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FI

전화살인

소설가(sulsunghyun@empal.com)

2009년 6월 통권 45호

1


 완연한 가을로 접어든 초저녁의 풍광이 창 너머로 비치고 있었다. 경수는 잠시 책을 덮고 멀리 보이는 공원 단풍나무에 초점을 맞췄다. 계절은 사람의 일생과 같다. 파릇파릇 돋는 새싹처럼 시작된 인생이 가을에 접어들면 지나온 시간들을 되돌아보게 된다. 각색의 단풍들이 다양한 추억을 가진 사람들의 일생처럼 보였다. 뒹구는 낙엽에서 애수를 느끼는 것은 언젠가 맞이하게 될 인생의 황혼을 미리 연습하는 것이다.

 ‘띠리리릿.. 띠리리릿..’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경수는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누구와의 통화인지 경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핸드폰을 귀에 댄 채 멀리 공원만을 응시했다. 잠시 후 그는 무엇인가 깊은 상념에 잠긴 듯 고개를 숙였다가 어떤 결심이라도 한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문을 열고 짧은 복도를 지나 부엌에 이르렀을 때 그 물건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호흡은 가빠져 있었고 어금니는 단단히 악다물렷다. 물건을 집어 들며 고개를 들자 부엌 한 켠에 서있는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 동공에 비친 상대의 표정은 조금 놀란 듯 했지만 아직 어떤 위험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듯 보였다. 잠시 무슨 판단을 해야 할 것만 같았지만 물건이 들린 손 근육의 간질거림이 몸이 덜덜 떨릴 만큼 심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짧게 숨을 몰아쉬며 상대에게 몸을 붙였다. 그제야 빠르게 뛰는 상대의 심장이 어깨를 통해 전해졌다. 

 몸을 때자 상대는 가볍게 무너졌다. 얼어붙은 그녀의 표정에서 현실이 느껴졌다. 오른 손에 흐르는 뜨거운 액체가 촉각을 돌려놓았다. 손에 칼이 들려 있었다. 칼? 칼이라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뭘 한 거야?

 그제야 정신이 들면서 두려움과 공포, 죄책감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천정과 바닥을 빠르게 오갔다. 그런데 그 감정들은 곧 뜨거운 슬픔과 분노로 뒤바뀌었다.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에 목이 타들어가고 끝 모를 분노에 하염없는 눈물이 솟았다. 가슴을 아무리 때려도 시원치가 않았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 미칠 것만 같았다. 이대로 있으면 몸이 폭발해 버릴 것만 같았다.

 마침내 그는 손에 들린 것을 돌려 잡았다. 한 번 찔렀을 때 오히려 묘한 쾌감이 들었다. 자신이 저지른 죄가 사함을 받는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찔렀다. 그제야 숨이 시원스럽게 쉬어졌다. 세 번. 네 번. 전신으로 쾌감이 번져갔다. 아픔은 쾌락의 파도 밑에 묻혀버렸다. 의식이 끊어질 때까지 그의 손은 움직임을 멈출 수 없었다. 자리에 주저앉은 그의 얼굴에는 일그러짐 속의 엷은 미소가 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2


 “삼촌, 연쇄살인을 구성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아세요?”

 짙은 눈썹에 짧게 깍은 머리, 단단한 체구의 청년이 옆에 선 40대 중반의 잠바에게 말을 걸었다. 

 “형민이 넌 삼촌한테 범죄수사 배우러 온다더니 배우러 온 게 아니라 가르치러 온 게냐?”

 잠바는 적잖이 튀어나온 배 아래로 옷을 끌어내리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게 아니고요, 삼촌 같은 베타랑 형사님께 제가 어찌 가르침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전 다만 추리물을 구성하기 위해 연구를 하다 보니 몇 가지 알게 된 사실이 있어 말씀드려 보려는 것뿐입니다.”

 “그래? 그럼 어디 말해봐라.”

 잠바는 경찰서 문을 열고 들어서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경례를 붙이는 몇 몇 경관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면서였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연쇄살인이라고 하면 한 사람의 범인이 여러 차례의 살인 행각을 연속으로 벌이는 걸 말하잖아요?”

 “그럼, 그거 말고 뭐가 더 있냐?" 

 “예. 일단 한 사람이 저지른 범행이니까 어떤 공통점이 있겠죠. 그러니까 살해 대상이 유사하다든지, 아니면 범죄 기법이 같다든지 하는 식으로요.” 

 청년이 잠바를 따라 방으로 들어서며 말을 이었다. 

 “그야 그렇지.”

 “그렇지만 전 한 가지 조건이 더 있다고 생각해요.”

 “한 가지 더?”

 잠바는 책상 위에 놓인 서류철을 펴 훑으며 물었다.

 “예. 한 사람이 수차례의 범행을 계속 저지르고도 잡히지 않고 있다는 건 그 만큼 자신의 존재를 숨기기 위한 철저한 노력이 있었다는 걸 의미하는 거 아닌가요? 단 한 번만 범죄를 저질러도 수십 개의 단서를 남기게 되는데, 몇 차례의 범죄를 연속으로 저지르면서도 덜미를 잡히지 않았다는 건, 그건 그 만큼 범인이 천재적이고 철두철미하다는 걸 의미하는 거죠.”

 “그래서. 그게 어쨌는데.”

 서류를 넘기는 잠바가 이렇다 할 흥미를 보이지 않자 청년도 풀이 꺾였는지 책상 맞은편 소파에 깊숙이 눌러 앉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 최후의 단계에서, 범인은 누구도 연쇄살인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그러니까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일련의 사건들을 구성하게 될 거라는 거죠. 서로 전혀 무관해 보이는 사건들. 그렇지만 거기엔 어떤 연관성이 존재하고, 실은 그 연관성을 없애려 한 노력 자체가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되는, 그런 사건이 구성될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연쇄 살인이 아닌 것 같은 연쇄살인이란 말이냐?”

 “그렇죠. 어쩌면 그렇게 덮여 버린 연쇄살인 사건이 과거에도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저 미해결의 개별 사건들로요.”

 “그런데?”

 “예, 그러니까,”

 여전히 반응이 없자 말문이 막힌 듯 잠시 침묵하다 이내 잠바의 옆으로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제가 이제까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역사상 가장 기가 막힌 연쇄살인 사건은 한편의 영화 속에서 등장해요. 덴젤 워싱턴이란 흑인 배우가 형사 역으로 나오는 ‘다크 엔젤’이란 영화죠.”

 “....” 

 “A라는 사람이 B에 의해 살해를 당하게 되요. 그 다음은 B가 C에 의해 살해를 당하죠. 이번엔 C가 D에 의해, 다음엔 D가 E에게, 사건은 동일한 살해방식으로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데, 미치겠는 건 살인자가 없다는 겁니다. 한 사건의 살인자가 다음 사건의 피해자니,”

 “흠!”

 잠바가 어의가 없다는 듯 콧방귀를 끼며 서류를 넘기자 청년도 다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렇지만 싱거운 건 범인이 ‘사탄’이라는 겁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자유롭게 이동해 다니며 영혼을 통제하는 ‘사탄’이 범인이었다는 거죠.”

 잠바는 잠시 말없이 청년을 노려보았다. 고작 그깟 얘기를 하려고 이제껏 지껄였냐는 표정이었다.

 “전 그에 못지않은 희대의 연쇄살인 사건이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다고 생각해요.”

 “뭐? 뭐라고?”

 그제야 잠바는 정색하며 소파에 앉은 청년을 바라보았다. 보고 있던 서류를 책상 한 쪽에 던지면서였다.

 “자, 이걸 좀 보세요.”

 청년은 아까부터 겨드랑이 사이에 끼고 있던 신문 뭉텅이를 잠바가 앉은 책상 위에 펼쳤다. 몇 몇 일간신문과 지역 신문들의 사회면을 스크랩한 것이었다.

 “이게 뭐야. ‘희대의 친족 살인 사건, 인간성 상실의 시대’, ‘가족 살인, 디지털 신문명의 말로인가?’, ‘타락한 문명의 탕아, 희대의 친족 살인’...”

 잠바는 스크랩된 신문들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제목을 읽었다. 모두 친족 간의 살인사건을 다룬 사회면 기사들이었다.

