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람쥐는 운동장 북쪽 가장자리에 멈춰 잠시 둘레를 살폈다. 산자락을 따라 꿩은 자주 내려왔지만, 다람쥐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녀석의 털 위에 내리는 봄날 햇살이 하도 포근해보여서, 민구는 창 밖으로 손을 내밀 뻔했다.
그는 가슴을 펴고 숨을 깊이 쉬었다. 가슴은 들끓는 감정들로 아직 어지러웠다.
“파이젠. 파이젠이라…….”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면서, 그는 뇌었다.
20세기 말엽에 생명체들의 지놈을 해독하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비용은 빠르게 낮아졌다. 마침내 사람의 지놈이 해독되었다. 자연스럽게 침팬지의 지놈이 다음 목표로 떠올랐다. 침팬지는 사람에게 가장 가까운 종이었다. 사람과 침팬지가 갈라진 것은 겨우 5백만 년에서 8백만 년 전이었고, 사람과 침팬지의 유전자들은 98퍼센트나 같았다. 자연히, 침팬지 지놈의 해독은 사람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터였다. 그 일에 매달렸을 많은 팀들 가운데 텍사스의 야심 찬 벤처 기업 하나가 맨 먼저 목표를 이룬 것이었다.
'이제 길성이가 보노보 지놈을 끝내면…….' 혀로 입술을 훔치면서, 그는 손을 마주 비볐다. 기대로 부푸는 가슴이 실제로 부푸는 듯 뻐근했다.
그의 친구인 언재대학교 최길성 교수는 보노보 지놈을 해독하고 있었다. 보노보는 원래 ‘피그미 침팬지’라고 불린 침팬지의 아종(亞種)으로 콩고 강 남안 지역에만 살고 있었다. 콩고 강이 침팬지와 보노보의 분화를 부른 것이다. 보노보 지놈의 해독 자료는 자체로 중요했지만 침팬지 지놈의 해독 자료와 교환될 수도 있었다. ‘파이젠’의 것이든지, 아니면, 경주에서 ‘파이젠’에 진 다른 연구소의 것이든지.
침팬지 지놈과 보노보 지놈을 갖추면, 침팬지와 보노보의 공통된 조상 침팬지의 지놈을 합성할 수 있었다. 이어 그렇게 합성된 조상 침팬지의 지놈과 사람의 지놈으로부터 침팬지와 사람의 공통된 조상의 지놈을 합성할 수 있었다. 이른바 ‘미싱 링크’의 유전자적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그와 최 교수는 이미 그 일을 위한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워서 그가 일하는 난곡연구소의 지원까지 얻어낸 터였다. 침팬지 지놈의 해독은 당장 쓸모가 있었지만, '미싱 링크'의 지놈을 합성하는 일은 당장엔 쓸모가 거의 없었다. 물론 그것은 지적으로는 무척 흥미로운 일이었지만, 실제적 용도가 없는 일을 지원할 기관은 드물었다. 난곡연구소는 바로 그런 종류의 연구들을 지원했다. 난곡 박선후는 여러 가지 연구들에 손을 댄 아마추어 고고학자였는데, 물려받은 큰 재산으로 지적으로 흥미롭지만 실제적 쓸모는 적은 연구들을 지원하는 연구소를 세웠다. 평판을 생각하는 연구소들이 외면한 사업들이 난곡연구소 덕분에 수행되었고 평범한 고생물학자이자 실패한 시인인 그도 어엿한 일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다행히, ‘미싱 링크’의 지놈을 합성하는 사업은 돈이 많이 들지는 않을 터였다. 많은 인원이 드는 것도 아니었고, 컴퓨터 타임을 빼놓으면, 달리 들어갈 비용도 없었다.
눈앞에 선연히 나타났다, 그의 먼 조상의 모습이, 큰 나무들이 많은 아프리카에서 네 발을 쓰며 사는 털 많은 유인원이. 영영 지나가버린 아득한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그의 가슴을 시리게 했다.
가슴에서 시린 물살이 잦아들자,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보지 않는 눈길로 내다보던 운동장에 눈길의 초점을 맞추었다. 느긋한 봄날의 햇살은 여전했지만, 다람쥐는 보이지 않았다.
2
“실장님.” 전신지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응?” 눈 덮인 운동장을 내다보던 민구는 돌아다보았다.
“이것…….” 그녀가 인쇄지를 그에게 보였다. “이것 실장님께서 보셔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피곤했다. 몸도 마음도. ‘미싱 링크’의 지놈을 합성하는 사업은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고, 그는 깨어 있는 시간을 모두 그 일에 바치고 있었다. 같은 일에 매달린 사람들이 많을 터였으므로, 한시가 급했다. 경주에서 둘째는 별 뜻이 없었다.
문득 두려움의 손길이 그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녀가 든 것은 신문의 기사를 인쇄한 것이었다. 그는 젊은 조수의 상기되고 걱정스러운 얼굴을 살폈다.
“실장님께서 빨리 보셔야 될 것 같아서…….” 그녀의 손길이 가늘게 떨렸다.
