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FI

1890년, 새들이 돌아오는 나날 <2부>

2024년 8월 통권 227호

(일러스트레이터: 박재령)


<2부>


수십 개의 총구가 일제히 별들을 겨누고 있었다. 말안장에서, 울타리 뒤편에서, 감시탑 꼭대기에서. 깨어 있는 사람은 어느 때보다도 많았으나 한밤의 툼스톤은 평소에 비길 데 없이 고요했다. 마을을 둘러싼 높은 나무 장벽은 어둠보다 두껍고도 무거운 긴장감에 휘감긴 채였고, 그 위에 줄지어 선 총잡이들의 얼굴은 흰 달빛을 받아 밀랍처럼 창백했다. 메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소리 없이 기도하는 자도 적지 않았다. 오늘 밤만큼은 조류학자의 경고가 빗나가기를 간원하는 가냘픈 기도들이 흙먼지 섞인 차가운 바람에 실려 황야로 흩뿌려졌다. 

까마득한 침묵을 깬 것은 멀리서 드문드문 깜박이는 등불이었다. 마을 서쪽의 농장에 일찌감치 진을 친 수우족 기병대가 보낸 신호였고, 그 의미를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윽고 산 위의 별들이 하나하나 꼼꼼하게 일그러져 요사스러운 오색으로 덧칠되어 가자, 싸늘한 전율이 총잡이들의 등줄기와 피부를 타고 물결처럼 퍼졌다. 조류학자 선생이 말한 그대로였다. 놈들이 오고 있었다. 고작 한두 마리가 아니라, 툼스톤의 하늘을 가득 메울 만큼 어마어마한 무리를 이루고서.

서쪽 하늘에 뜬 별 전부가 이질적인 색으로 물들었을 무렵, 목장 쪽에서 우렁찬 함성과 총소리가 일제히 울려 퍼졌다. 말 달리는 소리, 소들이 겁에 질려 우는 소리, 무언가 땅바닥에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소리를 이내 묻어버린 것은 세찬 빗소리와도 같은 무수한 날갯짓 소리였다. 자신들의 목소리조차 그것에 완전히 묻혀버리기 전에, 어프 보안관은 울타리에 늘어선 모두에게 들리도록 온 힘을 끌어모아 이렇게 외쳤다. 

“때가 되었다! 툼스톤을 위하여!”

명예를 위하여! 가족을 위하여! 한 잔의 술을 위하여! 어프의 외침에 호응해 제각기 터져 나온 구호들은 금방 흔적조차 없이 날갯짓 속으로 사라졌다. 처음으로 목장 방어선을 돌파해 날아온 괴물이 곧 총잡이들의 눈에 띄었다. 구물거리며 하늘을 헤엄치는 잿빛 구렁이를 닮은 놈으로, 1873년에 본햄과 포트스콧을 핏물로 뒤덮은 부류였다. 쩍 벌어진 아가리 아래로 길게 뻗은 송곳니가 뒤틀린 달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그 광경이 방아쇠에 걸린 어프의 손가락에 굳은 힘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그 힘이 온전히 쓰이기도 전에 어프의 왼편에서 먼저 총성이 울리더니, 어느새 구렁이는 이미 황야로 추락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울타리를 넘어갈 듯 아슬아슬하게 몸을 내민 사수의 목소리가 이어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봤냐, 피비? 오늘 선취점은 내가 가져간다!”

“호들갑 그만 떨지, 릴리언. 이제 시작한 참이니까.”

아무래도 툼스톤 최고의 명사수 둘은 벌써 승부에 돌입한 모양이었다. 피비 모지와 릴리언 스미스 사이에 조금이라도 협동심이란 게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어프는 종종 생각했지만, 오늘 같은 날만큼은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둘의 경쟁심이 오히려 도움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두 정의 소총에서 번갈아 가며 날아 나온 탄환은 루이스빌에서 대소동을 일으킨 가고일을 닮은 것, 헐튼을 집어삼킨 악어를 닮은 것, 아이오와주 곳곳을 사람이 살 수 없는 생지옥으로 만든 익룡을 닮은 것 등등을 차례차례 쏘아 떨어뜨렸다. 눈알이, 머리가, 척추가 납탄에 맞아 꿰뚫리고 으깨지며 투명한 체액을 소나기처럼 땅에 쏟아 댔다. 희망의 소나기였다. 끓어오르는 공포를 식히고 용기에 물을 대는 고마운 단비였다. 

