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희원과 처음 알게 된 것은 대략 1년쯤 전이었다. 당시는 내가 싸이월드에 미니홈피를 개설해 한창 그림을 올리고 있을 때였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즐겨 그렸던 나는 페인터와 타블렛을 이용해서 그린 그림들을 싸이의 갤러리 게시판에 올려두는 취미가 있었다. 만화가나 일러스트레이터를 지망하던 꿈 많은 대학생 시절의 관성 탓이랄까.
그 중, 별 생각 없이 그린 그림 중에 맥도날드의 친숙한 캐릭터인 로날드(Ronald)를 그린 그림이 있었다. 빨간색 뽀글머리에 광대분장을 한 로날드가 피투성이의 어린아이와 어깨동무하고선 해맑게 웃고 있는 그림을 그로테스크한 필치로 그려낸 작품이었다. 그런데 마침 그 그림이 미니홈피 랜덤 파도타기를 하고 있던 희원의 눈에 든 것이 발단이었다. 그 역겨우면서도 유쾌한 분위기에 매료된 희원이 문제의 그림 '로날드와 정다운 친구'를 스크랩해가면서 장문의 리플과 함께 방명록을 남겼고, 그것이 우리 사이 첫 교류의 시작이었다.
처음엔 그림에 대한 얘기로 서로의 싸이를 오가며 방명록을 남겼지만, 점차 다양한 얘기를 나누게 되면서—21세기의 새로운 노예제 신자유주의라든가, 빅브라더 사회가 오고 있는데도 대중들은 관심도 없다든가, 결국 나도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든가 하는 시시콜콜한 얘기들—속칭 '코드가 맞는다'는 것을 느꼈고, 며칠 못가 일촌을 맺었다. 둘 다 서울에 살았기 때문에 직접 만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비록 그가 유부녀이긴 했지만 나이는 동갑내기. 허물없는 사이가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나는 희원에게, 새롭게 밝혀진 자각몽과 생수와의 관계, 그리고 물레방아 문양을 획득한 강자들의 존재 등 꿈속에서 새로이 접어든 국면에 대해 설명하기 위하여 연락을 시도했다. 그러나 마침 그녀가 남편과 함께 있을 시간이어서 전화 통화는 힘들었고, 그래서 난 그녀와 나를 최초로 연결해준 매개체이자 지금도 유용한 접촉수단으로 삼고 있는 싸이를 자연스럽게 찾았다.
그녀의 싸이 비밀방명록에 글을 남길 요량으로 싸이에 접속했을 때, 나는 의외로 그녀에게서 먼저 쪽지가 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쪽지를 클릭해 내용을 열어본 순간 나는 뭔가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
♡다정한 쪽지
보낸이 : 함희원 (2006-9-28 03:54)
---------------------------------
돌아다니다가 이런 곳을 발견했어. 네가 한 번 직접 들어가 보는 게 좋겠다.
게시판에 네가 궁금해 할만한 자료들이 널려있더라고. 행운을 빈다.
클럽 : [집자모] 연속성 집단 자각몽 현상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모임
---------------------------------
모니터 화면과, 그것을 바라보는 나 자신을 제외한 세상 모두가 정지한 것처럼 느껴졌다. 연속성 자각몽. 그것은 나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집단? 집단 자각몽은 무엇이란 말인가? 설마… 설마 그렇다면…?
나는 내면에서 전개된 추리와 그 답을 애써 외면하면서 바삐 키보드를 두들겼다. 싸이월드 클럽 검색을 이용했고, 찾아냈다. 의외로 비밀클럽이 아닌 일반공개 클럽이었다. 클릭. 가입. 클럽장은 백지현이라고 되어 있었다. 창립연월일을 살펴보니, 생긴지 불과 두 달 밖에 되지 않았다. 가입 인원은 약 300여명. 게시판부터 쭉 둘러보았다. 게시판 카테고리 분류는 대강 다음과 같았다. [가입인사], [자유게시판], [자각몽의 메커니즘], [자각몽과 유체이탈], [자각몽 체험담], [꿈과 향정신성의약품]…
주요 게시판의 자료들은 나로선 눈이 번쩍 뜨이는 것들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게시판, [연속성 집단 자각몽 체험 연구]에만은 들어갈 수가 없었다. 클럽에서 그 게시판만이 비공개였던 것이다. 나는 뭔가에 사로잡힌 듯 클럽을 이 잡듯 뒤졌고, 공지사항에서 그에 관련된 글을 찾아볼 수 있었다. 글의 요지는 단순명쾌했다. '비공개 게시판 이용을 바라는 회원은 클럽장에게 쪽지를 보내십시오.' 나는 게시자 백지현을 클릭해 쪽지를 보냈다. '비밀게시판을 이용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초조했다. 쪽지를 보낸 뒤 답장이 오려면 반나절쯤은 지나야겠거니 생각하며 컴퓨터를 켜둔 채 거실에 나가 진한 블랙커피를 타 돌아왔는데, 나의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가 있었다. 발신자는 백지현. 모니터 화면에는 어느새 새로운 쪽지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팝업이 튀어 올라와 있었던 것이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쪽지를 열었다. 거기엔 나의 뇌리를 찌르는 단 한 마디만이 적혀 있었다.
'비밀 번호는?'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느낌이었다. 이미 클럽명을 본 순간 직감이 내려놓은 판단을 애써 부정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점점 처음의 그 판단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 보여주려 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마치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키보드를 두들겨, 답신을 보냈다.
'243627.'
이어, 실시간으로 답신에 대한 답신이 도착했다.
'게시판 사용이 허가되었습니다.'
점점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억누르면서, 나는 게시판을 클릭해 들어갔다. 거기에는 단 한 개의 게시물만이 올라와 있었다. 그것은 연구회원들만을 위한 비공개 홈페이지 도메인의 링크였다. 난 그곳에 접속하여 또 한 차례의 보안 인증과 가입절차를 마쳤고, 정식 연구회원으로 로그인하여 그곳의 게시판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러자, 희미하게 남아있던 의심의 여지는 일거에 무너져 내렸다. 지금까지 내가 꾸었던 꿈은 나 혼자만의 꿈이 아니었다. 내 꿈이 아니었다. 나는 꿈을 다른 자들과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구회원 게시판에 글을 올린 자들의 닉네임들을 본 순간, 그것은 자명해졌다. 독수리, 새스콰치, 악어, 사자, 우르크하이, 기린, 현무, 플레시오사우르스, 아나콘다, 원숭이, 화이어뱃… 심지어 아칸까지. 그 중엔 곰도 있었고, 나의 닉네임은 내가 설정하지 않았음에도 이미 코끼리로 등록되어 있었다. 이건 누가 누구의 꿈속으로 들어가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비롯한 이들 모두가 하나의 꿈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했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할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런 것이 정말 가능할까? 그것을 이미 뼈저리게 겪었고, 또한 이렇게 그 증거를 눈앞에 똑똑히 보고 있으면서도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표면의식이 현실 인식을 거부하든 말든 나의 무의식은 이미 그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고 있었고, 나는 반 삼매상태 속에서 그곳 게시판의 모든 것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정리된 결과는 대충 이러했다.
이곳 모임은 제각각의 직업에 제각각의 연령대의 사람들, 쉽게 말해 남녀노소 각계각층 갑남을녀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 회원들의 공통점은 딱 두 가지였다. 서울에 거주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약 두 달 전, 4월 말쯤을 전후하여 그 '물'을 마셨다는 것.
그들이 그 물을 마시게 된 경위는 대개 나와 비슷했다. 버스에서, 공원 벤치에서, 혹은 나처럼 전철 의자에서. '우연히' 주운 것이다. 문을 잠가놨던 차 안에서 그 병을 발견한 사람도 있었고, 점심시간에 자리를 비운 사이 사무실 책상에 놓여있는 것을 발견한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친구가 주운 것을 빼앗아 마신 사람까지. 그 어떤 경우이든, 그 물을 배포한 주체가 누구인지를 역추적 할 수 있을만한 단서는 털끝만치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는 점만은 한결같았다.
