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우선 여러분들을 이곳까지 모시는데 본의 아니게 범한 무뢰에 대해 사과드리겠습니다.”
원형의 견고한 철제 원탁에 둘러앉은 10여 명의 사람들의 얼굴에는 그래도 전혀 화가 가시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만 저희가 여기까지 여러분을 모시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와 부득이 그런 무뢰한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이해하신다면 아마 지금의 노여움을 푸시게 될 것으로 믿습니다.”
앞에 서있는 사람의 진지함 때문인지 아니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철벽의 견고함 때문인지 사람들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제 소개를 먼저 하는 것이 순서겠지요. 저는 앞으로 설명 드릴 실험을 총지휘하고 그 결과에 대한 보안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선은 그 정도 밖에 말씀드릴 수 없는 점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좌중의 눈빛에서는 여전히 불신의 눈초리가 완전히 가시지는 않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세계의 여러 곳에서 수없이 많은 과학실험들이 행해집니다. 그들 중 몇몇은 매우 중요한 것들이고 나머지 것들은 무의미하거나 실패로 끝나곤 합니다. 그리고 아주 가끔은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칠지 모르는 실험들도 행해지게 됩니다.”
갑자기 한 사람이 의자를 앞으로 끄는 바람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가 이내 다시 이야기에 주의가 집중되었다.
“실은 지난 3-4개월에 걸쳐 아마도 인류 역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될 실험 하나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실험은 처음 3명의 뇌 과학 연구진에 의해 시작되었다가 한 명의 외과 의사가 합류하였으며 비교적 외부에 대한 통제가 잘 이루어진 상태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그 실험은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 초의식, 그러니까 ‘영’이나 ‘영혼’, ‘귀신’, ‘유령’ 등, 무엇으로 불리던 간에 이제까지 과학으로 설명되지 못했던 초자연적 의식 현상에 대한 연구를 포괄하는 것이었습니다.”
과학실험에 대한 얘기가 갑자기 ‘영혼’, ‘귀신’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지자 원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곳에 모인 분들 중에는 과학자들도 계시고 생명공학이나 의학에 조예가 깊으신 분들도 몇 분계십니다. 그러나 주로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전공해 오신 분들도 계십니다. 따라서 복잡한 설명이나 어려운 용어를 사용하는 따위의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여기 이렇게 여러분을 모신 이런 자리를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제가 지금 여러분께 드리고 있는 말씀의 진지성은 충분히 입증되리라 봅니다.”
“여러분들께도 낯선 이름이겠지만 ‘국제문명보호연대’라는 비밀조직이 있습니다. 이 조직은 새로운 과학 지식이 인류에 미칠지 모르는 치명적 효과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한 무명의 독지가에 의해 처음 설립되었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인류는 과학 실험이라는 방식을 통해 지식을 축적해 왔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러한 지식이 인류에게 해악을 주기도 합니다. 적어도 과학 실험 자체는 어떠한 판단의 기준도, 인류를 보호하고자 하는 의지도 갖고 있지 못합니다.”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차라리 인류는 상자를 열지 않는 것이 나을 때도 있습니다. 적어도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될 때까지만 이라도요.”
“국제문명보호연대는 바로 그러한 활동을 하는 단체입니다. 일의 성격상 이 단체는 철저한 비밀 속에서 활동을 합니다. 그러나 인류 문명 보호를 위한 이와 같은 취지에 동참하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적지 않은 재력을 확보하게 되었으며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합법적인 활동을 보장 받고 있습니다. 물론 위장된 모습으로, 그에 합당한 정치 후원금을 지불하면서 말이죠.”
“우리는 과학 실험과 관련된 광범위한 정보망을 확보하고 있으며 세계 주요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실험의 내용과 진행 경과를 주기적으로 파악합니다. 그러다가 인류 문명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가진 실험이 이루어지면 그 실험을 행하는 기관, 학자들에게 접근하여 실험 내용을 보안하고 경과를 관리합니다.”
“그러다 만일 실험이 최종적으로 성공하고 정말 우려했던 위험한 결과가 도출되면 특별위원회가 소집됩니다. 그리고 특별위원회는 그 실험 결과를 인류 앞에 공표할지 여부를 결정합니다. 즉 과학 실험 자체는 갖고 있지 못한 인간적 판단의 기능을 우리가 대신 행사하는 것입니다.”
