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FI

퍼즐이 있는 방 <2부>

2024년 10월 통권 229호

(일러스트레이터: 박재령)


<2부>


모든 퍼즐에는 ‘밤하늘 부분’이 있기 마련이었다. 밤하늘 부분이란 절대로 먼저 맞출 수 없기에 다른 모든 부분을 맞추고 마지막에 남게 되는 부분을 말한다. 이 부분은 아무리 퍼즐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한숨을 쉬면서 아주 천천히 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이 부분에 이르면 어떤 기술도 통하지 않고, 퍼즐의 즐거움도 많이 남아 있지 않고, 단지 한 조각씩 대보면서 맞춰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밤하늘 부분이 없는 퍼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이 유난히 거대한 밤하늘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 확실해졌을 때 태훈이 가장 먼저 오지 않게 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태훈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은 오지만 아무와도 말하지 않고 몰두해서 퍼즐만 하고 갔다. 그는 그나마 희망이 있는 책상 부분을 완성하는 데 집중했다. 밤하늘 부분만 진전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다 된 것 같던 책상 안쪽도 문제가 있는 것이 드러나고 있었다. 엽서들과 공작 도구들 사이 로 어떻게 해도 빈공간이 생겼다. 라디오가 틀어져 있을 때면 혼자 휴대폰에 이어폰을 꽂고 다른 것을 들었다. 세라와는 일 년에 두세 번 마주치는 정도였다.

“틀지 말까?” 

둘이 책상을 결 따라 이리저리 맞춰보고 있던 날, CD플레이어에 레미오로멘의 CD를 넣으려다가 말고 세라는 물었다. 바깥세상에서 CD플레이어는 시대가 지난 지 오래였지만 퍼즐이 있는 방에서는 여전히 인기였다. 고등학교 때 이 사람 저 사람이 가져다 놓은, 주인을 알 수 없게 된 CD가 영원히 돌려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많았으니까 음악이 싫은 게 아니라고, 태훈는 세라에게 설명했다.

“뉴스가 싫은 거야. 갑자기 어떤 나쁜 얘기를 할지 모르니까. 그냥 나쁜 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얘기만 하니까. 기분만 나빠져.” 

그러고 보면 정말 그랬다. 뉴스에서 알려주는 것들은 알아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나쁜 소식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나도 뉴스 나오는 부분은 싫어.” 세라는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런 얘기 나오면 그냥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아.” 

“나는 그게 잘 안돼.” 

태훈은 웃음기 없이 대답했다. 어쩌면 태훈은 그들 중에 유일하게 왜 세상이 퍼즐을 통해서라도 구해져야 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태훈은 세상을 구할 수 없을 것 같은 때 왜 그만둬야 하는지 가장 빨리 알았던 사람이기도 했다. 태훈은 군대를 다녀와서는 잘 연락이 되지 않고, 결혼했다는 소식만 건너건너 소문처럼 들려왔다. 윤수와 유리는 졸업하고 바로 서로 결혼했다. 그들은 결혼하고도 종종 퍼즐이 있는 방에 들렀지만, 아이를 낳고는 아예 오지 않게 되었다. 


혜정이 퍼즐을 그만두게 된 것은 결혼이나 아이나 졸업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내면적 이유였다. 그녀는 외부적 요인에 핑계를 대고 인생의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마음이 떠났다고 어느 순간 사라져서 나타나지 않게 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녀는 퍼즐하는 사람이 둘만(간혹 나타나는 미나를 포함한다면 셋만) 남았던 여름이 끝날 무렵 세라에게 직구로 말했다.

“이거 정말 ✴✴들이 부탁한 거 맞아? 우리는 네 친구를 통해 들은 것뿐이잖아.”

✴✴들을 만나거나, ✴✴이 안 된다면 진우라도 직접 만나고 싶다고 혜정은 말했다. 세라는 진우의 번호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결번이었다고 고백했다. 세라가 그 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진실이었다. 졸업 앨범에도 사진이 없었고, 마치 증발한 것만 같았다. 혜정은 한숨을 쉬고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걔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퍼즐이 ✴✴들의 부탁이 아니었다고 의심하는 것도 아니야. 그렇지만 완성하는 데 도움을 더 받거나, 만에 하나라도 완성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듣지도 못하고 이 이상 계속할 수는 없어. 지금 우리 완전히 꽉 막혀 있잖아. 지난 달에 몇 조각이나 맞췄지, 우리 둘이? 열 조각도 안 될 거야. 이대로 우리가 죽을 때까지 완성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데? 그러면 아무 것도 아닌데 인생을 갈아 넣은 게 되잖아. 물론 이미 엄청난 시간을 썼지만... 나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인생을 걸 수는 없어. 매몰 비용 때문에 어떤 일을 계속하고 싶지도 않아.”

정말 그랬다. 혜정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인생을 걸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그녀의 좋은 면이었다. 


