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 우주선은 토성의 위성인 타이탄으로 보급품을 나르기 위해 3개월 전에 화성을 떠났다. 그리고 일주일 전에는 목성의 궤도를 지나 계속 타이탄을 향해 항해하고 있었다.
어젯밤, 나는 자정까지 근무를 서고 항해사인 상호와 교대했다. 아침(?)에 나는 눈을 뜨자마자 졸린 눈을 비비며 함교로 올라갔다. 복도의 밝은 조명이 아직 떨어지지 않은 졸음을 쫓아주고 있었지만 햇살이 그리웠다. 특히 칠흑 같은 어둠뿐이 우주에선 더욱 그랬다. 나는 햇살이, 태양이 지구의 인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새삼 생각하면서 혹, 내가 태양에 길들어진 건 아닌지, 대우주 항해의 시대에 그런 건 빨리 떨쳐 내야할 습관은 아닌지 생각하면서 오늘은 뭔가 재미난 일이 없을까 생각했다.
함교로 들어서자 당직인 상호가 중앙에 위치한, 그리고 조종실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높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좋은 아침.”
아침은 쥐뿔.
나는 상호의 그런 말을 기대했다. 늘 그런 식이다. 해가 뜨지 않는 우주선에서 시계가 가르치는 시간 외에는 아침이란 없었으니까.
그러나 상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조는 듯했다. 무료했던 나는 좋은 장난거리가 생긴 걸 기뻐하며 상호를 놀래주려고 살며시 다가갔다. 그러나 그는 졸고 있지 않았다. 뭔가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엇인가에 관한 ‘성분 분석 결과 보고서’였다. 상호는 보고서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게 뭐야?”
“아! 깜짝이야.”
“놀라긴.”
놀래주려고 다가왔지만, 보고서를 읽는 사람을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다.
“뭐야?”
나는 상호의 손에서 보고서를 빼앗아 보며 물었다.
“성분 분석 보고서.”
“그건 알고.”
나는 내가 아는 것 이외의 대답을 원했다.
“뭐에 대한 성분 분석이냐고.”
“저거.”
상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두운 전방 큐폴라(cupola : 돔 형태의 창문) 너머를 가리켰다. 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들었다. 정비 로봇이 움직이고 있었지만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보고서를 읽어나갔다.
[산소 : 88.881%, 수소 : 11.111%, 나트륨 : 0.001%, 마그네슘 : 0.001%, 철 : 0.001%, , 망간 : 0.001%, 불소 : 0.001% …… 알 수 없는 물질 : 0.001%]
이건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봤음직한 흔한 성분 분석 결과였다.
“뭐야, 물이잖아?”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다시 분석 결과를 넘겼다.
“응.”
상호의 대답은 간단했지만 목소리는 어딘지 심각해 보였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런 걸 왜 했는데?”
“넌 저게 안 보이냐?”
상호는 다시 창 밖을 가리키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가?”
나는 다시 창 밖을 내다보았다. 그제야 함교의 밖을 떠돌고 있는 정비 로봇과 성준이 보였다. 우주복 소매의 식별용 띠를 보고 성준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쟤는 또 왜 나가 있……”
성준을 바라보던 나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성준이 마치 무엇인가에 가려진 듯 일그러지며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뭐야?”
“물.”
놀라 묻는 내게 상호는 ‘알잖느냐.'라는 듯 말했다.
“물?”
이제 상호가 나를 놀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정말 물이었다. 나는 좀 더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이 막막한 우주에 얼지 않은 물이라니? 그것도 사람을 가릴 만큼 큰 물방울이라니!
우주선의 탐조등이 구형의 물방울을 내리훑고 있었다. 얼핏 물방울의 크기가 수십 미터는 돼 보였다. 물방울이라고 부르기에는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성준을 가릴 때만해도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 무중력 상태에서 콩알만한 물방울이 떠다니는 건 본 적이 있지만 저렇게 큰 물방울은 처음이었다. 나는 아직 내가 잠이 덜 깬 게 아닌가 생각했다.
“저게 도대체 뭐야”
“물!”
상호는 다시 힘주어 말했다.
“장난하지 말고.”
나는 처음 겪는 이 난감한 상황에 짜증을 내며 말했다.
“물이야, 물. 나도 더는 몰라.”
밤샘 근무에 신경이 예민해졌는지 상호도 짜증을 내며 말했다.
“언제 나타난 거야?”
“2시간 전에.”
“근데 왜 안 깨웠어?”
“넌 어제 밤 근무였잖아. 그래서 안 깨운 거야. 너 빼고 다들 깨웠어.”
“그래도 그렇지. 이런 상황에서……”
“우주선이 고장난 것도 아니고, 외계인이 총 들고 위협하는 것도 아닌데 뭐. 그냥 이상한 게 나타난 것 뿐이야, 지금까진.”
상호의 대답이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밤샘 근무를 선 그를 붙잡고 실랑이를 벌이고 싶진 않았다.
“근데 다들 어디간 거야?”
“성준이랑 종주는 밖에 나갔고, 정석이랑 함장님은 만약을 위해 기갑실(airlock)에서 대기중이야.”
다시 고개를 돌려 밖을 내다보니 성준이 물방울을 향해 무엇인가를 쏘고 있었다. 그 반대편에는 로봇과 성준의 애인이자 유일한 여성 승무원인 종주가 있었다.
“뭐 하는 거야?”
“굴절률 조사.”
“굴절률?”
