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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의 힘

2024년 10월 통권 229호

연구실 문을 열고 나온 과학자들


강의실과 연구실에만 있던 과학자들이 세상의 문을 열고 나오면서 활동 지형도가 바뀌었다. 번역서가 주류였던 과학 분야에 다수의 국내 저자가 등장하며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부동의 1위 자리를 뺏겼다. 인문학과 정치, 경제, 사회학의 전담이던 각종 칼럼에 과학자의 글이 보인다. 뉴스에서나 볼 수 있던 과학자가 교양과 엔터테인먼트 TV 프로그램, 심지어 셀럽이나 가능한 광고에 출연한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소셜 플랫폼을 대표하는 인플루언서 중 과학자도 있다. 과학자는 더 이상 아웃사이더가 아니다. 박수는 한 손으로 칠 수 없는 법이다. 대중 역시 과학에 관심이 없으면 이런 지대는 생기지 않는다. 어려운 과학에 사람들이 다가간다. 양쪽 모두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변화가 있다. 질문은 과학의 본질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풍요의 결과, 허기


이 질문에 나는 수백 가지 이유를 꺼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자연과 인간 사회가 복잡하게 얽힌 사연들을 배경에 둘 수 있다. 하지만, 굳이 한정된 지면에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다. 모든 이유는 결국 몇 개의 키워드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허기’와 ‘갈증’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두 단어는 결핍의 상징이다.


하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 풍요를 통과한 결핍이다. 대체 이건 무슨 역설인가. 산업화와 신자유주의를 통과한 인류는 결핍의 시대를 끝내고 인류사를 통틀어 지금이 가장 안전한 시대이자 ( 이 부분은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스티븐 핑커가 한 말이고 동의한다. 비록 전쟁은 지속되고 있으나…) 그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풍요와 부흥의 시절을 지나고 있다. 길어야 단 두 세기 만에 벌어진 일이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현대 문명과 인류의 삶을 살찌우기 위해 자연이 영양분으로 파헤쳐지고 인류가 큰 구덩이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기후 변화는 북극곰에게만 닥친 일이 아니었다. 내 집과 마을이 물과 화재에 사라진다. 스스로 위대하다고 자부한 인류 문명은 미미한 크기의 바이러스로 멈췄다. 글로벌을 외치던 국가가 각자의 국경을 닫았다. 질병이 정치와 경제의 변수로 작용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삶의 모든 공식이 변했고 삶의 방식과 태도 변화를 요구한다. 인류사 어느 때보다 자연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자연을 이해하지 못한 시절이다. 풍요 속에서도 허기와 갈증을 느낀다. 인류 문명이 성장통을 느꼈던 시절에 등장해 허기를 해소했던 인문학은 지금의 세상에 답을 꺼내지 못하고 있다.


과학기술은 현대 문명의 뼈대임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인류 삶의 본질과 근간을 흔들 수 없었다. 교양과 도덕, 철학도 아닌 학문이었을 뿐이고 늘 증거를 제시하는 시금석이었다. 정치. 사회. 경제의 모든 목소리에서 과학 기술은 중립적 태도와 객관성이 요구됐다. 하지만 기후 변화와 질병은 물론 인공지능, 반도체, 에너지, 건강, 교육 등 어떤 분야도 과학이 아니면 이해하기 힘든 세상이 됐다. 연구실 문을 열고 세상에 나온 과학자들의 이유 역시 허기와 갈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지속 가능한 세상을 위한 구원의 선언이자 계몽일지도 모르겠다. 이 시대에 담론은 과학이라는 것에 모두 동의한 것이다.


이제 고민은 ‘어떻게’ 만날 것인가이다. 통신과 운송수단의 발전은 공간의 지리적 한계와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었다. 소위 대륙이 봉합된 새로운 판게아 시대이다. 이렇게 소통하고 교류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이 널렸는데 ‘어떻게’란 방법론적 질문은 왜 던져진 걸까. 누차 이야기하지만, 질문은 과학의 본질이다.


