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어린 시절 읽었던 낡은 과학 문고로부터 시작된다. 아직 글자를 띄엄띄엄 거리던 때라 자연 내 눈길은 책 속의 색 바랜 삽화에 머물러 있곤 했다. 그림에는 신호등도 없는 도로를 질서정연히 오가는 차량들과 혼탁함을 찾을 길이 없는 맑은 도심 풍경이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외국인 친구의 흐릿한 3차원 영상을 마주한 사람들이 자연스러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담겨 있었다.
세련된 미래를 탐색하는 일은 더없이 즐거워서 나는 곧 정신없이 책에 빠져들었는데,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아빠는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당신의 어린 딸에게 말했다.
"그림 속 모습이 신기한 모양이구나? 하지만 그건 미래가 아니라 네가 태어났던 과거를 그린 거야. 자, 여길 봐라."
아빠의 손가락이 책의 한 귀퉁이를 집었다. 세월의 상흔이 가득한 누런 종이 위에는, 과연 2010이라는 숫자가 또렷이 제 원형을 간직한 채로 남아있었다.
"80년대 사람들이 상상하던 2010년의 모습이란다. 그런데 난 아직까지도 이런 광경을 본 일이 없어. 밖에 나가면 여전히 화석 연료를 먹는 차들이 도로 위를 기어다니지. 자동화된 거라고는 네비게이션 정도가 다인 걸. 그나마도 운전자가 천연지능이다보니 주의가 분산되어 교통 체증을 유발해. 그 창발 현상이라는 것 말이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빠를 바라보았다. 이해가 불가능한 얘기였다. 아빠 역시 막 글자를 떼기 시작한 딸에게는 여러모로 무리한 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망막렌즈에 자동 통역기라고?" 그러나 아빠는 다시 웃음을 터뜨리며 별세계 말을 이어갔다. "지금은 2014년이지만 아직도 난 외국인 친구가 없는데? 게다가 영어 학원까지 다니고 있잖아."
아! 나는 문득 얼마 전 큰댁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나보다 불과 세 살 많던 사촌 오빠의 유창한 영어가 친척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사이, 아빠는 구석진 자리에서 남몰래 법주 잔을 들이켜고 있었다. 평소 남들보다 일찍 출근길에 나서던 우리 아빠. 승진 시험 탓에 바쁜 시간을 쪼개 영어 학원을 다니셨건만 당신보다 나은 듯한 일곱 살 조카의 영어 실력에 공연히 심사가 뒤틀렸던 거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이즈음의 아빠는 확실히 영어에 대해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누린 미래 기술의 혜택은 고작 영어 회화를 듣기 위한 작은 MP3 플레이어에 휴대폰 정도가 전부일 거야!"
그러나 이런저런 푸념에도 불구하고 2010년을 기억할 때면, 아빠는 종종 흥분되고 즐거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2010년은 많은 사람들에게 여러모로 특별한 시기였다. 고양이와 개의 평균 수명이 30세에 육박하고 있었고, 소울메이트라는 재밌는 이론이 발견된 때였으니까.
하지만, 내가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아빠와 나의 귀여움을 받던 늙은 개 초롱이가 스물 다섯 살로 일기를 마감했다거나, 소울메이트란 이론이 우리 가족에게 다소 비극적인 영향을 초래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결국 아빠의 그런 흥분과 즐거움은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2010년은 수진이 네가 태어난 해잖니."
* * *
소울메이트.
인류가 금본위제를 포기한 이래로 숙명적 원죄가 된 인플레이션하며, 처치 곤란한 비만 문제와 식량 부족의 문제가 공존하는 아이러니는 그제나 지금에나 달라진 것이 없듯, 저 소울메이트라는 이론 또한 그제나 지금에나 여전히 뜬금없고 신기한 인상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나이 든 어른들은 소울메이트를 간단히 궁합이라 이해하곤 했다. 그러나 소울메이트는 불확실한 점성술과는 달리 영국의 한 연구기관에서 발표된 엄연한 과학 이론이었다. 물론, 아빠가 그 이론을 처음 본 것은 스포츠 신문의 해외 토픽 란에서였지만. - "이상하게도 그런 수상한 연구 결과는 늘 영국에서 발표된단 말이야. 소울메이트 이론도 그랬어."
소울메이트 이론은 모든 생명체가 갖고 있다는 정신적 파장에 기초하고 있었으며 두 개의 파장이 만나 일으키는 동조 현상이 이론의 핵심이었다. 동조는 부정적일 수도 혹은 긍정적일 수도 있었다. 부정적인 경우 동조의 두 주체는 피차 험한 꼴을 면할 수 없었지만, 긍정적인 동조를 일으킨다면 상호간에 육체적, 정신적으로 반드시 바람직한 효과를 얻게 되는 것이다. 건강한 육신. 정신의 고양. 이를 돕기 위한- 혹은 이의 원인이 되는- 호르몬 생성의 촉진. 활성화되는 성감대. 진실한 사랑. 무한한 상호 신뢰. 깨지지 않는 행복!