 “대략 2주 전쯤 전국에서 벌어졌던 친족 살인 사건들이에요. 여기, 이것까지 해서 총 여섯 건 이구요. 그리고 이게 나중에 종합한 일간신문 사설인데 여긴 네 건만 언급돼 있어요. 워낙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라요. 저도 뭔가 이상하다는 직감이 들어 며칠 분의 신문들을 뒤져서 발견한 거애요. 제가 못 찾은 게 더 있을 수 있고요.”

 “아니 그래서, 너 지금 이 친족 살인 사건들이 전부 연쇄살인이란 거냐? 넌 ‘친족 살인’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니? 자기 친족끼리 죽였다는 건데, 그럼 살인범이 전부 다르다는 얘기 아니냐?”

 잠바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예, 맞습니다. 살인범은 모두 달라요. 하지만 묘한 공통점들이 있어요. 이 사건들이 전부 2-3일 상간에 발생한 것들인데 패턴이 있어요. 모두 범인이 자기 집에서 가까운 친지들을 살해하고 현장에서 바로 자살을 했어요.”

 “뭐? 자살을 했다고?”

 “예.”

 “그럼 범인이 다 죽은 거네?”

 “그렇죠.”

 “그런데 연쇄살인이다?”

 “한 가지가 더 있어요. 아직 모두 확인해 본 건 아니지만 여기, 그리고 여기. 세 사건의 기사들을 보면, 모두 이렇다 할 살인의 동기가 없었다는 거애요. 그러니까 친족 간에 살인까지 저지를 원한 관계 같은 게 없었다는 거죠. 그래서 그냥 우연한 다툼 중에 우발적으로 저지른 거라고 보고 있는데, 가족 간에 우발적으로 살인을 한다는 게 당최 말이 되겠어요?”

 “아직 밝혀지지 않았을 수도 있지. 탐문 조사라는 게 그렇게 완벽한 게 아니야. 그리고 요즘은 이웃 간에 건, 친척 간에 건 아예 발 끊고 사는 사람들도 많고.”

 잠바는 청년이 여전히 한심스럽다는 듯 쏘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또, 결국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그 자리에서 자살을 했다는데, 누굴 더 찾겠다는 게냐?”

 청년도 잠시 당황한 듯 주춤 하다 이내 말을 이었다.

 “글쎄. 그건 아직 확실히 모르지만, 어쨌든 뭔가 있는 것 같아요. 말씀드렸잖아요. 원래 첫 눈엔 알아 볼 수 없는 게 고난도 연쇄살인의 특징이라고요.”


3


 하늘이 잔뜩 찌푸리더니 결국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평일 오전의 경부 고속도로는 시원스럽게 뚫렸다. 형민은 대전을 지나 계룡 톨게이트를 알리는 간판이 보이자 핸드폰을 열었다.

 “삼촌, 저 형민이에요.”

 “그래, 형민아, 야! 빨이 차에 태워!”

 “삼촌, 일하시는 중이신가 봐요?”

 “됐다. 이제 끝났다. 왜?”

 “예, 삼촌. 일단 어제 주신 사건 파일들은 모두 확인했습니다. 서울의 한 곳도 방문했고요. 지금은 계룡대로 가는 길이에요.”

 “그래, 그래서 뭐가 좀 나왔냐?”

 “예, 몇 가지 점들을 확인했습니다. 일단 서울 사건에서도 주변 사람들이 이렇다 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아주 단란한 가족이었다는 증언을 해 주었고요. 그리고,”

 “또 뭔데?”

 “사건 기록에서 한 가지 발견한 게 있어요.”

 “뭐? 뭘 발견했다고.”

 “예.”

 “그게 뭔데?”

 차가 계룡 IC로 들어서고 있었다. 형민은 핸드폰을 어깨에 끼고 요금을 지불했다.

 “야! 뭘 발견했다며?”

 “아, 예, 죄송해요. 톨게이트 요금 내느라고요.”

 “손님, 운행 중에 핸드폰 사용은 위험합니다.”

 톨게이트의 직원이 정색을 하며 말하자 형민은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며 차를 갓길에 세웠다.

 “죄송해요. 이제 차 세웠어요. 말씀드릴게요. 그러니까 네 건의 사건 기록에서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이 범행 전 30초가량의 짧은 통화를 했던 것으로 되어 있어요. 아직 경찰 쪽에서 통화 내용은 확인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고요. 아마 관할 구역이 전부 다른 사건들이라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 같아요. 이런 공통점이 있다는 걸 몰랐을 테니까요. 어차피 살인 시점을 정확히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한 사건에서 피해자 한 사람이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던 중 살해를 당했기 때문에 살해 시점을 정확히 알 수 있었는데, 그 사건의 경우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마지막 통화를 한 개 대략 사건 발생 1분 전 정도였다는 거애요.”

 “음..”

 “그리고 나머지 세 사건에서도 유사하게 마지막 통화가 30초짜리였고요. 두 사건은 확인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어요. 뭐 워낙 사건 자체가 불을 보듯 뻔 한 것이었으니까 자세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 같아요. 집도 외부와 차단되어 있었고, 다른 사람이 들어 왔던 흔적도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그 점에 대한 네 생각은 뭐야?”

 “글쎄, 저도 아직 확실히는 모르겠어요. 다만 패턴이 발견되고 있다는 거애요. 뭔가 공통점이 있다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일단 두 가지만 부탁드릴게요. 우선 피의자의 전화 통화 여부를 확인하지 않은 두 사건의 경우 통화 여부를 좀 확인해 주세요. 그리고 여섯 건 모두 최후 통화의 내용과 발신자를 확인해야 할 것 같아요.”

 “아이고 이거 완전히 시어머니 한 분 생겼네.”

 직접 보지 않아도 이마를 잔뜩 찌푸리는 삼촌의 모습이 절로 그려졌다.

 “그래, 너 분명이 말하는데, 이번이 마지막이다. 니 엄마 부탁이 아니었으면 아예 시작도 안했어. 이번에 확인해서 아무 것도 안 나오면 너 딱 포기해라. 알았지?”

 “예. 좋습니다. 만일 나머지 두 사건에서 통화 기록이 없다면 포기하겠습니다.”

 형민은 다부진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리고 넌 형사가 아니야. 그러니까 피해자들 집에 가서 처신 잘 하고. 알지?” 



 차는 깨끗이 닦인 도로 위를 굴러 소규모의 아파트 단지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으로 접어들었다. 삼군 본부가 모여 있는 계룡시에는 군인들의 거주지와 회식 촌을 중심으로 소규모 도시가 형성되어 있었다. 국민은행과 롯데리아가 있는 상가지역을 지나자 한 아파트의 입구가 보였다. 아파트는 입구에 대형 쓰레기 수거함이 방치되어 있었고 페인트 칠을 한지가 오래되었는지 전체적으로 허름해 보였다. 형민은 102동 앞 지상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파일철에서 자료를 다시 확인한 형민은 102동 입구로 향했다. 이웃들이 정답게 인사를 나누며 지나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 작은 도시일수록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더 돈독한 법이다. 경비 아저씨도 낯선 형민에게 특별한 눈길을 주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형민은 702호 앞에 다다랐다.

 “실례하겠습니다.”

 “네, 누구세요.”

 나이든 노부인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예, 아까 전화 드린 범죄심리학과 학생입니다.”

 “아, 예.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자 초췌한 모습의 노부인이 잔뜩 웅크린 채 서 있었고 그 뒤로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의 집안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신발을 벗으며 거실로 들어서자 소파와 가구들이 그리 넉넉지 못한 집안 사정을 말해주고 있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겠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경찰들이 다녀갔을 텐데 죄송합니다. 전화로 말씀 드린 데로 저는 서울 중곡 경찰서에 파견 나와 있는 범죄심리학과 대학원생입니다. 수사를 위한 기초자료 수집 업무를 돕는 수습기간 중에 있습니다.”

 “예.”

 노부인은 뭔가 복잡한 설명에 대충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데로 저희는 이 사건이 단순한 친족 살인이 아니라 배후에 뭔가가 존재하는 타인에 의한 살인사건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예! 그렇죠? 그렇죠? 상규가, 상규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상규는 절대 그럴 애가 아니에요.”

 부인은 그제야 구세주라도 만난 듯 형민에게 바짝 다가앉으며 호소했다.

 “예. 그러니까 평소에 김상규씨와 할아버님 사이에 크게 다툼을 벌이거나 원한을 살 만한 일은 없으셨다는 거죠?”

 “그럼요. 제가 제 친 자식이랑 우리 영감에 대해 모르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절대 없습니다. 그런 건 절대로 없었어요.”

 “예. 예. 역시 그렇군요.”

