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른손이 아프다. 나는 일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 두려워 문제가 생긴 것을 숨겼다. 일을 하지 못하면 청약통장에 저축을 할 수 없게 될 것이고 저축을 하지 못한 일수만큼 내가 월면 도시에 정착하는 날도 멀어질 것이다. 그러나 오른손의 상태는 하루가 다르게 나빠졌다. 남의 눈을 속이는 것조차 버거워질 무렵, 결국 사고가 일어났다.
조종석에 앉아 크레인의 센서를 오른편 손등의 컨버터에 연결하자 평소에는 느낄 수 없었던 전율이 느껴졌다. 비릿한 냄새와 함께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심지어 미약하게 발기가 되기도 했다. 대수롭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했다. 크레인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광산 갱도 입구를 내려친 것이다. 그 바람에 작업 중이던 인부 여럿이 우주로 날아갈 뻔 했다. 인부들은 간발의 차이로 크레인을 피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나는 작업반장에게 불려가 경위서를 작성해야 했다. 그리고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오른손이 결국 작업반장의 눈에 띄고 말았다.
"어이 김형, 크레인에도 고장이 없고, 당신이 그런 실수를 할 만큼 초짜도 아니고, 내가 보기엔 당신 오른손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숨기지 말고 말해. 김형이 말하지 않는다 해도 당신 오른손이 계속 꿈틀대는 게 이미 정상은 아닌 것 같으니까."
나는 오른손의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오른손은 스스로 생명을 얻어 냄비 속의 미꾸라지처럼 몸을 뒤틀었다. 엄지가 약하게 흔들리다가 수전증 환자처럼 파르르 손목을 털었다. 나는 작업반장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작업반장은 내게 한 달간의 무급 휴가와 지구로 돌아가 치료를 받을 것을 지시했다.
"채굴장은 우주야. 우주복에 실밥 하나만 풀어져도 순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고. 의수를 수리하기 전에는 작업장으로 돌아올 생각 하지마."
작업반장은 그 자리에서 휴가 명령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통제국에 전화를 걸어 서울행 패키지 티켓을 예매했다.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내게 작업 반장은 회사 돈으로 편도 티켓을 끊겠다고 협박했다. 나는 결국 10만 달러의 돈을 내고 왕복 티켓을 사야했다. 일당이 800달러라는 점을 감안하면 나의 월면 도시 정착은 120일 쯤 늦춰졌고 그 만큼 광산에서 부역을 해야 일수가 늘어나게 되었다.
이튿날 나는 월면 통제국 공항에서 왕복선을 탔다. 그리고 이틀 동안 우주 공간을 가로질러 지구 궤도 승강기 정거장에 도착했다. 이틀간은 수면실에서 내내 잠을 잤다. 잠을 자는 동안에도 오른손은 활발하게 활동했던 모양인지 담요가 엉망으로 흩어져 있었다. 오른손에 얽힌 담요를 풀어내는 데에도 한참이 걸렸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에는 통증이 심하여 담요를 입에 물고 신음을 찾아야했다. 하지만 나는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말할 수 없었다. 그냥 아프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오른손의 감응 센서가 신경을 통해 '아프다'라는 신호를 끊임없이 보내는 것이다. 방문의 경첩이 삐그덕 소리를 내며 '기름칠을 할 때가 되었습니다'라고 아우성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분명 아픔을 느꼈고 '아프다'라는 표현 외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었다.
궤도 승장기 대기실에서 신문을 보는 동안, 오른손은 더욱 심하게 요동쳤다. 오므려졌다가 펴지는가 하면 제 멋대로 손목을 비틀고 꺾는 바람에 신문이 찢어졌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나를 보고 있었다. 아이의 옆자리에는 은색 양복을 입은 남자가 신문을 읽고 있었다. 아이가 남자의 옆구리를 찌르더니 손가락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나는 얼른 소매 자락을 끌어당겨 오른손을 감췄다. 남자가 나를 쳐다보고는 아이의 손가락을 감싸 쥐어 제 양복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그들은 곧 자리를 옮겼다. 남자는 내 오른손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서둘러 자리를 피한 것은 내 옷차림 때문이었다. 나는 외투를 새로 장만하지 못해 월면 광산의 작업복 자켓을 입고 여행길에 올랐던 것이다. 지구에 도착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나를 피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승강기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오른손을 자켓 주머니에 넣은 채 몸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굴삭기 기사 하나가 얼마 전 지구에 다녀와 너스레를 떨던 것을 떠올렸다. 그는 인대가 늘어나길 바라는 것처럼 팔을 크게 벌리며 말했다. '지구? 거기가 뭐 별거 있어? 여전히 살려면 치사하고 더러운 곳이지.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멋진 곳인 것은 분명해. 내 장담하건데 지구에서 가장 볼만한 건 지평선이야. 특히 궤도 승강기를 타고 자유낙하를 할 때에만 볼 수 있는 지평선은 우주 제일일걸. 둥그렇던 지구의 표면이 점점 넓게 펴지면서 구름이 걷히고 바다가 보이고, 편편해지다 못해 결국에 쭉 펼쳐진 지평선이 되지.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고, 곧 삐쭉빼쭉하게 날 선 빌딩들이 지평선을 가려버리니 마음이 즐거운 건 그 전까지 만이야. 너희들도 지구에 갈 일이 있을 테니 기억해 둬. 아름다운 풍경은 잠시 뿐이야.' 나는 그의 자랑 같은 조언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을 기대하며 승강기에서 밖으로 난 창문을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한 시간 가량이 흐르자 승강기는 중력권에 접어들어 자유낙하를 시작했다. 중력이 느껴지자 속이 메스꺼웠다. 그래도 눈은 완만한 지구의 표면을 따라 널따랗게 펼쳐진 땅과 바다를 기다렸다. 하지만 나는 운이 나빴다. 한 시간을 더 기다려 내가 본 것은 두꺼운 구름과 스모그뿐이었다. 구름이 걷히고 하늘을 향해 죽일 듯 곧추 선 빌딩들이 눈에 들어왔다. 지구의 지평선을 볼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가 허무하게 무산된 것이다. 나는 창문의 가림막을 닫았다.
세 시간 만에 승강기는 구름을 뚫고 빌딩 숲을 지나 대지에 발을 내렸다. 중력 적응실에서 한 시간 가량을 더 머문 후, 나는 승강기 문을 열고 환승 센터로 향했다. 환승 센터에서 서울행 비행기로 갈아타고 하와이 국제공항을 떠났다.