하지만 명사수 두 명의 손가락에만 온 마을의 희망을 걸고서 마냥 지켜볼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처음에는 겨우 백여 마리 정도였던 괴물의 수가 삽시간에 열 배 이상으로 불어났으니 더더욱 그랬다. 점점 더 많은 괴물이 목장 방어선을 뚫고서 울타리 앞에까지 속속 도달했다. 그중에는 날아다니는 뱀이나 악어 따위보다 한층 위험천만한 놈들도 여럿 섞여 있었다. 인간을 닮은 얼굴과 몸뚱이에 박쥐의 날개와 개구리의 다리를 지닌, 뉴욕주의 브루클린과 코니섬에서 그 어떤 괴물보다도 많은 희생자를 낸 악독한 놈을 목격한 어프의 입가가 분노로 비틀렸다. 결코 잊을 수 없는 부류였다. 9년 전 이 마을의 O.K. 목장에서 어프의 형제들과 기세등등했던 ‘코치스 카운티의 카우보이들’을 잔인하게 찢어발겼던 괴물도 바로 저런 모습을 하고 있었으므로. 

이전까지 본 적 없는 수의 괴물들이 예고조차 없이 목장을 덮친 그날, 첫 습격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어프와 친구인 존 할리데이 둘뿐이었고 엄폐물이라고는 다 쓰러져 가는 헛간 하나가 전부였다. 하지만 둘은 그런 헛간에 숨어 총을 쏴대면서 놈들이 물러갈 때까지 버텨냈다. 살아남았고, 승리했다. 그랬더니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괴물들을 격퇴했다는 소문이 퍼지며 피난민들이 툼스톤에 우르르 몰려든 것이다. 삶의 터전을 잃고 떠돌다가 마지막 희망 하나를 믿고서 거지꼴로 당도한 그들을 어프는 빠짐없이 받아들였다. 값싼 동정심의 발로 때문만은 아니었다. 총잡이가 하나라도 더 있었으면! 말라빠진 손가락이나 방아쇠에 간신히 얹을 줄 아는 꼬부랑 노인이라도 좋으니, 이 헛간에 우리 말고 한 명만 더 있었더라면! 그날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었던 소원이 마음속에 박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O.K. 목장의 전투’가 가져다준 명성에 힘입어 툼스톤을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통치자 자리에 오른 이후로도, 어프는 단 한 순간이나마 그날의 소원을 저버린 적이 없었다. 총을 들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든 총을 쥐여주었다. 나이든 성별이든 피부색이든 전혀 가리지 않았다. 그랬더니 정말로 총잡이들이 툼스톤에 몰려왔다. 피난민 중의 자원자뿐만이 아니라, 괴물 사냥의 성지에서 명성을 떨치려는 용병들까지도. 기나긴 협상 끝에 “버팔로” 빌 코디가 이끄는 와일드 웨스트 용병단을 포섭한 것은 더없이 큰 성과였다. 그는 피비와 릴리언 같은 최고의 명사수들은 물론, 리틀빅혼에서 커스터 장군의 제7기병대가 괴물들에게 잡아먹히는 동안 전사들을 규합해 퇴로를 뚫은 일화로 유명한 ‘주저앉은 황소’라 불리는 수우족 명장까지 데리고서 툼스톤에 눌러앉았다. 단둘뿐이던 헛간의 총잡이는 그렇게 요새에 주둔한 군대가 되었다. 무리가 되었다. 총을 든 무리의 선봉에서 사람 닮은 괴물의 머리통에 총알을 박아 넣으며, 어프는 듣는 이 없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이렇게 중얼거렸다. 

“봤느냐? 인간도 무리를 지을 수 있어. 그리고 인간의 무리는 무엇보다 강하다.”