“스펙트럼 분석 결과로는 물이라고 나오는데, 안쪽은 모르니까. 만약 진짜 물방울이라면 물에 맞는 굴절률이 나오겠지만 안에 뭔가 다른 게 있다면 다르게 나오겠지.”
잠시 후, 교신용 콘솔에서 성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 물의 굴절률은 1.33인데 지금 측정된 굴절률은 1.19가 나왔습니다.
성준이 말을 마치자 조종실에는 적막감이 감돌았다. 나는 상호를 돌아보았다.
“왜 대답 안 해줘?”
“나한테 보고하는 게 아니라, 함장님한테 보고하는 거야.”
- 좋아, 우선은 거기까지 하고 철수해. 함교?
그제야 상호가 헤드셋을 켜고 말했다.
“예, 함장님.”
- 화성에선 다른 지시사항 없나?
“그쪽도 지구에 물어보고 있는 것 같은데요.”
- 젠장. 이래서 앤시블(ansible)이 빨리 나와야하는데
조나단 베이커 함장의 투덜거림이었다.
역시 고전 SF 소설 광다운 말이었다.
베이커 함장을 비롯해 우리 모두는 함교에 모여 물방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방울 옆에는 카메라를 장착한 정비 로봇이 반대편 모습을 모니터를 통해 보여주고 있었다. 상호는 지친 눈을 억지로 부릅뜨고 있었다. 그러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말했다.
“밖에서 보기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 뭔가가 있는 거지.”
성준이 심드렁히 말했다.
“그게 어딘데?”
턱을 어루만지던 정석이 물었다.
정석의 물음에 성준은 그저 어깨를 으쓱거렸다.
종주가 말했다.
“진짜 물방울의 경우엔 결국 모두 보이게 돼있는데……, 근데 이건 좀 달라.”
종주의 말에 상호가 심드렁히 말했다.
“좀? 내가 볼 땐 많이 다른 것 같은데.”
“결국 안으로 들어가 봐야겠군요.”
내가 함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외계 생명체와의 조우(遭遇)에 한껏 기대에 차 있었다. 우주선에 탄 승무원 중에 외계인과의 조우를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나의 기대와는 달리 함장과 다른 동료들의 생각은 달랐다. 정석이 말했다.
“그냥 어떤 불순물이 있을 수도 있어. 별거 아닐 수 있다는 얘기지.”
정석의 말에 성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어떤 행성이나 위성에서 터져 나온 물이 우연히 뭉친 것일 수도 있지.”
“그럼, 들어가도 상관없겠네?”
나의 말에 함장은 고개를 저었다.
“함장으로서 나는 누구도 위험에 빠뜨릴 생각은 없네. 명령이 없다면 말이야. 그리고 우린 탐사선도 아니고, 그저 보급선이잖아. 괜히 섣불리 나섰다가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정말 곤란해.”
“단순한 물일 수도 있다잖아요.”
나는 함장에게 정석이 한 말을 상기시켰다.
“만약 저 안에 외계 생명체가 있다면 우리의 행동이 저들에게 어떤 오해를 사게 될 수도 있네. 어쩌면 우리의 행동 하나 때문에 인류가 끝장이 날 수도 있어.”
함장의 말에 상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리고 저들의 의도도 알 수 없잖아.”
“그래, 만약 좋은 의도가 있다면 왜 아무 말 하지 않는 거지?”
성준도 거들었다.
내 편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우리와 교신하는 방법이 다를 수 있잖아.”
“맞아, 그럴지도 몰라. 어쩌면 우리와 전혀 다른 존재일 수도 있어. 잘 봐, 저건 분명 물방울이잖아. 그러니까 저 안에는 물고기가 살고 있을 거야.”
성준의 말에 모두 피식 웃고 말았다.
“물고기 때문에 굴절률이 변했다? 그것도 나쁘지 않군.”
상호가 턱을 어루만지며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난 광어였으면 좋겠는데, 회 쳐 먹게.”
성준의 말에 정석과 상호가 피식 웃었다. 그러나 요리사인 종주는 정색하며 말했다.
“난 회 칠 줄 몰라.”
나는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근데 정말 안에 물고기가 있을까?”
종주는 혼잣말처럼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석이 대답했다.
“글쎄, 그렇진 않을 것 같은데. 물고기가 있다면 물방울의 용존산소량이 줄어들었겠지. 그리고 하나둘 죽어서 떠올랐을 거야. 그리고 우주에는 많은 우주 먼지들이 날아다니는데 물방울로 그걸 막을 순 없어. 저 정도의 지름은 쉽게 관통할 걸.”
정석의 말에 성준은 아쉬운 듯 말했다.
“그럼 아까운 물고기들은 다 죽었겠군.”
나는 외계인과의 조우에 미련을 못 버리고 아쉬워하며 말했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우선은 뭐든 가능하다는 쪽으로 생각해봐야지. 그리고 저 물방울이 얼지 않았다는 것도 신기하지 않아?”
그러나 베이커 함장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어쩌면 유로파에 떨어진 소행성 때문에 떨어져나온 물방울들이 뭉친 것일 수도 있어. 그래서 아직 식지 않은 걸지도 모르지.”
“그럼 생선은 다 익었겠는데.”
성준이 모두를 향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나는 함장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지금처럼 정지해 있는 게 아니라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모르는 어떤 힘에 의해 정지해 있는 걸지도 몰라. 여기가 우리가 모르는 라그랑주 포인트(두 천체 사이에 작용하는 중력이 0가 되어 역학적으로 안정되는 위치)일 수도 있고.”