201*년 이후에도 그 방을 꾸준히 찾았던 것은 아마도 세라와 미나뿐이었다. 미나가 왔다 간 것은 간혹 퍼즐이 아주 조금씩 더 맞춰져 있거나 마루 쪽이 어질러져 있어서 알 수 있었다. 한 번은 마주친 적도 있었다. 미나는 퍼즐을 하고 있지는 않았고 옛날처럼 체육복 윗도리를 둘러쓰고 정원 쪽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날은 유난히 희망이 느껴지지 않는 토요일이어서, 그리고 그런 날에는 미나를 포함한 모두에게 화가 나곤 했기 때문에, 세라는 굳이 말 걸지 않고 가방을 내려놓은 뒤 퍼즐을 시작했다. 

“우리 이거 완성할 수는 있을까?” 

한 시간을 걸려 두 조각 정도를 맞추는 데 성공하고 지쳐서 엎드린 채로 세라는 말한다. 그중 한 조각은 심지어 아무래도 억지로 끼운 것 같았다. 

“퍼즐은 언젠가는 완성되게 되어 있어. 그게 퍼즐의 좋은 점이잖아. 어떻게든 결국은 완성되기로 정해져 있다는 거.” 

미나는 안개 낀 산을 보고 앉아서 철학적으로 말했다. 그 말이 미나가 처음에 퍼즐이 있는 방에 왔을 때 했던 말이었다는 사실을, 세라는 그 다음주쯤에야 깨닫는다. 세라는 미나를 다시 보지 못하지만, 그 이후로도 미나의 느린 손이 조금씩, 많이는 아니고 조금씩 그녀를 돕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물론 세라도 아주 퍼즐을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미나에 비하면 잘했지만 딱히 빠른 편은 아니었고, 전체 배치를 예상할 수 없는 부분에서는 유난히 갈피를 잡지 못했다. 세라는 유리의 예상도를 가장 열심히 들여다보는 멤버였다. 즉 예상도가 별 소용 없게 된 시점에서 세라 혼자서 그 퍼즐을 완성한다는 것은 딱히 가망 있는 얘기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세라가 퍼즐을 계속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우리가 어떤 일을 계속하는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 세상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대부분의 날들은 세상을 구하기는 커녕 아무 것도 만들고 있는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옛날에 같이 했던 부분들을 뜯어서 다시 맞춰야 했던 날들에는. 

그렇지만 세라는 아마도 처음부터 세상을 구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었다. 다만 진우를 좋아해서 퍼즐이 있는 방에 갔었다는 것을 세라는 뒤늦게 깨닫는다. 같이 집에 가고 싶어서, 그때 봄에 뒤늦게 찾아왔던 것처럼 더 일찍 더 자주 찾아오지 않을까 기대해서. 그렇지만 계속 진우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퍼즐이 있는 방에 갔던 건 아니었다. 나중에는 퍼즐의 방에 오는 사람들과 같이 지내는 조용한, 그리고 때로는 떠들썩한 시간이 좋았다. 약속도 안 했는데 들어갔더니 누가 있고, 같이 엎드려 퍼즐하고, 지루해질 때쯤이면 또 다른 누군가 부스럭부스럭 과자를 사 들고 들어오는, 아무렇지 않은 기쁨들이 중독적이었다.

혜정이 떠난 다음에도 세라가 토요일마다 퍼즐이 있는 방에 갔던 것에는 관성도 한 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니까 그녀가 기약 없는 공시 준비에 매달리고 있는 것과 같은 이유도 있었다. 세라는 한 번 시작한 일이라면 불가능한 일에 인생을 걸 수 있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미래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 편도, 깊이 생각하는 편도 아니었고, 한 번 마음과 시간을 쏟은 일은 아무 결과가 없고 아무도 칭찬해주지 않더라도 어떻든 일단 계속하는 편이었다. 그것은 세라의 좋은 면이었을까, 그 반대였을까? 어쩌면 단지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었는지도 모른다. 퍼즐이 없는 미래가 겁이 나서, 큰 희망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매몰 비용에서 발을 빼고 있지 못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줄 게 있다면서 유리가 연락해온 것은 하루에 한 조각도 맞추지 못하고 있는 날들이 이어지고, 세라도 퍼즐의 방과 함께 세상에서 잊힌 것 같던 무렵이었다. 

“어떻게 잊어버려. 내 인생 최고로 행복한 때였어.” 

아이 때문에 멀리 나오기 힘들다고 해서 그들은 유리네 아파트 앞에서 만났다. 나온 건 유리 혼자였다. 유리는 늘 그랬듯 긴 치마를 입고 있었고 그들은 늘 그랬듯 평온한 아파트 단지 앞 벤치에서 이야기했다. 하지만 유리는 모든 것이 아주 옛날에 일어났던 일인 것처럼, 아니, 그런 셈 치기로 한 것처럼 거리를 두고 말했다.

“혜정이에게도 연락할까 생각했는데 혜정이는 그만뒀을 것도 같아서.” 

유리는 가방에서 지퍼락 봉지에 든 퍼즐 조각들을 꺼냈다. 

“옛날 옷 정리하는데 나왔어. 처음에는 한두 조각인 줄 알았는데 주머니 가득 들어 있는 거야.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옛날에 내가 나도 모르게 가지고 온 것 같기도 하고.. 책상에 비는 부분이 있었잖아. 거기 들어갈 조각들 같아. 내가 계속 가지고 있으면 안될 것 같아서.”