결혼과 이혼이라는 경험을 반복하지 않고도 이렇듯 상호 긍정적인 동조를 일으키는 파트너를 탐색할 수 있다면, 세상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소울메이트 이론은 인생의 반려를 효율적으로 찾기 위한 최적의 이론이자 진정한 사랑에 목마른 사람들에게 있어 더없이 소중한 나침반이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소울메이트 이론도 처음에는 재밌는 뉴스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주요 일간지에는 소개도 되지 않았고 스포츠 신문의 18면 언저리를 지나다녔을 뿐이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벌어진 연구가 결실을 맺으며 이 이론은 대단한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다.
Na0은 강한 긍정적 동조의 파장 변화를 탐색하는 생물학적 메커니즘의 통칭이었다. 워낙 이름이 우습고도 경망스러웠던 탓에 필요 이상으로 학계의 조롱을 받았지만, 영화 마니아라던 그 연구자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Na0에 기반을 둔 반응기, 후아유를 개발했다. 후아유는 시장에 공개되자마자 소비자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효과는 명확했고 입소문은 빨랐다.
후아유는 사람들의 삶을 차곡차곡 바꿔나갔다. 이혼이나 실연에 따른 경제적 손실- 이를테면 소송에 따른 사회적 비용에 자살이나 휴직 따위 -이 급격히 감소했다. 출산률은 높아졌고 세상이 제법 건전해지는 분위기였다. 대개의 사람들은 20세가 되기 전에 자신의 소울메이트를 찾아냈다. 그렇게 성공한 결혼 생활은 만족도도 높았고 극단적인 위험선호 경향이 없는 한 외도의 위험도 거의 없었다. 후아유는 손목시계처럼. 아니, 안경처럼. 아니, 휴대폰이나 MP3처럼 일상의 흔한 소품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다하여 후아유가 늘 긍정적인 변화만을 이끌어낸 것은 아니다. 수많은 문제 중의 하나는 후아유가 보급되기 전에 이미 짝을 찾았던 사람들로, 그들은 권태와 불화에 빠져든 삶을 탈출하는 데에 중요한 당위성을 후아유를 통해 확보하려 들었다.
"이걸 봐요! 이럴 줄 알았어. 우린 처음부터 서로에게 맞지 않았던 거예요."
여자가 망연자실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에게 자신의 후아유를 들이민다.
"이젠 나도 지쳤어요. 우리가 인연이 없다는 걸 알았으니 더 질질 끌고 싶진 않아요. 당신도 알잖아요. 서로의 소울메이트를 찾는 것이 모두에게 행복한 일이 될 거란 걸."
이렇게 되면 결국 두 사람의 행복이 보장된 해피엔딩은 아닐까? - 그리하여 나는 후아유와 함께 생겨난 수많은 결손 가정의 아이 중의 하나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 * *
"자, 마셔."
소울메이트는 고사하고 잠시 시간을 함께 할 근사한 남자도 없던 서른 살의 밤. 나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미미의 물통에 캔 맥주를 따라주며 술잔을 나눴다. 그러나 검은 고양이 미미는 언제나 그랬듯 물통의 맥주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거니와, 내 눈치를 보는 일도 없이 밤풍경이 보이는 창가에 다가서서는 길게 하품만 늘일 뿐이었다. 턱부터 배 밑으로 이어지는 근사한 하얀 털이 창가 가로등의 조명을 받아 노랗게 물들었다. 턱시도를 입은 멋진 신사처럼 언제나 우아하고 여유 있는 미미. 그러나 녀석은 제 주인의 울적한 심사에 별 관심이 없다는 투였다.
"고양이는 정이란 게 없는 동물이야."
아빠는 이런 미미를 싫어했다. (아니, 싫어하는 척 했다.) 그건 아빠의 말마따나 도도한 고양이보다는 애정을 갈구하는 개가 당신의 취향에 더 맞았기 때문일 수도 있었고, 인간 수명을 지닌 유전 조작 동물에 대한 개인적 반감 때문일 수도 있었다. - 첨언하자면, 이 유전 조작 동물은 나온 지 충분히 오래되지 않아 인간의 수명에 관한 한 아직 실증된 바는 없지만.
그러나 피차 말은 안했어도, 나는 아빠가 미미를 싫어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엄마가 내게 남긴 마지막 선물이기 때문일 거라 생각하고 있다. 엄마는 개보다 고양이를 좋아했고, 수명이 짧은 동물을 기르는 일에 학을 떼곤 했다. 그 탓인지 아빠는 미미를 볼 때마다 늘 못마땅한 얼굴로 당신이 끔찍이도 아꼈던 초롱이의 얘기를 꺼내곤 했다.
