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FI

숲 <1부>

2021년 9월 통권 192호


(일러스트레이터: 박재령)

<1부>


“대위님, 궤도 진입했습니다.”

조종사 역할을 맡은 마마르 울지 소위가 윤을 돌아보며 말했다. 진한 녹색의 행성이 조종실의 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윤은 손톱을 깨물며 지그시 구름으로 덮인 행성을 바라보았다. 마치 지상의 움직임을 꿰뚫어 볼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에흐진과 보나, 티르민이 말없이 윤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윤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궤도 유지하면서 착륙 지점 확인해. 중력제어 엔진은 이상 없지?”

“그럴 겁니다. 이상이 있어도 어차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그냥 여기서 죽는 거죠.”

정비 특기인 에흐진 상사가 대답했다. 

“다들 아는 얘기를 뭐하러 또 하고 그래요. 거 성격 하고는 참….”

티르민 중사가 분위기를 바꿔 보려는 듯이 빙글거리며 말했다. 에흐진이 티르민를 노려보았다. 

“아, 왜요? 또 갈구시려고요? 이제 우리 다 군인도 아닌데 그러지 맙시다.”

“무사히 각자 갈 길을 갈 수 있으려면 그때까지는 지휘 체계를 유지하는 게 좋을 거라고 말했을 텐데?”

에흐진이 말하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서려는 것을 윤이 막았다. 

“그만들 해. 지금은 우주선을 수리하고 물자를 보급하는 게 더 급해. 싸우는 건 나중에 개인적으로 하라고.”

“나중에는 싸울 일이 없겠죠. 볼 일이 없을 테니까.”

티르민가 능글거리며 조종실을 나가버렸다. 

“여기 아무도 없는 거 맞겠죠?”

마마르가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발견된 지 얼마 안 된 행성에다가 전략적으로 전혀 중요하지 않은 위치라 아무도 없을 거야. 토착 생명체를 관찰하는 연구소가 하나 있었는데, 전쟁이 터지면서 전부 철수했다고 하더군.”

“그래도…, 누가 쫒아오기 전에 빨리 여길 뜰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일단 공간도약을 하고 나면 추적이 불가능한 거 알잖아? 이 시국에 탈영병 몇 명 잡겠다고 연합의 행성을 다 뒤질 리는 없겠지.”

“그래도 저희는 최신형 우주선을 갖고 도망친 거라….”

“적군에게 투항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해 주기를 바라자고. 연구소 주위를 관찰할 수 있으려면 얼마나 있어야 하지? 그때까지 좀 쉬어 둬.”

과학 연구를 목적으로 궤도에 올려둔 인공위성이 하나 있었지만, 우주선에서는 접속이 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우주선 시야를 이용해 지상을 살펴야 했다. 

얼마 뒤 연구소가 있어야 할 위치를 관찰할 수 있었다. 가장 큰 대륙의 남반구 중위도 부근이었는데, 온통 나무로 뒤덮여 있어 건물이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만 간신히 확인할 수 있었다. 

마마르가 열심히 지상을 살피며 착륙할 만한 지점을 찾아냈다. 연구소에서 몇 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폭이 100~150미터인 긴 띠 모양의 공터가 있었다. 반대 방향에는 멀지 않은 곳에 강이 있었다. 

“희한하네요. 숲에 왜 저렇게 넓은 길 같은 게 생겼지?”

“거대 괴수가 다니는 길 아니에요? 야물론 행성에 있는 그 괴물처럼.”

언제 다시 나타났는지 티르민이 등 뒤에서  깐죽거렸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그런 게 있으면 여기는 진작에 유명했겠지.”

지금껏 조용히 있던 에르덴 보나 중사가 한 소리 했다. 

착륙은 순조로웠다. 다행히 땅이 무르지 않아서 우주선은 내려앉을 때 그대로의 자세를 유지했다. 아침에 해당하는 시각이었다.  한숨 돌리고 나자 윤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지시를 내렸다. “일단 기본 정보 재확인. 이 행성은 거주적합도에서 상에 해당하는 곳으로 호흡이 가능하다. 현재 외부 기온도 적당해. 과학자들이 몇 년 머문 적도 있으니 며칠 정도 있다 가는 데는 무리가 없을 거야. 먼저 경계선 설정하고 드론 보내서 외부를 정찰해. 다섯 시간 동안 대기하면서 상황파악한 뒤에 활동한다. 그동안 상사는 손상 부위를 확인하고 고칠 수 있는 건 고쳐봅시다.”

에흐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에 수상한 게 없으면 마마르와 티르민은 강까지 호스를 연결하고, 보나는 나와 연구소로 가서 쓸만 한 게 있는지 살펴보자고.”

원래는 인적 없는 행성에서 물 정도나 보충하고 잠시 숨어 있다 움직일 생각이었는데, 도주하는 과정에서 공격을 받는 바람에 우주선에 약간 손상을 입었다. 보금품과 에너지캡슐도 일부 잃고 말았다. 그 상태로도 계획대로 움직일 수는 있었지만, 저번처럼 추적대를 만나는 등의 사건이 생기면 끝장이었다. 아슬아슬한 것보다는 확실히 하는 게 나았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윤이 아는 사람을 통해 우주선을 팔고 각자 새로운 신분을 얻을 계획이었다. 공간도약과 행성 이착륙이 모두 가능한 신형 군용기라 암시장에서 괜찮은 값을 받을 수 있었다. 