이들은 초기에 뿌려진 그 생수병의 수효를 약 이백 개 가량으로 추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 십여 병은 주인을 만나지 못하고 버려진 것으로, 나머지 백팔십 여 병 이상은 훌륭히 제 역할을 해 낸 것으로 추정했다.
그렇다면 그 수효는 어떻게 해서 계산된 것일까? 여기선 4월 말 무렵 처음 물을 마신 사람들을 일컬어 '초기 멤버'라고 불렀는데, 현재까지 각성 상태에 이르러 이곳에 가입한 자는, 독수리 인간의 말대로 나를 포함해 딱 33명이었다. 이곳 게시판 중 [사냥당한 수습생] 게시판에는, 지금까지 '연속성 집단 자각몽'에 접속하는 데 성공했으나 진입 초기에 일종의 NPC(Non Player Character)라 할 수 있는 인간 무리에게 린치를 당해 사망하거나, 또는 타 수습생과의 충돌로 포식당한 수습생들의 명단이 지속적으로 업데이트 되어 있었다. 누군가 타인을 먹었을 땐 누구를 먹었는지가 반드시 기록되었으며, 만일 잡아먹힌 수습생이 타 수습생을 잡아먹은 경력이 있다면 그것까지도 먹은 자의 경력에 포함시켰다.
그런 식으로 정리되어 있는 게시물들을 종합한 결과, 총 백 팔십에 달하던 초기 수습생들 중 백사십 가량이 이중 삼중으로 먹혔음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었고, 아직 먹히지 않았으나 각성 임계점에 도달하지 못한 채 꿈속을 유랑중인 자들이 약 십여 명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숫자들을 제하고 나면 나를 포함한 이곳 회원들의 숫자가 나오는 것이다. 33.업데이트 된 게시물 중에는 내가 먹은 자들의 명단도 올라와 있었다. 늑대인간. 질럿. 벨로시 랩터, 돼지, 끈끈이주걱, 저글링. 그 중 끈끈이주걱이 먹은 코모도 도마뱀과 저글링이 먹어치운 허수아비—아마도 오즈의 마법사의?—까지 모두 더하면, 내가 먹은 수습생의 수는 모두 여덟이었다. 적어도 기백 마리는 될 인간과, 그리고 여덟 명의 수습생을 먹어치우고 나서야 나는, 쿤달리니 각성이라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비교적(比較的) 일반에게 낯선 용어인 쿤달리니는, 비교적(秘敎的) 용어였다. 나도 모르던 단어였으나 이곳 게시판을 통해서야 처음 알았는데, 그것은 티벳 밀교나 인도문화권 수행자들 사이에서 일컬어지는 것으로, 인간의 척추 끝—해부학에서는 미추, 선도에서는 미려골이라 부르며 밀교에서는 물라다라 차크라1)(Muladhara Chakra)라 부르는 곳—에 감겨 누워있는 근원적인 에너지를 뜻했다. 수행자들은 육체적 영적인 훈련을 통해 이것을 상승시켜 머리로 끌어올리는데, 이때의 상태를 바로 쿤달리니 각성이라 불렀다.
쿤달리니 각성을 이룬 상태에서는 갖가지 신비한 능력들이 깨어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를테면 내가 에너지의 상승과 함께 느꼈던 지복의 상태라든가, 독수리 인간과의 텔레파시나 투시 따위가 그 예일 것이다. 그러나 각성 상태에서 신비 능력이 생겨난다는 점은 같았으나, 현실 세계에서의 쿤달리니 각성과 꿈속의 쿤달리니 각성 사이에는 양립할 수 없는 중대한 차이점이 가로놓여 있었다. 그것은 바로, 꿈속에서는 각성 상태에 다다르기 위해 수행이 아닌 대량살상을 그 수단으로 삼는다는 점이었다.
결정적으로, 꿈속에서 죽는 자는, 죽었다. 단지 꿈에서 깨어나거나 그 꿈을 다시 꾸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죽는 것이다! 비록 꿈속에서처럼 온몸이 뜯겨 죽는 것이 아니라 돌연사 형태로—즉 지병이 악화되거나 신체 중 가장 취약한 부위가 기능을 정지하는, 혹은 그러한 여지가 없을 경우 급성 심장마비나 원인불상의 뇌사 등의 형태로— 죽음이 찾아오긴 하지만 목숨을 잃는다는 점에 있어서는 본질적으로 같았다.
불교에서는 생각만으로 죄를 지어도 그 죄가 카르마에 남는다고 가르쳤던가? 하지만 나는 생각만으로가 아니라, 실제로도 수차례의 살인을 저지른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단지 살인했을 뿐만 아니라 그 고기를 먹었다.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나는 내가 그리 했다는 것이 전혀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조금의 죄책감도 들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나' 라는 자아에 대한 인식이 중심을 잃고, 코끼리 인간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 무렵이었다. 희원이 제시했던 키워드, 꿈과 현실의 접점은 이제 너무나도 거대하게 드러났고, 이 모든 사실이 처음으로 꿈속에서 타인—곰 인간—을 만났을 때 이미 암시되고 있었음을 그제야 확연히 깨달을 수 있었다. 더 이상 자각몽이 새롭게 얻은 유희거리나 이면의 삶이라는 생각은 사라졌다.
이젠, 인생의 중심이 어느 쪽에 있는가는 자명해졌다.
6
나는 처음에는 이 모든 소식을 희원에게 알리기 위해 애가 달았었다. 그러나 급격히 상황이 변하면서 나는 꿈속에서, 그리고 현실에서 내 앞가림을 하기에 바빠졌고, 그에 따라 차츰 희원을 생각하는 시간도 줄어들어갔다. 게다가 어찌 된 일인지 그 쪽지 이후 희원도 소식이 뜸해져서 먼저 연락을 해 오는 일도 없었다. 그렇게 부지불식간에 희원과 소원해지는 한편 나는 본 궤도에 오른 꿈속 생활에 무섭게 탐닉하기 시작했다.
쿤달리니 각성과 함께 생겨난 능력 중 하나, '투쟁심의 통제'는 꿈속 활동의 질을 대폭 상승시켜주었다. 그것은 초창기 코끼리 인간 때나, 코끼리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우월감과 평정심을 내게 가져다줬다. 그러나, 그 대가를 받아내기라도 하듯이 나의 현실 생활은 더욱 망가져 가고 있었다.
깨어있는 시간보다 잠들어 있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혈색은 창백해지고 머리숱이 줄었으며, 근골과 체격도 점차 왜소해져갔다. 한편 피부에는 마치 저승꽃이 피기 시작하는 노인처럼 까만 반점들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가족들은 그런 나를 병원에 쳐 넣기 위해 안간힘이었다. 그러나 가족들 모두가 달라붙어도 나의 힘과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무당을 불러 성대한 굿판을 벌이긴 했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회사에선 내가 연이어 보름을 무단결근 하자, 서면으로 휴직을 권고하고 나의 인사기록 일체가 퇴직 심사에 부쳐졌음을 알려왔다.
독수리 인간을 현실세계에서 직접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 무렵이었다. '연속성 집단 자각몽 연구모임'의 최초 오프라인 모임이 신촌에서 열렸기 때문이었다. 꿈속의 아바타(Avatar)가 아닌 연약한 인간의 형상을 한 채로 서로를 만난다는 것이 꺼림칙하기는 했지만 누구도 불평하는 자는 없었다. 사안이 중대 사안인 만큼 그런 것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으니까. 바로 얼마 전, 모든 사건의 배후자들—즉, '물'을 배포한 자들이 보인 새로운 움직임을 감지해낸 것이다.