"아빠, 초롱이가 무슨 엄친아야? 나도 초롱이를 기억한다고. 내가 초롱이를 얼마나 좋아했는데. 하지만 초롱이는 초롱이고 미미는 미미야. 왜 자꾸 비교를 해? 게다가 얘는 개가 아니라 고양이잖아. 어떻게 꼬리를 치며 멍멍거려? 그리고 유전 조작된 애완동물이 뭐 어때서 그러는데! 다 똑같은 생명을 가진 동물이라고."
내가 이렇게 미미를 두둔할라치면 아빠는 왠지 샐쭉해진 모습으로 입을 다물곤 했다.
"그래, 수진이 너는 아빠보다 저런 무정한 고양이가 더 좋다는 거로구나? 잘 알았다."
혹시라도 아빠는 미미에게서 엄마를 투영하는 게 아닐까? 그러나 나는 '엄마가 더 좋아? 아빠가 더 좋아?'라는 이 은유적인 물음에 언제나 거리낌 없이 미미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미미는 말 못하는 동물이잖아. 내 각별한 동반자고! 아빠도 말은 그렇게 하지만 여기 올 때마다 미미 간식꺼리를 챙겨오잖아."
"흥, 내가 이깟 고양이가 좋아서 그러는 줄 알아? 그건 너에 대한 아빠의 최소한의 존중인 거야!"
흥, 흥. 거짓말. 아빠는 고양이보다 개를 좋아하고 유전조작 동물을 싫어하며 엄마를 미워하고 또 그리워하지만. 사실, 미미를 싫어하지 않는 것 같은 걸.
* * *
초롱이가 세상을 떠난 뒤, - 아빠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 미미가 우리 집에 들어와 겨우 한 해가 지날 무렵. 미미는 한 살배기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질풍노도의 청소년이라도 된 마냥 곧잘 가출을 하며 이 어린 보호자의 속을 뒤집어 놓곤 했다.
"걔는 대체 뭐가 불만인지 모르겠어!"
아빠에게 미미에 대한 불평을 쏟아놓고는 가뜩 심통이 난 채로 가출한 녀석을 찾아 나선 길에, 나는 뜻밖에도 미미를 품에 안은 남자와 마주섰다. 평소 얼굴은 익었지만, 말을 주고받을 기회가 없었던 그는 친구들이 함께 모여 놀 때면 늘 쑥스러운 기색으로 선생님의 주변 언저리만 맴돌던 아이였다.
"이거 너네 고양이라며?"
그가 품 안에서 아등바등 거리던 미미를 내게로 내밀었다.
"어, 맞아. 찾아줘서 고마워."
"별 것도 아닌데, 뭘." 그는 내 품으로 들어와 태연작약 주인을 바라보던 미미를 살폈다. "정말 멋진 고양이야. 근사한 신사 같은……. 얘는 이름이 뭐야?"
"미미."
사실 피차 이성이라 부르기도 민망했던 6살의 우리였지만, 미미에 대한 그의 호감에 보답이라도 하듯 나역시 그에게 호감을 품게 되었다. 그는 유난히도 동물을 좋아하는 아이였으며 그로인한 평범한 고민거리 하나를 안고 있었다. - "우리 엄마는 동물 알러지가 있어. 동물이 가까이 있으면 몸에 뭐가 막 나고 그러는 거야." 이렇듯 동물을 기를 수 없는 환경 탓에 그는 늘 미미를 찾곤 했으므로 이 작은 친구가 그와 나를 잇는 좋은 가교 역할을 한 셈이었다.
6살 꼬마의 감정에 어른들은 장난스럽게 웃음을 짓고 말겠지만, 내가 생각하기로 우리는 제법 통하는 구석이 많았고 그만큼 잘 어울리는 한 쌍이던 것 같다. 동물 화보를 펼쳐놓은 채 끝도 없는 논의를 펼쳤으며 미미의 일상에 대해 얘기할 때는 함께 웃음꽃을 터뜨렸다. 우리는 떨어질 수 없는 단짝이었다. 나는 유치원의 다른 친구들과 함께 노는 것을 포기할지언정 그와 함께 선생님의 곁을 지켰으며, 한편으로는 아빠에게 큰 염려와 실망감을 안기기도 했다.
"수진이, 너 크면 아빠랑 결혼한다고 했잖아!"
"미안해. 마음이 바뀌었어. 나는 이제 그 애랑 결혼할 거야!"
그즈음 세간에 퍼진 유행 하나는 자식 딸린 부모들이 제 아이에게 후아유를 선물하는 일이었다. 되도록 일찍 반려를 찾아 안정되길 바란 것이었는데, 후아유로 인해 이혼까지 몰렸던 아빠 역시 그 바람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나는 어린 나이에도 아빠와의 길고 긴 일전을 각오했다. 그러나 "다른 애들은 다 후아유를 받았단 말이야!"라는 딸의 한마디가 '편부 슬하의 자식이 기마저 죽으면 안 된다'는 아빠의 감정적 논리와 흥분을 자아냈고, 뜻밖에도 아빠는 당일로 내 목에 신형 후아유를 걸어주고야 말았다.