 형민은 너무 가까이 다가서는 부인이 부담스러운 듯 조금 떨어져 앉아 서류를 넘기는 척 하면서 몇 가지를 더 물었다.

 “그렇다면 사건 당일 할머니께선 어디 계셨나요?”

 “아, 그날 전 뭐 동네 조금만 계모임이 있어서 나갔었어요. 그래서 아홉시쯤 돼서 들어왔는데, 글쎄..”

 노부인은 당시 상황이 떠올랐는지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 예, 그러셨군요. 진정하십시오. 진정하시구요.”

 형민은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차피 경찰 진술 기록에 남아 있는 것 이상의 이야기는 듣기 어려울 것 같았다. 차라리 집안을 좀 더 살펴 볼 요량이었다. 

 “이게 두 분 사진인가요?”

 피아노 위에는 등산복 차림의 두 남자가 시원스런 폭포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이 놓여 있었다. 

 “그래요. 그 사진 좀 보세요. 그게 어디 싸움이라도 할 사람들 얼굴인가요? 그게 이번 여름에 찍은 거애요. 이번 여름 피서 가서.”

 “예, 피서요?”

 “예. 그렇다니까요. 늘 어디든 같이 다니려고 하고, 뭐든지 지가 할 수 있는 일은 해 주려고 하고, 상규는 하여튼 요즘 애들하고는 달랐어요. 그래, 그 지난 번에는,”

 “할머니, 잠깐만요. 그러니까 이 사진이 올해 여름에 찍은 사진이란 말씀이시죠?”

 “아 예, 그래요.”

 “여기가 정확히 어디죠?”


5


 “삼촌, 형민이입니다.”

 형민의 차는 막 영동 고속도로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래, 또 뭔 일이냐?”

 “예, 아까 부탁드린 거, 확인 됐나요?”

 “자식, 그래, 내가 너 성질 급한 거 아니까 미리 확인해 놨다. 그래, 니가 이겼더라. 두 사건에서도 피의자가 통화한 기록이 있었다. 30초씩.”

 “역시 그랬군요!”

 형민이 흥분하는 바람에 차가 잠시 좌우로 흔들렸다. 형민은 폰을 어깨 사이에 끼고 핸들을 다시 다잡았다.

 “그런데 통화한 번호는 모두 달라. 그리고 통화 내역을 보니,”

 잠시 뜸을 들였다.

 “통화 내역이 말이야.”

 “예, 통화 내용이 뭐였나요?”

 “없더라.”

 “예?”

 “통화 내용이 없어.”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형민은 아무래도 안 되겠는지 갓길에 차를 세웠다.

  “내용이 없었어. 너 왜 알잖니. 우리가 한국통신 쪽에 의뢰를 하면 그쪽에서 자동 음성 기록 장치로 통화 내용을 녹취해서 우리에게 보내준다고. 그런데 보내준 여섯 건의 통화 내용이 모두 ‘아무 내용 없음’이야.”

 “아무 내용 없음이라고요?”

 “그래.”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는데.”

 “글쎄, 나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구나.”

 “삼촌. 여섯 건의 사건에서 모두 같은 30초씩의 전화 통화가 있었어요. 이걸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있겠어요?”

 “그래. 그건 니 말이 옳아. 그 점은 인정한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확연한 연관관계가 나타난 것도 아니야.”

 “아닙니다. 전 하나의 연결 고리를 더 발견했어요.”

 “뭐? 또 다른 연결고릴 발견했다고?” 

 “예.”

 “그게 뭔데?”

 “어제 방문했던 서울과 오늘 계룡. 두 곳 모두 지난여름에 같은 곳으로 피서를 다녀왔어요.”

 “뭐? 피서?”

 “예. 피서요.”

 “그게 어쨌는데.”

 “그래서 방금 또 다른 곳을 전화로 확인했습니다. 아직 여섯 곳 모두에 확인해 보진 못했지만 제 생각이 맞는다면 피해자 가족 여섯은 모두 지난여름 같은 곳으로 피서를 다녀왔던 것 같습니다.”

 “같은 곳으로?”

 “물론 다 같이 간 건 아닙니다. 서로 다른 날짜에 갔었어요. 서울의 경우 6월 말이었고 계룡은 8월, 광주의 경우 7월이었거든요.”

 “음.”

 “전 이게 결정적인 연결고리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범인이 피해자를 선정하게 된 기점이었던 거죠. 만일 여섯 건의 친족 살인이 어떤 제3의 연쇄살인범에 의한 것이었다면 그는 대체 왜, 그리고 어떻게 전국 방방곡곡의 사람들을 범행 대상으로 선정했을까가 문제였어요. 그건 피서지에서였던 거애요. 놈이 대체 어떤 생각으로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놈은 피서지에서 만난 가족들을 살해의 대상으로 찍었던 겁니다.”

 “흐음.”

 “삼촌, 전 지금 강원도 쪽으로 가고 있어요. 혹시 그곳에서 범인의 실마리를 잡게 되면 바로 연락드릴게요. 지역 경찰로부터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6


 비포장도로로 접어든 지 10여분이 흘렀다. 형민의 작은 차는 좌우로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가을 해가 산에 걸리자 주변이 점점 어두워졌지만 폭포는 생각보다 찾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구비마다 작지만 알아 볼 수 있는 입간판들이 있었다. 도착지까지 500m가 남았다는 표지를 보고 2분여를 더 달려 작은 고개를 넘자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리기 시작했다. 가을인데도 물이 마르지 않은 것을 보면 여름에는 제법 시원스러웠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폭포로부터 얼마 떨어진 곳에 산 귀퉁이를 밀어 터를 닦아 놓은 주차장이 있었다. 주차장 앞에는 작은 구멍가게 하나도 서 있었다. 올라오면서 보았던 부락들을 위해서인지 주차된 차가 없는데도 영업을 하고 있었다.

 차를 세운 형민은 우선 주변을 한 번 돌아보았다. 폭포로 가는 작은 오솔길 주변으로 숲이 우거져 있었고 제법 깊은 계곡물도 흐르고 있었다. 성수기에는 입장료도 받는지 매표소가 세워져 있었다. 계룡의 노부인에 따르면 폭포 물을 맞으면 신경통이 낳는다는 속설이 있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 곤 한다고 했다. 민박집과 식당을 포함해서 꽤 큰 부락이 형성되어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 일 것이다.

 “수고하십니다.”

 이 곳 사정도 알아볼 겸, 갈증을 풀 음료 하나도 살 겸, 형민은 가게로 들어섰다. 그리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다양한 품목들이 고루 갖추어져 있었다. 정면에 휴대폰 충전가능이란 표지가 눈에 띄게 걸려 있었다. 요즘 관광지에선 없어서는 안 될 서비스일 것이었다. 그러나 더욱 놀란 것은 그 아래로 난 작은 구멍과 그 너머로 보이는 사람의 손이었다.

 “어서 오세요.”

 느리지만 활기 넘치는 목소리가 구멍을 타고 흘러 나왔다. 주인은 벽 넘어 골방 안에 들어 앉아 있을 터였다. 이유는 모르지만 일단 태연하게 행동하는 것이 예의일 것이다.

 “아, 예. 안녕하세요. 뭐 시원한 거 하나 마실까요?”

 “예, 오른 편 냉장고에 보세요.”

 “예, 감사합니다.”

 형민은 주인이 알려주는 데로 오른쪽으로 이동하며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폈다. 아늑한 분위기에 잘 정돈된 상품들이 주인의 성품을 말해주고 있었다.

 “예, 700원입니다.”

 “감사합니다. 주변이 조용한데 영업을 계속하시네요.”

 형민은 돈을 건네고 가게 안에 마련된 간이 의자에 앉으며 말을 꺼냈다.

 “예, 여름 한 철이죠. 가끔 다른 계절에 왔다 가는 사람들도 있지만요. 그래도 문은 계속 열어요. 여기 밑에 마을 분들도 계시고. 이거 얼굴도 못 보여드리고 말씀드려서 죄송해요. 제가 몸이 좀 불편해서요.”

 “아뇨. 별 말씀을. 덕분에 시원한 음료 잘 마셨습니다.”

 “이 계절에 정말 여기까지 어쩐 일이신가요?”

 “하, 예,”

 형민은 잠시 속내를 털어 놓는 일을 망설였다. 하지만 주인의 소탈한 대답에 마음이 끌린 듯 입을 열었다.