“혹시 모르니까 무장 챙기고 경계 철저히 하도록!”

윤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일행의 등 뒤에 대고 외쳤다.

“해로운 미생물 같은 건 없나요?”

보나가 장비를 챙기며 물었다. 보나는 키가 크고 시원시원하게 생긴 여성으로, 뭐든지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습관이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없어. 보호장비 없이도 생존 가능하다고 되어 있으니까. 그래서 여길 고른 거야.”

“알겠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정찰 결과 별다른 움직임이 없자 각자 할 일을 하러 갔다. 마마르와 티르민은 장비실에서 펌프와 호스, 필터를 챙겼다. 강까지의 거리는 50미터 남짓이었다. 우주선과 강 사이에는 울창한 숲이 있었지만, 물을 끌어오기에 어려운 지형은 아니었다. 연구소를 찾아 연료와 쓸모 있을 만한 장비만 챙기면 오래 머물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손상을 입고도 여기까지 무사히 왔으니 조금만 손 보면 두세 번의 도약쯤은 무리가 아닐 터였다. 

에어록 문이 열리고 외부 공기가 들어오자 윤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이내 천천히 숨을 들이키자 시큼한 냄새가 옅게 났다. 그 외에는 호흡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몇 번 크게 들이쉬자 냄새도 금세 의식하지 않게 되었다. 

우주선이 내려앉은 땅 위에는 바싹 마른 나무와 풀의 잔해가 쌓여 있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버석거리는 소리와 함께 잔해가 부스러져 먼지가 일었다. 

그 뒤를 따라 보나가 경사로를 내려왔다. 

“육식동물은 있을 수 있겠지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가능성은 있지. 강화복을 갖고 오지 못해서 아쉬운걸. 최대한 조심하자고.”

윤은 팔뚝의 디스플레이 패널에 궤도를 돌 때 촬영한 지상 사진을 띄우고 현재 위치와 목적지를 표시했다. 숲속에 들어가면 정확한 지도가 소용 없으니 자기장과 태양의 위치를 이용해 방향을 잡고 내장된 거리계로 이동 거리를 살피며 움직여야 했다. 

윤과 보나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왜 여기만 이렇게 식물이 다 말라 죽었을까요?”

보나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두 사람이 향하고 있는 방향에는 나무와 풀이 울창한 숲이 있었고, 등 뒤에도 비슷한 숲이 있었다. 하지만 양 옆으로는 시선이 닿는 곳까지 말라 죽은 식물로 덮인 다소 메마른 풍경이 이어지며 두 숲을 갈라놓고 있었다. 

“글쎄.”

윤은 무심하게 대답하며 연구소가 있어야 할 방향을 주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발에 단단한 게 밟히며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흠칫 놀라 아래를 살펴보니 동물의 뼈였다. 숲 가까이 가는 동안 식물의 잔해에 덮인 몇몇 동물의 뼈를 더 찾을 수 있었다. 

곧 숲이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나무가 빽빽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무와 나무 사이의 땅에는 무릎 높이까지 오는 풀이 조밀하게 나 있었다. 나무는 잎에서부터 줄기까지 모두 초록색이라 특이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나무 줄기와 가지까지 가늘고 긴 잎으로 빽빽하게 덮여 있었다. 그래서 실제보다 나무가 한참 더 굵어 보였다. 그리고 나무 꼭대기 근처에는 아래쪽과 달리 넓은 잎이 달려 태양빛을 풍성하게 받고 있었다. 

숲의 경계에 이르자 근처의 메마른 땅 위로 어린 나무로 보이는 식물이 군데군데 튀어나와 있는 게 보였다. 가장자리일수록 어린 나무들인지 키가 작았다.  

“에흐진, 들리나?”

윤이 통신기에 대고 말했다. 

“네, 들립니다.”

“나와 보나 중사는 이제 숲으로 들어가 연구소를 찾는다. 30분 간격으로 통신 연결 확인하고, 이상이 생기면 즉시 보고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윤이 통신기를 집어넣고, 보나에게 고갯짓했다. 

두 사람은 숲속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머리 위에서 기묘하게 생긴 날짐승 몇 마리가 푸드득거리며 날아갔다. 

“풀 속에 뭐가 있을지 모르니 조심해.”

윤이 말하자 보나는 어떻게 조심할 수 있냐고 생각하면서도 고개만 끄덕였다. 숲 속으로 들어가자 시큼한 냄새가 아까보다 진하게 느껴졌다. 걸어가는 동안 몇 차례나 작은 동물이 도망치는 듯 수풀이 흔들렸다. 먼 발치서 개 정도 되는 크기의 동물을 여러 번 보기도 했다. 크기도 크기거니와 생김새가 초식동물 같아 크게 위협은 되지 않을 듯했다. 눈에 띈 동물들은 대개 윤과 보나를 조심스럽게 바라보기만 하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공기가 시원하기는 한데 냄새 때문에 상쾌하지는 않군.”