"수진아. 너는 소울메이트를 찾는다며 이 아빠를 버리면 안 돼!"
불현듯 걱정스럽게 당부하는 아빠에게 나는 새침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빠도 참. 그게 여섯 살짜리한테 할 소리야?"
그러나 나는 아빠의 염려대로 후아유를 받자마자 곧장 그를 찾아 달려갔다. 우리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던 그 어리고 여린 맘이 기대에 부풀고 부풀다 마침내 뻥! 뻥! 뻥! 그렇게 내 인생의 첫 번째 실연이 찾아올 줄은. 그의 후아유는 내가 아닌 유치원 선생님의 후아유에 반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몇 해 전, 그가 무려 열여섯 살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유치원 시절의 선생님과 맺어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섯 살의 내가 후아유를 들고 엉엉 울 때도, 그 소식을 듣고 씁쓸한 기분에 맥주 캔을 땄을 때도. 미미는 내 곁에서 태연히 하품을 늘이며 먼 곳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 *
"이게 말이나 돼요?" 앞에 앉은 민욱이 500cc짜리 맥주잔을 급하게 들이켜곤 말했다. "뭐, 그래요. 지금까지야 내 Na0 메커니즘에 뭔가 문제가 있나보다. 사는 데 지장은 없으니 뭐 작은 장애가 있다고 생각하자. 이렇게 생각하면 그만이었죠. 근데 이건 뭔가요? 싱글 보조금이라니요!"
내 옆에 앉은 민영이도 신세를 한탄하듯 그 말을 거들었다.
"소울메이트를 못 찾는 일도 서러운데, 사회에서 우리 비자발적 싱글들을 무슨 빈민처럼 대우한다니. 이젠 쪽팔려서 얼굴 들고 다니지도 못하겠어요."
"흠, 민영 씨, 그래도 민영 씨는 아직 젊잖아. 보조금은 30대 이상의 신청자에게만 지급된다고."
삼십 중반, 둥글둥글한 얼굴의 동섭 씨가 위로하듯 말을 건넸다. 호프 집의 대형 스크린에서는 앵커 커플의 주거니 받거니 멘트가 계속되고 있었다. 마침 그들은 정부에서 나이 삼십이 넘도록 소울메이트를 찾지 못한 이들에게 사회 보장 차원의 보조금을 지급하는 신설 법조항을 설명하고 있었는데, 앵커 커플의 동정어린 눈빛이 우리들의 심사를 더욱 울적하게 만들었다.
"민영 씨나 민욱이 너야 아직 창창한 나이지만 난 이제 서른여섯이야. 오늘 아침에 신문을 본 회사 직원들이 나를 보며 다 그러더라고. '그래, 뭐니 뭐니 해도 돈이 최고지. 그냥 신청해버려, 이대리.'하고 말이야. 그따위 걸 위로라고! 점심때는 전무이사님까지 내 식사 자리에 와서 어깨를 두들기더라니까."
"동섭이 형. 그래서 형은 보조금을 신청할 거유?"
기세가 한풀 꺾인 민욱의 물음에 동섭 씨는 한숨을 쉬었다.
"뭐 준다는 데 안 받기도 모하고. 고민 중이야. 어쩌겠어. 삼십이 넘도록 소울메이트 찾지 못한 게 뭐 대단한 유세라고."
"아놔, 씨팔."
다시 속이 타는지 민욱은 동섭의 대답을 듣자마자 급하게 잔을 비우고 말았다.
우리 네 사람은 인터넷 커뮤니티의 회원들이었다. 소울메이트를 미처 찾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드는 그 커뮤니티는, 서로간에 만남의 기회를 가지며 소울메이트 탐색에 열을 올리기 위한 목적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끝내 소울메이트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밀려나고 밀려나며 만든 수많은 소모임들. 그 중 우리 네 사람이 속한 소모임은 제법 오랜 역사를 갖고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커뮤니티에서 거쳐 갈 수 있는 마지막 관문의 성질을 띠고 있었다. - 이곳에서마저 소울메이트를 찾지 못한 사람들은 희망을 버리고 커뮤니티 자체를 탈퇴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사실, 동섭 씨가 말한 그 비참한 경험이란 내게도 제법 익숙한 것이었다. 입사 초기만 해도 내 소울메이트를 찾아준다며 이 사람 저 사람을 소개시켜주던 내 직장 동료들도, 이제는 기진맥진하여 내가 싱글이란 것을 일상적인 장애마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가.
말마따나 뭐, 그냥 장애가 있나보다, 하고 스스로도 익숙해지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우리였다. '소울메이트의 보급으로 인해 보급 전보다 연애가 어려워진 극소수 피해자에 대한 사회보장의 성격'이라는 보조금의 설명은 그럴싸했다. 실례로 소울메이트가 아닌 상대가 연애 대상에서 배제되어가는 사회 분위기 속에 우리 같은 후아유 무반응자들은 연애전선의 강한 고기압에 밀려 점차 소외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싱글들에게 필요한 건 어설픈 동정과 보조금이 아닌, 커플을 이룰 상대다.