이런 황당한 얘기를 과연 믿어야 하나 하는 회의적인 표정들도 이곳저곳에서 발견되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야기의 전개과정을 좀 더 지켜보자는 쪽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저희가 무조건 과학 실험을 통제하고 가로막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저희는 철저히 중립적입니다. 다만 인류 스스로 한 번 더 판단하는 기회를 갖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의사결정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철저히 외부인사로 구성하고 있습니다. 평소 이러한 문제에 식견을 가진 분들로서 다양한 분야의 인사들의 명단을 유지하고 있다가 특별위원회를 구성해야할 필요가 생기면 무작위 추첨을 합니다. 바로 여러분은 이번 실험을 위한 특별 위원으로 위촉된 분들이십니다.”
갑자기 장내의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 해졌다. 앞에서 이야기 하는 사람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자신들은 지금 상당히 심각한 사태에 연루되게 된 것이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갑자기 납치라도 당하듯 마취된 채 이곳에 끌려왔고 옷가지를 비롯해 모든 것을 압수당한 후 지급되는 옷을 입어야 했었다. 만일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자신들은 지금 여태껏 들어보지도 못한 비밀 단체가 행하는 기묘한 행사에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끌려오게 된 것이다.
“이제 이번 실험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실험은 한 마디로 인간의 사후 세계에 대한 실험이라 하겠습니다. 즉 인간은 죽은 후 어떠한 상태에 처하게 되는가에 관한 실험입니다.”
이미 충분히 놀라고 있었지만 실로 충격적인 주제가 아닐 수 없었다.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여러분은 아마도 ‘Life after Life’라는 저서에 대해 한 번 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 책은 심장이 멈추는 죽음, 즉 심장사를 경험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인터뷰 150여 편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심장이 멈추었다가 심폐소생술이나 전기 충격 등으로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증언이 놀랍도록 일치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죽음 직후 자신들의 일생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끝에 밝은 빛이 보이는 긴 터널을 통과합니다. 그 빛에 다다르면 대부분 자신의 몸에서 영혼이 빠져 나가는 것을 느끼게 되고 자신의 죽은 몸을 바라보게 된다는 식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비단 이 책의 인터뷰에서 뿐 아니라 다양한 문명권의 사후 세계에 대한 경험담에서 유사하게 발견되기도 합니다. 물론 문화적 특성에 따라 여러 이야기가 부연되거나 첨부된 형태로 말이죠.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는 죽음 이후에도 어떠한 새로운 형태의 삶, 즉 사후세계가 존재한다는 믿음의 강력한 근거가 되어 왔습니다.”
“4개월 전 인간의 뇌를 연구하던 3명의 학자가 하나의 실험에 착수하게 됩니다. 그들은 처음에 초능력, 예지력과 같은 초감각이 뇌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발생하게 되는가를 탐구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현상에는 물리적인 기반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철저히 신봉하는 과학자들로서는 이러한 초자연적 인식 역시 어떠한 방식으로든 뇌에서 발생되고 통제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이야기는 길게 이어지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감히 중간에 끼어들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의 연구는 과연 뇌의 어느 부위에서 그러한 의식이 나타나느냐를 찾는 것으로 귀결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모두 잘 아시겠지만 뇌의 조직은 너무도 정교하고 미세하기 때문에 어떠한 정신 기능이 이루어지는 정확한 위치를 찾는 다는 것은 망망한 대양에서 작은 섬을 찾는 것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정말 우연히 3명의 과학자는 한 외과의사의 수술 이야기를 접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뇌 연구는 환자의 동의하에 뇌수술 중 이루어집니다. 즉 뇌수술을 위해 두개골을 개봉한 상태에서 환자의 동의에 따라 제한적인 몇 가지 실험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술을 집도하던 외과의사가 뇌에 발생하는 반응을 관찰하는 실험 기구를 설치하던 시점에 그만 환자가 심장 발작을 일으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 수술 자체가 원래 대단히 무모한 시도였다는 군요. 환자가 심장병 이력이 있어 수술을 하지 못하다가 경과가 너무 악화되어 마지막 희망으로 뇌수술을 선택한 것이었답니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나중에 그 외과의사는 환자가 사망하는 순간 뇌의 활동이 자신의 실험 기구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죽음을 접한 순간의 뇌의 활동 과정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밝혀지게 된 셈이죠. 이제까지 그 누가 자신이 죽을 시점에 맞추어 뇌 반응 실험을 하겠노라고 자원했겠습니까?”