그녀의 가늘고 긴 손가락들이 눈에 들어오면서, 아픔에 가까운 그리움의 물살이 그의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오래 전, 다른 곳, 다른 여인의 손에서. 첫사랑은 깊은 각인이었다. 세월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오늘 샌프란시스코의 생명공학 기업 리커버는 사람과 침팬지의 공통된 조상의 지놈을 합성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이 공통의 조상은 '미싱 링크'라고 불려왔는데, 사람과 침팬지가 분화한 것이 5백만 내지 8백만 년 전이므로, 적어도 8백만 년 전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수전 크로닌 박사가 주도한 리커버의 연구 팀은 유전자 돌연변이의 속도에 관한 ‘거스먼 공식’을 사용하여 640만 년 전에 살았으리라고 추정되는 유인원의 유전자적 모습을 합성했다. 크로닌 박사는 자신이 합성한 유인원이 ‘미싱 링크’의 실제 모습에 아주 근접하리라고 말했다…….
멍한 마음속으로 몸의 먼 구석에서 힘이 밖으로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흘렀다. 그대로 주저앉고 싶었지만, 신지의 걱정스러운 눈길을 느끼고, 그는 얼굴에 웃음을 올렸다.
“우리가 진 것 같구나. 그렇지?”
그녀는 불안한 웃음을 띠면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녀 눈 속에서 감정이 일렁이고 있었다.
문득 마음이 달떴다. ‘동정? 걱정? 아니면…….’
그녀는 그의 눈길을 대담하게 받았다. 들여다볼수록 깊어지는 듯한 눈이었다. 바다처럼. 낯익었다. 오래 전, 다른 곳, 다른 여인의 눈에서.
“진 것은 진 것이고.” 저절로 나온 한숨이 그리 무겁지는 않았다. “우리가 하던 일은 마저 해야지.”
좀 밝아진 얼굴로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정도 걱정도 아닌 감정이 그녀 눈에서 보얀 몸을 드러냈다.
때로는 뻔한 얘기도 쓸모가 있었다. 하긴 이런 상황에선 뻔하지 않은 얘기가 나올 수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나?”
“아직…….”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용수하고 미셸에게도 알려줘. 그리고 다섯 시 반에 여기 모이도록 해.” 그는 인쇄지를 흔들었다. “이것에 대해 얘기하게.”
“네.”
“아, 그리고 ‘발하시’에 예약을 해둬. 저녁 먹으면서, 얘기를 좀 하지.”
“네.” 그녀 웃음이 환하게 피어났다. 이어 웃음의 송이가 오므라들어 눈 속으로 들어갔다. 빨아들이는 듯한 눈길로 그를 감싸더니, 그녀가 충동적으로 다가섰다. “실장님.”
향기가, 처녀의 풋풋한 냄새가, 그의 감각을 덮쳤다. 기억을 일깨우는 익숙한 냄새였다. 오래 전, 다른 곳, 다른 여인에게서 맡던. 그는 그녀 등을 토닥거렸다. “신지야, 고맙다. 이제 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줘라.”
“녜.” 그녀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그녀가 방을 나가자, 그는 나머지 기사를 마저 읽었다. ‘미싱 링크’의 지놈이 합성되었으니, 다음 목표는 그 지놈을 실제로 디엔에이로 만들어서 ‘미싱 링크’을 실체화하는 일인데, 유전공학의 빠른 발전을 생각하면, 그 일은 그리 멀지 않은 장래에 실현될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런 일은 물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있으므로, 윤리적 문제를 안고 있으며, 당연히 거센 논란을 부를 터였다. 크로닌 박사는 ‘미싱 링크’을 디엔에이로 만들어내는 일에 관해서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채, “과학적 연구는 나름의 논리를 지녔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고 기자는 썼다.
“나름의 논리라,” 아직 살을 시리게 하는 처녀의 냄새를 음미하면서, 그는 뇌었다. 그랬다, 과학엔 나름의 논리가 있었고, 그는 그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였다. 그에게 다른 선택은 애초에 주어지지 않았다.
3
젊은 축들이 운동장에 모이고 있었다. 수요일 오후마다, 연구소는 일을 멈추고 직원들이 운동을 하도록 배려했다. 인기가 높은 것은 역시 축구였다. 풀로 덮인 경기장에서 힘껏 달리고 차는 축구보다 육체를 더 즐겁게 하는 운동은 없었다. 누가 공을 차올렸다. 공이 골대 옆으로 날아가자, 누가 부리나케 공을 좇아갔다.
부러움과 서글픔이 살짝 어린 마음으로 그는 유니폼을 입은 젊은이들을 열린 창으로 내다보았다. 그가 이 운동장에서 공을 찬 지도 오래되었다. 마흔이 넘어서까지 찼는데, 헛발질이 많아지면서, 그는 점점 자신의 나이와 남의 눈길을 의식하게 되었다. 젊은 친구하고 공을 다투다가 머리에 받쳐 코 수술을 받은 뒤엔 마침내 운동장을 떠났다.
'나름으로 화끈하게 은퇴한 셈인데. 벌써 십 년 가까이 되었구나…….'
