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분야의 연구자가 아닌 사람이 필자에게 ‘하는 일 또는 연구 주제’에 관해서 물으면 꽤 당혹스럽다. 최대한 포괄적으로 이야기한다고는 하지만 다음으로는 거의 항상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쉬운 말로, 아니, 한 마디로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라는, 답하기 매우 어려운 질문을 만나게 된다. ‘쉬운 과학’, ‘과학의 대중화’는 과연 형용 모순(oxymoron, 모순어법)인 걸까? 도대체 얼마나 쉬워야 할 것이며 여기에서의 ‘대중’은 과연 누구일까?
노벨상이 발표되는 매년 10월 초에는 모든 언론에서 갑자기 과학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는데, 여러 매체에서는 관련 분야의 전문가를 섭외하여 ‘노벨상 해설’을 한다. 하지만, 이때 대중의 관심은 주로 언제 한국에도 노벨 과학상 수상자가 나올 것인가, 왜 우리는 노벨상을 타지 못하는가 등으로, 정작 수상자들이 어떤 일을 했고 그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지는 못해왔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주위를 보면 대중들이 과학에 대한 관심은 꽤 있지만 내용이 어렵기도 하고 어디에서 적절한 정보를 얻어야 할지도 확실하지 않아 관심을 더 발전시키기 쉽지 않은 것이 그간의 현실이었다. 전통적인 ‘과학 대중화’는 주로 과학잡지, 전공서가 아닌 과학 도서, 대중을 위한 과학 강연 등의 경로를 통하여 이루어져 왔다. 특정 도서가 대학, 혹은 특목고 입시에 도움이 된다는 소문이 돌면 그 도서가 이례적으로 많이 팔리는 경우가 있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과학 도서는 그다지 존재감을 보이지 못한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어느 정도 팔리는 과학 도서들은 그나마 대부분 아동 대상이었고 대중 강연도 아주 활성화되었다고는 보기 어려워, 일반 성인을 대상으로 한 과학 내용의 풀이와 설명은 거의 없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런 상황은 지난 몇 년간 유튜브와 같은 SNS의 폭발적인 발달로 인하여 크게 바뀌게 되었다. 물론, 이전에도 인터넷을 통하면 약간의 노력을 거쳐 양질의 정보를 찾아낼 수 있었으나 유튜브에서는 가만히 있어도 어려운 과학의 내용을 수 분 내로 요약하여 시각적 정보와 함께 ‘쉽게’ 설명해주며 심지어 재미있기까지 하다! 꽤 어려운 부분의 핵심을 짚어 잘 소개해주는 몇몇 유튜브는 필자도 가끔 보며 효과적 설명법에 감탄하기도 한다. 유튜브에서 크게 인기를 끌고 있는 진행자(크리에이터)들이 방송에 진출하여 여러 패널에게 과학 관련 내용을 설명해주는 경우도 꽤 많아져 이들이 연예인급의 인기를 누리기도 한다. 과학 전공생 중에도 ‘과학 크리에이터’를 꿈꾸는 학생들이 꽤 있는 것으로 안다. 물리학자 중 유난히 글을 잘 쓰시고 여러 분야에 관심이 많으며 설명을 쉽고 재미있게 해 주시던 분들이 몇 분 계신데 이분들 중에서는 TV 광고에도 출연하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도 하였으며 수십만 이상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분도 있어 대중들도 쉽게 알아보는 ‘스타 과학자’가 출현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양자 얽힘 같은 말들이 일상적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고 필자의 직업을 아는 사람들로부터는 이러이러한 유튜브를 보고 ‘양자 역학’에 관심이 생겼는데 조금 더 공부해보고 싶으니 적당한 입문서를 추천해달라는 말을 꽤 많이 듣고 있다. 필자가 물리학도를 거쳐 물리학자가 된 30여 년 동안 지금이 이러한 움직임이 가장 활발할 때가 아닌가 한다.
한국물리학회 차원에서도 물리를 대중들에게 친숙하게 만들고자 하는 고민을 오랫동안 해 왔고 실제로 상설위원회 중 ‘물리대중화위원회’가 있어 소속된 위원들과 위에서 얘기한 ‘스타 물리학자’를 포함한 많은 물리학자가 적절한 주제 선정, 강연회 등의 행사 기획 및 진행 등 ‘물리의 대중화’를 위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학회 홍보 잡지’의 성격으로 1992년 ‘물리학과 첨단기술(Physics and High Technology, 이하 물첨)’지가 격월로 발간되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물첨’이 월간 발행으로 전환된 1998년부터는 ‘물첨’의 기조가 ‘일반 교양화’를 지향하고 있다. 즉, ‘물첨’이 한국물리학회의 물리 대중화 방편의 한 축을 맡게 된 것이다. 필자는 2023년 1월 1일부터 2024년 12월 31일까지 2년간 제17대 편집위원장으로 ‘물첨’의 발행을 총괄하였다. 현재 ‘물첨’은 웹진으로 발행되고 있다(연결링크: https://webzine.kps.or.kr/?main=Y). ‘물첨’ 내용 중 ‘교양화’의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은 ‘특집’이다. ‘물첨’ 운영위원회에서 당시 큰 이슈가 되고 있거나 물리학계의 큰 관심을 끌고 있는 연구 분야를 위주로 특집으로 다룰 주제를 선정하면(매년 12월호는 노벨상 특집으로 편성된다) 해당 주제에 대한 전문가를 섭외하고, 이 전문가가 몇 분의 다른 전문가를 섭외하여 팀을 구성한 후 이 팀이 수 편의 특집 원고를 작성하게 된다. 이때, 원고의 주 대상은 대학원생, 혹은 관련 분야를 연구하고 있지 않은 비전문가 연구자들이다. 특히 첫 번째 원고는 보통 해당 주제에 대한 ‘소개’의 성격을 띠고 있어 학부생이나 비전공자, 비전문가들이 읽기에도 어느 정도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물첨’ 관련 일을 하기 전에도, 필자는 ‘물첨’의 애독자였는데 특히, 특집 원고들로부터 다양한 분야를 접했고 이로부터 연구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도 했었다. 이렇게 보면, ‘물첨’은 특정 주제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아닌 물리학자, 물리학도를 대상으로 내용을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는 역할을 한다고도 생각할 수 있겠다.
