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서 장관님을 이쪽으로!”
다급한 목소리에 영철은 앞에 선 장관의 등을 어깨로 밀쳐내고 돌아섰다.
“젠장!”
채 20m도 떨어지지 않은 어두운 모퉁이를 돌아 2m가 넘는 키의 도마뱀 외계인이 그 키만큼 긴 꼬리를 좌우로 흔들며 쫓아오고 있었다. 녀석은 긴 꼬리가 심하게 흔들리는 탓에 덩달아 긴 목도 좌우로 흔들면서 한 번은 오른쪽, 한 번은 왼쪽 눈으로 영철을 노려보았다.
방아쇠를 당기려던 영철은 가만히 놈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평소 곧게 펴고 달리던 꼬리가 좌우로 심하게 흔들리는 게 녀석은 분명 심한 상처를 입었으리라. 그렇다면 굳이 아까운 총알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
도마뱀 외계인도 그런 영철의 생각을 읽었는지 걸음을 늦추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분노와 절망이 섞인 눈빛으로 영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긴 목을 늘어뜨리고 마지막까지 영철을 바라보며 고꾸라졌다.
영철은 잠시 외계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안구가 굳어지는 걸 확인하고 해치(hatch) 안으로 들어섰다. 손잡이를 돌려 해치를 잠그고 쉽게 열리지 않도록 구석의 파이프를 손잡이 안에 꽂아 넣었다.
“서툴러요!”
맞은편 해치 앞에서 기다리던 장교가 영철을 향해 소리쳤다. 그의 앞을 지나던 영철은 힐끗 그의 군복을 확인하고 그가 러시아군이라는 걸 알았다.
“장관님은?”
“다음 방에서 계단을 내려가요.”
러시아 장교는 능숙한 한국어로 대답했다.
영철은 곧장 방을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아래로 이어진 계단은 조명 하나 없이 어두웠지만 영철은 난간을 잡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손전등이 영철의 앞을 비췄다.
“조심해요.”
어눌한 한국어였다.
힐끗 돌아보니 미군복 차림의 병사들이 마치 좀비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벽을 따라 앉아있다. 영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손전등 빛을 따라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그렇게 두 개 층을 내려가자 아래층에서 백열등 불빛이 희미하게 보였다. 영철은 그 불빛에 의지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이쪽입니다.”
해치 앞에선 병사가 영철을 불렀다.
해치를 지나자, 벽에 칠해진 오래된 페인트가 반쯤 벗겨진 방이 나왔다. 이 정도면 영철이 최근에 본 방 중에 가장 잘 관리된 느낌이다.
“늦었군, 서두르게.”
합참의장이 전투기의 비행복처럼 생긴 옷을 영철의 품에 던지며 말했다.
“오다가 놈들에게 기습을 당했습니다. 도대체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오라고 한 이유가 뭡니까?”
“희망 때문이지.”
합참의장은 짧게 대답했다.
희망?
영철은 머릿속에 희망이라는 말의 뜻을 어렴풋이 떠올리면서, 가슴속에서 뭔가 환하게 피어나는 느낌을 받았다. 희망, 그런 말을 들어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우린 지난 10년의 치욕을 바로잡을 거네.”
“바로 잡다니요?”
“타임머신이 만들어졌어!”
영철은 뒤통수라고 맞은 듯 멍하니 합참의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지난 10년 간 치른 전투와 계속된 패전의 치욕과 분노, 슬픔을 떠올렸다.
10년 전. 지리적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4대 군사강국들은 북한의 붕괴와 함께 혼란한 한반도의 상황을 정리하고자 UN의 깃발을 들고 한반도에 모여들었다. 그러나 자국의 이익을 챙기기 급급했던 그들은 통일을 원했던, 혹은 우려했던 한국인들의 기대, 우려와는 달리 다시 북한을 쪼개어 관할하기 시작했다. 그때 어느 쪽에 속하느냐가 자신들의 이익과 장래에 어떤 이익을 주는지 계산하기 시작한 북한군과 주민들은 각 국의 관할지역을 넘나들며 외교적으로는 그저 말썽으로 폄하된 사건, 사고를 일으켰다. 그 결과 다국적군은 현지 치안유지라는 자신들의 임무 대신 관할권 분쟁과 무력 충돌에 빈번하게 휩싸였고, 마침내 나토의 해군까지 가세해 북한의 동․서해안을 다시 남북으로 나눠 중국, 러시아 등과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세계언론들은 핵무기를 제외한 재래식 무기만으로 계산했을 때 세계 군사력의 30%가 한 곳에 모여 대치한다며 우려를 표했다. 그러나 그 우려는 곧 유일한 희망으로 바뀌었다.
일촉즉발의 숨막히는 대치가 14시간째 이어진, 종일 번개가 치던 날이었다.
사전 경고도 없이, 머리 위 하늘에서 곧장 내려온 외계인은 세계 주요도시와 모든 군사시설을 파괴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모든 나라가 군을 지휘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할 대표 한 명 남기지 못했다. 분명 완벽하게 준비된 침략이었다. 그러나 외계인들도 급박하게 진행되던 한반도의 정황을 예견하진 못했다.
군사적 대치상황을 중재를 위해 제주도로 날아온 UN 특사와 각 국의 국무부, 혹은 국방부의 협상 대표들은 살아남은 유일한 대표, 군 지휘권자가 됐고, 그들은 서로를 겨누던 총구를 재빨리 외계인을 향해 돌렸다.
그러나 지난 10년은 그들에게 좌절만 안겨주었다.
