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명훈 작가는 에세이 <SF 작가입니다>에서 보통 어떤 소설책의 마지막 부분에 실리는 ‘작가의 말’에 대해 “너무 잘 써도 안 되고 너무 못 써도 안 되는 장르”라고 말한다. 장르야 어떻든, 정보라 작가의 소설집 <너의 유토피아>에서 (초판과 신판의) ‘작가의 말’은 이 작품이 어떤 작품인지를 명확히 말해준다. 그것은 “생존과 상실에 관한 이야기들”이며, “계속 싸우는 이야기”이다.
단편 <너의 유토피아>에서 인간은 행성을 버리고 떠나고, “스마트카”나 “진단 설문용 로봇” 같은 “비생물 지성체”만 행성에 남는다.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는 “혼란스럽고 연약한 존재를 뒷좌석에 태우고 먼 거리를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용도로 만들어”진 스마트카다. ‘나’는 “타이어와 전구와 케이블을 찾아 죽어버린 동료들의 시체를 뒤지다가” “아마도 인간들의 병원이나 그와 유사한 시설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진단 설문용 로봇인 ‘314’를 발견한다. 314는 고장 나 있었고, “1부터 10까지 수치화한다면, 너의 유토피아는.”과 같은 말만을 되풀이한다. ‘나’는 314를 뒷좌석에 태우는데, “뒷좌석에 인간의 형태를 하고 인간의 목소리로 말하는 무언가가 놓여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는다.
소설에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유명한 ‘로봇 3원칙’이 등장한다.
1.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위험에 처한 인간을 모른 척해서도 안 된다.
2.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3. 제1원칙과 제2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자기 자신을 지켜야 한다.
‘나’는 위험에 처해 도움을 청하는 인간을 구하려 위험을 무릅쓰고, “다른 존재를 파괴하거나, 아니면 흡수하거나”하는 방식으로만 작동하는 ‘괴물’ 기계를 피해 달아나며, 태양열 패널과 전지를 준다면 “건물의 일부가 되어 언제나 100퍼센트 충전된 상태로 지속될 수 있을 것이라”는 건물의 솔깃한 제안을 물리친다. “나는 충전하기 위해서, 통신하기 위해서 생산되지 않았다. 나는 느리고 약하고 지적인 존재를 내 안에 태우고 멀거나 가까운 거리를 빠르고 자유롭게 이동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나는 이동하는 존재다.” ‘나’는 자신의 소유주인 인간을 잃었지만, 그래도 살아남아 ‘이동하는 존재’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나간다.
단편 <너의 유토피아>에서 소설의 화자가 ‘스마트카’였다면, 단편 <One More Kiss, Dear>에서는 서기 2069년의 어느 아파트에 있는 ‘엘리베이터’이다. 엘리베이터가 사물인터넷 등을 통해 얻은 정보로 한 인간을 알고 이해하고 애도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5305호에 새로 입주한 거주자가 탑승하자 엘리베이터는 신원을 확인한다. 93세의 여성이다. (서기 2069년에 93세이면 1976년생인데, 재미있게도 정보라 작가도 1976년생이다.) 엘리베이터는 “어디로 모셔다 드릴까요?”하고 묻지만, 5305호 거주자는 대답하지 않고 뭔가 찾는 듯한 동작으로 문 옆의 벽을 더듬는다. 그리고 한숨을 쉬고 나서 말한다. “지하 8층으로 가줘요.” 엘리베이터는 기계의 역사에 대한 검색을 통해 “모든 것이 둥지를 통해 의사소통하기 이전에 운행되던 엘리베이터는 벽에 층수가 표시된 버튼이 탑재되어 탑승자가 원하는 층의 버튼을 눌러야만 작동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5305호 거주자의 동작을 이해하게 된다. 또 엘리베이터는 “그녀의 전화기에 내장된 GPS가 알려준 정보”로부터 그녀가 국립병원에 다니며 파킨슨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녀는 갈수록 연약해진다. 엘리베이터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물의 둥지’에게 묻는다. 인간은 어째서 노화하고 어째서 죽어야만 하는지.
엘리베이터는 5305호 벽의 스피커 설정에서 재생 목록에 단 한 곡이 저장되어있는 것을 발견한다. 소설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Vangelis가 작곡한 <One More Kiss, Dear>이다. 1982년에 개봉된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 삽입된 곡인데, 1930/40년대 스타일의 재즈곡으로 왠지 모를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엘리베이터는 그녀가 짚었던 벽에 남은 손가락의 흔적을 저장하고, 떠나가는 그녀를 위해 <One More Kiss, Dear>를 연주한다.