"아빠는 재혼 안 해?"
어느 날엔가 나는 도통 재혼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아빠에게 물음을 던진 일이 있었다.
"재혼?" 신문을 읽던 아빠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혼자 사는 게 더 편한 점도 많아. 버는 돈도 내 맘대로 쓰지. 남는 시간도 다 내 꺼지. 뭐 너 키울 때야 좀 힘들었지만 이젠 너도 독립했겠다. 그냥 마음 편하고 좋다."
나는 서른 살이 넘도록 소울메이트 하나 찾지 못하는 딸 눈치에, 아빠가 혹여 재혼을 결심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아빠를 닦달했다.
"아빠 말대로 나도 이제 독립했겠다. 아빠도 슬슬 자기 인생을 즐겨야지. 남들처럼 후아유 같은 거 걸고 사람들도 좀 만나고 해보라고. 나이가 일흔이 다 되어서도 소울메이트를 찾아 즐겁게 사는 사람들도 많데. 요즘 평균 수명이 백스무 살인데 아빠 나이는 정말 창창한 거야."
그러나 아빠는 별 관심이 없다는 투로 시원찮게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글쎄."
* * *
"난 소울메이트 같은 건 믿지 않아. 자신의 사랑은 직접 선택할 수 있어야 진실한 게 아닐까?"
내 인생의 두 번째 남자는 같은 중학교의 육상부 넓이 뛰기 선수였다. 알음알이로 만나게 된 그와의 첫 대면에서 그는 대뜸 내게 자신의 외모만큼이나 쿨한 멘트를 던져왔다. 나는 그의 단 두 마디 말에 이내 사랑에 빠져버렸다. 후아유로 인한 여섯 살 첫 사랑의 아픈 상처를, 이 아이에게라면 치유 받을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로부터 방과 후, 운동장의 간이 트랙을 도는 그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는 건 나의 즐거운 일과가 되었다. 길고 탄탄한 다리로 세상을 질주하고, 목표를 향해 거침없이 뛰어 오르는 그는, 후아유를 달고 인연을 애타게 기다리는 아이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오롯이 버티고 선 굳센 벽처럼 느껴졌다.
"쟤 있잖아. 잘생기긴 했는데. 좀 밥맛 같지 않아?"
어느 날, 내 단짝 친구 민지가 점심시간 운동장 교정으로 나와 함께 도시락을 나누던 중에 돌연 운동장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허세 킹인 것 같더라니까? 허.셰.킹!"
케찹에 버무린 비엔나 소세지가 민지의 입안에서 오물오물 씹혀들었다. 운동장에는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나는 민지가 누구를 가리켜 말하는 것인지를 선뜻 알 수 없었다.
"운동하는 애들은 다 그런가? 몸은 멋지고 인물도 좋은데 무슨 마초에 폼만 쩔고. 큰소리만 뻥뻥!"
"다 그렇지는 않아." 나는 그 아이를 떠올리며 서둘러 항변했다. "자기 소신이 있고 멋진 애도 있는 걸."
나는 그 아이와의 교제 사실을 주변에 숨겼기 때문에 그 이상 말을 늘이지 않았다. 때마침 그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농구를 즐기고 있었다. 내 눈길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민지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적어도 쟤는 아냐. 바람둥이에 왕재수니까."
"쟤라니?" 나는 공연한 모욕감을 느끼며 민지를 돌아보았다. "너 설마 저 육상부 애를 말했던 거야?"
"그래, 육상부 넓이 뛰기 선수."
민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쟤는 여자 알기를 무슨 헌신짝처럼 안대. 남들 앞에서는 후아유를 믿지 않는다며 큰소리 뻥뻥치고는, 사실은 몰래 후아유를 갖고 다니면서 이애 저애 만나보고 다닌다 하더라."
그러나 민지는 평소에도 믿을 수 없는 소문까지 이리저리 주워 담는 아이였다. 그런 소문이 대개 사실이었다고는 해도 나는 여전히 민지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말이 사실로 판명이 난 후, 나와 그 아이의 관계는 불신으로 균열되고 산산이 깨어졌다. 난 믿기 힘든 두 번째 실연의 상처를 달래고자, 한동안 그 아이가 연습하는 모래밭을 찾곤 했다. 아무도 없을 때. 미미의 용변을 처리한 고양이용 화장실 모래를 들고서.
* * *
"동섭이 형. 벌써 취했어? 참으로 속 터지는 날인데 우리 2차, 3차 가야지!"
주말을 믿고 용을 쓰는 민욱이야 말 그대로 2차, 3차가 무난할 듯 보였지만, 동섭 씨는 나이가 나이였던지 게슴츠레한 눈으로 고개가 꾸벅꾸벅 떨어지곤 했다.