그것은 방금 쏘아 죽인 괴물에게 던지는 말이기도 했고, 툼스톤이 요새로 완성되기 전에 허무하게 먼저 떠난 친구 홀리데이에게 전하는 말이기도 했다. 과연 괴물들은 끝없이 밀려왔으나,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군세 앞에서도 총잡이들의 눈은 여전히 형형하게 번뜩였으며 감시탑에 배치한 개틀링은 피해갈 수 없는 죽음의 비를 쉼 없이 뿌렸다. 회색 눈보라처럼 우수수 떨어지는 괴물들의 사체는 오늘 밤의 최종적인 승리가 느리지만 꾸준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조금 이른 축포였다. 그리고 이번 승리는 9년 전의 승리보다도 더욱 많은 사람을 툼스톤으로 불러 모으리라, 지금 이상으로 크고 강대한 무리를 이루리라! 툼스톤이라는 마을은 무수한 괴물 놈들의 시체 무더기를 짓눌러 봉인한 묘비로서 영원토록 기억되리라! 어프의 가슴은 이미 두려움이 아닌 흥분으로 고동치고 있었다. 그는 어쩌면 오늘 같은 밤을 줄곧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토록 손을 떨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

날갯짓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지 대략 세 시간쯤 지났을까, 잠들 수 없는 밤의 굉음이 어느 정도 사그라질 때쯤 플로렌스는 은신처를 빠져나와 조용히 중앙 거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 외곽에서는 여전히 총성이 울리고 있었으나 아까처럼 잦지는 않았다. 비명이나 울음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밤이 시작될 무렵의 긴장된 침묵과는 다른 소강상태의 고요가 온 툼스톤을 감싸안고 있었다. 먼지 쌓인 컴컴한 길 위로 학자의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점점이 내려앉았다. 

인적 없는 대로 한가운데에서 플로렌스는 날개 여섯 장이 나선형으로 돋은 커다란 구렁이 하나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으나, 자세히 보니 그것은 머리 정중앙이 뻥 뚫려 미동조차 하지 않는 채였다. 아마 총에 맞아 죽어서도 관성으로 계속 마을로 날아오다가, 여기서 마침내 동력을 잃고 소가죽 차양을 무너뜨리며 추락한 것이리라. 가까이 다가가서 본 구렁이는 과연 뼈와 가죽밖에 남지 않은 앙상한 모습이어서, 무시무시하다기보다는 차라리 안쓰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벌어진 입에서 기름을 질질 흘리는 그 사체를 지나 플로렌스는 마을 서쪽으로, 포화의 거센 불꽃이 여전히 깜박이는 곳으로 계속 나아갔다. 

서쪽 장벽 앞에 도달한 플로렌스의 눈은 가장 먼저 낯익은 실루엣을 찾아 사방을 훑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울타리 뒤에서 총알을 쏘아대는 숱한 총잡이들 가운데서도 피비 모지의 굳건한 자세는 특히 도드라졌으므로. 바로 곁에서 울타리에 기어오르다시피 한 채 아슬아슬한 자세로 방아쇠를 당기려는 어린 릴리언 스미스와 비교하면 더더욱 그러했다. 항상 그러듯 사격 대결이라도 벌이는 모양이었지만, 플로렌스가 계단을 올라 다가가니 피비는 대결을 잠시 제쳐두고 달려와 어김없이 핀잔부터 주었다.

“도움도 안 되는 사람이 무슨 일이야? 쥐새끼처럼 안전하게 틀어박혀 있지 않고.”

“이렇게 많은 개체를 가까이서 볼 기회인데 숨어만 있을 수는 없죠. 게다가 지금은 그렇게까지 위험해 보이지도 않고요. 가장 큰 무리는 일단 지나간 모양이죠?”

“그래, 많기는 엄청 많았지. 하지만 선생이 호들갑 떤 데에 비해선 별것 아니던데. 크게 다친 사람도 없어 보이고, 수우족 분들도 전부 무사히 돌아왔고 말이야.”

오페라글라스로 울타리 너머를 내다보던 플로렌스가 피비의 말에 고개를 조금 갸웃했다. 마을 밖 황야는 어딜 보나 사체 천지였다. 갖가지 기괴한 모습을 한 암회색 사체들이 두터운 양탄자라도 되는 양 대지를 뒤덮고 있었다.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을 울타리 바로 아래에 이르러서는 시체의 산이 몇 개나 생겨났을 정도였다. 척 보기에도 수만 마리는 가뿐히 넘어 보이건만, 이만한 수의 괴물들이 몰려왔는데도 사망자는커녕 중상자조차 없다니. 물론 기뻐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어프 보안관의 철저한 준비와 피비를 비롯한 총잡이들의 놀라운 실력이 거둔 성과임도 분명했다. 하지만 플로렌스는 아주 자그마한, 아직까지도 조류학자의 논리로 자라나지 못해 그저 꾸물거리기만 하는 불안감 한 조각을 도무지 가슴에서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런 불안에 장작을 집어넣은 건 마침 날아오던 독수리를 닮은 괴물 한 마리였다. 지금까지 본 것 중에서는 그나마 새를 닮았다고 할 만한 그 흉물은 방향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고 연신 비틀거리며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려 하다가, 결국에는 릴리언의 매서운 총알에 두 눈 사이를 정통으로 꿰뚫려 정말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이걸로 확실히 자기가 앞섰다면서 릴리언은 신이 나 폴짝폴짝 뛰었다. 플로렌스는 전혀 신이 나지 않았다. 물어보는 목소리에 한층 짙은 의구심이 깃들었다. 

