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FI

꿈의 입자

소설가

2008년 4월 통권 31호

- 세계는 수식으로 설명 가능하다.

선생님이 뽐내며 말했다.

- 하지만 세상에는 기호에 속하지 않는 것들도 있어.

소년은 속으로 생각했다.

중급계량학 시간이었다. 산학 선생님은 맥박계와 체온계, 작은 칠판과 분필 하나를 가지고 장미꽃을 봤을 때 발생하는 심박변동량과 체온상승량 사이의 관계식을 유도해서 꽃의 심미지수를 계량하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26명의 학생들 중 24명이 관계식의 허용 범위 안에서 반응했다. 종이 치자 선생님은 이 공식의 타당도와 신뢰도를 산출하여 일반화할 것을 숙제로 내고 교실을 나갔다.

쉬는 시간 동안 아이들은 운동장에 나가 나무막대기 몇 개를 세워 그림자들의 길이로 태양광선 입사각의 차를 산출해서 지구의 직경을 측정하려고 시도하며 놀았다. 그 옆에서는 저학년 꼬마 몇이 단위 부피당 모래의 개수를 헤아려 운동장 전체의 모래알 개수를 추산하려고 재잘거렸다.


1.
소년은 현관문을 열고 조심스레 인기척을 살폈다. 곧 고개를 저으며 아무렇게나 모래 신발을 벗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엄마 아빠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욕실로 가서 삐걱대는 양수기를 돌려 얼굴과 손의 모래 먼지를 씻었다. 냉장기에서 간식을 꺼낸 다음 거실 안락의자에 앉아 화상기를 켰다.

무작위로 틀어주는 공공 영상을 보며 소년은 간식을 먹었다. 화상기는 42번 무인국도에 모래바람이 부는 것을, 도시 서남쪽의 늘어선 가로등들이 일시적인 전압강하로 깜빡이는 것을, 밤을 맞이한 서반구 상공의 인공위성이 중계하는 빛나는 별들을 보여주었다. 자연스레 여러 수식들이 떠오를 광경이었다. 가로등의 점멸 주기로부터 산출되는 발전소 전압의 위상 변이 계수나 인공위성의 궤도 높이와 선회 속도를 산출할 수 있는 별들의 일주 운동 왜곡치, 혹은 바람 속의 모래들이 따르고 있을 무질서 함수의 일단 같은 것들. 아마 다른 아이들이라면 모르는 사이 계산에 빠져들었겠지만, 소년은 입을 반쯤 벌리고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초인종 소리에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아빠와 엄마였다 엄마는 커다란 상자를 들고 들어오며 방긋 웃었다 상자에는 커다란 양과자가 들어 있었다 아빠도 큰 소리로 웃으며 가방에서 사과즙과 포도주를 꺼냈다 소년과 엄마와 아빠는 식탁에 둘러앉아 양과자를 한 조각씩 자르고 사과즙과 포도주를 마셨다 아빠는 연초를 꺼내 불을 붙였다 굴뚝 위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라 사과즙을 홀짝이며 설거지하는 엄마한테 둥실 떠갔다 엄마는 야자나무였다 하늘 아래 무성한 잎사귀 사이로 따뜻한 미소가 열매처럼 빛났다 그리고 딩―

―동! 초인종이 울렸다. 소년은 눈을 부비며 일어났다. 아빠와 엄마였다. 엄마는 손가방을 내려놓으며 피곤한 웃음을 지었다. 우리 아들 벌써 왔네. 아빠는 노대로 나가더니 연초를 꺼냈다. 아이, 참, 당신도. 엄마가 말했다. 제발 나 좀 가만히 놔줘. 퉁명스레 대답하며 아빠는 연초에 불을 붙였다. 매캐한 연기가 섞인 모래 바람이 거실로 들이쳤다. 엄마는 굳어진 얼굴로 부엌에 가더니 큰 소리를 내며 밀린 설거지를 했다. 소년은 놀라 물었다. 엄마, 양과자는? 아빠, 사과즙은? 어리둥절해진 엄마가 물었다. 무슨 양과자? 어리둥절해진 소년이 대답했다. 양과자…… 사 왔었잖아. 사과즙이랑…… 도대체 무슨 소리니, 바보같이! 엄마는 벌컥 화를 내더니 더 큰 소리로 설거지를 했다. 소년은 아무 것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조금 전에 봤던 건 과연 뭘까?


2.
소년이 아는 것은 단 하나,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뿐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소년이 안다고 생각했던 거랑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은 언제나 달랐다. 소년이 봤다고 생각한 거랑 다른 사람들이 본 것은 언제나 달랐다.

