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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의 물리학회를 향한 첫걸음

2025년 1월 통권 232호

한국물리학회장. 이 무거운 무게를 감당할 엄두도 내지 않았다. 또한 하고싶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어느 정도의 사회적 경륜이 쌓이게 되면 서서히 그 시대 그 공간에서의 역할이 주어지는 듯하다. 나 역시 그랬다. 어느 정도의 주변의 압박을 받았으나, ‘나보다도 더 훌륭한 물리학회 회원이 나설텐데 굳이 내가 나설 필요까지 있을까?’ 하지만 두번째로 내게 기회가 주어졌을 땐, 정말 뭔가를 바꾸고자 한다면 나서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가만히 있는 한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라는 생각에 앞으로 나설 용기를 냈었다. 


전국 물리학과를 방문해야 한다고 했다. 처음에는 물리학과를 방문하지 않고 줌으로 미팅을 하면 어떨까 싶었다. 전임 학회장 후보로 나선 분들이 전국의 학교를 방문하면서 결국은 매년 비슷한 얘기들이 반복되는 것 같았고, 해당학과 교수님들의 참석도 그닥 많지 않았기에 별 쓸모가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안 가면 들러리로 생각할 거라는 주변의 충고에 하는 수 없이 길을 나서기로 했다. 이왕 나섰으니, ‘그럼 나는 쓸모 있게 만들어보자’ 생각했고, ‘바꾸고자 한다면 나부터 시작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 다녀간 많은 후보자들과의 간담회에서 나누었던 얘기들, 제안들, 희망사항, 비전 이런 것들은 다 어디 갔을까? 그게 아쉬웠다. ‘그렇다면 기록을 해두자. 내가 학회장이 된다면 임기 2년 동안의 길잡이 역할을 해줄 수 있을테고, 설령 선출되지 않더라도 결국은 다른 분이 참조할 수 있는 자료가 되지 않을까?’ 하루에 두세 군데를 방문하였다. 뒤늦게 뛰어든 선거라 다닐 수 있는 기간도 짧았던 데다가 미리 계획되었던 해외 출장도 끼어 마지막 투표하는 주까지 빡빡하게 다니면서 회원들을 만났다. 기록을 하다 보니, 공통적인 주제도 물론 있었지만, 학교들마다도 달랐고, 또 개인별로도 새로운 관심과 아이디어들이 많았다. 다니면 내가 비전을 제시해야 할 줄 알았는데, 그보다는 얻어듣는 게 더 많았던 시간이었다. 낮에는 바쁘게 사람들을 만나고, 밤에는 또 그 기록을 하면서 나름대로의 방안을 고민해보고. 쉽진 않았지만 새로운 사람들에게서 새로운 생각을 듣는 것이 나름 재미도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이 기록을 나만 보기에는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런 생각을 공유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학과장을 통해서 자신의 학과 교수님들과 생각을 공유하게 하면 어떨까? 내가 잘못 이해한 부분도 수정할 수 있고, 또 미처 바빠서 참석하지 못한 교수님들의 피드백도 받을 수 있고. 의외로 반응이 괜찮았다. 본인 학교 로그를 방문했다가 다른 학교를 방문해보시는 교수님들도 생기고, 어느 정도 공간적인 공감대가 생기는 듯했다. 그렇게 전국을 다 돌았다. 미처 준비가 충분하지 못했던 내게는 학회장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회원들이 학회에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파악하는 좋은 시간이었던 것 같다. 또한 여러 회원들께서 좋은 의견을 많이 주셔서 감사한 시간이기도 했다. 


내가 회장으로 나서면서 걸었던 캐치프레이즈가 ‘바꿉시다 우리 모두의 물리학회로!’였다. 방문하는 기관들의 첫 질문이 “그래서 뭘 바꾸실 건데요?” 였다. 맞았다. 나는 뭘 바꾸고 싶었던 걸까? 모든 것을 바꾼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이제까지 많은 부분들은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가장 효율적이라고 검증된 것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막연하게 지금 이대로는 너무 정체되어 있어 지루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학회에서 학생들 발표도 시키고. 학회 가면 전국에 흩어져 있는 동창들도 만나고. 이런 거 외에 더 뭐가 있지? 아마도 대다수의 회원들의 생각이리라. 그래서 나이가 들면서 시들해 지고, 학회에 참여하는 것도 점점 줄어들고, 관심도 멀어지게 되는 듯하다. 뭐가 더 필요할까? 어떻게 해야 학회를 회원들이 같이 이루어 나가는 재미와 소통의 공간으로 만들 수 있을까? 그래서 일단 학회 운영부터 다양하게 바꾸고자 하였다. 다양성, 투명성, 공정성. 이 세 가지가 앞으로 새로운 집행부가 추구하는 가치가 될 것이다. 먼저, 지역, 성별, 분과, 대학/연구소 등에서 고루 참여하는 집행부를 구성하자. 이를 위해 각 분과나 학교를 통해 운영 위원을 추천 받고, 각종 상이나 정부 위원회 추천 절차 등을 공개적으로 오픈하여 회원들이 추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면 어떨까? 그러면 자연스럽게 시스템 안으로 회원들의 참여가 진작되고 회원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늘어나지 않을까?