축구처럼 격렬한 운동을 그만두면, 사람들은 배드민턴이나 탁구와 같은 가벼운 운동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이 어쩐지 서글퍼서 아예 그만두었다. 아침에 달리고 휴일에 등산하는 것으로 운동은 충분했다.
'쉰 다섯. 이 나이에 내놓을 것은…….' 앞에 누가 선 것처럼, 그는 두 손을 펴보였다. '자식 하나 낳지 못했으니…….'
누가 호루라기를 불었다. 사람들이 운동장 가운데로 모이기 시작했다.
'자식을 낳지 못한 것이…… 유기체에겐 어쩌면 그것이 가장 큰 실패지.' 그는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쉰여섯 해가 고스란히 담긴, 메마른 손이었다. 쉰여섯 살은 아이를 낳기에 너무 늦은 나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아이를 낳을 기회는 이미 지나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결혼은 할지 몰랐다. 더 늙어서 더 외로워지면. 나이 지긋한 여자와. 그러나 젊은 여인을 아내로 맞아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시절은 지나간 것이었다. 설령 그런 여인이 나온다 해도, 그로선 아이를 낳아 키울 자신이 없었다.
'신지는…….' 부르지도 않았는데 슬그머니 고개를 내민 그 생각을 그는 서둘러 밀어 넣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신지는 넘볼 수 없었다. 만일 신지가 보다 적극적으로 나온다면, 그로선 다른 길이 없었다, 그녀를 그녀 엄마에게 돌려보내는 것 말고는.
자꾸 그녀에게로 향하는 생각을 끊으려고, 그는 운동장을 살폈다. 심판의 주의 사항을 듣고 서로 악수한 양팀 선수들이 한데 모여 “파이팅”을 외친 다음 제각기 자기 위치를 찾아가고 있었다. 연구소의 축구 팀들은 모두 넷이었는데, 오늘은 ‘바이오’와 ‘에이아이’가 붙은 모양이었다. 말 그대로, ‘바이오’는 생물 분야 연구실들을 가리켰고, ‘에이아이’는 컴퓨터와 인공지능 분야 연구실들을 가리켰다. 심판은 행정실의 김인학이 맡은 모양이었다.
다시 눈길이 두 손으로 돌아갔다. '결국 빈손으로…… 내 대에서 대가 끊긴 채…….'
호루라기 소리가 나고 경기가 시작되었다. 파란 유니폼의 ‘바이오’가 먼저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패스 몇 번을 하다, 공을 빼앗겼다. 노랑 유니폼을 입은 ‘에이아이’ 선수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앞으로 내달았다.
자기 대에서 대가 끊긴다는 생각은 그의 가슴속을 죄의식의 안개로 채웠다. 생명이 시작된 뒤 거의 40억 년 동안 그의 수많은 선조들 가운데 자식을 낳는 데 실패한 이가 단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은 늘 그를 감동시켰다. 이제 그가 몇억 세대를 이은 그 길고 질긴 가계를 끊은 것이었다.
“실장님,” 이용수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응?” 어두운 생각을 마음에서 밀어내면서, 그는 그의 수석 조수를 돌아다보았다. 용수는 컴퓨터 모델링을 전공한 선임연구원이었다.“결과가 나왔습니다. ‘올 컴패티블’이라고 나왔습니다.” 용수의 목소리는 억누른 흥분으로 좀 탁했다.
“그래?” 흥분의 뜨거운 물살이 속에서 차오르더니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운동장에서 나는 소리가 문득 사라지고 거세게 뛰는 자신의 맥박만 들렸다.
“네.” 조심스러운 미소가 용수 얼굴에 어렸다.
“드디어 성공했구먼.” 용수의 조심스러운 웃음에 환한 웃음으로 답하고서, 그는 실험실로 향했다.
그가 들어서자, 메인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던 신지와 미셸 챵이 얼른 물러났다. 둘 다 흥분으로 얼굴이 발그스레하고 눈이 빛났다.
“어디 보자.” 혼자 중얼거리면서, 그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미싱 링크’의 지놈을 합성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침팬지의 지놈과 사람의 지놈이 워낙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유인원들과 마찬가지로, 침팬지는 염색체가 24쌍이었다. 사람은 염색체가 23 쌍이었다. 유인원들의 염색체 두 쌍이 융합되어서 사람 염색체 2번이 된 것이었다. 그것만 빼놓으면, 침팬지와 사람은 지놈에서 다른 점들이 아주 적었다. 그래서 침팬지가 본류고 사람은 아주 작은 집단에서 나온 지류라는 사실을 고려해서 적절한 가중치를 주면, ‘미싱 링크’의 평균적 지놈은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었다.
문제는 그런 평균점 지놈을 이루는 유전자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것을 검증하는 일이 힘들었다. 유전자들 사이의 관계가 워낙 복잡하고 유전자들이 만들어내는 단백질들도 무척 많은 데다가 아직 그것들에 관한 지식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서, 유전자들의 공립성을 검증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은 정말로 어렵고 더딘 부분이었다. 그는 지금도 검증 프로그램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검증 프로그램으로 합성된 지놈을 검증하는 데는 이십 분 가량 걸렸다. 마침내 화면에 결론이 떴다: “ALL COMPATIBLE. CONGRATULATIONS.”