그들은 잠시 더 앉아 있지만 덧붙일 말을 생각해낼 수 없었다. 서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참에 세라는 갑자기 생각해내고 물었다.

“너희 미나랑 아직 연락해? 계속 오는 줄 몰랐는데, 얼마 전에 갔더니 있는 거야. 너무 안 변해서 놀랐어. 생각해보니까 나는 걔 휴대폰 번호도 없더라고. 미나 번호 알려줄 수 있어? 우리 둘이라도 만나서 하고 그러면 좋을 것 같아서.”

유리는 그녀의 진의를 이해하려는 듯 한참 세라를 쳐다봤다. 

“미나는 사 년 전에 죽었어. 아빠 때문에 집 나가서 남자친구랑 동거하고 있었는데. 남자친구한테. 뉴스에도 났어. 엄청 크게. 댓글 보면 정말 화날 거야. 절대로 찾아보지 말고.”

유리는 돌아서려는 세라에게 작게 말했다.

“그리고 나 진짜 좋아했어. 어느 정도냐면 가는 길도 좋았어. 구석에 있던 편의점이랑 우산이 엄청 오래 걸려 있던 울타리 있잖아. 그런 것들도. 그런데 그 방에만 오래 있으면 현실감이 없어지잖아. 며칠씩 그 안에만 있게 되고, 나와도 시간이 지난 것 같지 않고, 영원히 어린 시절에서 나오지 않아도 될 것 같았어. 그렇게 계속 살 수는 없잖아.”

유리는 삶이 얼마나 작고 깨어지기 쉬운지 알아버린 사람처럼, 어차피 깨어지기 쉬운 것들뿐이라면 자기 몫의 조각만이라도 깨지지 않게 들고 가기로 결론 내린 사람처럼 말했다. 


세라는 그 이후로도 퍼즐을 계속했다. 세상을 구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세상이나 변해가는 날씨나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너무 자주 생각하지는 않았다. 뉴스는 실수로라도 듣고 싶지 않으면서 세상을 구하는 퍼즐을 하고 싶어 했던 태훈을 세라는 점점 이해하게 되었다. 

세라는 201*년 안팎을 계기로 퍼즐이 있는 방에서 더 긴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특히 봄과 여름에. 그 방의 몇몇 날씨들은 옛날 서울의 봄과 여름들을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봄이 원래 어떤 곳이었는지 잊고 싶지 않았고,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서늘한 여름 날씨만이 줄 수 있는 평화를 원했다. 공시 준비가 길어지면서 주말이 되면 달리 갈 곳이 없어진 것도 있었다. 

그렇게 약간의 비겁함과 깊이 생각하지 않는 희망과 관성의 힘으로 그녀는 퍼즐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요소가 있었다. 매 주말 혼자 어두운 방에 앉아서 끝이 보이지 않는 퍼즐에 매달리기 위해서는 막연한 두려움과 더 막연한 희망 이상의 어떤 힘이 필요했다. 통념과 달리 희망 혹은 기대는 그렇게 강한 감정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 십 년 넘게 질질 끄는 기다림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질긴 감정은 결코 아니었다. 

유난히 잘 계량되지 않는 요소였지만, 세라의 마음에는 기억의 힘이라고 불릴 만한 하나의 힘이 더 있었다. 그녀의 퍼즐은 아주 오랜 시간 매달린, 초고난이도의 퍼즐이었고, 그렇게 해서 맞춘 퍼즐의 제자리를 찾은 조각들에는 하나하나 강한 기억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기쁨으로 맞췄던 시간의 기억이. 퍼즐이 언젠가 다 맞춰질 거라는, 그리고 그러면 세상이 구해질 거라는 약속이 실체 없게 느껴질 때도(혜정의 말대로 세라는 ✴✴들의 입으로 직접 약속을 들은 적도 없었다.) 퍼즐에 맺힌 기억이 그녀를 이끌었다.

세라가 항상 똑같은 양의 의지와 끈기로 퍼즐에 정진했던 건 아니다. 그와는 거리가 멀었다. 몇 주씩 정말로 열심히 하지 않는 날들도 있었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방에 누워서 옛날 CD만 듣다가 오는 날들도 있었다. 라디오는 이제 세라도 듣지 않았다. 더이상 처음 왔을 때처럼 깨끗한 곳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퍼즐이 있는 방은 세라에게 더없이 편안한 곳이 되어 있었다. 혜정과 유리가 가져다 놓은 고등학교 시절 잡동사니에, 다른 애들이 쓰다 간 것들, 어른이 된 세라가 가져다 둔 잡다한 생활용품까지 해서, 다이소마냥 필요한 건 다 있었다. 빗도 종류 별로 있었고, 쿠션은 열 명이 쓰고도 남을 만큼 있었다. 대체 누가 읽던 건지 ‘고대 중국 미술사’도 한 권 있었다. 세라는 그 책을 세 번이나 통독한다. 옛날 패션 잡지도 있었고, 방부제 탓인지 방의 마법인지 십여 년이 지나도록 상하지 않은, 밖에서는 단종된 과자도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주 많은 날씨를 보았다. 어릴 적에는 보지 못했던 차이였지만, 미나가 말했던 것처럼 똑같이 비 내리는 날이라도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늦여름처럼 잠만 자고 싶어지는 무거운 습기의 날이 있는가 하면, 비 오는 소리에 오랜 잠에서 깬 듯이 정신이 들지만 대신 겉옷을 꺼내와야 하는 날도 있었다. 심지어 태풍이 치는 날들도 있었고, 네 시 반쯤 되면 꼭 한 번씩 잠에서 깰 정도로 공기가 찼으며, 미닫이문을 열면 학교 수련회에서 잠 못 들던 밤들 같은 냄새가 났다. 그녀는 예전 미나처럼 주말이면 퍼즐이 있는 방에서 잠을 잤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툇마루에서 영원히 안개 낀 산을 보고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세라가 마지막으로 맞춘 부분도 안개에 잠긴 산의 그림이었다. 의외로 밤하늘 부분은 책상보다 먼저 완성되고, 최후까지 세라를 골탕 먹인 것은 책상 위 엽서 배치의 미스터리였다. 그 미스터리를 해결한 것은 유리가 건네주었던 퍼즐 조각이었다. 몇 년 전 만나서 받아온 뒤 잊고 있던 조각들을, 세라는 방 전체를 뒤집어엎다시피 해서 겨우 찾았다. 그 조각들을 합치면 어떻게 해도 채워지지 않던 책상의 빈 구멍을 메울 일곱 번째 엽서가 되었다. 