"아냐, 안 취했어. 2차 가자. 그래, 가자고!"
그래도 끝내 오기를 부리는 동섭 씨의 목소리가 늘어졌다. 민영이 나를 걱정스레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동섭이 아저씨는 완전히 취한 것 같은데요, 언니."
"그러게."
고개를 끄덕이는 새, 민욱이가 피식거리며 웃었다.
"수진이 누나! 누나네 집이 여기서 가깝지? 그럼 우리 번다하게 다른 술집 찾지 말고. 술이랑 싸들고 누나네 집으로 가자. 먹다 졸리면 그냥 자게!"
"우리 집에?"
혼기가 가득차고도 넘친 처녀 집에 와 술을 먹고 숙박까지 하겠다는 저 당당함은, 도저히 반응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 후아유가 터놓은 막역한 우정 탓이겠지. 하긴, 이성에 대한 일말의 기대도 없는 우리가 무슨 사고를 칠 수 있겠니. "그래, 가자." 나는 일말의 당혹감과 두려움도 없이 콜 사인을 불렀다.
"소심한 듯 보여도 누나는 은근히 여자 대장부라니까!"
편의점에서 민욱이는 술과 안주를 바리바리 싸들었고, 동섭 씨도 비틀비틀 따라 들어가서는 무언가를 비닐 봉투 안에 챙겨 넣었다. 집에 들어선 우리를 반겨준 것은 미미였다. 잠시 호기심에 다가오다 술 냄새 탓인지 멀찌감치 물러선 것을 환영이라 할 수 있다면. "참 도도한 고양이네요." 민영이가 그런 고양이를 보며 슬며시 웃었다.
민욱이는 잽싸게 거실로 들어와 술부터 꺼내 챙겼다.
"이거 다 먹고 눕는 거야! 알지?"
집안 공기가 어색했던지 민영이 살짝 창문을 열고 TV 리모컨을 챙겨 들었다. 사회로부터 동정을 받아 마땅하다는 우리 유전적 장애우들은 술과 안주를 벌여놓고 둘러 앉아 두 번째 술판을 벌였다.
* * *
고등학교 때 만난 세 번째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고양이 알러지로 인해 나를 떠나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인연은 곧 다시 찾아왔다. 대학에 진학해 첫 미팅에서 만난 그는 고양이를 사랑했고 진심으로 소울메이트에 무심한 남자였다. 나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그는 내가 그제껏 만난 누구보다 여성의 마음을 잘 아는 남자였으며 나를 늘 편안하게 해줬다.
그러나 나를 바래다주던 어느 늦은 밤, 집 앞 골목에서. 두 눈을 감은 채 가슴 설레는 첫 키스를 기다리던 나를 두고 그는 돌연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미안해, 수진아. 도저히 못하겠어."
기대는 산산이 무너졌고, 우리 두 사람은 가까운 포장마차를 찾았다. 무슨 일이 있느냐며 묻는 내게, 안주도 없이 소주잔만 연거푸 들이켜던 그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백을 시작했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너를 만나서 정말로 사랑하고 내 마음을 잡아보려 했는데 그게 잘 되지를 않아."
나는 이별 예감보다 이 좋은 남자가 나로 인해 상처를 받았다는 일이 더 충격이었다.
"왜 그래? 내가 널 그렇게 힘들게 했니?"
"아냐, 그게 아냐. 네 문제가 아니야."
그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젓고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머뭇머뭇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난 있잖아, 수진아."
"괜찮아. 다 말해봐."
"난 여자에게서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자꾸 남자에게 마음이 끌린다고."
* * *
알코올이 임계치에 다다르고 있었다. 적적하게 거실을 비추는 TV 스크린의 심야 드라마에서는 아들이 데리고 온 여자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시어머니가 아들과 여자에게 불편한 심기를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저게 무슨 내용이야? 저 아줌마는 왜 저렇게 못되게 굴어? 재수 없게."
진미 오징어를 길게 입에 빼어 문 민욱이 돌연 TV 속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물었다. TV 속 이야기에 넋이 나간 민영이 시선도 돌리지 않고 대답을 해주었다.
"저 아줌마는 대기업의 회장 사모님이야. 아들이 결혼을 하겠다며 데리고 온 여자애가 별 볼일이 없는 집안이라 내키지가 않는 거지. 더군다나 두 사람의 후아유는 서로 반응도 하질 않고."
"그래?"
"근데도 두 사람은 서로 좋아 죽겠대. 떨어져선 못 살겠다는 거야."
"사모님이 속 터질 만도 하네."
"그렇지? 그리고 이 집안에 어울릴만한 여자가 있어. 그 여자는 저 귀공자의 약혼녀야. 귀공자는 그 약혼녀를 사랑하지 않지만 두 사람의 후아유는 빨갛게 빛나는 거야."
