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FI

얼터너티브 드림 1

2006년 4월 통권 7호

1

불과 반 년 전이었다. 그랬다. 내 일상이, 그리고 이 세상이 뒤틀어지기 시작한 것은 겨우 반 년밖에 되지 않았다. 기억을 치밀하게 되짚어 보면, 분명 올해 4월 말 무렵. 꼭 그쯤부터 뭔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당시 딱히 변화의 계기가 될 만한 사건 같은 건 일어난 바 없다. 그렇다고 유달리 저지른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문제의 2006년 4월 28일을 전후로 해서 내게 일어났고, 내가 한 일이라곤 모두가 따분하고 그저 그런, 그렇지만 안 할 수는 없는 종류의 일들뿐이었다. 대충 밥 먹고, 늦잠 자고, 지각하고, 퇴근하고, 낄낄거리며 TV보고, 인터넷에서 허우적대고, 새벽까지 게임하고, 하던 대로 섹스하고, 기타 등등 그렇고 그런 일들.

누구에게 해코지를 한 적도 없었다. 호혜를 베풀거나 반대로 후의를 입은 기억도 없다. 굳이 뭔가 특별 비슷한 일을 찾자면 전철 안에서 주운 물건을 몰래 마셔버린 일인데, 그런 일 쯤 때문에 상황이 이렇게 꼬여버린 것이라 생각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 물건은 당고개행 막차, 상계역에서 당고개역으로 넘어가는 마지막 구간에서 내 눈에 들어왔다. 난 사람들 없이 텅텅 빈 열차 맨 앞 칸에 홀로 앉아 졸고 있었고, 부스스 눈을 떴을 때 그건 내 맞은편 좌석에 나뒹굴고 있었다. 당고개 역에서 내리면서 자연스럽게 그건 내 손에 들려 있었는데 - 주인이 없었으니까 당연히 슬쩍 - 덕분에 난 꽤나 횡재한 기분이었다. 겨우 생수 한 병이긴 하지만 그건 아직 뚜껑도 따지 않은 새것이었고, 결정적으로 녀석의 값이 무려 2만원이나 되었기 때문이었다. 물 값 치곤 건방지다. 어떤 미친놈이 이런 걸 2만원이나 주고 산단 말인가. 아무리 몸에 좋다손 쳐도 500원짜리나 2만원짜리나 마시면 오줌으로 나오는 건 매한가지 아닌가?

그래도 비싼 값을 하는지 여타 생수와는 달리 이 녀석은 빛이 투과하지 못하도록 검은색 불투명 플라스틱 병에 담겨 있었고, ‘잠재 에너지 각성을 도와주는 신비의 해저암반수’라는 라벨이 제법 고급스럽게 도드라져 있었다.

성분함량 : 각종 미네랄 및 쿤달리니 각성을 돕는 신비의 케테르 함량 어쩌고 기타 등등

원 수 원 : 일본 요나구니 해역의 최고수심 지역 암반에서 채취한… 어쩌고저쩌고

용 량 : 아마도 800ml

용기재질 : 분명히 페트

유통기한 : 용기 상단의 측면 표기일까지, 라는데 대충 2008년 중순까지였던 것 같고.

수 입 원 : 코스믹 유니온 & 뉴 월드 오… 그리고 뭐였더라?

가 격 : 무려 20,000원 정

낯선 용어에, 물레방아? 어쩌면 강철 테를 두른 수레바퀴 모양의 처음 보는 회사 마크. 자세히 뭔진 몰라도 비싼 거니까 몸에 좋으려니 생각했고, 어쨌든 마셨다. 미적지근한데다 기대와 달리 아무 맛도 없었다. 당연한 거였겠지만, 마시니 헛배 부른 것도 다른 물과 마찬가지. 결국 마지막 몇 모금인가는 마시다 말고 길 위에 쏟아 부었다. 빈 병은 집 앞 버스 정류장에 놓인 종량제 쓰레기봉투 속으로 안착. 사기당한 느낌이 밀려왔지만 곧 잊었다. 내 돈 주고 산 것도 아니었으니까. 집에 들어가선 씻은 뒤 곧장 게임을 했다. 아니, 밥을 먹었던가? TV를 봤던가?

이렇게까지 얘기하고 보니, 수상한 냄새가 나는 듯도 하다. 확실한 건 그 암반수를 마신 4월 28일 이전에는 지금과 같은 기이한 변화는 일어날 조짐조차 없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변화 - 내게 일어난 그 변화가 대체 뭐냐고 성마르게 채근하지는 말라. 읽다 보면 곧 자연히 알게 될 테니까 - 에 그 물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어쨌든 조금이나마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적어도 그날 아침 머리 감을 때 샴푸랑 같이 눈에 들어간 물이나, 양치하면서 삼킨 물, 점심 먹고 식당에서 마신 보리차, 프레젠테이션 끝나고 마신 커피, 잠자기 전 마신 냉수 한 모금 따위와 동등한 정도의 혐의는 부여해야 공정한 거 아니겠는가.

핵심은, 그날 나의 체내로 침습했던 그 많은 물들 중에 과연 어떤 놈이 범인인지 가려낼 방도가 없다는 것이었다. 혹 그날이 아니라 다음날 마신 물중에 문제가 있는 거였다면? 아니, 물이 범인이긴 한 거야? 공기는? 서울 시내 가득한 미세분진은? 초음파, 저주파, 혹은 20HZ에서 20,000HZ 대역의 가청음파는? 전자파는? 환경호르몬은? 직장 상사의 폭언은? 어린 시절 학대당한 경험은?

원인이 무엇이 됐든, 확실한 건 그 불가지(不可知)의 원인으로부터 전개된 모종의 현상이 나를 서서히 변화시키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확실한 것 한 가지 더, 그 변화는 아직 진행중에 있다는 것.

이유 없이 신경질이 치솟다가는, 필요 이상으로 웃었다. 시계 초침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 책을 읽을 수 없었다. 매운 음식을 도저히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주당이던 내가 술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 구토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밤이면 꿈을 꿨다.

꿈이야 누구나 으레 꾸는 거지만, 같은 배경을 한 꿈이 매일매일 이어진다면 그건 평범한 일은 아니리라. 사실 내가 느낀 변화의 핵심이 바로 이 꿈에 있었다. 남녀를 불문하고, 신경이 예민해지는 것쯤이야 달의 기조력 등에 따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꿈을 꾼다는 것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미지의 경험이었다. 그로 인해 조금씩이지만, 나의 일상에는 균열이 가고 있었다. 현실과 환상을 갈라놓던 두터운 벽에 금이 가고 있는 것인지 - 아니면 혼연일체가 되어 있던 현실과 환상이 이제야 박리되고 있는 것인지는 모호했지만 말이다.

어쩌면 이 모든 일들의 원인이, 단순히 내가 미쳤기 때문이라고 결론짓는 것이 합리적인 설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신경과민이니 초기 정신분열증세니 뭐니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난 누가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미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왜냐고요? 적어도 지루하진 않잖아.

난 꿈을 꾸기 시작하던 초창기, 항상 이렇게 자랑하고 싶었다.

보라. 나의 이 육중해진 팔다리를.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뗄 때마다 느껴지는 이 중량감은 또 어떠한가. 점점 회색빛을 띠며 두터운 가죽으로 화해가는 피부는 마음을 든든하게 해준다. 머리는 갈수록 커져갔고, 귀가 점점 자라나 뺨을 덮었다. 조금씩 길어지던 코는 이미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턱 아래까지 닿을 수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꿈속의 나는 서서히 코끼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뭐, 관점을 달리해서 본다면 급격히라고 해도 별 상관은 없을 것이다. 이전에 코끼리가 되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떤 수식을 붙이더라도 그건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판단이 될 테니까.