“다 저랬나요, 피비? 오늘 날아온 놈들, 다 저렇게까지 기운이 없었나요?”

“일단 내가 본 놈들은 하나같이 그랬는데. 무슨 문제 있어? 선생이 말한 대로잖아. 멀리서 날아왔으니까 죄다 굶주려 있을 거라면서.”

“네, 그래서 우려한 거고요. 평소 이상으로 맹렬하게 달려들 거로 생각했거든요. 철새가 대이동을 하는 건 결국에 먹이를 구하기 위해서란 말이죠? 계절이 바뀌면 먹이가 있는 곳도 바뀌니까요. 그런데 사냥조차 제대로 못 할 만큼 지쳐 버렸다니, 그러면 애초에 고생스럽게 먼 거리를 비행할 이유가……. 잠시, 잠시만요. 생각 좀.”

이번처럼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마주했을 때 플로렌스가 매달릴 구석은 하나뿐이었다. 하늘이 아직 낯설지 않았던 시대의 지식, 지혜, 논리. 오듀본의 책에 실린 그림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플로렌스는 언제나 그러했듯 새들의 습성으로부터 답을 구하고자 했다. 26번 동판화의 캐롤라이나잉꼬가 무리를 지어 살아간 이유를, 62번 동판화의 여행비둘기가 한때 이 땅에 수십억 마리나 있었던 이유를, 208번 동판화의 에스키모쇠부리도요 암컷이 죽어간 이유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하늘의 색이 어떻게 바뀐다 한들 땅의 법칙은 영영 변치 않을 것이므로. 무리를 짓는 짐승들 사이에는 언제나 공통점이 있을 것이므로.

답을 찾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과연 공통점은 있었다. 

너무나 당연해서, 동시에 너무나 터무니없어서 미처 생각하지 못한 가능성이.

“……전부 최상위 포식자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무리를 짓는 거예요.”

그 말에 피비의 눈동자가 아주 조금 흔들렸다. 플로렌스가 내놓은 답의 의미를 곧장 깨달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단지 코끼리만큼 크고 퓨마보다도 무시무시한 저 온갖 흉악한 괴물들이 최상위 포식자가 아닐 거라는 주장이 다소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피비는 겁을 먹은 과학자의 말을 무작정 무시하지 않기로 했다. 이해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설명을, 바들바들 떨며 토해져 나오는 플로렌스의 목소리를 그저 들어 주기로 했다. 

“들어 보세요. 언제나 포식자는 적고 먹이는 많아요. 이것만큼은 절대 흔들리지 않는 법칙이죠. 만일 포식자가 먹이보다 많다면 금방 먹이가 다 잡아먹혀 동날 테고, 그러면 포식자도 굶주려서 수가 자연히 줄게 되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최상위 포식자는 언제나 가장 소수일 수밖에 없어요. 반대로 포식자에게 사냥당하는 종은 큰 무리를 짓는 경우가 많고요. 몇 마리가 잡아먹히더라도 나머지가 합심해서 천적을 쫓아내거나, 하다못해 동족이 먹히는 동안 재빨리 도망칠 수라도 있으니까요. 캐롤라이나잉꼬도, 여행비둘기도, 에스키모쇠부리도요도 전부 같은 생존 전략을 쓴 거예요. 

그리고, 그리고 저 괴물들이 무리를 지은 이유도 어쩌면 마찬가지일지 몰라요. 생각해 보세요. 이만한 무리가 마을을 덮쳤는데 다친 사람이 없다니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굶어 죽기 직전인 놈들이 정작 사람을 적극적으로 잡아먹으려 들지는 않았다는 소리잖아요. 기진맥진해서는 비틀비틀 날아오다가 총에 맞아 우르르 죽기만 했죠. 그렇다면 이유가 뭐겠어요? 굶어 죽는 것보다 더 큰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 아니겠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말이 되잖아요. 저것들은 철새처럼 대이동을 하고 있던 게 아니에요. 천적에게 쫓기고 있었던 거죠. 그러니까 사냥할 여력이 없을 수밖에요!”

