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Review

한국 SF 황금기의 아이콘, “하우스도르프 연결공간”을 읽고

2025년 3월 통권 234호

SF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 종종 화제가 되는 이야기 거리로 “한국은 SF 영화가 안 된다”라는 속설이 있다. 이 말이 “한국 관객들은 SF를 싫어 한다”라는 뜻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냥 완전히 틀린 이야기다. 소위 말하는 천만 영화 중에도 SF가 몇 편이나 포함되어 있고, 로보캅 시리즈나 터미네이터 시리즈처럼 한국에서도 한 시대를 풍미한 SF 흥행 영화는 여럿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제작한 SF 영화는 잘 안 된다”라는 뜻이라면 이 이야기는 조금 더 의미를 생각해 볼만 하다. 물론 “괴물”이라든가 “부산행”처럼 SF 요소를 많이 활용한 한국 영화들이 흥행한 사례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반대로 야심 차게 많은 예산을 투입했다가 큰 손해를 보고 망한 영화의 기록도 아주 선명하다. 이렇게 보면 대중 문화를 생산하는 한국의 제작 업체들이 과연 어떻게 SF를 만들어야 성공할 것이냐 하는 질문은 여전히 많은 고민과 분석이 필요한 문제다.


문제의 답을 찾기 위해 영화가 아닌 다른 분야의 대중 문화에서 한국 SF는 어떤 식으로 생산되고 유통 되었을까를 먼저 알아 보면 어떨까? 


한국의 문화 상품 중에서 금액으로 보았을 때 해외에 가장 많이 수출되는 분야는 게임이다. 그런데 한국 게임에서 SF는 그런대로 뿌리 깊게 정착해 있는 모습이다. 예로부터 컴퓨터 게임이란 것은 미래적인 느낌이 있는 문화인데다가 초창기 컴퓨터 게임들이 <<아스테로이즈>>나 <<스페이스 인베이더>>처럼 우주 전쟁을 소재로 한 것들이 많았다는 역사적인 이유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렇다 보니 1990년대 초 한국산 컴퓨터 게임이 개발되던 초창기부터 SF 게임들은 무척 많았다. 외계인의 침공을 지구인이 개발한 특수 전투 우주선이 물리친다는 식의 SF 소재는 대단히 흔하게 사용 되었다. 여기에 1990년대 후반부터 몇 년 동안이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스타크래프트>> 시리즈라든가, SF 소재가 쏠쏠히 등장하는 <<오버 워치>>, <<리그 오브 레전드>> 등의 외국 게임들도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그 결과, 지금은 외계인이라든가 미래의 세계라든가 특수한 과학 기술을 사용한 첨단 무기 같은 SF 소재들이 여러 한국 컴퓨터 게임에 등장하는 것은 당연해졌다.


만화는 어떨까? 한국 게임에 유독 SF 소재가 많이 등장하던 시대가 있었던 것처럼, 만화에서도 SF 소재가 특별히 선호되던 시대가 있었다. 우선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어린이용 로봇 만화가 유행하면서 로봇을 등장시킨 SF 만화가 굉장히 많이 유통되었다. <<철인 캉타우>>나 <<로봇 지빠>> 같은 고전적인 만화도 있거니와 그 유행이 이후 시대로 이어져서 SF 만화가라고도 부를 수 있는 고유성이나 김형배 같은 만화가들이 등장할 정도로 SF 만화는 널리 퍼졌다.


게다가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소위 순정만화 작가라고 부르는 여성 작가 중심의 만화계에서도 다양한 SF 만화들이 쏟아졌다. 그러다 보니 SF 만화의 전반적인 수준이 향상 되면서 신일숙, 강경옥, 황미나 등의 순정만화 대표 작가들이 저마다 걸작 SF 만화를 흥행시키던 시기도 있었다.


그런데 그에 비하면 2010년대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웹툰 전성시대에는 SF가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는 느낌은 아니다. 물론 다양한 웹툰 속에 SF 소재들은 분명히 요즘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넓게 보면 가상현실 SF로 분류할 수 있는 “주인공이 게임 속 세상으로 들어 가는 이야기”들은 여전히 종종 웹툰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그 밖에도 시간 여행, 미래적인 새로운 기술, 정체를 알 수 없는 외계인과 같은 악당이 등장하는 이야기 등등도 로맨스에서 스릴러까지 여러 형태의 웹툰에 결합해서 자주 등장한다. 그러니 웹툰 속 SF도 분명 충분한 내실이 있다. 단지 무엇인가의 부족으로 SF 바람이 다시 불게 되었다고 할 만큼 만화계의 전면에 SF가 등장하지는 못한 것 같은 느낌이다.