윤이 중얼거리자 보나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처음 와 보는 행성이니까요. 숨을 쉴 수 있는 게 어디에요.”

“그렇긴 하지. 어서 여기를 떠서 각자 갈 길을 가면 좋겠군.”

“그러게요. 전쟁은 너무 지겨웠어요.”

“전쟁은 누구나 지겹지.”

“팔다리가 잘린 채로 우주선 밖으로 빨려나가는 꼴도 보기 싫고, 이름도 복잡한 독가스에 얼굴이 녹아내리는 꼴을 보는 것도 싫어요. 어차피 해꼬지 당할 가족도 없으니 도망이라도 쳐서 더러운 꼴 그만 보고 살아야죠.”

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보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일까. 각자 사정은 조금씩 달라도 전쟁이라고 하면 이제 치가 떨리는 건 마찬가지였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어디선가 짐승들이 내는 소리가 간간이 들리는 것을 빼면 상당히 고요했다. 어쩌면 숲속 동물들이 인간이라는 낯선 동물을 보고 피하는 걸지도 몰랐다. 과거에 과학자들이 이 숲을 거닐기는 했겠지만, 인간에게 익숙해질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지형에 굴곡이 조금 있었지만, 기울기가 완만해서 걷기는 쉬웠다. 바위가 드러난 지형을 빼고는 숲 전체가 무릎 높이의 풀로 덮여 있는 것 같았다. 이곳의 초식동물들은 먹이 걱정은 없어 보였다. 

도중에 에흐진이 우주선 쪽 상황은 이상 없다고 한 번 보고했다. 좀 더 이동하자 얕은 개울이 나왔다. 물을 건너자 이번에는 비교적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타났다. 이 작은 언덕을 넘어가면 연구소가 보여야 했다. 

나무와 수풀은 언덕 위까지도 고르게 퍼져 있었다. 가벼운 운동이었지만, 두 사람의 호흡이 살짝 빨라졌다. 혹시 몰라 항상 전방을 향하고 있던 총도 어느새 어깨에 걸쳐매고 있었다. 

언덕 꼭대기에 다다를 무렵 앞쪽의 풀숲에서 작은 머리통 하나가 불쑥 솟아올랐다. 윤이 서둘러 어깨에 매고 있던 총을 그쪽으로 겨눴다. 주둥이가 길쭉한 그 동물은 잠시 윤과 보나를 응시하더니 토끼처럼 통통 뛰어 옆쪽으로 움직였다. 풀숲 위로 드러난 몸통이 통통하고 연약해 보여 두 사람은 마음을 놓았다. 토끼 같은 녀석은 시선을 인간에게서 떼지 않은 채 멀어져 갔다.

윤은 경계를 풀며 총을 다시 어깨에 매려는 순간 등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자 날카로운 이빨이 눈에 들어왔다. 다급히 총을 내밀어 두 턱 사이로 욱여넣었다. 보나는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다. 비명을 지르는 보나의 옆구리에 악어처럼 납작하지만 억센 다리가 있는 동물이 달라붙어 있었다. 윤은 총을 흔들었지만, 상대는 아가리를 단단히 다문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급한 대로 총을 내던지고 보나의 옆구리에 달라붙어 있는 녀석을 발로 차 떨어뜨렸다. 

보나가 풀썩 주저앉았다. 윤은 다시 총을 주우려 했지만, 풀이 너무 빼곡해서 찾을 수가 없었다. 찾았다 해도 주워들 새가 없었다. 세 방향에서 수풀이 흔들리며 둘을 향해 다가왔다. 윤은 재빨리 보나를 부축해 일으켜세우고 움직였다. 보나가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풀이 흔들리는 쪽을 향해 총을 갈겼다. 맞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흔들림은 일단 멈췄다. 

윤은 그 틈을 타 최대한 멀리 움직였다. 일단 여기까지 왔으니 돌아가는 것보다는 가까운 연구소로 향하는 게 더 나은 판단 같았다.빨리 찾을 수만 있다면.

 저 쪽에서 수풀이 다시 움직였다. 수는 그대로였는데, 아까보다 간격이 더 멀었다. 다행히 연구소 쪽 방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윤은 그쪽으로 비틀거리는 보나를 이끌었다.

윤이 재빨리 디스플레이를 보고 방향을 확인했다. 

“총은 나를 줘. 뛸 수 있겠어?”

보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디스플레이가 가리키는 방향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몇백 미터 안쪽에 있어야 했다. 

“가자!”

윤이 보나를 이끌고 달리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수풀이 다시 추격을 시작했다. 꼭대기 쪽에도 한 마리가 있어서 둘은 아래쪽의 능선을 넘어가야 했다. 능선을 넘어가자 내리막이 펼쳐졌다. 여전히 건물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뒤 흔들리는 숲속 풍경 속에서 잠시 뭔가 반짝였다. 

‘저기다.’

