었고, 수학 지식 또한 상당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기록만 보아도, 결코 다른 나라에 쳐지지 않는 과학기술 경쟁력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세종 시대에는 중국의 역법을 사용해서는 우리 땅에서의 일식과 월식을 정확히 측정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혼천의, 간의 등의 천문 관측기구를 만들고, 정확한 시간을 측정하기 위한 시계도 만들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의 독자적인 역법서도 만든다. 선조 때에는 케플러 초신성을 관측한 기록도 있다. 지금의 과학 교과서에는 케플러가 관측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당시 여러 곳에서 관측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초신성 관측 기록이 여러 차례 등장하고, 케플러의 기록보다 더욱 정밀하다고 인정받고 있다. 다만 이 기록을 찾아낸 것은 우리가 아니다. 외국의 과학자들이 우리나라에 보관되어 있던 왕조실록을 검토하던 중에 찾아낸 기록인데, 이로부터 30여년이 지날 때까지 우리는 실록에 나오는 초신성 관측기록을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선조들이 과학기술을 천시했다고 탓하는 것은 자칫 식민사관이나 패배주의로 이어질 수 있다. 도리어 우리의 중요한 과학기술 역사를 놓치고 있음을 탓해야 한다.


오로라가 관측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우리의 천문학이 엉터리였다는 생각을 하면 곤란하다. 자북극이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것은 알려져 있다. 지금도 계속 위치를 옮겨가는 자북극이, 조선시대에는 한반도에 훨씬 가까웠다는 증거가 오로라 관측 기록이다. 이뿐 아니라 지진과 날씨 등 다양한 과학기술 이야기가 조선왕조실록에 담겨있다. 최근 조선왕조실록이 전산화되면서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를 통하여 우리의 오래된 과학기술을 탐구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다만 과거 우리의 과학기술이 잊혀진 것은 현대의 과학기술 체계가 서양 위주로 정리된 탓이다. 필자는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근대화’라는 표현을 싫어한다. 이 표현은 구식에서 신식으로 들어간다는 관점을 갖고 있는데, 자칫하면 과거의 우리는 과학기술을 전혀 모르는 구시대적이라는 인상을 갖기 쉽다. 단지 산업혁명, 제국주의 등을 거치며 학문체계가 서양의 것으로 자리잡은 것이니, ‘서구화’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물론 ‘서구화’라는 것이 의도적으로 부정적인 뉘앙스로 쓰이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의미는 아니다.


여하튼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다른 체계에 의해 붕괴되거나 크게 쇠퇴하는 건 한순간에도 가능하다. 과학기술을 혐오하거나 기피하는 시기가 한두 세대만 이어져도,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된다. 이미 우리 사회가 이공계 기피 현상을 이야기한 것이 20년이 넘었다. 그럼에도 갈수록 이공계 기피 현상은 심해지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과학기술 발전의 기반이 되는 과학문화의 역할은 더욱 주목받아야 한다.


‘크로스로드’는 올해 20주년을 맞는, 우리나라 과학기술 웹저널의 선구자이다. 한국과학창의재단도 비슷한 시기에 ‘사이언스타임즈’를 창간하였는데, 당시 ‘사이언스타임즈’는 인터넷 뉴스에 보다 가까웠다. 크로스로드는 창간 초기부터 다른 과학 저널과는 차별화된 접근을 하여 왔다. 과학을 딱딱하게 설명하기보다는 일상 속의 과학 혹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SF 등으로 과학을 대중 곁으로 가져왔다. 지금은 그리 특별하지 않은 접근일지 모르지만, 크로스로드가 만들어지던 시기로 돌아가면 우리 사회에는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 시도였다. 한동안 과학문화 활동은 과학 전문가들이 비전문가나 대중을 교육시킨다는 관점이 강했는데, 이보다는 소통과 즐거움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이렇게 과학문화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과학데이’ 시절에는 강연과 신문이 대중을 만나는 유일한 창구였다면, ‘크로스로드’와 같이 웹을 통하여 소통하는 단계로 발전한 시기가 있었다. 지금은 동영상, 쇼츠 등 형식이 다양해졌을 뿐 아니라, 소통 채널 역시 손으로 꼽을 수 없을만큼 많아졌다. 그간 다양한 ‘가능성’이 교차하며 그 가능성을 넓혀온 ‘크로스로드’가 앞으로도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더욱 다양한 과학문화의 지평을 열어가길 희망한다.

댓글 1
  • 정민섭 2025-12-04 03:36:40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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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성
한국과학창의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