머릿속에서 휘몰아치던 말을 마구잡이로 한바탕 토해내고서, 플로렌스는 핏기가 가신 얼굴로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한편 피비는 여전히 플로렌스의 걱정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잘 모르겠는 논리야 일단 논리라고 쳐도, 코끼리보다 큰 괴물 무리를 잡아먹는 천적이라는 게 도대체 이 세상에 존재할 수가 있을까? 그러려면 도대체 얼마나 큰, 어떻게 생겨 먹은 괴물이어야 할까? 그런 괴물은 하다못해 상상조차 해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상상은 어차피 피비의 몫이 아니었다. 그런 머리 아픈 일은 눈앞에서 벌벌 떠는 학자에게나 맡겨두고서, 피비는 더 직관적이고 명쾌한 과제나 후딱후딱 처리하면 그만이었다.

“천적 얘기 말인데, 아직은 그냥 추측인 거지? 괴물 잡아먹는 괴물이 저기 어디에 도사리고 있단 게 뭐가 확실히 밝혀진 건 아니지?”

“네, 네. 그렇죠. 아직은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대비해 두면 좋겠네? 어프 씨한테 피난 얘기라도 다시 꺼낸다거나 말이야. 아무튼 대비해서 손해 볼 일은 아니니까.”

“맞아요. 당장, 당장 해야죠.”

“알겠어. 그러면 일단 어프 씨부터 찾아보자고. 여기는 릴리언한테 맡겨둬도 될 것 같으니까. 릴리언! 앞으로 10분쯤 시간 줄 테니까, 이 기회에 진짜로 한 번 앞질러 보지 그래?”

릴리언의 경쟁심에 한층 불을 붙일 요량으로 피비가 괜히 소리쳤다. 이미 자기가 앞지르고 있다며 펄펄 뛸 것을 내심 기대하면서. 하지만 릴리언은 화를 내지 않았다.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피비보다 열 살이나 더 어린 명사수는 울타리 뒤에 우두커니 선 채 그저 머나먼 허공을, 아까까지 괴물 무리를 우르르 쏟아내던 일그러진 별들 사이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나 소란스럽게 굴던 녀석이 갑자기 왜 저러나 싶어진 피비는 릴리언의 시선 방향으로 무심코 고개를 돌렸고…….

그것과 눈을 마주쳤다. 

다음 순간, 피비는 플로렌스의 손목을 붙잡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

숨도 쉬지 않고 계단을 달려 내려온 피비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 가장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파랗게 질려 입술만 겨우 달싹이는 플로렌스의 꼴사나운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플로렌스 역시 그것을 아주 잠깐이나마 보고 만 모양이었다. 그것 보라고. 하늘을 보기만 한다고 미칠 리는 없다더니, 괜한 걱정이라고 그렇게나 우기더니. 무심코 내뱉으려던 빈정거림을 속으로 꿀꺽 삼키고서, 피비는 일단 플로렌스의 뺨부터 힘껏 쳤다. 한 대, 두 대, 세 대, 그러고도 반대쪽 뺨까지 한 대 더. 그때야 겨우 이성 비슷한 것이 돌아온 플로렌스가 가장 먼저 내뱉은 말은 이러했다. 

“몰이사냥이에요. 지칠 때까지 뒤쫓아서 잡아먹는……. 저건, 저건 그런 존재예요.”

“그새 그걸 알아냈어? 선생도 참 한결같다.”

“알아낸 게 아니에요. 이해해 버린 거예요, 아마도.”

그렇게 말하고서 플로렌스는 어깨를 끌어안고 제풀에 부르르 떨더니, 기운이 죄다 빠져버린 목소리로 간신히 한 마디를 덧붙였다.

“오듀본은 저 비슷한 것도 그린 적이 없으니까요.”

