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FI

가장 훌륭한 똥(The Holy Shit) 1

2025년 9월 통권 240호

처음 보았을 때는 노인인 줄 알았어.

너는 새우 같고, 구겨진 종이 같고, 녹아내린 플라스틱 같았어.

한마디로 매력 따위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었다는 뜻이지.

내 시선을 붙잡은 건 눈이었어. 흐리멍텅한 눈인데 가장자리만 빛나고 있었어.

초승달 같다고 생각했어.

너는 이삼 일에 한번 꼴로 행정동에 나타났어. 우리가 콜로세움이라고 부르는, 일곱 층의 원형계단이 돔을 중심으로 트여있는 고풍스러운 건물 말이야.

우리는 낯선 사람을 쳐다보면 실례라고 배웠지만 모두가 너를 힐끗거리고 있는 듯했어. 비싼 보행로봇을 타고, 경호원도 세 명이나 데리고 있지 않았다면 시나브로 너에게 모여들었을지도 모르지.

네가 누군지는 몰랐지만 소문이 생길 줄은 알고 있었어. <테라>는 건강한 사람만 들어오는 곳이고, 프리메라들은 언제나 변화를 두려워했으니까. 불안을 달래는 데에는 자극적인 이야기만큼 효과적인 게 없지.


“성간우주선을 타고 온 외계인이래.”

“외계인을 우리한테 왜 공개해?” 

“우리는 바깥에 알릴 방법이 없잖아?”


너는 주름이 사라지고 허리가 펴지고 눈빛이 둥글어졌어. 

얼굴과 몸에 살이 오르고 힘과 균형이 돌아오기 시작했어.

노인에서 중년으로 가나 싶더니 갑자기 청년이 되어버렸지.


“외계인이 아니라 갑부 노인이래.”

“어딜 봐서 노인이야?”

“회사에서 젊어지는 신약을 개발해서 실험 중이래.”


닥터 이자의 사무실 앞에서 만났을 때 너는 나보다 키가 컸다. 하얀 얼굴에 살짝 주근깨가 있고 눈동자는 보기 드문 색이었다. 중심은 갈색에 가까웠지만 가장자리일수록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네가 나를 보고 반갑다는 표시로 눈을 찡긋, 했을 때 나는 알았어. 

너는 젊어지고 있는 노인이기는커녕 아직 덜 자란 아이라는 것을.

나에게 스스럼없이 눈 인사를 보낼 수 있는 내 또래의 남자 아이.


*


그러고 보니 나는 노인을 본 적이 없네. 

타운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았지만 노인은 아니었어.

밖에 나오면 죽으니까 없는 거라고들 했지만 가끔씩 날씨가 좋을 때에도 보이지 않았어. 나는 다 죽었다고 생각했어. 집에서 혼자 죽거나, 부랑자에게 살해당하고 집을 빼앗기거나. 아무도 그렇게 오래 살지는 못한다고 생각했지, 노인이 뭔지도 모르면서.

타운을 떠올리면 바람에 실려온 모래가 여기저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내 살갗을 쓸고 지나가는 기분이야. 타닥 타닥 불 타는 소리, 후두두두둑 피 떨어지는 소리, 쏴아아 물이 달려드는 소리까지 모래는 내 꿈속까지 쫓아 들어와 온갖 악마가 그 안에 다 있었어.

타운에 있으면 바람이 불지 않아도 들려. 바람이 불지 않는 게 확실해지면 뭔가 잘못된 거였어. 평소에는 온갖 소음을 일으키는 사람들도 조용해졌어. 숨을 죽인 채 고요가 지나가기를 기다렸지. 더 커다란 무엇인가가 괴물들의 입김을 잠재운 게 아니기를 기원하면서.

열두 살이 되던 해 갑작스러운 한파가 타운을 덮쳤어. 몇 달째 기온이 오십 도에 육박했던 터라 자연의 분노와 냉소가 한몸이 된 것과 같았어. 나의 가족이 살던 건물은 무너져 내렸지. 정확히 말하면 유리병처럼 깨져 버렸어. 나는 지하실에서 곤충 사냥을 하던 중이라 살아날 수 있었어. 엄마 아빠를 잃은 열 두 살 아이라서 살아날 수 있었어. 세 살만 더 많았어도 부랑자가 되었을텐데 열 두 살 아이라서 기관에 맡겨졌고, 건강검진을 받았으며, 세균검사 결과가 좋아서 <테라>에 올 수 있었어.