꽃잎이 떨어져 있는 날의 엽서에 가려져 반도 보이지 않는데도 마지막 엽서에 그려진 산의 모습은 아주 눈에 익다. 담이 있는 작은 정원과 툇마루가 보였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다 맞추기도 전에, 조각을 몇 개 뒤집어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아마 유리도 그랬을 것이었다. 완성된 형태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부분을 맞추는 것은 아주 쉽다. 한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지하철에서 그렇게 깊이 잔 것은 종종 내려야 할 곳을 놓치고 2호선을 한 바퀴 돌곤 했던 고등학생 시절 이래 처음이었다. 그녀가 눈을 뜬 것은 계절을 알 수 없는 2호선 지상 구간의 빛 속에서였다 

“조각들을 모아줘서 고마워.”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말했다. 역광을 받아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보이는 것은 빛에 따뜻해진 옷소매뿐이었다. 그들이 다니던 고등학교의 교복 소매였다. 몇 년이 지나도 눈에 닿으면 바로 기억에서 되살아나 버리는 것들이 있었다. 빛은 마치 기억 속에서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40도가 넘는 이해할 수 없는 여름에도, 겨울 같지 않은 겨울에도 전과 같이 열차 칸 안을 따뜻하게 하는 빛이었다. 

“모든 게 퍼즐에 달려 있었어. 네가 해낼 줄 알았어. 진우가 엄청 강력하게 추천했거든.” 

깊은 목소리는 도무지 고등학생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었고 사람의 입에서 들려온다고도 생각할 수 없었다. 지하철의 초록색 천장으로부터 울리는 것 같기도 했고 창밖을 꿈처럼 지나가는 풍경들에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잘 아는 사이도 아니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같이 집에 간 적도 일 년에 서너 번도 안 됐어요.” 

“그렇다고 해서 서로 잘 알 수 없는 건 아니잖아.” ✴✴은 잠시 멈췄다가 덧붙였다. “좋아할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진우는..”

“그 애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구하는 일을 돕고 있었어. 그쪽은 실패했어. 하지만 퍼즐은 완성됐지.”

“그러면 이제 세상이 구해지는 건가요?” 

그녀는 물었다.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해. 눈치 챘겠지만 퍼즐에 담겨 있는 건 이 세상의 소중한 조각들이야.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했던 좋은 곳들. 좋은 순간들. 너희가 퍼즐을 맞춰줘서 이제 그곳들로 연결되는 통로가 생겼어. 잃어버리지 않게 된 거야.”

“나는... 정말로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 조각이 모여 세상이잖아. 너희가 만든 세상.”

“퍼즐에 들어있지 않은 것들은...”

“너희 세상의 문제야.” ✴✴은 한숨을 쉬었다. ✴✴에 대하여: 

대도시는 원래 인간과 인간 아닌 것들이 자기도 모르게 함께 살아가는 곳이고, 불빛이 나직했던 고대적의 대도시는 더욱 ✴✴로 가득해 이를테면 비둘기나 고양이보다 ✴✴이 더 많았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집과 바깥 사이로 열려 있으면서 대낮에도 어둠에 잠긴 부엌은 이런 종족이 우리를 방문하기 좋은 장소이다. 어느 시점 이후로 역사 속에서 주로 주부들이 ✴✴의 방문을 받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가정부나 아이 보는 노인, 얹혀사는 백수 친척이나 얄궂은 시간에 깨어나 물을 먹으러 나오는 휴가 중인 군인 같은 사람들이 선택받았던 것이다. 