그는 ‘CONGRATULATIONS’를 가리켰다. “이거 누가 집어넣은 거야?”
“제가 그랬습니다.” 겸연쩍은 얼굴로 용수가 옆머리를 긁었다.
“이런 걸 뭐라 하는지 아나?”
셋이 눈길을 교환했다. 용수가 머뭇거리면서 대꾸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걸 ‘컴퓨터 옆구리 찔러서 절받기’라 하는 거야.”
웃음이 터지면서, 실험실은 축제 마당이 되었다.
4
그도 모르는 새 음악이 그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어왔다는 것을, 그래서 그가 선율을 따라 흥얼거리고 있다는 것을, 민구는 깨달았다. 그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그는 선율을 따라서 흥얼거렸다. 그의 가슴속 무슨 현이 울린 듯, 그리움이 길게 울리면서 긴 여운을 남겼다. 작곡한 사람도, 작사한 사람도 오래 전에 죽었지만, 노래는 세월에 바래지 않은 채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에 울리고 있었다. 뒤에 남길 만한 것이 자신에게는 없다는 생각이 쓸쓸한 바람으로 스쳤다.
“이 노래 좋아하세요?” 손에 잔을 든 채 신지가 물었다.
“응.”
“무슨 노래예요?”
“이십세기의 영화 주제간데. ‘러브 이즈 어 메니-스플렌더드 싱’이라고. 제목 그대로야. 사랑을 찬양하는 노래야.”
그와 신지는 ‘발하시’에서 ‘미싱 링크’의 지놈을 합성하는 데 성공한 것을 자축하고 있었다. 지난달에 약혼한 용수와 미셸은 오늘 저녁에 용수 부모님을 뵙고 저녁을 들기로 했다면서 일찍 나갔다.
그녀는 잠시 심각한 얼굴로 노래를 따라가더니 진지하게 말했다. “저도 좋은데요.”
“영화도 괜찮더라. 그때 영화 기술이 워낙 원시적이어서, 좀 어색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신지야, 무엇 좀 먹을래? 아니면, 술을 좀 더 들고 먹을래?”
“술을 좀 더 마시고요.” 그녀가 잔을 비웠다.
“그래라.” 그는 포도주 병을 들어 그녀 잔을 채웠다.
“그런데, 실장님은 왜 저를 싫어하세요?” 새 노래가 시작되자, 그녀가 불쑥 물었다.
그는 그녀를 한참 쳐다보았다. “무슨 얘기를 하냐? 내가 왜 너를 싫어해?”
“싫어하시잖아요? 제가 실장님께 적극적으로 의사 표시를 해도, 실장님은 반응이 없으시잖아요?” 그녀가 도전적 눈길을 던졌다. 술로 발그스레해진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 같았다.
“그건 다르잖아? 난 너를 좋아해.” 그의 아랫배에서 뿌듯한 욕정이 고개를 들었다. 죄의식이 섞인 사랑보다 더 강렬한 욕정을 일으키는 것이 있을까? “난 너를 아껴. 사랑한다고 해도, 뭐, 틀린 말은 아냐. 하지만 그건 연인으로서의 사랑은 아니고…….”
“그럼 뭐예요?”
“음.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서, 그는 말을 이었다. “네 엄마의 친구로서, 너를 아끼는 거라고 할까?”
“하지만, 전 실장님을 연인으로 갖고 싶어요. 안 놓치게 꼭 껴안고 싶어요.” 그녀가 두 손을 마주 잡고 힘을 주었다. “실장님, 제가 섹스어필이 너무 없죠? 그래서 저를 멀리 하시는 거죠?"
“이건 섹스어필의 문제가 아냐. 넌 내겐 친딸이나 마찬가지야. 그리고 네 엄마가 나를 믿고 너를 맡겼잖아? 널 가르치라고. 널 유혹하라고 한 게 아니잖아?”
“전 엄마에 소속된 존재가 아녜요. 전 이제 다 큰 여자란 말예요. 실장님, 자꾸 엄마 뒤에 숨지 마세요. 비겁해요.”
“난 누구 뒤로도 숨지 않는다. 그저…… 신지야, 실은 내일 네 엄마한테 너를 넘겨줄 작정이다.”
“뭐라고요?” 이번엔 그녀가 놀랐다.
그는 또박또박 다시 말했다.
“그건 말이 안 돼요.”
“말이 되든 안 되든, 이제 ‘미싱 링크’ 사업도 끝났으니, 너도…….” 막상 말을 꺼내놓고 보니, 가슴이 새삼 아파서, 그는 말끝을 흐리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20층 꼭대기 라운지에서 보는 야경은 늘 아름답고 신비로웠다. ‘저 어둠 속 어디에도 내가 신지를 데리고 숨을 곳이 없다니…….’
“실장님.”
“응?”