서울행 비행기에서 나는 공교롭게도 궤도 승강기 대기실에서 만났던 남자 아이와 같은 열에 앉게 되었다. 은색 양복을 입은 남자도 함께 있었는데 그는 아이의 아빠인 모양이었다. 남자는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아이에게 귓속말로 무언가 당부하는 듯 했다. 그는 아마도 '저기 이상한 아저씨 자꾸 쳐다보지마. 저 아저씨는 달에서 온 사람이야.'라고 말했을 것이다. 아무렴 어쩌겠는가, 나는 달에서 왔고 또한 평범한 사람이라면 한 방의 주먹질로 기절 시킬 수 있는 의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은 나를 두려워하는 것이 당연했다.
여객기가 정상 항로에 접어들어 기체가 안정되자 앞좌석의 뒤통수에 붙은 디스플레이에서 영화가 시작되었다. '루나틱'이라는 제목의 영화였다. 영화의 내용은 월면 도시 이주자들이 부역을 거부하면서 폭동이 일어나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군인들의 전우애와 혈투를 그린 것이었다. 주인공 군인들은 나와 같은 이주자들에게 총탄을 퍼부으며 상욕을 하고, 한편으로는 안타깝게 죽어가는 동료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나는 영화가 왜 월면 도시에서는 개봉할 수 없었는지 알게 되었다. 디스플레이를 끄고 구름으로 가득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때 누군가 내 옆구리를 찌르는 것이 느껴져 돌아보니 남자아이였다. 아이의 아빠는 좌석에서 얼굴에 신문을 덮고 잠들어 있었다. 아이는 남자의 감시를 피해 거대한 눈망울을 굴리며 내게 바싹 다가왔다.
"아저씨는 달에서 왔지? 근데 달의 뒷면에는 살가죽도 없고 24시간 피를 흘리는 괴물이 산다던데, 아저씨도 봤어?"
나는 고개를 가로 젓고 아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짙은 갈색 눈동자와 분을 바른 듯 하얀 피부, 누가 봐도 코카서스인종의 피를 가진 아이였다.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것을 보면 혼혈이거나 유럽계 한국인일 것이다.
"나도 달에 가고 싶어. 달에 가면 치안 방위군에 들어갈 거야. 달에는 악당들이 득실거린다며? 내가 다 처치해줄게. 이렇게. -아이는 손가락으로 권총을 만들어서 나를 향해 쏘았다.- 아저씨는 악당편 아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의 눈빛이 진리에 도달한 철학자 같았다. 잠에서 깬 남자가 성급히 달려와 아이를 번쩍 들었다.
"실례했소."
아이와 같이 코카서스인종의 얼굴을 한 남자가 아이보다는 부정확한 한국어 발음으로 말했다. 어쩌면 아이의 어머니가 한국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남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였다. 그들이 자리로 돌아간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남들의 눈에 거슬리지 않기 위해서는 얌전히 무언가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디스플레이를 다시 켰다. 영화를 켜둔 채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인천공항에 도착하기까지 일곱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두 세 편의 영화가 번갈아 상영되었으나 나는 그 영화들이 어떤 내용인지, 왜 그런 영화를 만들었는지조차 알고 싶지 않았다. 루나틱과 비슷한 내용이거나 지구 중심적인 내용일 것이 뻔했다. 루나틱, 월광염(月狂炎), 지구의 이방인 따위의 제목만 봐도 내용을 알만했다.
인천공항에 도착하자 공항 출입국 관리소의 공안 요원들이 나를 마중했다. 공안 요원들은 나를 공안 취조실로 데리고 갔다. 취조실에선 다부진 체격의 검사가 나를 맞이했다. 내가 자리에 앉자 검사는 비가시광선을 발사하는 하얀색 상자를 맞은편에 놓았다. 나는 그것이 거짓말 탐지기라는 것을 알아챘다.
"죄송합니다. 월면 소요 사태 이후로 보안이 많이 강화됐어요. 월면 도시 사람들이 입국할 때마다 하는 절차적인 것들이니 신경 쓰지 마시고, 질문에 성실히 답변만 해주시면 시간을 많이 빼앗지는 않겠습니다."
검사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친절하게 말했다. 하지만 내가 성실하게 대답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나에게서 많은 시간을 빼앗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투였다.
"한국에는 왜 오셨습니까?"
"치료를 받으러 왔습니다. 달에선 치료할 수 있는 병원이 없어서……."
나는 자켓 주머니에서 오른손을 꺼내 보였다. 나는 전혀 느끼지 못했지만 상태는 훨씬 더 나빠져 있었다. 오른손이 당장 폭발할 기세로 떨렸다. 나는 굳이 어디가 어떻게 아프다는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검사는 내 손을 보고 약간 놀라는 눈치였다.
"좋습니다. 어디에 묵으실 예정이신가요?"
내가 대답을 망설이자 남자의 눈빛이 변했다. 나는 거짓말 탐지기의 렌즈가 나를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을 생각했다.
"갑작스럽게 입국하게 되어서 아직 숙소는 잡지 못 했어요. 아마 서울역 부근의 여관이나 모텔에서 며칠간 묵게 될 겁니다. 병원이 그 근처니까. 치료만 받으면 바로 출국할 예정입니다. 갈 길이 멀어서요. 여기 월면 도시행 패키지 티켓입니다."
나는 자켓의 안주머니에서 티켓을 꺼내 보여주었다. 그는 티켓을 받아 컴퓨터로 발급번호를 조회했다. 위조 티켓인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친절하게 웃었다. 이어서 그는 주민등록번호, 시민 번호, 긴급 연락처, 보증인 연락처 따위의 것들을 물었고 나는 아는 대로 대답했다. 긴급 연락처와 보증인 연락처로는 작업반장의 것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취조실에서 한 시간 가량을 보낸 후 풀려났다. 오른손이 더욱 심하게 떨렸다. 검사는 기압차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말하며 미지근한 물에 한 시간 정도 담그고 있으면 괜찮을 거라고 알려주었다.
"저희 할아버님도 의족을 사용하셨죠. 우주여행에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겠더군요."
그는 나를 공항 앞까지 배웅하고 서울행 버스를 잡아탈 수 있도록 안내해주었다.
버스는 공항을 출발해 고속도로를 따라 서울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내가 지구를 떠나기 위해 서울에서 인천 공항으로 오던 때와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서해대교를 건널 때, 멀리 서해 간척지에 들어선 거대한 건설 로봇이 여러 개의 팔을 사방으로 뻗은 채 안개 속으로 숨어드는 것이 보였다.
