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Review

기술 발달의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황모과의 노바디 인 더 미러 에서의 포스트휴먼 존재 양상

2025년 1월 통권 232호

기술은 우리를 어떻게 존재하게 하는가?


2017년 이탈리아 신경외과 의사인 세르지오 카나벨로(Sergio Canavero)는 사지마비 등의 질병이나 장애를 가진 환자의 머리를 뇌사 상태인 사람에게 이식하는 기술에 대한 계획을 발표했다. 그는 이에 대해 ‘머리 이식(head transplantation)’이라고 명명했는데, 그로부터 10년도 지나지 않은 2024년에 미국의 신경과학 스타트업인 ‘브레인브릿지(BrainBridge)’가 해당 기술을 개발이 완료되었다는 발표를 하게 되었다. 기술의 발달은 어느덧 우리들 앞에 다가오게 되었고, 우리는 그 기술의 발달이 우리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2017년 기술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기술적인 효용성 이외에도 여러 가지 윤리적인 문제들이 함께 논의 되어왔다. 하지만 실제 기술의 구현이 눈앞에 도달한 지금, 우리는 실질적으로 머리 이식된 사람들을 어떻게 현재의 공동체에서 제도와 구조 안에 포섭할 것인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특히 이러한 기술이 현실화 되었을 때 윤리적인 문제 이전에 존재 자체를 인식하는 것에 대한 문제는 훨씬 더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문제이다. 예를 들어, 사지마비의 질병을 가진 A의 머리를 뇌사상태인 B라는 사람에게 이식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이 사람을 A라고 인식해야 할 것인지 B라고 인식해야 할 것인지 어떠한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의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뇌사 상태를 오히려 죽음으로 규정한다고 하니 사지마비였지만 뇌는 살아 있었던 A라고 판단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여기에서 좀 더 나아가, A와 B의 성별이 서로 상이했을 때, 우리는 이 사람의 성별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단순히 성기를 기준으로 하여 출생시에 그러한 것처럼 지정성별을 부여하는 것이 과연 당연할 것일까? 성별에 대한 문제는 제도적으로 조정해야 할 문제라곤 하지만 <얼터드 카본>과 같은 비슷한 설정의 SF 작품에서의 예들을 보면 이는 자본과 사회적 효용에 따라서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입장에서 뇌사에 이른 이의 몸에 다른 이의 뇌를 페어링(pairing)하는 이야기를 다룬 황모과의 노바디 인 더 미러(아작, 2023)는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사회에서 인간의 존재 문제에 대해서 흥미로운 지점들을 사고실험하게 해주는 작품이다. 보통 이러한 영역을 다루는 SF 작품들은 기술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춰 기술이 인간‘성’을 어떻게 위태롭게 하는지를 이야기하고, 결국 인간의 고유한 의미를 지키는 것으로 귀결되던 것이 일반적인 방식이었다. 하지만 현대에 인간이란 특정하거나 고유한 의미를 지닌 절대적 존재이거나 유일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환경과 물질들 사이의 촘촘하게 연결된 관계 속에서 다양하게 정의되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는 기존의 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는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으로 설명할 수 있다.


노바디 인 더 미러는 이러한 맥락에서 읽어낼 수 있다. 이 작품은 기술과 그로부터 발생한 세계의 변화와 영향력들을 건조하지만 단단하게 서술하고 있는데, 그러기 때문에 소설적인 연결이라기 보다는 보고서 혹은 사고실험 레포트를 건네받는 것 같은 느낌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특징 때문에 오히려 하나의 기술이 어떠한 문제 상황들을 만들어 내는가를 가지고 단순한 공포로 몰아가지도 않고, 그렇다고 특별한 주인공이 영웅적인 면모를 통해 세계의 모든 부조리들을 일거에 해결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기술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만이 아니라 다양한 상황들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펼쳐놓는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가치를 부여하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어떤 사건에 대한 르포르타주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기술이란 것은 그렇게 다양한 입장과 상황들을 만들어 내면서 우리의 삶에 침습하고, 우리의 존재들을 변화시키기도 한다는 것을 담담하지만 자세하고 치밀하게 그린다.