“하지만……”
내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베이커 함장은 손을 들어 막았다.
“우선 지구의 결정을 기다려보자고.”
2.
“주님, 은혜로이 내려주신 이 음식과 저희에게 강복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지구로부터 연락은 우리가 아침 식사를 차려놓고 베이커 함장이 식사기도를 하던 때였다.
성준이 지구로부터의 전문을 가지고 식당으로 들어섰다.
“뭐라던가?”
함장이 커피 잔을 입에 가져가며 물었고, 성준은 우리 모두 앞에서 전문을 읽어나갔다.
지구에서는 우리가 1차 조사를 할 것을 지시했다. 당연한 지시였다. 목성까지 탐사선이나 탐사 위성을 보내려면 최소한 3개월은 걸릴 터였다. 그때까지 저 물방울이 그대로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이곳을 떠날 순 없었다.
우리는 정비 로봇의 팔에 가스 크로마토 그래프와 매스 스펙트로 미터를 장착해 들여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얼굴 부위에 달린 2대의 카메라 외에, 로봇의 양쪽 팔에도 카메라를 설치했다.
“전파가 방해받을 지도 모르니까, 케이블을 연결해서 안으로 들여보내게.”
함장의 지시로 나는 전송 케이블을 다발로 묶어 3개나 연결했다. 나름 만약의 만약을 대비해서였다.
“근데 만약에 외계인이 이 로봇을 보고 이 로봇이 우리 인류의 보편적인 모습으로 오해하면 어쩌지?”
나의 농담 섞인 걱정에 성준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글쎄, 난 그것보다 이 로봇이 방수가 제대로 될지 걱정인데.”
그 말에 나도 걱정이 됐다. 우리가 입는 우주복이야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어 물 속에서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정비 로봇은 제작 때부터 그 작업 환경이 우주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방수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럼 우주복을 입혀야할까?”
나의 물음에 성준은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성준이 조종간을 밀자, 우주복을 입은 로봇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물방울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나 나는 로봇이 왠지 발버둥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로봇이 물방울에 닿자 물방울은 지구의 호수처럼 작은 파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파동이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제자리로 왔을 무렵엔 이미 로봇이 물방울 안으로 사라진 뒤였다.
처음 물방울 안으로 들어갔을 땐, 투명한 물방울 반대편이 그대로 비췄다. 그러다 10m쯤 들어갔을 때부터 가스 크로마토 그래프와 매스 스펙트로 미터가 변화된 수치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것 좀 봐.”
종주의 말에 계측값을 확인해보니 서서히 물의 밀도가 줄어들면서 질소와 산소의 량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또 그만큼 물의 양도 변하고 있었다. 마치 대기권 위로 올라갈수록 공기가 점점 희박해지듯이 안으로 들어갈수록 물이 희박해지고 있었다. 물과 공기가 완벽하게 분리되는, 우리 세계와는 뭔가 다른 듯했다.
나는 점점 물방울 속으로 사라지는 케이블을 바라보았다. 마치 호수에 던져진 낚싯줄 같았다. 그때 갑자기 케이블이 위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미끼를 문 물고기가 낚싯줄을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로봇의 상태는?”
“이상 없습니다.”
함장의 물음에 모니터를 응시하던 정석이 대답했다.
성준은 로봇을 조종하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이것 좀 보세요.”
종주의 말에 카메라의 영상을 확인하자, 안면과 팔에 달린 카메라로부터 마치 공기방울처럼 위로 올라가는 작은 물방울이 보였다. 물방울은 공기방울처럼 로봇의 몸을 스쳐지나갔다.
이어 환한 빛이 보였다. 분명 빛이 있었다.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던 빛이었다. 그러나 빛은 금방 사라졌다. 아무래도 밝은 곳으로 나가면서 카메라의 조리개가 미처 닫히지 못하고 빛을 너무 많이 받아 과다노출(Overexposure)된 것 같았다.
“다른 곳으로 들어선 것 같아요.”
나는 혹 웜홀 같은 것을 통해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 것은 아닌지 케이블을 확인했다. 만약 그렇다면 케이블도 같이 빨려들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케이블은 서서히 풀리고 있었다.
“저것 좀 보세요!”
다시 종주의 다급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그 뭔가가 사라진 뒤였다.
“뭐야?”
나는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뭔가 움직였어.”
“뭔데?”
“글쎄, 뭔지 모르겠어요. 근데 뭔가 빠르게 움직였어요.”
“대충이라도 설명해봐.”
망설이는 종주 대신 상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냥 하얀 사람의 모습이었는데, 마치 ……속옷 마네킹처럼 빛이 났어.”
속옷 마네킹이라는 말에 난 실소하고 말았다.
그때 다시 그 빛이 화면에 나타났다. 그 순간 나의 웃음을 사라지고 말았다.
상호의 말대로 하얀 빛, 정말 속옷 마네킹처럼 환하게 빛나는 사람이 로봇의 얼굴에 달린 카메라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 하느님.”
이어 여기저기서 똑같이 생긴 외계인들이 우주유영을 하듯 날아 로봇을 향해 다가왔다. 그들은 조심스럽지만 용감하게도 로봇을 만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처음엔 그들의 손이 로봇이 입은 우주복을 지나쳤다. 마치 유령 같았다. 그러나 다시 만질 땐 우주복을 정확히 쓰다듬고 있었다. 날개는 없었지만 천사처럼 아름다웠다.
“어, 어떻게 하죠?”
로봇을 조종하던 성준이 물었다.