✴✴은 항상 좋은 집을 찾고 있다. 어두운 시대는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시간으로 이럴 때 의지할 것은 건물뿐이지만, 모든 건물이 역사의 긴 겨울을 잘 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음으로 세워진 건물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들은 우리만큼이나 깊은 사랑으로(때로는 더 깊은 사랑으로) 우리의 건물들을 사랑한다. 그들은 선사 시대 최초의 고양이와 함께 도시에 자리를 잡은 이래 우리가 만든 것들을 쓰고 사랑하며 그에 의지해 살아왔다. 기둥 없는 유리 건물 같은 것들은 물론 ✴✴이 살 수 없는 곳이지만 요즘에도 오래된 병원이나 구식 콘크리트 역사 등은 종종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 그들의 집이다.

✴✴은 인간과 닮았지만 자세히 보면 닮지 않은 오래된 종족이다. 대부분의 ✴✴은 사람 말을 할 때 조금 어색할 정도로 천천히 말하고, 몇몇은 너무 나이 들어 아직도 인류가 수메르어나 그 아류 언어를 쓴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대형 파충류의 멸망을 동굴에서 살아남은 꼬리가 부드러운 쥐들처럼, 어두운 시대를 숨어 보내는데 특화된 종이다. 종으로서 그들이 우리와 아직도 공유하는 것이라고는 따뜻한 집안 구석과 어둡고 부드러운 잠자리에 대한 포유류적 취향 뿐이다(전망이 좋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너희가 만든 건 예쁜데 전부 금방 부서져 버리니까. 지금은 모조리 불타고 있고. 미안해. 전부 다 구할 수는 없었어.” 

그녀는 ✴✴의 손의 온기의 손 아주 가까이 있다는 걸 깨닫는다. 다음 역 안내방송이 지나가고 ✴✴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우리가 너에게 뭔가 줄 차례겠지. 큰 부탁을 들어줬으니까. 너한테 어떻게 보상을 해야 할지 생각해 봤는데... 퍼즐이 있던 방은 어때? 선물로 받아주겠어? 모두 너에게 그 방의 열쇠를 주고 싶어 해. 그 집을 처음 사랑했던 건 다른 사람들이지만 집의 일부인 방은 너에게도 소중한 장소가 되었으니까. 집은 우리도 종종 드나들겠지만 방은 네 거야. 심심해지면 집을 이리저리 다니면서 구경해봐도 돼. 아무도 너를 방해하거나 놀라게 하지 않을 거야.”‘그 집’은 누구의 것인가?:

수많은 방을 연결하는 것은 낮게 밝혀진 복도이다. 구석마다 전등이 있어 복도는 결코 완전히 어둡지 않지만, 손전등이 있다면 쓸모가 있을 것이다. 미로 같은 복도 사이로 엿보이는 바깥 날씨는 구름으로 어둡고, 벌써 오는지 올 예정인지 알 수 없는 비 냄새가 난다. 완전히 닫힌 문은 너무 외롭고 지나치게 열린 문은 잠을 방해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방은 미닫이 문이 두 뼘쯤 열려 있다. 방바닥에는 돗자리가 깔렸고 벽장 안은 이불로 가득하다. 많은 방에는 주인이 있지만, 방의 숫자는 무한에 수렴하기 때문에 손님들은 원한다면 영원히 서로 마주치지 않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곳은 우리가 이승에서 헤어진 동물들과 다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며 지상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천국에 가까운 곳으로, 고를 수 있다면 내가 가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아주 일부 비밀 방들을 제외하고) 모든 방은 세상에서 등을 돌린 동향이다. 동쪽은 비 내리는 영원한 정원으로 열려 있다. 정원 너머는 따로 방둑이나 내려가는 길 없이 곧바로 호수이다. 수면은 습기로 하얗다. 종일 비 오다가 말다가 하는 날이 둘도 없이 신적인 날씨인 것은, 앉아서 밖을 내다볼 마른 자리만 있다면 그런 날씨야말로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구경하기에 최적의 날씨이기 때문이다. 오래 사는 존재들 최고의 소일거리는 무작위로 벌을 주거나 불타는 눈으로 죄 많은 세상을 엿보는 것이 아니라, 낮잠을 자고 바람 부는 데 앉아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구경하는 일이다. 툇마루에서는 바로 호수가 내다보이며, 조금만 벽 안쪽으로 옮겨 앉으면 조용하고 춥지도 않다.

내가 아는 사람 하나는 이불을 꺼내려 무심코 평소와는 다른 벽장을 열었던 날,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많은 물건을 발견했다고 한다. 2002년에 생산이 중지된 녹차 과자와 건전지로 불을 켜는 연등, 상표가 없는 이천 피스 퍼즐 따위였다. 또 다른 사람은 자신의 방에서 이십만 피스 퍼즐과 청동기 시대 것처럼 보이는, 아직 쓸 수 있는 예쁜 잔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퍼즐을 발견한 것은 특히 행운이었다. 퍼즐은 신적인 놀이이며, 살아있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기쁨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곳 손님들이 아직도 같이 맞추고 있는 퍼즐은 가로로 길고, 수많은 집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퍼즐 속에서 하늘은 어둡고, 모든 집에는 동물이 살고, 동물들은 모두 막 잠들려는 중이거나 잠들어 있다. 아주 깊은 잠에 들려면 필요한 첫 번째 준비물이 집이라면 두 번째는 물소리에 잠긴 날씨이므로, 퍼즐은 유토피아의 설계도이다. 내 친구들은 여태까지 침대 위에서 이불을 덮고 자는 뱀과 잠들지 못하고 식탁에 앉아 있는 라쿤, 몸을 말고 잠든 낙타와 낙타를 껴안고 쉬는 고릴라 외에도 많은 것들을 맞추었다고 한다. 한편 유난히 잠귀가 밝은 내 친구의 친구는 몇 밤 연속해서 잠결에 호모 사피엔스의 것이라기에는 너무 무거우면서 조용한 발자국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고 증언한다. 그는 또한 다이앤 포시와 길고양이 집을 만들어주다 죽은 **구 주부, 해빙기의 도래를 피해 들어온 네 명의 네안데르탈인과 마주친 적이 있다고 전한다.