엄마 아빠가 죽어서 나는 슬펐나.

이상하게도 그게 기억이 나지 않아.

나는 운이 좋았다는 생각만 하고 살았어.

아침에 눈을 떴을 때도 나는 운이 좋았어.

저녁에 잠이 들 때에도 나는 운이 좋았어.

밥을 먹을 때에도, 공부를 할 때에도, 운동을 할 때에도, 가상현실에 접속할 때에도, 건강검진을 할 때에도, 그 모든 것을 내 방안에서 하느라 밖에 못 나갈 때에도 나는 운이 좋았어, 나는 운이 좋았어, 나는 운이 좋았어.

닥터 이자는 수많은 사람이 장내세균이 부족해서 죽어가고 있다고 말했어. 도시에 사는 부자인데도 영양실조에 걸리고, 치명적인 앨러지가 생기고, 중독증과 감염과 희귀질환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어.

<테라>가 없으면 인류는 다음 세기를 맞지 못할 거라고도 했어.

나는 마이크로바이움이 뭔지도 몰랐고 부모와 자식간에도 다를 수 있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닥터 이자가 나에게 인간의 장 속에 꼭 필요한 수백 종의 세균이 풍부하게 있다고 말했을 때에는,


매끈한 옷감 같은 게 떠오르더라.


왜 실로 만들지 않은 양 섬세하고, 빈틈없이 꽉 차 있는데도 살짝 비쳐 보이는 천 말이야.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르는데 내가 어디에서 그런 걸 보았는지 모르겠더라.


“수많은 사람이 너로 인해 목숨을 건지게 될 거야. 네가 살아난 건 우연이 아니라 신의 뜻인 셈이지.”


신은 나에게도 덥지도 춥지도, 전기나 물이 끊기지도, 모래와 먼지로 뒤덮이지도 않는 집을 주었어. 괴물의 등뼈가 어긋나는 듯한, 유령이 한숨을 쉬는 듯한,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하는 듯한 소리가 나지 않는 집을 주었어.

일주일에 한 번, 정해진 시간을 제외하고는 나갈 수 없었지만.

그날이 되면 나는 콜로세움의 삼층, 상점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지.

천으로 만든 인형도 있고, 색깔과 무늬가 있는 식기세트도 있고, 유리컵과 털실로 짠 코스터도 있고, 면으로 된 옷도 있고, 일주일에 한 번씩 새로운 물건들도 진열되는 곳으로 말이야. 내 머릿속 옷감은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나는 홀로그램을 켜고 백 년 전의 지구로 날아가는 수밖에 없었어. 숲을 돌아다니고 해변을 산책하는 일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어. 도시로 가야만 마법같은 옷감으로 만든 옷들을 찾을 수 있었거든.

처음에는 예쁜 옷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어떻게 땅을 전부 덮을 생각을 했지, 어떻게 저렇게 높은 건물을 지을 생각을 했지, 어떻게 저렇게 많은 사람이 금속 마차를 타고 다닐 생각을 했지, 어떻게 저렇게 많은 사람이 하루종일 돌아다닐 생각을 했지, 하는 생각뿐이었는데.

나는 점점 그곳에 있는 음식과 물건에 빠져들었어. 지구 전체를 다 덮고도 남을 것처럼 어마어마하게 많고,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사치품들 말이야.

VR핸드 말고 맨손으로 잡아 보고픈 소재도 많고, 어디에 쓰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물건도 많고, 가진 돈을 다 써서라도 하나쯤 숨겨두고 싶은, 눈을 감으면 눈앞에 아른거리는 물건도 많은데, 그 많은 게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항상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네가 그곳에서 왔다는 거였어.

백 년 전의 지구,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홀로그램 속에서.



*


말하다 보니 오해받게 생겼는데 내 궁금증 풀려고 너랑 얘기한 거 아니야. 네가 어떤 애인지는 너와 얘기하다가 알았어. 내가 먼저 만나자고 한 거 아니야. 나는 프리메라니까, 아무나 만날 수 없었지. 아무도 못 만난다는 편이 더 적당하겠지만.