연합군은 외계인과의 전투에서 연패에 연패를 거듭했다. 한때 세계 조선 1위 국에 주둔하면서도 해군은 띄울 배 한 척 없었고, 공군은 전투기는 고사하고 글라이더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두더지처럼 땅을 파고 기어들어 가는 일뿐이었다.
“언제요?”
“나도 이틀 전에 보고 받았네. 아직 시험 단계지만 미룰 수 없는 상황이야. 이미 전선은 붕괴됐어. 젠장, 여기가 ‘호치민’이나 ‘가자’였다면 더 버텼겠지만, 우리 지하 벙커는 이미 놈들에게 전부 노출됐네.”
영철의 물음에 합참의장이 대답했다.
“하지만, 시험 단계라면 무턱대고 장관님을 보낼 순 없잖습니까?”
영철이 구석에서 도움을 받아 비행복을 입고있는 장관을 보며 말했다.
그러자 합참의장이 영철을 나직이 윽박질렀다.
“젠장, 지금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라니까. 이미 동물실험은 성공했다니, 그걸 믿고 해볼 수밖에 없어.”
“하지만, 다른 사람으로 실험해보고 안전하면 그때……”
“빌어먹을 안전, 그딴 건 없어! 젠장, 한 번 사용하면 이틀을 충전해야한다더군. 그런데 지금 우리 상황은 이틀이 아니라 하루, 아니 2시간도 버티기 힘든 상황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나? 지금 보내지 않으면 인류는 전멸이야! 끝이라고!”
전멸, 끝이라는 말은 영철에게 익숙한 단어였다. 영철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거의 반사적으로 물었다.
“언제, 어디로 가야 합니까?”
합참의장이 검은 배낭을 건네며 말했다.
“타임머신을 통과하면 11년 전 이곳에 도착할 거네. 놈들이 나타나기 1년 전이지. 가방에는 장관, 그땐 차관이었지만, 아무튼 장관과 자네들 여권, 접속해야할 각 국 보안 컴퓨터의 접속 코드가 모두 들어있어. 과거 10년 전에는 절대 서로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것들이지만 지금은 공유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각 국 정부에 전달해야할 외계인의 정보와 새로운 작전 전술이 있네. 자네는 국방장관의 보좌관 겸 경호원이니까 장관님을 도와 필요한 사람들을 모아야해.”
“하지만, 우리가 과거로 간다고 해도 그들이 우리가 미래에서 왔다는 걸 믿어줄까요?”
“젠장, 그러니까 보안코드를 준 게 아닌가? 과거의 인간들이 자네들을 믿지 못하면 알아서 일을 진행시켜야해. 북한 따위에 신경 쓸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리란 말이야.”
영철이 합참의장에게 떠밀려 다음 방으로 들어가자, 이미 먼저 들어서 있던 국방장관이 합참의장에게 물었다.
“의장님, 이거 정말 믿을만한 겁니까?”
영철이 다가가 보니 그저 평범하게 생긴 나무문틀이 굵은 구리선에 감겨있었다. 그리고 만약을 대비해 함께 가기로 자원한 연합군의 특공대원 6명이 선임하사의 구령에 따라 완전무장을 한 채, 그 앞에 도열해 있었다.
“동물실험으로 봤을 때, 유기체도 안전합니다.”
합참의장 대신 때에 찌든 가운을 입은 백발의 노(老) 박사가 대답했다.
“동물실험? 사람은?”
장관이 못미더운 듯 물었다.
“사람은……”
박사가 머뭇거리자 장관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박사를 보며 말했다.
“아니, 내가 실험용 쥐라도 된단 말입니까?”
“이미 쥐와 별반 다른 건 없잖소, 장관.”
합참의장이 눈을 흘기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안전성은 확인해야하지 않습니까?”
장관이 따지듯 물었지만 합참의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지구에서 안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소, 장관. 당신도 잘 알잖소.”
“젠장, 그럼 돌아올 수는 있는 겁니까?”
장관의 물음에 합참의장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 지옥으로 말이오?”
그의 말에 두 줄로 도열해있던 특공대원들도 하나같이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반면 장관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합참의장의 쓴웃음에는 돌아올 수 없다는 대답이 담겨있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무얼 위해서 가야 하는 건지.
“기억되지 못할 영웅이 되는 거죠.”
특공대 선임하사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혼잣말처럼 말하고 어금니를 깨물었다.
장관이 부르르 떨며 합참의장을 쏘아보았다. 합참의장은 단호한 얼굴로 장관을 바라보았다. 영철이 장관과 합참의장의 쓸데없는 분쟁을 막기 위해 나서며 물었다.
“혹시, 만약 타임머신이 오작동해서 실패하면 어떻게 하죠?”
영철의 질문에 합참의장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턱을 내밀더니 시선을 내리깔고 영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실패라는 말 자체가 귀에 거슬린 게 분명했다. 실패 따위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 듯했다.
“제 말은 만약, 우리가 가야할 시간의 훨씬 전이나 한참 뒤로 가게 되면 어떻게 해야하냐는 겁니다.”
“그럼, 최고의 피난처를 갔다고 생각하게.”
합참의장이 대답과 함께 박사를 향해 손짓했다. 박사는 분주히 계기반을 조작하더니 마지막으로 구석에 있는 커다란 스위치를 힘껏 잡아당겼다.
그러자 평범해 보이던 나무문틀 주위로 푸른 유화물감이 물에 번지듯 색이 번지더니 서서히 가운데로 모이다가 소용돌이처럼 휘감기면서 갑자기 문 뒤로 쭉 뻗어나갔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지켜보던 이들은 모두 멍한 표정으로 그 안을 바라보았다. 영철은 조심스럽게 문을 돌아 뒤쪽을 살폈다. 그러나 뒤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앞에서 보이던 푸른빛도 없었다. 그저 반대편 장관의 모습이 그대로 보일 뿐이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이제 시작된 겁니다.”