나는 나 자신의 몸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슬금슬금 잇몸을 뚫고 자라 나오려는 엄니의 감촉부터, 강건한 뼈대, 굳건한 힘줄, 튼튼한 혈관, 큼지막한 내장기관의 약동까지도. 나는 완벽히 나였다.

“그렇게 생생하게 꾸는 꿈을 자각몽이라고 부르지 않냐?”

“무슨 몽?”

“무식하기는. 넌 자각몽도 모르냐?”

희원은 돌솥비빔밥을 먹으며 내 얘기를 듣곤 핀잔을 주었었다. 평소엔 머리가 빈 듯하지만 관심 분야에서만큼은 제법 인텔리 태가 나는 그였다. 나는 이후 이어진 희원의 잘난 척을 한 귀로 흘려 넘겼었다. 그러나 네이버 백과사전과 지식인을 검색해 알아본 결과 그의 말은 얼추 믿을 만한 정보였음이 밝혀졌다.

자각몽(自覺夢) : 자신이 꿈을 꾸고 있음을 인지하는 상태에서 꾸는 꿈. 수면자가 꿈속 자신의 행동이나 상황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는 통제력을 가지나, 완전한 장악력을 가질 수는 없다. 우연히 꾸게 되는 경우가 많지만 의도적으로 자각몽을 꾸기 위한 훈련을 통해 경험하는 것도 가능하다. 티베트 밀교나 힌두교 등 일부 종교에서는 자각몽 상태를 신비주의적으로 보기도 한다. 그들은, 꿈에 대해 완전한 장악력을 지니는 자는 현실에 대해서도 그러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자각몽을 꾸려고 일부러 노력하지 않아도 매일 밤 자각몽을 꾸게 되고, 그 꿈속의 사건과 무대까지 매일 이어서 꾼다는 경우 - 바로 내 경우 - 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았다.

당시엔 참으로 막막했다. 결국엔 차차 자각몽과 그에 관련된 현상들에 대해 정보를 얻고, 실제로 그것들과 맞부딪치며 준 전문가 수준에까지 이르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내가 겪은 경험들은 기이하고, 환상적이고, 파국적이었으며, 절망적인 동시에 격렬했다. 반년여 동안의 그 모든 과정을 상세히 전달할 자신은 없다. 그러나 주마간산 격으로나마 따라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다음으로 이어지는 나의 얘기를 들어주기 바란다.


2

그것은 아마도 내가 자각몽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지 약 26일쯤 지난 무렵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날 꿈에선 이후 사태가 전개되는 데 아주 중요한 발화점이 되는 요소를 발견했다. 물론 당시엔 그것이 가지는 의미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실상 그것이야말로 변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았다는 것을 훗날 이해하게 되었다. 그날 꿈은 사냥터에서 다시 깨어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날 나는, 꿈속으로 돌입하자마자 비등점 바로 아래에서 부글거리는 듯한 가벼운 분노가 심장에서 핏줄기를 타고 전신으로 퍼지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 전날의 꿈에서 젊은 인간 한 마리를 때려 죽였었고, 그 고기를 반쯤 먹다가 깨어 현실로 돌아갔었다. 하지만 다시 꿈속으로 돌아왔을 때, 그 자리엔 핏자국과 뼛조각 몇 개만 남아 있을 뿐 사체가 온데간데없었던 것이다. 아마 내가 현실로 돌아간 사이 누군가 다른 굶주린 인간이 가로채 간 - 녀석들은 서로를 먹는다 - 것일 터였다.

사실 처음 며칠 동안은 나도 이 꿈속에서 내가 무얼 할 수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었다. 여타 꿈에서 그랬듯 자유의지를 망각한 채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피동적인 인식에 머물러 있었다고 할까. 하지만 같은 꿈이 반복되면서 나는 이곳 필드(Field)에서 사냥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곧 그것을 능동적으로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상상할 수 있는가? 코끼리 인간이 되어 광포한 사냥을 즐기는 기분을.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인간을 죽여서 먹었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하진 마시라. 그곳은 다른 세계였다. 그곳은 나의 꿈이고, 거기서 나는 코끼리 인간이었다. 당신들과 달리, 그곳에서 난 의문의 여지도 없이 인간이란 열등하고 야만적인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선험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녀석은 <짐승>이었다.

배가 갈라진 채 죽은 여자의 시체가 가로누워 있었다. 그리고 녀석의 옆에는 깨어진 알 껍질과, 성숙되다 말고 알에서 끄집어내진 - 이것이 특기할 만한 점인데, 이 놈들은 태생(胎生)이 아닌 난생(卵生)이다 — 태아의 시신이 반쯤 뜯어 먹힌 채 나뒹굴고 있었다. 배를 채운 녀석은 발가벗고 나무등걸에 기댄 채 침을 흘리고 있었고, 오른손은 하체의 성기를 붙들고 위아래로 흔들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자위를 하며 괴성을 지르고 머리를 나무 등걸에 짓찧어대는 그 <인간>의 눈동자에선 이성의 불꽃이라곤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절정에 도달해 막 사정하기 시작한 그 짐승의 목뼈를 - 우두둑 - 망설임 없이 내리쳤고, 녀석은 원시적 오르가즘의 정점에서 사망했다.

(C) 조경아

상기와 같이, 존엄성과 위엄은 인간에게 있지 않았다. 바로 나, 코끼리 인간에게 있다. 그래서 나는 기꺼이 인간을 사냥할 수 있었다. 현실세계에서 인간이 그러하듯 말이다. 이빨을 딱딱 부딪치면서, 나는 새로운 사냥감을 찾아 어슬렁어슬렁 걷기 시작했다. 감히 내가 잡은 먹이를 가로챈 건방진 녀석 - 아마도 또 다른 인간 - 과 외나무다리에서 마주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당시 나는 아직 완전히 코끼리가 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네 다리로 걷지는 않았다. 직립보행이 어색해지긴 했어도 걷고 뛰는 덴 무리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손발가락이 짧고 굵어지긴 했지만 손을 오므려 물건을 쥘 만큼은 됐다. 무기를 하나 들면 제격이겠다. 그렇게 생각하자, 어느새 내 왼손에는 무지막지한 강철 도리깨가 쥐어져 있었다. 나를 만족시키는 이 꿈속의 기묘한 원칙 중 하나. <생각이 곧 물질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네이버 지식인에 나와 있던 설명처럼, 아무리 꿈속의 물질세계라곤 하지만 내가 완전한 장악력을 지닐 수는 없었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생각만으로 내 오른편으로 흐르고 있는 저 물줄기를 막아버릴 수는 없다. 하지만 도리깨를 만들어낼 수는 있다. 노려보는 것만으로 바위벽에 터널을 뚫을 순 없다. 그러나 암벽등반용 장구는 손에 넣을 수 있다. 뭐 그런 정도.

나는 발을 내딛을 때마다 느껴지는 내 육체의 기분 좋은 중량감을 만끽하면서 강변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바람이 시원했다. 흐응. 내 먹이를 가로챈 녀석이 어디로 갔는지 어렴풋한 예감이 다가왔다. 그 건방진 녀석은 젊은 인간과 나머지 시체들을 포식한 뒤, 오른편으로 보이는 갈대숲에서 개울물을 마셨다. 그리고 나선 어디로 갔지? 내면에서 즉각 답이 떠올랐다. 왼쪽. 방향을 틀어서 왼쪽으로 쭈욱.