베이커 함장은 말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모두 말이 없었다. 그저 눈앞에 나타난, 마치 천사처럼 아름답고 빛나는 외계인(?)의 모습에 멍해 있었다.
“무, 무슨 얘기라도 해야하지 않아요?”
나의 말에 베이커 함장은 콘솔과 연결된 마이크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잠시 주저하더니 간신히 입을 열었다.
“어, Hello?”
"저어, 로봇엔 스피커가 없는데요.“
성준이 대답했다.
머쓱해진 함장은 마이크를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우선, 우리의 존재도 알렸고, 저들의 존재도 알았으니까 물러나도록 하지.”
나는 외계인들이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케이블을 감았다. 외계인들이 서서히 멀어졌다. 그리고 로봇은 천천히 손을 흔들었다.
3.
우리는 다시 지구로부터의 지시를 기다렸다.
그동안 종주는 가스 크로마토 그래프의 측정 결과로 물방울 안의 대기조성이 지구와 같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성준과 나는 외계인과 접촉한 로봇의 상태를 살폈다. 그들의 손이 닿은 곳에 어떤 흔적이나 물질이 남아있다면 우리에게 치명적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은근히 바라기도 했다. 저들에 대해 무언가 알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로봇에는 어떤 흔적도 물질도 남아있지 않았다. 물에 씻겨나간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물이 외부 바이러스를 차단하는 소독실의 역할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시 저들의 존재에 온갖 추측을 이야기했다.
함장은 걱정스런 침묵으로 일관했지만 종주는 저들이 천사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모두가 종주의 의견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그 가능성은 배제하지 않았다. 그리고 영적인 존재와의 만남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걱정했다. 그때 상호는 이 일로 종교를 바꿔야하냐며 조금은 빈정거렸다.
12시간이 지난 뒤, 다시 지구로부터의 지시가 전달됐다.
안전을 위해 무장을 하고 다시 저들과 조우하라는 것이었다.
안전을 위한 무장이라니? 화물선인 우리 우주선에서 무기로 쓸만한 것이라고 해봤자 작업용으로 쓰는 레이저 절단기와 용접기가 전부였다. 물론 함장의 권총이 있긴 했지만 레이저 절단기보다 나을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우주복을 통과했던 외계인들에게 과연 총알이 통할까?
“글쎄 과연 무기가 우리를 보호해줄 수 있을까?”
정석도 회의적으로 말했다.
정석은 무장보다는 공기 중에 있을지 모르는 위험에 대비해 보호구를 더 갖춰야한다고 말했다. 정석의 말에 모두가 동의했다. 그리고 저들과 조우할 사람으로 나와 정석이 결정됐다. 결정은 쉬웠다. 우주선의 책임자인 함장이 갈 수도 없었고, 야간근무를 한 상호가 갈 수도 없었다. 그는 그때까지도 제대로 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성준과 종주는 연인 사이였기 때문에 이들 중 한 사람을 보내기도 뭐했다.
“흡수복이라도 몇 겹 더 입어.”
성준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설마 내가 똥이라도 쌀까봐 그래?”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웃을 여유가 있는 걸 보니 안심이네.”
정석과 나는 세 겹으로 입은 흡수복 위로 다시 수영슈트처럼 몸에 착 달라붙는 방역복을 입고, 우주복을 착용했다. 그리고 우주복의 생명유지장치를 보호할 겸 정비 로봇의 기계 장치를 꺼내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로봇의 머리에서 카메라만 남겨두고 로봇의 머리를 헬멧 위에 씌웠다. 그 모습은 마치 깡통 로봇 같았다.
4.
- 준비 됐나?
무전을 통해 베이커 함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대답과 함께 기갑실의 카메라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펴 보였다.
- 외부 스피커도 다시 확인해 보게.
“아아, 마이크 테스트, 하나, 둘. 하나, 둘.”
나와 정석은 번갈아 마이크와 스피커를 테스트했다. 외계인과 조우를 하면 그들과 대화를 시도하기 위해서였다. 테스트를 마치고 다시 엄지손가락을 펴 보였다.
기갑실의 문이 열리자 검은 우주가 보였다.
나는 마치 잠수 전에 숨을 깊게 들이마시듯이 숨을 들이쉬고는 우주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뒤늦게 따라나선 정석이 내 어깨를 잡았다.
- 천천히 가.
그러나 정석의 힘에 밀려, 나는 더 빨리 물방울을 향해 나아갔다.
“천천히 가자며.”
물방울로 다가갈수록 나는 내 심장 뛰는 소리를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케이블이 잘 붙어있는지 손을 돌려보았다. 그러나 두꺼운 우주복과 로봇의 장갑 때문에 팔은 등 뒤로 넘어가지 않았다.
“내 케이블 잘 붙어있어?”
내가 물방울에 들어가기 직전에 한 말이었다.
- 걱정하지마. 원숭이 꼬리처럼 잘 붙어있으니까.
성준의 대답에 조금은 안심이 됐다.
물방울 안은 이미 로봇을 통해 본 그대로였다.
물방울이 기포처럼 올라가자, 그 뒤로 뭐가 있는지 아는 나의 심장이 더 빨리 뛰기 시작했다.
- 진정해, 진정해.
함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의 심장 박동수가 위험수치에 달한 게 분명했다. 나도 그걸 느낄 정도였다.