 “예, 실은 뭔가를 좀 조사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게 뭔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여쭤 봐도 될까요. 제가 호기심이 원래 많은데다 이런 대 하루 종일 앉아 있다 보니 좀처럼 얘기할 상대도 없고 해서요.”

 “아, 예, 그러시겠습니다. 실은 전 범죄심리학과에 다니고 있는 학생입니다. 그리고 추리소설을 습작하고 있는 소설가 지망생이기도 하고요. 며칠 전부터 한 가지 사건을 추적하며 이것저것을 조사를 하고 있었는데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요.”

 “예, 그렇다면 역시 그 자살사건들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예? 자살사건이요?”

 “예. 몇 주 전 여기 아래 부락에서 일어났던 자살 사건들, 그러니까 여고생 하나 하고 청년 하나가 이틀 간 연이어 자살한 사건들을 말씀하시는 거 아닌가요? 그게 글쎄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라고 하는 얘기가 많이 돌았지요. 그리고 원주 시내에도 비슷한 일들이 있었다는 얘기도 있었고.”

 “그게 정말인가요?”

 형민은 너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예, 사, 사실인데요.”

 주인은 갑작스런 형민의 반응에 다소 움츠린 듯 했다.

 “그, 그게 정확히 언제 있었던 일인가요? 아니 그 집, 사건이 발생한 현장이 정확히 어디죠?”


7


 “삼촌, 저 형민이입니다. 원주 시경입니다. 김형사님이 옆에 계십니다. 전화 바꿔드리겠습니다.”

 형민의 옆에 앉아 있던 젊은 형사가 전화를 넘겨받았다.

 “아이고 강형사님, 별고 없으시죠.”

 “어, 그래 김형사 수고 많지. 어떻게, 사건 개요는 형민이에게 들었나?”

 “예, 대충 들었습니다. 아주 똑똑한 조카를 두셨습니다. 덕분에 저희 관할 사건 몇 가지도 해결하게 됐습니다. 실은 지난 몇 주 전 동기가 뚜렷치 않은 자살 사건 몇 건이 연달아 일어났었거든요.”

 “어, 그랬구먼.”

 “그게 전부 자살로 가장한 타살이라면 보통 실력을 가진 놈은 아닌데 그런 놈들로 용의자를 선별해 보니까 한 대 여섯 놈이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형민 군이 핸드폰과 관련된 사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를 해서 검토해 보니 작년 말에 출소한 놈 중에 핸드폰 판매상을 하는 놈이 있었어요. 뜨내기들이 하기 쉬운 일이니까요. 알아보니까 그 자식 담당 구역이 사건 지역이랑 겹치더라고요.”

 “허, 그래. 대단하구만. 자식, 아직 어린 줄만 알았더니, 한 건 했어.”

 “예. 신원 확보도 됐습니다. 밤이 되면 자취방에 돌아온답니다. 곧 출동해서 오늘 밤 중에 좀 세게 취조하면 뭐 나올 건 다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래. 잘 됐구먼. 김형사가 고생 좀 해.”

 “예, 뭐 고생은요. 저희야 놈들이 어디 있는지 모르니까 문제지, 어디 있는 줄만 알면 때려잡는 거야 뭐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하하. 배포는 여전하구먼.”

 “예, 그럼 조카분 바꿔 드리겠습니다.”

 형민이 전화를 건네받았다.

 “예, 삼촌 전화 바꿨습니다.”

 “그래, 형민아 수고 많았다. 니가 나한테 배우러 와서는 한 건 해주고 가는 구나. 그래, 공부는 많이 되었냐?”

 “예, 삼촌, 정말 많은 걸 보고 배웠습니다. 형사님들 고생하시는 것도 알았고요.”

 “그래. 무엇보다 발로 뛰는 걸 배웠으면 됐다. 그게 수사의 시작이자 끝이야.” 

 “예, 잘 알겠습니다.”

 “아참, 그건 그렇고. 근데 놈이 왜 죽일 사람들한테 죽이기 전에 전화를 했던 게냐? 그게 놈이 핸드폰 판매원인 것과 관련이 있냐?”

 “글쎄요. 정확한 이유는 직접 들어 봐야 알겠지만 어쩌면 위치 추적을 통해 피해자가 현재 자신의 집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랬을지도 모르겠어요.”

 “위치 추적?”

 “예, 통신사 마다 차이가 있지만 핸드폰은 일정한 가입절차를 거치면 위치를 추적할 수가 있잖아요. 그래서 범인이 사전에 철저한 조사를 해 놓은 다음 자신이 원하는 장소에 피해자가 도착해 있는지 최종 확인을 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통화가 이루어져야 정확한 위치 추적 기능을 쓸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대화 같은 건 필요 없죠. 그리고 아무래도 그런 조치를 자유자재로 취할 수 있으려면 핸드폰 관련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되었고요.”

 “음. 일리가 있구먼. 그럴 수도 있었겠어. 그러니까 피해자의 위치를 최종 확인한 후 평소 안면을 이용해서 접근한 다음 자살을 가장한 살인을 저질렀다 이거지. 그럼 그거 어떻게 하나 같이 타살 흔적 하나 없이 자살로 위장할 수 있었을까?”

 “유도의 혈도법 중에 사람을 순간적으로 기절시키는 방법이 있다고 들었어요. 목 아래쪽의 혈도를 눌러서요. 만일 그런 기술에 능하다면 장갑을 낀 채로 일단 사람들을 기절 시킨 후 범행을 저지를 수 있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어쩌면, 짧은 핸드폰 통화는 그런 일격을 가하기 위해 상대의 주위를 딴 곳으로 돌리려고 그랬던 것인지도 모르고요.”


8


 “형민 군. 그래도 체포 현장은 위험할 수 있으니 이따 놈을 잡을 때는 차 안에 있도록 해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형민은 사복 차림의 경관 두 사람과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차는 아까 오후에 폭포를 찾아 올라갔던 비포장도로로 접어들고 있었다.

 “여기 산 중턱쯤에 꽤 유명한 폭포가 있어요.”

 “아 예, 알고 있습니다. 피해자들이 피서 왔던 곳이 거기라 아까 오후에 들렀었습니다.”

 “그랬군요. 김병우. 그 놈이 지난 여름 그곳에서 3개월 간 파견 영업을 한 걸로 되어 있습니다. 그 동네 사람들도 그렇고 여름이면 거긴 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니까요. 보통 휴대폰 가입하면 입장료 같은 걸 대신 내준다는 조건을 걸기도 하죠. 하여튼 핸드폰 장사하는 사람들도 그렇지, 그렇게 피서지까지 찾아가서 물건을 팔게 할 생각을 하는 거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독하단 생각도 들고.”

 김형사가 앞자리 조수석에 몸을 파묻으며 말을 이었다.

 “사기, 절도, 폭력 전과 14범. 스물세 살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전과가 화려한 놈이에요. 작년 말에 이곳으로 전입했을 때부터 요주의 인물로 관리하고 있었는데 한 동안 조용히 산다 해서 기특하게 생각했더니만.”

 “지 버릇 개 주겠습니까?”

 운전을 하던 다른 형사가 한 마디 거들었다.

 “하여튼 다들 조심해. 뭘 숨기고 있는지 절대 알 수 없는 놈이니까.”

 “예, 알겠습니다. 김형사님.”

 나머지 세 사람이 합창이라도 하듯 함께 대답했다. 체포 전의 긴장감이 잠시간의 침묵 속에 맴돌았다.

 “아참. 그런데 그 폭포수 앞 가게 주인 분은 몸이 불편하신 모양이더군요.”

 “아 최선생이요.”

 “예. 그 분이 최선생님이시군요. 실은 아까 음료수 한 잔하러 들어갔다가 그 분 덕분에 이 지역 사건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 양반 참 딱한 사람이지요. 원래 카이스트에서 최연소로 교수가 되었을 만큼 뛰어난 사람이었는데, 그만 교통사고를 당했답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뭐 머리는 다치지 않아 멀쩡해서 계속 가르치고 연구하고 하는 걸 해 보려하다가, 어디 우리 사회가 그렇습니까? 아무리 좋아졌다 해도 장애인에 대한 차별도 심하고. 또 얼굴에 화상 흉터도 있고 해 노니까. 뭐 전부 정리하고 여기 내려 온 거죠. 한 삼년 돼 가네요.” 

 “그렇군요.”