두 사람은 간헐적인 사격으로 시간을 벌며 태양빛을 받아 반짝이는 구조물을 향해 달려갔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나무 줄기 사이로 엿보이는 건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금속 패널로 만들어 놓은 건물은 다행히 온전했다. 진한 녹색의 나무와 풀 사이에서 여전히 반짝이며 빛났다. 하지만 눈앞에 나타난 벽에는 문이 보이지 않았다. 이질적인 건물의 모습 때문인지 정체 모를 동물 무리는 더 이상 가까이 오지 않았다. 약간 먼 거리에서 풀숲이 천천히 흔들리는 모습만 보였다. 

문은 다른 방향으로 나 있는 모양이었다. 윤과 보나는 사방의 풀숲을 경계하며 건물을 빙글 돌았다. 건물은 커다란 ㄱ자 모양이었다. 마침내 문이 보였다. 윤은 문이 열려 있기를 바랐다. 

열려 있었다. 

문을 열며 뒤를 돌아보는데 20미터쯤 떨어진 나무 뒤에서 거대한 동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 발로 걸어오는 동물의 무지막지한 어깨를 보는 순간 상대해서는 안 되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윤은 보나를 안으로 밀어넣고 재빨리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아걸었다. 그 괴수가 밀고들어와도 문이 버텨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문을 부수려 들지는 않았다. 

윤은 문에 난 창으로 바깥을 살피며 우주선에 있는 에흐진에게 연락했다. 

“상사, 마마르와 티르민이 밖에 있으면 바로 우주선으로 철수해서 대기하라고 해. 우리는 공격을 받았다.”

“누구의 공격입니까? 추적대입니까? 적의 기지가 여기 있습니까?”

“아니다. 숲속에 맹수가 있어.”

밖에서는 거대한 맹수가 계속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수풀 속에 바짝 엎드려 따라오던 작은 동물은 보이지 않았다. 

보나는 벽에 기대 앉아 허리를 누른 채 간간이 신음했다. 윤은 에흐진에게 당분간 경계를 철저히 하라고 지시한 뒤 보나의 상태를 살폈다. 

“살이 좀 찢어지긴 했는데, 다행히 깊이 파이진 않았어요.”

윤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에 의지해 복도를 따라 걸으며 의무실을 찾았다. 의무실 캐비닛에서 찾은 구급상자를 갖고 돌아오자 보나가 받아들었다. 

“상처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대위님은 여기가 안전한 지 좀 살펴주세요.”

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건물 내부를 수색하는 동안 수상한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았다. 창문은 유리가 아닌 강화 플라스틱이라 어지간해서는 깨질 것 같지 않았고, 하나 더 있는 출입구도 단단히 잠겨 있었다. 윤은 기계실을 찾아 장비를 확인했다. 발전기를 조금 만져주니 건물에 전력이 돌아왔다. 방치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창고에는 여분의 연료도 있었다. 그 외에도 사용기한이 남은 멸균포장식품, 음식출력기 원료, 전자기기와 기계류를 수리할 수 있는 부품과 도구가 있었고, 약간이지만 우주선에서 쓸 수 있는 에너지캡슐도 남아있었다. 

“좋아. 기대보다 쓸 만한 게 좀 있어. 상처는 좀 어떻지?”

윤이 다시 돌아와 말했다. 보나는 어느새 일어서서 총을 들고 창밖을 살피고 있었다. 

“그냥 긁힌 정도예요. 혹시 몰라 항생제도 주입했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그나저나 어떻게 돌아가죠? 더 늘어났는데요?”

윤이 다가와 창문을 내다보았다. 마지막에 봤던 거대 맹수가 한 마리 더 늘어나 있었다. 둘은 멀찍이 떨어진 채 나무 그늘에 앉아서 간간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풀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니 처음에 둘을 공격했던 녀석들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듯했다. 건물 반대쪽으로 가서 창밖을 보니 그쪽도 비슷했다. 

“저 놈들 뭐죠? 우리를 먹이로 보는 건가요?”

보나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글쎄. 예전에 사람 맛을 본 적이 있나? 저렇게 둘러싸고 있으니까 포위당한 기분인걸?”

“기분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거예요.”

아닌게 아니라 그랬다. 저렇게 몰려와서 진을 치고 먹이를 노릴 수도 있는 건가? 이곳 동물의 습성을 모르니 무슨 상황인지 정확히 알기 어려웠다. 

현재 가진 무기는 하나. 둘이서 저 많은 짐승을 뚫고 갈 수는 없었다. 적당히 위협해서 쫓아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까의 경험으로 봐서 안 되지 싶었다. 우주선에 보급품을 가져가기는커녕 살아서 갈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그때 에흐진이 나쁜 소식을 전해왔다.

“대위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마마르 소위가 죽었습니다. 호스는 이미 설치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동물에게 습격당했다고 합니다. 티르민은 무사히 귀환했습니다.”

윤은 잠시 생각했다. 충분히 경계했다고 생각했는데, 오판이었다. 

‘드론 정찰할 때는 이것들이 어디에 숨어 있었지?’