2024년 발행된 물리학과 첨단기술(https://webzine.kps.or.kr/?p=5)
필자의 임기 중, “특집 원고들이 일반 대중이 보기에는 너무 어려운 것 아니냐”는 물음이 물리학회 내에서 제기되어 ‘물첨’ 운영진들이 ‘물첨’의 정체성에 대하여 고민을 한 바가 있다. ‘물첨’ 특집 원고들의 수준은 꽤 전문적인 소개로부터 학술지에 발표할 만한 논문 정도의 깊이에 이르는 경우도 있어 일정 수준의 물리학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일반 대중이 읽고 이해하기는 쉽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물첨’이 진정한 물리 대중화의 창구로서 역할을 하려면 유튜브, 대중 과학 도서에 이미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그에 필적하는 수준의 자료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주어진 여건과 제한된 인적, 물적 자원을 가지고 대중 접근성이 뛰어난 유명 필자를 섭외할 수 있을지, 높은 수준의 시각 자료 등을 얼마나 ‘물첨’ 내에 구현할 수 있는지 등 현실적인 문제에 당면하기도 했고, 이미 그렇게 자리 잡은 매체들이 충분히 있고 대중들이 이를 즐기며 물리학에 거리감을 줄여나가고 있는 마당에 ‘물첨’까지 굳이 이를 지향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 의문이 들기도 하였다. 수 차례의 논의 끝에 적어도 필자가 편집위원장을 맡고 있는 중에는 ‘물첨’이 현재의 형태와 기조를 유지하기로 하였다.
물리학회 관련 기관에서 발간하는, 학술지가 아닌 월간 잡지로는 대표적으로 영국 IOP (Institute of Physics) Publising에서 발간하는 ‘Physics World‘ (이하 ‘PW’)와 미국 AIP (American Institute of Physics)에서 발간하는 ‘Physics Today’ (이하 ‘PT’)가 있다. ‘PW’지의 사명(mission)은 ‘Physics World represents a key part of IOP Publishing’s mission to communicate world-class research and innovation to the widest possible audience.’ 으로, ‘Physics World는 세계적 수준의 연구와 혁신을 가능한 한 널리 알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IOP 출판국의 사명을 실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PT’지의 사명은 ‘Physics Today's mission is to be a unifying influence on the physical sciences by cultivating a shared understanding, appreciation, and sense of belonging among physical scientists.’으로, ‘물리학 분야에서 공통의 이해와 가치를 공유하며, 물리학자들 간의 소속감과 상호 존중을 고취함으로써 통합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라 하겠다. 두 잡지 모두 주요 독자는 물리학자들이고 ‘물첨’의 특집에 해당하는 연구 내용 소개 부분이 있으며 이 부분의 수준이 상당히 높은데, ‘PT’는 학술적 깊이를 보다 더 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많은 연구자들이 ‘PW’와 ‘PT’를 새로운 연구 분야 탐색에 활용하고 있다. 현재 ‘물첨’도 이 두 잡지와 비슷한 방향을 유지하고 있는데 전문가들이 최신 연구를 “우리말로” 비교적 깊이 있게 소개하므로 ‘물첨’이 물리학도들과 신진 연구자 및 새로운 연구 분야를 탐색 중인 연구자들에게 부담 없는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겠다고 보인다. 실제로, 몇몇 대학교에서는 학부 고학년과 대학원 수업 및 세미나 자료로 ‘물첨’을 종종 활용한다고 하며 영재고나 과학고에서도 참고자료로 ‘물첨’의 특집 기사를 사용한다고 한다.
정리하면, 일반적으로 말하는 ‘과학의 대중화’는 과학잡지, 유튜브, 방송 등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전문가와 크리에이터들이 주도하는 영역으로 남겨두고, ‘물첨’은 ‘세계적 수준의 최신 연구 동향을 우리말로 심층적으로 소개’하여 물리 연구자들에게 고급 정보를 제공하고 연구의 흥미를 북돋우며, 학문의 저변을 확장하는 데 기여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특히, 한국어로 된 전문 콘텐츠와 교육 자료가 부족하다는 현실을 고려할 때, ‘물첨’은 언어적 접근성을 개선하여 물리학을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보다 친숙한 자료를 제공함으로써 물리학 연구와 대중화, 교양화의 가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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