다른 언어와 사고의 차이


결론부터 말하면 다른 언어 때문이다. 과학자가 대중을 만나는 일이 그렇다. 연구실 문을 열고 사람들만 만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왜냐하면 과학자와 대중의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의 언어는 형식과 사고의 언어이다. 과학의 언어는 깊은 사고력을 포함하는 수학이다. 물론 일반인 중에 수학을 잘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 졸업과 동시에 가장 먼 학문이 된다. 물론 수학을 몰라도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그게 정상이다. 기하학을 몰라도 공간을 감각으로 이해하고, 미적분을 몰라도 몇 가지 셈과 평균을 구하는 정도면 충분하다. 하지만 과학자는 다르다. 미분과 적분, 행렬과 선형 대수, 각종 기호와 상수, 그래프로 버무려진 수학은 복잡한 세상을 상세하게 논의하고 기본 규칙을 설명하는 기본 언어이다. 그 언어에 논리로 풀어가는 것이 과학자들의 문장이자 문법이다. 첫 번째 오류는 수학이라는 ‘형식의 언어’를 꺼내는 불친절함에 있다. 두 번째 오류는 형식의 언어로 과학적 성과인 법칙에 무게를 두는 것이다. 사실 과학자조차 법칙의 일반적인 특성에 무게를 두면서도 법칙 자체를 그들의 언어로 대중을 이해시키려고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입담 좋은 경우 적절한 의인화와 비유 등 각종 수사를 꺼내 유려하게 풀어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사물에 대한 지나친 대입이 오히려 방해하는 경우가 적잖다. 사실 과학의 일반적 특성을 논하는 것은 법칙 자체를 논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수준의 논의다. 오히려 법칙 자체보다 더 높은 수준의 논의일지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대중의 질문은 더 높은 수준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고의 언어’다. 간단한 사례를 들어 보자.



유명한 뉴턴의 운동법칙이다. 대부분 이 공식은 기억할 것이다. 아마 지금도 물리 교과서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법칙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유명하고 간단한 공식이지만 의미를 정확히 아는 이는 의외로 드물다. 행여 과학을 좀 아는 일반 독자가 ‘힘은 질량과 가속도를 곱한 값’이라는 답을 했다면, 이는 전적으로 과학자( 교육자를 포함한 ) 탓이다. 이 사례가 일반적 특성에 앞서 법칙을 꺼낸 대표적 실수이다.


중요한 것은 이 법칙을 등장시킨 뉴턴의 질문에서 시작해야 한다. 법칙보다 질문이 먼저였다. 이 공식은 수학자인 레온하르트 오일러에 의해서 정의됐다. 그러니까 아이작 뉴턴도 이 공식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우리가 거인들의 어깨를 올라타 쉽게 진리를 접할 수 있지만, 지식으로 흡수하려면 거인들이 거쳐 간 사고 과정을 따라가야 한다. ‘왜 정지한 물체는 가만히 있는 걸까. 정지한 물체에 힘을 가하면 왜 움직이고 힘이 사라지면 다시 정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뉴턴이 가진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 왜 정지한 물체가 가만히 있는지, 갈릴레오가 던진 질문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모든 질문의 끝에 이 공식이 등장하지만, F=ma를 번역하면 ‘질량을 가진 물체가 힘을 받으면 가속, 즉 속도가 변한다’는 의미였다. 질문은 이야기로 시작해 이야기로 끝나야 한다. 대중의 질문이 더 높은 수준에 있다는 건 사고가 먼저이기 때문이다. 사고의 대상은 법칙이 아닌 과학적 현상의 일반적 특징이기 때문이다. 결국 수학이라는 과학자의 언어와 결론적인 법칙을 먼저 꺼낼 것이 아니라 대중이 그들의 언어로 그 과정을 사유하고 그려낼 수 있게 해야 한다.


칼럼과 집필의 유용성


세 번째 유의할 점은 소통의 도구에 있다. 앞서 언급했듯, 소통하기 위한 연장은 어느 때보다 많다. 결론부터 꺼낸다면 ( 필자는 성격이 급해 두괄식을 좋아한다. ) 칼럼과 집필은 과학자가 세상과 접하는 최고의 도구이다. 사람들이 축구를 좋아하고 축구 선수가 많아지려면 선수를 발탁하고 훈련하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 이전에 동네에 축구장을 많이 만들고 사람들이 언제나 축구를 즐길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의미라면 책보다 소셜 플랫폼이 이 시대에 가장 적합한 축구장처럼 여겨질 수 있다. 사람들로부터 책은 점점 멀어져 몇천 권이라도 팔리면 감사할 일이다. 반면 소셜 플랫폼에서 백만이 넘는 조회수를 달고 있는 과학커뮤니케이터는 스타가 된다. 보상도 적지 않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칼럼이나 집필은 노력 대비 가성비가 떨어지는 구시대적 도구로 여겨지는게 무리가 아니다.


다른 분야는 몰라도 과학에서 이런 시청각 채널이 진정한 축구장일까 하는 의심을 해 본다. 반복하지만 과학은 의심으로 시작한다. 소셜 플랫폼에서 만나는 과학자들의 영상은 흥미롭다. 보고 듣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런데 손에 쥐는 건 그리 많지 않다. 시청각을 타고 들어온 과학은 뇌를 흠뻑 적셨지만 휘발된다. 과학의 위대함이란 자극과 경험으로 기억될 뿐이다. 축구장에 갔지만 선수가 아닌 관람석의 구경꾼이었다. 그저 축구 경기를 흥미롭게 구경한 것이다. 축구는 즐거웠지만 여전히 공을 차는 법을 모른다. 과학은 의심하고 가설을 세우고 논리를 통해 사유와 실험으로 연구하며 수많은 실패를 통해 일반적 특성과 오류가 존재하지 않는 자연의 공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과학은 그래서 어렵지만 이 과정을 간접적으로라도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에는 받아들이고 경험하는 것이 힘들어도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 있다. 과학이 그런 것 중 하나다.


