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FI

죽은 자들에게 고하라

소설가

2008년 10월 통권 37호

  1.

  오늘 딸을 돌려보냈다. 해초로 만든 옷을 입고 보트 위에 누워 있는 아이는 그 어느 때보다 예뻐 보였다. 해초밭에 도착하자 우리는 항아리에 담아온 물고기의 진액을 그 아이의 몸에 뿌리고 서서히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 스물을 세기도 전에 진액의 냄새를 맡고 온 작은 물고기들이 아이의 옷과 살을 물어뜯었다. 마을 사람들은 고개를 돌렸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아이의 얼굴이 물고기 떼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버지로서 나는 딸의 끝을 봐야 했다. 

  집에 돌아오자 나는 내가 목탄으로 그린 아이의 초상화를 꺼냈다. 아내는 말렸지만 나는 해야 할 일을 했다. 화로 속에서 그림이 불타는 동안 아내는 울면서 내 등을 후려쳤다. 나는 그녀를 애써 무시하며 불타고 남은 재를 그러모았다. 나는 밖으로 나가 재를 바람에 날렸다. 마지막 한 줌의 재가 허공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아내는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나는 아내의 상실감을 이해한다. 누군들 자기 아이의 장례식을 치르고 싶겠는가. 누군들 그 참혹한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 않겠는가. 누군들 초상화와 이름을 붙들고 그 아이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환상을 만들고 유지하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의 세계는 같지 않다. 우리가 죽은 자들을 받아들이면 우린 그 대가로 우리의 삶을 바쳐야 한다.  

  나에게 더 이상 딸은 없다. 아이는 일곱 해를 간신히 채우고 다시 그 애가 태어났던 바다로 돌아갔다. 얼마 전까지 그 아이를 이루던 살과 뼈는 이제 물고기 속에, 해초 속에, 바다 속에 있다. 죽음은 순간이고 남는 건 생명뿐이다. 

  

  2.

  프랭크 마이와 제레미 솔락은 지난 99일 동안 궤도 위의 우주선 안에 갇혀 있었다. 그들은 그 동안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된 거의 모든 가상 파트너와 섹스를 했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서로와도 했다.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그들은 마놀라어를 연구했다. 천이백년 전에 영어에서 파생되어 서서히 어휘와 문자를 잃고 흐트러진 야만인들의 소박한 언어였다. 

  100일째가 되자 마이는 고함을 질렀다. 

  “더 이상 못 참겠어. 셔틀 타고 내려가자.”

  오락실 소파에 앉아 톨스토이를 읽고 있던 솔락은 말없이 파트너 머리 위에 있는 원형 캘린더를 가리켰다. 캘린더는 반으로 자른 케이크처럼 절반만 파랬다. 

  “앞으로 100일을 어떻게 더 기다릴 건데?”

  “그게 협회의 규칙이야.”

  “그 규칙이야 밑에 있는 놈들이 최소한 라디오를 만들 수 있을 정도의 문명 생활을 하고 있을 때나 먹히는 거지. 너도 아래를 좀 보란 말이야. 밑에 있는 놈들은 할 줄 아는 게 물고기 잡아 구워먹는 것밖에 없는 촌뜨기들이라고. 문자도 없고 정부도 없어. 여기서 스피커로 중얼거리는 말을 엿듣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마놀라 어를 배울 수도 없어. 언어를 제대로 배우려면 직접 내려가서 원주민들과 부딪혀야지. 그것도 우리 일 아닌가?”

  “우리 일은 행성의 공식적인 주인인 원주민들로부터 관광지 개발 허가를 받는 거지. 절차를 따르지 않으면 책임이 다 우리에게 넘어와. 네가 그걸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솔락은 페이지를 넘기며 대답했다. 

  마이는 신음소리를 냈다. 솔락의 말이 맞았다. 행성계발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절차이고 그 다음이 막노동이다. 조금이라도 트집을 잡히면 일을 망치고 만다. 만약 절차에서 조금이라도 흠집이 발견되면 마놀라-4는 다른 회사의 손아귀로 넘어갈 수 있다. 마놀라 시스템은 엘리시움 워프 포인트에서 상업 개발이 가능한 거리에 있는 유일한 태양계다. 마놀라-4를 다른 교역단에 빼앗기면 마놀라-3을 테라포밍하는 것 이외엔 방법이 없다. 회사는 테라포밍이 끝날 때까지 2세기를 기다려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주선 안에 짱 박혀 100일을 더 기다리는 건 그보다 더 못할 짓이다. 

  “하지만 우리가 100일 일찍 내려간 걸 교역협회에서 어떻게 알아? 그 쪽에서 믿을 건 우리말밖에 없어. 우리가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그쪽은 모른다고. 게다가 200일 규칙은 보호용이잖아. 다 우리가 다치지 말라고 만든 거야. 그런데 밑의 녀석들이 우리에게 무슨 해를 끼치겠어? 생선가시로 찌르기라도 할 거야?”

  “생선 나름이지.”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솔락은 책을 끄고 잠시 생각했다. 마이의 생각에도 일리는 있었다. 마놀라인들의 세계는 한없이 단순했다. 몇 달 하늘에 더 머문다고 해서 그들에 대해 더 배울 것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더 배울 게 없다면 위에서 게으름을 피우는 대신 직접 내려가 접촉하는 것이 생산적일 수도 있다. 그 역시 우주선에 갇혀 있는 것이 슬슬 갑갑해지기 시작한 터였다. 

  마놀라인들을 100일 일찍 만난다는 것. 솔락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늘에서 보기에 그들은 단순하고 아름다웠다. 치찰음을 잃은 그들의 언어는 부드럽고 친근했다. 그는 속으로 지금까지 그가 배워온 마놀라어의 문장들을 하나씩 시험해보았다. 엘리, 루아르 아린 아무르 알라이 아이. 

  “글쎄... 데이터를 다시 한 번 살펴보고, 더 이상 여기서 배울 게 없는 것이 확실하다면 내려가 보기로 하지.”

   솔락이 말했다. 

  

  3.