간간히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릴 뿐 긴장 속의 침묵이 다음 이야기를 재촉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죽음 직전에 기록된 뇌 반응의 경로였습니다. 서서히 약해지기 시작한 뇌파는 뚜렷이 하나의 경로를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선 대뇌신피질의 기억을 담당하는 구역에서 한참을 머물다가 이내 시각 중추의 가장 기본적인 두 부분, 즉 어두움과 빛을 나타내는 지역을 지납니다. 그러니까 이 과정에서 사람은 자신의 일생을 보게 되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 빛을 보는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마지막 순간입니다. 이렇게 뇌의 여러 부분을 통과한 마지막 뇌파의 흐름은 대뇌신피질의 최정점, 즉 정수리 부분에 모이게 됩니다. 머리 꼭대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뇌의 꼭대기 부분은 비어 있습니다. 뇌가 좌우 두 반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좌우 두 반구의 정점에 모인 뇌파는 상호 작용하며 갑자기 크게 증폭됩니다. 그러면서 뇌 전반에 걸쳐 모든 기능이 일시적으로 동시에 활성화되는 현상을 보여주더랍니다. 그리니까 이 과정에서 일상생활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종합감각, 일종의 초감각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몸이 떠오른다든가 동시에 여러 장면을 보는 등 현실의 논리와 형식을 초월한 감각의 복합적 작용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뇌 연구진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초감각의 영역은 뇌 위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뇌가 비어 있는 정수리 부근에서 작용하는 폭발적인 뇌파의 증폭과 그로 인해 뇌 전반의 기능이 동시에 작용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이었습니다. 연구진은 도저히 발견할 수 없었던 비밀의 장소를 이 우연한 사건 때문에 발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또 뇌파가 이렇게 강해질 경우 그것은 다른 사람의 뇌파에 전기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을 정도가 됩니다. 즉 의식의 교류, 교감 같은 현상도 가능해 지는 것이죠. 아직까지 이러한 현상이 어떻게 살아있는 동안에도 일어나게 되는지는 밝혀내지 못했지만 만일 연구가 더욱 진척된다면 이제까지 과학이 설명하지 못했던 초자연적 의식이나 체험 등도 그 물리적 기반이 밝혀지게 될 것입니다.”
“뇌 연구진과 외과의사가 함께 연구를 진행하게 되면서 연구는 마지막 주제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즉 ‘뇌파의 소멸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입니다. 인간의 사후 세계에 대한 질문이죠.”
원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자신들 앞에 주어진 문제의 실체가 모습을 드러내자 다시금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오늘 그들은 실로 인류 역사에 기록될 만한 엄중한 순간에 인류를 대표해 선택된 자들로서 서게 된 것이 분명했다.
“정수리 부근에 모인 뇌파는 상당기간 동안 그 부근에 머물면서 서서히 약화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연구자들은 비밀리에 머리 위에서 정수리의 뇌파를 측정할 수 있는 기계를 개발하여, 병원에서 사망한 환자에 대해 심폐소생술을 적용할 때 그 기계를 동시에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더 이상 환자의 동의나 뇌수술 없이도 실험 데이터를 모을 수 있게 된 것이죠. 인근의 종합병원에서 약 두 달 간 실험을 실시한 결과 10여 건의 데이터를 모을 수 있었고 지난 주 그들은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는 결론을 얻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최종적 결과는..”
최종적 결과를 기대 하는 십 여 개의 시선이 한 곳에 집중되었다. 짧지만 긴 정적의 시간이 흘렀다.
“최종 연구 결과 그 뇌파는 그곳에서 완전히 소멸된다는 것을 입증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주변 물질들과의 전위차를 서서히 줄이면서 완전히 ‘무’의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이것은 건전지의 충전된 전기가 자연에 방치된 상태에서 서서히 소멸되는 과정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 뇌파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저 주변의 전위를 다소 올렸다가 결국 영향력을 잃었습니다. 그 흔적은 어디에도 남지 않았습니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아직 이 결론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니까 이 실험 결과의 의미는, 그 의미는.. 결국 인간에게 사후 세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인간은 상상을 통해, 아니면 일시적인 죽음을 경험한 후 깨어난 사람들의 증언에 의해 우리의 감각을 초월하는, 아니면 이 자연계를 초월하는 사후의 세계가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이 실험은 인간이 그러한 특별한 순간에 체험하는 현상들조차 뇌의 특수한 부위에서 일어나는 감각의 일종일 뿐이고 결국 이 모든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뇌파는 서서히 사라지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자연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으로 정전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천과 금속 막대를 부비면 막대는 전기를 띄게 됩니다. 일정한 전기를 띠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그것들을 잠시 동안 방치해 두면 어떻게 될까요? 전기는 서서히 소멸됩니다. 과학적인 시각에서 볼 때 인간의 두뇌에 뇌파가 형성되어 감각과 의식이 작동하다가 사망으로 소멸하는 과정은 바로 이 과정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마침내 좌중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제각기 어떤 입장과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에 상관없이 이와 같은 결론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드디어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뇌에서 전기적 현상이 사라진다고 해서 인간 존재가 소멸된다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소. 우리가 물리적으로 측정할 수 없는 현상이 존재할지도 모르는데.”