민영의 설명을 듣던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알딸딸하게 풀려든 눈으로 TV속 스크린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후아유가 맺어준 인연을 버리고서 후아유로 부정당한 사랑에 모든 걸 건 두 남녀. 우리는 그들의 사랑이 이뤄지길 진심으로 응원했다.
* * *
소울메이트와 Na0 메커니즘, 후아유와 이를 발명한 박사를 저주하며 맞은 스물한 살에, 나는 할리퀸 소설에서나 나올법한 훈훈한 선배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술자리에서 지나간 내 인생사를 듣던 선배는 커피 CF에도 어울릴 듯한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이제는 다 잘 될 거야."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리고 얼마 후의 내 생일 날, 앞으로 잘 해보라는 문구가 적힌 카드와 함께 후아유 상자를 선물 받았다. 그 후아유는 선배의 후아유에 반응했고 그렇게 내 인생에 봄날이 찾아왔다.
그러나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듯 그 빛과 온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 선배의 후아유가 다른 후배의 후아유에도 반응을 하면서 내 삶이 서서히 원점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한 것이다. 불편하고 복잡한 삼각관계 속에서 나는 진지하게 중동으로의 이민마저 고민했다. - 거긴 일부 다처제잖아. 내가 걔보다 한 살이 더 많으니 퍼스트는 내가 되야겠지?
그러나 선배는 중동이민보다 합리적인 선택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세 사람의 후아유를 제작사의 서비스 센터로 가져갔던 이 남자는 새로운 소울메이트와 함께 총총이 나를 떠나갔다.
그날 우리 집에는 후아유 제작사의 본사에서 나온 직원이라며 찾아든 남자는 죄인처럼 연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런 일은 로또에 1등으로 당첨된 사람이 길을 걷다 벼락을 맞을 확률과도 같습니다. (너털웃음. 그리고 바로 정색) 하지만, 이런 문제가 발생한 데 대해 저희 회사는 고객님께 심히 유감스럽다는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이것으로 위로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희가 보여드리는 작은 성의입니다. 아무쪼록 부담 갖지 마시고 받아주십시오."
그는 신형 후아유와 함께 심심찮은 위로금을 전해주었다. 그 날 나는 아빠와 함께 듣도 보도 못한 비싼 양주를 땄고, 미미는 최고급 참치 통조림을 맛봤다.
* * *
"아, 시발. 말도 안돼."
크레딧이 올라오는 스크린을 멍하니 바라보던 민욱이 말했다.
"우리나라 드라마는 이래서 안 돼요." 민영은 흥분한 기색이었다. "어떻게 로또 1등으로 당첨된 사람이 길을 걷다 벼락 맞을 확률이 일어나요?"
드라마 속 귀공자의 후아유가 일으킨 작은 고장이 밝혀지며, 상황은 순식간에 교통정리가 되기 시작했다. 회장집 사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에 으레 열린 사고를 가진, 소탈한 성격의 회장님은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했고. 가난한 집에서 성실하게 자라온 며느리는 성심껏 시어머니를 모시며 닫힌 마음을 풀어갔다.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귀공자의 약혼녀는? 그녀를 늘 곁에서 오빠처럼 돌봐오던 - 그것도 후아유 부정론자였던 - 남자의 후아유에 반응하며 해피엔딩.
그래, 요즘 세상은 다 그렇다니까. 나는 웃으며 창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던 미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녀석은 동섭 씨의 곁에 다가가 앉은 채로 무언가를 계속 보채는 중이었다.
"뭐해요? 동섭씨."
동섭 씨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손에는 고양이용 간식이 들려있었다.
"수진 씨가 모임 자리에서 미미 얘기를 자주 했었잖아요. 처음 수진 씨 집에 방문하는 건데 미미 것도 챙겨오는 게 예의일 것 같아 아까 편의점에서 하나 챙겼어요."
미미가 야옹하며 동섭 씨를 보챘다.
* * *
그렇게 좌절로 점철된 나날들. 생애 처음으로 양주를 맛 본 이후로도 나는 네 명의 남자를 만났고, 소심한 등짝이 미워 차버린 일곱 번째 남자를 제외하면 모두가 자신의 진정한 소울메이트를 찾아 떠났다. 그들을 만나면서도 매번 한 두 번씩은 후아유가 반응을 했는데, 어째서인지 결국은 그 상대가 내가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나곤 했다.
"사실, 저희 회사에서도 수진 씨의 사례를 눈여겨보고 있어요." 이제는 얼굴마저 익숙해져버린 본사의 남자는 내 기분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학회 쪽에도 보고가 되었는데 혹시 따로 연락을 받은 일은 없으셨나요?"
"네, 받았어요. 연구 대상으로 제의하더군요. 하지만 거절했고요."
내 무심한 대답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셨군요."
그리고 이 남자가 내 이십대의 마지막 연애 대상이 되었다. 그와는 스물일곱 살을 맞이하던 해의 첫 6개월을 사귀었는데, 수수하지만 지루하기도 했던 연애 끝에. 그는 내 소울메이트가 어쩌면 후아유란 기계 자체일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남기고 내 곁을 떠났다.