- 24번! 어디 보냐!

- (야, 너!)

- 뭐? 응? 예? 네?

옆 친구의 재촉에 소년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선생님은 이미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었고, 학생들은 짜증 섞인 헛웃음을 웃었다.

언제나 그랬다. 소년은 멍하고, 흐릿하고, 요령부득이었다. 그런 소년을 사람들은 비웃었다. 언제나 그랬다. 소년은 결코 세상의 질서에 익숙해질 수 없었다. 모두에게 당연한 것이 소년에겐 이상했고 소년에게 자연한 게 사람들에겐 이상했다. 그러니 눈 뜨고 있는 것보다는 감는 것이 편했다. 감고 있으면 간혹 이상한 풍경이 펼쳐지고 이상한 사건들이 벌어졌다. 소년은 차츰 그런 것들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게 되었지만, 이미 너무 늦은 일이었다.

선생님과 엄마아빠, 급우들까지 모두들, 소년을 수상하게, 이상하게, 괴상하게 보고 있었다.


3.
- 안녕하세요, 3학년 4반 담임입니다.

- 어머,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 예, 안녕하세요, 통화 괜찮으신가요?

- 네, 선생님. 무슨 일이신지……?

- 말씀드리기 죄송하지만 아드님이……

- 네? 우리 애가 무슨 일이라도……?

- 아뇨, 아닙니다. 무슨 일을 저지른 건 아니고요, 다만 학교생활에서 조금 문제가……

하지만 문제는 조금이 아니라 아주 심각했다. 담임도 알았고 어머니도 알았다.

내가 뭘 잘못한 건데? 소년은 질문했다. 소년에겐 잘못이 없었다. 그럼 누구 잘못이야?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세상에는 세상과 맞지 않는 사람들이 태어나기도 한다. 첫 단추부터 세상과 들어맞는 접점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다만 세상은 세상대로, 그리고 그들은 그들대로 각각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그뿐이다. 때문에 해결책은 없다. 담임은 좋은 말로 타이르고 회초리도 쓰고 급우들에게 도움을 부탁하고 계속해서 면담하고 부모와 상담하고 동료 교사들과 상의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소년은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수업 시간마다 멍했다. 마침내 모두들(엄마아빠도) 포기했다.

- ……아무래도 전문가의 전문적인 진단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니면 전문 기관의 전문적인 치료를 받을 수도 있고요……


그래서 소년은 탁량리 뇌병원으로 보내졌다.


4.
뇌병원에는 소년과 비슷한 사람들이, 그리고 소년 같은 사람들을 이해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이 모두 정상적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 ― 모든 사람의 모든 뇌가 모두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소년은 행복해졌다. 소년의 자리는 여기라고, 세계가 정해놓은 것 같았다.

그러나 사실은 아니었다.

소년의 자리는 그곳이 아니었다. 소년은 아침이면 누가 깨우기도 전에 일어나 고요한 새벽 휴게실에서 화상기를 켜고 조간신보를 봤다. 그리고 한적한 구내식당에서 이른 아침을 먹었다. 잠시 쉬고 나면 오전 검진을 받았다. 뇌 사진을 찍고 뇌액 표본을 채취했다. 의사들은 매일매일 뇌 사진을 검토하고 뇌 분비물을 분석했다. 점심에는 검진 결과에 따라 처방된 특별식과 약을 받았다. 오후에는 여러 가지 치료요법을 받았다. 모래 정원에 나가 산책을 하거나 태양욕을 하고 강당에서 뇌 활성 체조를 했다. 중증인 환자들은 실험적인 외과 처치를 받기도 했다. 간소하지만 영양이 풍부한 저녁을 먹고 나면 취침 시간까지는 편지를 읽든 책을 읽든 자유로웠다. 일요일에는 바깥 원족을 나가거나 간단한 사역을 했다. 평화로운 하루하루. 뇌병원의 그 누구도 소년을 띵하다거나 멍하다거나 바보 같다고 놀리지 않았다.

하지만 소년은 결국 병원에서 나와야 했다. 소년은 여전히 자고 일어나면 종종 이상한 말을 했다. 있지도 않았던 일을 있었던 것처럼 겪지도 않은 일을 겪은 것처럼. 소년은 나름대로 감추려고, 참아보려고 했지만 별 수 없었다. 처음에 의사들은 기억이상을 의심했고(해마조직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정신분열증을 추정했으며(뇌량과 뇌간에 대한 정밀 검사가 이어졌다) 종국에는 현실 해리 장애나 통합 환지각 같은 이상한 용어를 만들어냈다. 소년의 뇌는 신경세포 단위로 검사되었고 그 결과 논문들이 셀 수 없이 양산되었다. 뇌의학 학회지 등지에 심심찮게 등장한 소년의 사례는 결국 의학 외 다른 과학 분야 사람들의 이목까지도 끌어들였다.