그녀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실장님, 실장님 문제가 뭔지 아세요? 실장님은 너무 시대에 뒤떨어졌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다.”
“저는 저고 엄마는 엄마예요. 실장님이 엄마 연인이었다는 사실이 뭐가 그리 중요해요? 엄마랑 이 년 동안 같이 살았다는 사실이 뭐가 그리 문제가 돼요?”
이번엔 그가 놀랐다. 신지가 그녀 엄마와 그 사이의 관계를 알리라고는 그는 생각지 않았었다. 서둘러 마음을 다잡고서, 그는 나직이 타일렀다.
“신지야, 내 말 잘 들어라. 너는 예쁘고 섹시해. 나는 너를 좋아하고 사랑해. 나와 네 엄마 사이의 관계도, 네 말대로, 문제가 되진 않아. 사람들이 알면 수궁거리겠지만, 그게 뭐 대수냐? 그렇지만, 신지야, 나는 좋은 배우자가 못 돼. 그게 궁극적 문제야. 나는 쉰여섯이다. 재산도 없고 사회적 지위도 없어. 너는 네 아이들에게 좋은 아빠를 갖도록 할 의무가 있어. 알겠니?"
그가 말을 끝냈어도, 그녀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밖을 내다보고만 있었다.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나는 내 이익보다 네 이익을 앞세워야 돼. 맞지?” 헤어짐의 아픔을 미리 맛보면서, 그는 호소했다. “그게 사랑의 역설이다. 지금 나는 네게 가장 큰 위협이 되었어. 내가 자신을 통제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 너를 나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너를 네 엄마한테 돌려보내는 거야.”
“그 ‘사랑의 역설’ 때문에 엄마를 그냥 놓아준 거예요?”
그는 잠시 생각했다.
“그런 면도 조금은 있겠지. 나보다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이 나타났다고 네 엄마가 말했고, 그래서 내가 네 엄마 집을 나왔으니까. 네 엄마 판단이 옳았지. 너처럼 예쁘고 똑똑하고 착한 아이를 낳았으니. 그리고 재산과 지위를 가진 남편 덕분에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이루었으니. 나랑 같이 살았으면, 지금 네 엄마가 장관을 하겠니?”
“실장님을 버렸는데도, 엄마를 미워하지 않았어요? 결혼할 때, 엄마가 실장님 팔을 잡고 입장하셨다면서요? 친한 오빠라고 소개하고서요?”
“그런 얘기까지 했니? 네 엄마는 나를 아직 사랑한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표현했어. 자식을 위해서 보다 나은 배우자를 골라야 하기 때문에, 나를 버릴 수밖에 없었지만…….”
그녀가 문득 깔깔 웃었다. 웃음소리가 맑았다. 그녀가 잔을 들어 그에게 손짓했다. 그들은 잔을 부딪쳤다.
“실장님, 이거 아세요?”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고서, 그녀가 진지하게 물었다. “그때 실장님께서 못 놓아주겠다고 펄펄 뛰셨으면, 엄마가 그냥 실장님하고 결혼했으리라는 것을요?”생각지 못했던 아픔이 문득 가슴을 후려쳤다. “무슨 얘기냐?”
“제가 엄마한테 물었거든요. 아빠의 좋은 조건에 마음이 끌렸을 때, 실장님께서 펄펄 뛰셨으면, 어떻게 했겠느냐고요. 그랬더니, 엄마가 그러데요, 붙잡으면 그냥 주저앉을 생각이었다고요. 정말 사랑한 것은 실장님이었다고요. 그런데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짐을 싸더래요.” 잠시 뜸을 들인 다음, 그녀가 단단한 목소리로 못을 박았다. “그 얘기를 하면서, 엄마가 한숨을 길게 쉬었어요. 그거 아세요?”
그는 그녀가 막 들려준 얘기가 맞다는 것을 알았다. 수연이는 그에게 외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꼭 붙잡아달라고. 조건이 좋은 배우자를 찾는 암컷의 본능을 이길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그러나 그는 그녀의 안타까운 외침을 듣지 못했다. 상처 받은 자존심을 감추려고, 사랑의 역설을 되새기기만 했었다. 회한의 물결은 거세게 일었지만, 삼십 년의 세월은 나름으로 한 일이 있어서, 그는 이내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솔직히 몰랐다.” 그는 잔을 비웠다.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그녀가 잔을 채웠다. “사랑하니까, 떠나보낸다. 실장님 그건 말이 안 돼요.”
“말이 된다.” 잠시 생각한 다음,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은 스토커들과 레이피스트들의 자식들로 득실댈 거다. 나는 자식을 낳는 데 실패했지만, 스토커들과 레이피스트들이 보통 사람들보다 더 많은 자손들을 낳는다고 믿을 근거는 없다. 신지야, 그러니 내일 사무실 정리하고 나랑 같이 엄마한테 가자.”
그녀는 잠자코 포도주를 마셨다.
그는 순간적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엄마한테 내가 말하마. 이제 장관 그만둘 때가 됐다고. 이제 딸하고 같이 보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너랑 같이 여행이나 하라고.”