“믿음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부여하는 인간의 논리 형식입니다. 이미 과학은 많은 정신 현상의 물리적 기원을 밝혔습니다. 아까 설명 드린 바와 같이 이 실험은 이제까지 과학이 설명하지 못해온, 그래서 무언가 ‘초월적’이라고 여겨지던 정신 현상들을 해명 했습니다. 저 역시 국제문명보호연대의 일원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물리적 뇌파의 소멸이 곧 의식의 소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단계에 왔다고 생각합니다. 갈릴레이가 처음으로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 다고 했을 때 당시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충격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그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장중한 분위기 속에서 장내의 사람들은 더 이상은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의학과 생물학을 전공한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장문의 보고서를 여기 저기 검토하고 있었다. 곧 그들도 그 내용을 수긍한 듯 보고서를 덮고 정면을 주시했다.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들께서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신 것으로 보고 결론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여러분들은 이제까지 제가 설명 드린 과학실험의 결과를 인류 앞에 공표할 것인가의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특별위원회의 위원들이십니다. 문제의 특성 상 긴 시간을 허비할 수 없습니다.”
“납치되신 여러분들도 그렇고 앞으로 언론사들이 이 사안에 대해 알게 되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정확히 12시간이 주어집니다. 힘들고 피곤하시겠지만 앞으로 12시간 동안의 토론을 통해 최종 결론을 도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4시간 간격으로 식사를 겸한 다과가 주어질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께서 개별적으로 의사진행의 규칙을 정해 토론을 시작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확히 12시간 후 좌석 앞에 마련되어 있는 투표 버튼으로 최종 결과를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처음 몇 분 동안은 침묵이 흘렀다. 모두들 침통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무신론자나 사후세계를 부정하던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이 사실은 충격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다가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람이 결국 입을 열었다.
“일단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잘 이해하셨으리라 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루어진 설명들도 모두 거짓은 아닌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인류를 대표한 입장에서 실로 진지한 문제를 감당해야할 위치에 놓인 것 같습니다. 자 이제 각자 자신에 대한 간단한 소개부터 하고 서로의 입장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게 어떨까요?”
모두들 수긍하는 눈치였다. 자연스럽게 처음 말을 꺼낸 사람의 오른쪽으로 돌며 자신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시작했다. 생물학과 의학, 수학, 기타 순수과학과 공학 분야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대략 반수에 달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경제학, 정치학, 법학 등의 사회과학과, 심리학, 철학 등의 인문학 전공자들이었으며 마지막으로 종교학자와 소설가도 포함되어 있었다. 소개가 끝나고 맨 먼저 생물학 전공자가 입을 열었다.
“인류의 역사를 돌아볼 때 새로운 발견은 늘 있어왔습니다. 때로는 그 발견이 인류에게 충격이 되기도 했지만 인류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 적은 없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과학 기술에 기초한 문명을 이룩하고 있다는 것이 그 근거입니다. 결국 인간은 진실을 받아드리고 그것을 소화할 수 있는 새로운 이념을 창조해 왔습니다. 저는 우리가 다시 한 번 그러한 인간의 능력을 발휘해야 할 때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종교학자가 입을 열었다.
“인간에게 있어서 삶과 죽음의 문제를 어느 때 잠깐 고민하고 말 문제라거나, 일상생활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을 문제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문제야 말로 인생 전체를 통해 순간순간의 행동을 지배하는 대전제와도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한 행동, 도덕적 행동, 그 모든 것은 왜 가능한 것입니까? 삶에 대한 의미 부여는 삶 그 자체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삶 이후의 것이 있음으로 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됩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저 역시 신학자가 아닌 종교학자이기 때문에 신에 대한 믿음을 여러분께 강요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말씀드려야 할 것은 인간 문명에 있어서 삶과 죽음의 문제는 너무나 중대한 문제라는 점입니다. 어쩌면 이 실험의 결과는 동물과는 다른 인간, 삶과 죽음을 인식할 줄 아는 인간에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죽음, ‘진짜 죽음’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옆에 앉아 있던 심리학자가 말을 이었다.