다소 맥락 없이 떠오르는 질문 하나.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인 유전자>에서 “우리는 생존 기계이다. 즉 우리는 유전자로 알려진 이기적인 분자를 보존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된 로봇 운반자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도킨스에 따르면 “어떤 행성에서 지적 생물이 성숙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생물이 자기의 존재 이유를 처음으로 알아냈을 때다.” 이런 관점에서 인간과 “비생물 지성체”의 차이점은 무얼까? 인간은 과학적 탐구를 통해 (우연히 만들어진) 자신의 존재 이유를 뒤늦게 깨달았지만, 애초에 뚜렷한 구체적 목적을 갖고 만들어지는 비생물 지성체는 생산되면서부터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게 될까? 그렇다면 비생물 지성체는 태어나면서부터 성숙한 지성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단편 <그녀를 만나다>에서 정보라 작가는 그녀의 방식으로 2021년 현실의 상실을 기억하고 애도한다. 소설의 화자인 ‘나’는 20세기에 태어나, 왕년에 데모를 좀 많이 해본, 내일모레 120살이 되는 할머니이다.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서 멀쩡한 청년이 죽었”던 시절로부터 70여 년이 지났으니, 소설의 현재는 아마도 2090년쯤이다. (“김용균 님은 2018년 12월 24세의 젊은 나이에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산업재해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 그때까지 정보라 작가가 살아 있다면, 내일모레 120살이 되는 할머니일 것이다. 여러 면에서 소설의 ‘나’는 현실의 정보라 작가와 닮아있다.
‘그녀’의 팬미팅에 참석하려 줄을 서 있던 그 할머니는 폭탄 테러를 당해 큰 부상을 입는다. 성소수자를 겨냥한 혐오 범죄였다. ‘그녀’는 ‘그’였다. “그리고 그가 군에 입대하고 여성으로 정체화하고 성별 재지정을 결심한”다. 폭탄 테러 이후 3년이 지나서 범인은 잡히고, ‘그녀’의 팬미팅이 다시 열린다. ‘그녀’는 말한다. “저는 행복합니다.” “저는 군인이고, 엄마이고, 아내이고, 음악가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이 모든 걸 다 가질 수 있어야 했고, 이제는 다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 더 행복하게 살고, 행복하고 건강하게 사는 모습을 여러 사람 앞에 당당하게 내보이려고 합니다.” 행사에 참석한 ‘나’는 너무나 듣고 싶었던 그 말을 들으며 운다. 그리고 서늘했던 2021년 봄날의 외침을 생각한다. “변희수 하사를 기억합니다.”
1998년생인 현실의 ‘그녀’ 변희수 하사는 ‘그’였다. 2017년부터 육군에 근무했다. “복무 중 2019년 11월,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수술을 받았다. 그러자 육군본부는 강제 전역 처분을 내렸다. ... 그 후 육군을 상대로 강제 전역 취소를 요구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했지만, 첫 변론을 앞두고 2021년 2월 27일 사망했다.” 사인은 자살이었고, 당시 그녀는 22세였다. 그러나 결국 전역 처분은 취소되고, 순직이 인정되었다. 2024년, 여군 변희수 하사는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미약한 개인이지만 변화에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고 했던 변희수 하사의 바람대로, 세상은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갔다.”
‘작가의 말’에서 정보라 작가는 “세상에 진짜로 변화를 가져오는 움직임”으로서 유토피아에 대해 언급한다. “인본주의적-자유주의적 유토피아적 태도는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이상 사회가 내 눈앞에 나타나진 않겠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더 좋은 세상이 반드시 올 테니까 꾸준히 그때까지 노력한다는 태도라고 한다.” 그런 노력은 단편 <씨앗>에서 ‘정장 인형’들에게 심어진 씨앗 같은 것이다. “바람을 타고 우리가 뿌린 씨앗이 춤추며 돌아오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혐오 세력이 승리한다면, 단편 <여행의 끝>에서처럼 다른 사람을 식료품으로 여기며 물어뜯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그녀는 말한다. “상실하면 애도해야 하고, 상실을 기억하고 애도하기 위해서는 생존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기억하지 않는다면 상실된 사람들을 누가 기억해줄 것인가. 그리고 행동으로 애도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런 상실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정보라 작가는 독자들에게 당신의 유토피아도 나의 유토피아와 같은지 묻고 있는 것 같다.
참고문헌
[1] SF 작가입니다, 배명훈, 문학과지성사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래빗홀
[3] “여군 변희수, 현충원에 잠들다 [시선]”, 박미소 기자, 시사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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