  그들은 하늘에서 왔다. 유령들이 가득 찬 죽은 공간. 그들이 탄 배는 둥글고 희고 매끄러웠다.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것보다 더 완벽하게 죽은 물체를 본 적이 없다. 발에 차이는 돌멩이나 말라붙은 진흙덩어리도 그것보다 살아있었다. 자연의 불규칙을 허용하지 않는, 오로지 숫자의 규칙으로만 만들어진 물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새나 물고기처럼 빈 공간을 날아 마을 앞 해변에 내려앉았다. 우리들이 보는 앞에서 그것은 둥그런 입을 벌려 두 남자를 토해냈다. 한 명은 생선 속살처럼 분홍색이었고 다른 한 명은 진흙처럼 갈색이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우리를 닮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건 갈색이었다. 그는 말했다. “안녕하세요. 우린 다른 별에서 온 사촌들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동굴 속의 메아리처럼 낮았고 혀는 굳어 있었다. 아이들은 킥킥 웃었다. 남자는 수줍게 웃었고 옆에 서 있는 분홍 동료에게 자기네 말로 뭐라고 말을 했다. 

  촌장인 나는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달려 나갔다. 나는 마을을 대표해 그들에게 인사했고 그들의 이름을 배웠다. 갈색은 솔락, 분홍은 마이라고 했다. 내가 그들의 이름을 완벽하게 발음했을 리는 없지만 그들은 웃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우리 집으로 안내했다. 그들은 우리가 우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궁금해했다. 나는 내가 아는 태양계와 은하계의 규칙에 대해 이야기했고 우리가 마법이나 미신을 믿는 야만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그들은 내 대답에 놀라고 만족스러워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아주 중요한 일로 왔다고 말했다. 우리가 그들과 어떤 약속을 한다면 우리에겐 엄청난 이익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약속을 해도 우리가 누리는 삶의 방식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우리가 갈 수 없는 행성 반대편의 땅과 바다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곳이 더럽혀진 곳이라고 경고했지만 그들은 괜찮다고 했다. 천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곳의 재는 비에 씻겨 사라졌고 지금 그곳은 우리의 마을과 마찬가지로 안전하다고 했다. 나는 그들의 지식을 믿는다. 어느 것도 영원히 죽어 있지는 않는다. 천 년이라면 새로운 생명이 죽은 땅을 지배하기 충분한 시간이다. 내가 믿지 못하는 건 그들의 약속이다. 그들은 정말 모르는 걸까? 숫자들이 얼마나 죽어 있는지, 이익에 숫자들이 관여하면 생명이 얼마나 파괴되는지?

   

  4.

  “이거 불안한데. 너무 손쉽잖아.”

  마이가 투덜댔다. 

  “도대체 뭐가?” 

  솔락이 대꾸했다.

  “그냥 조상들이 잘 가르친 것이던데, 뭐. 우주선을 만들 대한 지식은 물려주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미신과 무지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방치하지도 않았어. 세상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꼭 필요한 만큼 알려줬더라. 그리고 문자도 없는 게 아니던데? 네가 잠시 나가고 없을 때 촌장이 이야기해줬어. 모래 위에 자기 이름도 쓰더라고. 알파벳 몇 개가 날아가긴 했어도 모양과 쓰임새는 그대로 남아있었어. 일이 편해진 거지. 괜히 신처럼 행세할 필요도 없어. 사람들을 설득한 다음 대표자의 서명을 받고 떠나자고.”

  “그래도 뭔가 이상해. 분위기가 나쁘다고.”

  “천 년 동안 우리랑 격리되어 있던 세계는 당연히 이상해. 안 이상하면 그게 이상하지.”

  “그래도 이상하지 않아? 어떻게 우주와 물리학에 대해 저렇게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기술 문명을 재건하지 않았던 거지?”

  “천 년 전에 핵전쟁으로 거의 몰살당할 뻔한 사람들의 후예잖아. 방사능과 낙진을 피해 행성 반대편으로 달아나 간신히 살아남은 거지. 그런 사람들이 기계 문명에 거부감을 느끼는 게 그렇게 이상해? 게다가 여기에서 기계문명이 뭐가 그렇게 필요해? 날씨 좋겠다. 먹을 것 풍부하겠다. 이 정도면 지상 낙원이지.”

  “말 잘 나왔다. 너 같으면 지상 낙원에 사는 사람들을 어떻게 계약에 끌어들이겠어? 뭘 주고 서명을 받겠냐고?”

  마이가 조사를 위해 다시 마을로 떠나자 솔락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파트너의 말이 맞았다. 회사가 마놀라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기껏해야 그들의 삶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 뿐.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뭔가 더 필요했다. 

  하지만 그건 마이의 일이었다. 솔락은 그 뒤 일주일 동안 자기 일을 하느라 바빴다. 그는 마이를 마을에 남겨둔 채 셔틀선을 타고 관광지로 계획된 행성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그는 그곳의 지형을 조사하고 지도를 수정하고 옛 마놀라 기계문명의 흔적을 탐사했다. 전쟁으로 멸망한 도시의 폐허는 관광객들에게 인기였다. 도시 중 하나는 천 년이라는 세월을 고려하면 썩 잘 보존이 되어 있고 해변과도 가까워서 조금만 손보면 페허 공원으로 쓸 만할 것 같았다. 관광객들은 오전에 핵전쟁의 비극에 대해 묵상하고 오후엔 해변으로 나가 선탠과 다이빙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일주일 뒤, 솔락이 다시 마을로 돌아오자, 마이는 심술궂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아주었다. 그동안 맛있는 걸 먹고 몸이 호강했는지 체중이 3,4킬로 정도 불어 있었고 그 때문에 그의 동그란 얼굴은 더 악동 같아 보였다. 

  “기가 막힌 사실을 알아냈어.”

  마이가 말했다. 

  “뭐가 그렇게 기가 막힌데?”

  “여긴 종교가 있어.”

  “아하, 무슨 신을 믿는데?”

  “그런 게 아니야. 신 같은 걸 믿으면 오히려 쉽지. 초자연현상을 조작해 사기를 치면 되니까. 마놀라인들의 종교엔 신도 없어. 내세도 없고 사후세계도 없지. 오로지 있는 건 생명과 현재 뿐이야. 현실에 충실하라, 지금 그대로의 삶을 즐겨라.”