우리는 방해받지 않을 독립된 공간이 필요했고, 그에 꼭 맞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커뮤니티 카페를 빌려 첫 모임을 가졌다. 우리는 꿈속 서로의 신분을 확인할 수 없도록 익명성을 보장하기로 했으며, 유일한 예외는 독수리 인간에게만 두었다.
그가 바로 백지현이었다. 그는 백발이 성성한, 그러나 강단 있어 보이는 중늙은이였다. 그는 이 꿈속에서 가장 먼저 쿤달리니 각성에 도달한 자였고, 가장 많은 인간과 가장 많은 수습생을 죽인 살인왕이었다. 그는 아마도 우리 중 가장 강대한 자.
그는 빠른 속도로 각성 상태에 도달한 뒤, 꿈속과 현실세계의 경험과 지식을 총동원하여 그 자신이 경험한 것을 분석했고, 그 꿈이 자신 혼자만의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파해냈다. 그리하여 클럽을 개설한 뒤 비공개 게시판을 만들어 검증된 자들만을 받아들였고, 모임을 주도했다.
알고 봤더니, '연속성 집단 자각몽 연구 모임'이라는 이름의 온라인 커뮤니티는 싸이월드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음 카페, 네이버 카페는 물론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포탈 커뮤니티엔 어김없이 모임을 개설, 어디에 위치하고 있을지 모를 수습생들과 각성자들의 스펙트럼을 포용하도록 한 것이었다. 결국 어느 커뮤니티에 가입하든, 그가 발급한 비밀번호를 제대로 입력한 자들이 모이는 곳은 이곳 비공개 도메인 한군데였지만 말이다.
어떻게 모든 각성자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자각몽 커뮤니티를 찾아와 최종적으로 이곳까지 접촉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할 길은 없었다. 이전의 나였다면 아마도 그런 우연이란 존재할 수 없다며 강경한 입장을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초감각적 지각을 경험해 본 '각성자'가 된 지금은 그러한 우연이 결코 우연으로 보이지 않았고, 때문에 그러한 것이 조금도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물'을 배포한 자들은 자신들의 물을 마신 피험자(?)들이 이렇게까지 신속하고도 조직적으로 집단을 결성하리라곤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그 '물'을 마시게 된 수많은 사람들 중에, 단지 우연히 그—백지현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KIST의 뇌과학 분과 책임연구원 중 한 사람으로, 미국이 중심이 되어 연구중인 뇌 구조와 홀로그램 구조의 연관을 밝히는 첨단 뇌과학 분야의 전문가였다. 또한 그는 초심리학과 극심저 최면—울트라 뎁스(Ultra depth)—에도 일가견이 있는 최면가이기도 했다.
만일 '물'을 배포한 것이 불특정 일반대중을 향한 실험이었다면, 그들 입장에서는 백지현이 그들의 타겟 안에 들어와 버린 것은 의도하지 않은 골칫거리가 될 터였다. 아니, 어쩌면 이런 형국을 노리고 일부러 백지현을 계획에 넣은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나중에 알고 보니 백지현이 '물'의 개발에 연루되어 있는 음모자 일파였다는 식의 상투적인 반전이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한층 강화된 내 직감은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고, 난 나의 직감을 믿었다.
그 자리에 모인 33인은, 실로 다양한 출신성분들을 갖고 있었다. 비록 각자의 신상을 밝힌 것은 아니었으나 겉모습에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와 외모, 그리고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느낌 등을 종합해 볼 때 대강의 정보는 추리해 낼 수 있었다. 화이트 칼라와 블루 칼라는 대략 반반이 섞여있는 듯 했고, 남녀의 비율은 6:4 정도로 남자가 우세했다. 연령 대는 매우 다양했는데, 가장 놀라운 것은 그 중 초등학생까지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녀석은 제법 귀염성 있게 생겼을 사내아이였으나, 쿤달리니 각성의 탓인지 지나치게 표정과 행동거지에서 부자연스런 조숙함이 풍겼다. 겉보기엔 초등학생이지만, 저 놈도 살인마인 것이다. 뽀글이 파마를 한 주부도 몇 보였고, 독서실에 가 있어야 할 것 같은 중고생들, 대학생 쯤 되어 보이는 남녀들, 중년의 남녀도 몇몇 보였다. 그 중엔 음침하게 생긴 한 여고생도 있었는데, 유독 그 여고생의 정체만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 놈이었다. 그녀가 바로 꿈속의 곰 인간이었다.
으득. 각성 이후 얻은 분노 통제력이 작용했다. 이곳이 꿈이 아닌 현실계라는 점도 분노를 억제하는 데 일조했다. 그리하여 나는, 나 스스로가 그 여고생의 골통을 빠개고 혀를 잡아 뽑으려 시도하는 것을 가까스로 막을 수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곰 인간은 알 듯 모를 듯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 웃음에서 비린내가 풍겨왔다. 다시 한 번 가까스로, 참을 수 있었다. 대체 나는 왜 이토록 저 녀석에 대한 분노에 사무쳐 있는 것일까? 놈과 나는 의식적으로 서로에게 포커스를 맞추는 것을 회피했다. 곧 회의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이윽고 독수리 인간의 주재 하에 회의가 진행되었다. 진행은, 그가 발제하고 회원들이 돌아가며 질문하고 답변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자칫 중구난방이 되기 쉬운 진행방법이었지만 이곳 회원들에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 무렵엔 서서히 꿈속에서의 고도 동시지각능력이 미미하게나마 현실로까지 투사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 회원들은 자신이 말을 해야 할 때와 하지 말아야 할 때를 직감적으로 알았고, 일단 나온 말은 거의 본능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이곳 회의석상에서는, 현실세계에서의 나이와 신분을 떠나 상호간의 무조건적인 평대가 전제되었다. 초등학생과 노인도 아무런 위화감 없이 반말로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는 대등한 각성자들이었으니까.
“그러니까 그게 정확히 얼마 전이라는 거지?”
“약 보름 전.”
“그럼 그 무렵부터 수습생 개체 수가 눈에 띄게 증가하기 시작한 현상이 설명되는군.”
“놈들이 노리는 게 뭐지? 이 꿈속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접속시키려는 거야?”
“이번 규모는 크다. 산출된 내용에 따르면 이번에는 순차적으로 약 천여 명, 혹은 그 이상이 접속해 올 것이다. 보름 전부터 시작해서 현재까지 약 삼백여 명이 접속에 적응했고, 접속에 적응해가는 자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배포 방법은? 우리 때와 같은 방법?”
“아니. 몇몇 일선 관공서에 비치된 냉온수기에서 물을 마신 직원 및 일반 민원인들이 꿈을 꾸기 시작했다. 슬슬 적응하는 자들이 생기기 시작했어.”
“그밖에는?”
“일부 중고등학교에 비치된 생수를 마신 학생들이 꿈에 접속했다는 증거가 있지. 주로 강남권이다.”
“조사된 지역들에 대한 생수 유통을 전담하는 업체들이 있는데, 총 다섯 개 업체들 모두가 수상한 행적을 보이고 있다. 다섯 개 사 모두 한 달 전쯤 대주주가 교체됐고, 회사 대표가 실종됐다.”
“배후에 있는 놈들의 정체가 뭘까? 생수 업자들? 천만에. 그들은 장기판의 졸에 불과하지.”
“이 기술은 특별해. 게다가 오컬트적이기까지 해.”
“일반상식으로 추론하긴 어려운 자들일 듯 하군.”
“원하는 게 뭘까?”
“접속 중독자를 늘린 뒤 상업적 판매를 개시하려는 속셈일까?”
“어떤 경로를 통해 판매한다는 거지?”
“이 시스템에 상업적 가치가 있을까?”