위험 요소가 없는 행성으로 기록이 되어 있어서 방심한 탓도 있었다. 발견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충분히 조사가 안 되어 있을 뿐인데. 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우주선 조종은 티르민이 대신할 수 있으니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건 아니었지만, 살겠다고 도망치다가 허무하게 이렇게 되었다는 데서 울컥 짜증이 치밀었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밤이 올 거야. 연구소 안에 있으면 우리는 안전하니까 일단 밤을 지내고 내일 아침에 다시 움직이자고. 가능한 중무장을 하고 와줘야 할 거야.”

밤이 오기까지는 시간이 좀 있었다. 윤은 시설 내부를 좀 더 자세히 살폈다. 구조는 단순했다. 길게 나 있는 복도를 따라 방이 여럿 놓여 있었다. 개인침실과 연구실, 휴게실, 의무실, 창고, 기계실이 전부였다. 윤은 각 방의 문을 열고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의무실에서 쓸 만한 약품을 더 챙긴 뒤 보나에게 갔다. 보나는 그나마 깨끗해 보이는 침실 하나를 찾아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마마르 소위는 처음 봤을 때부터 오래 못 살 것 같았어요. 인상이나 느낌이나….”

보나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꼭 챙겨야 할 사람이 있다고 해서 데려온 건데. 차라리 그냥 두고 올 걸.”

“그러면 우리가 잡혀서 처형당했겠죠. 계획을 알게 된 순간 선택의 여지는 없었어요.”

둘은 한동안 말없이 앉아있었다. 이윽고 보나가 천천히 일어서며 말했다. 

“밤에는 안전할까 모르겠네요. 이 안에 짐승들이 들어온 흔적은 없어 보이지만.”

“혹시 연구실에 뭐라도 있나 가서 보자고.”

윤과 보나는 연구실로 향했다. 이곳에 있던 과학자들도 전쟁이 터지면서 급히 철수한 터라 상당수의 장비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쌓인 먼지를 적당히 치우고 컴퓨터를 켜 보니 전원이 들어왔다. 둘은 각자 컴퓨터 한 대씩을 맡아서 파일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 파일 정리 개판이네.” 보나가 투덜거렸다. “그래도 없애진 않은 것 같네요. 사진하고 영상 자료가 많은데….”

“과학자니까. 군인하고는 다르지. 군인은 보안이 생명이지만, 과학자는 공유가 중요할 거야.”

“해부 영상이 잔뜩 있네. 이 사람은 이런 걸 연구했나 봐요.근데 이런 걸 본다고 약점 같은 걸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거긴 어때요?”

“여긴 일지랑 보고서 위주야. 어느 지역에 개체수가 어쩌고, 식생이 어쩌고, 이동 패턴이 어쩌고…. 보기만 해도 골치 아프군.”

윤은 컴퓨터를 내버려두고 일어섰다. 

“이걸 본다고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군. 그보다 푹 쉬는 게 중요하겠어. 내가 먼저 경계를 볼 테니 보나 중사가 먼저 잠을 자도록 해.”

육식동물이 밤에 더 활발히 움직일 가능성이 있었다. 윤은 야전식량을 씹으면서 건물에 있는 창문을 하나씩 돌며 밖을 관찰했다. 해가 지자 밖은 완전히 깜깜해져 야시경을 써야 했다. 상황은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윤은 날이 밝아 지원이 온다 해도 과연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 들었다. 

두 사람은 날이 밝을 때까지 번갈아 가며 잠을 청했다. 새벽이 되자 통신기가 울렸다. 에흐진이었다. 

“대위님, 여기 상황이 좀 이상합니다.”

윤은 얼른 통신기를 집어들었다. 

“무슨 일이지?”

“갑자기 숲에서 동물들이 나타났습니다.”

“우주선을 위협하고 있나?”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에흐진이 머뭇거렸다. 

“짐승들이 떼로 나타났다고요!”

티르민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에흐진이 성을 내는 소리가 들리면서 통신이 잠시 끊겼다. 그때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보나가 창문을 내다보더니 동물들이 떠나고 있다고 말했다. 

윤이 확인해 보니 정말이었다. 연구소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동물들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었다.  먼 발치로 덩치 큰 맹수가 서둘러 뛰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밤새 외부를 관찰하고 있었는데, 날이 밝자 강가 쪽 숲에 갑자기 동물들이 나타났습니다. 그 수가…, 수백 마리는 될 것 같습니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면 그보다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다시 에흐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백 마리가 뭘 하고 있지?”

순간 윤은 흉포한 짐승 무리에 포위된 우주선을 떠올렸다. 

“전진합니다.”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신속하게 앞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양 옆으로 나란히 줄을 맞춰서요. 이건 뭐랄까…. 이해가 안 갑니다.”

“계속 보고해.”

“저희 우주선은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강가쪽 숲에서 나와 반대쪽 숲으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윤은 들으면서도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동물들이 대오를 맞춰서 움직인다고? 설명하는 에흐진도 황당하긴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저게 뭘 하는 거지?

“에흐진 상사?”

“아, 예. 앞서 간 동물들이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습니다. 정확히는 반대쪽 숲 경계를 파헤치고 있습니다. 풀을 죄다 갈아엎는 모양샙니다. 그리고 또 다른 동물은…. 저게 뭐지? 아, 나무를 갉아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먹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우와! 나무가 넘어졌어!”