  “그게 종교야?”

  “물론이지. 그것도 엄청 엄격한 종교야. 종교란 게 뭐야? 허구의 신성을 조작해 인간의 행동과 본능을 통제하는 거야. 여기엔 그런 종교가 있어. 이름도 없고 교회도 있지만 종교는 있단 말씀이지. 억지로 이름을 붙이면 생명교 정도 되겠지. 하지만 단 하나밖에 없는 종교에 이름을 붙여서 뭐해?

  아까도 말했지만 이 종교의 핵심은 생명과 현재야. 이들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예찬해. 호흡, 출산, 섹스, 식사, 배설 심지어 병과 고통과 죽음까지. 이 모든 것들을 현재진행형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하는 거지.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어. 좋은 거지, 살아있다는 건. 거기에 감사하는 것도 좋은 거고. 그렇게 즐겁지 않은 삶의 다른 요소들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도 긍정적이지. 종교가 아니라면 나도 이런 태도를 다른 세계에 소개하고 싶어.

  하지만 이건 종교야. 일종의 반종교적 종교지. 이들은 생명과 현재, 현실을 넘어서는 모든 것들을 배격해. 그냥 그런 것은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와 관련된 모든 행동을 금지한단 말이거든. 죽음은 괜찮아. 그건 삶의 일부니까. 하지만 죽음을 넘어서는 어떤 것도 허용되어서는 안 돼. 

  간단한 예를 들어볼까? 누가 죽는다고 치자. 그럼 이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이름을 나무 조각에 써서 죽은 사람이 가지고 있던 물건들과 함께 태워버려. 그럼 나무 조각이 타는 것과 함께 이름도 사라지고 더 이상 사람들은 그 이름을 부르지 않지. 살아있는 누군가의 어머니나 아버지로 불릴 수는 있지만 이름은 안 돼. 그건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허용되는 것이니까.

  마찬가지로 이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이 만든 노래나 이야기도 기억하지 않아. 노래나 이야기를 문자로 기록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지. 죽은 사람의 목소리를 사후까지 남기는 것은 범죄란 말이거든. 예술은 호흡과 출산처럼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만 허용되는 것이란 말이야. 그 때문에 이곳에서 노래나 이야기는 언제나 현재형이고 고정되어 있지 않아. 사람들의 입과 귀를 통해 끊임없이 흐르고 변화하는 노래만이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어. 고정되어 있는 노래는 유령이지. 죽어야 하는 데도 죽지 않고 허공을 떠돌며 산 사람에게 기생하는 비정상적인 존재 말이야. 이 행성에서 유령은 이처럼 현실적이지.”

  “흥미롭군. 하지만 토착문화를 우리가 멋대로 바꿀 수는 없잖아.”

  마이는 기가 차는 모양이었다.

  “모르겠어? 이 문화를 바꾸지 않으면 우리 임무는 성사될 수 없어. 이들은 죽은 자들의 기억을 인정하지 않아. 어떤 서류도 남겨두지 않고 이름도 기억하지 않는단 말이야. 그렇다면 어떻게 이들과 영구 계약을 맺을 수 있겠어?”


  5.

  분홍이 끔찍한 소리를 했다. 서쪽 해변에서 나는 그가 지는 태양을 바라보며 감상에 젖어 자기말로 뭐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 내가 뜻을 궁금해 하자 그는 그 말을 번역해 들려주었다. 그것은 기쁨도 사랑도 광명도 없는 컴컴한 광야와도 같은 세상에 대한 읊조림이었다. 그의 모국어 안에서 말들은 노래처럼 울렸지만 정작 곡조는 없었다. 그는 그것이 1500년 전에 죽은 한 섬사람의 노래라고 했다. 그는 그 사람의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걸 발설하지 않으련다.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그것은 유령의 노래였다. 오래 전에 죽어 곡조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죽음을 거부하고 살아있는 사람의 정신에 달라붙어 1500년의 부자연스러운 삶을 살아온 괴물과도 같은 존재였다. 

  내가 거부감을 표시하기도 전에, 그는 우쭐거리며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죽은 자들의 목소리가 수천 년 동안 살아 산 사람들을 지배하는 세계, 죽은 자들의 목소리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조금씩 겹쳐져 산 사람이 홀로 도달할 수 없는 마법을 만들어낸다. 자연에서 떨어져 살아있는 척 하는 그 죽은 지식들을 이용해 그들은 하늘을 나는 배를 만들고 그 배를 타고 다니며 전쟁을 하고 행성들을 약탈한다. 어떻게 그들은 이것이 끔찍하다는 걸 모르는가!

  그의 이야기가 끝나자, 나는 우리의 관점에서 그들의 세계가 어떻게 보이는지 이야기해주었다. 그는 흥미롭다는 얼굴이었지만 설득된 것 같지는 않았다. 이해할 수 있다. 죽은 자들은 그에게 너무나도 많은 걸 주었다. 그 모든 걸 단번에 포기하기는 어려우리라.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믿는다. 세상 모든 마법보다 중요한 것은 생명이다. 삶이다.

  

  6.

  마이와 솔락은 쉽게 포기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워프 네트워크 재건 전문가들은 회사가 까라고 하면 군말 없이 깐다. 애사심이나 복종심이 남들보다 투철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직업적 자존심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마이와 솔락이 그들의 사악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맨 처음에 한 일은 마놀라-4의 인구분포도를 만드는 것이었다. 마놀라 인들은 제3대륙의 서쪽 해안에 있는 다도해에 몰려 있었다. 비슷비슷한 마을들이 세워진 섬의 수는 200개가 조금 더 되었다. 가장 오래된 곳은 그들이 착륙한 섬으로 다도해 서쪽 끝에 있었다. 이들의 조상은 핵전쟁이 일어난 제1대륙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이 섬으로 날아와 모든 기계들을 파괴한 뒤 보다 자연에 가까운 생존 방식을 찾았던 것이다. 