- 고객305, 305번 고객은 안내대로 나와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고객305는 안내대로……

병원은 환자들을 고객으로 지칭했다. 구별을 위해 숫자를 붙었다. 숫자에 익숙해지는 것은 정상인으로 가는 첫걸음이었다. 뇌 오작동은 대부분 숫자를, 공식을, 질서를 거부하는 데서 비롯됐으니까. 소년은 2층 복도 중앙으로 갔다.

그동안 물리게 봤던 안경잡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엔 턱수염까지 기르고 있었다. 구겨지고 닳아빠진 허름한 양복을 입고 있었다. 진료복을 입은 게 다를 뿐인 병원 의료진들이 그 뒤에서 똑같은 미소로 소년을 맞았다. 소년은 그 미소가 싫었다. 그 미소들은 달갑지 않은 일들이 예정되어 있다는 하나의 기호(표지)였다.

- 안녕, 나는 손 박사라고 한다.

안경잡이가 한 손을 내밀었다. 소년은 마지못해 고개를 까닥였다.
- 자자, 착하지, 고객305? 손 박사님은 입자 정량학계에서 손꼽히는 학자시란다.
소년의 반응이 불안했는지, 달래는 말투로 진료복들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왔다.

- 앞으로 305번 고객을 전담해주실 거야. 고백하건대, 우리는 고객의 증상에 접근, 치유하는 데 한계가 있었지. 그런데 박사님께서 관심을 보여주신 거야. 최후의 기회라고, 우린 생각한다.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 박사가 계속 한 손을 내밀었다.

- 하지만 엄마 아빤…….

소년이 말끝을 흐렸다.

- 물론 동의하셨단다.

다른 진료복이 대답했다. 소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까지 그렇게 편안하고 친숙하던 이곳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랬다. 이곳에 소년의 자리는 없었다.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병원은 치료를 위해 존재하는 곳이고, 소년의 병은 불치였으니까.

소년은 손 박사의 손을 잡았다.




5.
모래먼지가 날리는 외곽 순환도로를 모래차는 천천히 달렸다. 이윽고 모래강이 나왔다. 완만한 속도로 끊임없이 흐르는 거대한 모래흐름[流沙] 위로 가늘게 놓인 다리를 지나며 소년은 멍하니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규칙적으로 흘러가는 다리 난간들 너머로 넘실거리는 모래와 그 위의 모래배들의 색색깔의 돛들, 하늘 끝까지 일어난 모래먼지의 벽 너머로 흐릿하게 내비치는 공허한 하얀 눈동자 같은 큰해[太陽], 작은 노란 점 같은 작은해[小陽]. 소년은 문득 학교와 급우들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 누구의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았다. 지나간 일들은 언제나 금방 잊혀졌다. 병원을 떠올려도 마찬가지였다. 좀 전에 떠나왔지만 벌써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한적한 새벽의 구내식당만이 간신히 떠올랐다. 아릿한 그리움과 함께 앞날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그림자처럼 스멀거렸지만 소년은 곧 고개를 저었다. 소년 바깥의 세상이 소년에게 낯설게 흘러가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 소년의 머리가 유리창 쪽으로 기울었다. 소년은 머리가 모래차 유리창에 닿으면서 마음도 몸의 선을 넘는 것을 의식했다. 그 선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었다. 정신을 조금이라도 놓으면 어느새 마음은 선을 넘어 알 수 없는 어딘가로 줄달음치곤 했다. 지금처럼-
모래들이 물결쳤다 세 개의 달이 휙휙 소리를 내며 새하얀 낮의 회백색 하늘을 네 갈래로 찢었다 달들이 지나간 자리는 깊이가 있는 어둠이었다 그 어둠 저 멀리에는 하얀 빛점들이 차갑게 깜박이고 있었-

- 다 왔다.

손 박사가 말했다. 소년은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차창에 닿았던 이마가 욱신거렸다. 박사는 이미 차에서 내려 걸어갔다. 문을 열고 그 뒤를 따르면서도 소년은 하늘을 흘깃거렸다. 달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하늘에 못 박혀 있었다. 물론 달들의 자전 주기와 공전 궤도에 관한 계산식은 기초학교에서 배웠지만, 소년은 새삼스레 달들을 쳐다봤다. 그리고 박사의 뒤를 따라 바삐 걸었다.