“물론이지. 천문학적인.”
“그 문제는 보류해 두기로 하지.”
“놈들이 우리의 결성과 활동을 염두에 두고 있을지 궁금하군.”
“놈들이 우리의 존재를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어. 꿈속 세계를 프로그래밍한 놈들이니 그 속의 전개상황까지 모니터링하고 있다 해도 이상할 건 없지.”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에 변수가 되지는 않아. 지금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지.”
“사냥이다.”
“새로 유입되는 자들에게 입지를 빼앗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어떤 경우를 상정해 봐도, 한 번 확보된 비교우위를 놓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
“그렇다면 우리가 제일 중점을 둬야 하는 일은 뭘까?”
“사냥이지.”
“그 다음엔?”
“사냥이지.”
간단했다. 결론은 도출되었고, 착실히 시행되기 시작했다. 사냥이었다. 무차별적인 사냥. 토끼몰이. 대량학살. 갓 꿈에 접속하기 시작한 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하나 둘, 속절없이 죽어갔다. 그 당시 내가 죽이는 수습생은 하루에만도 수십에 달했다. 그것들의 머리통을 연달아, 생으로 오드득 오드득 씹어 먹은 뒤 몸통을 쥐어짜 생혈을 마시면, 마치 전신에서 오르가즘이 느껴지는 듯한 황홀한 고양감을 느낄 수 있었다.
혹시나 해서 다시 말하지만, 이 당시의 살생은 초창기와 같이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격정 속에서 이뤄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초창기의 살생이 우발적이고 감정적인 것이었다면, 이 당시의 살생은 의도적이고 유희적이었다고 할까.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전자의 나는 미치광이 살인자에 가까웠고, 후자의 나는 '보편적'이고 '훌륭한' 정치가에 가까운 셈이었다.
최초 접속자 백팔십여 명 중 각성자를 제외한 백오십여 명이 수면 중 돌연사 혹은 자연사로 사망함으로써 이 꿈속의 죽음의 시작을 알렸고, 우리들의 본격적인 사냥이 시작되면서부터는 멀쩡하게 잠들었다가 아침이면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는 자들이 조금씩 늘어 최초 사망자의 수효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구 천만의 대도시 서울에서 그 숫자는 보잘것없는 것이었으며, 사망자의 분포가 워낙 광범위했기 때문에 그들 간의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도출해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할 수 있었다. 설령 사망자 간의 공통분모, 즉 기이한 형태의 자각몽을 밝혀낸다고 할지라도 그 누가 상상할 수 있겠는가? 꿈속 죽음과 현실의 죽음 간의 그 부조리한, 그러나 완벽한 일치를.
7
점점 각성 상태에 익숙해지면서 나는 초감각적 지각을 적절히 제어하는 법을 익혀가고 있었다. 처음에 독수리 인간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타인과 접촉하고 싶을 때는 접촉할 수 있었으며, 끊고 싶을 때도 역시,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외부로부터의 접촉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테크닉도 익힐 수 있었는데, 나보다 상위 단계의 진화 상태에 있는 상대, 혹은 대등한 상대에게는 효력이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러한 시스템은 제각각의 우리 각성자들이 독수리 인간이라는 대표자를 통해 일원적인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필요 이상으로 서로를 침해하지 않는 것을 가능케 해주었다.
각성자들의 네트워크, 가칭 '33인 위원회'에 속하게 되면서 알게 된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이 더 있었다. 그것은 우리들이 결코 서울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꿈속에서만큼은. 우리는, 그리고 우리를 제외한 꿈속의 모든 존재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 유리벽에 가로막힌 동물원 속 원숭이들처럼, 서울에서 경기도로의 그 장벽을 넘어갈 수가 없었다. 접경지역에서 그 너머를 볼 수는 있었다. 하지만, 결코 통과할 수는 없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유리벽 같다고 할까? 그 경계선을 아무리 강한 힘으로 내리쳐도, 내리친 그 힘은 고스란히 돌아올 뿐 어떤 물리적 변화도 초래할 수 없었다. 아니, 그건 유리벽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극도로 강력한 자기장이라 하는 편이 더 적절한 설명이 될지도 모르겠다. 같은 극성의 자석들이 필사적으로 서로를 밀어내고, 결코 서로 닿으려 하지 않듯이, 장벽과 우리는 결코 맞닿을 수 없었으니까.
“제발 좀 움직여 봐. 응? 어디 동네라도 한 바퀴 돌고 들어오든가 해라. 제발 좀. 누워있지만 말고!”
“이 게을러터진 노므 새끼야! 그렇게 집구석에서 잠만 쳐 자고 있으니까 몸이 그 모양으로 야위지! 아프면 병원엘 같이 가든가! 그것도 싫다고. 달래도 안 되고, 굿을 해도 안 되고. 대체 어떡하면 되냐? 아이구 속 터져, 어이구 속 터져!”
부모님의 푸념과 잔소리가 연일 이어졌다. 그러나 그들의 평가와는 달리 나는 게으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내내 부지런히, 바삐 움직였다. 꿈속에선 사냥해야 할 수습생들이 쉼 없이 들어오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부모님을 그런 식으로 납득시키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충 둘러대는 수밖에.
“…전 괜찮다니까 그러세요. 그냥 좀 그동안 잠이 부족해서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네? 푹 자게 그냥 놔두세요 좀. 저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다니까요.”
새로이 꿈속으로 접속해 들어오는 자들은 처음의 나와 같이 이것을 단순한 꿈으로 생각했으며, 미숙했다. 하루에 십여 명의 수습생을 포식하게 되면서 나는 더 이상 인간을 먹지 않게 됐다. 썩은내 나는 고기와 질 낮은 피를 먹고 마셔야 할 이유가 더 이상 없었던 것이다.
내가 먹는 수습생들의 모습은 실로 다양했다. 각종 포유류와 파충류, 곤충류, 식물류뿐만 아니라 갖가지 신화에 등장하는 신과 짐승, 악마, 알려진 혹은 알려지지 않은 종류의 외계인, 각종 게임이나 만화의 캐릭터 등 그 종류엔 제한이 없는 듯 했다. 추측하건대 꿈으로 접속하면서 쓰게 되는 육체의 형상은, 그 개인의 깊은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형상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무작위로, 혹은 알 수 없는 어떤 기준에 의해서 잠재되어 있던 형상이 꿈—현실 속으로 현현하게 되는 것이다.
한창 수습생들을 먹으며 성장하던 이때, 나의 신장은 약 7미터에 육박했다. 팔다리는 강건한 대리석 기둥과 같았고, 우둘투둘하던 피부는 눈부신 순백색으로 탈피했다. 멋들어지게 휘어져 하늘을 찌른 황금빛 상아는 길이가 2미터에 달했다. 한때는 가슴에 간신히 닿았던 나의 코는, 길고 굵어져 원하기만 하면 채찍처럼 휘둘러 강철이라도 우그러뜨릴 수가 있었다. 이마의 물레방아 문양은 더욱 돋아나온 채 은백색 금속성을 띄었고, 시계방향으로 서서히 회전을 지속하고 있었다. 전신에는 정교하게 세공된 찬란한 금빛 갑주를 걸쳤고, 왼손엔 직경 3미터의 거대한 은륜(銀輪)을, 오른손엔 나의 키만한 대력금강저(大力金剛杵)를 움켜쥔 채 만물을 오시했다. 진화를 거듭하면서, 나는 점차로 신격(神格)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기는 했지만 각성자들은 대개 비슷한 수준으로 진화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나는 최상위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평균 이상의 성취를 이룩하고 있는 편이었다. 나는 금강저와 은륜을 종횡무진 휘두르면서, 회의를 통해 결정된 내 관할구역인 서대문구에서 새로이 발생하는 수습생들을 닥치는 대로 사냥해 나갔다.
