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Review

이것은 결국 모든 생명들에 대한 이야기다

김보영의 [종의 기원담]을 통해 보는 비인간-인간 존재들의 공생 가능성

2024년 7월 통권 226호


이것은 결국 로봇의 이야기다


김보영의 [종의 기원담] (아작, 2023)의 작가의 말에는 이러한 구절이 나온다. “부디 이야기를 자신에게 익숙한 세상에 맞추기 위해, 모든 것을 은유로 보며 눈에 보이는 단어를 다른 단어로 치환하려 애쓰지는 말기를 바란다. 단어는 눈에 보이는 단어 그대로의 뜻이다. 이것은 결국 로봇의 이야기다.” 작가는 SF가 이야기에 대한 사유 없이 도식적으로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allegory)로만 읽히는 것, 특히 로봇을 이야기의 중심으로 가지고 왔음에도 그저 인간에 대한 은유로만 읽히면서 사라지는 것들을 경계했던 것으로 보인다. 로봇이 이야기에 등장한 이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너무 손쉽게 소거하고 관습적으로 인간을 중심에 두고 읽어내는 것들을 말이다. 이러한 우려를 받아들여 [종의 기원담]은 “기계 생명을 향한 찬가”이며 “사물에 깃든 생명에 바치는 경애”로 읽어야 그 세계가 제대로 보인다. 그러기에 우리는 [종의 기원담]의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1029 모델의 로봇 케이 히스티온에게 우선 집중해 볼 필요가 있다.


책의 제1편에서 케이 히스티온이 살아가는 세계는 로봇들이 거의 유일한 ‘생명체’에 가깝다. 이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지구상에 유기물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고, 태양은 공장에서 나온 기체들로 인해 철저하고 안전하게 차단되어 있다. 제1편의 세계에서 세상을 구성하는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물질은 무기물이며 로봇들은 공장이라고 불리우는 곳에서 생산된다. 로봇들은 모델 넘버로 구분되어서 각자의 특징을 가지고 있고, 당연하게도 생물학적인 성별의 구분이나 젠더 구분과 같은 개념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이상하게도 2000 모델의 경우 ㄱ타입과 ㄴ타입 등으로 외형의 구분이 되어있을 뿐이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야기의 세계는 철저하게 로봇들이 주체가 되어있다. 당연하게도 이곳에서의 상식이라는 것도 로봇들의 존속과 연관된 것들이다.


독서를 진행하는 사이 독자들은 이러한 세계에 대해 미심쩍음을 내보이게 된다. 텍스트의 바깥에서 로봇들이 의심을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한 답을 알고 있음을 인지하고, 이들 세계의 당연함이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텍스트 바깥의 독자들의 당연함이고 텍스트 안에서 로봇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당연함은 독자들의 당연함과 다르다. 하지만 독자들의 당연함은 독자들의 것일 뿐 텍스트 안의 당연함은 아니다. 독자들은 오히려 텍스트 안의 로봇들의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 낯선 세계를 따라가 봐야 한다. 그래야 이들의 세계가 왜 이렇게 구성되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우리에게 낯선 세계에 대한 법칙들을 사고 실험하여 인식의 지경들을 넓히는 경험은 SF가 줄 수 있는 특별한 것인데 [종의 기원담]의 경우 이러한 특징들이 치밀하게 잘 배치되어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의 부탁대로 [종의 기원담]은 로봇의 이야기로 읽어내고 로봇의 이야기로 사고하는 것을 요구한다. 섣불리 인간을 중심으로 사고하지 않고 이야기 안에서 만들어 놓은 세계의 법칙대로 사고하는 연습을 할 때 작품을 경험하는 진가가 드러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법칙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고 정답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인간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었다는 당연한 사실을 자각하는 것, 그것이 이 작품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다. “생명은 자신의 의지를 갖고 있어야 하고, 전기 에너지를 이용해야 하며, 칩이 있어야 하고, 공장에서 만들어야” 한다는 명제를 받아들이는 것, 여기서부터 작품에 대한 독법이 시작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인식의 전회는 단순히 작가가 자신이 구축한 세계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한 방법론에서 그치지 않고, 현시대의 SF를 읽어내는 독법으로도 유의미한 지점에 닿아있다. 