5
“내 얘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존재한 적이 없고, 존재할 권리도 없는 생명체들을 일부러 억지로 만들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 사람들은 괴물을 만들려는 것입니다.” 사회자의 왼쪽에 앉은 나이 지긋한 사내가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자 사회자 오른쪽에 앉은 사내가 이내 말을 받았다. “괴물이라 부르는 것은 지나친 일입니다. ‘미싱 링크’의 실체화는 사람과 침팬지의 공통된 조상의 평균적 지놈을 갖춘 생명체를 만들려는 과학적 노력입니다. 지금 우리 인류가 지닌 유전자들에 관한 정보를 한데 모아서 평균을 내면, 평균적 유전자들을 지닌 사람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런 평균적 사람을 괴물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지난달에 ‘미싱 링크’의 지놈을 합성한 일본의 ‘MBR’이 그 지놈을 실체화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미싱 링크’의 지놈을 맨 먼저 합성한 ‘리커버’도 그 일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침팬지와 사람의 공통된 조상이 컴퓨터에 담긴 유전적 정보 묶음에서 피와 살을 지닌 생명체로 조만간 태어날 터였다.
당연히, 온 세계가 논란에 휩싸였다. 가장 거세게 반발한 것은 물론 종교계였다. 지금 세계적 방송회사 ‘AIS’의 시사 토론 프로그램 ‘JULIE SEJAL SHOW’에서도 그 일을 놓고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물론 괴물이죠. 그것은 신이 만드신 생명체들의 목록에 들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을 괴물이라 부르는 것이 왜 문제가 되나요?” 조지 만하임이라고 소개된 종교철학자가 말했다. “확실한 것은 사람은 신 노릇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죠. 그것은 필연적으로 재앙을 부릅니다.”
민구는 잔을 들어 브랜디를 단숨에 마셨다. 목이 먼저 화끈거리더니 이어 속이 따스해졌다. 그러나 가슴의 빈 구석으로는 써늘한 바람만이 소리치며 지나갔다. ‘신지는 지금 무엇을 할까?’
6
그는 침침한 눈을 들어 창 밖을 내다보았다. 눈이 날리고 있었다. 그는 일어나서 창가로 다가갔다. 눈발이 제법 푸짐했다. 어느새 운동장이 눈으로 덮여서 마른 풀줄기들만 눈 위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는 기지개를 켜고서 어깨를 팔로 주물렀다. 종일 컴퓨터 앞에서 일했더니, 온몸이 쑤셨다.
'좀 느긋하게 해야 되는 것 아닌가?'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마지막 고비라,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지만, 그럴수록…….'
지금 그는 ‘루시 지놈’ 사업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루시(Lucy)는 350만 년 전에 살았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여인이었다.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된 그녀의 화석은 잘 보존되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미싱 링크’와 현대 인류 사이에 자리 잡았다. 그래서 한번 ‘미싱 링크’의 지놈이 합성되면, 루시의 지놈을 합성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다음 목표로 떠오르게 되어 있었다. 실제로 거의 한 세기 전에 위대한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지놈의 연구가 현생 인류 지놈의 해독, 현생 침팬지 지놈의 해독, ‘미싱 링크’ 지놈의 합성, 루시의 지놈의 합성, 루시 지놈의 실체화로 이어지리라고 예언했었다.
루시의 지놈은 이미 합성되었다. 어렵고 더딘 것은 ‘미싱 링크’의 경우처럼 유전자들의 공립성을 검증하는 프로그램이었다.
푸짐한 눈발이 그의 지치고 쓸쓸한 마음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긴 한숨을 내쉬고서, 그는 책상으로 다가가서 서랍을 열었다.
정인형 씨와 김현실 씨의 차남 정수빈 군
박수연 씨의 장녀 전신지 양
신지의 결혼 청첩장이었다. 오늘 받았다. 벌써 댓 번은 꺼내 읽었다. 신지가 청첩장 맨 밑에 쓴 글 때문이었다.
외삼촌께. 엄마한테 한 가지만 부탁했어요. 나를 데리고 식장에 들어갈 사람은 내가 고르겠다고. 제가 외삼촌을 대자, 엄마가 놀라서 제 얼굴을 한참 바라보고만 있었어요. 엄마가 놀랄 때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어요. 저를 잘 이끌어주신 외삼촌 팔에 의지하고서 새 삶의 터전으로 들어가고 싶어요.
신지 올림
청첩장을 손에 든 채, 그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눈발이 더 푸짐해진 듯했다. ‘내 마음에도 저리 푸짐하게 눈발이 날릴 날이 있을까?’
7
민구가 실험실 문을 들어서는데, “빙고”하고 용수가 외쳤다.
그를 보더니, 용수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실장님, 된 것 같습니다.”
“그래? 어디?” 그는 메인 컴퓨터로 다가갔다.
화면엔 ‘ALL COMPATIBLE. MISSION COMPLETED’라고 나와 있었다. 은은한 음악이 나오고 있었다. 용수가 이번엔 사운드까지 넣은 모양이었다.
