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스 무덤 앞에 선 에호이는 보호막 바깥을 바라보았다. 검은 구름은 변함없이 비와 번개를 쏟아내었고, 초속 150미터가 넘는 바람에 날린 바위들이 보호막에 부딪혀 둔중한 메아리를 만들었다. 말없이 서 있는 에호이의 손을 에두움이 슬며시 끌었다.
“아빠, 가요.”
에두움이 깨끗한 갈색 눈을 깜박이며 에호이를 올려보았다. 릴리스를 빼닮은 눈동자였다.
“엄마가 보고 싶지 않느냐?”
에두움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초교육을 거의 마친 에두움의 눈에는 지성의 빛이 반짝였다. 교육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 기초교육 이상의 지식은 에두움이 살아가는 데 방해만 될 뿐이었다. 현실과 격리된 지식은 자칫 치명적인 정신적 결함을 유발할 염려가 있었다. 무한대의 질량, 마이너스 부피,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파악하는 원리 등등 1만5천여 년 동안 축적된 인류의 지식은 에두움에게 필요하지 않았다. 에두움에게 필요한 건 생물학적 존재를 유지시켜줄 수 있는 기초지식이었다.
큰 사건 대부분은 아주 작은 실수에서 비롯되고, 신비한 현상도 원리를 알고 자주 접하면 생활의 일부가 된다. 인류는 자신들이 사용하는 에너지에 관심을 둘 필요가 없었다. 단 한번의 오류도 없이 7천년 동안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무한에너지는 공기처럼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다.
그날도 수소와 산소 분리 촉매제로 쓰인 변형우라늄을 폐기하기 위해 화물비행선은 바다 위를 날았고, 비행선 감시관의 콧노래는 노을처럼 감미로웠다. 인류는 까마득한 날에 있었던 핵분열의 공포를 잠재의식에 지니고 있었기에, 변형우라늄 폐기소는 대기권 밖 위성에 만들어 핵폭발의 위험요소를 아예 없앴다. 그런데 그날은 지난 7천년의 매일과 달랐다. 비행선이 바다 위에서 상승하는 순간, 주먹만한 변형우라늄 봉들이 다 닫히지 않은 문틈을 통해 바다로 쏟아졌다. 화물칸 문 점검을 제대로 했더라면, 혹은 변형우라늄이 원칙대로 완전히 연소되었더라면, 아니면 평소대로 완전히 코팅이라도 되었더라면, 그도저도 아니면 비행선의 고도가 더 높았든지 낮았더라면 인류 최후의 날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것은 진화가 멎은 생명체를 도태시키려는 창조주의 뜻이었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7천년 동안 단 한번의 실수도 없던 완전함은 인류에게서 ‘주의’이라는 의식을 지워버렸다. 비행선의 고도가 조금만 높았어도 코팅이 덜된 변형우라늄 봉은 대기마찰로 완전히 탔을 것이고, 조금만 낮았더라면 촉매제로 작용할 만큼 열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우라늄에 의한 핵분열의 파괴력을 경험한 인류는 축적된 모든 지식을 총동원하였다. 그로부터 천 년 뒤에 원자로가 사라지고 수소와 산소의 분해와 결합을 이용한 거대발전소가 개발되었다. 그 일은 역사가 시작된 지 8천5년 만에 인류가 이룬 가장 위대한 성과였다.
물에서 수소와 산소가 분리 결합될 때 생기는 엄청난 에너지뿐만 아니라, 우주에서 가장 많은 원소인 수소는 바닷물 1마일당 5억4천600만 톤이나 되었다. 물분해 거대발전소와 순수수소는 무공해의 무한에너지를 공급했고 인류는 에너지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여기에 바닷물이 분해되고 난 뒤 잉여물로 생산되는 금은 문명구조물 전체를 황금으로 바꾸어놓았고, 1마일의 바닷물에서 수소를 분리할 때 생기는 43억4천81만 톤의 순수산소는 식물의 존재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수소는 과거에 원시적인 방법으로 사용했던 농축우라늄보다 더 위험했다. 수소가 산소와 분리 혹은 결합할 때 생기는 에너지는, 촉매제로 쓰는 변형우라늄의 방사능을 몇 백 배로 증폭시켰고, 여기에다 수소원자의 핵반응까지 더해질 경우 그 폭발력은 상상할 수 없었다. 실수로 떨어뜨린 변형우라늄은 바다 전체에서 연쇄반응을 일으켰고 물이 있는 곳이면 재앙을 피할 수 없었다.