 “김형사님 저쪽 세 번째 집이 온정리 186-60입니다.”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운전석에 있던 형사가 차의 속도를 늦추며 말했다. 형민은 핸드폰을 열어 시간이 열 한 시를 향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좋아. 여기 차 세워. 윤, 정 두 형사는 뒤로 돌아서 반대쪽 길목부터 차단하고 들어와. 우리 둘이 앞으로 갈 테니까. 모두 총기 점검 다시 하고. 유사시 공포탄 사용 후 바로 실탄 사용해도 좋다. 알겠지.”

 “예.”

 “아직 놈이 도착하지 않았을지 모르니까 방에 불이 켜져 있는지 확인하고 안 켜져 있으면 섣불리 접근하지 마. 아, 그리고 형민군은 차 안에 있거나 너무 멀리 가진 마세요. 이쪽에는 접근하지 마시고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네 사람은 신속하게 차에서 내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형민은 잠시 좌석에 기대어 눈을 붙이고 있다가 바람이라도 쏘일 요량으로 차에서 내렸다. 크게 심호흡을 하자 찬 가을 산 공기가 폐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다. 이제 지난 며칠간을 추적해온 사건이 마지막 종결을 향해 치닫고 있다고 생각하니 적잖은 흥분 감마저 들었다. 그러나 얼마 후 있을 격렬한 체포 현장을 떠 올리자 긴장감으로 몸이 다시 웅크려 졌다.

 그 때 동네 어귀 가로등 밑을 지나는 휠체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형민은 대번에 그가 최선생임을 알아 봤다. 휠체어가 이야기를 나눌 만 한 거리까지 도달 하는 데는 꽤 긴 시간이 걸렸다. 최선생은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수건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최선생님, 안녕하셨습니까?”

 “어이구. 아까 뵀던 분이시네요. 어떻게 제 이름을,”

 “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저는 나형민이라고 합니다.”

 형민은 그제야 이제까지의 자초지종을 간략이나마 이야기할 수 있었다. 형민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최선생은 감탄한 듯 말했다.

 “정말 흥미롭군요.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그런 일들에서 실마리를 발견하고 끝까지 추적하셨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덕분에 억울한 사람들의 원혼을 달래 주게 되었네요. 그 주변 분들도 그렇고요.”

 “아닙니다. 과찬이십니다. 우연히 발견한 것뿐입니다. 계속 운이 좋았습니다.”

 “아니에요. 운으로만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그런 처지가 된 사람들에 대한 마음이 없었다면 중간에 그만 둘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소설을 쓰신다고 하셨죠.”

 “예, 그렇습니다.”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실은 저는 과학을 공부했었습니다. 그렇지만 소설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초면에 과분한 부탁입니다만 오늘 밤은 저희 집에서 묵으시고 내일 시내로 내려가시면 어떨까요. 때로는 과학적 지식이 추리소설의 좋은 소재가 되기도 하죠. 그리고 이웃집 김씨가 원주 시내로 아침 일찍 출근하니까 아침에 그 차로 원주로 가시면 되고요. 어차피 밤새 취조는 경찰들이 하게 될 텐데요.”

 “아, 예에.”

 형민은 잠시 망설였다. 그렇지만 곧 판단이 섰다. 어차피 내일 취조 결과를 듣기 위해서는 이 지역에 머물러야 했다. 잘 곳도 딱히 마땅치 않고 몸이 불편하신 분이 모처럼 한 제의를 거절하지 않는 편이 예의에 맞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예, 좋습니다. 그런 호의를 베풀어 주신다면 저로서는 감사한 일이죠.”

 그 때 마침 먼발치에서 반항하는 용의자를 차에 태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형사님들께 말씀드리고 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형민은 최선생의 휠체어를 뒤로 하고 차가 있는 곳으로 뛰었다.


9


 최선생의 집은 동네가 끝나고 나서도 한 참을 더 들어간 외딴 곳에 자리해 있었다. 그러나 휠체어가 다닐 수 있도록 길은 제법 평평하게 다져져 있었고 중간쯤에 가로등 하나가 켜져 있었다. 시골집의 낮은 담이 허름한 단층 양옥집을 빙 두르고 있었고 입구 앞에는 얼마 전에 세워 놓은 듯 한 깨끗한 우체통이 있었다. 

 “강원도 고성군 온정리 186-72”

 형민은 최선생이 마당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며 우체통에 적힌 주소를 읽었다. 아까 용의자 김병우의 집이 ‘186-60’ 이었던 것이 떠올랐다. 두 집 사이에 집이 10여 채쯤 있는 것이었다. 

 “나선생님, 이쪽으로 들어오시죠. 이래봬도 지하실에는 그럴듯한 실험실도 꾸며져 있습니다. 일단 지하실로 내려가시죠. 제가 뭐 좀 드실 것을 준비해 가겠습니다. 저쪽이 내려가는 입구입니다.”

 최선생은 집 옆 모퉁이의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예, 감사합니다. 그럼 먼저 가서 기다리겠습니다.”

 “예, 그러시죠. 내려가셔서 불을 켜고 계십시오.”

 마당을 가로질러 문을 열자 내려가는 계단의 불을 켜는 스위치가 보였다. 스위치를 올리니 너비가 꽤 넓은 계단이 아래로 뻗어 있는 것이 보였다. 계단을 내려가 불을 켜자 상당히 넓은 공간의, 흡사 공학 실험실과 같은 장소가 펼쳐졌다. 형민의 입에서 저절로 감탄사가 터질 정도였다. 기능조차 알 수 없는 기계들과 각종 전산장비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이곳저곳을 살피며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바지춤의 핸드폰이 진동하고 있음을 알았다. 강형사였다.

 “삼촌, 형민입니다.”

 “그래, 체포 잘 됐냐?”

 “예, 방금 전에 연행해 갔습니다. 아마 밤새 취조가 이루어지겠죠.”

 “그렇겠지. 그래, 넌 어쩔 셈이냐.”

 “예. 전 내일까지 이쪽에 있다가 취조 결과를 확인하고 내려가겠습니다.”

 “그래, 그래라. 어쨌든 수고 많았다.”

 “아닙니다. 수고는요. 삼촌께서 여러 가지로 배려해 주셔서 정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생한 경험을 했습니다.”

 “자식, 겸손하기는. 아참, 그래,”

 “예, 삼촌 말씀하시죠.”

 형민은 계단 옆에 마련돼 있는 소파에 앉으며 여유 있게 말했다.

 “그 왜 범행에 사용되었던 전화 있잖나, 피해자들한테 마지막에 걸었던 거.”

 “예,”

 “그거 모두 번호가 다르다고 했었는데 그 주인을 찾았다. 모두 대포폰이더라. 한 사람이 구매한 거고. 얼마나 철저히 출처를 세탁해 놨던지 찾는데 애 먹었다더라. 구입자가 택배로 받아서 겨우 주소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 주소가, 뭐더라. 어디 보자.”

 “천천히 찾으세요.”

 형민은 하나 남은 마지막 퍼즐이 빈 곳에 맞아 들어가기를 느긋하게 기다리는 마음으로 여유 있게 말했다.

 “어, 여기 있네. 주소가 강원도 고성군 온정리,”

 “네,”

 형민은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마지막 퍼즐 조각이 빈 곳에 끼워지고 있었다. 

 “186-”

 “186이요.”

 “72.”

 “예. 72. 예? 72요? 60이 아니고 72라구요?”

 “그래 72.”

 형민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지막 조각의 한 귀퉁이가 퍼즐 위로 삐져나와 버렸다. 형민은 순간 주변을 돌아보았다. 무슨 생각인가가 떠오르자 뒤통수를 한 데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래, 그렇지!”

 형민은 한 가지를 놓치고 있었다.

 “나선생. 뭘 그리 놀라시나.”

 그러나 제대로 놀랄 틈조차 없이 최선생의 목소리가 저승사자의 호령처럼 지하실험실에 울렸다. 최선생의 휠체어는 널찍한 계단의 옆면에 설치된 레일을 따라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형민은 그 모습에 오금이 저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최선생의 손에 쥐어진 검은 물체가 눈앞으로 들리고 잠시 어른거리더니 이내 무엇인가가 그의 얼굴을 덮쳤다. 숨이 막혔다. 눈이 너무 따가워 바닥을 뒹굴었다. 의식이 엷어지면서 차라리 통증이 조금씩 가셨다. 그러나 더는 의식을 붙들 수 없었다.


10


 “정신이 좀 드나?”

 눈이 여전히 따가웠다. 형민은 의식을 뚜렷이 하기 위해 몇 차례 머리를 흔들어댔다. 뒤통수가 납덩이처럼 묵직하게 느껴졌다.