그 방향으로는 산이 있었다. 수락산이었다. 현실세계의 수락산과 똑같지만, 어딘지 모르게 다른 느낌.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보다 원시적인 느낌이랄까. 그러고 보면 내가 지금 밟고 있는 이 땅도 원래는 아파트가 들어서 있던 상계동 자리지만, 복개되지 않은 하천이 흐르고 풀숲과 나무가 무성했다. 마치 문명 이전의 서울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 가상의 서울엔 도로도, 승용차나 버스도, 전철도, 가스관도, 전봇대와 전선도, 광케이블망도, 기지국도, 아파트도, 빌딩도, 모텔도, 유흥가도, 병원도, 군대도, 국회의사당도, 우매한 대중도, 정치인도 없었다. 이 전인미답의 처녀지엔 오로지 나, 꿈꾸는 코끼리 인간만이 가벼운 흥분과 분노를 느끼며 활보하고 있었다. 그곳은 나의 영토였다.

나는 슬슬 속도를 높이며 달리기 시작했다. 거침없이 산을 오르며 적의 흔적을 쫓았다. 성난 코끼리의 무지막지한 돌파. 가로막는 나무는 쓰러뜨렸고, 수풀은 짓밟고 넘었다. 개울을 건너 절벽을 지나 비탈을 올랐다. 그리하여 수락산 중턱에 펼쳐진 널찍한 바위언덕에 도달했을 때, 나는 녀석과 대면할 수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멈칫, 녀석의 몸이 굳었다. 나 역시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놀라움. 나는 당시까지 약 4주 동안 홀로 탐험한 그 꿈속에서, 나 외에 살아 움직이는 것은 인간밖엔 보지 못했었다. 다른 무언가를 불러내고자 노력했지만 그것은 내 의지 밖의 일인지 아무런 변화도 이끌어낼 수 없었다. 그저 몸이 점점 코끼리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희열과, 사냥의 쾌감에 만족했을 뿐. 하지만 드디어, 문제의 그날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뭔가 다른 놈이 모습을 드러내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렇다. 내가 쫓던 <적>은 예상과 달리 인간이 아니었다. 이것은 꿈에 대한 내 의지의 지배력이 보다 강해졌다는 뜻이었을까? 녀석은 곰이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곰 인간, 혹은 곰이 되어가는 인간. 혹시 나와 같은? 흥, 그래 봐야 꿈속의 존재. 녀석은 나와 달리 허구에 불과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곰 인간은 인간들의 둥지를 습격하여 포식 중이었다. 지푸라기와 나뭇가지로 만든 둥지에는 부화를 앞둔 알들이 깨져 선혈이 낭자했고, 곰은 늙은 수컷 한 마리와 젊은 암컷 한 마리의 골통을 양손에 붙들고 부딪쳐 깨고 있던 참이었다. 멍하니 서 있던 곰 인간은 손에 들린 깨진 머리통에서 피와 함께 뇌수가 흘러내리자, 얼른 입을 벌려 후르륵 빨아먹은 뒤 거칠게 시체를 내팽개치곤 나를 향했다.

덩치는 엇비슷했다. 그러나 나는 무기가 있었고 놈은 없었다. 시시한 인간이 아닌 제대로 된 사냥감이 나타났다는 사실이 나를 기쁘게 했다. 딱, 딱! 이빨을 부딪치곤 쿵 - 한 발을 내딛어 위협했다. 피가 끓어올랐다. 녀석도 이빨을 드러내고 털을 곤두세우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 있으리.

뿌우우우 - ! 내가 포효를 내지르며 쇠도리깨를 휘둘러 달려드는 순간, 녀석도 흉성과 함께 거대한 앞발을 휘두르며 마주 달려 들어왔다. 녀석은 무식하게도 떨어지는 쇠도리깨를 오른쪽 어깨로 받아내며 왼쪽 앞발로 내 머리를 후려쳤다. 녀석은 어깨에 받은 충격으로 휘청거리며 한쪽 무릎을 꿇었고, 나 또한 순간적으로 머리가 진탕되는 것을 느끼며 반대 방향으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녀석과 나는 전혀 충격을 받지 않은 것처럼 동시에 일어나며 돌진, 서로의 가슴팍에 육중한 발길질을 날렸고, 마찬가지로 동시에 타격을 입히며 뒤로 널찍이 나동그라져 굴렀다. 흙먼지가 자욱이 피어오르는 것보다, 녀석과 내가 튀어 일어나 서로를 노려보는 것이 더 빨랐다. 강인한 투지, 놀라운 생명력.

오기가 치솟았다. 건방진 새끼… 감히 꿈 주인과 맞먹으려 들어? 녀석과 나는 타오르는 눈길로 서로를 노려보며 천천히 옆으로 걸었다. 서로에게서 눈동자를 뗄 수가 없었다. 쇠도리깨를 움켜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만만치 않은 상대임은 대번에 파악되었으나, 공포는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리 실제와 같이 생생히 느껴지는 꿈일지라도 꿈은 꿈. 결코 현실이 아니므로 죽거나 다쳐도 그만이다. 다음날 또 꾸면 되니까. 말하자면, 이건 게임 같은 것이다. 아주 현실감 넘치는.

천천히 옆으로 걸으며 기만동작. 기만동작. 다시 한 번 기만동작. 그러나 녀석도 나도 넘어가지 않았다. 별 수 없이 정면충돌이었다. 서로 유지되고 있던 간격은 단 한 걸음에 무너졌다. 녀석은 무지막지한 앞발을, 나는 살벌한 쇠도리깨를 내리찍으며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이번엔 녀석의 앞발이 마음대로 내 머리를 강타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셈이었다. 우선 녀석의 미간을 내리찍을 것처럼 쇠도리깨를 휘둘렀다. 그리곤 그것을 살짝 빗겨 올려 녀석의 앞발을 쳐내는 것이 둘째. 그리고 그 반동으로 다시 미간을 노려 적중시키는 것이 셋째. 대갈통이 깨졌건 안 깨졌건, 녀석이 쓰러진 뒤엔 한 번 더 미간을 내리찍는다. 여기까지가 넷째. 이상, 향후 전투계획 개요.

그러나, 그 찰나의 순간. 무서운 속도로 내 머리로 떨어져 내리는 녀석의 앞발이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곤 이내 마치 슬로모션을 보는 것처럼 느려졌다. 나의 쇠도리깨가 곰 인간의 미간을 직격해 들어가는 모습 또한 필름을 늘린 듯 천천히 보이기 시작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눈앞의 영상은 그치지 않고 점점 느려졌다. 그리곤 돌연 모든 사물이 마치 옆으로 잡아 늘이듯 비정상적으로 퍼져나가며 시야가 암흑으로 물들었고, 천지가 붕괴하는 듯 연속적으로 울려대는 굉음만이 어둠 속을 가득 메웠다. 갑작스럽게, 모든 것의 붕괴가 찾아왔다.

그리곤 눈을 떴다. 침대, 이불 속이었다. 천장이 보였다. 소리가 들렸다. 째르르르르릉 - 왼쪽 귀에 밀착된 알람시계가 우악스럽게 울려대고 있었다. 세상이 붕괴되는 소리.

나는 미친 듯이 울고 있는 알람시계를 신경질적으로 쳐냈다. 코끼리 인간. 곰 인간. 쇠도리깨. 깨어진 알과 흥건한 피. 흘러내리는 뇌수. 그리고 알람시계.

침대 밑에 나동그라진 알람시계는 계속 성난 아기처럼 억척스럽게 울어댔다. 가슴 깊은 곳에서는 견딜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리고 그 분노는 그날 종일 내 안을 가득 메운 채 가라앉지 않았다. 회를 거듭할수록, 꿈속에서의 감정이 점차 강렬하게 현실에 여운을 남기기 시작하고 있었다.

곰 인간 - 타인 - 과의 조우.

당시엔 몰랐지만, 그것이 바로 파멸의 수레바퀴가 구르기 시작했다는 최초의 징후였다.