보호막 안에서 천진하게 뛰어노는 아들과 딸을 만족한 눈으로 바라보던 에호이는 땅이 흔들리자 나무줄기를 붙잡았다. 분리되었던 산소와 수소가 재결합되면서 대기에 엄청난 양의 물을 만들었고, 쏟아지는 그 물에 의해 한 개 뿐이었던 대륙이 몇 개의 덩어리로 조각나면서 지진이 자주 일어났다.
대재앙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이 보호막 밖에서 어슬렁거렸다. 하지만 그들을 인간이라고 부르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1만3천 년 전까지만 해도 지구상에 수없이 많았다던 짐승들처럼 사족보행하는 무리가 절반을 넘었다. 지구를 뒤덮은 방사능은 그들을 변이종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아니, 그게 아니었다. 인간 유전자는 진화의 시간을 되집고 있었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퇴화되었던 신체부위들이 빠른 속도로 재생되면서 몸이 다양한 형태로 변화되어갔다. 언어능력을 상실하여 단순음을 되뇌었고, 보온을 위해 온몸은 털로 덮였다. 동족을 먹기 위해 송곳니가 발달하였으며, 먹이가 되지 않기 위해 손가락과 발가락은 날카롭게 변화되었고 사족보행을 돕기 위해 꼬리뼈의 발달이 두드러졌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는 생식 방식이었다. 기초교육 중 생물역사 시간에 보았던 신체를 이용한 교접이 보호막 밖 어느 곳에서나 행해졌다. 그들의 생식 행위는 생존을 위한 싸움보다 훨씬 격렬했다. 그들이 왜 그렇게 생식행위에 몰두하는지 에호이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남성기는 엄청나게 커졌고, 몇몇은 오로지 번식만이 삶의 목적인 것처럼 몸체보다 더 길어진 생식기가 스스로 여성기를 찾아갈 정도였다. 또한 과거에 여자로 분류되었던 무리는 한꺼번에 많은 자식들을 낳았고, 유방도 몇 쌍씩 생겨났다. 인간의 정신이 사라져가는 그들에게 움직이는 생물은 교접대상이나 먹이, 둘 중 하나였다.
*
에두움의 정자와 인류보존용 난자와의 수정이 실패를 거듭하자 에호이와 릴리스는 다급해졌다. 과학장비를 사용할 수 없게 된 현실에서 에두움의 짝, 즉 자식을 낳을 수 있게 튼튼한 자궁과 방사능으로 변형되지 않은 유전자를 가진 완전한 여자가 필요했다.
에두움은, 방사능에 오염된 현재 릴리스의 난자가 아닌 예전에 에호이의 아버지가 연구하고 보관해두었던 난자를 에호이의 정자와 수정시켜 릴리스의 자궁에서 태어났다. 기계가 아닌 인간의 자궁에서도 태아가 자랄 수 있다는 사실이 에호이와 릴리스는 신기하기만 했다. 하지만 방사능에 노출된 릴리스의 체세포는 빠르게 노화되는 특성이 있었다. 에두움을 기르느라 10개월을 버틴 릴리스의 자궁은 더 이상 세포활동을 못했다.
자궁 대신 쓸 수 있는 온전한 체세포가 없었다. 릴리스는 방사능에 노출되었고, 에호이는 이미 노화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에두움의 왼쪽 폐 아랫부분을 떼어낸 뒤 분열시켜 인공자궁을 만들어 수정란을 착상시켰다.
신체적으로 완벽한 여자를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앞으로 어쩔 수 없이 치러질 근친 교배에 의한 유전적 퇴보와 유전질병을 어느 정도나마 막을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릴리스의 난자가 아닌 제3의 난자가 필요했고 다행히도 생명연구소에서 가져온 인류보존용 난자가 있었다. 하지만 그도 역시 7개 중 이제 1개가 남았을 뿐이다.