전국을 다니면서 나왔던 공통적인 질문이 ‘두 번의 학술대회가 너무 똑같이 진행되는데, 두번씩이나 할 필요가 있느냐’였다. 한 번으로 줄일 수도 있지만, 두 번의 포맷을 바꾸는 것도 답이 될 수 있었다. 이 역시 다양성과도 관련되는 제안이었다. ‘그래, 학술대회가 그야말로 학술적인 발표가 주이긴 하나, 현재의 학술대회는 지나치게 분과 위주로 돌아가는 경향이 있지’. 각 분과가 융합하거나 공통의 주제로 자리를 같이 할 수 있다면, 이 또한 학회를 참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 될 수도 있겠다. 기계학습이나 장비 개발 등의 주제라면 학문분야를 떠나 관심있는 사람들로 재구성이 가능하지 않을까? 같은 학문분야의 사람들은 얼마든지 다른 미팅에서 만날 수 있지만, 다른 분야에서 어떤 사람들이 어떤 주제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는 물리학회가 아니면 쉽지 않을텐데... 


그러자니 자연스럽게 학회의 역할로 의문점이 옮겨갔다. 학회는 개인으로서는 하기 힘든 일을 제공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교육 차원에서는 물리 교육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하는 것. 고등학교에서 물리를 안 듣고 오는 학생들의 교육을 위한 기초물리 커리큘럼을 표준화해서 제공하고, 현재 대학물리 수준의 교육으로 이어지는 사다리를 제공할 수도 있겠다. 또한 각 대학의 일반물리 실험에 대한 정보를 모아서 새로운 실험 주제를 제공한다던가, 각 공학전공에 맞춘 일반물리 주제를 선별해서 제공하는 것 등 개인으로서 하기에는 벅차지만 다양한 조직의 구성원들을 회원으로 둔 학회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들을 하는 것이 학회의 역할인 듯하다. 그 외에도 대중강연에 관심이 있는 회원, 교육에 관심이 있는 회원, 장비 개발에 관심이 있는 회원,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회원 등 다양한 관심사를 표출하고 관심을 공유할 수 있는 플랫폼을 학회 내에서 제공하는 것도 개인보다는 학회가 하는 것이 효과적일 듯하다. 이 외에도 국가 정책에 대비해서 선제적인 정책을 세워놓고 여러 경로를 통해 정부기관을 설득한다거나, 대외적으로 또 국제적으로 물리학회의 위상을 강화함으로써 국내 물리학자들의 국제적인 인지도 향상에 기여하는 등의 활동도 필요할 것이다. 이런 부분들은 대체적으로 공약에 담겨있다. 


공약은 크게 네 가지이다. (*아래 공약의 자세한 내용은 다음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1. 모든 회원이 참여하는 KPS를 만들겠다. 소외되었던 회원들의 참여를 대폭 확대하고, 회원들의 의사를 수렴하는 투명한 시스템을 마련하겠다.
  2. 미래 세대가 꿈꿀 수 있는 물리학의 세상을 만들겠다. 물리학의 중요성과 첨단과학으로서의 가치를 알리고, 미래 세대들이 물리학을 통해 행복하게 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하겠다.
  3. 대정부 및 대국회 활동을 강화하겠다. 적극적인 대외활동을 통하여 축소되는 물리교육을 복원하고,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기초과학 연구비 확보를 이루겠다. 
  4. 학회의 국제적인 위상을 강화하겠다. 미국, 유럽, 일본, 중국 등 선진국가들과의 교류를 다양화하고, 신흥 아시아국 물리학회와의 적극적인 교류를 통하여 아시아 지역에서 리더의 위치를 공고히 하겠다. 


한국물리학회 역사상 72년만의 여성물리학회장 탄생. 이를 기회로 여러 인터뷰 기사가 나갔다. 그 외에도 평의원회 추천으로 후보가 되어 선출된 최초이며, 또한 소수 분과에서 선출된 몇 안되는 회장 당선자이다. 우리 물리학회 역사에서 학회의 다양화에 기여한 듯하여 내 자신이 뿌듯하기도 하나, 그만큼 어깨가 무겁기도 하다. 학회를 나 혼자 운영하는 것이 아니듯이, 집행부가 단독으로 운영하는 것도 아니다. 회원들 모두의 뜻이 모아져 집행부로 하여금 그 뜻을 실천하게 하는 것이다. 학회는 우리 모두의 학회다. 모두가 뜻을 모으고 밀어줄 때 비로소 제 구실을 다할 것이다. 회원 여러분의 뜨거운 성원과 열띤 참여를 기대하며, 내 자신 초심을 잃지 않고 앞으로 2년의 임기를 잘 이끌어보고자 한다.


한국물리학회 제31대 회장 윤진희 (출처: 인하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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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희
한국물리학회 제31대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