3

첫 만남 이후 며칠간은 더 이상 꿈속에서 곰 인간을 만나볼 수 없었다. 놈의 목을 내 손으로 꺾기 위해 혈안이 되어 놈을 찾았지만, 도대체 놈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의도와는 달리 녀석을 만나기 전과 마찬가지로 평화로운(?) 인간사냥의 나날들이 한동안 이어졌고, 나는 수락산 일대와 상계동 부근을 넘어 노원 일대까지 나의 행동반경을 넓혀갔다. 가는 곳마다 산은 더욱 크고 우거져 있었으며 물은 훨씬 맑고 생기가 넘쳤다. 모든 지형지물은 거의 그대로였으나 보다 원시적 활력을 과시하고 있다는 점이 달랐다. 그리고 전술했다시피, 이곳 꿈속의 서울에선 문명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비록 인간만 부지런히 잡아 죽이고, 먹는 나날이 이어졌지만, 나는 결코 곰 인간을 잡는 일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 건방진 녀석을 찾아 작살을 낼 요량으로 노원 주위를 이 잡듯 수색했고, 직관과 물증을 적절히 배합해가며 끊임없이 녀석의 흔적을 쫓았다. 꿈을 거듭하면서, 희미하긴 했지만 놈의 흔적을 잡을 수 있었고, 점차 노원 부근을 벗어나 계속 행동반경을 넓혔다. 그리곤 현실 세계에서라면 4호선 라인이 지나갔을 자리인 방학동, 창동 근방을 지나 쌍문동까지 갔는데, 거기에서 녀석의 흔적을 놓치고 말았다. 어찌된 일인지 반사적으로 떠오르던 예감도 그 부근에 도달하자 더는 떠올라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영 수확이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약이 오를 대로 오른 나는 인간이나 더 먹으러 개울가를 뒤지고 다니다가, 뭔가에 이끌리듯 자그마한 소나무 숲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거기서 기이한 놈들의 싸움을 목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곰 인간의 존재를 발견한 것만큼이나 의미심장한 사건이었으나, 당시에 나는 이것 역시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었다.

한 녀석은 늑대인간이었다. 하지만 놈은 강대한 야성으로 주위를 위압하는 전통적인 늑대인간의 모습과는 약간 거리가 멀었다. 녀석은 마치 평범한 인간에서 이제 막 늑대인간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처럼 털도 듬성듬성 나 있었으며 손발톱이 그리 크지도, 날카롭지도 못했다. 그래도 샛노랗게 물든 동공과 제법 길쭉이 삐져나온 송곳니, 질질 흘려대는 침만은 그럴 듯 했다. 허나 그마저도 상대방에게 그다지 큰 위협이 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그 늑대인간을 상대하고 있는 녀석은 그보다 조금 더 황당했다. 전신에 강철 슈트를 입은 채 양손에서 삐져나온 플라스마 소드를 휘두르는 거구의 외계인. 파랗게 인광을 발하는 쫙 찢어진 눈하며 우둘투둘한 파충류의 피부, 그리고 말이나 염소처럼 역으로 굽어 있는 무릎관절. 영락없는 질럿(Zealot)1) 이었다. 다만 이 녀석도 무지막지한 돌파력을 자랑하는 최종단계의 질럿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알 방도가 없었으나, 나는 직관적으로 녀석의 수준을 알아챌 수 있었다. 녀석은 발업도 되지 않은 상태였고, 어택 0, 디펜스 0, 쉴드 0의 그야말로 갓 게이트에서 뽑아낸 애송이 질럿이었던 것이다.

놈들은 내가 근처에 와서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까맣게 모른 채 처절한 사투를 전개하고 있었다. 이놈들은 곰 인간보다 약하다. 서투르다. 나의 예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고, 실제로 놈들이 싸우는 모양새만 봐도 나는 그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놈들의 상태는 마치 갓 코끼리로 변모하기 시작하던 초기의 내 모습과도 흡사한 분위기를 풍겼다. 지금의 나라면 다가가 손쉽게 둘 모두를 제압해 포식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들었다.

그러나 난 그렇게 하지 않았다. 손쉽게 놈들을 때려죽이느니, 놈들의 치고 박는 모양을 구경하는 것이 더 흥미롭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놈들의 싸움을 구경하는 건 독특한 재미가 있었다. 마치 투견싸움이나 투계싸움을 구경하는 것과 비슷하달까. 놈들의 전투기술은 훌륭했다. 투지가 넘치고 동작은 기민했으며, 타격은 강렬하고 방어는 유효적절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내 눈엔 하찮게 보였다.

녀석들은 치열하게 싸웠고, 결국 질럿의 플라스마 소드가 늑대인간의 목구멍을 꿰뚫음으로써 승패가 결정났다. 하지만 질럿도 무사하진 않았다. 오른쪽 허벅지 부분의 강철 슈트가 깨지고 우그러져 푸른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으니까. 파란색 피. 어떤 맛일까? 구경을 마친 나는 성큼 발을 내딛어 수풀 밖으로 나아갔고, 고개를 들며 거칠게 포효했다. 뿌우우우 - !

놈은 나를 발견했다. 그리곤 내 위치를 가늠하자마자 절뚝거리면서도 추호의 망설임 없이 플라스마 소드를 휘두르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나 역시 놈을 향해 돌진했다.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나도 그렇고 곰 인간도 그렇고 이놈들도 그랬다. 이 꿈속의 놈들은 왜 하나같이 이렇게도 투쟁적인 것일까? 더 생각할 여유도 없이 충돌의 순간이 다가왔다. 그 무모한 질럿의 몸통을 들이받아 날려버렸다. 멈추지 않고 달렸다.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무섭게 나뒹구는 놈을 쫓아가 무참히 짓밟으면서, 나는 나 자신이 어느새 네 다리로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밟고 지나갔고, 방향을 선회하여 되돌아와 다시 한 번 놈의 온몸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두 앞다리를 들어올렸다가 일거에 내리찍었다. 내리찍었다. 내리찍었다. 그 압도적인 파괴력 앞에선 프로토스의 기술력으로 만들어낸 장갑도 무력했다. 강철슈트를 박살내자 짓뭉개지고 너덜너덜해진 녀석의 뼈와 살이 드러났다.

허겁지겁 그 살을 포식했다. 녀석의 파란 피에서는 어릴 때 먹었던 한약 냄새가 났다. 녀석을 다 먹은 뒤 늑대인간의 시체마저 다 뜯어먹고 우뚝 섰을 때, 나는 얼마 전만 해도 갓 자라나기 시작하던 나의 엄니가 어느새 입 밖으로 50센티미터 이상 자라나와 그 날카로운 끝이 하늘로 향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자랑스럽게도, 이제 완전히 네 다리로 굳건히 서 있었고 보다 육중한 몸체를 가진 한 마리 거대한 코끼리가 되어 있었다.

이 꿈속의 또 다른 공식을 깨달은 것이 바로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싸우고, 죽이고, 먹으라. 그리하면 진화하리라. 더욱 강대해지리라.> 이것은 마치 일종의 온라인 게임의 룰 같은 것이었다. 몹을 사냥하거나 플레이어를 사냥하면 경험치를 얻고 레벨이 오르는. 대체 이러한 룰은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일까? 단지 나의 뇌가 만들어낸 조화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다면 왜 나 스스로가 이것을 통제할 수 없는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꿈속에서는 그렇게, 야만적인 승승장구를 거듭해갔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의 내 일상은 조금씩 망가져가고 있었다. 걸핏하면 가족들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명령을 하기 일쑤였고, 식탐이 비정상적으로 강해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부모님과 여동생은 그런 날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단지 신경이 날카로워졌을 뿐이라고, 조금 요양이 필요할 것 같다고 얼버무렸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가족들은 나의 정신상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꿈 이야기를 해야 할까? 그럴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날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며 오랜만에 무당을 불러야겠다는 둥 굿을 해야겠다는 둥 수군거리는 판에, 그랬다가는 할머니 대에서 끊긴 신줄을 내가 이어받아야 된다는 소리가 나올 판이었으니까.