  지난 천 년 동안 마놀라인들은 조금씩 동쪽으로 그들의 영역을 넓혀왔다. 개척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건 400년 전부터였다. 다도해를 정복하는 데 300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다. 아이를 많이 낳지 않고 선천적 심장병 때문에 수명이 마흔을 넘기지 못하며 대를 잇는 목표 의식도 없는 사람들이 이룩한 업적 치고는 상당했다. 

  섬과 섬 사이를 날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던 마이와 솔락은 그들의 임무가 보기만큼 어렵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촌장이 절대 진리라고 믿고 있는 종교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은 동쪽으로 갈수록 흐릿해져갔다. 서쪽 섬에서는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걸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지만 동쪽 섬들에 사는 사람들은 이름을 외치기 전에 헛기침을 하거나 ‘이런!’과 같은 감탄사를 외치면 그 금지가 대충 풀린다고 생각했다. 

  문자 기록을 남겨두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동쪽 사람들은 서쪽 사람들에 비해 과거의 역사에 대해서도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들의 기억에 따르면 마놀라의 종교는 500년 전까지만 해도 없었다. 사람들이 서서히 동쪽으로 옮겨가며 이전의 생활 방식에 금이 가기 시작하자, 이전에는 그냥 당연시했던 생활 방식을 법규로 정하고 종교화했던 것이다. 

  마이와 솔락은 일단 동쪽 섬들부터 공략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맨 처음에 한 일은 마놀라인의 수명을 늘리는 것이었다. 유전자 검사를 해보니 그들의 심장병은 알약 두 개로 충분히 치료 가능했다. 그들이 죽음을 앞둔 동쪽 섬 촌장의 병을 치료하자,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어차피 마놀라인들은 내세를 믿지 않았고 삶은 편했으니 20여년의 여분 수명은 선물과도 같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주선 앞에 줄을 서서 (줄 서는 습관 역시 이들이 마놀라인들에게 전파한 것이었다) 심장병 약을 타갔다.

  기대 수명이 20년 이상 연장되자 순식간에 인구 증가의 효과가 나타났다. 다도해는 오래 전에 마놀라인들에게 정복당한 뒤라, 그들에겐 신천지가 필요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 문제의 정답은 제3대륙이었다. 문제는 가장 가까운 해안은 오래 전부터 사막화가 진행되어 있었고 기후 조건이 좋은 삼각주 지역은 다도해에서 100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타고 다니는 나뭇잎 뗏목 정도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일단 거기까지 사람들을 옮긴다고 해도 일이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그들은 농사도 지을 줄 몰랐고 삼각주에 서식하는 다른 생물들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다. 

  그들은 일단 항해술과 배 건조법부터 가르치기로 결정했다. 다도해에는 큰 배를 만들만큼 단단한 나무는 없었지만 갈대와 비슷하게 생기고 빨리 자라는 해초는 있었다. 그 해초를 잘라 엮으면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타고 다녔던 갈대배와 비슷한 것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견본이 완성되자, 이를 모델로 한 수십 척의 배가 완성되었다. 

  사람들을 이주시키는 데 성공하자 마이와 솔락은 이들에게 농사를 가르쳤다. 삼각주에는 이미 야생종으로 퇴화된 밀과 쌀이 자라고 있었다. 그들은 이들의 씨앗을 유전자 조작해서 삼각주에 뿌렸다. 가르치고 배울 것들이 많았지만 마놀라인들을 설득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들은 밀과 쌀로 만들어진 새로운 음식들과 사랑에 빠졌고 무언가를 배우고 개척하는 것이 얼마나 굉장한 것인지 처음으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죽은 조상들의 기억을 남기지 못하면 이 모든 것들은 불가능하다고 마이와 솔락이 말하기도 전에, 이들의 신앙심은 순식간에 희미해졌다. 마이와 솔락이 지금 당장 떠나도, 이들이 불을 당긴 농업 문명의 폭주는 멈추지 않을 판이었다. 

  그들은 일부러 다른 섬에는 신경을 끄고 있었지만, 이들이 시작한 변화의 바람은 다도해 전체를 휩쓸었다. 순식간에 수많은 노래와 이야기들이 이들의 세계에 휩쓸려 들어왔다. 낚시하러 나가는 어린 소녀가 엘비스 프레슬리를 흉내내며 [하운드독]을 부르거나 두 남자아이들이 피터 파커와 엔더 위긴 중 누가 진짜 짱인지를 놓고 싸우는 걸 보는 것도 이제 이상하지 않았다. 나이 든 음유시인들은 창작의 순수성이 떨어진 것에 대해 불평하고 싶었지만, 그런 불평이 먹히기엔 그들의 흥미를 끄는 노래들이 너무 많았다. 군데군데에서 야심적인 예술적 통합이 일어났다. 그중 가장 근사한 것은 몇몇 모차르트 오페라 아리아들에서 선율을 따와 마놀라식으로 개작한 [오디세이] 이야기를 얹은 판소리 비슷한 노래로,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면 다섯 시간이 넘는 대작이었다. 마이와 솔락은 이 공연을 모두 녹음했고 사람들이 요청하면 틀어주었다. 이 노래를 만든 음유시인은 4주 뒤에 바다에서 익사했기 때문에, 그들이 이 자료를 보관한 것을 모두가 고마워했다. 

  도서관과 인쇄소가 생겨났다. 사람들은 이제 다른 세계의 이야기들을 읽은 것만으로 부족해 직접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어했다. 마이와 솔락은 분류를 위해 이야기 끝에 그들의 이름을 적으라고 요구했고 그들은 그 규칙에 복종했다. 이제 그들의 이름과 목소리는 죽은 뒤에도 도서관과 함께 영생하게 되었다. 영생에 대한 희망이 생기자 마놀라인들의 야심도 점점 더 부풀어갔다. 그들은 이야기 속에 영원히 남을 멋진 주인공이 되기 위해 해초배를 타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비교적 멀쩡한 상태로 돌아온 일부는, 진정한 선원들의 전통에 따라, 야만 종족과 바다 괴물들이 부글거리는 허풍 섞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의 반의반도 믿지 않았지만 어쨌건 그들의 이야기를 받아 적었다.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라 이야기의 재미였다. 어차피 진실은 조금만 지나면 밝혀지기 마련이었다. 마놀라인들의 세계 진출 속도는 그만큼이나 빨랐다. 