잠시 후, 커튼이 걷히듯 물방울이 사라지면서 커다란 방이 나왔다. 넋을 놓고 방을 살피는 사이 조금 전까지 물 속을 허우적거리던 나의 발은 어느새 딱딱한 바닥을 딛고 서 있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마치 푹신푹신한 잔디밭을 거닐다가 딱딱한 아스팔트 포장도로로 나온 기분이었다. 바닥은 조금 낯설었지만 중력을 느끼면서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와 함께 우주복과 로봇에서 떼 온 장갑의 무게가 느껴졌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였다. 그나마 다행히 중력은 지구보다 낮아 지구의 약 60% 정도였다. 만약 지구와 같았다면 우주복과 장갑의 무게에 꼼짝도 못했을 터였다.
“젠장, 엄청 무겁군. 중력은 미처 생각 못했는데.”
정석이 투덜거렸다.
나는 우주복 속에서 어정쩡한 자세로 몸을 낮추고 목을 빼, 로봇이 전송한 영상에서는 보지 못한 2층과 3층을 올려다보았다. 온통 하얀 대리석으로 세워진 건물에는 작은 테라스가 층마다 3개씩 있었다. 마치 고대 그리스의 대리석 건물처럼 보였다. 그 위로는 머리에 뒤집어쓴 로봇의 장갑이 시야를 가려 더 볼 수 없었다. 대신 들고 있던 카메라를 돌려 화면을 전송했다.
“보여요?”
- 잘 보여.
“오, 이런.”
정석의 놀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영상으로 보았던 외계인이 좁고 높은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나는 다시 놀라 그들을 바라보았다. 1m가 조금 넘을 것 같은 작은 아이였다. 그리고 몸에서 빛을 발하는 빛의 존재. 속옷 마네킹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하나님이 빛으로 천사를 만들었다더니. 정말, 천사 같지 않아?”
정석이 경외에 찬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비록 날개는 없었지만 정말 천사와 같은 빛의 존재 같았다.
모두 다섯이었다. 어딘가 숨어 우리를 지켜보는 외계인이 더 있을지는 몰라도 우선 우리 앞에 나타난 건 다섯이었다. 그들은 호기심 어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조심스럽게 허공을 가르며 다가왔다. 마치 물 속을 헤엄치는 인어 같았다.
[아까 그 외계인일까?]
목소리가 들렸다. 놀라웠다. 이들은 우리와 같은 언어를 쓰고 있었다!
나는 조금 허둥대며 외부 스피커를 켜고 물었다.
“이봐요. 우리 말할 줄 알아요?”
[글쎄, 비슷하게 생기긴 했는데.]
그들은 나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리고 계속 자신들끼리 이야기했다. 그 목소리는 내게 너무나 뚜렷이 들렸다. 나는 내 마이크나 스피커가 고장났는지 확인해야 했다.
“정석아?”
정석은 나를 등지고 빛의 존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응.”
“내 말 들려?”
“들리니까 대답했지.”
정석이 내 쪽을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저들 말도 들려?”
“응.”
“근데 우리 말을 못 듣나봐.”
“귀머거린가.”
우리가 얘기하는 동안에도 그들의 말이 들렸다.
[어디서 왔을까?]
[왜 말을 안 하지?]
[우리 우주선이 고장난 걸 알고 있을까?]
[쉿, 조용히 해.]
[어차피 우리말을 모를텐데.]
[근데 왜 말을 안 하지? 무슨 소리라도 내야지.]
[우릴 보고 놀랬나봐.]
[바보야, 그게 아니야 우주복을 입고 있어서 그런 거야.]
[아, 그래. 밖에서 들어왔지.]
[저게 우주복이라고? 정말 웃기게 생겼다.]
[저 옷을 벗으면 얘기할 수 있을 거야.]
강한 텔레파시?
나는 그 빛의 존재를 찬찬히 살폈다. 나의 예상대로 그들은 귀가 없었다. 그리고 입은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렇다면 강한 텔레파시로 대화를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너무나 강력해서 텔레파시 능력이 없는 우리 인간에게까지 들리는 강력한 텔레파시.
나는 살짝 웃음이 났다. 저들은 우리가 아무리 떠들어도 우리 얘기를 들을 수 없다. 하지만, 저들은 아무리 조용히 얘기해도 우리에게 숨길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누가 얘기하는지 도통 구별할 수가 없었다. 분명 다른 느낌의 텔레파시가 전달되고 있었지만 입을 열지 않으니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구별할 수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정석이 물었다.
나는 잠깐이지만 정석의 목소리도 텔레파시라고 착각했다.
“글쎄, 우선은 우리가 유리한 입장 같은데.”
- 무슨 일인가? 저들이 뭐라고 해?
베이커 함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텔레파시는 분명 무전을 통해선 전달될 수 없는 의식이기 때문에 우주선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나는 우주선이 너무 멀거나 물방울이 의식의 전달을 차단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저들이 텔레파시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 텔레파시로?
“예, 저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다 들려요. 근데 우리 얘기는 못 듣는 것 같습니다.”
- 저들의 텔레파시를 들을 수 있다고? 그럼 외계인이 우리말을 한다는 건가?
“함장님, 하나님이 통역 천사라도 두고 다니는 줄 아십니까?”
내가 웃으며 말했다.
- 무슨 소리야?
“만약 갑자기 하나님이 나타나서 전 세계를 향해 사랑과 평화를 말씀하신다고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이 우리말로 말씀하실까요? 히브리어? 영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통역이 필요할까요? 아니죠. 그건 느끼는 겁니다. 언어가 달라도 알 수 있는 거죠. 그게 텔레파시죠. 텔레파시는 소리내는 언어가 아니라 체계화된 의식의 전달입니다. 그러니 언어가 달라도 상관없죠.”