바로 그런 시각에서 보면 독특하게 눈에 뜨이는 만화가 반-바지 작가의 걸작 SF 만화 단편집, <<하우스도르프 연결 공간>>이다.


<<하우스도르프 연결 공간>>에는 SF 소재를 완연히 살린 단편들이 실려 있다. 얼마나 SF 소재가 강하게 살아나 있는지, 중간 중간 등장하는 판타지 소재의 이야기들조차 SF로 반쯤 가공되어 실려 있는 것들이 많은 편이다. 예를 들면 주문을 외어 신비로운 마법을 사용하는 일의 원리를 풀이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이런 일은 마치 눈에 보이지 않지만 굉장한 능력을 갖고 있는 우리 주위의 외계인에게 그 외계인의 언어로 말을 걸어 부탁을 하면 그 외계인 같은 것이 그 부탁을 들어주는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그것이 곧 마법이다. 이런 식의 해석을 풀어 놓는 것이 결말이다. 이런 이야기는 판타지이지만, 5도, 10도 정도만 각도를 틀어서 보면 SF로 보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이 만화들은 단편이면서도 분량이 극히 짧다. 그래서 너무나 읽기 편하다는 점도 이 책의 큰 장점이다. 책에 실린 대부분의 만화들은 보통 우리가 단편 소설이라고 생각하는 이야기 분량 보다도 훨씬 더 짧다.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오직 단 한 페이지에 모든 내용이 다 표현되어 있을 정도다. 한 페이지에 들어 있는 세 장, 네 장 정도의 그림으로 이야기가 완성되어 있다. 이런 구성은 단편의 묘미인 강렬한 아이디어를 잘 살린다는 맛도 있거니와, 만화 매체의 전통적인 네 컷 짜리 신문 만화 구성과 통하는 느낌도 있어서 만화 특유의 짧지만 강렬한 느낌이 잘 살아 나는 감동도 있다.


<<하우스도르프 연결 공간>>에는 아예 이렇게 한 페이지에 그림과 글이 조합되어 있는 매체의 구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메타픽션도 여러 편 들어 있다. 만화를 구성하는 큰 그림과 작은 그림의 관계 자체가 이야기의 요소가 되거나, 만화를 읽는 방향이나 만화가 그려진 칸이 지나가면 시간이 흘러 간 것으로 본다는 매체의 관습을 이야기의 소재로 가져와 활용하는 내용도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기발하기도 하거니와 이야기의 줄거리와 잘 조합 되어 주제 의식을 더 극적으로 강화하거나 강렬한 신비감을 살려 주는 효과를 내기도 한다. 특히 그림의 표현이 아름다운 몇몇 페이지는 그대로 그 페이지를 떼어 내서 미술관 벽면에 붙여 놓으면 훌륭한 미술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만큼, 이야기의 표현과 담고 있는 주제가 잘 어울려 절묘한 감상을 뿜어 내고 있었다.


<<하우스도르프 연결 공간>>의 또다른 절묘한 점은 다루고 있는 소재 중에 무척 심오하고도 심각한 이야기들이 꽤 많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내가 이 책을 보고 나서 한국 SF 영화나 한국 SF 만화의 전반적인 경향에 대해 생각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보통 소설이 있고, 영화가 있고, 만화가 있고, 게임이 있다고 한다면 문화 분야의 업체들은 대개 소설이 더 심각하고 어려운 내용을 다루고 영화는 그 보다는 좀 더 쉽고 누구나 어렵잖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을 다루어야 한다고 판단한다. 만화나 게임은 그 보다도 더 쉬워야 한다고 보는 경향도 강한 것 같다. 양자 이론의 오묘함이나 우주의 근원을 지배하고 있는 과학 법칙의 무목적성에 대한 고민 등등의 주제는 만화나 게임에서 다루기에는 어울리지 않다고 본다는 뜻이다. 그런 이야기는 단아한 표지를 씌워 펴낸 심각한 느낌의 소설 책에 어울린다고들 생각한다.