박사가 키보드를 두드리며 말했다.
문틀 위에 달린 LED에 [2032년 11월 20일 06시 30분 10초]라는 시간이 표시됐다.
“이제 됐습니다.”
박사가 장관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나 장관은 갑자기 나타난 이상한 빛과 인간으로서는 최초라는 말에 못미더운 듯 망설이고 있었다.
그때 해치 너머로 두려운 총성이 들렸다. 합참의장은 고개를 들어 환기구를 바라보았다. 스피커처럼 환기구를 통해 비명이 들려왔다.
“젠장, 놈들이 여기까지 들어왔군. 어서 서둘러.”
그러나 장관은 석상처럼 굳은 얼굴로 비명소리를 내지르는 환기구만 바라보았다.
“빌어먹을, 자네들이 먼저 들어가!”
합참의장의 말에 특공대가 마지막일지도 모른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는 마치 럭비선수처럼 문틀을 향해 돌진했다.
특공대가 사라지자 이어 합참의장이 영철을 향해 소리쳤다.
“어서!”
영철은 이를 악물고는 머뭇거리는 장관의 허리를 끌어안고 문틀 안으로 뛰어들었다.
2.
영철은 어렸을 적에 가본, 수영장의 기다란 미끄럼틀을 통과하는 기분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그저 문틀을 통과했을 뿐이다.
어두운 방이었다. 마치 타임머신을, 아니 문틀을 통과하기 전의 그 방처럼 보였다. 그들 뒤로, 조금 다르게 생겼을 뿐 문틀도 있었다. 그러나 뭔가 낯선 느낌이었다. 영철은 11년 전이라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먼저 통과한 특공대원들은 주위를 경계하며 둥근 방벽처럼 앞을 막고 서있었다.
“오, 온 건가? 여기가 어디지?”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사지가 제대로 붙어있는지 확인하던 장관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영철은 앞을 가린 특공대원들을 사이를 헤집고 나가며 말했다.
“아무래도 11년 전 그 방인 것 같습니다.”
“죄송하지만 아닙니다.”
마치 선고를 내리는 판사와 같은,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한 사내가 두 개의 막대기가 세워진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있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아쉽게도 11년 전 그 방은 아닙니다. 아무튼 시공간-항[港](Space-Time Port)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저는 시공관리사 코드명 ‘일루미난트’라고 합니다.”
“시공관리사?”
영철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시간여행자들의 안전과 시공간-항의 관리 및 보안을 담당하고 있죠.”
쥐색 망토로 목 아래를 가린 사내는 방금 도착한 영철과 일행을, 담담한 얼굴로 하나하나 바라보고는 말했다.
“시간여행은 처음이시죠? 우선 여러분의 여행 목적을 확인하겠습니다.”
특공대원들은 침묵 속에서 사내를 바라보았지만 여차하면 방아쇠를 당길 기세였다. 영철은 우선 그가 도마뱀 외계인이 아닌 인간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며 대원들을 진정시키고 일루미난트에게 다가갔다.
“우리는 인류를 구하기 위해 타임머신으로 11년 전, 그러니까 2032년으로 가려고 왔소. 그런데 도대체 여기가……”
“정확히 2032년 11월 20일 06시 30분 10초죠?”
일루미난트가 영철 일행이 막 통과한 문틀 위에 써진 LED의 숫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건 처음 노 박사가 입력한 바로 그 시간이었다.
“그렇소.”
“메고 계신 배낭에는 지난 11년 동안 알아낸 외계인의 정보와 보안코드가 담겨있고요.”
영철은 처음 보는 이 사내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그리고 이 사내가 이미 자신들의 임무를 알고 있다면, 자신들이 11년 전이 아니라 미래로 온 게 아닐까하는 생각에 불안했다. 그러나 사내는 더 두려운 말을 꺼냈다.
“죄송하지만 여러분의 시간여행은 불가합니다. 그런 목적이라면 돌아가셔야 합니다. 아니면 무장을 해제하고……”
순간 노리쇠가 찰카닥거리며 장전되는 소리가 들렸다.
“잠, 잠깐만.”
영철이 대원들을 진정시키고 일루미난트에게 물었다.
“당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일루미난트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여러분은 시간을 거슬러 과거를 바꾸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건 법적으로 금지돼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우주의 지구에서 최초로 타임머신을 만들고 시간여행을 하기 때문에 모르고 있겠지만, 타임머신을 이용해 과거를 바꾸는 시도는 시공간을 통과해 여행하는 우주 어디에서나 금지돼있습니다. 그게 시공간-항법 제 2조 1항이죠.”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검은 피부의 특공대원 한 명이 험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위협하듯 다가왔다. 그러나 일루미난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간단합니다. 타임머신을 통해 과거를 바꾸는 건 금지돼있으니, 당신들의 시간으로 돌아가던가, 당장 무장을 해제하고 저의 지시에 따르라는 겁니다.”
영철은 도무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다는 듯 일루미난트를 바라보기만 하자 장관이 다가와 말했다.
“이보시오. 나는 국방장관 최혁기요. 나는 현재, 그러니까 2043년의 최고 명령권자로서 당신에게……”
일루미난트가 손을 들어 장관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그건 여러분 세계에서의 지위일 뿐입니다. 여기서 당신은 그저 시간여행자일 뿐이죠. 그리고 저는 시공관리사로서 당신에게 제 지시에 따르도록 명령할 권리와 우주의 균형을 유지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무슨 헛소리야. 이 빌어먹을 자식아! 네놈이 우릴 막겠다는 거냐, 지금?”