2.
"어디에 문제가 생긴 것인지는 검사 결과가 나와봐야 알 수 있겠지만 센서 감응 장치와 메인 보드에 문제가 생겼을 것 같군요. 메인 보드는 오래되면 종종 오작동을 일으키죠. 다른 장비와 직접 연결을 했을 때 잘못된 신호를 보내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겁니다. 그 동안 기술도 많이 발전했고 가격도 많이 떨어졌으니 신제품을 둘러보시죠. 어쩌면 수리하는 것보다는 신제품으로 교체하시는 편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와이셔츠의 단추가 뜯어질 듯 살이 찐 의사가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그는 책상 서랍을 뒤적여 의지 제작 브랜드가 소개된 카탈로그를 꺼내 내게 건넸다. 카탈로그에는 처음 보는 용어들이 가득했다. 의사의 말처럼 기술이 많은 발전을 이룩한 모양이었다. 나는 카탈로그의 제품 소개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알 수 있는 것은 15만 달러에서 30만 달러까지 다양한 가격뿐이었다. 가장 싼 15만 달러도 내가 치르기엔 비싼 것이었다.
"시간이 촉박하다고 하시니까, 내일까지 결정을 내려 주십시오. 전화를 주셔도 좋습니다. 최대한 빨리 수술 일정을 잡아보도록 하겠습니다만 2, 3일은 걸릴 거예요. 정확한 일정은 내일 알려드리도록 하지요."
"되도록이면 수리하는 방향으로……. 견적을 좀 내주세요."
"달에서 오셨다고 하니까 저도 되도록 그렇게 해드리고 싶습니다만 수리비가 많이 나올 수도 있어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그리고 처방전을 써드릴 테니 약을 사드세요. 오작동이 멈추지는 않겠지만 고통 신호가 뇌로 전달되는 것을 차단해 줄 겁니다. 신경을 차단하는 것이라 떨림이나 뒤틀림도 조금 가라앉을 거고요."
카탈로그를 쥔 오른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때 나는 오른손의 떨림이 묘하게 박자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의사는 진료가 끝났다는 말을 하기 위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오른손에 눈을 고정시킨 채 미온적인 운율을 관찰했다. 1초에 한번. 아니다. 그것은 1초에 두 번 씩, 떨렸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내 심장의 박동과 동일하게 움직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선생님, 떨림이 묘하게 심장 박동과 일치하는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나요?"
의사가 허리를 펴며 내 손의 떨림을 지켜보았다.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하지만 의수는 인체의 정동맥과 직접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냥 센서 감응 장치만 신경과 연결될 뿐이죠. 우연이거나 센서의 오작동으로 심작 박동을 감지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으니 별로 신경 쓰실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의사는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신경이 쓰였다. 마치 내 심장 박동에 맞춰 오른손이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심지어 오른손의 떨림으로 인해 내 심장이 뛰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방문의 경첩이 녹슬어 괴이한 소음을 낼 때 심장이 뛴다면 그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소리에 반응을 하여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혹은 접시를 깨뜨릴 때와 같이 깜짝 놀라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면서 심장이 요동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내 심장 박동에 맞춰 자동차 엔진에서 비명 소리가 난다면 이상한 일이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병원을 나선 나는 오른손을 자켓 주머니에 넣고 눈으로 떨림을 확인하며 거리를 걸었다. 오른손은 여전히 고통 신호를 보냈다. 나는 어서 약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 오른손의 떨림과 내 심장 박동이 점점 더 정확해지는 것 같았다.
병원을 나오자 건너편에 약국이 보였다. 약국에 들러 약을 사고 다시 거리를 걸었다. 지구의 햇볕을 맞으니 기분이 좋았다. 고통 신호도 멈춘 듯했다. 여유롭게 산책을 하고 싶었지만 신경은 온통 오른손에 가 있었다. 오른손에 신경을 쏟으며 걷다보니 나는 목적지도 없이 시내를 걷는 꼴이었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시청 앞 광장이었다. 광장에 설치된 무대 위에서 머리칼을 어깨까지 기른 남자가 마이크에 대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서울에서 유년기를 보낸 내게는 익숙한 풍경이었다. 시청 앞 광장은 불만에 쌓인 시민들을 위해 언제나 개방되어 있었고 시민들은 광장의 단상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해가 질 무렵이면 경찰들도 달려 나와 몽둥이를 휘두르며 함께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다. 정말 변한 것이 없었다. 변한 것은 더 이상 내가 지구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뿐이었다.
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에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무대 밑에서는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남자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나는 괜히 남자의 이야기가 궁금하여 무리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단상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남자의 등 뒤로 펼쳐진 현수막의 글귀가 보였다.
「월면 이주민도 사람이다!」
그의 이야기는 대략 이런 것이었다. 세계 우주 개발 기구는 월면 도시 정착을 미끼로 빈민층 노동자들을 달로 내몰고 있으며, 달로 간 노동자들에게는 월면 도시 정착을 조건으로 부역을 책정해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는 위험천만의 우주 공간에서 작업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WSDO(세계 우주 개발 기구)는 부당하게 노동력을 착취하고 있으며 우주 공간에서의 인권유린이 매우 심각한 상태라는 것이다.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선 내키지 않았다. 나는 위험한 부역을 통해서라도 월면 도시에 정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구에서는 더 위험한 일을 해도 빈곤한 생활을 청산할 수 없으니 달은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유토피아나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들어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나는 무리를 빠져나왔다. 겨우 사람들 사이를 뚫고 나와 옷매무새를 추스르고 있을 때, 누군가 내 팔을 붙잡았다.
"선생님, 괜찮으시다면 단상에 올라가셔서 실상을 얘기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그는 내 자켓이 월면 광산 노동자들에게 지급되는 작업용임을 알아 본 모양이었다. 나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들과 멀어져야 한다는 것을 직감하고 빠른 걸음으로 광장을 벗어났다.
어느새 나는 종로의 빌딩 숲 샛길을 걷고 있었다. 걸음을 멈추자 가쁜 숨이 턱 밑으로 차올랐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오른손의 떨림도 빨라졌다. 심장 박동을 따라 고통 신호도 강해졌다. 나는 주머니에서 의사가 처방해 준 알약을 꺼내 한 알을 삼켰다. 그리고 숙소를 정해야한다는 것을 떠올렸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주위의 빌딩들에서 묵을 만한 곳을 찾았다. 호텔이 있었지만 내 형편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결국 내가 숙소를 찾기 위해 향한 곳은 공안 검사에게 말했던 서울역 근처가 아니라 영등포의 주택가였다. 지구를 떠나기 전까지 함께 군대 생활을 했던 K가 영등포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떠올린 것이다. 나는 숙박비를 아끼고 오랜 벗의 얼굴도 볼 겸, 그의 집에 짐을 풀어놓을 작정이었다.
