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Review

위래, 사람을 사로잡는 이야기의 비밀을 아는 작가

2023년 11월 통권 218호

사람은 둘 사이에 비슷한 점을 잘 찾아내는 동물이다. 특히 사람은 사람의 삶과 관계가 있는 비슷함을 더 잘 찾아낸다. 흔한 예시로 사람은 자동차를 앞에서 보면 헤드라이트는 눈 같고 자동차 회사의 문장은 코 같고 자동차 앞의 그릴 부분은 입 같아서 그 모습이 사람 얼굴 같다는 생각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정도가 심한 예시로는 이모티콘도 있다. 키보드의 6자 키 위에 새겨져 있는 기호인 “^” 모양을 “캐럿”이라고 부르는데, 한국인들은 캐럿 두 개만 나란히 써 놓아도 그것이 사람의 웃는 얼굴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비슷한 점을 잘 이용하면 신비로운 이야기, 그럴듯한 상상을 활용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꾸려 나갈 수 있다. 만약 주인공이 비좁은 가구 가게 안의 통로를 걸어가고 있는데 통로에 세워 둔 의자의 옆면이 등 뒤에 닿았다고 해 보자. 이런 이야기로는 그럴듯한 상상을 이어 나가기란 쉽지 않다. 그렇지만 낙엽이 다 떨어진 길게 뻗은 나뭇가지의 끝부분이 사람의 등 부분에 닿는 장면을 생각해 보자. 앙상한 나뭇가지의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길게 뻗은 팔이나 손 모양과 비슷하다고 상상한다. 그렇다면 그 비슷한 점을 이용해서 신비로운 이야기를 상상해 보자. 나뭇가지가 사람의 손이 된다고?


나뭇가지가 어깨 뒤에 닿은 느낌을 누군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고 주인공은 착각한다. 주인공은 고개를 돌려 나무를 쳐다본다. 이런 이야기는 더 자연스럽고 쉽게 이어져 나가는 느낌이다. 주인공은 고개를 돌려 나무를 쳐다본다. 나무를 보고 주인공은 무엇을 느낄까? 왜인지 나무가 불길해 보이는 느낌이 든다는 이야기로 이어진다면 어떨까? 나무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해 보면 어떨까? 아예 나무가 정말로 팔을 뻗듯이 나뭇가지를 움직여 그 가지로 나를 툭툭 건드리는 신비로운 일이 벌어졌다고 해 보아도 재미있지 않을까?



위래 작가의 “두 발로 걷는 남자 괴담”에서 중심 소재로 이용한 것은 엘리베이터다. 자동으로 문이 열리고 버튼을 누르면 그 장소로 자동으로 움직여 가는 엘리베이터는 현대의 전기, 전자 문명의 산물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서 15층까지 간다고만 해도 사실 그것은 꽤나 먼 길이다. 걸어서 올라간다면 한참 고생해야 할 거리이고, 누구 등에 업혀서 간다고 해도 편안하지는 않을 거리다. 그런데 엘리베이터는 짧은 시간 안에 그 먼 거리를 단숨에 움직인다. 그러면서도 그 먼 거리를 가는 동안 버튼을 누르는 것 이외에 다른 조작은 없다. 그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움직인다거나 말을 타고 간다는 느낌과도 전혀 다르다. 그냥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면 이동은 끝난다. 누구나 쉽게 이용하여 이미 세상 곳곳에 널리 퍼져 있는 자율주행 이동 장치라고도 말해 볼 수 있는 것이 엘리베이터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그 이동에서 기이한 느낌을 받기 쉽다. 엘리베이터를 조종하는 사람도 없는데, 엘리베이터는 혼자서 움직여 나를 다른 공간에 가져다준다. 신비의 이동 장치와 비슷하다는 상상을 떠올리기에 좋다. 대부분의 엘리베이터는 타고 있는 동안 정확히 어디로 움직이는 지, 바깥이 보이지 않게 된다. 이 점도 신비감을 더한다. 닫힘 버튼을 누르면 엘리베이터 안은 잠시 아무것과도 통해있지 않고 바깥과는 완전히 막힌 단절의 공간이 된다. 그러나 잠시 후 문이 열리면 나는 자동차들이 펼쳐진 지하 5층에 있을 수도 있고, 푸른 하늘에 구름이 펼쳐진 지상 40층 전망대에 있을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엘리베이터는 공간 이동의 문이나 포털과도 비슷하다. 