뒤에서 듣고있던 특공대원 한 명이 으르렁거리며 다가와 일루미난트의 이마에 총구를 겨누며 윽박질렀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특공대원들은 잠시 당황했지만, 지금은 위기의 지구를 구하기 위해 한시라도 빨리 11년 전으로 가야했다. 1초도 지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일루미난트는 여전히 담담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총으로 저를 위협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미안하지만 그 정도의 위협은 제 업무상 위협도 아닙니다. 흔한 일이죠. 그동안 당신 같은 분들을 한두 번 상대해본 것도 아닙니다.”
“허, 그래? 근데 아직 살아있는 걸 보니, 그 녀석들은 방아쇠를 당길 용기가 없었나보지?”
“아뇨. 용기뿐만 아니라 실제로 당겼죠.”
일루미난트의 대답에 총을 겨누던 대원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그리고 다시 잔뜩 눈살을 찌푸리더니 총구를 일루미난트의 이마로 가져갔다. 이마 안으로 총구가 아무 저항 없이 밀려들어갔다.
“젠장, 홀로그래피야.”
특공대원들이 장관과 영철를 에워싸며 사방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젠장, 영사기는 어디 있지? 감시 카메라는?”
선임하사가 성난 사자처럼 외쳤다.
그러나 일루미난트는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놀라실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을 해칠 생각은 없으니까요. 그저 무장을 해제하고 저의 지시에 따른다면 여기에 더 머물러도 좋습니다. 시공간-항 호텔에서 편히 지내실 수도 있습니다. 물론 원하신다면요. 아니면 지금 바로 여러분 우주의 지구, 여러분이 떠난 그 시간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영철, 우리가 타임머신을 통과한 게 맞긴 한 건가?”
영철의 뒤로 몸을 숨긴 장관이 지금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물었다.
그러나 영철도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일루미난트가 말했다.
“타임머신을 통과한 건 맞습니다. 처음이라 지금 상황을 이해 못하시는 것 같으니 잠시 설명해드리죠. 사실 이런 최초의 경우는 과학자들이 와서 이야기를 듣는 게 이해가 쉬운데, 지금 여러분 지구의 상황이 그런 상황은 아니죠.
우선 과거에는, 물론 이제 과거, 현재, 미래가 의미 없어졌지만, 여러분이 이해하기 쉽게 과거라고 하죠. 과거에는 모든 타임머신이 자유롭게 시공간을 넘나들었습니다.”
“모든 타임머신?”
“설마 여러분의 타임머신이 전 우주를 통틀어 최초의 타임머신이라고 기대하시는 건 아니겠죠? 죄송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 최초의 타임머신은 인류가 출현하기 이전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초기 타임머신 개발자들은 단순한 시간여행이라 믿으며 시공간을 통과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큰 혼란이 발생했습니다.”
“혼란이라니?”
영철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일루미난트는 테이블 위의 버튼 하나를 눌렀다.
그러자 두 막대기 사이에 영상이 펼쳐지면서 거대한 나무가 나타났다.
“최초 타임머신 개발자들은 과거와 미래를 오가는, 그저 단순한 시간여행이라 생각하면서 시공간을 넘나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만든 타임머신은 단순한, 혹은 완벽한 선형 타임머신이 아니었습니다. 평행우주, 다중우주에 대해선 들어보셨죠? 시공간은 수많은 우주와 그만큼 많은 지구와 연결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우주의 지적생명체는 대부분 타임머신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초기에 만들어진 타임머신은 그런 다양한 우주를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자신의 우주가 아닌 다른 우주에 가서 또 다른 자신을 만나고, 그러면서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처음 떠났던 현재로 돌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다른 우주의 지구로 가서 다른 우주의 자신을 만나고, 서로 자신이 진짜라며 싸우고 심지어 다른 우주의 자신을 [시간의 악마]라고 부르며 죽이거나 죽기도 했죠. 즉, 과거 시간여행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다른 우주로 가서 죽거나 범죄자로 전락해버린 겁니다.
그리고 종종 시간여행자들의 기준으로 이미 과거인 역사에 개입하면서 새로운 우주, 간단히 말해 또 다른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그 새로운 우주는 지금 우리가 북유럽 신화의 [우주수]에서 차용해 단순화시킨 시공간 모델에 새로운 가지를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즉, 시간여행자의 개입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우주가 주류로 편입된 거죠.
새로운 우주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땐, [닫힌 시공간]이라고 부르는 [시간의 거품]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시공간을 넘지 않던, 말 그대로 시간만을 타고 이동하던 타임머신도 선의의 시간여행자들을 처음 그들이 떠난 우주가 아닌 다른 우주에 내려놓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를 들어드리면, 제가 처음에 떠난 곳은 A라는 우주였는데, 제가 시공간을 이동하는 동안 어디선가 다른 여행자가 과거에 개입해 새로운 우주 혹은 시간의 거품이 생겨나면서 시공간에 왜곡이 생겨났고, 이를 인지하지 못한 저의 타임머신은 저를 A가 아닌 B, 혹은 C라는 우주에 내려놓은 겁니다. 이런 식으로 [시공간의 방랑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시공간의 방랑자?”
“원래 출발했던, 고향 우주로 돌아가지 못하고 다른 우주를 떠돌면서 자신의 생체시간만 소비하는 사람들을 말하죠.
믿지 못하시겠지만 서기연대로 2221년에 20년째 자신의 우주를 찾지 못하고 헤매던 [시공간의 방랑자]가 처음으로 발견됐습니다.”