배경으로 티르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시 에흐진이 말했다. 

“속도가 대단히 빠릅니다. 여기저기서 나무가 쓰러지고 있습니다.”

‘뭘 하는 거지? 우리가 착륙해서 무슨 짓을 한 건가?’

“어? 갑자기 동물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습니다. 아,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숲에서 털 난 악어 같은 게 나와 땅을 파던 녀석들을 공격합니다. 사냥은 아닌 것 같은데…. 이게…, 설명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이리 내 봐.”

티르민이 통신기를 빼앗아 든 모양이었다. 

“대위님? 강쪽에서도 비슷하게 생긴 놈들이 나와서 돌진하고 있어요. 한 판 붙으러 가는 모양인데. 오, 진짜다. 아까 놈들은 초식이었고, 이놈들은 육식인가 봐요. 숲과 숲 사이의 공터에서 한 판 붙었어요. 수십, 아니 수백 마리가 뒤엉켜 싸우고…, 와, 저건 뭐야? 덩치가 와…. 그 어느 행성이더라…, 하여튼, 그 바위곰을 닮은 놈들이 있어요. 우와, 저 놈이 후려치니까 털 난 악어 같은 게 몇 마리씩 날아가 버리는데? 어디? 저쪽? 아, 진짜네? 대위님? 반대편에서도 비슷한 놈들이 나왔어요. 오, 이제 비슷한 놈들끼리 붙는다! 거대한 놈 둘이 맞붙어서 싸워요. 와, 이건 눈으로 봐야 하는 건데. 이거, 이거, 이거 여기 완전 전쟁터인데요? 장수와 졸병들이 한바탕 싸우는 것처럼….”

티르민이 아무렇게나 내뱉는 설명이 오히려 더 이해하기 쉬웠다. 짐승 수백 마리가 서로 편을 갈라 한 판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윤이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쓰는 사이에 보나가 문을 열어 밖을 보면서 말했다. 

“대위님, 지금이라면 여기서 나갈 수 있는데요?”

보나의 말을 듣고 밖을 보니 정말 그랬다. 

“여기 있던 놈들이…, 저 쪽으로 싸우러 간 건가?”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이 숲이 자기들 영역인가 봐요.”

“보통 동물이면 한 마리 아니면 한 무리가 영역을 갖는 거 아냐? 여러 동물이 한 영역을 가질 수도 있는 건가?”

“그건 모르겠고. 어떻게 하실래요?”

“일단 가자.”

일단은 우주선에 돌아가서 계획을 다시 세우는 게 나을 듯했다. 

윤과 보나는 연구소 문을 잘 닫아 놓고 우주선 쪽으로 움직였다. 우주선 주변이 난장판이 됐다고 해서 일단 약간 멀리 둘러간 뒤 상황을 보기로 했다. 동물들은 전부 싸움터로 향했는지 돌아가는 길에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윤의 판단은 틀렸다. 

싸움은 우주선 근처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멀리서 우주선과 그 주위의 싸움을 본 윤과 보나는 싸움이 없는 곳으로 피하기 위해 꽤 한참을 옆으로 돌았지만, 싸움은 꽤 긴 전장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숲 경계에는 처음 보는 작은 동물이 집단으로 모여 있었다. 처음에는 깜짝 놀라 한 자루밖에 없는 총을 겨눴지만, 이들은 슬금슬금 물러나기만 하고 위협적인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앞발이 억세고 발톱이 튼튼해 보였다. 그 사이사이에 앞니가 굉장히 발달된 동물이 섞여 있었다. 이 녀석들이 땅을  파헤치고 나무를 갉는다는 종류인 듯 싶었다. 

“대위님, 들리십니까?”

에흐진이었다. 

“들린다. 우주선이 보이는 곳까지는 왔는데, 가까이 가기가 어렵다. 여기서 대기하면서 상황을 보겠다.”

“네, 이 근처는 싸움이 끝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연구소쪽 숲에서 나온 무리가 밀려나고 있습니다.”

근처에 바위가 드러난 비교적 높은 지형이 있었다. 윤과 보나는 그곳으로 올라가 바위 사이에 몸을 숨기고 싸움터를 관찰했다. 에흐진의 말대로였다. 겉으로만 봐서는 두 진영을 구분할 수 없었지만, 일부 동물이 두 사람이 있는 방향으로 도망치고 다른 동물들이 그 뒤를 쫓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아직 그 사이를 뚫고 우주선에 접근하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숲 경계에 우글우글 모여 있던 동물들이 일제히 안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소위 ‘최전선’은 숲 안쪽까지 들어오고 있었다. 이게 정말로 두 숲 세력의 싸움이었다면, 연구소쪽 숲의 패배가 분명해 보였다. 

“뛰자.” 