 “대체 왜, 왜 그런 짓을 한 겁니까? 대체 당신, 정체가 뭐요?”

 형민은 가까스로 눈을 뜨면서 절규하듯 내뱉었다. 얼굴의 한 쪽 면이 완전히 일그러져 버린 최선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 이런. 방금 전의 일로 이제까지의 일들을 모두 간파한 것인가? 역시 뛰어나군. 그렇지만 너무 뛰어나면 늘 문제가 되는 법이지. 나 같은 천재가 이 사회에서 철저히 버려지게 되었을 때처럼 말이야.”

 형민은 몸을 움직여 보려 했다. 그렇지만 의자에 손과 발이 결박되어 있음을 그제야 알아 차렸다.

 “장애인이 된다는 게 어떤 기분인 줄 아나? 거기다 이렇게 흉물스런 몰골로 말이야. 절대로 상상할 수 없을 거야. 그게 어떤 기분인진 말이지.”

 “음,”

 형민의 입에서 저절로 신음 소리가 세어 나왔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곧바로 절망해 버릴걸. 자기 자신을 존중할 수 없다는 거, 그건 정말 견딜 수 없이 비참한 거거든. 그렇지만 난 달랐어. 난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했지. 난 천재니까. 내가 천재라는 건 사방팔방을 활개 치듯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과, 그럴 듯한 외모를 가졌다는 것 같은 것들과는 그렇게 반드시 연관되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나는 보란 듯이 당당히 복귀했어. 더 가멸차게 연구하고 열성적으로 강연했지. 처음엔 관심을 가져 주더 군. 아마 동정이었겠지. 그런데 그 동정이란 거, 그게 그렇게 오래가지는 못하는 거잖아. 겉으로는 그러더군. 내가 너무 날카로워져 있다나? 전에 보여주었던 포용력이 부족해진 거 같다고? 끝까지 진짜 하고 싶은 말들은 안하더란 말이야. 알아? 괴물 같은 병신과는 같이 일하기 싫다고, 너무 무서워서 강의를 들을 수가 없다는 그런 얘기는 끝까지 하지 않더란 말이야!”

 최선생은 다소 흥분한 듯 휠체어에서 일어나 옆의 책상을 잡고 섰다.

 “그렇지만 그때 이미 인간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어. 그래. 그래도 아직 그녀가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녀 역시 그리 오래가지 못하더군.”

 최선생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인 채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잘못만은 아니었지. 주변의 만류가 하도 심했으니까. 그렇다 해도 결코 용서할 순 없었어. 나만을 사랑한다고 영혼을 건 맹세를 했던 여자가 날 버렸다는 건, 그건, 인간에겐 더 이상 희망은 없다는 걸 의미하는 거였으니까.”

 고개를 든 최선생의 눈빛에는 살기가 비등했다. 이미 자신의 감정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상태가 아닌 것 같았다. 형민은 그저 최선생의 말을 더 들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이곳으로 숨어들었다. 그때까지 모아둔 돈과 특허권을 통해 얻고 있는 수입 모두를 여기 투자했어. 그리고 한 가지 실험을 시작했지. 이미 오래 전부터 그 가능성은 알려져 있었지만 누구도 섣불리 시작하지 못했던 실험. 바로 인간의 뇌를 통제하는 실험이야.”

 형민은 최선생의 말을 들으며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인간은 뇌에 의해 통제되지. 그리고 이미 과학은 뇌를 통제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개발해 왔어. 좁쌀만 한 알약 하나로 방금 전까지 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결심했었던 사람을 순식간에 순한 양처럼 만들 수도 있으니까.”

 최선생이 버티고 선 책상 위로 가장 큰 크기의 컴퓨터가 화면이 켜진 채로 작동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지만 그런 약물은 뇌 전체에 영향을 미칠 뿐이야. 그래서 결국 목표로 하는 몇 부위에 작용하게 되긴 하지. 그러나 그런 식으로는 의도한 특정 행동을 불러일으킬 수가 없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게 하거나. 누군가를 찾아가게 하는 것 같은 고등적인 행동을 하게하기 위해서는 보다 세련된 도구가 필요해. 원하는 행동을 정확하게 할 수 있도록 뇌 속의 각 지점들에 정확히 작용하는 그런 매개체 말이지. 그건, 그건 바로 소리야.”

 형민은 컴퓨터 옆으로 아까 자신을 급습했던 가스총과 스피커에 연결된 작은 오디오 같은 기계가 놓여 있는 것을 확인했다.

 “사람들은 흔히 시각이 가장 강력한 감각이라고 생각하지. 확실히 가장 화려한 것이긴 해. 가장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그렇지만 뇌의 비밀을 풀 수 있는 키는 청각에 있었어. 바로 소리지. 엄마 배속에서부터 엄마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키워졌던 청각 말이야. 그 태고의 감각이 뇌 속에서 자신의 의지와 이성으로 행동을 통제하도록 하는 기제를 해체해 버리는 열쇄가 되더란 거야. 물론 그 기제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수십 단계가 넘는 자극과 반응의 과정을 반복야만 했지. 그렇지만 일단 그렇게 통제 기제가 해제되면 그 다음부터는 어떤 행동이든 유발할 수가 있어. 소리를 통해 그 사람의 감정과 본성, 본능, 그런 것들과 완전히 동일한 방식으로 자극을 줄 수가 있거든.”

 형민은 이어지는 최선생의 말에서 점점 사태가 심각한 것임을 절감하고 있었다. 형민의 눈은 필사적으로 주변을 살폈지만 최선생은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를 불러일으키는 뇌 속의 지도를 완성하는 것은 실로 지난한 일이었지. 그건 마치 망망한 대해 속에 빠진 보물선을 찾는 것과도 같았어. 그 동안의 연구로 대략 어느 지점인지는 알 수 있었다 해도 결국은 바다 속 밑바닥을 샅샅이 훑는 것과 같은 일을 하지 않고는 결코 완전한 지도를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지. 제대로 된 생각이 박힌 놈이라면 누가 그런 무모한 짓을 하겠나. 말하자면 한반도 크기의 땅을 구석구석 뒤져도 될까 말까 한 일인데 말이야. 그렇지만 난 달랐어. 그게 아니라면 내 존재의 이유조차 없어지는 것이었으니까. 지난 삼년간의 대부분의 시간을 거기에 허비했다. 하지만 단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았어. 내가 갈던 복수의 칼날은 하루하루 더 날카로워지기만 했을 뿐이니까.”

 최선생은 책상에 몸을 의지하며 한쪽 끝에서 다른 쪽으로 이동했다. 형민은 최선생이 돌아 선 사이 반대편을 빠르게 살폈다. 그러나 결박을 풀고 위기를 벗어나는데 이용할 만한 물건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지난 초여름이었어. 실험이 최종적으로 성공했던 것은 말이야. 이제 남은 건 테스트 뿐이었지. 과연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둘까. 사람들의 행동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을까? 난 대상을 물색했지. 뭐 먼 곳에서 찾을 필요도 없더군. 여름이 되자 여느 때처럼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니까. 세상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신음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 따위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그저 자신들에게 주어진 것을 마음껏 즐기기 위해 삼삼오오 모여든 사람들 말이야.”

 최선생의 눈빛은 광기로 빛나고 있었다.

 “난 그 중 특별히 단란하고 화목한 사람들을 지목했다. 그들에게 더 처절한 복수를 해 주고 싶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통해 이 실험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가가 들어날 수 있기 때문이야. 사람들이 별 생각 없이 핸드폰 충전을 맡겼을 때 난 그들의 폰 번호를 손쉽게 얻을 수 있었어. 그리고는, 대략 두 달 전부터 실험에 들어갔다. 몇 차례의 실패가 있었지. 그렇지만 결국 3주전 실험으로 멋지게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었어. 전국 방방곡곡의 10여 곳에서 단란한 연인과 가족들이 서로를 죽이고 또 그 자리에서 자살을 했으니까. 흐흐흐 그래. 처절한 파멸이지.”

 “으으,”

 형민은 분노에 떨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의자에 결박된 상태로는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실험은 원래 30명을 대상으로 했었어. 그 중 그 시간에 주변에 아무도 없었던 사람들은 그저 그냥 혼자 자살을 한 것이 되었지. 이곳의 몇 사람들처럼 말이야. 잘 모르는 사람과 함께 있었다면 살인은 실패했겠지. 저항이 만만치 않았을 테니까. 결국 상대가 결코 자신을 죽이지 않을 거라 믿었던 사람들, 그러니까 가족이나 연인들만이 서로를 죽이게 되었던 거야. 자, 그럼 어때, 백문이 불여일견인데, 한 번 직접 체험해 보는 것이.”