종로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십여 분을 달려 K의 집에 도착했다. 내가 달로 떠나기 전날의 밤, 그가 내게 적어준 집의 주소는 영등포구 신길동의 한 오피스텔 빌딩이었다. 인구 감소와 빈민층의 월면 이주로 인해 지구의 주택난이 해소되자 아파트나 오피스텔 같은 다가구 주택은 값이 폭락했고 중심가 인근의 낡은 오피스텔에는 도시 빈민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K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 역시 복도에 들어서기만 해도 지린내가 진동하는 빈민 아파트 중 하나였다. 그의 집은 25층이었는데 그 곳으로 가기 위해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잠든 머리가 하얗게 센 노숙자와 복도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는 청춘남녀들을 피해야 했다. 가까스로 도착한 그의 집 문 앞에 서서 혹시 그가 이사를 간 것은 아닌지, 아니면 나를 까맣게 잊은 것은 아닌지 곱씹어 생각했다. 어차피 잃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과감하게 초인종을 눌렀다. 현관문이 조금 열렸다. 현관문 안쪽에 체인이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체인 너머로 술독에 발갛게 달아오른 K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나를 본 K는 흉터처럼 찢어진 두 눈을 깜박이며 술병을 입에 대고 연거푸 두 세 모금을 들이켰다. 누구라도 그때 그의 표정을 봤다면 그가 선택의 기로에 서서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웃을 것인가 다시 문을 닫을 것인가. 복도에서 술을 마시던 녀석들이 나를 보고 키득거렸다. 아마도 나를 연인에게 문전박대 당한 얼간이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잘 지냈어? 잠깐 볼 일이 있어서 오늘 지구에 돌아왔어. 이러고 있으면 남들이 우리 사이를 의심할 텐데 안으로 들어가면 안 돼?"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문이 열리고, 우주가 공기를 빨아들이듯 K가 나를 집 안으로 거세게 끌어당겼다. 나를 집안에 들이자마자 K는 세 개의 자물쇠를 위에서부터 차례로 잠갔다. 집안의 공기가 새어나가면 안 된다는 듯 다급한 손놀림이었다. K가 내 얼굴을 천천히 훑어보며 말했다.
"너 정말 요한이야? 김요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나를 껴안고 제자리에서 깡충깡충 뛰었다.
"나를 찾아 온 거야. 맙소사,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 다 있다니. 잘 왔어. 정말 잘 왔다고. 내가 걱정을 얼마나 많이 했는줄 알아? 네가 달로 가고 나서 일 년 뒤에 폭동인지 해방 투쟁인지가 일어났잖아. 그때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거야. 군인들이 오백 명이나 죽었다고 지구놈들이 난리 법석을 떠는데, 군인 오백 명이 죽었으면 너 같은 이주 노동자들은 얼마나 많이 죽었겠느냐 말이야. 넌 괜찮아? 다친데 없고?"
월면 해방 투쟁이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 나는 가족을 이끈 중년의 인부들과 기숙사의 지하 창고에 숨어 있었다. 정확히 일주일 만에 총성이 멈췄고 창고 밖으로 나왔을 때에는 거리에 시체가 즐비했다. 수많은 사연이 있었지만 K의 물음에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내 집에서, 시궁창 같이 지독한 냄새가 나기는 하지만 꽤 편한 곳이야, 내 집에서 지낼 거지? 넌 그래야 돼. 마침 좋은 술도 잔득 있으니까 오래간만에 둘이 퍼마셔 보자고."
K가 내게 술병을 내밀었다. 'J&B'라는 이름의 양주였다. 나는 그것이 빈민 아파트보다 회사원들이 자주 드나드는 여의도의 음침한 바에 어울릴 법한 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K가 크게 성공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말없이 술병을 받아 한 모금 들이켰다.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지독한 향이 입 안에 퍼지며 목구멍부터 똥구멍까지 달아올랐다. 꽤 좋은 느낌이었기 때문에 나는 K에게 술병을 돌려주지 않고 몇 모금을 더 마셨다.
술기운 때문인지 약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오른손이 아프지 않았다. 나는 편안한 기분으로 술을 들이켰다. 한 병을 다 마시자 K는 어디선가 같은 술을 두 병 더 내왔다. 이제는 각자 한 병씩을 하늘을 향해 치켜들고 들이켰다. K는 끊임없이 떠들었다.
"영리한 자식, 어떻게 알고 이 형님을 찾아온 거야? 그러니까 나도 곧 월면으로 갈 수 있게 됐는데, 그걸 알고 나를 만나러 온 거지, 그렇지? 좋아, 좋아, 어쨌든 좋다고. 지구는 안녕이야. 나도 드디어 신세계로 가는 거야. 노동자들의 세계로 말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구는 너무 늙었어. 모든 게 정해져서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모두 다같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해. 달에서처럼 말이야. 맞아, 그래야 공평하지."
뭐가 다시 시작한다는 말인지, 희망은 도대체 어디 있다는 것인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었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의 말은 언제나 맞고 틀림이 분명하지 않았다. 무엇이 틀린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맞는 말은 말들의 바다 속에서 부표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는 언제나 맞는 말에 대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K의 말에 대해서는 '달에서, 다같이 처음부터, 시작해야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K가 밤새 무슨 말을 지껄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그의 말에 연방 고개를 끄덕이다가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 내가 위장 속에 든 술을 게워내기 위해서, 그리고 물을 마시기 위해서 잠깐씩 깨어났을 때에도 K는 의자에 앉아 지껄이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튿날, 머리가 끔찍하게 아파서 눈을 떴다. 전날은 미처 몰랐던 방의 악취가 콧구멍을 통해 머리까지 진주했다. 화장실로 달려가 구역질을 했지만 시큼한 위액이 콧구멍을 자극할 뿐이었다. K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집을 나섰다. 그리고 오피스텔의 1층에 있는 공중전화로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내가 용건을 말하자 병원의 자동응답기가 지난번의 의사에게 신호를 넘겨주었다. 의사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퉁명스럽게 말했다.