“그렇군. 상대가 불어를 하던, 중국어를 하던 텔레파시라면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다는 거군. 그런데 텔레파시라니 정말 신기한데. 그럼 문자가 필요 없지 않을까?”
정석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글쎄, 선천적인 것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저들이 고도로 발달하고, 또 많은 정보를 서로 교환한다면 소리로 전달하는 말보다 텔레파시가 더 편해서 선택, 발전한 후천적 소통방식일 수도 있지.”
“말보다 편해서 선택했다고?”
“그래,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말이 모뎀이라면 텔레파시는 광랜(LAN)인 거야.”
- 그럼 너희도 텔레파시로 얘기해봐.
성준이 함장의 뒤에서 얘기하는 듯, 감이 먼 소리로 말했다.
“그게 말처럼 쉽게 되냐.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 그래도 어떻게든 시도해 보게, 정신을 집중해봐.
다시 베이커 함장이 지시했지만 이미 나도 어떻게든 의식을 전달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혹 내 의식이 읽히더라도 저들이 놀라지 않도록 긍정적이고 좋은 생각만을 했다. 그러나 5분이 지나도 소용없었다. 게다가 상황을 보고하라는 함장의 목소리와 옆에서 계속 떠드는 외계인들의 이야기에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둘이 어디가 좀 다른 것 같은데.]
[왜 우주복을 안 벗지?]
[우리와 숨을 쉬는 게 다른 거야.]
“안되겠어요. 우선 저들과 얼굴을 맞대고 얘기해 보죠.”
정석이 용감하게 나섰다.
정석은 먼저 헬멧 위에 보호용으로 쓴 로봇의 장갑부터 벗었다.
[와! 머리가 떨어졌어.]
[바보야, 우주복이라니까!]
[아, 맞다.]
빛의 존재들은 다시 정석이 우주복을 벗길 기대하며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러나 정석이 혼자서 우주복을 다 벗을 순 없었다. 그래서 내가 정석을 도와 우선 로봇의 장갑을 벗겼다. 로봇의 장갑에서 나오려면 우선 성준이 꼬리라고 한 케이블을 뽑아야했다. 난 내가 케이블에 연결되어 있으니 우주선에서 이 안의 상황을 계속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케이블은 단순한 교신용이 아니었다. 나는 보다 중요한 케이블의 역할을 잊은 것이다!
장갑을 벗은 정석은 다시 우주복의 헬멧을 벗었다. 그리고 얼굴 전체를 가린 마스크를 제거했다. 그건 엄청난 용기였다.
최초로 인간의 얼굴이 빛의 존재와 만나는 순간이다. 빛의 존재, 천사와의 첫 조우. 그게 내가 아니라는 사실이 조금 아쉬웠지만, 그 현장의 증인이라는 사실에 나는 만족했다.
정석의 얼굴을 본 빛의 존재들은 자신들과 닮은 모습에 놀라며 뒷걸음질쳤다.
[맙소사. 우리랑 닮았어.]
[그런데 빛이 나지 않아!]
[근데 말은 못하나? 아직 아무 말 안 했지?]
[아직 우주복을 덜 벗어서 그런 걸 거야.]
[왜 안 벗지?]
[혼자선 못 벗었잖아.]
[우리가 도와 줄까?]
[그래, 도와 주자.]
[도와 주자.]
그들은 가볍게 몸을 흔들며 정석에게 다가갔다. 분명 우리가 숨쉴 수 있는 공기가 가득한 공간이었는데 그들은 여기서 마치 물 속의 인어처럼 헤엄을 쳤다. 마치 날개 없는 천사처럼 보였다. 그들은 정석에게 다가가 우주복을 벗는 걸 도왔다. 처음에는 손이 우주복을 통과했지만 그들이 정신을 집중하자 손이 우주복에 닿았다. 그들의 의식에 따라 물체를 만지고 통과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놀라운 모습을 재미있게 지켜보았다. 빛의 존재의 도움을 받으며 우주복을 벗는 정석의 모습은 마치 천사들의 시중을 받는 왕 같았다. 조금 부럽기까지 했다.
-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잘 감시하게.
베이커 함장의 긴장한 목소리가 들렸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나는 서서히 저들이 인간을 찾아온 진정한 빛의 존재, 천사가 아닐까 생각했다.
우주복을 모두 벗자 하얀 흡수복을 입은 정석이 그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섰다.
“기분이 어때?”
외부 스피커를 통해 정석에게 물었다.
“좋은데, 무거운 우주복도 벗고 공기도 신선하고, 우리 우주선의 공기보다 더 좋은 것 같아.”
빛의 존재들은 다시 가볍게 몸을 흔들며 정석을 에워쌌다. 그리고 손을 뻗어 어루만졌다. 정석도 그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두 손이 마주치자 정석의 손은 홀로그램 속으로 사라지듯 빛의 존재의 손안으로 사라졌다.
“괜찮아.”
놀라 바라보는 내게 정석이 안심하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마치, 홀로그램 같아. 하지만, 온기가 느껴져.”
그때 갑자기 외계인의 손이 정석의 손을 밀어냈다. 그리고 놀라는 정석을 향해 배시시 웃으며 다시 정석의 주위를 맴돌았다.
“이들이 의도하지 않으면 사물과 접촉해도 소용없나봐.”
- 젠장, 그럼 총은 확실히 소용없겠는데.
정석의 말에 상호가 투덜거리며 토를 달았다.
정석은 외계인의 팔을 어루만졌다.