회사에 나가서도 나 스스로를 통제하는 것은 어려웠다. 나는 월례회의 시간에,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졸음을 어쩌지 못하고 엎드려 잠들어버렸고, 막 꿈속으로 접어들려는 찰나에 나를 깨운 상사를 벽으로 밀어붙여 죽일 듯 목줄기를 틀어쥠으로써 부서를 발칵 뒤집어놨다. 직장 동료들도 나를 슬슬 피했고, 한동안은 회식 자리에 나가기도 어려워졌다.

결국 제대로 얘기를 나눌 사람은 희원 밖에 없었다. 그는 나의 꿈 얘기를 처음부터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그 개연성을 인정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는 희원을 만날 때면 나의 불안정한 정신상태에 대해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희원은 그것을 태연히 받아들였다. 지금은 비록 전공과 관계없는 출판 일을 하고 있지만, 한때는 열정적인 심리학도였다는 점도 나와, 나를 둘러싼 정황들 자체를 그가 수월하게 받아들이는 데 큰 보탬이 되었으리라.

확실히 나의 얘기는 희원에게 지적인 자극이 되어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마치 학부시절로 돌아간 듯 들떠 있었으며, 여기저기서 자료를 모으며 나름대로 나의 상황을 해석하려 시도 중이었다. 내가 희원에게 늑대인간과 질럿의 등장에 관해 설명해주자, 그는 가만히 얘길 듣고 나선 내게 이런 이야길 들려주었다.

“혹시 ‘돌고래 부르는 사람’이라고 들어봤어?”

“글쎄. 못 들어봤는데.”

“좀 특이한 얘긴데 말이야. 왠지 너랑도 관련이 있을 것 같은 아이템이라서 말이지.”

그러면서 시작된 희원의 이야기는 꽤 길었지만, 적당히 간추리자면 대충 이러했다. 그 이야기는 <섬 생활>(Pattern of Islands, 1952)이라는 자서전 속에 등장하는 일화였다.2) 그 책을 쓴 사람은 남태평양의 길버트 제도에서 토지 감찰관 노릇을 했던 아서 프랜시스 그림블이란 영국인이었는데, 1914년부터 5년간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겪은 특이한 사건들을 책을 통하여 담백하게 묘사했다고 한다.

그 그림블이란 사람은 그곳 섬의 키티오나라는 늙은 추장과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어느 날인가는 추장이 그림블이 너무 말랐다며 돌고래 고기를 좀 먹을 것을 권했는데, 돌고래 고기를 어디서 얻을 수 있느냐고 묻자 추장은 아랫마을에 살고 있는 자신의 사촌이 대대로 이어져오는 <돌고래를 부르는 사람>이라고 말해 주었고 한다.

그림블도 그곳 섬의 샤먼들은 일종의 마법으로 돌고래를 해변으로 불러오는 능력을 지녔다고는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그것이 도구를 사용하는 일종의 속임수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추장의 말에 따르면 엉뚱하게도 그 마법은 특정한 꿈을 꿀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샤먼이 이 꿈을 꾸는 연습을 해서 능력이 갖춰지게 되면, 꿈속에서 그의 영혼이 신체를 떠나 <돌고래인>들을 찾아가 마을로 와서 성찬을 먹고 춤을 추도록 권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돌고래들이 해변에 도착하면 재빨리 꿈속에서 돌아와 부족들에게 알려 돌고래들을 마중 나간다고 했다.

실제로 <돌고래를 부르는 사람>은 그림블에게 그것을 보여주기로 했다. 약속된 당일 그 샤먼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두막에서 꿈을 꾸기 위해 잠들었다. 그리곤 한참 뒤 돌고래들이 왔다고 소리치며 발작을 했고, 기를 쓰고 일어나더니 천천히 해변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추장과 그림블을 비롯한 마을 사람 천여 명이 모두 그 뒤를 따라 해변으로 향해갔다. 마침내 해변에 도착했을 때, 돌고래들은 이미 껑충껑충 뛰면서 빠른 속도로 모래사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돌고래들은 얕은 물까지 들어와 마치 소함대처럼 의젓하게 정박했고, 마을 사람들은 해변에 서서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듯 말하며 그들을 환영하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물 속으로 들어가 돌고래들을 껴안아 뭍으로 밀었다. 그리곤 샤먼의 신호에 의해 일제히 그들을 들어올렸고, 질질 끌다시피 모래사장으로 옮겨왔다. 여자와 아이들은 주위를 돌며 꽃장식을 들고선 리듬에 맞춰 춤을 추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돌고래들은 아주 평화로운 표정을 지으며 아름답고 위엄에 찬 모습으로 뭍에 안착했다. 돌고래들이 마치 승리를 얻은 듯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편안히 휴식을 취하는 그때, 주민들의 태도는 돌변했다고 한다. 주민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하늘이 찢어질 듯한 새된 목소리로 비명을 질러대며 펄쩍펄쩍 뛰거나 거만한 자세를 취했고, 꽃장식을 벗겨내 움직이지 않는 돌고래들의 몸통을 향해 던져댔다. 그림블은 이 광경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자만심과 경멸이 뒤섞인 격정의 폭발로 묘사했다고 한다.

그리곤 주민들은 돌고래들을 꽃장식과 함께 남겨둔 채 집으로 돌아갔다. 뒤에 바닷물이 빠져나가 돌고래들이 진퇴양난에 빠져 바싹 말랐을 때, 남자들이 칼을 들고 해변으로 몰려가 돌고래들을 학살했다. 그날 밤 쿠마 마을에선 향연과 춤판이 벌어졌고, 그림블은 돌고래 고기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차마 그것을 먹지는 못했다나.

흥미롭기도 하고, 오싹하기도 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다 듣고 난 뒤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물었다.

“재밌네. 그렇지만 내 꿈이랑은 별 관련이 없잖아? 나보고 꿈에서 돌고래라도 불러오라는 거야 뭐야.”

“뭐 그런 건 아니지만… 네 꿈 못지않게 특이한 꿈 아니야? 꿈속에 가서 돌고래 인간들을 초대했다잖아. 그럼 꿈속에서도 현실에 대한 의식이 명확히 있었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그 돌고래 불러오는 꿈인지 뭔지도 자각몽일 거란 얘기지.”

“거기서 접점이 발생하긴 하는데… 그래도 어려운데.”

“내 얘긴 이거야. 혹시 알아? 네 꿈에서도 돌고래 불러오기처럼 현실과 연결될 수 있는 여지가 있을지도 모른단 거지.”

꿈과 현실과의 연결. 곰 인간. 질럿. 늑대인간. 그랬다. 지금까지 계속 그래왔던 것처럼, 나는 결정적인 단서 앞에 직면하면서도 그게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아니, 당시엔 그것을 해석하기엔 정황이 무르익지 않았으므로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그날 희원이 제시했던 그 키워드는 이 대변혁의 과정에서 핵심이 되는 중대한 키워드 중 하나였고,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는 사건을 겪게 되었다.


4

희원이 다방면으로 알아봐 주고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희원에게만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혹 제도권 의학에서 일말의 힌트나마 얻을 수 없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정신과에서 열어놓은 인터넷 상담 게시판을 서너 군데 찾아봤다. 나의 상태를 꼭 고쳐야겠다거나 견디기 힘들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도리어 이 상태를 즐기고 있었고, 꿈속에서 얻은 또 하나의 세상을 스스로 박탈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만, 알고 싶었다. 이 기이한 시스템의 메커니즘을. 그것이 촉발된 원인을. 이 모든 일들의 숨겨진 전말을.