로봇-인간 존재들의 공생(Symbiosis) 가능성


[종의 기원담]의 세계는 로봇에 대한 이야기지만 제2편과 제3편으로 확장되면서부터 ‘인간’이란 존재가 이들의 세계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로봇들이 주인이었던 세계에 주인공인 케이의 논문으로부터 출발한 유기 생물학이 발달하게 되고, 그것이 결국 유기 생물들의 탄생을 위한 변화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변화의 양상이 쉬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이들은 유기 생물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마치 신화와 같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특히 10만 여년 전에 멸종한 유기 생물이 다시 자랄 수 있는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다양한 실험들을 거치지만 번번이 실패하기만 한다. 로봇류들이 존재하기에 적합하게 구축되어 있는 세계에서 유기 생물들은 생존 조건은 상상한다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무기 생물이 생물의 기준이 되어있는 세상에서 그에 반하는 영역에 있는 유기 생물들은 상식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서 케이가 던지는 질문은 인상적이다. 케이는 “우리가 너무 로봇 기준으로 생각하는게 아닐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유기 생물들이 생존할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에 대해 상상하고자 한다. 유기 생물들이 가지고 있는 당연한 조건인 성장이나 변화들이 “철학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으로 여겨지는 세계에서 케이의 이러한 질문은 그것만으로도 과감하고 위험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케이가 수행하고 있는 것은 리차드 그루신(Richard Grusin) 등이 이야기했던 ‘비인간 전환(nonhuman turn)’을 떠올리게 하는 ‘인간 전환(human turn)’인 것이다. 인간중심으로 구축되어 있는 세계에서 당면한 한계와 문제들을 해결하게 위한 방법으로 대두되고 인는 비인간 전환과 같이 로봇류들의 세계에서 이전에 없던 문제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인간 전환이라는 인식론적 전회(Epistemological turn)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도전은 결국 인간을 그들의 세계에 다시 등장하게 만든다. 제2편은 인간의 탄생을 앞에 두고 도망쳐 버렸던 케이가 자신이 떠나왔던 칼스트롭 연구소에 다시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로봇들이 그곳에만 들어가면 행방이 묘연해지는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1편으로부터 30여년이나 지난 이 시기에는 유기 생물학이라는 것들의 유행도 오히려 시들해지고, 로봇들에 대한 권리와 중요성이 더욱더 부각되는 시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구소에 다시 들어간 케이는 그곳에서 지난 30여 년 동안 인간을 만들어 내고, 그들이 살아가기에 적합하게 유기 생물체들을 위한 환경을 구축해 놓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을 마주한 케이는 로봇이 존재하는 이유와 인간과의 공생 불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시설에 있던 모든 인간들을 죽이게 된다. 참혹한 비극으로 끝난 것 같았던 제2편을 지나 제3편에 이르면 새로운 가능성이 발생하게 되는데, 바로 참극으로부터 살아남아 있던 인간들과의 공생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케이와 로봇류들이 도달하게 된 것은 각각의 존재들이 주체적으로 상대를 인식하고 그 차이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이 과정이 가능하게 한 케이의 존재는 인간과 로봇, 로봇과 인간이라는 고전적이고 고정적인 관념에 저항하고 그것들을 끊임없이 사유하는 것이었다. 로봇은 인간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존재로 설계되어 그 영향이 지금까지 이어졌지만, 유기 생물학에 대한 새로운 시작을 추동했던 케이는 새롭게 태어난 인간들에게는 일종의 창조자이기도 했다. 이렇게 전후의 관계들이 끊임없이 전복되어 있는 케이라는 존재는 이들이 새로운 상태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 이들은 서로 간의 차이를 명백하게 확인하고 인식적 타자경험(Fremderfahrung)을 통해 상호 주관성을 만들어 내어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공생의 가능성을 부여받게 된다.