에두움의 정자와 인류보존용 난자의 수정은 실패를 거듭했다. 가져왔던 난자 중에 6개를 사용하고 난 뒤에야 에두움의 폐로 만든 인공자궁에 문제가 있음을 알았다. 에두움의 왼쪽 폐로 만든 인공자궁 세포에는 미세한 남성 호르몬이 남아 있었고, 그에 대한 거부반응으로 착상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열폭풍에 하나는 이미 녹아버렸고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은, 그나마 방사능 오염이 덜 된 릴리스의 신장을 떼어내 만든 인공자궁에서, 세포분열 단계까지 이루어지고 있었다.
에호이는 자신의 체세포를 이용하면 쉽게 새 여자를 만들 수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체세포로 만든 그 여자아이는 또 다른 자기였다. 자신을 복제한 그 여자아이의 생체 나이는 이미 노쇠가 시작된 현재의 에호이와 같았다.
릴리스와 에호이는 한 순간도 인공자궁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모든 희망이 그곳에서 자라고 있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리고 둘은 눈만 감으면 떠오르는 과거의 잔상을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병적으로 몰두했다.
*
인류력 1만5천5년 9월 30일.
에호이는 모처럼 휴가를 얻었다. 릴리스도 기대에 들뜬 모습이 역력했다. 정책결정위원 10인 가족에게만 지급되는 천연엽록소 섬유 옷을 입은 릴리스의 몸에서는 기분 좋은 식물향이 났다.
“소장님, 연구소는 걱정 마시고 쉬었다 오세요. 사모님께서도.”
연구소 경비장교가 친근한 미소로 인사를 했다. 특권계층들이 휴가를 즐기는 남극의 작은 섬인 천연식물섬은 아무나 가는 곳이 아니었다. 이런 특권을 누리기 위해 에호이가 기울인 노력은 대단했다.
350세에 생명연구소 소장이 된 사람은 연구소가 생긴 7천년 이래 에호이가 처음이었다. 150년간의 의무교육과 적성 검사 기간 50년은 어쩔 수 없다 해도, 전문교육 200년 과정을 100년 만에 끝낼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사람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의지력 덕분이었다.
인간 유전자 배열 구조가 완벽하게 밝혀진 지도 1만2천 년이 지났다. 하지만 유전자 조작은 질병치료와 생명연장 수단을 벗어날 수 없었다. 과학원에서 퍼뜨리는 약화된 바이러스를 제외한 모든 질병유발체가 사라진 지도 1만 년이 지났고 인간의 평균 수명은 950년을 웃돌았다. 또한 대기권 밖으로의 진출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그곳은 창조주가 거주하는 신의 영역이었다. 신의 말씀은 사회를 지배하는 법이었고, 인간은 태어날 때 대기권 밖 진출 금지법과 유전자 조작 금지법이 무의식에 심어졌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에호이의 아버지는 이런 법률이 각인되지 않았다. 생명연구소장직은 10인 정책결정위원의 일원으로 최고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지만 아버지가 그 자리를 그만둔 이유도 그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는 신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 신의 말씀은 인간 역사를 비유해 기록한 것이라 여겼고, 그랬기 때문에 생명연구소소장직을 그만둔 뒤 지하연구실에 틀어박혀 비밀리에 연구를 진행했다.
지구에서는 인간에게 한계가 있었다. 어떤 생명체든지 시련 없는 환경에서는 더 이상 진화하지 않는다. 인간들은 생존을 위한 어떤 노력도 필요치 않았다. 나쁜 감정은 유전인자에서 제거되었고, 상대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미움 없는 사랑은 공허했다.
인간의 세포 하나에서 일어나는 변화까지도 감지하는 과학원에서 인간의 진화가 멈추었다는 사실을 공식화한 지도 7천 년이 지났다. 모든 생물체는 더 나은 형태로 변화를 추구한다. 그것이 멈추었다는 사실은 퇴화를 의미했다. 3차원 공간에서는 과거와 미래만 있을 뿐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3차원 존재가 현재라고 느끼는 순간은 이미 과거이다. 이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 생물체에게는 ‘앞으로’ 아니면 ‘뒤로’가 있을 뿐이었다.