오듀본이라는 사람의 책을 본 적조차 없는 피비도 그쯤은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저런 형상을 사람이 대체 무슨 수로 그려낼 수 있겠는가. 방금 본 것이 정확히 어떤 모습이었는지마저 도무지 확신할 수가 없는데. 피비의 기억에 남은 것은 눈알뿐이었다. 오직 그 커다란 눈알만이, 밤하늘 한가운데에 달처럼 떠서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던 형언 불가능한 시선만이 눈을 깜박일 때마다 어둠 속에 선명히 나타나 피비의 정신을 무자비하게 꿰뚫었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눈을 감고 있었다가는 그대로 혼절해 버릴 것만 같았다. 

어차피 눈을 감고 있을 여유가 없기도 했다. 피비가 계단에 발을 들이기가 무섭게 등 뒤에서 일제히 쏟아지던 신음은 이미 잦아들었지만, 대신 들려오기 시작한 목소리들은 방벽 위쪽의 상황을 고스란히 알려주고 있었다. 와 봐! 와 보라고! 더 가까이 오라니까! 쏴라! 툼스톤을 지켜내야 한다! 명예를 위하여! 하나같이 투지로 불타는 고함이었지만, 정작 그 속에 총성은 하나도 끼어 있지 않았다. 아무도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고 있었다. 릴리언 스미스도, 와이어트 어프도, 총 한 자루에 목숨을 맡기고서 서부의 황야를 종횡무진했던 그 어떤 총잡이도. 

피비가 저들처럼 무력한 허수아비로 전락하지 않고 재빨리 도망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크기와 거리를 재는 것만큼은 특기였으니까, 맞힐 수 있는 표적과 없는 표적을 누구보다 똑바로 구분할 줄 알았으니까. 밤하늘을 타고 툼스톤으로 다가오는 저것은 결코 맞힐 수 없는 표적이었고, 총으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사냥감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총잡이의 일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그래, 학자의 일이라면 또 모를까.

“일어나, 선생. 일어나서 이것부터 좀 받아.”

완전히 힘이 빠져 흐느적거리는 플로렌스를 어떻게든 끌어당겨서 일으켜 놓은 뒤, 피비는 아직도 바들바들 떨기만 하는 불쌍한 조류학자의 어깨에 자기 윈체스터 소총을 둘러메 주었다. 총알 주머니를 챙겨주는 것도 물론 잊지 않았다. 갑작스레 주어진 묵직한 선물에 플로렌스가 공포조차 순간 잊고 당황하자, 피비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서 재빨리 할 말을 마쳤다.

“잘 들어. 선생은 빨리 스미소니언으로 가. 오늘 알게 된 걸 다른 학자 양반들한테 전부 말해주라고. 말은 내 걸 타고, 총 쏘는 법은 전에 대충 가르쳐줬으니까 알지? 필요하면 머뭇거리지 말고 쏘면 돼. 자, 어서.”

“그게 무, 무슨 소린가요. 당신은요? 총도 말도 다 주면 당신은 어쩌려고요?”

“나는 아직 할 일이 남았거든. 어프는 틀렸을지 몰라도 주저앉은 황소는 심지가 강한 사람이니까, 어쩌면 아직 말이 통해서 마을 사람들 피난시키는 걸 도와줄지도 몰라. 그리고 릴리언도……. 걔는 아직 너무 어려. 억지로라도 끌어내 봐야지.”

그렇게 내뱉은 목소리에 자신감이라곤 하나도 실려 있지 않았음을 스스로도 잘 알았기에, 피비는 괜히 부끄러워져서 몸을 홱 돌리고선 계단을 저벅저벅 올라갔다. 그런 피비를 말릴 수도 뒤쫓을 수도 없어 플로렌스는 다만 저벅저벅 계단을 올라 방벽 위쪽으로 향하는 총잡이의 실루엣을 한동안 올려다보았으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시야 가장자리의 하늘을 일렁일렁 물들이기 시작한 잿빛 그림자의 존재를 눈치챈 순간에 플로렌스의 몸은 이미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그저 한없이 두려워하면서, 혼란스러워하면서. 소용돌이 치는 밤공기에 잡아먹혀 허무하게 녹아 사라지는 피비의 마지막 당부를 들으면서. 

“가는 길에 꼭 전해, 선생! 툼스톤에는 절대 오지 말라고! 만나는 사람마다 말하란 말이야!” 

*****

칠흑 같은 어둠을 표류하는 말안장 위에서, 플로렌스 미리엄은 여전히 208번 동판화를 생각하고 있었다. 

26번도, 62번도, 그리고 다른 몇몇 번호도.