최전선이 숲 안쪽으로 들어오자 그 뒤로 공백 지역이 생겼다. 윤과 보나는 재빨리 바위 사이에서 빠져나와 그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윤이 총을 들고 앞장섰고, 보나가 뒤를 따랐다. 싸움에 정신이 팔린 짐승들을 재빨리 지나쳐 숲을 빠져나갔다. 그곳에는 다른 동물의 무리가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시체를 짓밟으며 나란히 밀려오고 있었다. 윤은 앞길을 가로막은 동물 몇 마리를 쏘았다. 총 소리가 울려퍼지자 순간 근처의 모든 동물이 움찔하며 동작을 멈췄다. 

우주선의 문이 열리며 에흐진이 나와 지원 사격을 시작했다. 근처의 동물들이 재빨리 흩어졌다. 

“상사, 조심해!”

윤이 외쳤다. 우주선 밑에서 털 달린 악어가 뛰어오르며 에흐진을 공격했다. 에흐진이 황급히 물러서는 게 보였다. 하지만 서너 마리가 더 나타나 문을 향해 뛰어올랐다. 

그리고 우주선 뒤편에서 바위곰 같은 맹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사, 문 닫아!”

문이 닫히자 바위곰은 시선을 윤과 보나에게 돌렸다. 

“아, 이런 젠장.”

우주선까지 가기는 틀린 모양이었다. 달려오는 맹수를 피해 둘은 다시 숲속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숲속에서도 여전히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둘은 날아오는 이빨과 발톱을 몇 차례 피하며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윤이 뒤를 돌아보는데, 추격자가 바로 뒤에서 달려들려는 참이었다. 급한 마음에 총을 내갈겼다. 몇 발이 적중하며 전진을 늦췄지만, 그뿐이었다. 

앞서 뛰던 보나가 갑자기 멈추는 바람에 윤은 보나와 부딪치며 뒤엉켜 넘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눈앞에 맹수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둘을 쫓아오던 그 녀석이 아니었다. 고개를 돌리니 그 녀석은 그쪽에 있었다. 윤은 보나를 끌어안고 재빨리 옆으로 굴렀다. 

두 괴수가 포효하며 부딪쳤다. 털 달린 악어 몇 마리가 다가와 주위를 맴돌더니 기회가 생길 때마다 싸우고 있는 두 괴수를 공격했다. 가만히 보니 총에 맞아 체액이 흐르고 있는 녀석을 돕는 모양새였다. 윤은 총을 주워들고 조그만 녀석들을 처치했다. 동작이 빨랐지만, 다른 곳에 신경 쓰고 있는 놈들을 맞추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커다란 두 맹수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에 승부가 갈렸다. 총에 맞아 약해진 놈이 먼저 쓰러졌다. 승리자가 윤과 보나를 향해 돌아보았다. 어느 새 털 달린 악어들이 달려와 두 사람을 둘러싸고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윤이 총을 겨누었다. 

“잠깐만요.” 보나가 윤을 제지했다. “잠깐만요.”

잠시 망설이는 사이에 동물들이 잠잠해졌다. 갑자기 분위기가 일변하는 느낌이었다. 그때 강쪽 방향에서 동물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저쪽 숲에서 계속 밀고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윤이 중얼거리며 그쪽을 향해 총을 쏘았다. 몇 마리가 달려오다가 넘어졌지만, 역부족이었다. 휴대하고 있는 탄약도 떨어져가고 있었다. 

“연구소로.”

둘은 다시 연구소의 방위를 확인하고 그쪽으로 뛰었다. 이쪽 숲의 동물들도 다함께 섞여서 도망쳤다. 윤은 어떻게 된 건지 대강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이쪽 편을 든 셈이 됐군”

다시 연구소로 돌아왔다. 윤의 추측대로 윤이 공격자들을 몇 마리 처치하고 함께 도망친 뒤로는 이곳의 동물들이 적의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어서 일단은 문을 걸어잠그고 에흐진을 호출했다. 

“상사, 우리는 다시 연구소로 돌아왔다. 그쪽은 안전한가?”

“바깥에 짐승들이 득시글하긴 하지만 우주선은 괜찮습니다. 괜찮으십니까?”

“우리는 괜찮아. 돌아가는 문제가 골치지.”

“여기서 보니 아까 맨 앞에 서 있던 동물들이 다시 몰려가서 그쪽 숲의 나무를 마구 베어 넘어뜨리고 있습니다. 얘네들 아주 조직적입니다. 저 놈들이 땅을 파헤치고 나무를 베다가 저쪽 숲에서 육식동물이 나와 공격하면 이쪽에서도 육식동물이 나가서 맞서 싸우는가 봅니다. 타이밍과 움직임이 대단합니다. 누가 지휘를 하는 것처럼요. 그런데 왜 나무를 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영역 싸움일지도요.”

“이쪽도 그래. 육식동물들이 싸우는 동안 초식동물들은 뒤에서 대기하고 있더군. 이쪽에서 저쪽을 밀어냈다면, 반대로 그쪽 나무를 파헤쳤을지도 몰라. 보아하니 양쪽 숲은 적대 세력의 진영이고, 우리가 착륙한 황무지는 싸움터인가 보군.”

“하필 지금 싸움을 벌이다니요. 이번 싸움 때문에 이쪽은 강쪽 숲 세력이 완전히 점령했습니다.”