소셜 플랫폼에는 알고리즘이 있다. 자신들의 지속 가능함을 광고라는 상업적 기반 위에 설계했기 때문이다. 콘텐츠는 조회수 경쟁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결국 구독자들이 외면하지 않도록 더 자극적인 주제, 혹은 더 흥미 있게, 또는 더 중요한 사실로 포장해야 지속할 수 있다. 심지어 구독자에게 심판받는 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있다. 한때 ‘냉장고를 부탁해’라는 이름의 요리 경연 프로그램이 있었다. 한정된 재료로 요리를 15분 이내에 만들어 출연자에게 심판을 받는 프로그램이었다. 앞서 언급한 오류의 복제판이 여기에서 벌어진다. 나는 거의 빼놓지 않고 이 프로그램을 봤지만, 나의 요리 실력은 전혀 향상되지 않았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레시피를 따라 요리를 한 번만이라도 했다면 분명 달랐을 것이다. 그저 심판이자 관람객인 대중을 축구장으로 끌어 내려 공을 차게 하는 방법은 없는 걸까. 진정한 허기와 갈증은 채워야 해소될 일이다.

우리 문명 중에는 더 이상 발전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숟가락이나 포크 같은 도구가 그렇다. 같은 의미에서 텍스트를 넘어설 만한 전달 수단도 드물다. 텍스트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자 더 발전할 필요 없는 완성품이다.


텍스트의 힘


인간은 다른 존재로부터 배우고 생각하며 자신을 만들어 왔다. 심지어 메타인지조차 다른 존재의 인식에 기반한다.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도 다른 존재로부터 인식하게 됐으며, 이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학습하게끔 설계됐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전달하며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마치 경험한 것처럼 학습한다. 이야기는 시공간을 초월한 경로를 통해 전달되고 확산하며 상상이 더해졌다. 그 중심에 텍스트가 있었다. 텍스트 전달 방식은 독특하다. 전달된 문장을 다시 분해해 머릿속에서 재조립하는 방식이다. 독자는 화자의 맥락은 물론 감정선까지 고스란히 경험한다. 여기에 상상력과 사유가 동원된다. 정보는 재조립되며 마치 DNA 복제 시 돌연변이처럼 이야기에 또 다른 이야기가 더해지고 인류 문명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처럼 정보량이 많고 변화무쌍한 시대에 텍스트에 의지하는 게 부담스러울 수 있다. 정보 취득이 결국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함이라면 텍스트는 학습하는 데 저항이 높은 매체임은 확실하다. 시간을 들이고 사유하는 데에 많은 에너지가 든다. 그에 비해 동영상과 같은 직관적 정보는 양질의 정보를 분류하는 작업 없이 뇌에 정보를 입력하거나, 심지어 예측의 결과마저 쉽게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의 뇌는 AI처럼 데이터만 집어넣으면 작동하는 기계가 아니다. 텍스트는 문명이 만들었지만, 문명을 다시 끌고 갈 힘이 있다.


최근 전 세계 학생들에게 어휘력 저하 현상이 나타난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이동진의 영화평 ‘명징’과 ‘직조’ 논란을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들여다보면 어휘력 문제가 아니라 ‘어려운 단어’의 문제이다. 앎에 대한 경시, 쉽게 얻으려는 태도가 만연해진 것이다. 결국 ‘사흘 나흘’ ‘0명 모집’ ‘우천시’ 등 문해력 Literacy 논란으로 연결됐다. 성인 독서율 저하라는 현상 역시 이런 경시와 태도와 관련 있다. 물론 종이책 자체는 미디어로 적합하지 않아 외면될 수 있다. 콘텐츠와 지식은 다양한 모습으로 출판될 수 있다. 하지만, 깊고 방대한 지식을 대상으로 시간을 들여 사유하고자 하는 태도를 상실하게 만드는 구조라면 모두가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과학이 문화가 되려면 축구장의 잔디와 공을 발끝으로 느껴야 한다. 같이 뛰는 선수들의 격렬한 몸싸움과 생생한 숨소리를 만나야 한다. 그런 점에서 여전히 에너지를 품고 있는 텍스트는 과학자가 세상을 만나는 최고의 도구임이 분명하다. 과학자의 글쓰기가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대이다.


