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Review

지구종(種)의 세계를 꿈꾸며

김초엽의 『지구 끝의 온실』과 트러블과 함께하기

2022년 7월 통권 202호


SF가 이야기하는 이야기의 주체들


우리가 접하는 이야기는 결국 인간이 만들고, 인간들이 소비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야기에서 인간은 중요한 위치에 놓여있다. 하지만 근대 이후로 ‘인간중심적’인 사고방식과 그로 인해 발생한 수많은 부조리들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현대에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사고실험들이 이뤄지고 있다. 이야기 또한 예외가 아니었는데, 그중에서도 SF는 이러한 시도에 언제나 밀접하게 관여하고 있었다. 이 지구에서 더 이상 인간만이 의미있는 존재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지구상의 모든 개체들이 하나로 어우러져서 벽을 허물고 새롭게 정의되는 존재에 대한 새로운 정의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해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았을 때 SF 텍스트가 기존의 차가운 금속재질의 비생물 느낌으로 대표되고, 기술만능주의와 비인간적인 것에 대한 우려를 보여주던 것에서 최근 ‘인간 냄새나는’ 혹은 ‘휴머니즘적인’이라는 언표로 설명되곤 하는 이유를 새롭게 이해해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인간 냄새와 휴머니즘은 이전까지 신봉하던 의미있는 존재로서의 현생인류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다양한 행위자들이 상호연관성을 가지면서 어우러진 모습을 의미한다. 거기에는 종의 구분도 없고, 주체에 대한 위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그러한 의미의 최상위에 존재하던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가치 판단들을 배제하려는 움직임들이 오히려 강조된다.


이러한 변화는 SF의 발달 양상과도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데, 이를 현대의 한국의 SF 작가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김초엽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주체의 모습들은 시대적으로도 의미가 있는데, 우선 현시대에 대중들에게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음과 동시에 꾸준하고 열정적으로 작품활동을 개진하고 있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김초엽의 작품들을 대중적으로 소개할 때 유독 자주 등장하는 단어들이 몇 개 있다. 바로 ‘사람’. ‘인간적인’, ‘SF같지 않은’과 같은 단어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오해들이 있는데, 바로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SF 내에서의 사람 혹은 인간을 인지하고 형상화하는 방법이 계속해서 변화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김초엽의 작품에서 읽어내는 사람이나 인간에 대한 감각들은 기존의 인간중심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의미들로 읽어낼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본다면 김초엽의 작품들이 다양한 기술에 대한 사고실험과 그것으로 인해서 변화되는 생활이나 인식, 감정의 새로운 양상들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의미부여 역시 가능하다. 데뷔작이었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2019)을 지나서 『원통 안의 소녀』(2019) 이후 『지구 끝의 온실』(2021)에 이르게 되면 이러한 시도들이 더 다채로워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지구 끝의 온실』에서는 작가가 그려놓은 세계 내에서의 다양한 종들이 서로 뒤섞여 있는 의미들을 그려내고 있는데,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시각은 인간중심주의적인 세계관을 해체하고 재의미화하는 작업으로 의미화 될 수 있는 것이다.


식물-인간-기술들의 세계


『지구 끝의 온실』은 더스트로 인해서 멸망을 지나온 지구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이 암울해 보이는 멸망 이후의 지구에서 또 다른 문제현상들이 일어나는데, 바로 ‘모스바나’라는 넝쿨식물에 의해 기이한 일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들은 종말과 그 이후를 다루는 SF 텍스트에서 수도 없이 그려져 왔던 디스토피아의 단상들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이제까지 서사에서 대체적으로 주동이자 중심이었던 동물 유기체가 아니라 수동적이고 행위성이 결여되어 있는 존재로 묘사되었던 식물을 중심에 놓고 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특히 1장과 2장의 미스테리한 맥락들을 벗어나서 3장으로 돌아오면 모스바나라는 식물이 가지고 있는 의미들이 이야기의 세계 내에서 새롭게 배치되어야 함을 확인하게 되는데, 이것을 통해 기존의 인간중심적 세계관 혹은 동물 유기체 중심적인 세계관을 해체하는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서사의 진행을 통해 척박해진 환경에 적응한 우세 종을 보호하기 위해서 오염된 땅과 분리된 ‘온실’이라는 공간은 해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주지하는 것은 이러한 작가의 의도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소설 내에서 재난 상황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만들기 위해서는 식물과 인간, 그리고 과학기술들이 서로 만들어내는 밀접한 관계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이상적으로 표상된 자연도 존재하지 않고, 도구로써 훌륭하게 사용된 과학도 없으며, 그 모든 것들에 우선시되는 의미를 가진 인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소설의 세계에서 재난 혹은 테러라고 여겨졌던 식물인 ‘모스바나’는 구원의 열쇠였고, 삶을 풍요롭게 해줄 ‘도구’로서의 과학기술 역시 도구가 아닌 존재자 혹은 행위자로 자리하게 된다. 그와 함께 그 모든 것들을 활용하여 풍요로운 세상에 존재했어야 할 인간 역시 주변의 존재들과 공생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결말은 소설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러기 때문에 소설에서 마치 무용한 것처럼 여겨졌던 ‘생물 다양성’이라는 단어는 오히려 이야기의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의미가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생물 다양성을 확보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종들 간의 긴밀한 관계 맺기 뿐 아니라 생물과 비생물간의 관계 맺기도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식물-인간-기술이 동등하게 서로에게 작용하여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낸 것인데, 모스바나로 인해서 재난적 상황이 해결된 세상을 설명하는 결말부에서 이러한 의미를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모스바나는 자연인 동시에 인공적인 것이지요, 모스바나를 이루는 구성 요소들은 모두 자연에서 왔고, 그것은 인위적인 개입에 의해 모스바나라는 총체가 되었으며, 다시 자연의 일부로 진입했습니다. 인간이 모스바나를 이용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반대로 모스바나가 인간을 이용했다고 볼수도 있을 겁니다. 둘은 분리할 수 없고, 분리할 필요조차 없는 것입니다. 분명한 건 모스바나는 인간에게 적응하는 전략으로 그 종의 번영을 추구했고, 인간은 모스바나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는 사실입니다. 모스바나와 인간은 일종의 공진화를 이룬 셈입니다.” (김초엽, 『지구 끝의 온실』, 자이언트북스, 2021, 371쪽.)