“우리가 착륙한 게 싸움을 유발했을 수도 있지. 그나저나 그쪽은 숲이 좁은데 그 많은 동물이 어디서 나온 거지?”

“강 너머 숲까지 이어지는 세력이겠지요. 밤 사이에 강을 넘어왔나 봅니다.”

“젠장. 전쟁이 지겨워서 도망쳤더니 전쟁터란 말이야? 우리는 어쩌다 그쪽 동물 몇 마리를 죽였더니 이쪽 편이 된 모양이야. 이곳 동물들이 우리를 공격하지 않더군.” 

윤은 입술을 깨물며 보나를 돌아보았다. 

“저렇게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려면 지휘자가 필요할 텐데, 그게 누굴까요?”

보나가 창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글쎄. 그 바위곰? 힘이 가장 세잖아.”

“아까 보니까 그 바위곰 한 마리에 악어개 여러 마리가 팀을 짜서 다니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 그 와중에 자세히도 봤네.”

어느새 보나는 자연스레 동물에 이름까지 붙이고 있었다. 위급한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무심한 듯 행동하는 건 보나의 장점이었다. 

“그 두더지랑 갈갈이도 바위곰의 지휘를 받는 걸까요? 걔가 힘은 세도 그렇게 머리가 좋아 보이지는 않던데.”

두더지랑 갈갈이? 뒤에서 대기하던 초식동물들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이쪽 편이 이겼다면, 그 놈들이 전진해서 저쪽 숲을 파헤쳤겠지? 그런 식으로 적의 숲을 줄이고 자기네 숲을 늘려가는 거겠지?”

지금까지 본 내용으로만 보면 가장 그럴 듯한 추측이었다. 

“얘네는 우리 때문에 당했는지도 몰라요.”

보나의 말이었다. 윤이 쳐다보자 보나가 덧붙였다. 

“우리 때문에 병력을 이쪽으로 돌리는 바람에 방비가 소홀해져서 당했나 싶어서요.”

“그랬다면 조금 미안한걸.”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지금 그런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상사, 우리가 지금 그쪽으로 갈 수 있는 상황으로 보이나?”

“음, 쉽지 않아 보입니다. 지금은 초식동물들이 나무를 베어내고 있기는 한데 육식동물들이 주변에서 호위하는 것처럼 여기저기 서 있습니다. 숲 안쪽으로 얼마나 침투해 있는지는 여기서 잘 안 보이지만, 그쪽 숲의 최외곽은 지금 완전히 점령당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특이한 게 있습니다. 강쪽 숲에서 새로운 동물이 떼로 나타났습니다. 포동포동하고 깡총깡총 뛰어다니는 놈들인데 지금 저희 주변에서 육식동물들에게 잡아먹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망도 안 가고…, 죽으려고 온 것처럼 그냥 먹힙니다.”

‘뭐지? 식량 보급인가….”

어느 새 윤은 자연스럽게 이 상황을 전투에 빗대 보고 있었다. 

잠시 연구소 외부를 살펴보자 바위곰 한 마리와 악어개 여러 마리가 보였다. 지난 밤과 달리 그 한 무리가 전부인 게 아무래도 감시조 정도로 남겨 둔 것 같았다. 윤은 에흐진이 방금 말한 게 뭔지 알 수 있었다. 바위곰 한 마리와 악어개 여러 마리가 윤과 보나가 처음 공격당했을 때 봤던 통통한 토끼 같은 동물로 보이는 것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마치 잡아먹힐 순서를 기다리는 것처럼 얌전히 앉아 있는 녀석들도 있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퍼뜩 처음 공격받기 직전에 그게 자신과 보나의 시선을 끈 게 우연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은 다시 연구실로 돌아왔다. 

“상사, 우주선에 짐승들을 쫓아내거나 한쪽 포위망에 구멍을 낼 만한 무기가 있던가?”

“없습니다, 대위님. 테스트 중이던 걸 훔쳐온 거라 우주선도 비무장 상태고, 저희 개인화기가 전부입니다. 몇 마리야 무섭지 않지만, 저 정도 수는 무리입니다.”

“망했네.”

옆에서 화면을 쳐다보며 듣고 있던 보나가 중얼거렸다. 

“대위님? 티르민입니다. 제가 웬만하면 구출하러 갈 텐데, 짐승들이 떼로 몰려 있어서 어쩔 수가 없네요. 알아서 못 오시면, 우주선 좀 부서진 건 도박한다 셈 치고 저희끼리 그냥 갑니다? 네?”

에흐진이 티르민을 밀쳐내며 상황이 장난처럼 보이냐고 화를 내는 소리가 들렸다. 윤은 순간 우주선을 연구소 위에 띄워 놓고 줄사다리 따위를 타고 올라가는 방법을 떠올렸다. 하지만 곧 중력제어 엔진이 작동하는 동안 우주선에 인접한 외부에 사람이 있으면 특유의 역장 때문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적어도 며칠은 이곳에 머무를 생각이었으니 급할 건 없었다. 천천히 우주선에 합류할 방법만 강구하면 괜찮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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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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