그렇다면 세상의 그 많은 건물 중에, 어느 한 건물, 아주 이상한 곳에 있는 엘리베이터, 한 대가 전혀 다른 세계로 사람을 데려다주는 역할을 한다고 해도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좋지 않을까? 아마도 그런 이유로 엘리베이터에 관한 이상한 이야기나 기괴한 도시 전설은 여럿 나와 인터넷을 떠돌며 세상에 퍼져 있는 듯하다. 


위래 작가가 “두 발로 걷는 남자 괴담”에서 엘리베이터를 신비의 공간으로 이동하는 장치라는 소재로 사용한 방법도 이런 이미 세상에 퍼져 있던 그런 이야기들과 비슷한 부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버튼을 누르는 순서를 특별하게 조작하면 그 외의 방법으로는 전혀 갈 수 없었던 곳으로 엘리베이터는 사람을 데려다준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런 이야기에서 익숙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두 발로 걷는 남자 괴담”의 재미는 바로 그렇게 비슷함으로 인해 그럴듯한 상상으로 쉽게 이어지는 소재를 그만큼 생생하게 연결해 우리 앞에 펼쳐 준다는 데서 일단 훌륭하다. 연결하기 좋은 소재, 공감하기 쉬운 상상의 소재를 가져와서 그것에 폭 빠져들 수 있도록 생생한 글솜씨로 읽기 좋고, 받아들이기 좋게 펼쳐 두었다.


특히 이 소설에서 가장 기가 막힌 대목은 주인공이 처음 엘리베이터의 비밀에 대해 이야기를 듣는 장면이다. 과학의 여러 영역 중에서도 가장 공상적인 이야기로 자주 취급 받곤 하는 평행세계, 평행우주에 관한 소재가 신비의 공간으로 사람을 데려다주는 엘리베이터와 연결되어 있다니, 그렇게 쉽게 믿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들입다 그냥 이야기를 갖다 붙이면, 그런 게 어디 있나 싶어 허무맹랑하게 들릴 내용이고, 그렇다고 평행우주가 어쩌네, 우주의 무한함과 유한함이 어쩌네, 하면서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는다면 지루하고 딱딱해지기 쉬운 내용이다. 나는 “가장 이상한 예언 사건”이라는 장편 소설을 쓰면서 이런 함정에 걸려들었다. 너무 괴상하면서도 복잡한 사연을 줄거리 속에 엮어 가려고 하다 보니 몇몇 부분에서 너무 길고 어려운 설명이 대화 속에서 많이 이어져 버리고 말았다. 내 스스로 돌아봐도 딱 걸리는 느낌이 들어, 다 좋은 데 거기서 읽기에 어색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위래 작가는 “두 발로 걷는 남자 괴담”에서 환상의 공간 이동 엘리베이터라는 너무나 흐리멍텅한 소재를 사채빚에 시달리는 젊은이와 돈 받으러 온 사람 이야기에 깔끔하게 연결해 두었다.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이상한 평행우주를 연결하는 엘리베이터라는 공상적인 소재가 그럴듯한 현실적인 도시 풍경에 녹아들어 가깝게 다가온다. 


옛날 만화 도입부에는 흔히 박사님이 등장해서 신비로운 현상을 발견했다면서 알파베타 별이나 감마 델타 별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는 내용을 줄줄 늘어놓는 장면이 많이 나왔다. 그런데 위래 작가는 그런 역할을 하는 장면을 빚 때문에 고생하는 도시 뒷골목 이야기를 하면서 보여 주고 있다. 대화에 나타나 있는 말투도 그럴듯하고 진짜 대화하는 느낌이 풍부하다. 그런데다가, 범죄, 사고, 죽음 같은 자극적이지만 사실적인 소재가 슬쩍슬쩍 끼어들어 있어서 더욱 호기심을 키운다. 나는 위래 작가의 소설에서 이 대목을 보고 후회를 많이 했다. 나도 좀 더 노력해서 내 소설에서도 이런 식으로 대화를 채워 두었다면 훨씬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계속하게 되었다.