"김요한씨, 술을 얼마나 마신 겁니까? 젠장, 월면 이주자의 상담을 맡는 게 아니었는데. 어제 밤부터 출입국 관리소에서 십 분에 한 번씩 당신을 찾고 있다고요. 왜 담당 검사에게 연락을 하지 않은 겁니까? 그리고 의수 교환 수술을 하려면 오늘부터는 무조건 금주하셔야 합니다. 아시겠어요?"
출입국 관리소에서 만난 친절한 검사는 내게 연락을 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나는 의사가 화를 내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알았다고만 대답했다.
"출고 번호를 확인해보니 김요한씨는 그 의수를 중고로 구입하셨더군요. 결론만 말씀드리자면 그 의수는 수리가 불가능합니다. 부품도 없고 망가진 부분이 너무 많아서 수리비용이 만만치 않아요."
머리속에서 악마가 찬송가를 불러댔다. 이런 머리통이라면 차라리 깨어져버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나는 왼손 엄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힘껏 누르며 더듬더듬 말했다.
"그래도 되도록 수리를…"
"이보세요. 무슨 수립니까. 애당초 그런 의수로 무중력 환경에서 일을 한 것이 잘못입니다. 댁의 의수가 무슨 만능 드라이버인 줄 압니까? 수리비 견적이 21만 달럽니다. 어제 카탈로그 보셨죠? 보급형 의수도 15만 달러면 살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내가 대답을 못하자 의사는 무중력에서도 장시간 버틸 수 있다는 30만 달러짜리 의수를 추천했다. 나는 알았다고만 대답했다. 그리고 수술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수술을 하지 않으면 달로 돌아갈 수 없을 테고 수술을 한다면 족히 1년은 더 광산에서 부역을 해야 했다. 후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알았으나 탐탁지 않은 무엇이 가슴 속에서 뜨겁게 달아올랐다. 의사는 이틀 후 오후 두 시에 수술일정을 잡겠다고 말했다. 나는 알았다고만 대답했다.
전화를 끊고 편의점에 들러 알콜에 혹사당한 위장을 달랠 인스턴트 식품들을 샀다. 뜨거운 김칫국과 반건조 쌀밥 따위를 양손에 들고 25층으로 올라갔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K는 이미 잠에서 깨어 좁은 방안을 분주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바쁜지 내가 집 안에 들어온 것을 보고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옷가지들을 여행용 가방에 구겨 넣고 책상 서랍에서 서류 봉투들을 꺼내 옷가지 사이에 숨겼다. 나는 탁자에 앉아 사온 것들을 늘어놓고 입맛을 다셨다. 그러는 동안에 K는 주방으로 달려가 냉장고를 열고 무언가를 다른 가방에 쓸어 넣었다. 내가 그에게 소리쳤다.
"엄청 바쁜 모양이네? 그래도 뭐 좀 먹고 하지 그래?"
그가 손을 멈추고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냉장고에서 가방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얼핏 보아도 500만 달러는 되어 보이는 돈다발들이었다.
"바쁘냐고? 이 멍청아, 나 지금 엄청 바쁜 거 안 보여? 먹을 거에 환장한 빈민굴의 돼지같이 이 상황에서 먹을 게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냐? 응?"
나는 그가 왜 그토록 악을 쓰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K의 몫을 빼두고 밥을 먹었다. 비닐 덮개를 열자 김칫국이 끓기 시작했다. 반건조 쌀밥을 부어서 수저로 저으니 얼큰한 냄새가 위를 자극했다. 나는 수저를 들고 허겁지겁 국물을 떠 마셨다.
잠시 후, 복도에서 여러 명이 뜀박질을 하는듯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나는 심상치 않은 일이 K의 집 밖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느끼고 수저질을 멈췄다. 가방을 싸던 K도 지난 밤 나를 맞이했던 표정이 되어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발자국 소리는 K의 집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두드렸다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표현인데 쳐부술 듯이 문을 때리는 그들의 행동을 달리 표현하지 못하겠다. K가 가방 위에 주저앉았다. 문 밖의 이들은 잠시 조용한가 싶더니 문의 자물쇠를 하나씩 녹이기 시작했다.
세 개의 자물쇠가 차례로 녹아서 떨어지자 문이 열렸고 옷차림, 생김새, 머리 모양, 말씨마저 제각각인 다섯 명의 남자 아이들이 들어왔다.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아이는 스무 대 여섯 정도 되었을 법한 얼굴이었고 나머지는 고등학생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직 양볼에 젖살이 빠지지 않은 아이도 한 명 있었다. 그치들은 웃고 떠들며 제법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녀석이 K를 보자마자 냅다 발길질부터 시작했다. 녀석을 시작으로 다른 무리들까지 발길질에 동참했다. 나는 엉덩이가 의자에 붙은 것처럼 꼼작도 하지 못한 채 K가 차이고, 찍히고, 밟히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았다. K가 말한 먹을 게 넘어가지 않는 상황이란 이런 것이었다. 처음 K에게 달려들었던 그치가 이번에는 나에게 다가오더니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K에게 했던 것과 같이 발을 내 아랫배로 찔러 넣었다. 나는 쓰러지며 탁자 모서리에 머리를 찧고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두 손이 묶인 채 쓰러져 있었다. K는 반대편 벽면에 앉아 그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 번씩 녀석들이 K의 뺨을 치는 것으로 보아 토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 듯 했다. 나도 정신을 잃은 후 몇 대를 더 얻어맞았는지 온 몸이 쑤시고 아팠다. 특히 오른손은 갓 잡힌 멸치처럼 퍼덕이며 허공을 박찼다.
"어이 아저씨, 우리를 호구로 아나본데, 우리가 밀가루랑 약도 구분 못하는 병신들인 줄 아나본데. 큭큭.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줄까? 어제 아저씨랑 거래한 몽구있지? 그놈 어젯밤에 마포대교에서 뛰어 내렸다? 다리에 돌덩어리를 매달고 뛰어내린 주제에 유서까지 착실하게 썼더라고."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는 녀석이 K에게 말했다. 나는 그가 일당의 리더쯤 되리라 짐작했다. 그는 뭐가 우스운지 계속 싱글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저씨. 아저씨는 안 죽을 거야. 왜냐하면 아저씨는 술을 퍼마시느라 써버린 우리 돈 100만 달러를 갚아야 하잖아. 그런데 아저씨, 돈은 있어? 없지? 돈 생겼다고 이렇게 퍼마시는데 가진 돈이 있을 턱이 없지. 아저씨 같은 거지들은 그래서 안 돼. 돈을 쓰는 방법을 몰라. 그러니까 술 마시느라 여태 도망도 못 쳤지. 큭큭"
리더 옆에 서 있던 녀석이 커다란 스포츠가방에서 역시 커다란 유리 캡슐을 꺼냈다. 리더는 손톱으로 유리 캡슐을 긁으며 말했다.