결국 인류가 모스바나와 함께 공진화하는 형태로 재난적 상황들을 해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좀 더 흥미로운 지점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기술의 활용 혹은 개입을 수행한 것 역시 이러한 공진화의 영역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캐서린 헤일즈는 공진화를 설명하면서 단지 유전자에 의해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과 신경을 구성하는 문화와도 관계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기 때문에 유기체와 기계 간의 구분이 해체되고, 다양한 종이 주체성을 가지고 기존의 인류와 함께 존재하는 것에 대한 가치들이 중시될 것이라 예견했다. 또한 질베르 시몽동은 이를 통해 개체초월적 집단화를 현실화 시킬 수 있는 능동적이고 전-개체적인 에너지를 강조했는데, 『지구 끝의 온실』에서 보여주는 인간과 모스바나의 공진화가 바로 이러한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소설이 보여주는 유토피아적 지향점은 식물-인간-기술을 연결하는 다양한 개체들이 ‘서로 함께-되기’를 수행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지구종(種)의 세계에서 트러블과 함께하기


서로 함께-되기는 도나 해러웨이가 이야기한 트러블과 함께하기의 맥락과 닿아 있는데, 김초엽의 소설 『지구 끝의 온실』도 마찬가지이다. 해러웨이는 인류세의 시대 담론의 한계들을 지적하면서 모든 것들이 서로 뒤엉켜 있고 그것에 반응하면서 관계 맺고 살아가는 개념의 중요성을 제시했다. 여기에는 종들 간의 구분이나 우위도 존재하지 않고 퇴비 더미와 같이 하나의 거대한 군집을 이루어 그 안에서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트러블들을 마땅히 감내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더스트로 인해서 멸망한 세상에서의 생존의 가능성도 이와 같은 모습들에서 발생한다. 특히 모스바나와 보여주는 종을 초월한 변화와 진화의 과정은 트러블과 함께하면서 만들어낼 수 있는 가치에 대한 일종의 표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특히 이 소설이 팬데믹을 지나면서 발표되었다는 것은 시대적인 상황에 비추어 보았을 때 주목해 볼만하다. 팬데믹은 결국 인간이 자연과의 관계 맺기에 실패하면서 발생한 전지구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바이러스와 인간의 새로운 관계맺기에 대한 시도는 2년 여 동안 계속되었고 그 사이에 우리는 우리들의 삶의 방식과 방향이 이전과는 달라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체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달라진 방향에는 바이러스를 비롯한 수많은 지구상의 개체들과 우리가 밀접하게 관계 맺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그러한 방법들을 새롭게 점검해 보아야 한다는 인식들이 포함된다. 이러한 현실에서 『지구 끝의 온실』은 그러한 관계 맺기 방법을 SF적 상상력과 경이감의 세계를 통해 보여준 훌륭한 사고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작가의 말을 통해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김초엽은 “우리가 이미 깊이 개입해 버린, 되돌릴 수 없는, 그러나 우리가 앞으로 계속 살아가야 하는 이곳 지구를 생각했다.”라고 밝히고 있다. 기후 위기의 시대, 팬데믹을 거치면서 드러나 버린 돌이킬 수 없는 시대의 변화에 대해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이야기는 다양한 존재들이 뒤엉켜서 트러블을 일으키며 살아가고 있는 거대한 덩어리로서의 지구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이다. 현대의 지구에서 인간은 더 이상 만물의 영장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그러한 오만함을 내려놓고 객체에 머무른다고 생각했던 식물이나, 도구라고 여겼던 기술들과도 새롭게 관계 맺기를 해 지구에 사는 모든 종, 즉 지구종들의 세계가 될 때 우리에게도 비로소 미래가 열린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것이 단순히 형이상학적인 인식체계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적인 필요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더욱더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필요할 터인데, 이 지점에서 SF는 훌륭한 예시가 되어준다. 그리고 이러한 필요를 채워주는 작품들을 한국어로 만나볼 수 있다는 것 역시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김초엽의 작품들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인간’이라는 언표에 대한 사고의 확장은 앞으로도 한국 SF 작품의 궤도 내에서도 유의미하게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후로도 김초엽의 작품 내에서 계속해서 열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지구종들의 트러블과 함께하기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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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용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