오듀본은 대이동에 나선 에스키모쇠부리도요의 모습을 여행비둘기에 비유했다. 여행비둘기 떼가 지나가면 일식인 양 해가 가려지고 새똥이 눈처럼 떨어졌노라고도, 캐롤라이나잉꼬 무리가 밭에 내려앉으면 화려한 카펫이 깔린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고도 썼다. 전부 어마어마한 무리를 짓는 새들이었다. 한때 북미 대륙에는 그런 무리가 여럿씩 있었다. 어째서였을까, 이 땅의 새들은 어째서 그렇게나 큰 무리를 짓게 되었을까. 플로렌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하늘을 가득 메운 새 떼의 형상을 눈앞에 그려볼 수밖에 없었다. 짹짹거리고 푸드덕거리며 소용돌이치는 거대한 부정형의 구름이 어느새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그러다가 구름이 서서히 눈을 떴고, 동판화 속 암컷 에스키모쇠부리도요의 텅 빈 눈이 오페라글라스 너머에서 플로렌스를 빤히 들여다보았고…….

아, 그랬구나. 

플로렌스가 어둠을 머금고 속삭였다. 

어쩌면 그 새들은 알았을지도 모른다. 나아가 흉내를 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태곳적부터 저 하늘 높은 곳에 도사리고 있던 온갖 날아다니는 것들을 겁주어 쫓아내기 위해서, 그것들의 천적처럼 온 하늘을 어두컴컴하게 뒤덮는 구름 모양을 함께 그럴듯하게 이루면서. 이 새로운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에스키모쇠부리도요와 여행비둘기와 캐롤라이나잉꼬의 무리를 직접 눈에 담고서 기억 속 형체와 비교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플로렌스에게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 한때 오듀본이 보았던 무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하늘이 낯설어지기 전부터 그 새들은 이미 총알과 덫과 독극물에 포위당한 채 초라하게 줄어들어 가고 있었으므로.

그래서였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거야. 

전부 천적의 모습을 흉내 내던 새 떼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괴물들이 우르르 내려왔고, 괴물의 천적도 이내 뒤따라왔다. 알아냈어, 피비. 이제야 알았어. 속삭이고 또 속삭이며 플로렌스는 끊임없이 논리를 가다듬고 근거를 쌓아 올렸다. 무엇을 위해서? 적어도 스미소니언에 전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아마 소용없을 테니까. 여행비둘기와 캐롤라이나잉꼬와 에스키모쇠부리도요가 북미의 하늘을 다시 장엄하게 뒤덮도록 그것이 기다려 주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니 목적지 없이 달리는 말 위에서 플로렌스가 끝까지 생각을 멈추지 않은 것은, 단지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을 되풀이해 생각하며 정신의 파편 하나하나를 시시각각 부숴 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있어. 우리는 이해할 수 있어. 드디어 새들을 이해할 수 있어.

이제 우리도 그 새들처럼 될 거잖아.

부서지고 또 부서져 형체를 잃어버린 정신이 고운 모래알처럼 밤공기에 흩날리다가 말발굽 자국 위로 점점이 내려앉는 동안, 플로렌스 미리엄의 마지막 남은 이성은 끝까지 208번 동판화를 생각했다. 그 동판화에 어떤 존재가 그려져 있었는지는 이제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26번도, 62번도, 그리고 다른 모든 번호도……. 하지만 얼마든지 논리적으로 추측해 볼 수는 있었다. 어려운 일은 전혀 아니었다.

어차피 전부 그 눈알이었을 테니.

*****

본 소설은 1890년 4월 26일자 《더 툼스톤 에피타프》(The Tombstone Epitaph)에 실린 유명한 기사, 〈사막에서의 목격: 후아추카 사막에서 기이한 날개 달린 괴물이 발견되고 사살되다〉(FOUND ON THE DESERT: A Strange Winged Monster Discovered and Killed on the Huachuca Desert)를 모티브로 하였습니다. 작중의 괴물 묘사는 기사에 적힌 내용을 거의 그대로 따랐음을 밝힙니다. 1890년에 두 카우보이가 사막에서 추격전 끝에 사살한 거대한 비행 괴물(이른바 ‘툼스톤 천둥새’)이 대체 무엇이었는지, 그 사체를 툼스톤으로 가져오겠다는 기사 말미의 계획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현재까지 알려진 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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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화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