 최선생은 책상 반대쪽에 놓여 있던 오디오 모양의 기기 앞에 섰다. 

 “물론 질문을 했다고 해서 선택권을 주려고 했던 건 아니야. 자, 직접 느껴보라고. 내가 인간을 심판하기 위해 완성한 필생의 대작을 말이야.”

 최선생은 귀마개를 양쪽 귀에 끼우며 스위치를 눌렀다. 형민은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휘 저었다. 그러나 귀로 들려오는 기분 나쁜 기계임을 막을 수는 없었다. 마치 아무 화면도 나오지 않는 TV가 켜져 있을 때 나는 소리와 같이 째지는 듯 한 낮은 기계음이 처음에는 작았다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런데 소리는 스피커에서 커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머릿속에서만 커지고 있음을 형민은 곧 알 수 있었다. 갑자기 전신의 모든 근육이 저려 오고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렸다. 형민은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뛰어 나가야 할 것 같은 열망에 휩싸여 묶인 몸을 심하게 뒤틀어 뎄다. 

 “으어어어...”

 그러던 것이 갑자기 기분이 침울해 지면서 한없는 슬픔에 목이 메기 시작했다. 가슴을 죄어 오는 아픔이 자신을 어떻게 해버리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형민은 의자에 묶인 채로 미친 듯이 몸서리를 쳤다. 더는 의식을 붙들고 있을 수 없다고 느끼는 순간 전신의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옷은 이미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최선생은 귀마개를 빼며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직접 느껴본 기분이 어떤가? 만일 줄에 묶여 있지 않았다면 자넨 아마 나를 죽이고 스스로 자살을 했을 거야.”

 최선생은 형민이 의식을 회복하도록 기다리는 듯 잠시 침묵했다. 

 “자, 이제 내 계획이 무엇인지 말해 줄까. 여기 이 DVD가 보이나?”

 최선생은 DVD 한 장을 케이스에서 꺼내 보이며 말했다. 

 “이건 한 온라인 쇼핑몰 사이트의 회원 정보 10만 건이야. 이것도 남이야 어떻게 되든 자신의 잇속만 챙기면 그만이라는 버러지 같은 인간들 덕분에 내 손에 들어 온 것이지.”

 “대, 대체 그걸로 뭘 어쩌려는 거야.”

 형민은 가까스로 눈을 뜨며 말을 꺼냈다. 아직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조차 없었다. 

 “난 오늘 이들 모두에게 한 통씩의 메일을 보낼 거야. 이 쇼핑몰에서 할인 쿠폰을 발행하는 형식으로 말이야. 실제로 메일에는 아무 내용도 없어. 그저 메일을 열면 배경음악이 조용히 연주될 뿐이지.”

 “뭐, 뭐라고.. 10, 10만 명 모두에게?”

 형민의 입에서 신음소리 같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게다가 거기에 삽입된 특수 프로그램에 의해 보안등급이 2급 이하인 컴퓨터의 경우 자신의 메일 시스템에 저장되어 있는 모든 주소로 같은 메일을 전송하도록 되어 있지. 메일은 오늘 밤 사이에만도 일파, 만파 퍼져나가게 될 거야. 자. 그럼 대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미, 미친 짓이야. 당장 그만두지 못해!”

 형민은 최선생을 덮치기라도 할 듯 몸부림쳤다.

 “아까 네가 처음 기절했을 때 이미 모든 준비는 완료해 두었어. 이제 이 버튼만 누르면 모두 자동으로 진행되도록 되어 있지. 자신의 주변을 돌아볼 줄 모르는 인간들, 남의 고통을 손톱에 낀 때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인간이란 족속이 철저한 처벌을 받는 날이야!”

 최선생은 컴퓨터를 조작하기 위해 몸을 돌리려 했다. 그 순간 형민은 몸을 움직이려다 의자에 결박되어 있던 발이 풀렸음을 알아차렸다. 기계음을 듣고 심하게 몸부림을 치던 중 그렇게 된 모양이었다. 형민은 두 손이 의자에 묶인 채 몸을 일으켜 최선생에게 돌진했다. 

 “엇, 억..”

 몸이 부딪치면서 둘 모두 바닥을 굴렀지만 형민은 책상에 의지하며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든 컴퓨터가 작동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렇지만 두 손이 묶인 채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최선생 역시 주변 기물을 잡고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무언가 결단이 필요했다. 일단 최선생이 일어나면 두 손이 자유로운 그가 더 유리해 질 것이 분명했다. 

 형민은 순간 아까 최선생이 기계음을 틀었던 기기를 보았다. 오디오를 작동시키는 버튼이 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저 정도라면 머리로 받아서라도 작동시키는 것이 가능해 보였다. 형민은 잠시 망설였다. 그렇지만 뒤편에서 최선생이 자신에게 다가 오고 있는 것을 본 순간 그는 몸을 날렸다. 

 “비이이이-”

 기계음이 작동됐다. 형민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몸이 묶인 채로 괴로워하다 깨어나겠지만 최선생은 기계음에 따라 행동하게 될 것이다. 즉 자신은 최선생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겠지만 결국 최선생도 자살하게 되므로 10만 명, 아니 그 이상의 사람들의 목숨을 살릴 수 있을 거란 판단을 한 것이었다. 

 머리 속 뇌를 휘 저어 버리는 듯 한 폭풍이 또 한 차례 지나갔다. 전신의 근육이저려옴과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이 다시 한 번 순서에 따라 진행되었다. 형민은 기진맥진한 속에서 자신이 지금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감지해 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자신의 발가락이 계속해서 꼼지락 거리고 있다는 것을 곧 알아차렸다.

 “역시 생각보다 뛰어난 놈이군. 하마터면 당할 뻔 했어. 내 계획을 막기 위해 자신은 죽어도 좋다는 것인가? 같잖은 영웅심이라도 발동한 거야?”

 최선생은 다시 책상에 의지하며 몸을 일으켰다. 

 “아니, 어, 어떻게..”

 “소리가 나는 순간 귀를 막았지. 처음엔 뭘 하려는지 몰라 하마터면 걸려들 뻔 했지만 말이야.”

 “으...”

 “다시 일어서려 하면 가스총을 쓰겠다. 얌전히 있는 게 좋아.”

 최선생은 몸을 움직여 책상 반대편의 가스총을 집어 들며 말했다.

 “심판의 순간을 보고 기록할 녀석이 하나쯤 있는 게 나으니까 말이야.”

 “으으으..”

 형민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의 절망감에 치를 떨었다. 그 때 순간 형민의 눈에 먼발치에 떨어져 있는 자신의 핸드폰이 보였다.

 “누가 누구를 심판한다는 거야?”

 “뭐라고?”

 “당신이 과연 심판할 자격이 있을까?”

 형민은 빠르게 판단이 섰다. 아까 전화가 끊어지면서 삼촌은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연락을 취해 지금 형민이 있는 곳으로 경찰이 급파 될 수 있도록 조치했을 것이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했다.

 “그래. 인간은 어떨 땐 버러지 같은 존재가 돼 버리기도 하지. 하지만 또 얼마든지 위대한 존재도 될 수 있다는 걸 당신도 잘 알잖아. 우리가 인간에게 기대를 걸 수 있는 건, 그렇게 한없이 타락할 수도 있는 인간이 언제나 스스로를 돌아보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사실 때문 아닌가? 인간이 진정으로 위대한 건 저절로 그렇게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는 것 때문 아니야?”

 형민은 최선생의 눈빛에서 약간의 망설임을 보았다.

 “당신은 인간을 심판할 권리가 없어. 당신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아무 의미 없이 죽어 갈 사람들이 모두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라고 확신할 수 있어? 그들이 모두 당신이 증오했던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지?”

 “그런 말장난에 내가 넘어 갈 것 같아? 천 번도 더 생각해 본 일이야. 선한 행동? 정의? 그런 건 모두 가증스런 가식에 불과해. 결국 자기에게 돌아올 이익을 생각해서 하는 얄팍한 눈속임에 다름 아니라고. 그런 게 지켜져야 할 가치가 있는 것들인가?”