  마이와 솔락은 슬슬 다음 단계의 작업을 시작했다. 그들은 동쪽 섬들의 촌장들을 모아놓고 지금의 시스템으로는 점점 넓어지는 대륙의 신천지를 제대로 관리할 수 없으니 보다 조직적인 정부가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이들이 제시한 문제점은 촌장들 자신도 인식하고 있는 것이었고, 어차피 다도해에서는 원시적으로나마 직접 민주주의의 기반이 다져져 있었기 때문에 이를 보다 복잡한 현대 민주주의 시스템으로 옮기는 것은 별다른 거부감 없이 행해질 수 있는 작업이었다. 다도해가 하나의 제국으로 통합되고 최고 통치자나 그와 맞먹는 단일 정부 조직이 완성된다면 마이와 솔락의 일은 일차적으로 끝나는 것이었다. 남은 건 자발적으로 역사에 영원히 자신의 이름을 남길 의지가 있는 마놀라-4의 적법한 대표가 회사와 계약을 맺는 것이었다. 

  

  7.

  동쪽 섬에서 끔찍한 소문들이 들려온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들은 이제 죽은 자들을 살리고 동쪽 저편에 있다는 낙원으로 사람들을 인도한다고 한다. 그들이 인공적으로 강가에서 키운 새로운 식물의 씨앗으로 만든 음식들이 우리 섬에도 들어오고 있다. 어리석은 자들은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좋아한다. 하지만 그들은 일단 마법에 빠진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재앙이 닥치게 될지 모른다. 이미 어머니 세계 지구에서는 그와 같은 일들이 일어났다. 전쟁과 약탈, 질병과 재난, 불평등과 부정의, 그리고 그 신이라고 불리는 가상의 혐오스러운 존재. 

  마을 사람들도 동요하고 있다. 나는 그들을 설득하려 하지만 쉽지가 않다. 나는 과거 지구와 행성 저편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예로 들며 그들의 마음을 진정시키려 한다. 하지만 내 말은 통하지 않는다. 이해가 된다. 내가 들려줄 수 있는 것은 죽은 사람들의 이름이 제거된 막연한 이야기뿐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들은 자유롭게 그 이름을 부르고 심지어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움직이는 그림까지 동원해 우리의 주장에 맞선다. 내가 이성적으로 그들의 주장을 반박해도, 이름과 그림의 번뜩이는 재주에 속아 넘어간 마을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유령들을 등에 업고 있는 저들에 비하면 나의 무기는 너무나도 빈약하다. 

   

  8.

  마이와 솔락은 자기네 계획에 마놀라인들의 동지축제를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마놀라인들은 동지절 전후 엿새 동안 다도해의 한 섬에 모여 대축제를 벌였다. 그 때는 204명의 촌장들도 모두 참석했다. 동쪽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지난 반세기 동안 두 번 이상 촌장들이 모여 다도해 전체와 관련된 일을 상의한 적 있었다고 한다. 대부분 폭풍이나 지진과 같은 대규모의 재난이 있었을 때였고 의제는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정작 그 의제가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 결과에 만족하지 않은 사람들도 별로 없었던 모양이다. 지금 마이와 솔락이 내놓은 의제는 자연재해처럼 급히 처리해야 할 문제가 아니었으니 연례행사에 업혀가는 것이 안전했다.

  언제나 모든 일에 조금씩 비관적인 솔락과는 달리 마이는 결과에 대해 자신이 있었다. 이번 모임을 위해 그는 이미 150명이 넘는 촌장들을 만났다. 그들은 모두 회사의 제안에 긍정적이었고 앞으로 일어날 변화에 대해 큰 기대를 품고 있었다. 어차피 그들이 반대한다고 해서 다가올 변화가 갑자기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축제 전날 밤이었다. 솔락은 동지 불꽃놀이를 준비하느라 바빴고 마이 혼자 해초배 갑판에 누워 오래간만에 생긴 빈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하늘은 별로 꽉 차 있었다. 마이는 몇 세기 뒤 이곳에 세워질 도시들의 인공조명으로 저 별들이 희미해질 날을 상상했다. 실실 웃음이 나왔다. 

  탕탕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지팡이로 선체를 친 것이다. 그는 눈을 뜨고 일어나 밑을 내려다 봤다. 작고 살찐 남자의 희미한 모습이 보였다.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서쪽 섬의 촌장이었다. 

  마이는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촌장은 성의 없이 그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마이는 우쭐했다. 악수는 그들이 내려와 전파한 새로운 인사법이었는데, 그가 아는 가장 보수적인 마놀라인이 그 유행을 받아들인 것이다. 

  먼저 입을 연건 촌장이었다. 

  “마을 아이들이 나에게 거미괴물이 된 남자이야기를 합디다. 몸에 착 달라붙는 파랗고 빨간 옷을 입고 손목에서 거미줄을 뽑아 나무처럼 높이 솟은 탑들 사이를 날아다닌다고요.”

  “네, 그런 이야기들도 있지요.”

  마이가 대답했다. 

  “그게 모두 거짓말이라는 건 당신도 알지 않습니까? 왜 그런 이야기를 들려줍니까?”

  “아이들이 좋아하니까요. 그 아이들도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건 압니다. 원래 그런 게 이야기지요. 사실만 들려준다면 얼마나 재미가 없겠습니까.”

  “우린 지금까지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마놀라의 이야기들이 재미가 없었죠. 당신들의 노래는 정말 좋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들은 시시해요. 게다가 그 시시한 이야기들도 제대로 기억 못하지 않습니까?”

  촌장은 움찔했다. 마이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냥 할 말이 막힌 것치고는 충격이 조금 커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촌장은 다시 입을 열었다. 

  “거짓을 이야기하면 언젠가 거짓을 믿게 됩니다.”