대부분의 호스트는 교실을 같이 썼지만 나는 아니었어. 공동으로 작업을 하는 일도 있었지만 나는 아니었어. 혹시라도 마이크로바이움이 오염되거나 소실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라고 했어.

프리메라가 아니라고 해도 밥은 혼자 먹었어. 사람마다 식단이 다르지. 신체접촉은 금지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신체검사 점수가 떨어지면 월급이 깎이거나, 방이 작아지거나, 홀로그램 사용이 제한되거나, 최악의 경우 회사에서 쫓겨날 수도 있으니까.

테라의 바깥은 온통 사막이야.

날카롭게 반짝이는 모래의 바다.

그래도, 할 사람들은 다 했어. 연애라고 해 봐야 홀로그램으로 대화하는 수준에 그쳤고 그 이상 가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그마저도 단둘이 접속은 꺼릴 수밖에. 회사 시스템에는 기록이 다 남으니까.

딱 한번, 임신을 한 경우도 있었는데 우리는 여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몰라. 어느 날 사라졌고, 남자 한 명도 같이 사라져서 그렇게 둘이 사귄 거구나 하고 알았을 뿐.

너는 사람들이 너를 미워하는 것 같다고 했지만 아니야.

누가 너에게 가까이 가고 싶겠어. 네가 오염되기라도 해서 본인 잘못이라고 판명되면 퇴출될지도 모르는데. 누가 너와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았겠어. 테라에서 너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너는 가장 높은 층에 있는 방을 차지했어. 닥터 이자의 방과 같은 층. 아무리 프리메라여도 그렇게 좋은데 사는 건 처음 봤어. 경호원이 따라다니는 것도 처음 보았고, 프리메라에게만 붙는 개인 코디네이터도 너에게는 세 명이나 있었지.

왜 갑부 노인이라는 소문이 났는지 이제 이해되지?

회사에서 누군가에 대해 공개적으로 설명하기도 처음이었네. 아예 홀로그램에 접속하면 뜨는 공지사항 중에 적혀 있었어. 너는 오지에서 구조되었는데 평균보다 세균 다양성이 이십여 퍼센트 높고 그 중 7-8퍼센트는 현재 발견되지 않는 세균종이라는 거였어. 오해와 추측으로 회사의 중요한 구성원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일은 삼가달라는 내용이었지. 우리는 그 말을 아주 잘 알아들었고. 타인의 감정을 침해하는 행위에 대해서 테라는 매우 엄중한 태도를 가지고 있으니까. 너는 아랑곳하지 않았지만.

너는 내가 있던 상점에 불쑥 들어왔어.

물건을 구경하는 척 내 손을 살짝 잡았다 놓았어.

나는 소리를 지를 뻔 했지만 너의 짧은 미소가 입을 막았어.

내 손에 와닿은 것이 네 손인지 확신이 안 가기도 했어. 무언가가 손안에 남아 있었거든. 설마 내가 찾아 헤매던 옷감의 감촉인가 싶어서 놀라기도 했어. 정말 부드럽고 녹을 듯한 감촉인데 두 번이나 접은 종이라니 방에 들어와서는 더 놀랐지만.

나라면 그런 엄청난 물건에 글씨를 쓰지는 않았을 거야. 아마도 바늘 따위로 소스 같은 것을 조금씩 떨어뜨려 쓴 모양이었는데 여기저기 번지고 모양도 예쁘지 않았지만 알아보기는 했어. 딱 한 문장이었으니까.


‘보러 가도 돼?’


무슨 뜻인지는 이해하기 어려웠지.

그렇잖아, 보러 간다는 게 대체 뭐야?


‘보러 가도 돼?’


솔직히 화가 났어. 무례한 짓이라고 생각했지. 나와 대화를 하고 싶은 거라면 홀로그램에 접속했을 때 메시지를 보내도 돼. 나는 받아 들일 수도, 않을 수도 있지. 시스템에 기록을 남기기 싫어서 생각해 낸 방법이라면 좋아, 내 대답은 어떻게 들을 참이지? 나도 비뚤배뚤 써서 종이를 갖고 다니다가 어느 날 네 손 안에 쥐어주면 되는 건가? 아니면 시스템으로 메시지를 보낼까? 나 혼자 흔적이 남게? 내가 먼저 말을 건 것처럼?