“2221년이라니? 지금은 2043년인데.”
장관이 터무니없는 말 더는 못 들어주겠다는 듯 발끈하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그건 여러분의 기준일 뿐입니다. 이곳에서는 우주의 탄생조차도 모두 현재진행형입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는 타임머신이 만들어지면서 무의미해졌죠. 그저 상대적인 현재만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과거와 미래의 기준도 바뀌었습니다. 이미 내가 아는 일은 모두 과거일 뿐이죠. 제가 서기 3,000년에 태어났어도 서기 5,000년에 있을 일을 안다면 서기 5,000년도 과거일 뿐입니다.
아무튼 그 일로 [시간 여행]을 상품으로 내건 여행사들은 엄청난 소송에 휘말렸습니다. 물론 여행사들은 여행자들이 저지른 실수 때문에 다른 우주가 생긴 거라면서 책임을 회피했죠. 그리고 지구 정부의 입장에서도 골치였습니다. 저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어떤 우주의 지구에서는 인구의 0.002%가 단순한 시간여행이라 믿었던 시공간 여행을 통해 증발해버렸습니다. 0.002%, 물론 작은 숫자지만, 500억 인류 중에 0.002%면 1백만 명이죠.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우주에 최소한 100만이라는 시간의 방랑자가 존재한다는 뜻이니까요.”
“500억? 지금 인류는 500만도 안 돼.”
선임하사가 터무니없는 숫자에 코웃음치며 말했다.
그러나 일루미난트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여러분의 지구에서는 인구가 얼마까지 감소했는지 모르지만, 여러분과 같은 지구연대를 갖고 있는 다른 우주의 지구는 포화된 인구 때문에 화성에 식민지를 건설했고, 어떤 지구에서는 아직도 인류가 토굴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또 어떤 인류는 아예 태양계를 벗어나 우주로 나갔지요.
아무튼 시간의 방랑자가 발견된 후, 각 우주의 과학자들은 다른 우주로 여행하는 일을 최대한 막고, 자신의 세계를 벗어나지 않은 선형 타임머신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외 과거에 만들어진 타임머신에 의해 발생한 [시공간의 거품]을 제거하고 또 다른 거품이 생겨나지 않도록 관리․감독할 필요성이 제기됐죠. 그래서 타임머신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던 각 우주의 인류는 협심해 시공간-항을 건설했습니다.”
“시공간-항?”
“기본적으로 타임머신은 여러분을 3차원 공간에서 4차원의 시공간으로 진입시킵니다. 그때 3차원과 4차원의 접면에 위치한 저희는 4차원에 진입한 시간 여행자들을 시공간-항으로 안전하게 유도합니다. 즉, 여러분이 만든 타임머신은 저희 시공간-항으로 오는 문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과거에는 배가 아무 해안이나 상륙하고, 프로펠러 비행기도 평지만 있다면 어디든 착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배는 항구를, 비행기는 공항만을 이용하게 됐죠. 타임머신도 마찬가집니다. 물론 배의 입출항과 비행기의 이착륙은 평범한 해안이나 도로에는 진입이 어려워진 배와 비행기의 대형화, 첨단화 같은 기술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정치적인 이유도 있지요. 시공간-항이 생긴 것처럼요. 바로 혼란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허가되지 않은 입출국을 막아 혼란과 범죄, 위험한 질병을 막자는 거죠.”
“자네 말은 마치 우리가 범법자나 병균이라도 된다는 투군.”
일루미난트의 말에 장관이 불쾌한 듯 투덜거렸다.
영철이 일루미난트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봐. 대충 무슨 얘긴지 알겠어. 하지만, 당신은 아직 우리 상황을 몰라서 그러나 본데, 지금 지구에서는 외계인이 쳐들어와서 우리 인류를 전멸시키려하고 있어. 그리고 우리가 유일한 희망이야. 그러니……”
“그건 여러분의 우주, 여러분의 지구에서만 생긴 일일뿐입니다. 다른 우주의 지구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아니, 있다고 해도 그건 그들이 풀어야할 문제죠. 한 지구의 일로 시공간에 혼란을 주어선 안됩니다. 여러분이 과거로 돌아가 역사에 개입하게 되면 최소한 [시간의 거품]이 생깁니다. 말씀드렸듯이 저희는 그 거품이 생기는 걸 막기 위해 시공간-항을 건설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역사 개입에 성공해서 새로운 역사, 우주가 생겨도 저희는 그걸 제거하는 게 임무입니다.”
“기껏 목숨걸고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 역사를 바꿔도 다시 돌려놓는다고? 이거 무척 도전적으로 들리는데.”
특공대원 한 명이 도전을 받아들인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일루미난트 쳐다보았다. 그러나 일루미난트는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우주는 거대한 시스템입니다. 또한 수많은, 무한의 우주를 구성하는 하나의 부품이죠. 한 지구의 일로 모든 우주의 시스템을 위험에 빠뜨릴 순 없습니다. 여러분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사소한 일로 큰 일을 망치면 곤란한 것처럼 우주……”
“이건 사소한 일이 아니야! 전 인류의 미래가 걸린 문제라고!”
선임하사가 발끈하며 소리치자 일루미난트는 담담하게 말했다.
“전 인류가 아니라 여러분 우주의, 더 작게는 여러분 지구의 일일뿐입니다. 자신들이 전 인류를 대표하는 유일한 존재라고 과대평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 지구의 인구보다 더 많은 우주, 지구가 있다는 걸 아셔야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인류를 구한다고 하지만, 지금 여러분의 행동은 다른 우주 인류의 안전을 위협하는 짓입니다.”