8
차임이 울렸다. 그는 푸드 디스펜서로 가서 잔을 집어 들었다. 조금 맛보니, 꿀물이었다. 시원한 꿀물이 마른 목을 축여주었다.
오늘 저녁은 과음했다. 그의 연구실 다섯 사람만이 자축하기로 했는데, 어떻게 소문이 퍼졌는지, 다른 연구실들 사람들에다가 행정실 사람들까지 찾아와서, 삼차까지 하고서야 겨우 풀려났다.
그가 소파에 머리를 기대자, 방안 불빛이 좀 흐려졌다. 이어 음악이 나왔다.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노래였다. 아마도 20세기 노래일 터였다. 방은 그의 취향에 맞는 음악을 찾아내서 그에게 조심스럽게 선보이고 있었다.
이사 온 지 반 년이 됐으니, 방이 그에 대해서 잘 알만도 했다. 그가 입은 옷에 든 센서들로 그의 몸 상태를 알아내고 그런 상태에서 그가 무엇을 원하는가, 무슨 음식을 먹고 싶고, 무슨 음료를 찾을 것이고, 무슨 음악을 듣고 싶어하며, 어떤 온도와 습도와 조도가 그의 상태에 맞는가 놀랄 만큼 정확하게 짚어냈다. 방은 그에 대해서 그 자신보다 오히려 잘 알고 있었다.
붉은 술기운에 몸이 둥실 뜨는 기분이었다. 지난 세월이 바람으로 불어와서 살을 씻고 표표히 사라졌다. 늦가을 하늘 아래 빈 들판으로 남은 생애가 누워 있었다. 몇십억 년의 세월이 다듬어낸, 정교한 육신이 너무 빨리 사라지는 것이었다. 아니었다, 너무 빨리 사라지다니. 누구도 호수에서 떠낸 한 바가지 물을 넘을 수는 없었다. 운이 좋으면, 몇 바가지 물을 호수에 돌려줄 수 있었다. 더러 그처럼 그저 엎지를 수도 있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신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호수에서 떠낸 물을 너그럽게 되돌려줄 수 있을 터였다.
늙어가는 육신은 이리 아까운데
젊음의 그림자 저리 짙어라.
술기운이 차츰 가시면서, 몸이 다시 가라앉았다. 그는 창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안 불빛이 아주 낮아지면서, 창이 투명해졌다. 별이 총총한 하늘이 그의 가슴속으로 밀려들어왔다. 어린 시절엔 하늘이 매연에 찌들어서 별을 보기 힘들었던 터라, 맑은 밤하늘은 그에게 늘 경이롭게 다가왔다.
메인 컴퓨터 화면에 떴던 ‘MISSION COMPLETED’라는 구절이 다시 떠올랐다. 그 말이 묘하게 마음에 얹혀서 자꾸 생각났다. 그랬다, 임무는 끝난 것이었다. 루시의 지놈은 만들어졌고 유전자들이 서로 부딪치지 않고 실제로 몸을 만들어낼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이제 루시는 독특한 정체성을 지닌 존재였다.
물론 다음 단계는 루시의 지놈을 실체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나 연구소의 능력을 훨씬 넘는 일이었다. 디엔에이로 지놈을 실제로 만들어서 사람의 핵을 제거한 난자에 넣고 그것을 다시 여자의 자궁 속에 넣어서 키워내는 일은 방대한 사업이었다. 난곡연구소로선 그런 일을 할 만한 자금도 기술도 없었다. 게다가 종교계의 거센 반대를 무릅써야 할 터였다.
'어쩌면 루시는 영영 컴퓨터 속에 든 정보의 패키지로 남을 수도…… 이 세상을, 햇볕이 내리고 바람 부는 이 세상을 맛보지 못하다…….'
문득 가슴이 답답해졌다. 컴퓨터 속에 갇힌 루시의 모습이, 350만 년 전에 에티오피아의 초원을 달렸던 여인이 기계 속에 갇혀 웅크린 모습이 떠올랐다.
루시는 날렵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엄지와 검지와 중지로 물건을 잡아서 오버핸드로 정확하게 던질 수 있었다. 침팬지는 아직도 언더핸드로 제대로 겨냥하지 못한 채 던지고 있었다. 그녀는 말하지 못했지만 손으로 의사를 전달할 수는 있었을 터였다.
다시 술기운의 물살에 몸이 실렸다. 그 물살이 문득 350만 년의 세월을 거슬렀다. 짙은 그리움으로 살이 시려왔다.
아득한 세상으로 흐른 그의 넋에 아련한 노래가 들려왔다.
내 갇힌 몸은 그리느니
풀밭 적시는 풋풋한 빗방울을
내 머리 스치는 소금기 밴 바람을
땀 찬 한낮의 질주를
여기 이렇게 갇혀
꼭꼭 접힌 내 넋은 그리느니
사랑했던 이들을
그들의 이름들을 목소리를
내 육신에 담긴 사십억 겨울은
사십억 여름은 그리느니
땀 밴 살에 부서지는 햇살을
바람과 서리로 풀리는 흙덩이를
9
“여기 서명하면 됩니까?” 민구는 계약서 맨 밑줄이 쳐진 곳을 가리켰다.