창가의 어둠 아래는 베개와 작은 전등들, 또 많은 담요들로 발 디디기 어려울 정도로 가득하다. ✴✴들이 멸망을 앞둔 우루나 월루사 또는 뉴욕 시장에 들러 곧 죽을 상인들 손에서 사온 것들이다. 잘 만든 물건이란 지상의 어떤 마음보다 오래 가는, ✴✴들의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친구이기 때문에 그들은 열심히 좋은 물건으로 집을 채운다. 

그들은 늦게까지 불을 켜지 않는다. 그들은 그곳 테이블에 앉아 생각하고 퍼즐을 맞추고, 세상에 대해 잡담한다. 무엇이 생각되고 무엇이 이야기되는가? 생각은 과거를 재료로 하지 않을 수 없지만 대화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룰 수 있다. 우리가 갖는 수많은 의견이 결국에는 의견에 불과한 것처럼 ✴✴들의 의견 교환 또한 근본적으로 유희이다. 이 유희의 와중에 그들은 집 밖에 남은 운 나쁜 호모 사피엔스들에 대해 생각하는가? 가끔씩 가볍게라도 걱정하는가? 세상의 끝까지 아니 그 이후까지도 어둠을 떠돌 운명을 고려하는가? 그러나 어쩌면 세상의 끝은 오지 않고 좋은 집 한구석에서 보내는 좋은 시간이 있는 것뿐 아닐까? 

그곳에서도 창가에서 자고 일어나면 몸은 조금 춥다고 한다. 비 때문이다. 하지만 비의 빛으로 방은 밤 내내 어둡지 않고, 아침이 밝으면 하늘에서 물이 또 세차게 내리기 시작한다. 바다 같은 호수 너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따뜻한 산이다. 

 ‘그 집’은 어디에 있는가?:

결국은 각도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하나의 각도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해서 사물이 존재하지 않게 되지는 않는 것처럼, 그곳으로 가는 잘 알려진 길과 넓은 문이 없어졌다고 해서 건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닌지도. 단지 관찰 가능한 각도가 좁아지며, 사물을 만지기 위해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 더 복잡해질 뿐은 아닐까? 이를테면 물을 건너야 갈 수 있는 곳이라고 해서 반드시 섬이 아니듯 꿈에서 발견한 곳이라고 꿈에만 존재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모든 대륙이 섬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꿈에서 닿을 수 없는 장소만이 현실로 존재한다고 치면 그렇게 정의된 현실에는 과연 무엇이 남을 것인가? 이를테면 나는 거대한 금 간 콘크리트 건물과 파도치는 오래된 나무 사이를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가던 길을 기억한다. 우리 동은 진정한 아파트들이 그렇듯이 복도식이었다. 복도 양 끝은 비상계단으로 이어져 있었지만, 양쪽 모두 정작 일 층 문이 잠겨 있어 결국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면 중앙 현관을 통과해야만 했다. 단지 안 깊은 곳에는 미용실과 화장실이 있는 이 층 상가가 있었고, 더 숨겨진 곳에는 내가 어렸을 때 이미 쓰지 않게 된 아파트 굴뚝이 서 있었다. 굴뚝에는 더 이상 땅으로 연결되지 않는 사다리가 감겨 있다. 내 방 서랍에는 십 년 된 부채부터 수많은 안 쓴 크리스마스 카드까지 무엇이든 있었고 무엇이든 찾을 수 있었다.


“열쇠라고 하면...” 

기억상 퍼즐의 방으로 가는 길에는 열쇠가 필요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망설였다.

“아쉽지만 원래 너희가 쓰던 통로는 곧 막힐 거야. 세계아파트는 올가을이면 재개발에 들어가거든. 새 아파트는 옛날처럼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은 아닐 거야. 여태까지처럼 편하게 오가게 해줄 수 있더라면 좋았겠지만... 그건 우리에게도 점점 어렵게 돼서. 우리가 지금 너에게 주는 열쇠는 사용법이 달라. 열쇠를 사용하면 너는 언제든 퍼즐이 있던 방으로 돌아갈 수 있어. 바깥이 얼마나 변했든 네가 얼마나 지쳤든 네 기억 속 그대로일 거야. 원한다면 영원히 그 안에서 행복하게 살아도 돼. 조심할 점은 한 번 들어가면 다시 나올 때 바깥의 시간이 얼마나 흘러 있을지는 모른다는 거야. 신선놀음에 도끼 썩는 얘기 요즘도 학교에서 배우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이건 기다렸다가 써야 돼. 네가 세상에 정말 지치고 더이상 갈 곳이 없을 때에. 대부분의 경우는 막다른 길처럼 보여도 정말 막다른 길은 아닐 거야. 그렇지만 언젠가 정말 그런 때가 온다면...”