내 뱃속으로 들어간 수습생들의 숫자가 기백에 가까워질 즈음이었을 것이다. 희원과 연락이 완전히 끊어진 것은 그 무렵이었다. 그녀가 먼저 연락을 해오지 않았음은 물론이었고, 문득 생각이 나 내가 먼저 연락을 시도하길 한두 차례 했었으나 닿지 않았다. 그녀와는 더 이상 핸드폰으로도, 회사 전화로도, 인터넷으로도, 심지어 집 전화로도 접촉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인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예전 같았으면 직장으로라도 찾아가 보려 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 볼품없는 현실의 육체를 가지고 밖을 나다니는 것이 그리 유쾌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하찮고 덧없이 느껴졌다. 그것은 비단 느낌 때문만은 아니었다. 실제로도 현실 세계는 생기를 잃고 어딘가 모르게 빛이 바래가고 있었다. 문득 문득 지나칠 때면 사물들이 흑백으로, 때론 회갈색으로 보이곤 했다. 꿈속의 세계가 총천연색으로 강렬한 자극을 선사하는 것과는 아주 대조적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본격적인 사냥이 시작된 후로 한달이 조금 지났을 때, 33인 위원회의 멤버들이 살상한 수습생의 총 수효는 일천백여 명에 달했다. 애초의 예상치를 조금 웃도는 수치였다. 그 정도면 수습생들은 거의 박멸 상태에 놓여져 있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새로이 진입하는 수습생들의 수는 결코 줄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높은 비율로 증가하고 있었다. 우리는 꿈속에서 서로의 네트워크를 개방했다. 회의였다.
'놈들이 계속 증가하는 이유가 뭐지?'
'메이저 급 생수회사 하나가 넘어갔다. 놈들이 다시 손을 썼어.'
'그럼 얼마나 더 유입된다는 거야?'
'놈들의 목적이 뭐지? 돈을 벌기 위한 게 아니었단 말인가?'
'이걸 상품화 하려는 게 아닌 건 분명해지는 것 같은데.'
'예상이 옳다면 놈들은 그치지 않을 셈이다. 계속해서 늘려나갈 셈이야.'
'얼마나?'
'필요한 만큼. 어쩌면 서울시 전체로.'
'지나친 추측 아닐까?'
'정보를 종합해 봤을 때, 그렇게 가정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그렇다면 더 이상 지금까지와 같은 방식의 사냥만으론 힘들 것 같은데.'
'위계를 이용해야 한다.'
'각성자를 양성하자. 그들을 죽이는 대신 굴복시켜 휘하에 거느리자.'
'세력을 형성하면 효율적인 관리가 가능하지.'
'체계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다.'
'이제부터 우리는 군림하고, 다스린다. 목표 달성을 위해, 다들 현실세계로 돌아가는 시간을 좀 더 줄이도록 하자.'
이후 유입되는 수습생의 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무차별적인 사냥 대신 위계 형성을 위한 계획적인 살상을 꾀했다. 각성자들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굴복시켰다. 마치 중학생 일진회를 다스리는 고등학생 일진회처럼. 그리고 조직이 커지면, 고등학생 일진회를 다스리는 조폭으로, 마피아로, 대기업으로, 정치세력으로, 그렇게 점차 단계를 밟아 나갈 것이었다. 군림하고, 다스리기 위해.
8
예상했겠지만, 당시 현실세계에서는 유래 없는 난리가 연출되고 있었다. 원인을 찾을 수 없는 수면중 돌연사 사건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의 천여 명까지는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돌연사라곤 하지만 지병이 악화되는 등 자연사에 가까운 양상을 보였기 때문에 문제가 될만한 여지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불과 한 달여 사이에 무려 사천 여 명이라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잠을 자던 중 목숨을 잃어, 아침에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 사망자 수는 날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었다.
사망자 간의 어떠한 유의미한 상관관계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역학조사에서도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들 간의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잠을 자던 도중 갑작스레 사망했다는 점, 그리고 그들 모두가 서울에 거주하는 서울시민이라는 것. 단지 그것뿐이었다. 실제로, 서울을 제외한 전국 어디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발생하지 않았다.
대중들이 느끼는 불안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조류독감이나 광우병, 에이즈 따위는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는가 하는 지침이 존재하기에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치명적 위협에 비해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칼에는 눈이 없다는 말이 있던가. 그와 마찬가지로 이 수면중 돌연사 역시 어느 누구를 찾아갈지 알 수 없는 죽음의 칼날과도 같았다. 잠이란 피하고자 해서 피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고, 그런 이상 누구나 그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미디어는 연일 이에 관련된 뉴스를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처음의 몇 건이 알려졌을 당시엔 연쇄 밀실살인 쯤으로 다뤄졌으나, 그 희생자 수가 늘어나고 그 무작위성이 명확해지자 다양한 원인 분석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단순 심장마비로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가려는 시도부터, 규명되지 않은 신종 바이러스일 가능성, 악성 수맥파에 의한 쇼크사라는 해석, 심지어 최근 있었던 비정상적인 태양 흑점의 증가에 탓을 돌리는 분석까지. 그 중 그나마 개연성을 인정받는 것은 심장마비 설이었으나 설명이 불충분하여 온갖 설들이 나도는 것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접근들이 진상을 밝혀낼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희원과 다시 연락이 닿은 것은 그 즈음이었다. 그녀가 먼저 전화를 걸어왔고, 만나기를 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음울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당시 나는 밖을 나돌아 다니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고 있었으나, 희원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 번거로움은 감수할 수 있었다. 희원과 만난 것은 신림동의 한 카페였다. 소파는 쿠션이 풍성해 안락했고, 왼편으론 통유리가 달려있어 관악산 자락이 보이는 자리였다. 그는 커피를 시켰고, 나는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다.
“그 동안 잘 지냈어?”
그렇게 말하는 희원의 얼굴은 몹시 야위어 보였다. 피부는 푸석해 보였고, 눈가엔 짙은 슬픔이 배어있었다. 나는 짐짓 걱정스러운 투로 말을 건넸다.
“…얼굴이 많이 안 좋아 보인다. 너야말로 어떻게 지낸 거야?”
“연락 못해서 미안해… 그간 좀 바빴어.”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래?”
“우리… 우리… 동훈씨가…”
희원은 남편의 이름을 꺼내면서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메마른 표정으로 눈물을 흘렸다.
“우리 동훈씨가, 죽었어… 자다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차가워져 있었어. 내가 어떡하면 좋을까? 어떡해야 되니? 모르겠어… 내가 이제 어떡하면 좋은 걸까?”
이어 희원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띄엄띄엄, 그동안의 사정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희원의 남편은 수면중 돌연사가 이슈화되기 직전, 약 한달 전에 잠을 자던 중 죽었다고 했다. 그래서 장례를 치르고, 재산을 처분하고, 한동안 모든 연락을 끊은 채 죽은 듯이 살았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황폐화 된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었고, 일상생활 쪽으로 정신이 돌아오면서 내게 연락을 한 것이다.
그녀에겐 기댈 사람이 필요했으리라. 남편이 죽어버린 지금, 그녀가 찾을 사람이 나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는 그러한 관계였으니까. 그녀의 눈물은 절박했으되 천박하지는 않았다.
“무서워… 무서워 지훈아… 동훈씨도 꿈을 꿨대. 너처럼 말이야. 죽기 얼마 전에 그 얘길 했었어. 혹시 그 꿈하고 뭔가 관계가 있는 건 아닐까? 응? 너 요새도 그 꿈 꾸니? 뭐라도 알고 있는 거 없어?”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희원의 남편이 죽었을 무렵을 계산해 보면, 그 시기는 처음 우리가 무차별 사냥을 시작하던 때와 들어맞았다. 희원의 남편은 꿈속에서 죽었을 것이다. 우리들 중 누군가의 손에. …어쩌면 나의 손에.