“마치 부드러운 천을 만지는 것 같아, 양탄자나 솜? 그런 거. 근데 너무 부드러워.”
- 오, 하느님, 맙소사. 정말 천사일까?
경외에 찬 듯한 베이커 함장이 중얼거렸다.
[입을 벌려.]
[배가 고픈가봐.]
[먹을 걸 줘야할까?]
[우리랑 먹는 게 같을까?]
[아니야, 이 바보들아. 말을 못하잖아. 저것도 우주복이야.]
[아하, 그렇구나.]
정석의 모습을 보고도 우주복을 입은 거라고 생각하는 외계인들의 대화에 나는 실소하고 말았다. 정석도 피식 웃고 말았다.
[우주복을 몇 겹으로 입은 거야.]
[무척 힘들겠다.]
[언제 다 벗고 우리한테 모습을 보여줄 거지?]
[자자, 이것도 벗게 우리가 도와주자.]
빛의 존재들이 정석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흡수복까지 벗기기 시작했다. 정석은 빛의 존재 앞에 벌거벗고 섰다.
- 못 봐주겠군.
성준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웃고 있었다. 정석도 웃고 있었다.
그러나 순간, 정석의 당황한 모습이 보였다. 나 역시 당황했다.
“아니야, 아니야. 이건 벗는 게 아니야.”
정석이 손을 흔들었지만 그 손동작은 외계인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듯했다. 외계인들은 우주복에서 헬멧을 벗기듯이 벌거벗은 정석의 목을 비틀었다.
“으악!”
정석이 비명을 질렀다.
[몸을 흔드는데, 싫은가봐.]
[바보야, 헬멧 부분과 아래가 단단히 붙어있어서 그래.]
[아, 맞다.]
[꼭 그런 것 같지 않은데.]
[만약 이게 몸이라면 왜 비명을 안 지르겠어.]
[아, 그렇구나.]
그들은 더욱 정석의 목을 비틀었다.
“도와줘!”
정석이 소리쳤다.
나는 정석을 구하기 위해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우주복에 로봇의 장갑까지 입은 나는 빨리 달릴 수가 없었다. 그저 아기처럼 아장거리며 걸을 수 있을 뿐이었다.
- 뭐해, 서툴러! 어서 총을 쏴!!
함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내겐 총이 없었다.
“젠장.”
로봇의 팔에 있는 건 작업용 레이저와 용접기뿐이다. 급한 대로 우선 이 둘을 동시에 작동시켰다. 그러자 레이저와 용접기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그들에게 레이저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었고, 용접기의 불꽃은 그저 또 다른 빛이었다. 그들은 놀라지도 않았다. 마치 귀여운 아기의 재롱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가 급히 정석을 향해 달려가는 사이 한 빛의 존재가 내 등 뒤로 다가왔다. 나는 뒤늦게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 꼬리를 떼야 우주복이 벗겨지는 거지?]
[맞아.]
‘이런!!’
내가 돌아섰을 땐 이미 그 빛의 존재의 손에 케이블이 뽑혀져 있었다. 당황한 내가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나와 우주선을 연결했던 케이블이 물방울 속으로 사라졌다. 위급한 상황이라고 판단한 우주선에서 날 구하기 위해 케이블을 당긴 것이다. 그러나 난 이미 케이블과 분리되어 있다!
“젠장.”
나는 마지막 기대로 무전기를 켰다.
“함장님! 들립니까? 들리면 응답하세요. 제발!”
그러나 응답이 없었다.
“도와줘!”
다시 정석의 비명이 들렸다. 빛의 존재들에게 팔다리가 붙잡힌 정석은 몸부림치며 끌려가고 있었다. 난 다시 뒤뚱거리며 정석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내가 채 서너 발도 못 걸었을 때, 헬멧 위에 쓴 로봇의 장갑이 획, 돌아가며 시야를 가렸다. 그리고 세상이 돌듯 눈앞이 어지럽게 돌았다.
“젠장, 그만둬!”
내가 소리쳤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우주복을 털어 내나봐.]
[답답한가봐. 빨리 벗게 도와주자.]
[조금만 참아요. 금방 벗겨줄게요.]
나는 두려움에 몸부림쳤지만 그들은 오히려 나를 돕는다고 생각했다. 순식간에 장갑이 벗겨지고 이제는 내 우주복의 헬멧을 벗기려 달려들었다. 그 사이 정석의 목을 비틀던 외계인들은 정석을 실험대처럼 생긴 넓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정석은 계속 소리쳤다.
“아니야, 아니야. 그만해!”
[조금만 기다려요. 우리가 도와줄게요.]
빛의 존재들은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는지 모르는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젠장, 그만 두지 못해!”
나도 몸을 흔들며 저항했다. 그러나 내 힘은 그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빛으로 된, 공기보다 가벼워 보이던 그들의 힘은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강하고 부드러웠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정석의 우주복을 벗기면서 쌓은 경험으로 순식간에 내 우주복을 벗겼다.
“으아아악!”
정석의 비명이 들렸다.
빛의 존재들의 완력에 정석의 다리가 부러졌다.
“아악, 내 다리, 내 다리!”
[이것 봐. 흐물흐물해졌어. 이걸 찢어도 될까?]
그 말에 나는 누가 그런 잔인한 말을 하는지 보려고 눈과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아이처럼 순수했고, 진지하기만 했다.
[글쎄, 그래도 될까?]
[우주복 때문에 말을 못하니, 물어볼 수도 없고, 어떡하지?]