자연진화가 멈추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진화할 출구를 열어주어야 한다는 것이 아버지의 신념이었다. 그는 육체가 아닌 정신진화의 길을 열고자 하였다. 그 실험대상은 자신의 체세포 유전자를 변형시켜 복제해낸 자식들이었다. 에호이의 형과 누나들 100여 명이 태어난 지 하루도 안 돼 뇌의 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죽었다. 그런 실패 뒤에 태어난 아이가 에호이였다.
덕분에 에호이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미 사라진 의지, 끈기, 슬픔, 분노와 같은 몇 가지 감정이 있었다. 또 에호이가 태어난 곳은 생명생산공장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만든, 지하 200미터까지 관통하는 과학원 감시파를 피하기 위해 1미터 두께의 납과 특수합금으로 에워싸인 지하 250미터의 비밀연구소였다.
천연식물섬행 2인용 광속정의 투명금속 뚜껑이 닫히자 에호이는 릴리스의 손을 잡았다.
“당신 덕분에 식물섬 여행을 다 해보네요. 같이 가는 여행은 처음이죠?”
릴리스의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미안해.”
“아이, 그런 말은 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아참, 그랬었지.”
“호호호, 당신에게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땐 얼마나 당황했던지.”
“그때 당신의 황당한 표정은 아직도 생생해, 하하하.”
“당연하죠, 그때만 해도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으니까.”
광속정 안에 유쾌한 추억이 흐르는 동안 불이 희미해지며 홀로그램 여자안내원이 나타났다.
“저는 두 분을 모실 안내컴퓨터 J-29입니다. 곧 광속정이 출발할 것입니다. 식물섬까지 6천430킬로미터, 현재 시간 17시 30분, 출발시간 17시 40분, 도착 시간은 17시 50분입니다. 잠깐 동안 실내 압력 변화가 있겠습니다.”
우웅, 소리가 들리더니 귀가 멍멍해졌다.
“코를 잡고 숨을 내쉬어보세요.”
안내원이 싱긋 웃으며 자기의 코를 가리켰다. 릴리스가 코를 잡고 숨을 힘껏 내쉬자 이마에 푸른 핏줄이 돋았다. 안내원이 소리 내어 웃었다.
“호호, 이제 괜찮아지셨죠? 불편사항이 있으면 불러주세요. 저의 호출이름은 J-29입니다.”
홀로그램이 사라졌다. 그때였다. 조금 흔들린다 느꼈을 때는 출발을 위한 동작인 줄 알았다. 그런데 주위가 환해지더니 수평선 너머에서 하얀 태양이 솟아올랐다. 광속정 주위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멋있어요.”
릴리스도 황홀한 듯 탄성을 뱉었다. 그러나 에호이는 불안을 느꼈다. 본 적 없는 하얀 태양, 저 정도의 프로젝트라면 정책결정위원인 자신이 모를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J-29, J-29.”
에호이가 다급하게 부르자 싱그러운 미소를 띤 안내원이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저게 뭐지?”
“글쎄요? 저의 프로그램에는 존재하지 않는 현상…….”
안내원이 하얀 태양을 바라보며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을 끝내기도 전에 에호이의 입에서 벼락같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정책위원회를 호출해, 빨리.”
“알겠습니다.”
대답을 한 안내원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상합니다. 위원회와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다시 해보겠습니다.”
은은한 진동이 느껴졌다. 무언가 에호이의 머릿속을 스쳤다. 어렸을 때 아버지의 교육 프로그램에서 본 적이 있는, 1만3천 년 전에 지구의 거의 모든 생물을 사라지게 했던 핵분열. 에호이는 망설이지 않았다.
“정책결정위원 에호이, AHE-10 긴급 암호발동. J-29, 좌표 T5227, Y3336으로 출발해, 빨리!”
“무슨 일인데요?”
릴리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에호이를 쳐다보았다.
“정책결정위원 에호이, 인류생존 위기경보 AHE-10 암호발동. 좌표 수정되었습니다. 출발합니다.”
안내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광속정은 쏜살같이 미끄러졌다. 에호이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고 있었다. 하얀 태양이 떠오른 때가 40초 전, 섬광과의 거리가 1천여 킬로미터, 아버지의 지하연구소까지 15킬로미터. 만약 그것이라면 이곳까지 충격파 도달 시간은? 젠장 10여 초가 남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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