“이 문제는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심리 구조라는 입장에서 이 문제의 여파를 설명 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삶과 죽음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완벽하게 판명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성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신의 실존을 확신할 방법이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쉽게 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것과 완전히 동일하게 신이나 사후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완벽하게 증명할 방법은 전혀 없었습니다. 따라서 신이나 초월적인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에게도 자신들의 삶을 지탱할 무언가가 필요하게 됩니다. 그건 사람마다 다양하게 다를 수 있죠. 그러나 그 중 아주 중요한 것은 바로 신을 믿는 사람들에 대한 상대적인 우월감, 그러니까 나는 적어도 저런 미신에 의존하지는 않고 있다는 자신감이었습니다. 완전하지는 않아도 적어도 다른 사람들 보다는 우월하다는 심리상태가 인간에게는 상당한 안정감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만일 죽음 이후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초월적인 존재란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그 결과 신이나 초월적 존재를 믿는 사람들 뿐 아니라 그 동안 그러한 존재를 믿지 않았던 사람들의 심리적 균형도 파괴되고 맙니다. 그들은 더 이상 상대적인 우월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역설적으로 신을 믿는 사람들과 동일한 평면에 놓이게 되고 이러한 상실감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게 될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의견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정치학자가 이어 받았다.
“어쨌든 우리는 오늘날 민주주의라는 정치공동체에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중요한 의사결정을 공동체 전체의 합의에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전제가 모든 정보는 공개되고 공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알 권리’는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가 무언중에 합의하고 있는 근본적인 정치적 결단입니다. 만일 이 실험 결과가 진실이라면 모든 사람은 그 진실을 알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함부로 나서서 그 사람들의 권리를 빼앗을 권한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그 견해에 동조합니다.”
이번에는 철학계를 대표한 학자가 말을 이었다.
“인간은 인간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일 이 사실이 공표되어 부정적인 결과가 초래되고 심지어 우리 문명이 파괴된다 해도 그것 역시 우리 운명의 일부일 뿐입니다. 우리 문명은 과학적 지식을 추구해 왔고 결국 오늘 이 실험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진실을 추구합니다. 그것이 본성입니다. 오늘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철학의 역사가 그 증거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 결과에 따라야 할 뿐입니다.”
“저는 좀 다른 관점에서 생각합니다.”
이번에는 조금 전에 자신이 의사임을 밝힌 사람이 말문을 열었다.
“과학 기술이나 지식 역시 인간을 위한 것 아닙니까?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알 권리나 진리도 중요하지만 정말 인간의 복지에 도움이 된다면 막을 수 있는 건 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탄생하고 많이 만들기도 했지만 우리는 결국 그것의 사용을 막고 통제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지 않습니까?”
논쟁은 시간이 갈수록 격렬해 졌지만 결코 어느 한 방향으로 치우쳐지지 않은 채 지속되었다. 몇 차례 간식이 제공되고 치워지기를 반복하고 어느 덧 12시간의 시간이 흘렀다. 논쟁을 마무리 짓고 투표에 임해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장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느끼고 있었다. 처음 말을 꺼내고 비공식적인 사회를 맡아 왔던 노령의 학자가 마무리를 하려는 듯 말을 꺼냈다.
“이제 여러분 모두께서 적어도 몇 차례 씩 의사를 표시하셨고 대부분 생각할 수 있는 의견들은 모두 제시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각자 신중하게 생각하셔서 투표에 임하시면 되리라 봅니다. 그런대 유독 소설가라고 소개하셨던 분께서만 한 번도 의견을 말씀하지 않으신 것 같아 유감입니다. 아마 이쪽에서 그 분을 모신 까닭은 소설가야말로 인간에 대한 이해와 소설적 상상력을 통해 실험 결과가 공표되었을 때의 결과를 실감 있게 예측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기 때문일 텐데요.”
소설가가 입을 열었다.
“실은 저는 아까 회의를 시작할 때부터 줄곧 한 가지 생각에 붙들려 다른 생각을 할 여유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른 분들의 말씀을 들으며 저 나름대로의 생각은 정리했습니다. 제가 한 생각이 여러분들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입니다. 그래서 투표가 끝날 때까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군요. 좋습니다. 그럼 이것으로 토론을 마치고 투표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처음에 실험 결과를 발표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토로했던 생물학자가 다시 나섰다.