과학자와 독자가 놀 수 있는 축구장


사유가 존재하지 않는 정보 유통의 종말을 보는 듯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 추석 귀경길,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최적화된 길은 결국 논두렁길에 수많은 사람들을 가뒀다. 확률과 통계로 선택된 재앙이었다. 기계를 맹신한 모든 이가 무기력함을 느꼈을 것이다. 현장에 있던 지인은 늪에 빠진 기분이었다고 했다. 기계의 농간이고 역습일까? 해프닝으로 끝난 일이지만 나는 심오한 미래를 보는 듯했다. 인공지능이 등장하며 콘텐츠 역시 생산에만 집중됐다. 콘텐츠 공급은 무한대로 증가하는데 어떻게 소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사유가 사라진 세상에서 확률에 의지한 인공지능이 그동안 인류가 쌓아 온 집단 지성을 논두렁길처럼 단순하게 만들지는 않을까? 사유 없이 구경한 영상 콘텐츠에 '좋아요'를 누르는 순간 가중치가 쌓여 언젠가 우리를 논두렁길로 인도하는데 보탬이 될 것 같다. 결국 콘텐츠를 어떻게 재구성하고 어떤 식으로 소비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할 지점이다. 텍스트를 외면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나마 반가운 소식은 최근 MZ세대를 중심으로 확산하는 텍스트힙 Text Hip이라는 독서 인증 문화의 확산이다. 도파민 디톡스로 수식되며 쉽게 휘발되는 가벼운 콘텐츠에 지친 이들의 반작용이기도 하고 깊은 지식과 사유에 대한 허기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몇 줄의 프롬프트로 고화질의 동영상을 만들어 내는 시대지만, 허기와 갈증을 느낀 소비자가 찾은 답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좋은 축구장은 텍스트가 기반인 필드였다. 문자와 활자가 만들어지고 급속하게 퍼졌던 그 물성이 최고의 수단임을 반증한다.


최근 십여 년간 과학 대중화를 위해 애써온 카오스재단의 새로운 행보 역시 주목된다. 비영리재단인 카오스재단(KAOS)은 ‘무대 위에서 깨어난 지식 Knowledge Awakening On Stage’이란 이름으로 대중들이 세상의 본질을 경험할 수 있도록 과학자와의 만남의 장을 만들어 지식을 나눔해왔다. 국내 수많은 석학이 무대 위에 올라 대중들과 지식을 향유했다. 왜 강단이 아닌 무대였을까. 강의가 아닌 강연이었고 누구나 즐기는 지식 콘서트였기 때문이다. 십여 년 동안 다양한 분야의 과학 지식 콘텐츠를 축적한 경험으로 얻은 것은 대중이 더 높은 수준의 논의를 원한다는 것이다. 어려운 것을 원하는 게 아니라 앞서 언급한 과학적 사실의 일반적 특성, 즉 세상의 근본과 본질이었다.



그 연장선에서 무대는 온라인으로 확장했다. 그리고 한국이라는 국경을 해제했다. 관념을 뒤집고 거꾸로 생각해 본다는 의미였을까. 올해 가을 공개될 지식 플랫폼의 이름은 KAOS를 반전한 SOAK이다. 지식과 함께 떠나는 과학 여정(Scientific Odyssey Along the Knowledge)의 의미지만 지식에 흠뻑 젖는다는 중의적 의미를 포함한다. 지금까지 카오스(KAOS)가 테마를 중심으로 과학 지식을 나눴다면 SOAK은 근본적이고 기초적인 과학 지식의 그물망과 같은 연결을 경험하기 위한 지식 플랫폼이다. SOAK의 가장 큰 특징은 독자가 텍스트를 향유할 수 있는 구조에 있다. 동시에 제공하는 영상과 다국어 음성은 보조적인 도구일 뿐이다. 텍스트를 품은 콘텐츠가 독자에게 제공하는 숨겨진 시간은 무한대이다. 지식을 시간 들여 사유하고자 하는 태도를 지켜내고자 함이다. SOAK은 그 사유의 과정에 우리가 지켜야 할 세상이 있음을 숨겨 놓았다.


국내 대학과 연구소, 및 기업체의 전문 분야에서 활동하는 여러 학자와 연구원들에 의해 집필된 텍스트는 분야별 데스크 검증을 거치고 소비할 수 있는 콘텐츠로 엄밀하게 제작된다. 이 과정에 현존하는 최고의 인공지능 솔루션들이 적용된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보조적 도구일 뿐이다. 텍스트는 여전히 사람이 중심이다. 대중과 후손에게 전해줄 과학자의 이야기가 중심이다. 필진은 과학기술의 대중화와 지식 나눔을 위해 세상의 문을 열고 나온 과학자들이며 텍스트의 힘을 믿는 과학자라면 이 축구장은 누구에게든 열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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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민
(주)그래디언트 퍼블리싱WG 그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