그런데 반-바지의 만화들은 정반대의 방향을 택했다. 부담 없이 쉽게 접할 수 있다는 만화의 특색을 역으로 활용해서 오히려 글로 풀어 놓으면 딱딱해서 이해하기 어려울 만한 내용을 과감하게 중심 소재로 대거 활용했다. 모르긴 해도 위상 공간을 다루는 수학 용어인 하우스도르프 공간이라는 말이 제목에 등장하는 책이 한국에서 대량 출판된 것은 단군 이래 최초일 것이다. 바로 그런 과감한 자유로움으로, 격조 높게 꾸민 두꺼운 책에 어울릴 거라는 고정 관념을 가질만한 소재들을 친숙한 그림을 석 장 연결해 만든 한 페이지 짜리 만화 이야기로 마음껏 그려내 보였다. 바로 그 덕분에 독자들이 두려움 없이, 어려울 거라는 걱정 없이, 문턱이 높다는 느낌 없이, 쉽게 색다른 소재에 접근할 수 있게 했다. 반-바지의 만화에 대한 독자들의 호응은 이런 작전이 성공을 거두었다는 증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혹시 이런 성공으로부터 한국 SF 문화를 더욱 여러 영역으로 확대해 나가기 위한 새로운 전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보면 반-바지 만화에서는 또 다른 재미난 특징도 하나 눈에 뜨인다. 2010년대 후반부터 한국 문학에서 SF가 점차 비중을 늘여 가게 되었을 때, 대개 그 흐름의 중심에 있었던 것은 종이책을 주로 출판하는 기성 문학 출판사였다. 새롭게 등장하여 다른 방식의 문학 소비를 이끌어 낸 새로운 유통 경로인 웹소설에서도 SF의 성장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 방식은 달랐다. SF의 뿌리가 펄프 소설, 장르 소설, 대중 문학에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종이책 기성 출판사가 중심이 된 이 시기 한국 SF의 경향은 상당히 특이했다고 생각한다.


<<하우스도르프 연결 공간>>을 비롯한 반-바지의 만화는 주류 웹소설과 비슷한 소재와 구성을 택하기 보다는 종이책 출판사의 SF와 더 가까운 모습을 택했다. 학구적인 소재를 거침 없이 활용하거나, 과감하고 실험적인 시도에 도전하거나, SF 소재를 중심에 두고 탐구하는 듯한 반-바지 만화의 내용은 분명 비슷한 시기 종이책 출판사의 SF와 더 닮은 모습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반-바지의 만화가 최초로 유통된 경로는 잡지나 언론 매체가 아닌 인터넷 SNS 매체였다. 


그러니까 반-바지의 만화는 웹 소설 유통 플랫폼 보다도 오히려 더욱 자유롭게 창작물을 내 보일 수 있는 매체를 활용했으면서도 동시에 전통적인 종이책 출판사의 SF에 가까운 내용을 선보였다. 이것은 매체와 내용을 도식적으로 구분하는 틀에서 벗어나 있다. 인터넷 매체는 대중적이고 쉬워야 하고 반대로 종이책은 좀 더 심각해야 한다는 단순한 구분의 한계를 초월한다. 


지금 돌아 보면, 만화라고 하는 쉽게 소비할 수 있는 형식과 1 페이지에 이야기가 마무리 되는 가벼운 분량이 이러한 초월을 가능하게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종종 웹 소설로 대표되는 좀 더 대중화 되었다고 하는 유통 경로와 종이책 출판사라고 하는 전통적인 유통 경로가 좀 더 과감하게 틀을 깨는 방향으로 다가 가면 뭔가 재미 있는 일이 더 많이 벌어질 거라는 생각에 빠진다. 


그것이 한국 SF의 다음을 가져 오는 좋은 방법이 아닐까? 혹은 양쪽 사이에 어떤 교류와 소통이 더 많이 활발해져도 좋을 것이다. 이미 전혜진 작가나 이서영 작가 처럼 양쪽 모두에 익숙한 SF 작가들이 있는 만큼, 이런 변화가 곧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모든 생각 속에서 나는 반-바지의 <<하우스도르프 연결 공간>>을 황금기라고 할만한 지금 현재, 한국 SF의 상황을 두루두루 상징하는 걸작이라고 정리해 보고 싶다. 한국 SF가 무르익고 성장해 온 토양 속에서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간 줄기 끝에 피어난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고 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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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