  “자꾸 신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요새 그런 것 믿는 사람들 없습니다. 그건 사춘기나 여드름처럼 몇 년 겪은 뒤 잊어버리는 중간 단계에 불과하다고요.”

  “당신네 도서관엔 신 이야기를 하는 책이 없단 말인가요?”

  “있지요. 하지만 거미 인간 이야기를 하는 책도 있고 동짓날마다 전 우주를 날아다니며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는 빨간 옷을 입은 뚱뚱한 남자 이야기도 있지요.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그걸 다 믿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역사책이 있으니 잘못된 방향으로 가지 않을 수가 있어요. 우리가 이렇게 시작한다고 해서 당신들이 지구의 역사를 다시 겪는 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럴 필요가 없어요. 지식이 있고 우리가 위에서 도와줄 테니까요!”

  “죽은 사람들의 도움을 말입니까?”

  “네, 죽은 사람들의 도움 말입니다. 왜 그들을 그렇게 두려워합니까? 말과 생각은 죽은 뒤에도 당연히 살아남는 겁니다. 우리가 말을 하고 글을 남기는 한, 그것들은 우리의 손과 뇌를 타고 흐릅니다. 그걸 막는 것 자체가 비정상이에요! 네, 그것들이 모이고 막히고 얽혀서 가끔 끔찍한 일을 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도 여드름이나 죽음처럼 세상의 일부예요. 당신네들은 죽은 자들로부터 순결한 척 하고 있지만 사실 그런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당신들은 그물과 나뭇잎 뗏목 만드는 법을 어디서 배웠습니까? 실을 잣고 천을 만드는 방법은 어디서 배웠냐고요. 죽은 사람들의 지식을 금지하고 자연의 순리대로 살라는 말은 또 어디서 배웠지요? 모두 죽은 사람들로부터 나온 게 아닙니까?”

  “이단입니다!”

  “네, 그렇겠지요. 죽은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아하, 아까 당신이 왜 그렇게 움찔했는지 이제 알 것 같군요. 지금까지 다도해를 돌아다니면서 당신만큼 적극적으로 이 종교를 수호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어요. 왠지 압니까? 저 사람들은 조상들의 말씀에 당신처럼 얽혀있지 않거든요. 이 행성에서 죽은 사람들에게 가장 심각하게 조종당하는 사람은 바로 당신입니다. 아마 당신은 집 어딘가에 죽은 사람들의 이름이 잔뜩 쓰인 책도 숨겨 놓고 있겠지요! 당신만큼 뻔뻔한 위선자는 본 적이 없어요!”

  촌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의기양양해진 마이의 빨간 얼굴을 한참 노려보더니 말없이 왔던 길로 돌아왔다. 마이는 촌장의 뒷모습에 대고 그가 알아듣지 못할 욕설을 퍼부었다.

  그가 자기가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 알아차린 건 그날 밤이 지나서였다. 그는 섬과 섬 사이를 뛰어다니며 어떻게든 그가 저지른 일을 막으려 했지만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는 없었다. 서쪽 섬의 촌장은 만장일치의 규칙을 내세우며 반대표를 던졌고 촌장 모임은 그의 권리를 인정했다. 투표 결과는 찬성 203표, 반대 1표였다. 서쪽 섬 촌장이 승리한 것이다.  

  결과가 발표되자 마이는 이를 갈며 셔틀선 벽에 발길질을 해댔다. 그는 십 분 동안 스무 개가 넘는 마놀라어 욕을 발명했고 그 모든 어휘들을 서쪽 섬 촌장을 공격하는 문장에 써먹었다. 

  “너무 흥분하지 마.”

  솔락이 말했다. 

  “촌장이 반대했다고 세상이 끝난 게 아니라고. 내년 동지를 노리면 돼. 계약을 원하는 건 우리만은 아니니까 분명 정치적 압력이 가해질 걸. 조금만 조작하면 촌장을 합법적으로 밀어내고 우리에게 호의적인 다른 사람을 앉힐 수 있어. 그게 안 된다면 또 어때? 저 친구는 이 행성 나이로 벌써 서른여덟이야. 우리가 만든 약도 안 먹을 테니 곧 심장병으로 죽는다고. 뭐가 걱정이야?”

  하지만 솔락의 설득은 먹히지 않았다. 마이는 더 이상 임무를 회사의 일로 보지 않았다. 이제부터 그것은 그와 촌장과의 전쟁이었다. 그는 씩씩거리며 섬을 돌아다니면서 복수의 계획을 짰다. 

  이틀 뒤 마이는 키들거리면서 학교 건물 공사를 관리하는 솔락을 찾아왔다, 마이는 주머니에서 동그란 야전용 기억장치를 꺼내 솔락에게 내밀었다. 

  “우리가 이곳 언어를 공부하기 위해 마을에 던져놓은 스파이 로봇들을 기억하지? 그것들이 보낸 정보들을 뒤져서 아주 재미있는 것을 찾아냈지, 한 번 볼래?”

   마이는 기억장치를 켰다. 저녁 햇빛에 물든 갈색의 희미한 입체 영상이 마이의 손바닥 위에 떠올랐다. 솔락은 얼굴을 찡그리며 뒤로 물러났다.  

   “제발 하지 마.” 

  솔락이 말했다. 

   “왜 안 돼? 난 할 거야.”


  9.

  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 얼마 전에는 다른 섬에서 학교를 다니다 잠시 놀러왔다는 여자아이들이 내 뒤를 미행하다 내가 책과 일기를 숨겨놓은 동굴을 찾아냈다. 그들은 내 책을 훔쳐 마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내가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라고 말했다. 나는 우리 마을 촌장들이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해서 과거의 지식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을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지만 아이들은 믿지 않았다. 그들은 빼앗은 책들을 도서관으로 보냈다. 