다음 역이 다가왔다가 잠시 존재하고 지나갔다. 세라는 물었다. 

“다른 애들은요?” 

“퍼즐은 완성한 건 너니까 열쇠는 네 거야. 하지만 친구를 데려오고 싶으면 얼마든지 데려와도 돼.” 

“미나는...” 

“그 애는 이미 거기 가 있어. 자, 이제 열쇠를 받아줘. 생긴 게 열쇠라기보다는 초대장이라고 해야겠다. 쓰는 방법은..”


꿈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덜컹덜컹 소리에 눈을 떴을 때 세라의 옆자리에는 아무도 없고, 빛이 드는 무릎 위에 익숙한 사진만 한 장 초대장처럼 놓여 있었다. 세라는 휴대폰 전화번호부를 뒤지기 시작했다.



1) ✴✴에 대하여: 

대도시는 원래 인간과 인간 아닌 것들이 자기도 모르게 함께 살아가는 곳이고, 불빛이 나직했던 고대적의 대도시는 더욱 ✴✴로 가득해 이를테면 비둘기나 고양이보다 ✴✴이 더 많았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집과 바깥 사이로 열려 있으면서 대낮에도 어둠에 잠긴 부엌은 이런 종족이 우리를 방문하기 좋은 장소이다. 어느 시점 이후로 역사 속에서 주로 주부들이 ✴✴의 방문을 받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가정부나 아이 보는 노인, 얹혀사는 백수 친척이나 얄궂은 시간에 깨어나 물을 먹으러 나오는 휴가 중인 군인 같은 사람들이 선택받았던 것이다. 

✴✴은 항상 좋은 집을 찾고 있다. 어두운 시대는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시간으로 이럴 때 의지할 것은 건물뿐이지만, 모든 건물이 역사의 긴 겨울을 잘 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음으로 세워진 건물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들은 우리만큼이나 깊은 사랑으로(때로는 더 깊은 사랑으로) 우리의 건물들을 사랑한다. 그들은 선사 시대 최초의 고양이와 함께 도시에 자리를 잡은 이래 우리가 만든 것들을 쓰고 사랑하며 그에 의지해 살아왔다. 기둥 없는 유리 건물 같은 것들은 물론 ✴✴이 살 수 없는 곳이지만 요즘에도 오래된 병원이나 구식 콘크리트 역사 등은 종종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 그들의 집이다.

✴✴은 인간과 닮았지만 자세히 보면 닮지 않은 오래된 종족이다. 대부분의 ✴✴은 사람 말을 할 때 조금 어색할 정도로 천천히 말하고, 몇몇은 너무 나이 들어 아직도 인류가 수메르어나 그 아류 언어를 쓴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대형 파충류의 멸망을 동굴에서 살아남은 꼬리가 부드러운 쥐들처럼, 어두운 시대를 숨어 보내는데 특화된 종이다. 종으로서 그들이 우리와 아직도 공유하는 것이라고는 따뜻한 집안 구석과 어둡고 부드러운 잠자리에 대한 포유류적 취향 뿐이다(전망이 좋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2) ‘그 집’은 누구의 것인가?:

수많은 방을 연결하는 것은 낮게 밝혀진 복도이다. 구석마다 전등이 있어 복도는 결코 완전히 어둡지 않지만, 손전등이 있다면 쓸모가 있을 것이다. 미로 같은 복도 사이로 엿보이는 바깥 날씨는 구름으로 어둡고, 벌써 오는지 올 예정인지 알 수 없는 비 냄새가 난다. 완전히 닫힌 문은 너무 외롭고 지나치게 열린 문은 잠을 방해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방은 미닫이 문이 두 뼘쯤 열려 있다. 방바닥에는 돗자리가 깔렸고 벽장 안은 이불로 가득하다. 많은 방에는 주인이 있지만, 방의 숫자는 무한에 수렴하기 때문에 손님들은 원한다면 영원히 서로 마주치지 않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곳은 우리가 이승에서 헤어진 동물들과 다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며 지상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천국에 가까운 곳으로, 고를 수 있다면 내가 가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아주 일부 비밀 방들을 제외하고) 모든 방은 세상에서 등을 돌린 동향이다. 동쪽은 비 내리는 영원한 정원으로 열려 있다. 정원 너머는 따로 방둑이나 내려가는 길 없이 곧바로 호수이다. 수면은 습기로 하얗다. 종일 비 오다가 말다가 하는 날이 둘도 없이 신적인 날씨인 것은, 앉아서 밖을 내다볼 마른 자리만 있다면 그런 날씨야말로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구경하기에 최적의 날씨이기 때문이다. 오래 사는 존재들 최고의 소일거리는 무작위로 벌을 주거나 불타는 눈으로 죄 많은 세상을 엿보는 것이 아니라, 낮잠을 자고 바람 부는 데 앉아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구경하는 일이다. 툇마루에서는 바로 호수가 내다보이며, 조금만 벽 안쪽으로 옮겨 앉으면 조용하고 춥지도 않다.

