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이후의 세계들에 대한 상상력들
죽음은 이야기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어 온 소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죽음은 인간에게 극복할 수 없는 두려움의 대상이고, 그러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거나 전유하고 싶은 욕망들을 이야기를 통해 구현해 보고자 하는 시도들이 반복되어 왔다. 이는 SF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우선은 과학기술을 통해서 인간의 죽음 그 자체를 극복하려는 시도들이 가장 먼저였다. 이는 의학의 발달로 인해 질병의 극복과 평균 수명의 연장과 같은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는데, 20세기 초반까지의 소설들에서 유토피아를 그릴 때 이러한 모습들이 나타나기도 했었다. 이후에는 과학기술의 발달이 거듭되면서 이전에 마법이나 신의 영역이라고 여겨졌던 영원불멸에 대한 구현을 논리적으로 재현하는 모습들이 주로 나타났다.
그러한 가운데 SF에서 죽음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나타났는데, 바로 1980년대 미국에서 형성되었던 사이버펑크(cyberpunk) 장르에서 인간의 뇌를 컴퓨터와 연결하는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의 아이디어들이 이야기로 들어오면서부터였다. 사이버펑크에서 컴퓨터와 연결된 뇌는 의식을 업로딩 할 수 있게 되는데, 이렇게 업로딩 된 인간의 의식은 인간 존재를 의미했고, 이를 통해 유기체적 몸이 가지고 있던 유한성들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이러한 설정들은 이후 수많은 작품들에 적용되었고, <얼터드 카본>과 같은 작품에서는 급기야 몸을 옮겨가면서 인간이 완벽하게 죽음을 극복한 세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와 같이 SF에서 그동안 죽음에 대해 다루는 방식은 대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과학기술의 발달이 영향을 미친다는 설정들이 주를 이뤘다.
그렇다면 죽음 그 이후의 세계들에 대해서는 어떤 형태들을 보여왔을까? 우선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 역시 수많은 이야기에서 다뤄온 것이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야기는 단테의 신곡이 있을 것이다. 중세 기독교의 종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죽음 이후의 세계를 천국과 지옥, 연옥으로 나누어서 그렸고, 동양에서는 불교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죽음 이후의 세계들을 그려내기도 했다. 웹툰을 원작으로 영화화가 된 <신과 함께> 같은 이야기도 불교의 내세관을 바탕으로 구성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죽음 이후의 세계들에 대해서는 주로 종교적인 맥락들을 가지고 와서 구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신화의 시대가 저물게 된 현대에 이전 시대의 신화들을 대체한 과학기술로 상상하는 죽음 이후의 세계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한국의 SF 웹툰에서 이러한 모습에 대한 흥미로운 예를 찾아볼 수 있는데, 바로 모래인간, 까말솔 작가의 <이별로 와요>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사후세계가 외계행성이라는 설정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러한 설정은 이 작품에서만 보여주는 고유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다양한 형태로 존재해 왔던 것이다. 특히 사이버펑크 이후의 SF나 실제 현대에 영적인 존재들에 대해 탐구하는 이들로부터 인간이 죽음 이후에 외계행성 혹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계속 있어왔다. 하지만 이들의 경우 과학기술에 의해서 기존의 종교에서 신의 영역으로 이야기하던 것을 다르게 구체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별로 와요>에서의 사후세계로서는 우리가 지구에서 가지고 있던 지식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고, 그것을 활용해 세계의 법칙들을 자신들에게 맞게 바꾸어 이상향을 구축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별로 와요>의 죽음 이후 세계와 과학기술
언급한 바와 같이 <이별로 와요>에서의 죽음 이후의 세계가 특징적인 것은 단순히 사후에 외계행성으로 옮겨지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옮겨진 행성에서 지구에서의 과학적 지식들을 적용해 영혼들에게 맞게 바꿀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설정은 사후 세계들이라고 여겨졌던 공간의 설정과 결정적으로 가장 큰 차이를 만들어 낸다. ‘마르마로스’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외계행성은 처음부터 지구에서 죽은 영혼들이 모여드는 장소는 아니었다. 어느날 갑자기 지구 근처에 구멍이 생겨나면서 지구에서 죽은 영혼들을 빨아들여 행성과 연결되면서 영혼들이 모여들게 된 것이다. 외계행성으로 옮겨오게 된 지구의 영혼들은 이곳에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지식, 특히 과학적 지식들을 동원해 자신들에게 익숙한 법칙들로 구성되는 사회로 바꾸는 일종의 테라포밍(Terraforming)을 진행하게 된다.
그 결과 마르마로스는 이상적인 형태의 사회를 띄게 된다. 이것은 보통의 천국과 다른 의미를 지니는데, 초월적인 존재들에 의해 마련되어 있는 이상향에 도달하게 된 것이 아니라 척박했던 환경을 지구에서 가지고 있던 지식을 통해 영혼들이 스스로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상적 형태는 천국보다는 오히려 유토피아(Utopia)적 성격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과학기술과 지식으로 인한 환경의 극복과 변화가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데서 전통적인 유토피아 서사와 동일한 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렇게 구축해 놓은 유토피아인 마르마로스에서 영혼들은 먹고 마시는 일이 필요 없음에도 그것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연구를 하고, 영혼을 진정시킬 수 있는 기계장치를 개발한다. 그들은 이를 ‘삶’을 개선하는 연구라고 지칭하고 있다.