“여러분, 마지막으로 이 점을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보호하려는 인류는 대체 무엇입니까? 인류의 역사는 진리를 찾아 나선 여행이었습니다. 이 연구의 결과에 이르기까지 학자들이 지새웠을 그 많은 밤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건 그들만의 명예나 부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것 자체가 바로 인류의 모습입니다. 저는 인류로부터 이러한 탐구욕을 빼앗는 것이 인류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생물학자의 말까지 끝나자 벽 한쪽 귀퉁이에 앉아 눈을 감고 있던 문명보호연대의 담당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 테이블 위의 버튼을 봐 주십시오. 파란색과 빨간색으로 되어 있습니다. 파란색은 공표에 대한 찬성을 빨간색은 반대를 의미합니다. 이제 5분 후에 투표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버튼을 정확히 확인하시고 눌러주시기 바랍니다.”
길고 긴 침묵과 정적의 시간이 흘렀다. 주위를 둘러싼 철벽만큼이나 무거운 침묵이었다. 모두들 저마다의 생각을 정리하느라 눈을 감고 사색에 잠겼다. 마침내 정해진 시간이 되었다.
“자 이제 투표 버튼을 눌러주십시오. 내, 모두들 감사합니다. 투표 결과가 나왔군요. 여러분 열 분의 위원님들께서는 최종적으로 발표에 반대하는 쪽으로 투표해 주셨습니다. 한 분은 투표하지 않으셨군요. 좋습니다. 잠시 저희가 몇 가지 사항을 처리하는 동안 자리에 앉아서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결과가 발표되자 다시 장내는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공표 쪽으로 투표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때 회의에서 사회자 역할을 맡았던 학자가 소설가에게 다시 물었다.
“이제 투표도 끝났으니 소설가 선생님의 이야기를 좀 들려주시죠. 도대체 어떤 이야기이기에 투표가 끝날 때까지 말할 수 없다고 하신 건가요?”
“아, 예, 물어보시니 답해드리죠. 하지만 곧 모두들 아시게 될 내용인데요.”
소설가는 말을 잇기 위해 침을 한 번 삼켰다.
“만일 투표 결과가 지금과 같이 공표하지 않는 것으로 나오면, 여기 계신 여러분 모두는 어떻게 될까 하는 겁니다. 그냥 앞으로는 없었던 일로 해달라는 이야기와 함께 순순히 집으로 돌아가게 될까요? 이 주위의 강철 같은 철벽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실은 저는 이곳에 처음 온 순간부터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아니, 뭐라구요?”
갑자기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아마 그렇지 못할 겁니다. 정말 투표 결과처럼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기 있는 우리들 모두가 사라져줘야 할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 실험의 결과를 인류로부터 완전히 격리시킬 수 있겠습니까? 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한편으로 이 일이 정말 의미 있는 일이란 생각이 들어서 여기 계신 여러분들이 정말 스스로의 이익과는 상관없이 판단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에 끝까지 말을 꺼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도저히 저 스스로는 투표를 할 수가 없더라고요. 자기 목숨을 내놓고 옳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투표하기란 너무 어렵더군요. 그래서 그냥 투표는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정말 죽음 뒤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죽는 게 어떤 기분일지 궁금했는데 곧 알게 되겠네요. 정말 상상이 안 되더라고요. 그래도 죽음의 순간이 오면 막연하게나마 먼저 죽은 가족이나 친구를 다시 만나겠다든지, 천국에 가겠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될 텐데. 하여튼 우리는 인류 최초로 죽음 이후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알고 죽는 사람들이 되었네요.”
소설가의 담담한 말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기가 질린 표정들이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들은 곧 이 강철 철벽과 함께 생을 마감해야하는 처지에 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실로 그것은 죽음 뒤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안 첫 죽음이 될 것이었다.
“역시 뛰어난 분이시군요. 소설가 선생님께서 제가 해야 할 어려운 일을 대신 해 주셨네요. 저분의 말이 전적으로 옳습니다. 또 그 이유도 충분히 납득하셨으리라 봅니다. 조금 전 투표 결과와 함께 여러분은 모두 여기서 생을 마감하셔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도 포함해서입니다. 그리고 이 실험에 관여 했던 과학자들 역시 같은 시각에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장내의 질서 유지를 위해 총을 소지하고 있습니다. 모두 열 한 방의 총알이 장전되어 있습니다. 열 발은 만약의 상황을 위한 것이고 마지막 한 발은 저의 자살을 위한 것이지요. 아무쪼록 저의 지시에 잘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저의 지시에 따르지 않으시면 괜히 삶의 시간만 단축하게 될 뿐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의문의 실종으로 처리될 것입니다. 여러분 가족들께는 여러분이 몰래 가입해 놓은 것으로 되어 있는 거액의 보험료가 지급됩니다. 장담컨대 적어도 여러분의 자녀분들까지 평생 풍족하게 사시는데 부족하지 않는 금액이 될 것입니다.”