"이게 뭔지 알아? 산화 방지 캡슐이라는 건데, 살점을 여기에 넣어두면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어. 이식용 장기나 신체를 담는데 많이 쓰이는 물건이야. 아주 비싸게 구입했어. 나는 여기다 아저씨의 오른손을 담아서 팔 거야. 왼손보다는 오른손이 값을 쳐주거든. 그러면 아저씨가 퍼마신 내 돈이랑 이 캡슐을 사는데 사용한 돈이랑 우리가 문을 부수고 아저씨를 혼내주느라 애쓴 수고비까지 해서 딱 본전이다?"
리더가 바지춤에서 열선 나이프를 꺼냈다. 주위에 있던 녀석들이 K에게 달려들어 자르기 좋게 팔을 붙잡았다. K는 의식이 없어 보였다.
"야, 야, 이 새끼야. 더 위를 잡아 위를. 너무 손목 가까이를 자르면 팔 수가 없다니까."
리더는 부산을 떨며 열선 나이프의 스위치를 켰다. 전자파가 방 안에 진동했다.
어디서 그런 힘이 생긴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내 손목을 붙들고 있던 테이프를 오로지 힘으로만 뜯었다. 그리고 리더를 향해 달려들어 열선 나이프를 잡고 있던 오른손을 붙잡았다. 그가 비명을 질렀다. 나는 그의 손목을 잡아 열선 나이프를 휘두르지 못하도록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병이 난 내 오른손이 미쳐버린 것이다. 그의 손목이 뒤틀리며 피부가 찢기고 뼈가 튀어 나왔다. 리더가 바닥에 쓰러졌다. 다른 일당들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리더의 얼굴을 보며 박제 된 순록처럼 순진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나는 미안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일당들아 버둥거리는 우두머리를 멍하니 바라보는 동안, 나는 그들을 제치고 K를 끌어냈다. 나는 K와 눈을 맞추려 했다. 하지만 퉁퉁 부어 오른 그의 얼굴에서 눈을 찾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나는 K의 겨드랑이에 내 어깨를 밀어 넣었다. 물 먹인 솜이불처럼 늘어진 K의 몸뚱이가 나를 짓눌렀다. 가까스로 K를 부축하여 현관을 나설 무렵, 일당 중 한 명이 비명을 지르며 나를 앞질러 오피스텔 비상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나는 그치가 경찰이나 구급차를 부르리라 짐작했다. 어느 쪽이 되었든 마주치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있는 힘을 다해 K를 둘러업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뛰었다. 엘리베이터가 25층을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등에서 땀이 흘렀다. 경찰에 붙잡히기라도 하면 치료도 받지 못한 채 강제 추방을 당할 것이다. 아니, 사정을 잘 이야기하면 치료는 받게 해줄지도 모른다. 지구는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다. 월면 도시에 정착할 수만 있다면.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내렸다. 경찰들이었다. 경찰 무리의 앞장을 선 것은 공항 출입국 관리소에서 만난 친절한 검사였다. 벌써 신고가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찰들은 우리를 잡으러 온 것이 아니라 나를 잡으러 온 것이었다. 때마침 상황은 경찰이 필요하게 되었고 나를 비롯하여 K와 순진한 표정으로 넋을 잃고 있는 건달패까지 체포되었다.
3.
경찰들은 나와 K, 일당을 결박해 경찰서로 압송했다. 경찰서에서 나는 다른 이들과 구분되어 좁은 취조실 하나를 독차지할 수 있도록 배려를 받았다. 내가 취조실에 들어서고 잠시 후, 나를 따라 들어온 것은 공항에서 만났던 검사였다. 검사는 어제와 다르게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내 앞에 앉았다. 존댓말도 사용하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지. 치료를 받으러 왔으면 얌전히 치료나 받을 것이지 싸움질은 왜 하나?"
나는 그의 얼굴을 마주볼 염치가 없었다. 그가 서류를 한 장 꺼내 그곳에 적힌 질문들을 하나씩 읽어갔다.
"묻는 말에 그렇다 아니다로만 대답한다. 당신은 달에서 정치적 활동을 한 적이 있습니까?"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당신은 달에서 반정부 집회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까?"
다시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당신은 월면 이주자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또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당신은 지구에 무슨 목적을 가지고 왔습니까? 이건 그냥 솔직하게 얘기해."
검사는 잔득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나는 긴장한 탓에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저는 오른손을 치료하러……. 작업 반장이 치료를 받지 않으면 일을 시키지 않겠다고 해서……. 일을 하지 못하면 월면 도시에 정착할 수 없으니까요. 저는 그냥 월면 도시에 집을 얻고 싶어서, 제 통장엔 150만 달러가 있고 앞으로 50만 달러만 더 있으면 부역이 끝나니까 오른손을 수리하면 곧 정착을……."
검사가 내 뺨을 후려쳤다.
"이 새끼야, 그런 사람이 싸움은 왜 해? 벌금이 50만 달러, 당신한테 죽을 뻔한 녀석의 치료비가 90만 달러로 책정됐어. 돈 무서운 줄 아는 사람이 사람을 치나? 여긴 지구야, 무법천지 달세계하고는 달라. 다시 질문한다. 똑바로 대답해."
검사는 똑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들려주었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고 이따금 검사가 내 뺨을 후려치거나 발등으로 내 콧잔등을 가격했다. 그러기를 수십 번 반복하자 검사는 지쳐보였다. 그는 담배를 피우고 오겠다며 취조실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나 역시 내 힘으로 일어서기 힘들만큼 지쳐있었다. 검사 대신 들어온 경관이 나를 등에 둘러업고 경찰서 지하에 있는 독방으로 옮겼다. 경관의 등에서 떨어진 나는 그대로 잠에 빠졌다.
시멘트 바닥의 찬 기운에 놀라 잠에서 깼다. 밤이 되어 독방 안은 달빛이 만든 그림자로 가득했다. 독방의 한 쪽 벽 귀퉁이에 뚫린 작은 창문으로 달빛이 들어왔다. 나는 작은 창문을 통해 지구의 그림자에 가려 저물어가는 그믐달을 바라보았다. 검게 가려진 그림자 속에 제 1 월면 도시가 있었다. 나는 청약통장을 채워 부역을 마치면 제 1 월면 도시에 90제곱미터의 땅을 배정 받을 수 있었다. 그 땅을 다져 작은 집을 짓고 작은 정원을 만들 생각이었다. 정원에는 월면 도시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개량된 꽃과 묘목을 심고 볕이 잘 드는 곳에는 파라솔과 푹신한 안락의자를 놓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구에서 본 달은 너무 작았고 내 집과 정원의 안락의자는 꿈처럼 느껴졌다.