“…아니. 이제는 안 꿔. 너한테 얘기했던 게 마지막이었어. 더 이상은 꾸지 않아.”
희원은 빤히 나를 바라보았다. 눈물에 젖은 그의 눈길이 마치 나의 심장을 꿰뚫는 듯 느껴졌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려 눈길을 창밖으로 던졌다. 복잡한 시가지 건물들, 바쁘게 왕래하는 사람들이 보였으며, 그 너머 푸르른 관악산이 보였다. 그리고 그 관악산 봉우리 위에는…
나는 숨을 들이쉰 채 그대로 멈추었다. 나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관악산 봉우리 위에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물레방아가, 거대한 물레방아가 생겨난 채 천천히 돌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테이블이 뒤집히며 커피 잔이 바닥에 떨어져 깨졌고 재떨이가 나뒹굴었다. 희원이 소스라치게 놀라 손으로 입을 막으며 날 바라보았지만 나는 결코 시선을 창밖에서 뗄 수 없었다. 나는 눈이 찢어져라 부릅뜨고 그것을 무섭게 응시했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것은 내 이마에 새겨진 물레방아와 완벽히 같은 모양이었다!
“지, 지훈아?”
희원이 당황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문득 이마에서 뭔가가 회전하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아주 익숙한 느낌. 나는 전율하며 시선을 창 밖에서 유리창의 표면으로 천천히 옮겼다. 유리창에 희미하게 비친 내 모습은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흰 피부와 금빛 상아, 기다란 코… 그리고 그 가운데 이마의 반을 차지한 채 천천히 회전하고 있는 물레방아!
“지훈아, 가… 갑자기 왜 그래, 응? 너 괜찮니?”
나는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나는 두 손을 들어올려 내 얼굴을 만졌다.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틀림없는 코끼리의 얼굴이었다.
“너 괜찮은 거야? …도대체 왜 그래, 응?”
커피숍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에서도, 희원의 눈길에서도, 나의 모습에서 이상함을 느끼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형상은 나에게만 보이는 것인가? 나는 선 채로,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하고 희원에게 말했다.
“…희원아, 저 산 위에 뭐가 보여?”
“…뭐라고?”
“저 산꼭대기에 뭐가 보이냐고.”
“대체 무슨 소리야. 너 갑자기 왜 이래?”
“뭐가 보이는지만 말해!”
“왜 이래? 산 위에 도대체 뭐가 있다는 거야!”
“흐흐… 흐흐흐흐!”
그래. 다른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는 거였다. 그런 거였다. 나는 희원을 홀로 놓아둔 채 미친 사람처럼 웃으며 커피숍에서 나왔고, 그 이후로 희원에게서 연락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9
훗날 꿈속에 들어가 알아 본 결과, 그날 내가 물레방아의 등장을 확인한 것과 같은 시각, 꿈속 세계의 관악산에서도 거대한 물레방아가 출현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차라리 하나의 계시였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우리의 생명력의 근원이 바로 저 물레방아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경배의 대상이었고, 숭배의 대상이었고, 욕망의 대상이었다. 물레방아가 등장하면서부터 우리의 능력은 진일보하기 시작했다. 그간 수습생을 먹으며 쌓아온 잠재력이, 물레방아의 등장과 함께 비로소 촉발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33인 위원회 멤버의 대부분은 이때를 전후하여 2차 쿤달리니 각성을 경험했다. 그것은 첫 각성 때보다 무려 열 배 이상의 환희와 쾌감, 그리고 에너지의 상승을 가져다주었다. 이로써 33인 위원회는 일반 각성자들과는 완전히 차별화된 힘의 우위를 재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의 전반적인 능력은 대체적으로 진보했다. 그러나 한 가지 이상한 점이라면, 최초의 각성에서 획득했던 '투쟁심에 대한 통제력'을 부분적으로 상실했다는 점이었다. 강대해졌으나, 보다 무자비해졌고, 보다 참을성을 잃었다. 단지 그 정도. 그다지 문제가 될 것은 없는 사항이었다.
그쯤부터, 현실세계에선 수면중 돌연사와 자각몽 간의 인과관계가 심각하게 거론되기 시작했다. 당시의 사망자는 총 이만여 명에 달했으며, 총 접속자 수는 추정하건대 무려 십만에 달했다. 관여된 인원이 그쯤 되고 보니 같은 경험을 공유한 자들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고, 차차 꿈속의 죽음과 현실의 죽음 간에 유력한 관계가 있다는 거짓말 같은 주장들이 속속 설득력을 갖고 제기되기 시작했다.
사회 각계에서 맹렬한 논란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서울의 돌연사 사건은 이미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기이한 대사건이었기에 이 사건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려는 시도는 한국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시도들 간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들이 모두 실패했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11월, 가을이 저물어가던 당시 33인 위원회는 각 멤버들이 휘하에 각각 백 명의 중급 각성자를 거느리고, 중급 각성자들은 각자가 열 명의 각성자를 거느리는 체제를 구축한 상태였다. 총 구성인원 무려 삼만삼천. 명령에 대한 절대복종이 아니면 꿈과 현실 두 세계 모두에서의 생명을 박탈하는 엄중한 군대식 지휘체계. 33인 위원회는 이들로 하여금 관악산 물레방아를 중심에 놓고 공사에 착수하도록 했다. 본거지가 될 수 있는 거대한 성을 쌓았으며, 그 가운데에는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궁을 건축했다. 그리고 그 궁의 배경으론 거대한 물레방아가 자리하는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휘하의 각성자들에겐 철저한 입단속을 하도록 하여 현실세계에서 꿈속에 관한 정보를 일절 흘리지 못하도록 일종의 보도통제를 실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도 부질없이, 총 접속자 수가 삼십만을 넘어서면서부터는 33인 위원회의 통제 하에 있지 않은 각성자들이 속속 늘어나게 되었고, 그들이 현실세계에서 꿈속에 대해 떠들어 대는 것은 어떻게 막을 방도가 없었다.
아버지와 여동생이 죽은 것은 그 무렵, 11월 말의 일이었다. 미처 내가 손을 쓸 새도 없었다. 각성자가 아닌 일반 수습생인 이상 꿈속에선 이성이 마비된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 상태에선 누가 현실세계의 누구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불완전하나마 슬픔을 느낄 수는 있었으니까.
그러나 얼마 후 나의 어머니가 각성 상태에 오르자마자 죽고 말았을 때는, 더 이상 어떠한 슬픔도 분노도 느낄 수 없었다. 그것은 제3의 쿤달리니 각성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의 일이었다. 당시엔 이미, 현실과 꿈의 상태를 순식간에 전환할 수 있었다. 앞서 묘사했던 것과 같이, 마치 텔레비전의 채널을 바꾸듯이 말이다. 하지만 오락프로에 푹 빠진 시청자가 좀처럼 교육방송을 틀지 않듯이, 나의 의식도 현실계보다는 대부분 꿈속에 맞춰지고 있었다.