위래 작가처럼 현실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풀어 놓으면서 환상적인 소재를 곁들이니까, 환상도 더욱 신비로워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능력자들끼리 싸우는 만화에서 주인공이 하늘을 날아다니다가 장풍으로 산을 부수어도 독자들은 그러려니 할 뿐이다. 그렇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다르다. 누가 눈빛을 보내면 항상 상대방은 재채기가 나온다는 정도의 사소한 이상한 현상만 일어나도 “세상에 이런 일이”와 “서프라이즈”에서 여러 차례 방영되며 인기를 끌 수 있다. 이것이 현실과 환상의 차이이고, 이것을 가깝게 갖다 붙이면 소설에서 환상을 읽으며 기이함을 느끼면서도 진짜 있었던 이야기 같다는 느낌도 받을 수 있다. 바로 그 감각을 이용해 독자를 끌어들이는 실력을 위래 작가는 멋지게 보여 주었다. 듀나 작가가 “동전 마술” 같은 단편에서 보여 주었던 실력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다. 


특히 이상한 엘리베이터를 소개해 주는 대화에서 주인공이 상대방의 웃는 얼굴을 보고 웃는 얼굴을 처음 보는 것 같았다면서 잠시 뜸을 들이는 대목은 정말 노련하다. 이것이 이야기에 대한 관심이 더 깊어지도록 속도를 조절하면서 동시에 글을 읽는 흐름도 자연스럽게 매만지는 솜씨다. 그 부분은 그야말로 어떻게 재미난 글을 풀어 내는 지 비결을 체득한 사람 같다.


뒤이어지는 정말로 이상한 세상을 모험하는 내용들도 무척 읽기 즐겁다. 특히 처음으로 주인공이 이상한 평행우주를 경험하면서 겪는 부분은 매우 좋다. 독자까지 같이 신비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환상의 세계에 빠져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애초에 소설의 시작부터 비교적 상식적인 말을 꺼 내놓는 주인공과 빚에 시달리면서도 싱글싱글 웃으며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는 상대방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러니 처음부터 독자는 상식적인 사람인 주인공 쪽의 시각으로 이상한 소리 하는 상대방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 이야기를 접하는 동안 주인공은 자기도 모르게 주인공과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소설 속의 관찰자와 독자가 일치되는 느낌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후, 이야기가 펼쳐지며 이제는 주인공이 이상한 세계를 조금씩 관찰하는 내용으로 넘어가면, 독자도 같이 주인공의 시선으로 그 이상한 세계를 관찰하게 된다. 독자는 주인공과 하나가 된다. 저절로 독자는 주인공에게 이입하게 된다. 주인공이 위기에 빠지면 독자도 당황하고 주인공이 알 수 없는 문제를 맞닥뜨리면 독자도 같이 궁금하게 된다. 주인공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이 이상한 세상은 어떤 곳이고 어디로 더 나아가게 될지, 나라면 어떻게 할지, 생생한 상상 속에서 계속 책장을 넘기게 된다.


여기까지는 “환상특급”이나 “블랙 미러” 같은 TV 시리즈에서 환상적이고 우화적인 내용을 다루는 에피소드 한 편 같은 느낌을 주는 내용이다. 모르긴 해도, 여기까지를 당장 방송국에서 판권을 사들여서 TV극 한 편으로 만들어도 그럴듯하게 한 시간 분량쯤은 채울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주인공은 한 군데의 이상한 평행 우주만 경험하지 않는다. 다른 세계로, 더 이상한 세상으로, 더 환상적인 곳으로 주인공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해 간다. 말하자면, 재미난 상상을 해 볼 수 있는 온갖 이상한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갖가지로 계속 늘어놓는다. 그 많은 상상을 보여줄 수 있는 도구는 갖춰져 있다. 신비의 엘리베이터라는 장치가 있다고 치고 이야기의 본론으로 넘어왔으니, 신비의 엘리베이터를 사용하고, 또 사용하면 된다.


나는 이런 것도 단편 소설이나 중편 소설이 줄 수 있는 좋은 재미라고 생각한다. 이상한 도구를 이용해 신비의 세상을 돌아다니는 이야기는 영화 중에도 많다. “빽 투 더 퓨처 3”에서는 자동차를 타고 주인공들이 서부영화 속 시대를 여행하고, “엑설런트 어드벤쳐 2”에서는 공중전화기를 이용해서 주인공들이 저승을 탐험하며, “헬레이저” 시리즈에서는 이상한 퍼즐 조각을 이용해 마귀들의 세상을 방문한다. 


