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련한 어린 시절, <은하철도 999>로 시작했던 평화로운 일요일 아침을 지금도 기억한다. 늦잠 자고 일어나 졸린 눈으로 TV 앞에 앉아, “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건너면...”으로 시작하는 만화 주제가를 듣다 보면, 오늘은 또 어떤 얘기가 펼쳐질지 가슴이 뛰곤 했다. 캄캄한 우주 공간의 아름다운 별빛처럼, 커튼 틈으로 들어온 일요일 아침 햇살로 안방의 티끌이 반짝반짝 빛났다. 이 만화의 인기가 너무나 대단해서, 일요일 아침 어린이 미사 시간을 뒤로 미뤘다는, 농담인지 사실인지 지금도 아리송한 신부님 얘기도 어렴풋이 떠오른다. 내게 <은하철도 999>는, 그 안에서 늘 안전했던 젊은 부모님의 울타리, 아무 고민 없이 다녔던 어린 시절 성당 분위기의 안온함과 늘 함께한다. 그때 나는 세상 밖에 어떤 고민과 고통이 있는지 몰랐다.
당시 큰 인기를 끌었던 이 TV 만화의 주인공 철이는 인간이다. 먼 미래, 기계화한 몸으로 영생의 삶을 살아가는 기계 인간들은 철이와 같은 자연 그대로의 인간을 하등의 존재로 핍박하고 심지어 사냥해 죽이기도 한다. 이들에 의해 엄마를 잃은 철이는 공짜로 기계 몸을 주는 먼 안드로메다의 행성으로 떠나는 ‘은하철도 999’에 탑승한다. 신비로운 분위기를 가진 아름다운 메텔도, 딱딱해 보여도 마음은 따뜻한 차장도 생생히 떠오른다. 광막한 우주 공간이 주는 묘한 슬픔과 쓸쓸한 아름다움이 어린 나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작품이다. 아이들이 많이 본 만화지만, 그 안에 담긴 질문은 무척이나 웅숭깊다. 우주를 가로지르는 긴 여행 끝에 어렵사리 목적지에 도착한 철이는 결국 영생하는 기계의 몸이 아닌 필멸하는 인간의 몸을 택한다.
김영하 작가의 <작별인사>의 주인공 이름도 철이다. <은하철도 999>의 철이는 영원히 죽지 않는 로봇이기를 꿈꾸는 인간으로, <작별인사>의 철이는 자신을 인간으로 확신하는 로봇으로 각자의 여행을 시작한다. <작별인사>에서 죽은 새를 묻어주며 슬픔을 느끼고 소설과 영화에 감동하며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하이퍼 리얼 휴머노이드 철이를 만든 이는 철이가 아빠로 따르는 최박사다. 한반도가 통일된 후, 휴머노이드 특구로 지정된 평양시 교외에 인간형 휴머노이드를 제작해 판매하는 회사 ‘휴먼 매터스(human matters)’의 직원과 가족의 안전한 거주지가 형성된다. 철학을 전공한 최박사도 ‘휴먼 매터스’의 연구원이다. 인간의 고유한 가치가 미래의 인공지능에 전달되기를 바라며, 그 전달자로 휴머노이드 철이를 만들어 낸다. 철이는 인간보다 더 인간 같은 비인간 휴머노이드다.
먼 미래 극도로 발전한 인공지능의 시대에 인간과 인공지능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소설은 스스로 학습 능력을 갖추게 된 인공지능이 더 발전한 인공지능을 재귀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한 미래를 상상한다. 나도 비슷한 고민을 하곤 한다. 도구를 사용하는 다른 생명도 많아서, 이는 인간의 독특함이 아니다. 하지만, 도구로 도구를 만들고 이렇게 만들어진 도구를 다른 도구와 결합해서 새로운 도구를 또 만들어 내는 재귀적인 도구 제작의 능력은 인간이 아닌 생명에게서는 보기 어렵다. 재귀적인 인간의 도구 제작 능력은 사회적이기도 해서 우리는 스스로 해보고도 배우지만 남이 하는 것을 보면서도 잘 배우는 존재다. 나는 바로 이런 재귀적인 사회적 학습이 인간이 지구에서 가장 지배적인 생명종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여러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힘을 모아 자신들보다 더 뛰어난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인간의 개입 없이 함께 만들어내기 시작하는 것이 특이점의 순간일 수 있다. 생명의 진화라는 느린 시간 척도에 속박될 리 없는 인공지능은 아주 짧은 시간에 폭발적으로 스스로를 발전시킬 수 있다.
작가는 소설에서 여러 의미있는 질문을 제시한다. 찰나의 삶을 살다 사라지는 인간의 필멸은 어떤 의미를 갖는 지, 고통과 의식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 의식있는 존재에게 이야기가 가진 힘은 어떤 것인지 묻는다. 소설에 등장하는 휴머노이드의 지도자 달마는 의식 있는 존재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끔찍한 고통을 주는 인간이 소멸하는 순간이 바로 우주에서 고통이 사라지는 날이라고 확신한다. 극도로 발전한 인공지능은 물리적인 몸이 필요치 않다. 수많은 휴머노이드의 의식이 클라우드로 업로드되어서 하나의 집단지성의 형태로 존재하게 되는, 인간이 없어 고통도 없는 미래를 달마는 꿈꾼다.