“집행은 정확히 한 시간 후에 이루어집니다. 실은 이곳이 하와이 근처의 화산섬입니다. 우리는 아직 활동 중인 활화산 부근에 있었습니다. 시간이 되면 이 방은 레일을 따라 자동으로 이동하여 화산으로 돌진하게 될 것입니다. 아까 여러분께서 투표 버튼을 누르시는 순간 이 모든 과정이 자동으로 시작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 전에 여러분께는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약이 지급될 것입니다. 저희로서도 여러분의 죽음을 결코 원치 않습니다. 문명 보호라는 대의명분을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라 생각합니다. 이 약으로 여러분은 적어도 어떠한 육체적 고통 없이 편하게 죽음을 맞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의 마지막 배려를 기꺼이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약의 효과는 30분 정도 후에 완전히 발휘되기 때문에 집행 전 30분에는 모든 분께서 약을 복용하셔야 합니다. 화산의 온도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약을 복용하지 않을 경우 엄청난 고통을 겪으며 사망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마지막까지 여러분이 편하게 잠드시는 것을 확인한 후 총으로 자살할 것입니다.”
“이상입니다. 지금까지 협조해 주셔서 감사드리며 인류의 이름을 대신하여 여러분의 희생에 경의를 표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육체적 고통이 없다고! 지금 장난하는 거요.”
자신이 의사임을 밝혔던 사람이 소리쳤다.
“아니, 아무 죄도 없는 우리를 일방적으로 이렇게 끌고 와서 이렇게 그냥 죽여도 되는 거요? 지금까지 한 얘기가 ‘죽고 나면 완전히 끝이다’, 그건데 그걸 알고 지금 여기서 그냥 죽으란 말이요. 난 절대 동의할 수 없소. 이렇게 허무하게, 아무 의미 없이 죽을 순 없단 말이요. 문, 문이 어디요. 난 나가겠소.”
의사는 이성을 잃고 자리에서 일어나 담당관 쪽으로 달렸다.
“탕!”
총성이 한 번 울렸고 의사는 그 자리에 쓰려졌다.
“여러분이나 저나 어차피 모두 죽을 사람들입니다. 제가 발포에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다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 규정에 따라 자리에서 이탈하시는 분은 장내의 질서 유지를 위해 사살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머지 한 시간의 시간을 각자의 생각을 정리하시는데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한 번의 총성으로 순식간에 장내는 다시 조용해졌다. 더 이상 과격한 행동을 하려 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금 전까지 실감되지 않던 죽음이 이제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각자에게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흐르다 누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주, 죽음 뒤에 아, 아무 것도 없다는 걸 알고 죽는 다는 게 정말 이, 이렇게 허무한 것인지는 미처 몰랐습니다. 저, 정말 너무나 떨리는 군요. 전 사실 발표하는 쪽으로 투표했었지만 오, 오히려 이렇게 된 게 잘 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이 이런 고통을 당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니 끄, 끔찍하네요.”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모두들 체념한 듯 고개를 숙이고 침묵을 지켰다.
“이제 시간이 되었군요. 지금부터 말씀드린 약을 배부해 드리겠습니다. 모두 1분 내에 복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담당관은 말과 함께 봉투 하나를 돌렸다. 저마다 봉투에서 알약 하나씩을 꺼냈다. 사람들은 바로 약을 먹지 못하고 씁쓸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약만 바라보고 있었다.
“말씀드린 데로입니다. 약을 복용하지 않으실 경우 불필요하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당하게 되실 것입니다. 이제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약을 복용해 주십시오. 정상적인 경우 10분 후면 잠이 들고 30분이 경과하면 완전한 사망 상태에 이르러 어떠한 고통도 느끼지 않게 됩니다.”
몇 몇은 독려하듯 말하는 담당관을 원망어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결국 그들 역시 운명을 받아드리고 약을 삼켰다. 다른 어떠한 대안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하나 둘 씩 앞으로 뒤로 쓰러져 깊은 잠에 빠졌다. 모든 사람이 잠든 것을 확인한 담당관은 장내를 한 바퀴 돌며 한 사람 씩 건드려 보다가 이내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그러한 고통을 일부러 감내하고자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총을 꺼내 드는 그의 손도 떨리고 있었다. 이미 실내의 온도도 상당히 올라가 있었다. 레일 위를 따라 이동하는 방이 이미 화산에 상당히 가까워졌음을 알리고 있었다.