이와 같이 기존의 사후세계에 대한 이야기나 유토피아 담론과 크게 다르지 않은 흐름을 보이는 <이별로 와요>가 보여주는 개성은 반복해서 이야기 한 것처럼 영혼들의 세계에 과학기술의 존재한다는 설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과학기술에 의해 이승과의 완전한 분리를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순간부터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비대칭성을 가진 비인간적 사물인 하이브리드(hybrid)들이 증식하는 세계가 되어버리고 만다. 이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기술이 의미하는 바와 그것이 어떠한 영향력을 미치게 되는지에 대한 이해와 응답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들의 욕망대로 행동하게 된다. 각자의 사정과 사연들을 내세우면서 수행하는 모든 일들에 주변과의 연합이나 소통은 존재하지 않고 무리 짓고 과격하게 행동하는 형태로 치달으면서 유토피아의 몰락을 초래하게 된다.
사후세계를 테라포밍 한다는 것도 드문 설정이지만, 그랬기 때문에 그것이 또 다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는 설정 역시 기존의 사후세계를 그리던 이야기에서는 흔하게 등장하지 않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결국 <이별로 와요>에서의 사후세계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특징들은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의 존재 여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서 드러나는 문제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국 이들이 추구하고 있는 과학기술이 무엇이고, 그 기술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며, 그로 인해 바뀌게 되는 마르마로스라의 변화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SF에서 제안하는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이 그대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별로 와요>에서 보여주는 사후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이러한 문제를 SF적인 상상력으로 풀어낸 흥미로운 예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현대사회(사후세계)에서 필요한 것들
<이별로 와요>에서 보여주는 SF적 상상력은 결국 현대 사회의 단면들을 향하고 있다. 과학기술에 의해서 구축된 영혼들의 사회는 결국 현대사회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메시지라고 여겨지는 것들은 우선 ‘지금 여기’를 인식하고 주변의 존재들에 대해 인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마로스에 도착한 영혼들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혼란스러워하고, 기억이 사라져 있는 경우들도 있어 적응을 잘 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적응을 위한 시설이 존재하지만 그곳에서는 이 세계에 대한 정보만을 제공하여 계몽하고자 할 뿐이다. 이러한 구조들은 마치 라투르가 지적했던 계몽주의가 초래했던 시대의 명과 암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과 같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황을 인정하지 않고 주변에 대해서도 제대로 인식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척박한 행성을 테라포밍해 영혼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계를 구축하는데 성공했지만 이후로 기술의 발달이 고도화되면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지구에 있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에 관여하기 시작한다. 자신들의 명분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내세워 지구에 있는 이들을 판단하고 마치 신과 같이 행성 바깥에서 지구에 있는 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이 별’로 오게 하는(죽게 하는) 위험한 일들을 자행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지구에 있는 이들의 의지는 전혀 반영되지 않은 행동들이었다. 마르마로스가 지구보다 훨씬 더 편안하다고 느껴지는 영혼들이 있을 순 있겠지만 그건 개인적인 인식일 뿐이고, 그렇게 판단할 때 발생하는 위계 역시 자의적인 것일 뿐이다. 라투르는 그렇게 위계를 통해 나와 주변을 구분하고 의미화하는 하이브리드들의 비대칭성이 문제시 된다고 지적했든데, <이별로 와요>에서도 그러한 문제들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는 지구와 마르마로스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제대로 인지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류이다. 지구와 마르마로스 모두 인간, 그리고 인간의 영혼들이 자신들의 욕망과 의지를 가지고 주변 환경들을 변화시키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완전히 같다고 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명확하게 무엇이 더 낫다를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블루 마블이라고 불리는 지구와 마블의 어원인 마르마로스라는 이름이 붙은 행성이라고 할지라도 명백하게 서로 다른 영역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호 간의 차이와 사정들을 고려하지 않고 행동한 결과 마르마로스에 있는 영혼들을 자신들이 사랑했던 이들의 삶을 앗아가고, 그와 관련된 다양한 문제들을 발생시키게 된다. 특히 주인공인 이소하 박사의 아들을 데려오는 과정에서 아들이 살고자 하는 마지막 의지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의적 판단으로 이를 수행하게 되는데, 이러한 사실이 밝혀진 뒤에 아들과의 거리감을 오히려 극복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결론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함이 불러오는 다양한 문제들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결국 과학기술로 만들어 낸 관측 장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판단하고 실상 상대방과는 소통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라투르는 이러한 소통을 결국 인간들 간에 수행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물들과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사물들의 의회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사물들과 소통하기 위해서, 사물들이 우리 주위에 연결되어 상호작용하는 행위자 연결망 이론(Actor-Network-Thoery)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 먼저 필요하다. 이를 통해 나와 주변의 위계가 아닌 평평한 존재론적인 상황에서의 대칭성을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주인공인 이소하 박사에게 우선 필요했던 것은 지구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아들을 ‘이 별’로 오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와 마르마로스, 이소하와 아들 간의 상호 존재를 인정하고 ‘이별’이라는 상태로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주변의 사람들 뿐 아니라 다양한 존재, 그리고 과학기술이라는 현대적 상황들과의 소통을 위한 다양한 시도들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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