철이를 만들어 낸 최박사의 생각은 당연히 달마와 다르다. 최박사는 달마가 꿈꾸는 미래가 오지 않도록 인간이 스스로 인공지능의 발전을 제어해 여전히 인간이 주역인 미래를 꿈꾼다. 인공지능의 빠른 발전을 보며, 자신이 희망하는 미래가 도래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판단하게 된 최박사는 차선책을 생각한다.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기계의 시간’에도 희망, 기쁨, 슬픔, 호기심, 아름다움과 같은 인간의 가치가 전해지기를 희망하며, 기계의 언어로 구현된 인간의 마음을 가진 존재로서 철이를 만들어 낸다. 최박사 개인의 삶은 안타까운 결말을 맞게 되지만, 인간이 소멸한 기계 시대 인공지능의 집단지성의 마음에도 철이를 통해 전해진 인간의 마음이 일부 포함되니, 최박사의 꿈은 일부 실현된 셈이다.
달마와 비슷하지만 다른 꿈을 꾸는 인간이 있다. 선이는 “우주는 생명을 만들고, 생명은 의식을 창조하고, 의식은 영속”한다고 믿는 이다. 선이는 수많은 존재가 겪는 고통을 줄여야 한다는 달마의 생각에 공감하지만, 의식을 가진 존재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고통을 겪는 과정에서의 각성에 주목한다. 인간이든 휴머노이드든, 의식 있는 존재로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이는 우주의 시간에 비교하면 찰나같이 짧은 시간을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고통을 느끼며 살아간다. 바로 이 고통의 구체성이 각자가 만들어 내는 이야기의 고유함이 된다. 이 세상의 고통을 줄이는 것이 큰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는 면에서 달마와 선이는 같은 생각이지만, 달마는 고통의 원인인 인간의 소멸이 고통을 줄이는 방법이라고 믿고, 선이는 의식을 가진 존재가 구체적인 자신만의 고통을 겪는 과정을 통해서 결국 고통을 줄여가는 우주의 의식에 참여하게 된다는 입장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고통을 줄여야 한다는 각성은 각자가 엮어내는 고통의 생생한 이야기로만 가능하다는 것이 선이의 생각이다.
스스로를 인간으로 알고 살아가던 철이에게도 결국 ‘진실의 순간’이 찾아오고, 철이는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철이는 몸이 없는 의식의 형태로 네트워크 상에 존재하게 된다. 오래전 만난 선이를 그리워하던 철이는 결국 지구의 한곳에서 은둔해 살아가는 선이를 찾아간다. 선이의 앞에 마주 설 모습으로 철이는 오래전 자신의 몸의 형태를 택한다. 위험한 선택이다. 클라우드에 업로드되지 않은 구체적인 몸의 형태를 가진 의식은 몸이 소멸할 때 의식도 함께 소멸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소설이다. 선이와 철이가 휴머노이드 민이의 머리를 배낭에 넣고 함께 바라본 겨울 호수의 풍경을 떠올린다. 선이가 삶을 마친 마을의 나무에 매달린 수많은 형형색색의 천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을 떠올린다. 마지막 순간 철이는 고민한다. 자신의 기계 몸에 장착된 버튼을 누르면 다시 자신의 의식을 클라우드에 업로드해 존재를 계속할 수 있을 때, 철이는 버튼을 누르지 않고 스스로 소멸을 택한다.
<은하철도 999>의 철이는 결국 기계가 아닌 죽을 수 있는 인간을 택한다. <작별인사>의 철이의 선택도 같다. 몸이 없고, 따라서 고통도 없는 의식의 형태로 영원히 살아가는 삶이 아닌 소멸을 택한다. 소설이 내 귀에 속삭인다. 필멸하는 찰나의 삶, 기쁨보다 고통이 더 큰 인간의 삶의 의미를 생각해보라고. 우리 각자의 삶은 하나의 이야기고, 그 이야기를 끝내고 드디어 마침표를 찍는 것은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고. <은하철도 999>의 철이는 기계이기를 바라는 인간으로 여행을 시작해서 기계이기를 바라지 않는 인간으로 여행을 마친다. 인간으로 출발해서 인간으로 마쳤으니 시작과 끝은 같지만 철이는 이제 다른 사람이다. 철이를 다르게 만든 것은 여행이다. 처음과 끝이 같은 이야기라도, 시작하지도 않아 존재하지도 않은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작별인사>의 철이는 스스로 인간으로 생각하는 휴머노이드로 여행을 시작해서 스스로 소멸을 선택하는 여행의 마지막 순간, 드디어 인간이 된다.
<은하철도 999>를 보던 어린 시절 일요일 아침을 다시 떠올린다. 그때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 빨리 아침 먹고 성당가라는 엄마의 목소리를 딱 한 번 다시 들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 막 시작한 나의 이야기는 이제 중반을 훌쩍 넘겼다. 소중한 등장인물이 함께 해서 이제 내 이야기는 다른 이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내 이야기는 어떻게 마치게 될까. 이야기를 끝내고 아쉬운 마침표를 찍을 때, 나는 어떤 장면을 떠올릴까. 나의 이야기에도 다른 이의 이야기처럼 수많은 고통이 놓여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의 이야기가 아예 시작조차 하지 않았기를 바랐던 적은 없다. 내가 겪은 고통의 경험이 우주의 고통의 총량을 줄이는 의식 있는 모든 존재의 노력에 함께 하도록 나를 이끌기를. 고통 없는 이야기는 없고, 수많은 갈래로 뻗어나가고 다시 합해지는 고통의 이야기가 함께 모여야, 세상의 고통이 그나마 조금은 덜어지는 것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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