어느 날 벽에서 소리가 났을 때 나는 뭔가가 고장난 줄 알았어. AI한테 물어보아도 아무 이상이 없다기에 잘못 들었나보다 했는데 잠시 후에 소리가 또 났지.

나는 타운에 있던 빌라를 생각했어. 종일 듣던 소리가 떠올랐어. 커다란 애벌레가 방귀 뀌는 듯한 소리, 발을 헛디딘 요정들이 데굴데굴 구르는 듯한 소리, 늙은 공룡의 등뼈가 어긋나는 듯한 소리. 빌라가 살아 있다는 상상을 한 적도 있었지. 언젠가는 등뼈를 다 맞추고 일어나서 우리를 사막 저편으로 데려다줄 거라고. 하지만 그 소리는 단순하고 건조했지. 아무런 상상력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소리였어.


똑, 똑, 똑.


엔지니어이자 나의 친구인 죠셉 아저씨를 불렀지. 죠셉 아저씨는 패드를 들고 이것저것 점검하더니 아예 벽의 타일을 통째로 떼어내더라. 내 방이 쉽게 떼어낼 수 있는 식이었다니 당황스러웠어. 철제 프레임에 각종 기계가 붙어 있었어. 내 방 전체가 프레임에 매달려 있는 셈이었지. 기계 사이 사이로 아찔한 어둠이 보이고.


“저 밖은 뭐예요? 왜 어두워요?”

“밖이 아니라 서브 모듈이라는 거야.”

“그게 뭔데요?”

“이래저래 좋은 거. 빈곳이 있어서 너희가 잘 사는 거지.”


죠셉은 모니터를 보는 채로 말했다.


“혹여라도 나갈 생각하지 마라.”

“제가 저길 왜 나가요?”

“사람들이 많이 죽었어. 아주 위험한 곳이야.”


나는 며칠 잠을 설쳤나 봐. 잠이 들만 하면 균형을 잃는 느낌이 들어서 깨버리곤 했어. 매달려 있는 기분이 어떤 건지 알아? 나는 가루인데 체에 걸러지는 기분이야.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를 게 없는데 매일매일 걸러지다 보면 뭔가 잃어버린 기분이야. 나는 늘지도 줄지도 않았는데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르고 하지만 바뀌는 것은 없어.

사고를 당하면 매일 꿈에 나온다는데 나는 아니었어. 내 몸은 사라지고 모호하게 더러운 기분만 남은 꿈을 지겹게 꾸었지.


똑, 똑, 똑.


세 번째로 소리가 났을 때 나는 직접 벽의 타일을 떼어냈어. 벽 뒤에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어. 무언가 무서운 것이 있다 해도 하루종일 어지러운 기분보다는 낫다고 생각해서.


“안녕?”


네가 프레임에 매달려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지.


“무슨 짓이야? 죽고 싶어?”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아.”

“내가 밀면 위험해지겠지.”


너는 프레임을 두 팔과 두 다리로 꽉 껴안은 다음 말했다.


“안 밀 거잖아. 여기 정말 경치가 좋단 말이야.”


그러니까 너는, 들어 오려는 게 아니라 나와 보라는 거였어. 단지 나를 보겠다는 게 아니라 나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는 얘기였어. 이상하게 그게 마음에 들더라. 마음에 발이 생긴 것처럼 편안했어.

어둠 속에서 오직 감각만으로 몸을 옮겨야해서 프레임 타기가 쉽지는 않았어. 어디가 경치가 좋다는 것인지 처음에는 전혀 모르겠더라. 나의 방에서 두 층 정도 아래, 작은 테라스 같은 구조물에 앉자 그네를 탄 것 같았어. 양손으로 철제 빔을 붙잡고 나서야 밑을 내려다볼 수 있었어.

생각보다 훨씬 깊어서 의아했어. 숙소동은 삼십 층인데 그보다 훨씬 높은 건 분명했어. 어둡고 멀어서 바닥까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기계마다 달린 크고 작은 표시등의 꽃밭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어서 알 수 있었어.


“왜 보자고 했어?”

“궁금해서.”

“뭐가?”

“너 웃는 모습.”