이번에는 영철이 발끈하며 말했다.
“당신 말이 사실이라도 그건 고작 시공간을 넘나드는 여행자들의 안전일 뿐이야! 여행은 잠시……”
“그 여행자들의 수가 지금 여러분이 구하려는 지구인들의 수보다 많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일루미난트가 영철을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
“빌어먹을! 이 딴 유령과 이야기할 시간이 없습니다.”
선임하사의 말에 영철은 고개를 끄덕이고 테이블로 다가가 그 위의 버튼과 알파벳이 새겨진 자판을 살폈다. 처음 보는 계기반이었지만 알파벳으로 쓰여있어 난감한 정도는 아니었다. 영철은 우선 버튼을 하나하나 눌러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들이 맞은편의 문을 지나 이곳으로 왔다면, 분명 저 문을 통과해 다시 자신들이 원하는 과거로 가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다행히 몇 차례 버튼을 누르고 화면의 커서를 옮기자 문 위 LED의 숫자가 화면에 나타났다. 영철은 재빨리 자신들이 가야할 시간을 입력했다.
일루미난트가 말했다.
“시간을 입력한다고 시공간의 문이 열리는 건 아닙니다. 가고자하는 우주의 코드번호와 시공간-항 관리위원회의 승인, 위원장님의 최종 서명이 없으면 이곳 시공간의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빌어먹을!”
영철이 테이블을 내리치고는 일루미난트의 홀로그래피를 향해 총구를 겨누며 소리쳤다.
“당장 문 열어!”
그러다 눈앞의 사내가 단지 3차원 영상이라는 걸 떠올리며 총구를 거두고 장관과 특공대원들을 돌아보았다.
한 대원이 선임하사에게 수신호로 구석에 문이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영철도 구석을 바라보니 정말 어두운 구석에 흐릿하게 문의 형태가 보였다. 선임하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특공대원 한 명이 낮은 자세로 빠르고, 조심스럽게 다가가 작은 측정기로 문을 확인하고 돌아왔다.
“틀도 그렇고, 뒤가 비어있는 게 분명 문 같습니다. 재질은 5cm 두께의 지르코늄 강입니다. 근데 밖에서 여는 건지 손잡이는 없습니다.”
“그 정도라면 폭탄으로 열 수 있을 겁니다.”
선임하사의 말에 장관이 주저하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행동할 순 없지 않나?”
장관의 말에 특공대가 망설이자 영철이 낮고 힘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도 없잖습니까? 저들이 누군지도 모르고, 우리는 임무가 있습니다. 여기서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일루미난트가 끼어 들었다.
“시간은 상관없습니다. 여기에 1시간을 있나 10년을 있나, 여러분이 돌아갈 시간은 이미 정해져 있고, 그 시간으로 돌아가게 될 겁니다. 단지 여러분이 이곳에 머무는 만큼 생물학적으로 늙어서 갈 뿐이죠.”
“젠장, 유령 씨는 좀 닥쳐!”
영철이 일루미난트에게 소리치고는 선임하사에게 물었다.
“이곳을 제압할 수 있겠소?”
“제압하라고요? 그건 여기가 어디고, 또 저들이 몇이나 되는지 모르니 장담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만 있을 순 없지 않나.”
장관의 말에 영철과 선임하사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이 있는 곳은 천장이 높은, 창고처럼 보이는 커다란 방이었다. 이미 그들은 갇혀있는 거나 다를 바 없었다.
선임하사가 말했다.
“굳이 제압할 필요는 없겠죠. 그저 2032년으로 갈 길만 뚫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영철과 장관, 특공대는 문에 폭탄을 설치하고 테이블 뒤로 몸을 숨겼다. 그동안 일루미난트의 홀로그래피는 계속 그들을 설득했다.
“여기는 시공간-항입니다. 이곳에 폭탄을 설치하는 건 위법입니다. 당연히 보안요원들이 있고, 그들은 당신들보다 더 강력하고 위험한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행동은 자신들을 더 위태롭게 할 뿐입니다. 당장 무장을 해제하고, 저의 지시에 따르십시오. 그럼 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우주에서 장관이고 특공대지만 어느 우주의 지구에서는 그저 평범한 직장인일 뿐입니다. 그리고 지금보다는 행복하죠. 여러분의 지금 행위는 또 다른 당신들의 생활을 위태롭게 할 뿐입니다.
여러분이 엉뚱한 지구에 외계인이 쳐들어온다고 정보를 제공하면 그들은 오히려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오지도 않을 외계인과 전쟁을 준비하는 겁니다.
폭력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여행을 온 많은 민간인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군인입니다. 민간인들의 안전을 위협하면 안됩니다.”
“정말 시끄럽게 떠드는군.”
“그저 기계가 하는 말일뿐입니다.”
장관의 말에 영철이 신경 쓰지 말라며 말했다.
“지금 말을 하는 건 3차원 영상이지만 지금 제가 하는 말은 모두……”
“이제 닥치게 해주지!”
선임하사가 폭탄에 연결된 격발 스위치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어 꽝하는 폭발음이 크게 울렸다.
일루미난트가 눈살을 찡그리며 문을 바라보았다. 폭발음과 먼지가 잦아들자 영철도 그의 시선을 따라 문을 바라보았다.
“젠장.”
문은 크게 일그러졌을 뿐 떨어져나가지는 않았다.
“빌어먹을.”
선임하사가 이를 악물더니 배낭에서 노란 테이프에 감긴 커다란 탄창을 꺼내 들었다.
일루미난트가 말했다.