  다행히도 그들은 내 일기장만은 남겨두었다. 하지만 이제 일기를 쓰는 것은 더 이상 희생도 특권도 아니다. 모두들 공책을 만들어 자기 이야기를 쓰고 있다. 죽은 자들의 이름을 남기는 것도 더 이상 금기가 아니다. 다도해의 모든 금기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 세계의 생명은 죽은 말들과 정보들 사이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여전히 나는 촌장이다. 분홍과 갈색은 어떻게든 나를 밀어내려 하고 있지만 지난 10년 동안 다진 내 입지가 그렇게 쉽게 흔들리지는 않는다. 많이 부족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나에겐 여전히 나만의 무기가 있고 나는 죽는 날까지 그 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저들에게 항복하고 복종한다면 어떻게 내가 살아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내가 생명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

  아내가 나에게 무언가 숨기고 있었다. 분홍과 싸우기 위한 계획을 짜느라 정신이 없었던 나는 어제 밤까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계획 때문에 아직 아이들에게 발각되지 않은 다른 동굴로 갔다가 집에 돌아왔는데, 아내가 무언가를 허겁지겁 등 뒤로 숨기는 게 아닌가. 나는 안절부절 못하는 아내의 손에서 그것을 빼앗았다, 

  그것은 바로 내가 직접 나무판에 그린 딸아이의 초상화였다. 나는 딸아이의 장례식 때 그것을 내 손으로 직접 불살랐다. 이것이 어떻게 지금 아내에게 돌아와 있는가. 말할 필요도 없이 분홍의 장난이었다. 그라고 허공중에 사라진 재를 다시 모아 이전의 초상화로 만들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겐 분명 다른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초상화를 다시 불사르려 했지만 그건 소용없는 일이었다. 나무판은 불타지 않았고 부서지지도 않았다. 나는 나무판을 집어던지고 아내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딸의 유령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다. ‘유령들’이다. 사방의 벽은 분홍의 기계로 복사한 딸의 모습을 담은 그림들이 한 치의 빈틈없이 붙어있었다. 방 안의 공기도 유령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반투명한 딸의 유령은 나를 보고 웃으며 달려왔고 내 이름을 불렀다. 그럼 허공중에서 갑자기 내 분신이 나타나 딸의 손을 잡고 그 아이의 머리칼에 입맞춤했다. 나는 다시 사라지고 딸은 보이지 않는 바다를 향해 달려갔다. 잠시 뒤 그 아이는 다시 방 한가운데로 돌아와 아까 했던 일들을 그대로 반복했다. 

  내 평생 이처럼 뻔뻔스럽게 자연의 법칙을 외면한 광경은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어떻게든 분홍이 만든 유령들을 부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벽에 붙은 종이는 투명한 막에 덮여 뜯어내기가 불가능했다. 허공중의 유령은 어디에 뿌리를 박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지팡이로 벽을 두들기는 것뿐이었다. 말없이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던 아내는 결국 나를 집에서 쫓아냈다. 나는 반항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럴 권리가 있었다. 


  10.

  마이는 좋아 죽을 지경이었다. 그는 뚱한 표정으로 창 너머를 바라보며 그를 외면하는 파트너에게 자신의 모험담을 들려주었다. 

  “...그래서 한참 기존 자료를 돌려보다 결국 놈의 아킬레스건이 뭔지 알아낸단 말이야. 그건 바로 자기 딸이었던 거지. 녀석의 딸이 우리가 오기 한 일주일 전에 병으로 죽었다는 건 너도 알고 있었잖아. 그걸 이용하기로 했어. 녀석은 학자일 뿐만 아니라 예술가야. 딸이 살아있을 때 딸을 그린 상당히 멋진 그림을 그렸더군. 물론 경건한 신자답게 장례식날 그것도 태워버렸지. 난 우연히 녀석의 아내가 거기에 대해 투덜거리는 걸 들었고 그걸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어. 그의 아내는 딸이 아직까지 살아있었다면 남편의 충성스러운 협조자로 남아 있을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그 아내가 죽은 딸에 대한 추억을 말살하도록 강요받는 엄마라면 사정이 다르지. 아무리 마놀라에서도 그건 자연스럽지 않아. 기억하고 슬퍼하고 상처를 죽을 때까지 안고 가는 게 자연스럽고 정상인 거야. 촌장 녀석은 자연이니, 진실이니를 떠들지만 이 간단한 사실도 외면하고 있지. 그러니까 녀석이 진 거야.

  일단 방법을 알자, 할 일은 뻔해지더군. 녀석과 딸의 모습을 담은 동영상을 찾아 딸아이의 얼굴을 익힌 뒤, 모든 관련자료들을 뽑아냈어. 정지 사진과 영화 자료들이 산처럼 쌓이더군. 심지어 녀석이 그린 초상화의 자료까지 찾아냈어. 녀석이 그림을 불태울 때 로봇이 마침 그 근방을 날아가고 있었거든.

  녀석은 물론 그걸 보고 난리를 쳤어. 이단이기도 하지만 그런 짓을 저지른 내가 싫었겠지. 하지만 그것도 녀석의 실수였어. 아내를 바로 앞에 두고 딸과 아내를 모욕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야. 녀석은 너무 화가 나서 정작 자기 아내가 화가 나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깜빡 했지. 이곳에서 촌장의 배우자들은 촌장과 같은 권리를 배정받아. 부부는 일심동체이니 말이야. 날이 밝자 이 여자는 당연한 일을 했어. 남편의 이름을 걸고 촌장 사퇴를 선언한 거지. 난 막 섬에서 새 촌장을 뽑는 걸 보고 오는 돌아오는 길이야. 잘 뽑았더군. 젊고 머리도 좋아. 공부할 수 있게 책을 몇 권 보내주어야겠어. 과학에 관심이 있대.“

  “꼭 그렇게 해야 했어?”

  솔락이 물었다. 

  “물론 그렇게 해야 했어! 무엇보다 촌장을 위한 일이었어. 그 정도 재능이 있고 똑똑한 친구가 죽을 때까지 그런 착각을 품에 안고 살면 쓰나. 지금이라도 마음을 고쳐먹고 죽은 딸 초상화라도 몇 개 더 그리는 게 이 세계에 이바지하는 일이지.”