“웃는 걸 보고 싶은데 어두운 데로 데려와?”

“일단 좀 친해져야 웃을 것 같아서?”


나는 그때 이미 웃고 있었어.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있어서 좋았지. 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해볼 수 있어서 좋았고.


“오지에서 구조됐다던데, 어디서 구조됐어?”


너는 피식, 웃더니 대답했다.


“아마도… 영원 속에서?”


나는 더 캐묻지 않았어. 네가 말한 건 우리가 열 번째 만난 날이었어. 너는 오지가 아니라 질소 탱크에서 구조된 셈이라고. 자신은 백 년도 넘게 냉동 수면 상태에 있었다고. 내가 말이 없자 놀랐냐고, 미안하다고 했지만 나는 그런 게 아니었다. 너에게서 어디선가 맡아본 것 같은데 결코 기억나지 않는 냄새와, 처음인 게 분명해서 이름을 붙여주고 싶은 냄새가 한꺼번에 나고 있었는데 그럼 이 냄새들도 다 얼어 있었겠네, 하는 생각이 들자 이상하게도 잠시 어지럼증이 돌았을 뿐이지.


“냉동되는 건 어떤 기분이야?”

“점이 되는 기분이야.”

“웬 점?”

“아무리 오래 자도 내일 일어나는 기분인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분명 나는 죽어있었는데, 그 안에 까마득한 뭔가가 있었어. 시간도 얼어붙어서 나랑 같이 자는 느낌?”


너는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이었을까.

내가 좋아하는, 수백 년 전의 싯구 같은 말을.

그제야 네가 왜 어둠속의 빛들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이해했어. 첫날에는 내가 무슨 경치가 좋다는 거냐고 물었더니 저 밑을 바라보면 밤하늘을 보는 것 같지 않냐기에 어이가 없어서 또 몰래 웃기만 했는데.

그날부터는 우리가 우주에 있다고 생각했어. 

우주를 가로지르는 성운의 가장자리에 앉아있는 것 같다고.

우주선도 우주복도 필요없는, 뭐 그런 존재가 되어.


*


너의 엄마는 어마어마하게 부자였고 어마어마한 부자는 적도 어마어마해서 너는 납치당하거나 죽임당하지 않기 위해 항상 경호원이 있었고 학교는 안 갔고 가정교사한테 배운데다 또래 아이들과 만나는 유일한 시간은 어른들의 파티에서였는데 아이들이 너에게는 무서운 존재였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기울어진 튜브를 타고 물살에 떠밀리고 있는 나를 상상했어.

나는 납치당하거나 죽임당할 수 있는데도 곤충사냥을 다녔고 학교는 당연히 못갔고 엄마한테는 또래 아이들은 하나같이 악마라는 사실을 배울 수가 없었으니 우리는 공통점이 참 많네, 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

지금의 나는 괜찮고 튜브도 조금밖에 기울어지지 않았고 물살도 세지 않으니까 조금만 팔을 저으면 너와 멀어지지 않을 수 있지만 맨날 나만 하는 것 같으니까 너도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네가 나를 붙잡고 끌고 하는 것 같으니까 제풀에 지쳐서 맡겨버리고 싶은 마음 드는 거 알아? 나도 모르게 그냥 응, 하게 되는 마음 말이야.

어느 순간부터는 너도 네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지. 우리의 우주에서는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고 표정으로 마음을 가릴 수 없어서 목소리가 쉽게 들키곤 했으니까. 서로가 서로의 목소리를 섬세하게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우리가 듣지 않은 것은 침묵보다 말이었나봐.

수술을 하고부터 너는 부쩍 불안해했어. 닥터 이자가 우리의 관계를 눈치 챘을 지도 모른다고 했지. 나는 그럴 리 없다고, 너는 회사에서 제일 비싼 프리메라인데 닥터 이자가 알았다면 아직까지 가만 있을 리 없다고 말했지만 너의 의심은 가라앉지 않았어.

테라에서 너를 치료하기 위해 집어넣은 기계 때문이었어.


“들키면 추방할 지도 몰라.”

“퇴출되는 일은 거의 없어.”

“추방되면 몸속의 기계도 빼앗길 거야.”

“그럴 일 없다니까.”