* * *
재혼을 독촉하던 내게 아빠가 말했다.
"사실 말이야. 이제 네가 후아유에 대한 미련을 버렸으니 하는 말인데. 아빠는 후아유가 싫어. 덕분에 네게 비싼 양주들도 얻어먹고 그랬지만. 암튼 난 후아유가 싫다고."
가라앉은 침묵 사이로 나는 아빠에게 물었다.
"엄마 때문에?"
"엄마 때문이 아냐. 난 그냥 후아유가 싫은 거야. 후아유는 나나 네 엄마가 서로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고 했잖아."
아빠는 잠시 후, 읽던 신문을 접어들고는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난 네 엄마를 사랑했어.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아빠는 엄마랑 자주 싸웠잖아. 신었던 양말을 세탁기에 넣는 문제 따위, 아주 사소한 것을 갖고도."
"그래, 그래도 아빠는 엄마를 사랑했다고. 하루걸러 부부 싸움을 하고 언성을 높이고 울고 화를 냈지만. 아빠는 그렇게 엄마를 사랑했던 거야."
"그런 사랑이 세상에 어딨어?"
"그런 사랑은 있었어. 후아유가 나오기 전까지는."
아빠는 깊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옛날 사람들은 궁합이 좀 안 맞아도 서로 맞춰가며 살았어. 처음에야 티격태격 대고. 뭐, 나중에도 계속 싸울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싸우면서 모난 곳을 서로 깎고 조금씩 맞춰가며 살았다고. 그게 정이고 사랑인 거야. 오십년을 함께 산 부부도 다 늙어서는 '난 아직도 내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라고 말하는 법이야. 그럼에도 여전히 잔잔한 정으로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지. 그게 진짜 소울메이트야! 후아유가 점지해주는 완벽한 연인이 아니라."
"엄마는 아빠를 이해하지 못했어."
"후아유 때문에 시간이 충분하지 못했던 거야. 서로에게 맞추며 변화할 시간들을 기다리지 못했고, 진심어린 과거를 기억하며 참아낼 수 없었던 거지. 후아유 때문에……."
그래도 후아유 덕분에 소울메이트들은 서로 행복하게 지내잖아.
"모르겠어, 아빠."
내 말에 아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신문을 펼쳐들었다. 희미하게 아빠의 웅얼거림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래, 이젠 나도 모르겠다. 요즘 세상은 그냥 다 그런 것 같아. 마치 원래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 * *
서른 살의 문턱을 넘은 나는 정부 보상금 신청을 고민하는 선천적 Na0 메커니즘 결핍자 내지 유전적 기형아로서 세상에서 가작 적은 소수집단인 싱글족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이 너덜너덜해져버린 듯한 이즈음의 나는. 작은 것 하나까지 배려할 줄 아는, 내 생애 두 번째로 괜찮은 남자를 만나게 된 것 같다.
그는 우리 아빠처럼 미미의 간식거리를 챙길 줄 알았고, 우리 아빠처럼 자신의 소울메이트를 찾지 못했으며, 우리 아빠처럼 상처가 많고 외로운 사람이었다. 더불어 그는 우리 아빠처럼 내 사소한 문제에까지 보이지 않게 신경을 쓰며 배려를 해주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이 사람이 나를 살피고 이해해준 것은.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대판 싸운 적도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그와 처음 만난 모임의 시기를 짚어보려 애썼지만 기억이 나질 않았다. "대체 우리가 첫 통성명을 한 게 언제였죠?" 그러나 그 역시 그것을 기억해내진 못했다. "그럼 언제부터 나와 내 얘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거예요?" - 모르겠어요. 그냥 언제부턴가 예요. 우리의 후아유는 서로 반응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사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빠의 말처럼 소울메이트는 후아유가 반응하는 상대가 아니라 서로 아끼며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일지도 모른다.
미미가 나와 동섭 씨의 사이로 비집고 들어섰다. 나와 평생을 살아온 고양이 미미. 첫 남자를 이어줬고, 두 번째 아이에 대한 복수를 도왔고, 세 번째 아이를 떠나보내게 했으며 네 번째 동성애자를 맺어준. 그 이후로도 누군가가 내 곁을 떠날 때면 늘 관심도 없는 척 내 곁 창가에 다가와 무심히 먼 곳을 바라보던 미미. 내 삶과 고독의 무게를 무겁게 지탱해주던 아빠나 미미의 작은 어깨가 이제는 조금 더 가벼워 질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날따라 유난히 밝은 듯한 녀석의 눈을 보며 말했다.
"고마워, 나의 소울메이트." (終)
*글쓴이의 말: 이 글은 김성훈이 쓴 동명의 엽편을 원안으로 새로운 주제와 해석의 관점하에 스토리와 인물을 재구성해 완성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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