[우선 다른 우주복처럼 목을 돌려서 열어주자. 만약 우주복이 찢어져서 돌아가지 못하게 되면 안되니까, 조심하고.]
나는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주저앉고 말았다.
정석은 계속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저들은 정석의 고통을 모르고 있었다.
저 정도의 고통이라면, 어쩌면 강력한 고통의 의식이 전달될 수도 있을 텐데.
나는 실낱같은 기대로 빛의 존재들을 바라보았지만 그들은 아기천사처럼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나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리고 이제 나의 목을 비틀기 시작했다.
[이들은 어떻게 생겼을까?]
[글쎄, 빛이 없는 존재는 없으니까. 분명 빛이 나겠지?]
[무슨 빛일까?]
[난 예쁜 핑크빛이었으면 좋겠어.]
그들은 나의 머리를 좌우로 비틀며 말했다.
[여기 좀 와봐. 이 안에 뭔가가 움직여.]
정석의 몸을 살피던 빛의 존재의 말에 나를 둘러싸고 있던 빛의 존재들이 정석을 향해 다가갔다. 그들은 정석의 가슴 위에 손을 얹고 신기한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여기 있나봐.]
[그럼 이 외계인은 요 안에만 있는 건가?]
한 외계인이 정석의 가슴뼈 주위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말했다.
정석은 고통에 꼼짝도 못하고 그저 낮은 신음소리만 내고 있었다.
[굉장히 작은데.]
[작다고 비웃으면 안 돼! 이 외계인이 기분 상해할지도 몰라.]
[저도 그 정도는 알아요.]
[이 정도의 크기라면, 지금 우주복은 이음새를 찾을 수 없는데 목 부위를 잘라서 꺼내줘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우주복이 상하면 기분 나빠할지도 몰라요.]
빛의 존재들은 다시, 친절하게도(?) 정석의 목을 비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의 목도 비틀기 시작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몸이 따라 움직였다. 빛의 존재들은 목을 돌리기 쉽게 하려는 듯 나와 정석의 몸을 내리누르고 테이블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이제 내 몸은 철에 붙은 지남철처럼 테이블에 빈틈하나 없이 붙어있다. 옴짝달싹할 수 없다. 간신히 고개만 돌릴 수 있을 뿐이다.
[안 되겠어. 드릴로 잘라야겠어.]
[왜 이렇게 벗기 불편한 우주복을 입은 거지.]
한 빛의 존재가 툴툴거렸다.
잠시 후,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조금만 기다려요, 우리가 꺼내줄게요.]
“아, 아니야. 아니야!”
정석이 마지막 발악으로 울먹이며 소리쳤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이다.
[위잉]하는 모터 소리가 들렸다. 정석은 계속 비명을 질렀다. 나는 차마 볼 수 없어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정석의 비명이 들리지 않았다. 나는 두려움에 떨며 정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머리는 이미 몸과 분리돼있었다. 외계인들은 잘린 정석의 머리를 바닥에 내려놓고, 목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아직 죽지 않은 신경으로 발작하고 있는 정석의 심장을 꺼내들었다.
[이봐요. 내 말 들려요?]
[이 안에 있는 건가?]
[이 안에? 설마 그렇게 작을까?]
[알 수 없지. 열어보기 전엔.]
그들의 빛나는 손 위에 정석의 심장이 붉은 피를 내뿜고 있다.
그 모습에 나는 정신이 아찔하다. 그러나 두려움이 나의 정신을 맑게 한다. 아니 아무 생각이 없다. 훈련 탓이다.
우주선이 고장나 우주의 미아가 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선 그저 관제센터에 목숨을 맡기고 지시를 기다려야한다. 특히 소형 우주선에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해서도 안 된다. 그저 두려움 속에서 평정을 잃지 않고 지시를 기다려야 한다. 그래야 살 수 있다.
그러나 지금 그게 무슨 소용인가. 소리를 질러도 들어줄 이 없는 이곳에서, 눈만 끔벅일 수 있는 내게. 지금 내게 필요한 건 희망이다.
상호가 나를 구하기 위해 와줄까? 성준이 올까? 함장이?
[위잉]소리를 내는 회전체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 이제 내 차례다.
나는 사지를 뻗고 테이블에 누워있다. 벌거벗은 기분이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무언가를 기다린다.
그때 함장의 경외에 찬 목소리가 머릿속을 메아리쳤다.
- 오, 하느님, 맙소사. 정말 천사일까?
제발 천사면 좋겠다.
문득 죽은, 아니 이제 깨어난 정석의 영혼이 외계인들과 함께 빛나고 있는 듯하다.
나도 내 육신을 버리면 저들처럼 빛나는 존재가 될까? 내 심장 속에 영혼이 있을까?
이제 내 자신에게 말한다. 아니 기도한다.
그래! 어쩌면 이들이 맞을 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이 몸에 익숙해 있을 뿐이다. 이 몸은 그저 지구라는 별에서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진 하나의 우주복이다. 그러나 30년 동안 같이해온 이 몸을 떨쳐내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천사를, 하나님을 만나려면 이 몸을, 이 우주복을 벗어버려야 한다. 제발 이들이 맞아야 한다! 그게 내 유일한 희망이다. 제발, 제발.
[조금만 기다려요. 당신도 꺼내줄게요.]
친절한 천사의 목소리에 나는 두려움 없이 눈을 감고 다시 기도하고 싶다. 그러나 감을 수가 없다. 회전체가 서서히 내 목을 겨누고 다가오고 있다. 내 동공은 점점 커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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