“12mm 열화우라늄탄이군요. 이곳에선 방사능 물질의 사용이 엄격히 금지돼있습니다.”
“그래? 하지만, 우리 지구에선 필수품이지.”
선임하사가 일루미난트의 말을 비웃고는 탄창을 기관총수에게 건넸다. 기관총수가 탄창을 끼우고 방아쇠를 당기자 폭탄의 충격을 간신히 버티고 있던 문은 탄환의 충격까지는 이기지 못하고 문틀에서 떨어져나갔다.
선임하사의 수신호에 이어 두 대원이 복도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앞장서 나갔다. 영철은 장관을 등지고 입구를 향해 섰다가 안전하다는 신호를 확인하고 장관과 함께 복도로 나갔다.
양쪽으로 이어진 복도는 텅 비어있었다.
“어느 쪽으로 갈까요?”
선임하사 바짝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영철은 양 복도를 바라보며 숨을 가다듬고는 모퉁이가 가까운 오른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특공대가 2인 1조로 모퉁이를 돌아, 조용하고 빠르게 복도를 달려갔다. 그리고 다음 모퉁이에 도착해 복도를 살피더니 갑자기 욕지거리와 고함을 지르며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다 죽여버려!”
“이런 젠장! 무슨 일이야?”
선임하사가 관자놀이의 무전기를 누르며 소리쳤다.
- 외계인이에요! 놈들이 있어요!
“젠장, 외계인입니다. 함정이에요. 놈들이 우릴 속인 겁니다. 당장 돌아와! 다시 최초 위치로 돌아간다!”
선임하사는 군인답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어떻게?”
영철은 외계인들이 어떻게 타임머신을 통과한 자신들을 함정에 빠뜨릴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특공대에 끌려 다시 처음 도착했던 창고 안으로 뛰었다.
창고로 들어서자 영철이 다시 물었다.
“우린 분명 그 박사가 만든 타임머신을 통과했는데 어떻게 놈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선임하사가 탄창을 교환하며 말했다.
“그거야 알 수 없죠. 멍청한 박사가 타임머신인지, 공간이동인지 구별도 못하고 외계인의 기지와 연결된 어떤 문을 연 걸지도 모르죠. 빌어먹을. 저걸 다시 작동시킬 수 있을까요?”
영철은 다시 테이블로 다가가 버튼을 조작해보기 시작했다.
다시 영상으로 나타난 일루미난트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총격을 멈추세요. 그들은 외계인이 아닙니다. 과거 지구를 지배하던 공룡의 후손입니다. 적이 아닙니다.”
“닥쳐! 이 빌어먹을 자식아!”
선임하사가 일루미난트의 홀로그래피 영상에 총을 쏘며 소리쳤다.
“여러분은 지구의 공룡이 멸종한 과거만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지구도 있습니다! 저들은 다른 우주의 지구인입니다.”
일루미난트는 총성에 지지 않으려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나 영철은 듣지 않았다. 그는 계속 버튼을 조작하며 소리쳤다.
“젠장, 그럼 우릴 그냥 돌려보내죠!”
“지금 당장 처음 왔던 시간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아니! 11년 전으로 보내!”
“그건 곤란하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젠장, 인류가 전멸한다고! 너도 인간이면서 계속 안 된다고만 할 건가?”
영철이 일루미난트의 홀로그래피를 쏘아보며 소리쳤다.
그때 영철의 뒤로 또 다른 영상이 유령처럼 나타나며 물었다.
“일루미난트, 이제 어떻게 할 거지?”
기계적인 어색한 목소리였다.
영철이 돌아보니 일루미난트와 같은 망토를 두른 3차원 영상이 영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큰 키였다. 영철은 고개를 들어 다가온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낯선 얼굴도 아니었다. 비록 망토에 가려 길다란 목과 꼬리가 보이지 않았지만, 그리고 머리에 부서진 헬멧처럼 생긴 이상한 장비를 달고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지만, 그는 분명 영철과 장관이 타임머신을 타기 위해 비밀기지로 올 때, 그들을 기습했던, 그리고 마지막까지 자신을 노려보던 도마뱀 외계인과 닮아있었다.
“빌어먹을 자식! 너, 인간을 배신했구나!”
영철이 총을 뽑아들기 전에 선임하사가 소리치며 영상을 향해, 그리고 다시 벽을 향해 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일루미난트가 새로 나타난 영상을 향해 다급히 소리쳤다.
“타치타, 당장 너희 보안요원들을 철수시켜! 저들이 너희를 외계인 침략자로 오해하잖아! 그리고 어서 이 방에서 나가!”
그러나 타치타는 물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일루미난트, 넌 저들을 설득하지 못했어. 오히려 문제만 더 커졌지. 저들은 지금 시공간-항에서 사용이 금지된 방사능무기를 쓰기 시작했어. 그러니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순 없어. 여긴 너희 인간들만의 시공간-항이 아니야. 시간여행을 하는 모든 생명체들이 이용하는 곳이야. 당장 저들을 설득해서 무장을 해제시키지 않으면, 시공간-항의 안전을 위해서 우리가 저들을 제압할 수밖에 없어. 이건 다른 종족들도 다 동의한 결정이야.”
타치타의 말에 일루미난트가 말했다.
“하지만, 저들을 죽이면 시간의 거품이 생길 수도 있어!”
“아니. 여긴 저들의 우주와 연결된 시공간-항일뿐, 과거도 다른 우주도 아니야. 그리고 저들이 늙어 돌아가든, 죽어서 돌아가든 어떻게 돌아가든 그건 저들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일 뿐이야. 현재의 선택은 시간의 거품을 만들지 않아. 그러니 우린 저들이 과거로 가 저들의 과거를 바꾸지만 못하게 하면 돼. 그리고 저들이 죽어 돌아가도 저들의 지구에선 자신들이 만든 타임머신이 실패했다고만 생각하겠지. 그걸로 끝이야.”