복도에서 간수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검사가 돌아온다면 나는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해 볼 작정이었다. 오른손을 고쳐서 월면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해준다면 두 번 다시 지구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었고 왼손을 팔아서 벌금을 낼 수도 있었다. 문의 감시용 창이 열리고 간수가 독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그에게 검사를 불러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감시용 창을 닫았다. 구둣발이 힘차게 땅을 디디며 반대편으로 멀어졌다.
검사는 오지 않았다. 간수도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었다. 오른손이 심장 박동을 따라 요동쳤다. 마치 오른손을 위해 심장이 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른손의 고통 신호는 더 강하게 머리를 후려쳤다. 나는 쏟아지는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을 주머니에서 꺼내 모두 입에 털어 넣었다. 약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물밑으로 침잠하듯 모든 것이 아득해졌다. 누군가 귓전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오른손을 보라!' 나는 그것이 내 심장의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있는 힘껏 벽에 오른손을 내려쳤다. 시멘트 부스러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른손의 중지가 부러지면서 피부가 찢기고 실린더가 튀어나왔다. '오른손을 보라!' 또 누군가 소리쳤다. 어차피 고장 난 오른손이었다. 다시 벽을 쳤다. 손등 위로 강화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뼈대가 튀어나왔다. 뼈대 옆에서 붉은색 윤활유가 뿜어졌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작은 창으로 들어온 달빛이 벽에 흩뿌려진 피처럼 붉은 윤활유를 따라 흘러서 바닥에 고였다. 오른손은 이미 뭉그러졌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독방 밖에서 간수들이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바스러진 오른손으로부터 볼트와 너트, 전선들과 실린더들이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흩어졌다. 내 오른손은 비로소 제 모습을 찾은 듯 했다. 독방의 문이 열리고 두 명의 간수가 들어왔다. 먼저 들어온 간수가 진압봉을 휘둘렀다. 진압봉이 내 허벅지를 파고들었지만 나는 약기운 때문에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다만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아야 했다. 다른 간수가 내 손에 수갑을 채우려 했으나 산산조각 난 오른손을 보고는 그만두었다. 잠시 후 다른 간수들이 달려와 내게 구속복을 입혔다. 팔이 엇갈려 양쪽 옆구리에 고정되었다. 그러자 간수들은 일제히 진압봉을 휘두르며 나를 무두질했다.
간수들은 실컷 땀을 뺀 후에야 독방에서 나갔다. 나는 누운 채로 시멘트 바닥의 한기를 느끼며 작은 창문을 통해 작은 달을 바라보았다. 문득 치료를 하지 않으면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말라던 작업반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태양풍에 그을리고 노화되어 험상궂은 얼굴이 되었지만 인품은 월면 광산 인부들 중에서 최고였다.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지구에서 보냈다며 내게 카스테라를 나누어 주기도 했으니까, 그는 분명 좋은 사람이다. 나는 그제야 신원보증인으로 작업반장의 연락처를 적은 것을 후회했다. 월면 반동분자인 나의 신원보증인을 통제국이 그냥 둘리 없었다. 지금쯤 통제국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에게 숙식을 제공한 K 역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지구에 온 것을 후회했다.
아침 일찍 변호사가 나를 찾아왔다. 국선변호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내게 별다른 할 말이 없어 보였다.
"김요한씨에게 상해를 입은 그 청년은 월면 통제국 부국장의 아들이더군요. 마약 밀수에 연루되어 있으니 그쪽도 떳떳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렇다고 김요한씨의 폭행죄가 없어지는 건 아니고요. 제 말은 당신을 이적단체 조직원으로 엮어 넣으려는 짓은 하지 않을 거라는 말입니다. 적당한 선에서 무마하려고 할 테니까요. 그런데 자해는 왜 한 겁니까? 지금부터는 그냥 얌전히 재판 받으시고 벌금이나 낸다고 생각하세요. 혐의가 확실해서 재판이라고 해봐야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겁니다."
변호사는 독방의 냉기에 몸을 떨더니 의자에서 일어났다. 독방에 들어온지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나는 달이 사라진 작은 하늘을 올려보았다. 약기운이 사라지면서 지난밤 간수들에게 무두질을 당한 곳이 아파왔다. 나는 온몸에서 전달되는 고통 신호들 중에서 오른손으로부터의 신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독방을 나서던 변호사가 걸음 멈추고 말했다.
"사정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재판을 받고 벌금만 성실하게 내세요. 그러면 빈곤노동자 보호법에 따라 의수 교환에 필요한 돈을 정부로부터 빌릴 수 있을 겁니다. 절대 어젯밤 같은 짓은 하지 마세요."
돈을 빌리면 다시 갚아야 한다. 그동안 월면 광산에서 벌어 둔 돈은 벌금으로 내야하고 앞으로 일하는 돈은 빚을 갚아야 할 것이다. 나는 언제쯤 청약통장을 채우고 부역을 마치게 되는 것일까? 통장을 채울 무렵이면 다시 오른손을 고쳐야한다거나, 이번엔 왼손이 절단된다거나, 혹은 빌린 돈의 이자를 갚느라 또다시 부역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뫼비우스의 띠 위를 바쁘게 뛰어가는 개미와 같았다.
점심을 먹은 후, 간수들이 나를 차에 태웠다. 도착한 곳은 법원이었다. 간수들의 손에 끌려 재판장에 들어섰다. 재판장에는 판사들과 원고측 검사, 그리고 방청석에 열 명의 배심원들이 앉아 있었다. 검사의 맞은편에 아침 일찍 나를 찾아왔던 변호사도 보였다.
내가 피고석에 들어서서 선서를 하자 재판이 시작되었다. 먼저 검사가 일어났다. 그러자 하얀 벽에 프로젝터에서 투사된 사진이 비춰졌다. 검사가 말했다.