그런데 어디인가로 신비로운 곳을 여행할 수 있는 장치가 있다면, 굳이 한 군데만 여행을 할 이유가 있을까? 필요한 대로 정신없을 정도로 이상한 세상들을 이리저리 돌아다닌다는 이야기도 안 될 것 없지 않나? 


영화에서는 새로운 세상을 보여 주려면 그만큼 세트도 새로 만들고 특수분장도 새로 해야 한다. 그러니까 제작비 때문에라도 보여 줄 수 있는 세상에는 한계가 있다. 그나마 “릭 앤 모티” 시리즈 같은 애니메이션 시리즈에서 비교적 다채로운 이상한 세상들을 다양하게 보여 줄 수 있는 정도다. 그렇지만 혼자서 글로 쓰는 소설이라면 제작비 걱정 같은 것을 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위래 작가처럼 하는 것도 글의 매력, 소설의 즐거움을 즐기는 방법이다. 온갖 악몽 같은 세계를 줄줄이 내키는 대로 마음껏 이어 가도 안 될 것이 없다? 소설에서 눈앞에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마귀들의 머리통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장면을 보여 주고 싶다면, 그렇게 서른 글자 정도만 쓰면 된다. 그런 사연들이 모여 있으니 읽다 보면 어떤 후련한 느낌마저 든다. 돈 떼이지 않으려고 고민하는 사실적인 이야기에서 점점 악몽의 세계로 떨어져 가며 점점 너무 먼 나락으로 간다는 흐름은 공포물로서도 나쁘지 않다.


중반부까지의 훌륭한 글솜씨와 이야기를 점점 키워 나가면서도 흥미를 더하는 후반부까지의 흐름에 비해서 결말은 조금 구획된 틀에 가까운 느낌이다. 더 무서운 일, 더 괴로운 일을 주인공에게 들이 밀기위해 벌어지는 사연으로 공포물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이 결말의 풍경은 자주 보던 사건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만하면 그래도 괜찮은 결말이라고 생각한다. 굳이 몇 가지 마음에 남았던 점을 돌이켜 보자면, 할아버지나 몇몇 주변 인물에 대한 사연 정도다. 주인공의 죄책감과 연결되어있는 할아버지라는 인물이 소설 초반부터 잘 연결되는 감정의 흐름 속에서 더 자연스럽게 등장했다거나, 이야기 전체의 중심 줄기와 조금 더 이어질 수 있는 방편이 있었다면 소설 전체가 더욱더 튼튼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야기의 큰 흐름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몇몇 인물들이 이야기 전체의 구성이나 주인공의 감정 변화와도 부드럽게 맞춰 같이 흘러가면서 균형 잡힌 분량으로 등장했다면 어땠을까? 전체 내용이 더욱 절묘하다는 감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몇 가지 다른 생각을 해 볼 수 있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결국 그만큼 소설 속에 푹 빠져 많은 생각을 했다는 의미다. 그만큼 이 소설에서 위래 작가는 뛰어난 기량을 가진 다듬어진 솜씨를 잘 보여 주었다. 재미난 생각을 떠올려 본 것들을 시원하게 부려내어 풍성한 글을 만들어 내면서, 사람이라면 눈길을 줄 수밖에 없는 소재와 장면 묘사 방식으로 이야기를 갖추었다. 그 이야기를 들려 주기 위해, 이야기 속에서 무엇이 보이고 무엇이 느껴지는 지를 머릿속에 바로바로 심어 주는 단어들을 명쾌하게 엮었다.


앞으로 위래 작가가 계속해서 이런 실력으로 여러 가지 다른 소재들을 소재에 어울리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풀어 간다면, 그때마다 볼 만한 이야기들이 줄줄이 탄생할지도 모른다. 다시 소설을 읽어 보니 그에 대한 기대는 더욱 커진다. 계속해서 꾸준히 글을 써서 앞으로도 이런 소설들을 여럿 또 써주기를 응원하고 싶다. 나는 이런 글솜씨는 반복될수록 더 자라나는 법이라고 생각한다. 언제인가 위래 작가가 반드시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이야기 거리를 잡아낸다거나, 스스로 꼭 한 번 표현해 보고 싶은 감정을 떠올린다면, 그 선명한 생각이 이와 같이 훌륭한 이야기 만드는 솜씨에 엮여 더욱 강렬한 소설이 탄생할 것이라는 상상도 한번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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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