나는 커피숍에서의 그날 이후 현실에서조차 나의 신체를 코끼리 인간으로 밖에 인식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관악산 물레방아를 중심으로 하여 지형지물조차도 꿈속의 것과 현실의 것을 겹쳐 보아야 했다. 때문에 나의 의식을 현실로 투사한다고 해도 그것엔 큰 의미가 없었다. 나의 현실은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제3의 쿤달리니 각성을 맞은 것은 겨울의 초입. 12월의, 11일이었다. 그것은 유래 없이 거대했다. 꼬리뼈 부근에서 세 번째로 솟구쳐 오른 빛의 유동체는 그 열기로 척추를 하나하나 녹여 없앴으며, 머리로 상승한 뒤에는 머릿속의 모든 것을 태워버린 뒤 두개골을 꿰뚫고 밖으로 터져나갔다. 형용할 수 없는 우주적 오르가즘이 전신에서 밀려왔다. 그 감각이 차츰 잦아들었을 때, 나의 신체는 보다 강대하게, 보다 정묘하게, 보다 아름답게 변모해 있었다. 두개골을 꿰뚫고 나간 빛은 머리 주위를 감싼 채 은은한 금빛 후광을 형성했고, 그것은 나 자신의 신격을 드러내 보이는 하나의 지표였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 모든 변화와 더불어, 처음 이 꿈에 들어왔을 때 느꼈던 감각. 본능적이고 이유 없는, 강렬한 투쟁심이 온전히 되살아났다. 이것은 우리들 33인 위원회에 있어서는 크나큰 비극이라 아니 할 수 없는 변화였다. 이제 막 완공을 앞둔 성채와 궁궐로의 입주를 앞둔 우리들은, 이 변화로 말미암아 지금까지의 절제된 조화를 상실했다. 그리곤 분별없는 투쟁에의 길로 접어들어 버린 것이다.
가장 먼저 죽은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가장 강대하던 독수리 인간이었다. 그는 가장 먼저 3차 쿤달리니 각성에 도달했고, 무방비상태의 기린과 플레시오사우르스를 기습하여 살해한 뒤 새스콰치와 식인인어, 골룸의 협공에 의해 사망했다.
내가 3차 각성에 달한 이후 가장 가까이 있던 자는 원숭이였다. 그 역시 나처럼 갓 3차 각성에 도달한 상태였으며, 그 형상은 영락없는 손오공이었다. 몸통엔 전설의 쇄자황금갑(鎖子黃金鉀)을 걸쳤으며 이마엔 금강고를, 오른손엔 여의금전봉(如意金箭棒)을 움켜쥐었다. 이 모습이 원숭이 인간의 신격의 발현인 모양이었다.
반면 나는 어깨 위에서 한 쌍의 팔이 더 생겨났다. 다리 사이에선 거대한 남근-링가가 치솟았고 머리 위엔 화려한 금관을 썼다. 허리엔 굵은 뱀 한 마리가 머리로 스스로의 꼬리를 삼키며 둘레를 감았다. 원숭이-손오공과 마주쳐 적의를 떠올리자, 즉각 네 개의 손에 제각각 신병이기(神兵異器)들이 쥐어졌다. 첫 번째 왼손엔 연꽃 대신 금환도(金還刀)를, 두 번째 왼손엔 자비의 원반 대신 날카로운 톱날 박힌 은륜(銀輪)을, 첫 번째 오른손엔 손도끼 대신 대력금강저(大力金剛杵)를, 두 번째 오른손엔 희망과 길상의 卍자가 새겨진 조개껍데기 대신 거대한 묵철방패(墨鐵防牌)를 들고 있다는 점만 빼면, 그리고 상아가 하나가 아닌 두 개라는 점만 빼면, 나의 모습은 힌두의 신 가네샤와 다를 바가 없었다. 코끼리로서 도달한 나의 신격은 바로 시바의 아들이자 파르바티의 아들, 군중의 지배자, 대환희자재천(大歡喜自在天) 가네샤였던 것이다.
여의봉이 나를 가리켰고, 길어졌고, 나는 그것을 묵철방패로 쳐냈다. 여의봉은 금환도와, 그리고 금강저와 음속 이상으로 맞부딪치며 아크 방전을 일으켰다. 나는 동시에 은륜을 날려 손오공의 목을 잘랐다. 분신-허상이었다. 곧장 일곱 명의 손오공들이 일제히 다른 방향에서 여의봉을 휘둘러왔다. 나는 일일이 은륜으로, 금환도로, 금강저로, 묵철방패로, 금빛 상아로 그것들을 쳐냈으며, 코로 휘감아 우그러뜨렸다.
손오공이 주문을 외웠다. 십여 차례의 전격이 나의 정수리에 내리꽂혔다. 나는 온몸에서 아지랑이를 피워 올리면서 한쪽 무릎을 꿇었고, 손오공은 내 이마의 물레방아로부터 발해진 종횡파에 분신들을 잃고 한줌 선혈을 토했다. 그 순간 나는 고개를 있는 대로 뒤로 젖혔고, 내부의 빛을 끌어올렸으며, 다시 전방을 향해 고개를 던졌다. 뒤로 젖혀졌던 긴 코가 채찍처럼 앞으로 뻗었다.
콰아아아-! 황금빛 참살(慘殺)의 에너지가 내 코로부터 손오공에게 몰아쳤다. 손오공은 법력을 끌어올려 그것을 극복했다. 결국 손오공이 공격을 이겨내고 지상에 굳건히 섰을 때, 이미 날려졌던 나의 은륜은 호선을 그리며 돌아와 그의 뒷목을 쳤다. 선혈이 치솟았다. 손오공은 근두운을 불렀고, 나는 그것을 흩어버렸다. 손오공은 모든 힘을 다해 여의봉을 던지곤 뒤돌아 달렸으며, 나는 여의봉을 받아낸 뒤 그의 등에 금환도를 날려 꽂았다. 손오공은 쓰러져 나뒹굴었고, 나는 쫓아가 짓밟은 뒤 금강저로 그 골통을 산산이 바수었다. 그리고, 먹었다. 일찍이 맛보지 못한 역량의 축적과 성장이 느껴지는 최고급 육신이었다. 3차 각성은 이렇듯 재앙의 시작이었다. 어제의 동료가 오늘의 양식이 되었으며, 오늘의 승리자는 내일을 장담할 수 없었다. 결국 우리들은, 이미 짜여진 프로그램 위에서 이리저리 날뛰는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이었다.
10
일단 우리가 서로를 죽이고, 죽기 시작하자 위계가 흩어지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아직 안정적인 판단이 가능한 1차에서 2차까지의 각성자들은 제각각 무리를 지어 곳곳에서 할거를 시작하였으며, 그 와중에 33인 위원회의 살아남은 멤버들이 무차별적으로 서로를, 혹은 하급자들을 살상하면서 대혼란이 빚어졌다.
그러한 대혼란은 비단 꿈속 세계에서만 빚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살상을 통제하던 33인 위원회의 체계가 무너지자, 이미 늘어날 대로 늘어난 꿈속의 각성자들은 집단을 이룬 채 서로 실력투쟁을 하거나, 수습자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현실계에서의 사망자 수도 점차 늘어갔으며, 누적 총계가 약 이십만에 달할 지경이 이르렀다. 도시는 패닉 상태에 빠져들었고, 산업시설들은 마비되었다. 미디어도 제 기능을 하지 못했으며 공권력의 힘마저 약화돼 치안이 무너졌다. 이 무렵엔 서울시민의 절대다수가 이 저주스런 자각몽의 올가미에 빠져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도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언제부턴가 그 '물'은, 상수도를 타고 서울시 전체에 급수되고 있었던 것이다. 일종의 결계로 둘러쳐진 서울시, 그 전체 인구가 꿈에 접속하게 되면서 꿈과 현실이 보다 긴밀히 공명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 무렵이었다.
꿈속에서 서울 밖으로 도망칠 수 없다면, 현실 세계에서는 어떨까? 소용없었다. 이미 한 번 물을 마신 자는 물리적으로 서울 밖으로 벗어난다 해도 꿈속에서는 서울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정부의 소행이었을까? 혹은, 정부조차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며 뜻을 관철시키는 어떤 거대한 조직이 존재하는 것일까? 문득 생수병 라벨에 붙어있던 메이커가 떠올랐다. 코스믹 유니온 & 뉴 월드 오더… 우주적 합일과 새로운 세계질서… 언젠가 이런 얘길 들은 적이 있었다. 세상에는 스스로를 구름 위의 신들이라 여기며, 대중들 위에 군림하여 결국 세계를 통합하여 단일정부를 수립하려는 자들이 존재한다고. 혹시, 작금의 이 현실은 그러한 구상이 실현되어 가는 단계인 것은 아닐까?