“네. 김 실장님께선 거기 하시면 됩니다. 위에는 소장님께서 하실 겁니다.” 행정실에서 국제 업무를 맡은 최석현이 말했다.
그는 계약서 두 부에 조심스럽게 서명했다. 목소리나 얼굴에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그는 가슴이 뿌듯했다. 자신이 만든 프로그램이 외국에 큰 돈을 받고 팔려나가는 것이었다. 그저 돈을 쓰면서 연구하는 것만 알았던 그로선 좀 얼떨떨하기도 했다.
그동안 그는 자신이 합성한 ‘루시 지놈’을 실체화할 만한 곳을 물색했었다. 일 자체가 어렵고 돈도 많이 드는 데 실용적 가치는 뚜렷하지 않았다. 게다가 실체화에 대한 윤리적 논란이 거셀 터였다. 미국에서 ‘미싱 링크’를 실체화하려는 시도는 종교계의 반대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명목적 금액만을 받고 제공하겠다고 해도, 선뜻 나서는 데가 없었다.
그가 낙심해서 포기하려는데, 중국의 제약회사에서 사겠다고 나섰다. 그것도 100만 달러를 내고서. 하얼빈에 있는 ‘동북제약’에선 유전자들의 공립성을 검증하는 프로그램에 눈독을 들인 모양이었다. 그것을 꼭 포함시켜 달라고 했다. 그래서 판매 가격은 20만 달러가 늘어났다.
“인센티브가 삼십 퍼센트니, 삼십육만 달러가 되겠네요.” 그가 건넨 계약서를 받으면서, 최가 말했다. 웃는 얼굴이었지만, 최의 목소리에는 부러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
“여러 분들이 도와주신 덕분에…… 이번에 최 대리께서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인센티브가 나오면, 내가 술 한잔…… 최 대리께는 술 한잔으론 안 되겠다.”
따라 웃으면서, 최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문이 닫히자, 그는 창가로 다가갔다. 운동장 마른 풀들을 덮은 서리를 초겨울 햇살이 힘겹게 녹이고 있었다.
“잘 시집보내는 셈이지.” 자신에게 이르고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보니, ‘동북제약’은 착실한 제약회사였다.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벤처 기업이었는데, 특허도 여럿 가졌고 야심 찬 연구 사업들을 벌인다는 얘기였다.
아득한 옛날 수연이와 함께 결혼식장에 들어서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 수연이는 그의 귀에 속삭였었다. “오빠, 고마워. 사랑해.”
결혼식장에 들어서면서, 신지도 그의 귀에 속삭였었다. “외삼촌, 고마워요. 사랑해요. 영원히 사랑할 거예요.” ‘영원히’라는 말이 그의 가슴에 길게 울렸었다. 그리 길지 않은 목숨을 가진 생명체들에겐 영원한 것은 없었다.
이제 루시를 보내는 것이었다. 상상하기 힘들 만큼 아득한 세월에 따가운 초원의 햇살 아래 땀을 흘리며 달리던 여인이 새 삶을 얻으려고 떠나는 것이었다. ‘내 팔을 잡고서. 수현이처럼. 신지처럼.’
내 갇힌 몸은 그리느니
풀밭 적시는 풋풋한 빗방울을
내 머리 스치는 소금기 밴 바람을
땀 찬 한낮의 질주를
이제 그녀는 풋풋한 빗방울도 소금기 밴 바람도 맛볼 수 있을 터였다. ‘개똥밭에서 뒹굴어도 좋다’는 이 세상을 긴 머리 날리면서 달릴 터였다.
어둑한 버추얼 땅에서
몸 웅크리고 기다리는 그대여
내 비옥한 딸이여
이제는 오라
구만리 長空에 긴 머리 날리며
내 메마른 살 적시는
號哭의 빗줄기로 오라
한숨을 길게 내쉬고서, 그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방안을 둘러다보았다. 연구소에 둥지를 튼 지 어느 새 스물아홉 해였다.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실질적으로 여기서 보낸 것이었다. 이제 이곳 삶도 루시를 시집보내는 것으로 끝난 것이었다. ‘MISSION COMPLETED’ 컴퓨터 화면에 뜬 그 구절엔 용수가 생각하지 못한 뜻이 담겼었다.
문이 열렸다. 정현이가 웃음 띤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바로 선 모습이 말할 수 없이 우아했다. 사람은 두 발로 바로 서는 동물이었다. 사람이 된 것은 몇백만 년 전 아프리카의 초원에 두 발로 바로 선 덕분이었다. 앳된 그녀 얼굴에 한순간 세 여인의 얼굴이 차례로 겹쳤다.
“실장님, 소장님께서 지금 시간이 나셨답니다.”
“그래? 알았다.” 그는 웃음 담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고왔다. 350만 년 동안의 성 선택은 루시로부터 그녀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는 하마터면 덧붙일 뻔했다. ‘참 곱다.’ 그는 책상 서랍을 열고 흰 봉투를 꺼내 웃옷 안주머니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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