                                   

단독자, 복합자, 부존재들의 세계


노바디 인 더 미러에서는 브레인 페어링(brain pairing)이라는 기술을 통해서 존재할 수 있는 기술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그리고 이 기술로 인해서 발생하는 존재들을 각각 장의 제목으로 설정하면서 설명하고 있다. 결국 소설은 브레인 페어링 기술에 의해서 몸과 정신(뇌)이 각각 자의적으로 조정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1장의 제목은 “제삼, 단독자”이고 2장의 제목은 “이혜, 복합자”, 3장은 “제삼, 부존재”이며 에필로그는 “주희, 그리고 공존자들”이다. 이 제목들은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그들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우리가 인식하고 있던 존재에 대한 문제에 회의를 던지면서 그것에 대해 재질문하게 만드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1장의 제삼은 브레인 페어링을 받은 김영일이다. 제삼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전의 김영일과는 다른 사람이고 두 번째나 세 번째 김영일이라고 생각해달라고 스스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브레인 페어링 기술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 드러난다. 이는 몸이라는 것을 존재의 중심에 두고 다른 이의 뇌가 페어링 된 채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김영일의 ‘원본’이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고 증언하는 제삼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노바디 인 더 미러의 세계에서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몸’이라는 물질적인 상징이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보통 신체를 교환하거나 보강하는 서사들의 경우 뇌 혹은 정신을 존재의 핵심으로보고, 현대 의학에서도 뇌를 생존의 기준으로 보는 것을 감안했을 때 이와 같은 설정은 오히려 기존의 관습들을 전복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의 흥미로움은 여기에서부터 발생하는데, 이렇게 변화하게 된 제삼이 오히려 기존의 김영일보다 훨씬 더 괜찮은 사람인 것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기존에 몸과 영혼이 일치하지 않았을 때 진짜가 아니라는 문제를 공포스럽게 연출하던 관습을 전복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소설은 기술에 대한 문제 제기에서 그치지 않고 몸 안에 다른 이들의 뇌가 페어링 되면 그들을 우리가 어떤 존재로 인식해야 하는가에 대한 사고실험으로 이어진다. 복합자와 부존재가 바로 그것이다. 소설에서의 브레인 페어링은 뇌사자의 몸에 기존의 다른 뇌를 그대로 이식하는 형태가 아니라 컴파일링이라는 개념으로 일정하게 학습을 시키는 것에 가깝다. 2장에서 등장하는 김영일의 아내인 박이혜는 이 점을 이용해서 자신의 뇌를 그대로 유지한 채 사회적으로는 죽었으나 실험을 위해 안치되어 있던 ‘좀비’와 같은 존재 주희와의 브레인 페어링을 시도한다. 여기에서부터 소설의 세계가 가지고 있는 이격이 발생한다. 뇌사라는 것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가, 뇌가 기능을 하지 않다고는 하고 있지만 외부에서 일정한 자극을 주었을 때 반응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렇게 인간의 뇌와 똑같은 상태의 뇌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세상에서 인간의 존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결국 박이혜는 주희와 공존하는 복합자가 된다. 보통 하나의 몸의 두 개의 영혼 혹은 존재적 기억이 공존하게 되면 극심한 혼란과 불안을 유발하는 것이 기존까지의 서사에서 흔히 보아오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니면 그러한 존재의 공존이 이야기에 심각한 문제들을 불러일으키면서 사건의 발달이 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정상성 혹은 존재에 대한 고유한 의미들을 중심에 두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노바디 인 더 미러는 그러한 형태로 서사를 구축하지 않고 오묘한 연속성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단절에 대해 이야기한다. 박이혜가 복합자로 존재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이들은 하나의 몸에 존재하고 있으면서도 서로를 과도하게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배려하면서 존재하고 있다. 공생(symbiosis)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공존(co-habitation)하고 있는 것에 가까운 형태인 것이다. 그렇다면 제삼 역시 그러한 공존의 상태에 있진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고, 거기에서 이 세계의 비밀들이 하나 둘 드러나게 된다. 부존재를 그러한 은폐된 부조리를 드러내는 명칭인 것이다.


우리는 공존자들의 세계를 꿈꿔야 할까?