거절의 주체성과 공생발생(Symbiogenesis)


이들이 공생(Symbiosis)의 가능성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를 완벽하게 생각하지 않고, 거기에서 두려움이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제2편에서 케이가 만들어 냈던 비극들은 케이가 스스로에게 가진 두려움으로부터 연유한 것이었다. 케이의 이와 같은 두려움은 로봇류의 특성과 맞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불안정으로 인해 케이는 인간들이 내리는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지 않는 존재로 만들어 준다. 대개의 로봇류들이 인간이 내리는 명령에 무비판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을 보이는 데 반해 이에 저항할 수 있고, 부정할 수 있는 자율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들이 로봇류들과의 공생을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지점이 되었다. 자신들의 명령에 무조건 적으로 복종하는 위계 상의 하위 존재자 아니라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할 수 있는 존재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케이가 보여준 거절은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단편 「필경사 바틀비」(1853)에서 보여주었던 것과 같이 독립된 주체가 수행할 수 있는 중요한 증거이기도 하다. 특히 [종의 기원담]에서 인간의 명령은 로봇류들에게 초월적 존재인 신의 명령과 같이 작용한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와같이 위계가 명확한 존재들과의 공생은 오히려 위험한 것이다. 위계가 깨지는 순간 걷잡을 수 없게 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이는 더 이상 해결 가능하지 않은 문제로 확장되기 십상이다. 이야기 내에서의 인간들 역시 제2편에서 케이가 일으킨 비극으로 인해서 이러한 교훈을 얻게 되었다. 위계로 이루어진 관계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에 대한 회의가 생긴 것이다. 결국 그들은 위계를 통한 강제적이고 위압적인 안전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로봇류들과의 공생을 모색하고자 한다. 위계의 균열 지점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경계하면서 동등한 주체들과 상호연관하는 세상을 꿈꾼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의 명령에 그대로 따르지 않기를 결정하는 로봇, 케이 히스티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가능성을 확인한 인간들은 앞으로도 영원히, 로봇류와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인간의 어떤 명령도 들을 필요가 없다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이는 로봇류들에게는 존재의 신비처럼 남아있던 이해할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법칙들을 파훼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서로가 서로의 존재들을 인정하고 진정으로 공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과감하게 믿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결국 로봇의 이야기이며 기계 생명, 사물에 깃든 생명들에 대한 찬가인 [종의 기원담]에서 이야기하는 기계 생명, 사물에 깃들 생명은 단순히 로봇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로봇과 인간류가 공생하는 세계들이 새롭게 구성되면서 식물을 비롯한 다양한 생명들이 생겨나고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의 변화 가능성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능성은 결국 그다음으로 향한다. “서로 다른 종 사이의 지배 체계를 부여한 고대의 어떤 정신 나간 초월자”의 예상을 훌쩍 벗어나서 위계가 해체되어 있는 세상을 만들어 낸 로봇류와 인간들은 “로봇의 영혼이 인간의 몸에 깃들어 태어날지도” 모르고, “우리가(로봇류가) 인간이 되어 다시 번성할 수도” 있는 세상을 꿈꾼다. SF적이고 과격하게 무기 생물과 유기 생물이 서로 상호 작용하여 일종의 공생 발생을 이루게 되는 세상에 대한 상상인 것이다. 마치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가 이야기 했던 ‘공생자 행성(Symbiotic Planet)’의 이상적이고 초월적인 모습이 [종의 기원담] 내에서 펼쳐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대적 담론들에 조응하는 소설 속 세계와 인식의 전회들은 현대의 우리에게 직면해 있는 많은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들을 사고 실험하게 한다. 결국 [종의 기원담]은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과 기존의 위계에서 벗어나 모든 종(種)들이 동등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마지막까지 살고자 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 시대에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거대한 인신론적 전회의 양상을 소설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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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용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