  솔락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파트너의 고집을 꺾는 것이 촌장의 신앙을 박살내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 난투극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촌장이 물러나자 마이와 솔락의 계획은 다시 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한 달도 되지 않아 다시 촌장회의가 열렸고 의제는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일주일에 걸친 토의 끝에 다도해와 대륙 식민지는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었고 정부와 지도자가 선출되었다. 이제 남은 건 적당한 시기를 잡아 지도자를 만나 회사와의 계약을 성사시키는 것뿐이었다. 마이가 벌려놓은 것들을 뒤처리하는 것이 솔락의 일이었기 때문에 그 동안 그는 정신이 나가버릴 정도로 바빴다. 마이는 그 동안 셔틀과 궤도 위의 우주선을 번갈아 오가며 기계들을 손보고 있었다. 그들도 이제 슬슬 고향으로 돌아갈 때가 된 것이다. 

  드디어 마놀라-4의 대표단이 회사와의 계약에 서명하는 날이 왔다. 솔락은 혁명이 시작된 동쪽 끝의 섬에서 대축제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다도해와 대륙의 식민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섬으로 몰려왔다. 식민지 사람들은 이미 섬사람들과 많이 달랐다. 더 거칠고 도전적이며 야심적이었다. 곧 마놀라인의 문화 중심은 그들 쪽으로 넘어갈 것이다. 

  축제는 대성공이었다. 솔락은 지금까지 은하계 이곳저곳을 떠돌며 별별 것들을 다 구경하고 다녔지만 이 날 동쪽 섬에서 벌어진 축제처럼 신나는 구경거리는 본 적이 없었다. 원래부터 놀기 좋아하고 빈 시간 동안 늘 새 놀이감을 찾느라 안달이 되어있던 사람들이 제약이 풀리고 새로운 재료들을 접하자 창의력을 폭탄처럼 터트린 것이다. 허공을 날아다니는 스파이더맨 모양의 풍선 인형, 쌀가루 반죽을 얇게 구워 발효한 물고기 진액을 발라낸 떡, 축구의 동작을 도입한 무용, 전통악기에 맞추어 편곡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까지, 즐길 수 있는 것들은 무궁무진했다. 이런 에너지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솔락은 알 수 없었다. 

  난장판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솔락은 셔틀선 앞에 서서 새로 뽑힌 정부 관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마이를 보았다. 마이는 관리들에게 인사를 하고 솔락에게 달려왔다. 

  “영감 봤어?”

  “촌장 말이야? 왜?”

  “얼마 전까지 여기 있었어. 요새 그 친구 계속 숨겨놓은 무기가 있다고 떠들고 다니던데, 그게 뭔지 알아? 지금 와선 암만 봐도 영감이 할 수 있는 건 없는데, 뭐가 그렇게 자신만만한지 모르겠어. 여기 와서도 괜히 실없는 소리만 늘어놓고 가던데, 도대체 의도가 뭔지.”

  “그냥 졌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자, 시작되었어!”

  다섯 대의 나팔이 요란하게 신호 음악을 연주하자, 마이는 계약 내용이 인쇄된 양피지 서류를 들고 단상위로 올라갔다. 그는 이제 꽤 유창해진 마놀라 어로 우정과 발전과 소통에 대한, 듣기 편하지만 교묘하게 공허한 연설을 했다. 이런 정치적 연설에 익숙하지 않은 마놀라인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마이는 그에 답변하듯 양피지 서류를 치켜올렸다. 

  그 때 폭음이 들렸다. 

  붉은 불꽃과 함께 불타는 작은 조각들이 바다를 향해 날아갔다. 처음에 솔락은 불꽃놀이 폭죽이 잘못 날아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폭죽이 장치된 건 해변이 아니라 바다 위에 떠 있는 나뭇잎 뗏목이었다. 그렇다면 이 섬에서 이런 식으로 폭발할 수 있는 것은...

  솔락은 고함을 지르며 해변으로 달려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해변에 셔틀선이 서 있던 곳은 지금 불바다가 되어 있었다. 뒤따라온 마이가 비명을 질러댔다. 드디어 그들은 촌장이 말한 ‘무기’가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것은 은유 따위가 아니었다. 기계 시대가 끝난 뒤에도 성능을 잃지 않고 천 여 년 동안 보존 되었던 파괴 무기였다. 왜 그걸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그가 다른 사람들 몰래 책을 숨길 수 있었다면 폭탄 역시 숨길 수 있는 게 아닌가?

  한동안 무릎을 꿇고 불타는 잔해를 바라보던 마이는 벌떡 일어났다. 그는 사람들 속으로 뛰어들어 그 사이에서 웃음도 울음도 아닌 모호한 표정을 짓고 있던 옛 촌장의 멱살을 잡고 그의 얼굴에 주먹질을 했다. 솔락은 불타는 우주선이 내는 타닥거리는 소음 사이에 희미하게 울리는 마이의 고함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바보 녀석, 네가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솔락은 그들을 말릴 생각이 없었다. 그는 일어나 천천히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물이 발목까지 올라오자 멈추어선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잔해는 거대한 횃불처럼 타오르며 섬과 바다를 아름다운 주황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는 배를 움켜쥐고 미친 듯이 웃어대기 시작했다. 

  

  11.

  그들이 타고 온 배는 파괴되었다. 죽음의 세계와 우리를 연결시켜주는 유일한 통로가 끊어진 것이다. 나는 왜 지금까지 선임자들이 나에게 죽음의 시대의 유물인 폭탄을 보존하게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에서야 나는 그 이유를 안다. 어떤 경우 죽음의 침략은 죽음의 무기로만 끊을 수 있다. 

  사람들은 나를 증오한다. 그들은 나를 고집쟁이 반동이라고 부른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그들은 내가 구하려고 하는 세계는 이미 죽었고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다가올 변화는 막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내가 배를 파괴했어도 그들은 곧 다른 배가 그들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 올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믿고 싶으면 믿으라. 나는 신경 쓰지 않겠다. 그들이 부서진 배와 우스꽝스러운 색깔을 한 외계인들의 헛소리를 믿는다면, 나는 자연을 믿겠다. 나는 모든 것들을 이전처럼 복원하고 기계들의 빈자리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자연의 힘을 믿는다. 어떤 죽음의 기계도 생명의 힘은 막을 수 없다. 죽음은 순간이고 남는 건 생명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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