나는 비공개 게시물을 통해 세부를 제외한 대강의 사건 배경과 증상을 설명했고, 몇 군데에서는 답장을 받아볼 수 있었다.

1. …님께서 질문하신 내용의 요지는 한 달 이상 꿈을 꾸고 그것이 무척 생생하며, 아침에 몹시 피곤하고 졸리다는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꿈의 내용이나 횟수 및 그에 대한 회상의 정도는 개인차가 많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규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몽이나 생생한 꿈을 꾼다는 것은 우울증, 불안장애, 히스테리를 비롯한 다양한 정신과적 장애나 급만성 스트레스 장애, 약물효과 등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나타날 수 있고 나르코렙시나 수면무호흡, 가위눌림 등과 같은 특정한 수면장애에서도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문의하신 글에서 부수적인 다양한 증상에 대한 납득할만한 설명이 없어 단정 지을 수는 없으나, 문득 쏟아지는 심한 졸림과 히스테리 증상 등이 수반된다면 나르코렙시의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내원하셔서 수면의학을 전공하시는 전문의와 상의…

이것은 강남의 유명하다는 정신과에서 온 회신이었다. 나르코렙시… 해석하면 기면증? 찾아보니 시도 때도 없이 잠이 쏟아지는 병이란다.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게다가 내가 그렇게 강조한 자각몽의 ‘연속성’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패스.

2. …현대사회의 삭막함과 경쟁이 주는 스트레스로 인한 반감으로 동물성과 인간성이 반전된 세계를 창조하는, 무의식의 자연스런 작용입니다. 같은 꿈이 이어지는 것은 흔하지는 않지만 있을 수 있는 일로, 일시적인 현상이므로 곧 사라질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자각몽은 병증이 아니고, 매회 같은 배경이 이어진다는 것은 특이하긴 하지만 큰 문제가 있는 증상이라곤 보이지 않습니다. 꿈을 꾸고 싶지 않으시면 일정 분량의 수면제 처방으로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되며, 감정적으로 격렬해 지는 증상은 약물 처방으로 완화할 수 있으니 한 번 내원하셔서 치료를…

모 대학병원 정신과로부터의 회신. 일반적인 일이라고? 큰 문제가 없다고? 수면제나 먹으라고? 더 들을 것도 없었다. 여기도 패스.

3. …서면 진술만으론 자세한 도움을 드리기 어려우니, 일단 한 번 내원하셔서 진찰과 상담을 받으시길 권합니다. 예약을 위한 폐 병원의 전화번호는…

서초구에 위치한 모 병원. 가타부타 해설도 없이 간단 담백한 답신이 오히려 더 신뢰감을 주었다. 그래서 찾아갔고, 상담과 정신분석 결과 뚜렷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내가 가벼운 히스테리 상태에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경구 또는 혈관을 통해 약물을 투입했는가 여부도 검사를 했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 음성. 그렇다면 원인은 약물 따위의 외부요인이 아닌 나 자신의 내면에 있다는 소리였다. 적어도 현대 신경정신의학에 따르자면.

이어 수면패턴 검사와 뇌파검사도 실시했는데, 여기선 그래도 제법 내 증상에 맞게 납득할만한 결과가 나왔다. 먼저 수면패턴 검사에서는 일반인에 비해 두 배에 가까운 REM—급속안구운동—수면 상태가 반복되고 있음이 밝혀졌다. REM수면 상태를 꿈 수면이라고도 부른다는 것을 생각하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결과라 하겠다.

뇌파도 마찬가지였다. 잠이 들었을 때 검출된 나의 뇌파는 정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깊은 잠을 잘 때 나타나야 하는 델타파가 수면 중 전혀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에 잠을 자는 내내 두 가지 패턴의 뇌파만이 검출되었는데, 그것은 꿈을 꾸거나 몽상에 빠져 있을 때 나타나는 세타파. 그리고 바쁘게 움직이거나 불안할 때 자주 나타나는 베타파였다. 잠자는 시간의 대부분을 자각몽으로 보내는 나의 상태를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설명해주는 결과라 하겠다.

그럼 낮 동안의 뇌파는 멀쩡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애석하지만 비정상. 깬 상태에서 활동적으로 움직일 땐 알파파와 베타파가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나의 경우엔 아니었다. 히스테리 증상이 일어날 때는 숙면을 유도하는 델타파가 발생하고 있었고, 그 외 대부분의 시간엔 꿈을 꾸는 상태인 세타파가 약하게 지속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깨어있는 동안에도 꿈을 꾸는 뇌파라니.

낮 동안 나의 뇌가 그려내는 델타파와 세타파의 교차곡선. 왜 그렇게 꿈속 감정의 여운이 깬 뒤까지 길게 남아있었는지, 왜 그리도 신경이 날카로웠었는지, 문득 문득 왜 그렇게 잠이 쏟아졌는지도 대충 설명이 된 셈이었다.

하지만.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뇌파 분석을 통해선 증상이 나타나는 양상까진 설명이 되었다. 그렇지만 대체 ‘왜’ 그런 상태가 발생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정신분석과 검진만으로는 더 이상 진전을 볼 수 없었기에, 결국은 며칠의 여유를 두고서 최면 요법을 써서라도 그 원인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 중 이 방면에서는 가장 뛰어난 기법을 자랑한다는 데이브 엘먼(Dave Elman)3) 최면요법을 통해 비교적 최근의 일부터 시작해 순차적으로 연령퇴행을 유도 받았다. 깨끗했다. 국민학교 4학년 때 짝사랑하던 여자애에게 뺨을 맞은 사건 외에는 별다른 트라우마가 없었다. 의사는 전생까지의 퇴행을 권했으나 거절했다.

직감 때문이었다. 나의 상태는 결코 내면의 숨겨진 상처나 전생의 쇼크 따위에 있지 않다는 내면의 강렬한 느낌. 그것은 마치 코끼리 인간일 때 곰 인간을 쫓으며 문득 문득 떠오르던 그 직감과도 비슷했다. 놈은 이 개울을 건넜어. 놈이 저 언덕을 넘었군. 아니, 놈은 결코 여기서 뛰어내리지 않았어. 그래. 그리고 이 의사가 지껄이는 말은 엉터리야. 틀렸어.

연령 퇴행을 통해서도 원인을 찾지 못하자, 의사는 지속적인 상담치료와 더불어 약을 투여 받고 음악치료를 병행할 것을 권했다. 그 말을 해석한다면 다음과 같으리라. ‘당신의 증세를 낫게 해준다는 보장은 없소. 그러나 결과에 상관없이 당신에게 거액을 청구할 거라는 사실만은 반드시 약속하리다.’ 기타 등등.

나는 숙면을 유도하는 음악CD를 받아와 희원에게 선물했고, 처방전은 구겨서 버렸다. 의사가 보름치를 처방해 놓은 약은 다름 아닌 디아제팜(diazepam)이었다. 주먹구구식 신경안정제 따위를 순순히 먹어줄 만큼 내가 어리석지 않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 어떤 병원이 됐든, 다시 병원을 찾을 일은 더 이상 없을 것 같았다. 며칠 간 돈을 가져다 바친 결과 거기서 알아낼 수 있는 만큼은 다 알아냈으니까.

그리고 그날 밤 꾼 꿈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법으로 내가 느꼈던 그 직감이 정확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날은 희원과 저녁식사 후 밤을 함께 보내게 되었고, 한 차례 격렬한 폭풍우가 지나간 뒤 우리는 뿌듯한 만족감과 함께 지쳐 쓰러졌다. 그날 그 탈진상태에서 잠속으로, 그리고 다시 꿈속으로 접어들었던 일련의 과정은 마치 현실과 가상공간을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문을 통과하는 것과도 같았다.