내가 아는 사람 하나는 이불을 꺼내려 무심코 평소와는 다른 벽장을 열었던 날,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많은 물건을 발견했다고 한다. 2002년에 생산이 중지된 녹차 과자와 건전지로 불을 켜는 연등, 상표가 없는 이천 피스 퍼즐 따위였다. 또 다른 사람은 자신의 방에서 이십만 피스 퍼즐과 청동기 시대 것처럼 보이는, 아직 쓸 수 있는 예쁜 잔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퍼즐을 발견한 것은 특히 행운이었다. 퍼즐은 신적인 놀이이며, 살아있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기쁨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곳 손님들이 아직도 같이 맞추고 있는 퍼즐은 가로로 길고, 수많은 집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퍼즐 속에서 하늘은 어둡고, 모든 집에는 동물이 살고, 동물들은 모두 막 잠들려는 중이거나 잠들어 있다. 아주 깊은 잠에 들려면 필요한 첫 번째 준비물이 집이라면 두 번째는 물소리에 잠긴 날씨이므로, 퍼즐은 유토피아의 설계도이다. 내 친구들은 여태까지 침대 위에서 이불을 덮고 자는 뱀과 잠들지 못하고 식탁에 앉아 있는 라쿤, 몸을 말고 잠든 낙타와 낙타를 껴안고 쉬는 고릴라 외에도 많은 것들을 맞추었다고 한다. 한편 유난히 잠귀가 밝은 내 친구의 친구는 몇 밤 연속해서 잠결에 호모 사피엔스의 것이라기에는 너무 무거우면서 조용한 발자국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고 증언한다. 그는 또한 다이앤 포시와 길고양이 집을 만들어주다 죽은 **구 주부, 해빙기의 도래를 피해 들어온 네 명의 네안데르탈인과 마주친 적이 있다고 전한다.

창가의 어둠 아래는 베개와 작은 전등들, 또 많은 담요들로 발 디디기 어려울 정도로 가득하다. ✴✴들이 멸망을 앞둔 우루나 월루사 또는 뉴욕 시장에 들러 곧 죽을 상인들 손에서 사온 것들이다. 잘 만든 물건이란 지상의 어떤 마음보다 오래 가는, ✴✴들의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친구이기 때문에 그들은 열심히 좋은 물건으로 집을 채운다. 

그들은 늦게까지 불을 켜지 않는다. 그들은 그곳 테이블에 앉아 생각하고 퍼즐을 맞추고, 세상에 대해 잡담한다. 무엇이 생각되고 무엇이 이야기되는가? 생각은 과거를 재료로 하지 않을 수 없지만 대화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룰 수 있다. 우리가 갖는 수많은 의견이 결국에는 의견에 불과한 것처럼 ✴✴들의 의견 교환 또한 근본적으로 유희이다. 이 유희의 와중에 그들은 집 밖에 남은 운 나쁜 호모 사피엔스들에 대해 생각하는가? 가끔씩 가볍게라도 걱정하는가? 세상의 끝까지 아니 그 이후까지도 어둠을 떠돌 운명을 고려하는가? 그러나 어쩌면 세상의 끝은 오지 않고 좋은 집 한구석에서 보내는 좋은 시간이 있는 것뿐 아닐까? 

그곳에서도 창가에서 자고 일어나면 몸은 조금 춥다고 한다. 비 때문이다. 하지만 비의 빛으로 방은 밤 내내 어둡지 않고, 아침이 밝으면 하늘에서 물이 또 세차게 내리기 시작한다. 바다 같은 호수 너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따뜻한 산이다. 


3)  ‘그 집’은 어디에 있는가?:

결국은 각도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하나의 각도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해서 사물이 존재하지 않게 되지는 않는 것처럼, 그곳으로 가는 잘 알려진 길과 넓은 문이 없어졌다고 해서 건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닌지도. 단지 관찰 가능한 각도가 좁아지며, 사물을 만지기 위해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 더 복잡해질 뿐은 아닐까? 이를테면 물을 건너야 갈 수 있는 곳이라고 해서 반드시 섬이 아니듯 꿈에서 발견한 곳이라고 꿈에만 존재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모든 대륙이 섬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꿈에서 닿을 수 없는 장소만이 현실로 존재한다고 치면 그렇게 정의된 현실에는 과연 무엇이 남을 것인가? 이를테면 나는 거대한 금 간 콘크리트 건물과 파도치는 오래된 나무 사이를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가던 길을 기억한다. 우리 동은 진정한 아파트들이 그렇듯이 복도식이었다. 복도 양 끝은 비상계단으로 이어져 있었지만, 양쪽 모두 정작 일 층 문이 잠겨 있어 결국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면 중앙 현관을 통과해야만 했다. 단지 안 깊은 곳에는 미용실과 화장실이 있는 이 층 상가가 있었고, 더 숨겨진 곳에는 내가 어렸을 때 이미 쓰지 않게 된 아파트 굴뚝이 서 있었다. 굴뚝에는 더 이상 땅으로 연결되지 않는 사다리가 감겨 있다. 내 방 서랍에는 십 년 된 부채부터 수많은 안 쓴 크리스마스 카드까지 무엇이든 있었고 무엇이든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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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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