결론적으로 제삼은 자신의 뇌를 페어링 하면서 관여했던 모든 부조리들과 거기에 관련되어 있던 문제들을 받아들이고 스스로의 세계를 능동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행동을 한다. 여기에서 능동적으로 수행을 했다는 것은 존재로서 굉장히 중요한 영역인데, 이를 통해 제삼은 더 이상 제삼이라는 존재가 아니라 김영일이라는 존재로 자리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어떠한 고유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불합리와 부조리,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서 연관되게 된 모든 이들과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을 수 밖에 없는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존재 방식에 대한 이상향은 박이혜를 통해 구현된다. 박이혜는 연구실에 있었던 주혜 뿐만 아니라 다양한 동물들과 기증된 인간들을 모두 받아들여 복잡자가 아니라 거대한 군집과 같은 공존자가 되어버린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주혜와 복합자가 되었을 때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을 온전히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박이혜는 자신이 죽어있다고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공존자가 되어버리고 난 뒤에 오히려 생존이 과연 미덕이고, 그것을 위해서 다른 어떠한 것들도 정당화될 수 있을까를 재질문한다. 생의 아름다움과 자아실현에 대한 숭고함 등의 회의도 발생하게 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받아들였던 다양한 존재들에 의해 박이혜의 존재를 좀 더 뚜렷하고 명확하게 정립되어 간다. 공존자들이 자신들만의 논의를 통해 원본이라고 할 수 있는 박이혜의 존재를 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공존자로서의 박이혜는 다양한 개체(거기에는 인간 뿐 아니라 동물을 비롯한 다양한 비인간 존재들까지 포함되어 있다)들이 상호인정하여 존재하는 인간이 된다. 이는 단순히 공생의 영역을 넘어 다양한 개체들과 그것을 둘러싼 기술과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기억과 지식, 경험들까지를 아울러 새로운 존재로 공생발생(symbiogenesis)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기존의 진화에서와 같이 서로 경쟁하여 우위를 차지하지도 않고, 각각의 존재들을 인정하면서 존재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존재를 단절시킬 수 있는 과감함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느슨하고 오묘한 연결을 유지해야 하는 감각들이 필수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이상적으로 가능하게 되었을 때 박이혜라는 공존자가 존재하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그러한 공존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롭게 자신의 존재를 정립하기 시작한 제삼과 그들이 만든 모든 이들에게 만족감과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집의 환경이 필요하다. 하나의 몸에 거대한 세계가 들어왔다고 해서 그것으로 완성되었더나 이상적인 의미부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노바디 인 더 미러에서 결국 하고자 했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의 몸과 다양한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확대해서 사고해 보면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들여다 볼 수 있다.


기술은 우리 사회를 예전보다 더 촘촘한 연결망으로 연결하고 있다.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이들과도 우리는 생각보다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인간 뿐 아니라 다양한 종들과 기술적 층위에 의해 만들어진 다양한 맥락들 가운데 위치하게 된다. 단순히 생물학적인 변화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술로부터 촉발된 다양한 변화들 사이에 위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우리는 결국 공존자로서의 인식들을 지향하지 않으면 다양한 문제들을 발생시킬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가고 있기도 하다. 인간중심주의로부터의 인식론적 전회, 평평한 존재론, 비인간 개체들에 대한 재인식 등의 다양한 문제제기들은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방법들을 취할 수 있을까, 박이혜가 그랬던 것처럼 다양한 존재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서로의 단절을 인정하고 느슨하지만 오묘한 연속성을 지향할 수 밖에 없다.


학자들은 우리가 포스트휴먼이 되어야지만 현 시대의 문제들과 전지구적인 위기상활들에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역설한다. 그리고 현대의 포스트휴먼은 능력이 일취월장한 영웅적 인간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한계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다양한 개체들과의 연관성을 인정하며 공생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흐름에서 보자면 우리는 결국 노바디 인 더 미러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은 공존자들의 세계를 꿈꿔야하는 것이 맞다. 박인혜라는 몸을 하나의 세계 혹은 집단, 혹은 국가와 민족과 같은 개념으로 치환해 보면 그 안에 다양한 개체들과 의미들이 공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우리에게 도래한 현실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더 많은 단절과 연속들을 이야기 해야한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들을 공유하는 제삼과 같은 다양한 세계들과 연대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다양한 존재들이 안심하고 존재할 수 있는 하나의 세계를 비로소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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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용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