 “하하하. 얄팍한 눈속임이라고? 가식이라고? 천만해. 당신은 왜 과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지? 그건 자신의 영달만을 위한 것이었나? 정말 인류를 위해, 다른 사람들이 더 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던 거야? 만일 그런 것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인간은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지. 그리고 그런 것이 조금도 없었다면 당신은 인간을 심판할 자격조차 없는 존재인 거야.”

 “헛소리 집어 치워! 난 너희들 관 달라. 난 천재야. 너희들에게 버려진 천재지. 자. 이제 날 버린 죗값을 톡톡히 치르게 해 주겠다. 모두 죽어버려!”

 “최경도, 꼼짝마! 움직이면 쏜다.”

 경관 세 사람이 어느새 계단 아래로 쇄도하고 있었다. 맨 앞의 김형사가 최선생을 향해 총을 겨눴다. 최선생은 잠시 망설인 듯 하다가 갑자기 가스총을 김형사에게 겨눴다. 

 “총 버려. 안 그러면 쏜다.”

 김형사의 위협에도 최선생은 총을 거두지 않았다.

 “탕. 탕. 탕.”

 “으어어..”

 공포탄 이후 발사된 두 발의 총성으로 최선생은 책상 앞으로 넘어졌다. 그렇지만 책상 귀퉁이를 잡고 몸을 일으키더니 필사적으로 컴퓨터 자판을 눌러댔다.

 “안 돼요! 못하게 하세요. 어서, 어서요!”

 의자에 묶인 채 넘어져 있던 형민은 온힘을 다해 절규했다. 잠시 멍하니 서있던 두 경관이 최형사에게 달려들어 그를 책상에서 때어냈다. 김형사는 형민에게 다가가 결박을 풀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나요?”

 형민은 대답도 없이 컴퓨터로 달려갔다. 화면은 메일 전송률이 이미 2%를 넘고 있음이 표시하고 있었다. 형민은 필사적으로 버튼을 눌러댔다. 그러자 잠시 후 메일 전송이 중지되었다는 메시지가 떴다.

 “이게 대체 뭡니까?”

 “맙소사. 벌써 2천통이 넘게 보내졌어.”

 형민은 절망하며 책상 옆에 주저앉았다. 두 경관이 안고 있던 최선생은 이미 숨을 거두었는지 한 경관이 눈을 감겨주고 있었다. 형민은 눈을 감은 채로 체념 한 듯 말을 꺼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이 메일들에는 듣는 사람이 옆 사람을 죽이고 스스로도 자살하도록 하는 특수 음파가 들어 있어요. 그런데 그게 지금 2천명도 넘는 사람에게 보내진 겁니다.”

 “뭐, 뭐라구요?”

 “사실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모두 귀를 막으십시오. 메일 내용을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메일을 열었을 때의 음을 들으시면 큰 일 납니다. 모두 조심하십시오.”

 형민은 경관들 모두를 한 번씩 돌아 본 후 메일을 열며 재빨리 귀를 막았다. 그리고 충분한 시간이 흐른 뒤 귀에서 손을 때었다. 그런데 스피커에서는 여전히 감미로운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다른 경관들도 형민을 따라 귀에서 손을 땠다. 음악을 듣고 있던 한 경관이 조금은 황당한 듯 물었다.

 “호, 혹시 이 노랩니까? 그 음파라는 게?”


11


 “예, 삼촌. 가스총은 1회용이었답니다. 아마 최경도는 스스로 죽음을 자초했던 것 같아요.”

 형민은 자신의 방 컴퓨터 책상에 앉아 강형사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글쎄요. 스스로 해 온 일들에 대한 죗값을 치르려 했었는지도 모르죠. 조사 결과 음파를 만들었던 과정이나 방법에 대한 자료도 모두 소각한 것 같답니다. 오디오에 저장되어 있던 음원도 저희가 제거했고요. 그건 아직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위험한 것인 것 같습니다.” 

 형민은 컴퓨터의 전원을 켜며 말을 이었다.

 “사건일지 상에 연달아 일어난 두 사건이 있었어요. 한 사건은 서울에서, 다른 사건은 부산에서 일어난 것이었는데 두 사건은 사망 추정시간을 아무리 늘려 잡는다 해도 채 네 시간도 되지 않는 사이에 발생한 것이었거든요. 만일 처음 의심했던 김병우가 범인이었다면 사실상 할 수 없는 일이었죠. 그걸 잊고 있었네요.”

 형민은 인터넷에 접속하여 자신의 메일 계정을 확인했다. 며칠간 확인하지 않은 메일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사건이 조용히 처리될 수 있도록 삼촌께서 힘써 주십시오. 김형사님도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순리적인 일일 거란 의견이십니다.”

 말을 잇던 형민은 순간 한 통의 메일을 보고 놀라 잠시 말을 멈췄다.

 “아, 아닙니다. 삼촌. 고생은요. 정말 많을 것을 보고 배웠습니다. 삼촌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삼촌, 그럼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전화를 급히 끊은 형민은 다시 한 번 메일 제목을 확인했다.

 ‘나형민 군에게.’

 발신자는 분명 ‘최경도’로 되어 있었다. 형민은 자신도 최선생이 말했던 쇼핑몰의 회원임을 상기했다. 그렇다면 메일은 그가 자신의 이름을 알게 된 후, 그러니까 가스총을 맞고 실신한 동안 작성된 것이었다.

 메일을 열기 위해 클릭하려던 손이 잠시 머뭇거렸다. 형민은 다시 귀를 막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는 귀를 막지 않은 채 메일을 열었다.

 ‘형민군. 이렇게 마지막 순간에 형민군을 만나게 된 것은 신이 나에게 허락한 마지막 행운인 것 같소. 아마 이 메일을 보고 있을 때쯤이면 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요. 난 지난 세월을 절망과 분노, 복수심 속에서 살았소. 그게 어떻게 날 파괴하는지도 모르면서 그것들이 주는 힘에 의지해 살았던 거요. 지금은 마음 깊이 후회하고 있소.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파멸과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주었다는 것을, 그것이 얼마나 사악한 짓이었는가를 스스로 느끼지 조차 못했던 내 자신이라는 것을, 이제는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소. 내 한 몸이 죽어진다고 해서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죄가 아니라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인 것 같소.’

 형민은 메일에서 눈을 때지 못하고 계속 읽어 내려갔다.

 ‘그렇지만 우리 인간이 스스로를 다시 돌아봐야 할 때가 된 것은 사실이오. 난 한 때 인류의 선구자로, 인류의 미래를 개척하는 선지자라 자부했었소. 그렇지만 사고를 겪고 난 후 난 인간의 가장 더러운 면들을 적나라하게 경험하게 되었소. 그것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도, 그럴 자격도 내겐 없소. 나도 똑같은 인간일 뿐이니까. 그렇지만 이젠 세상이 바뀌었소. 그 동안 우리가 힘없고 약한 사람들을 간단하게 무시해버렸던 이유가 무엇이오. 그건 그야말로 그들은 나약한 존재일 뿐이기 때문이었소. 그렇지만 이젠 아니오. 만일 우리가 그런 사람들의 분노와 슬픔을 계속 외면한다면 이제 과학기술의 발달로 그들은 우리 모두를 위협할 힘을 얻게 될지도 모르게 되었소. 적어도 내 한 존재가 그 점을 입증한 셈이니까. 그래서 이 사실을 인류에게 알리고 싶소. 형민군이 억울한 사람들의 원을 위해 끝까지 추적을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이나, 추리소설을 써보고자 하는 소설가 지망생이라는 사실은 운명의 신이 적어도 나의 마지막 소망은 진실 된 것임을 인정해 주었던 것으로 믿고 싶소.’

 형민은 최선생의 진지했던 모습을 떠올리며 잠시 고개를 숙였다.

 ‘이제 나는 형민 군을 상대로 마지막 연기를 펼칠 생각이오. 나는 최대한 진지하려 하오. 형민 군이 지금의 느낌을 떠 올리며 보다 생생한 글을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가능한 가장 사악하고 가장 악랄한 모습을 보여주려 하오. 형민 군은 의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니 반드시 나를 위해, 그리고 인류를 위해 좋은 글을 써 주실 것으로 믿소. 감사하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스총은 미안했소. 그럼.’

 메일을 모두 읽은 형민은 한참 동안 의자에 기대어 천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 책상에 바짝 다가앉았다. 잠시 후 그의 손이 빠르게 자판 위를 움직였다. 모니터 위로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글 한편이 올라가고 있었다.


 ‘전화 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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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인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