나는 희원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눈을 감은 채 나의 의식이 깊고 따뜻한 물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리곤 이내 암흑. 완전히 잠속으로. 하지만 곧이어 의식이 되살아나며 꿈이 시작된다는 것을 명확히 알았고, 나의 무의식 세계가 구축해 놓은 미지의 땅 위에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완전한 코끼리 인간으로 재정립되는 과정을 온전히 인식할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문득 깨달았다. 회를 거듭할수록 이 모든 과정들이 좀 더 명쾌해지고 있었고, 소요되는 시간은 점차 짧아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것은 내가, 결코 단절되지 않는 항구적인 각성상태를 유지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현실에서야 두말할 것 없고, 꿈에서조차 ‘항상’ 현재의식을 유지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인생을 두 배로 살 수 있게 되는 건가? 결국에는 미쳐버리는 건 아닐까? 과연 이런 현상이 얼마나 지속될까?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현실에서 꿈으로. 그리고 꿈에서 현실로 전환되는 과정이 이런 식으로 점점 짧아진다면, 종내에는 텔레비전의 채널을 바꾸듯이 순간적으로 꿈과 현실 사이를 횡단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꿈속 서울에서 나는 이미 곰 인간의 뒤를 쫓아 혜화동 부근까지 가 있는 상태였다. 거기까지 이르는 도중에, 나는 제법 많은 수의 인간 이외의 존재들과 마주쳐야 했다. 놈들의 출현은 조금씩이지만 분명히 점점 더 빈번해지고 있었다. 거의 완전한 파충류 수준에 도달한 벨로시랩터4), 제법 살이 붙은 거대 돼지인간, 걸어 다니는 파리끈끈이 주걱 인간 등을 각각 박살냈고, 먹었다. 그 와중에 인간도 꾸준히 포식했음은 물론이다. 그 결과 나는 하루가 다르게 강대해지고 있었다. 심지어 현실 생활 따위야 어떻게 되든 말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날 꿈에서 징후가 나타난 것은, 방송통신대학이 있던 자리에서 맞부딪친 저글링5) 한 마리—아드레날린 업 상태의—를 압살시켜 뜯어먹은 뒤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저글링의 뼈와 살이 소화되면서 점차 내부의 힘이 고양되는 것을 만끽하고 있던 나는, 문득 꼬리뼈 부근에서 뭔가 뜨거운 에너지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꿈틀거리는 뜨거운 액체, 또는 빛에너지로 이루어진 한 마리 뱀처럼 나의 척추를 휘감고 상승하기 시작했다. 나는 전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빛의 유동체는 척추를 쭉 타고 올라와 목뼈를 지나 두개골까지 도달하고야 말았고, 그 순간 수백만 개의 섬광탄이 작열하듯 강렬한 빛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당시엔 몰랐지만, 그것이 바로 내 인생 최초 쿤달리니 각성의 순간이었다.

빛이 한동안, 아마도 꽤 오랫동안 지속되는 동안 나는 지복(至福)의 상태에 있었고, 그 빛 외의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허나 그 빛이 차츰 사라지면서 표면의식이 돌아왔고, 그러자마자 나는 이마가 간지러운 것을 느꼈다. 처음엔 단지 가려운 정도였지만 얼마 안 있어 그 간지러움은 미칠 듯 심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마 뼈 안쪽에서 뭔가가 뒤틀고 갉아대는 듯한 기이한 고통으로 변모했다. 그것은 꿈속에서도 현실에서도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감각으로, 방금 전 빛과 함께 도달했던 지복의 상태와는 극과 극을 달리는 저열한 감각이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뿌우우우우—!

나는 떨쳐 일어나며 포효했고, 달리기 시작했다. 꽝. 꽝. 숲을 헤집고 달리며 아름드리나무들을 보이는 대로 들이받아 쓰러뜨렸다. 그러나 그것으론 부족했다. 나는 내 몸집만한 바위들을 향해 돌진했고, 쪼개질 때까지 들이받고 또 들이받았다.

이윽고 내 이마는 피투성이가 되고 바위는 산산이 부서져 파편화 될 지경에 이르렀을 때, 그제야 뼈 안쪽에서 헤집고 나오던 그 통증은 사라졌다. 강대한 코끼리인 나조차도 지치는 것을 느낄 지경이었으니 내가 쏟아 부은 힘이 얼마나 위압적이었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그러면서 정신없이 달린 덕분인지 어느새 나는 청계천 근처까지 와 있었다.

가만히 선 채 격해진 숨을 고르면서, 나는 나의 이마에 뭔가 물리적 변화가 생겼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바위를 들이받아서 생긴 생채기와 타박상이 있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그와는 다른 종류의 무엇. 나는 당연하다는 듯 그 사실을 눈치 챌 수 있었지만, 내 이마 위에 생겨난 이상 그것을 직접 눈으로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이미 사족보행을 하고 있었기에 손 대신 코를 말아 올려 이마를 만져보았다. 몇 개의 사선. 그리고 원형의 돌기가 느껴졌다. 대체?

나는 곧장 청계천 개울가로 내려가 물에 이마를 비춰보았다. 물살 때문에 제대로 된 형상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나는 물결이 잔잔해지기를 <원했고>, 그러자 마자 물 표면의 일부가 마치 거울과 같이 평평하게 정지했다. 수면에 흉폭해 보이는 코끼리의 거대한 면상이 비쳤다. 그 이마의 한가운데에 도드라져 있는 흰색 문양. 그것은 지름 삼십 센티미터 가량의 수레바퀴였다. 세 개의 살대가 중심점에서 교차하며 바깥으로 뻗어 별모양(*)을 만들었고, 원형의 굵은 테두리 하나가 그것들을 감싸고 있었다. 그것은 뼈 자체가 살을 뚫고 돋아져 나와 만들어진 것이었다.

순간 나의 사고는 정지했다. 머리 속이 텅 비면서 단 한 문장만이 백만 킬로와트의 밝기로 명멸했다. <잠재 에너지 각성을 도와주는 신비의 해저암반수.> 내 이마에 돋아나온 문양은 전철에서 주운 생수병 라벨에 그려져 있던 그것, 물레방아, 혹은 단단한 수레바퀴처럼 생긴 바로 그 문양과 같은 것이었다.

마치 어긋나 있던 전신 뼈마디가 한꺼번에 제자리를 찾는 것처럼, 그간의 의구심들이 일순간에 아귀가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다. 희원이 제시한 키워드, <꿈과 현실과의 접점.> 더 이상 의심할 바 없었다. 이 모든 일들의 원인은 바로 그 괴상한 생수에 있었던 것이다. 어린시절 학대당한 경험 때문도, 현대인의 만성 스트레스 때문도, 새집 증후군 때문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탐색의 초점을 어디다 맞춰야 하는가는 명약관화했다. 그 생수병에 대해 기억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되살려 조사하고 분석해야 하리라. 케테르. 쿤달리니. 요나구니. 코스믹 유니온. 뉴 월드 오… 뉴 월드 오더? 신세계질서?