너의 불안은 물결을 쳤어. 앞뒤가 맞지 않았지.


“접촉하면 마이크로바이움이 바뀐다는 말 믿어?”

“회사에서 왜 그런 거짓말을 하겠어.”

“우리를 통제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르지.”

“무슨 통제?”

“겁을 줘서 고분고분해지게 하려는 거지.”


정말 그렇게 믿었다면 너는 왜 내 손 한 번 잡아보지 않았을까? 네 말대로 모든 게 테라의 거짓말이면 우리가 무슨 짓을 하건 마이크로바이움은 바뀌지 않을 테고, 우리는 건강검진을 무사히 통과해서 아무 일 없이 잘 살았을 텐데.


“왜 완치시키지 않고 기계를 썼을까?”

“걱정마, 다 괜찮을 거야.”

“나를 저당잡으려고 일부러 그랬나 봐.”

“뭐하러 그런 짓을 하겠어.”

“나에게 공포심을 주기 위해서지.”


그래, 공포심. 너는 공포심에 빠져 있던 거야.

왜 그럴 때 있잖아, 무서워서 오히려 과감해질 때. 나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어. 뭐라도 채집해 보려고 사막과 숲 사이를 뒤지다가 맞닥뜨렸지. 부랑자들이었는데, 원하는 게 있는 눈빛으로 나를 보는척 마는척 하고 있었어. 나는 본능적으로 달아나면 붙잡히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았어. 그래서 가방 안에 유리병을 잡아 한 명의 몸을 맞추었지. 일부러 여자를 노려서, 전갈을 잡아 모아놓은 유리병을.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호들갑을 떠니까 남자 둘도 발이 묶였고 나는 그 틈을 타 도망쳤어. 먼발치에서 가방을 샅샅이 뒤지는 장면을 목격하고 그들이 원한 것은 단지 음식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 뒤로는 부랑자를 만날까 봐 항상 촉각이 곤두서 있었어. 그들이 실제로 위험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어. 나는 그걸 고민해야 하는 상황 자체를 피하고 싶었던 거야.

네가 네 얘기를 다시 시작했을 때도 나는 어느새 물살이 멈췄다고 생각했지. 지금까지와는 다른 이야기처럼 들렸거든, 이를테면 너의 아빠 이야기 같은.


“엄마가 오래 외국에 있을 때마다 나를 아빠한테 맡겼는데 아빠는 목초지에 살았어.”

“목초지? 목초지가 뭔데?”

“그냥 내버려두는 곳?”

“뭘?”

“뭐든지. 나무도, 풀도 너무 자라지만 않게. 소도 키우고, 돼지도 키우고, 닭도 키우고.”

“바이오팜 같은 건가?”

“전혀 달라. 내버려두는 곳이라니까?”


나는 너의 체취가 목장에서 온 거구나, 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어. 바이오팜처럼 풀과 가축이 있어서 내가 알 것 같은 냄새도 있지만, 바이오팜과는 전혀 달라서 전혀 모르는 냄새도 있던 거구나, 하고.


“가까운 곳에 숲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

“무슨 숲?”

“드론이 찍어오는 영상 말이야. 바다 옆에 꽤 큰 숲이 있는 게 보였어.”

“그건 방파림이야.”

“방파림도 숲이잖아.”


테라를 믿지 못한다면서, 테라의 영상은 어떻게 믿는지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


“이곳이 완벽하게 순환한다는 말을 믿어?”


너는 매번 그런 식이었어. 세렝게티가 어떻게 고요하고 동시에 풍요로울 수 있었는지를 말할 때에도, 피닉스의 바닷속이 얼마나 신비롭고 다채로웠는지를 말할 때에도, 아마존이 왜 말라가기 시작했는지를 말할 때에도, 말의 끝은 언제나 네가 처음 섰던 자리로 돌아가 있었어. 


“바깥에 아무것도 없다는 건 말이 안돼. 무언가가 남아있지 않으면 이곳도 남아있을 수 없어.”


그러니까 나는, 어느새 맡겨 버리는 마음이 되는 수밖에.


“여기서 나갈까?”


확신에 가득찬 너의 눈빛을 상상하며.


“응.”

댓글 1
  • 메이플 2025-10-04 22:40:25

    2편 어디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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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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