강한 놈들만을 골라 사냥을 계속하던 내가 곰 인간과 맞닥뜨린 것은 33인 위원회의 파국이 찾아온 지 며칠 되지 않은 시점, 정확히는 12월 24일 경이었다. 당시 현실과 꿈은 이미 중첩되어 분리가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굳이 의식을 현실 쪽으로, 꿈 쪽으로 투사하려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 양 측면들은 동시에 지각이 가능했고, 한데 뭉뚱그려져 떼어낼 수 없었다. 이곳 서울의 꿈과 현실은 같은 주파수로 공명하기 시작했고, 점차 합일에 가까워져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내가 녀석을 만난 것이 현실계에서였는지, 꿈속에서였는지는 확실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이 적어도 한 가지는 있었다. 녀석과 내가 만난 장소가 신림동 근처, 관악산과 그 거대한 물레방아가 왼편으로 보이던 곳이었다는 사실 만큼은 분명했으니까. 놈과 나는 서로를 마주보고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녀석의 키도 역시 나와 같이 약 8미터에 육박했고, 머리엔 황금빛 후광이 둥글게 감싸고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나는 인공의 무기들을 잔뜩 들고 있었고, 녀석은 강인한 털가죽과 무섭도록 날카로운 발톱들만을 무기로 가지고 있다는 점뿐이었다.
우리는 이런 날을 고대하고 또 고대해왔었다. 처음 만나 공격을 주고받았을 때부터.
그리하여, 우리는 격돌했다. 혼신의 힘을 다 한 전투. 나는 녀석의 왼쪽 어깻죽지를 벨 수 있었다. 반면 나의 금환도는 부러졌고 원반은 쪼개졌으며, 은륜은 우그러지고 금강저는 여섯 조각이 났다. 두 개의 상아는 무참히 부러졌고, 왼 무릎은 반 이상 잘렸으며 오른쪽 눈은 실명했다. 나의 완패였다!
나는 속에서 빛을 끌어올렸고, 점점 다가오는 녀석을 향해 그 가공할 힘을 코로 뿜어냈다. 그러나 녀석은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견뎌냈고, 계속해서 다가왔다. 나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기 위해.
'크으으……!'
나는 도망치기 시작했다. 두려웠다. 회복. 회복해야 했다. 이렇게 여기까지 와 놓고 이렇게 쉽게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수습생이 많은 곳을 찾아 필사적으로 달렸다. 닥치는 대로, 눈에 띄는 대로 수습생들을 잡아먹었다. 회복해야 했다. 부족했다. 더. 더 먹어야 했다. 저희들끼리 죽고 죽이는 데에 정신이 팔려있는 수습생들을 손아귀로 빨아들여 미친 듯이 먹으며 달렸다. 그럼에도 곰 인간은 마치 할 테면 얼마든지 더 해보라는 듯한 태도로 느긋하게 내 뒤를 쫓았다. 그리고 그것이 나로 하여금 더욱 공포를 느끼게 했다. 녀석은 대체 얼마나 더 강해진 것일까? 얼마나 강해졌기에 이 정도의 여유를 부리고 위압감을 줄 수 있는가? 아니, 그보다 먼저, 대체 놈과 나는 왜 그렇게 서로에게 강렬한 적대감을 품고 투쟁하는 거지? 없었다.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이것은 그저 타인에 대한 순수한 증오였다!
내가 허겁지겁 수습생, 혹은 각성자들을 씹어 삼키며 나아가는데, 유독 겁이 없는 한 각성자가 눈에 들어왔다. 나의 등장과 함께 동료들이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지는데도 녀석은 마치 나를 보고선 그 자리에 굳어진 듯, 멍한 눈으로 서서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만 있는 것이었다. 빨간색 뽀글머리 파마, 알록달록한 광대화장. 녀석은 맥도날드의 로날드였다.
놈이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벌리려는 순간, 나는 놈의 몸을 낚아채 머리부터 씹어 먹었다. 와드득— 후루룹. 뼈를 씹었고 피를 삼켰다. 먹으면서, 나는 이 녀석 로날드가 누구인지 알 것도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누구? 누구지? 이건 누구…지?
나의 동작이 멈추었다. 그걸 떠올린 순간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자 곰 인간과의 간격은 좁혀졌고, 녀석은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나의 사지에는 박차고 달려 도주할 힘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태양이 곰 인간의 등 뒤에 떠 있었으나, 녀석의 그림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문득 고개를 돌려 나의 그림자를 찾아보았다. 없었다. 우리의 그림자는 어느새 어디론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꿈과 현실은 하나로 합쳐졌고, 우리는 우리의 그림자와 하나로 합쳐졌다. 분리되어 있어야만 하는 것들이 합일했다. 이것은, 하나의 세계의 종말이 아니고 그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로날드를 죽였다. 그리고 이제는 도망칠 수가 없다. 곰 인간은 날 죽일 것이다. 일순간 모든 것이 참으로 자명해졌다. 잠시 후 길고 날카로운 손톱이 내 정수리를 내리찍고, 비틀어 쪼개었다. 그것으로 나는, 이, 삭막한, 무자비한, 육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 *
내 눈동자에서 생명의 불꽃이 꺼지기 직전, 찰나의 순간에 나는 보았다. 그 혼돈의 도가니 속에서, 그들, 물레방아의 주인들이 강림하는 모습을. 그들은 압도적인 신격을 몸에 두른 신인들이었으며, 혼돈의 쟁패에서 살아남은, 가장 강대한 13인의 각성자들-당연히 곰 인간이 포함된-의 경배를 받으며 물레방아 위에서 탄강하였다. 그들이야말로 배후에서 이 모든 것을 안배하고 조종한 흑막 뒤의 손들이었다. 탄강 이전엔 그들도 '인간'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 이후부터는 의심의 여지없는 '신'으로 군림하게 되리라.
그때 나는 근거 없는 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곳 서울에서 벌어졌던 과정들이, 지금 이 순간부터 세계 곳곳에서 똑같이 일어날 것임을. 그리하여, 이 세상에는 새로운 세계 질서가 확립될 것임을. 피와 압제의 새로운 세계 질서가.
나는 생명의 끈을 놓으면서, 희원이 따스한 빛 속에서 나타나 웃으며 나를 맞아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결코 그런, 꿈과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나는 빛을 잃었고, 이윽고 완벽한 어둠 속에 놓였다.
그것으로 나의 꿈은, 끝이었다.
1) 차크라(Chakra) : 산스크리트어로 수레바퀴라는 뜻으로, 인간의 신체에 존재하는 일곱 개의 에너지 센터를 말한다. 차크라들은 인체의 두정에서부터 회음까지를 일직선으로 가르는 선상에서 주요 선(腺)과 신경총에 각각 위치해 있으며, 일곱 차크라들은 모두 고유한 명칭과 색깔을 지니고 있다. 과거에는 신비가들 사이에서만 다뤄져 왔으나 근래에는 시각적 비침습 스캐닝 시스템인 PIP(Polycontrast Interference Photography)와 같은 장비를 통해 실시간으로 촬영하여 각 차크라의 상태를 확인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여기서 물라다라 차크라는 제1차크라로서 인체의 회음부에 위치한다.
0
독자님의 정보를 입력해주세요.
* 는 필수항목입니다
첨부파일은 최대 3개까지 가능하며, 전체 용량은 10MB 이하까지 업로드 가능합니다. 첨부파일 이름은 특수기호(?!,.&^~)를 제외해주세요.(첨부 가능 확장자 jpg,jpeg,png,gi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