나는 끓어오르는 전율과 당위성 부족한 환희, 그리고 지향성 잃은 분노에 휩싸인 채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골반과 척추에서 한 차례 우드득거리는 소리가 났고, 나는 언제 사족보행을 했었냐는 듯 자연스럽게 두 다리로 섰다. 코끼리 인간에서 코끼리로. 코끼리에서 다시 코끼리 인간으로. 네 발로 달리는 코끼리가 된 이후에도 꾸준히 체격이 자랐었기 때문에, 두 다리로 일어서자 나의 신장은 약 4미터에 육박했다. 전신에 강인하기 그지없는 우람한 근육들이 빈틈없이 튀어나왔고, 그 위의 피부는 이미 강철갑주처럼 단단했다. 귀는 축 처지는 대신 양옆으로 활짝 펼쳐져 호쾌하게 뻗었다. 두 개의 엄니는 휘어져 올라가 약 70센티미터에 달했으며, 상아빛이 아닌 짙은 금빛을 띠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빛의 상승과 폭발, 그리고 그로 인해 이마에 물레방아 문양이 드러난 것과 관련이 있는 듯 했다. 아마도 물레방아 문양의 획득은 이 꿈속 세계에서 일정 수준 이상을 넘어섰다는, 즉 충분한 경험치를 쌓아 레벨 업을 했다는 뜻이리라 짐작했다. 그간의 학살과 포식에 더해, 아드레날린 업 저글링을 해치움으로써 나도 모르는 사이 임계점을 돌파한 것이 분명했다.

그들과의 연결이 발생한 것은, 복잡한 생각에 잠겨있느라 진일보한 신체의 감각에 채 익숙해지기도 전이었다.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보고 있는데, 돌연 내 이마 위의 물레방아가, 뼈로 된 그 수레바퀴가,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간 간헐적으로 일어났던 직관적 감각이 갑작스럽게 증폭되었고, 그 상태가 유지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맹목적으로 나 자신을 지배해 오던 강렬한 투쟁심이 거짓말처럼 중화되었으며, 그것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나는 평정심에 도달했고, 그와 동시에 내가 ‘네트워크’에 편입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와 같은 경지에 도달한, 이 꿈속의 절대강자들만의 네트워크에.

갑작스런 지각 수준의 변화에 놀랄 새도 없었다. 일단 그 감각을 획득하자, 가장 먼저 타 존재들의 숫자와 위치가 자연스럽게 파악되었다. 총 수효가 열하나… 열셋… 열여덟… 서른둘. 그것은 치열한 투쟁을 거쳐 물레방아 문양을 획득한 자들, 강대한 힘을 지닌 자들의 수효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나 외에도 끊임없는 투쟁과 승리를 통해 힘을 키워온 존재들이 이 꿈속에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그 수효가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내 꿈속에서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경쟁 상대들이 무려 서른둘이라! 허구의 존재들과 아귀다툼해야 한다는 사실에 분노해야 할지, 아니면 투쟁하고 파멸시킬 수 있는 대등한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대체 이것은 누가 짜놓은 틀일까?

이 꿈속 세계가 위계가 나뉘어 있는 레벨 업 시스템이라는 것은 이제 자명했다. 코스믹 유니온? 뉴 월드 오더? 그것은 어떤, 단체의 이름일까? 기업의 이름일까? 어떤 자들이기에 이런 고도로 조직화된 꿈을 꿀 수 있도록 조정된 ‘물’을 만들어 파는 것일까? 아니, 판매하는 것이기는 한 건지도 의구심이 들었다. 비록 부작용이 조금 있기는 하지만 꿈속에서 또 다른 삶을 즐길 수 있도록 해주는 이러한 ‘물’을 개발했다면 그 부가가치는 실로 막대할 것이다. 그런 물이 겨우 2만원이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판 전 비공개 임상실험을 위해 무작위로 배포한 것일까? 혹은 우연히 외부로 유출된 것을 내가 손에 넣은 것은 아닐까?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있는 찰나, 근처에 있던 녀석 하나가 대뜸 말을 걸어왔다.

‘초기 멤버 치곤 조금 늦었군. 네가 서른세 번째다.’

녀석의 말은 귀가 아니라 이마를 통해 들려왔다. 난생 처음 경험하는 텔레파시. 동시에 녀석과 나 사이에 마치 공간을 꿰뚫는 터널이 생긴 것처럼 시야가 열렸고, 가시거리 너머에 있을 녀석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마찬가지로 눈이 아닌 이마를 통해서였다. 녀석의 위치는 아현동. 그는 거대한 독수리 인간이었다. 나보다 강한가? 답은 즉각 떠올랐다. 강했다.

‘어쨌건 인증 단계에 도달한 걸 축하한다. 비밀번호는 243627. 생각이 있다면 찾아오라.’

꿈속 코끼리 인간에겐 정묘한 발성기관이 없었기에 그간 낼 수 있었던 소리라곤 뿌우우 하는 포효뿐이었다. 하지만 이마의 물레방아 문양은 나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말다운 말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나는 이 꿈을 꾸게 된 이래 최초로, 말을 했다. 최초라는 의미를 두기엔 시답잖은 질문이긴 했지만.

‘…인증 단계? 그게 무슨 뜻이지?’

‘지금 네 머리에 돋아난 그 물레방아 문양을 뜻한다.’

‘어디로, 누구를 찾아오라는 거야?’

그러나 독수리 인간은 내 물음에 답하지 않은 채 텔레파시와 원거리투시를 일방적으로 차단해버렸고, 나는 더 이상의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알면 알수록 더욱 기이하기만 한 이 꿈속에는 얼마나 많은 비밀이 더 숨어있는 것일까. 일단은 다른 녀석들이 있는 곳을 찾아가 담판을 지어야 할까? 녀석들의 숫자가 만만치 않은데 혼자서 위험하진 않을까?

처음으로 꿈속에서의 죽음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면 정말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걸로 영영 끝일까? 이 꿈을 꿀 수 없게 되는 건 사양하고 싶은데. 그렇지만 왠지, 단순히 꿈을 더 이상 못 꾸는 정도로 끝나진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 꿈속의 경쟁 상대들이 얼마나 많건, 얼마나 강하건, 나는 놈들 앞에서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꿈의 주인이므로. 그리고 내가 상대해야 할 서른둘의 적수들 중엔, 그 녀석—곰 인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1) 질럿(Zealot) : 본디 ‘열성자’라는 뜻이나, 여기서는 1998년 블리자드에서 출시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스타크래프트에 등장하는 프로토스의 기본 지상 유닛을 말한다. ‘Citadel of Adun’이라는 건물에서 ‘Leg Enhancements’를 업그레이드 하면 질럿의 이동속도가 증가되는데, 이것을 속칭 발업이라 부르기도 한다.

2) 콜린 윌슨 저, 1999년 하서출판사에서 출간한 ‘아틀란티스의 유산’ 중에서 이 책에 대해 언급한 것을 재차 인용하였다.

3) 데이브 엘먼. 1900년 5월 6일 미국 노스 다코타에서 출생, 1967년 12월 5일에 죽었다. 서구 현대 최면가들 사이에 최고의 최면가로 손꼽히고 있으며, 현대 최면을 나누는 두 줄기의 큰 갈래, ‘지시적 최면’과 ‘비지시적 최면’ 중 ‘지시적 최면’ 기법을 대표한다. 특히 1950년대와 1960년대 기간 동안에 엘먼이 적극적으로 가르친 최면 기법은 오늘날도 대단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으며, 그는 환자로 하여금 재빨리 증상의 원인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역행시키는 방법인 '급속유도법(rapid induction methods)'을 개발하기도 하였다.

4) 벨로시랩터(Velociraptor). 지질시대 백악기(白堊紀) 후기에 살았던 육식공룡. 작은 몸에 비해 높은 지능,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 날렵한 동작을 이용해 자기보다 큰 공룡도 사냥할 수 있어 '날랜 사냥꾼'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아시아 지역에서 발견된 공룡 가운데 가장 사납고 잔인한 육식공룡이다.

5) 저글링(Juggling). 1998년 블리자드에서 출시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스타크래프트에 등장하는 저그 종족의 기본 지상 유닛. 아드레날린 업그레이드를 하게 되면 이동 속도와 공격 속도가 증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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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