타치타의 말에 일루미난트는 망설이며 말했다.
“그래도 저들을 죽이는 건 범죄야.”
“아니, 이건 정당한 방위행동일 뿐이야.”
“알았어. 알았으니까, 시간을 좀 줘. 우선 철수하라고. 그리고 너도 여기서 나가. 여러분은 제발 사격을 멈춰요!”
그러나 창고에 울리는 총성에 일루미난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제발 사격을 멈춰요. 안 그러면 모두 죽습니다!”
일루미난트가 다시 소리쳤다.
“이 배신자! 어차피 너도 도마뱀 녀석에게 잡혀 먹힐 거야!”
선임하사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그리고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이 모든 소리를 집어삼켰다. 총성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일루미난트, 이건 분명 너희 인간들의 일이야. 너희 인간들의 관할이지. 그러니 결정은 네가 내려야해.”
어둠 속으로 물러나 조용히 지켜보던 타치타가 말했다.
일루미난트는 말없이 특공대원들과 테이블 아래 숨어 두려움에 떠는 장관을 바라보았다.
일루미난트의 홀로그래피 영상은 서서히 흐려지고 있었다.
“감시카메라가 고장나기 전에 결정해야해. 그렇지 않으면 우리 쪽 피해도 커져.”
타치타가 재촉했다.
일루미난트는 말없이 고개를 떨궜다. 그걸로 대답은 됐다.
타치타가 알 수 없는 말을 속삭였다. 휘파람 같기도 했지만 아름답게 들리지는 않았다. 이어 그 소리에 화답하듯 복도에서도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영철은 불안한 눈빛으로 복도를 돌아보았다. 뭔가 번쩍이고 지나가더니 문 앞을 지키던 특공대원이 비명을 지르거나, 혹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어 선임하사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영철이 그를 돌아봤을 땐, 이미 선임하사의 손이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번쩍이던 물체는 선임하사의 손을 자르고 벽에 부딪혀 퉁겨져 나왔다.
영철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뭔가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그러나 총성은 들리지 않았다.
다시 어둠 속에서 걸어나온 타치타가 널브러진 시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인간들이란. 자신들이 신을 본떠 창조됐다고 믿으면서 다른 종족들은 철저하게 무시하지. 우리 조상들이 지구를 대표하는 생명체였을 땐, 그저 토굴 속에 살던 두더지 같은 존재였으면서. 저들은 아직 시간여행을 할 자격이 없었어. 최소한 저들 우주의 인간들은 말이야.”
일루미난트는 무표정한 얼굴로 바닥에 뒹구는 시체를 바라보기만 했다.
“시체는 어떻게 처리할 거지?”
타치타가 물었다.
일루미난트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돌려보내 줘야지. 여긴 시체안치소가 아니니까.”
타치타는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그리고 몇 걸음 옮기자 그의 홀로그래피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3.
국방장관을 끌어안은 영철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합창의장은 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비명을 지르는 환기구를 바라보다가 닫혀있는 해치를 보며 생각했다.
이제 잠시 후면 미래는, 아니 현재는 바뀌고 저 외계인들에게 그동안 당한 복수를 할 일만 남았다고, 아니면 10년 전부터 바뀐 그래서 이제는 평화로운 현재가, 장관일행이 바꿔놓은 새로운 현재가 있을 거라고.
그 기대에 응답하듯 갑자기 주위가 고요해졌다. 총성도, 비명도 들리지 않았다.
합참의장은 박사를 바라보았다. 박사도 합참의장을 바라보았다.
정말 한순간에 새로운 세상이 온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걸 확인하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했다.
합참의장은 천천히 해치를 풀었다.
어차피 과거가 바뀌지 않았다면 해치를 닫고 있다해도 곧 죽을 터였다. 지금 문을 여는 건 기껏해야 잠깐 죽음을 앞당기는 것뿐이다.
합참의장이 막 손잡이를 당기는 순간, 젖은 빨랫감을 바닥에 던지는 듯한 소리와 박사의 비명이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직 푸른빛이 가시지 않은 문틀 형태의 타임머신 뒤로 무언가가 나오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이어 흥건한 피가 기름 위의 불길처럼 번져왔다.
합참의장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미 깨달았지만 차마 말하지 못했다.
당황한 박사가 입을 틀어막고 멀찍이 돌아 문틀 뒤로 쓰러지는 시체들을 보며 더듬더듬 말했다.
“이, 이럴 리가 없는데, 개, 개와 고양이는 아무 이상 없이 통과했습니다. 아, 아무래도 전력이 부족했던 게 아닌가…, 아무래도 타임머신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전력이 더, 근데 해치가….”
박사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놀라고 당황한 시선으로 합참의장을 바라보았다.
합참의장은 그저 굳게 입을 다물고 자신의 발끝을 적시기 위해 밀려오는 피를 내려다보았다. 피는 발끝에 걸려 세 갈래로 갈라지며 흘렀다.
해치의 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이 천천히 밀렸다.
해치를 등지고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해병의 시체가 안으로 쓰러지며 퀭한 눈빛으로 합참의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끄러미 해병의 얼굴을 바라보던 합참의장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 도깨비불처럼 빛나는 노란 눈빛이 하나둘 늘어나더니 그를 향해 춤을 추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합참의장은 마지막 침을 삼켰다.
라퓨탄(writtenmo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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