"지금 보고 계신 것은 범행 현장에서 수거된 신종 마약, 루나틱입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월면 도시에서 몰래 재배되고 있는 약이지요. 국내에 밀반입된 양이 어림잡아 몇 십 톤은 될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그동안 마약단속 반원들이 이 약의 반입 경로를 추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도, 피고의 입장에선 아주 재수 없는 경우지만, 우연한 사고로 인해 경로가 잡혔습니다. 김요한씨는 의수를 교환한다는 핑계로 지구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밀반입책인 K씨와 접촉한 것입니다. 김요한씨는 공급책인 것이지요. 존경하는 재판장님께 먼저 피고측 변호인의 말이 모두 사실이 아님을 말씀드려야 했군요. 죄송합니다. 피고는 피의자 박원식이 마약을 판매해왔다고 주장하였으나 전혀 근거가 없는 거짓말입니다. 증거가 없을 뿐 아니라 정부 고위 관직의 자제들이 뭐가 부족해서 마약을 팔고 있겠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돈이 필요한 것은 K와 월면 노동자 김요한씨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내가 변호사를 바라보자 그는 눈을 감았다. 재판장이 변호인을 호명했다. 변호사가 일어나 목을 가다듬었다.
"먼저 본 재판은 김요한과 K, 그리고 박원식과 그 동료들 사이에서 벌어진 폭력사건에 대한 것임을 상기시켜드리는 바입니다. 마약 밀수와 관련된 원고측의 발언은 합당한 자료가 부족하므로 납득할 수 없습니다. 또한 마약과 관련된 건은 아직 수사가 필요한 부분이며 성격상 본 심의에서 제외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변호사가 말을 마치자 다시 검사가 발언권을 얻었다. 발언권을 얻은 그는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꺼내 재판장과 변호사에게 건넸다. 서류봉투를 열어본 변호사가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나도 그를 따라 눈을 감았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본 재판이 폭력사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함이고 법의 권위를 지키기 위한 것임을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지금 드린 것은 박원식을 진찰한 의사의 소견서입니다. '동맥 파열'이라고 쓰인 게 보이시죠? 피고는 박원식의 팔을 부러뜨릴 때 정확히 동맥이 지나가는 곳을 짚어냈습니다. 그리고 뼈가 부러지면서 동맥이 뼛조각에 의해 파열되도록 한 것이죠. 소견서에는 우연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쓰여 있을 겁니다. 인간의 손은 조각난 뼛조각이 동맥에 박히도록 조작할 수 있을 만큼 정밀하지 못하니까요. 하지만 의수는 어떨까요? 의수는 기계 팔입니다. 괜히 정밀한 공정에 로봇을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숙련된 사용자라면 의수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정밀한 작업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우주공간에서 크래인을 조종한다든지 하는 일들 말이죠. 피고는 우주공간에서 크래인을 조작하는 일을 하며 의수를 사용하는 일에 도가 터 있었습니다. 따라서 피해자에게 상해를 입히는 순간 피고의 오른손은 살인 무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명백한 살인미수에 해당된다고 판단됩니다."
"억측입니다. 김요한씨는 동맥이 팔의 어디를 지나는지조차 모르는 노동자입니다. 그런 사람이 동맥을 일부러 파열시킬 수 있다는 말입니까?"
변호사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귀도 막고 싶었지만 구속복 때문에 팔을 쓸 수 없었다. 이어서 차분하고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재판장의 목소리일 것이라 생각했다.
"억지 주장인지 아닌지는 저희가 판단하겠습니다. 다른 반론은 없습니까?"
변호사는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재판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재판 결과를 공포합니다. 피고의 폭행 및 살인미수, 마약 밀수 협의가 일부 인정된다고 판단되어 형법 262조 1항과 251조, 마약금지법 1조 4항 마약소지 금지법에 따라 무기징역에 처합니다. 마약 밀수 및 특수 범죄에 관해서는 경찰의 수사 결과에 따라 재심의가 필요하리라 여겨집니다. 존경하는 배심원 여러분들 중에 이의가 있으신 분은 손을 들고 발언권을 얻어주시기 바랍니다. 없으시면 이것으로 2030년 8월 11일, 신길 오피스텔 폭력 사건에 대한 심의를 마칩니다."
재판장이 배심원들에게 지루한 인사를 건네는 동안 누군가 내 팔을 붙들었다. 눈을 떠보니 간수들이 나를 다시 독방으로 데려가기 위해 팔을 붙들고 있었다. 나는 재판의 결과가 믿어지지 않았다. 차라리 꿈이기를 바라며 다시 눈을 감았다. 간수들이 나를 끌고 가는 동안 변호사가 다가와 귓속말을 속삭였다.
"미안합니다. 이적단체 조직원이 될 줄만 알았지 마약 밀수범에 살인자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당신을 악당으로 만들어서 빠져나가려는 심산인 것 같습니다. 재심에서 다시 기회가 있을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를 타고 경찰서의 지하 독방으로 돌아왔다. 내게 족쇄를 채우던 간수가 희망을 버리라고 말했다.
"루나틱 마약의 공급책은 이미 다른 곳에서 검거됐어. 당신과 당신 친구의 이름을 명단에 추가하는 건 숨쉬기보다 쉬운 일이지. 안 됐지만 일이 그렇게 됐네."
이것으로 뫼비우스의 띠는 끊어졌다.
재판이 끝난 후, 나흘 동안 나는 지하 독방에서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밤에는 작은 창을 통해 달을 바라보았고 낮에는 달이 뜨는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믐달은 서서히 지구의 그림자에 먹혀들어갔다. 그리고 내가 지하 독방을 떠나기 전에는 완전히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무월광의 밤이 지나고 나는 달의 '비의 바다'에 위치한 특수 범죄자 수용소로 향하게 되었다. 다시 달로 가기 위해 오른 지구 궤도 승강기에서 K를 만났다.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은 K의 얼굴은 크리에이터로 뒤덮인 달의 뒷면 같았다. 우리는 꽤 오래간만에 다시 만나게 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만남에서 인사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네 명의 간수들이 나와 K를 둘러싼 가운데 K가 내 옆에 앉았다.
"마약 밀매, 살인 교사. 마약 밀매는 그렇다 치고 살인 교사는 대체 뭐야? 제길. 이런 식으로 월면에 정착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는 붓기가 빠지지 않은 입술로 애써 태연한 척 미소를 지었다. 그는 언제 어느 상황에서든 너스레를 떨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내가 오른손을 잃어버린 전쟁터에서 그랬고 생을 마감하게 될 마지막 우주여행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이제 너의 오른손은 필요 없게 됐구나."
간수가 진압봉을 꺼내 들며 잡담을 삼가라고 말했다. 지구 궤도 승강기가 빌딩들의 숲을 지나쳐 하늘로 솟아올랐다. 나는 둥글게 변해가는 지구의 지평선을 바라보며 K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병우(monoeffec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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