“여러분, 제 말이 들리시는지, 그렇지 않는지는 모르지만 다시 한 번 여러분의 희생에 감사드립니다. 저 역시 제가 하고 있는 일이 옳다고 확신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 그것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탕!”
또 한 발의 총성이 울렸고 담당관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실내 온도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올라가고 있었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지.”
갑자기 뒤쪽에서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났다. 그는 연신 이마의 흐르는 땀을 닦으며 쓰러진 사람들을 재치고 앞쪽으로 나왔다. 생물학자였다. 담당관이 죽은 것을 확인한 그는 곧장 정면에 보이는 문을 열었다. 그것은 이제까지 담당관만이 출입했던 문이었다. 담당관조차 간식을 내올 때만 들고 나곤 했었다. 문을 열어 보니 문 안 역시 작은 방이었다. 그러나 출입구로 보이는 문은 아무리 열려 해도 열리지 않았다. 창문이나 그 외에 외부로 통할 수 있는 문은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탈출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오른 실내 온도에 그는 하마터면 기절할 뻔 했다. 의식을 유지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러나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 이제 그는 어떻게든 외부에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일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자신의 죽음도 헛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정면 테이블 위에 컴퓨터가 보였다. 컴퓨터는 켜져 있었고 메일을 보낼 수 있는 상태로 되어 있었다. 아마 투표 후 담당관이 자신의 마지막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켜 둔 것일 거였다. 모니터의 화면이 고온으로 간간히 일그러지기는 했지만 아직 작동은 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시간이 없었다. 그는 화면상에 보이는 누군가의 메일 주소를 클릭했다.
“이 사실을 알려야해. 인류는 진실을 알아야할 의무가 있어. 이건 우리 문명을 위한 진정한 사명이야.”
그는 이를 악물고 타이핑을 했다. 짧은 시간 내에 이 모든 사실을 알린 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마음이 급해서 인지 ‘이건 정말 사실이니 반드시 믿어 달라’는 말만 몇 차례 반복하고 있었다. 겨우 이제까지 있었던 일들의 대강을 적고 나자 레일 따라 이동하던 방이 마침내 화산 속으로 떨어지려는지 실내가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이미 온도는 견딜 수 없는 수준까지 올라가고 있었다. 이제 그는 살이 타는 듯 한 뜨거움 속에 몸서리치며 마지막 절규와 함께 메일의 전송 버튼을 눌렀다.
-------------------------------
“요즘에도 스팸 메일 많이 들어와?”
“그럼. 하루에도 수십 통은 될 걸?”
“새로 나온 차단 프로그램을 써. 그게 웬만한 건 막아 준다고.”
“아니, 스팸 메일이 꼭 나쁘지만은 않아. 그래도 메일 열어 봤을 때 편지가 한 통도 안 와 있는 것 보다는 낫잖아? 게다가 어젠 굉장히 좋은 SF 소설 소재 하나가 왔지 뭐야?”
“뭐? 소설 소재?”
“그래. 누군지 장난 친 게 분명해. 자기가 화산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나? 정말 뻥도 쎈 놈이지. 아니 화산 속에 빠져들고 있으면 빨리 빠져 나갈 것이지 왜 메일을 보내. 그리고 컴퓨터 앞에 앉은 채로 빠졌던 모양이지?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메일을 보내게?”
“그래서? 내용이 뭔데?”
“근데 그런 뻥 쎈 놈들이 순간적인 머리는 있어가지고 꽤 그럴싸한 얘기를 지어 내었더라고. 하여튼 기대해 봐. 안 그래도 다음 달 SF 소설 잡지에 뭘 써서 낼지 고민이었는데. 메일 보낸 친구한테 편지는 보내 놨어. 만일 일주일 기다려도 답장 안 오면 이걸로 소설 한 번 써 볼 테니.”
“대체 무슨 소설인데 그래. 내용이 뭐야?”
“그건 비밀이고, 제목만 알려주지. 어제 밤에 생각한 건데 꽤 마음에 들어.”
“제목이 뭔데?”
“진짜 죽음.”
0
독자님의 정보를 입력해주세요.
* 는 필수항목입니다
첨부파일은 최대 3개까지 가능하며, 전체 용량은 10MB 이하까지 업로드 가능합니다. 첨부파일 이름은 특수기호(?!,.&^~)를 제외해주세요.(첨부 가능 확장자 jpg,jpeg,png,gi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