“형이외학 연구소”

소년은 가정집 같은 건물의 현관에 걸린 현판을 보고 박사를 따라 들어갔다. 박사는 소년을 2층 복도 끝의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 자, 여기가 앞으로 자네가 묵을 방이다.

방은 작고 비좁았다. 오래된 전공 서적들과 전문 잡지들이 빽빽이 꽂힌 크고 낡은 책장들이 벽을 꽉 메우고 있었고 한쪽 벽에는 간이 침상과 회전의자가 하나, 누렇게 뜬 유리창이 작게 나 있었다. 구석에는 조그만 세면대가 있었는데 수동식 양수기였다. 가방을 풀고 옷가지 몇 벌과 일기장, 남들이라면 분명히 내다버리라고 할 귀중한 잡동사니 몇 개를 옷장과 책상 서랍에 정리하는데,

- 좀 후졌지? 미안. 원래 숙직실로 쓰다 휴게실로 쓰다 뒤죽박죽이었던 방이라서.

홑이불과 베개, 담요 등을 한 아름 안고 들어온 젊은 여자가 말했다. 동그란 얼굴에 동그란 안경을 쓰고 빛바랜 면옷과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 네가 바로 그 아이구나. 안녕? 난 연산2야. 손 박사님의 연구에서 기호 논리 계산을 담당하고 있지.

소년은 연산2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상하게 호감이 가는 얼굴이었다. 특별히 예쁜 건 아니었지만 그 때문에 도도한 느낌 없이 편안했다. 뇌병원의 간호원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언제나 졸린 눈으로 어떻게 보면 웃는 것 같고 어떻게 보면 또 우는 것 같은 표정의 간호원이었다. 언제나 뭔가를 까먹거나 놓치고 잃어버렸지만 환자들은 모두들 그 간호원을 좋아했다. 하지만 뇌병원은 좋아하지 않았다. 환자들 뇌의 오작동 범위를 확장시킨다고 의사들과 기술자들은 언제나 투덜거렸다.

연산2는 통근 직원이었다. 짐 정리를 마저 하는 동안 퇴근했고, 소년은 손 박사와 묵묵히 저녁을 먹었다. 이곳은 사설 연구소로, 손 박사만 기본적인 숙식을 해결하는 모양이었다 ― 앞으로 나도 그렇겠지, 소년은 생각했다.


6.
다음 날 아침, 소년은 출근한 연구진들과 상견례를 하고 연구소의 각 시설들을 안내 받았다. 연구진은 연산2를 비롯해서 연산 담당 두 명, 계측 담당 한 명, 손 박사의 동료와 제자 두 명으로 이루어진 단출한 구성이었고, 좁은 연구실 구석에 놓인 기기들은 일견 뇌병원 검사실에 있는 것들과 비슷해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좀 투박하고 더 낡은 구형들이었다. 소년은 어렴풋이 손 박사의 연구 규모를 헤아려보고 실망했다. 불안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소년의 절망감은 엄마 아빠와 헤어져 뇌병원에 들어간 뒤 계속 깊어진 오랜 상처였다. 학교를 떠나면서부터 소년은 남들이 다 살아가는 정상적인 삶의 궤도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소년은 남몰래 한숨을 쉬고 박사의 연구에 참여했다. 소년의 역할은,

- 관찰자라네.

손 박사가 말했다. 손 박사는 소년에게 특별한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다만 소년의 관자놀이와 목덜미, 온몸의 관절들에 전극을 꼽고 뭔가 반응이 나타나기만 기다리며 소년에게 수면제를 주사했을 뿐이다.

- 우리가 연구하려고 하는 건 인간 정신의 물리학이네. 지금까지 입자물리학자들은 우주만물을 이루는 모든 입자들의 특성과 상호작용의 원리들을 거의 대부분 밝혀내었네만, 안타깝게도 인간의 정신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했지. 다시 말해서 인간의 정신 구조를 구성하는 입자는 무엇인지, 그 실체는 무엇인지, 외부 현실과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는 밝혀내지 못하고 있단 말이네. 많은 학자들이 언어를 매개로 정신에 접근하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 그건 한계가 분명한 방법이야. 언어 자체가 균질한 매질이 아닌 데다가 단어나 형태소, 음절이나 음운, 음소는 아무리 분석해 봐도 정신과의 직접적인 연결점이 보이지 않거든. 어쩌면, 어떤 학자들의 견해가 옳다면, 정신이 물질의 추상일 경우, 언어는 바로 그 정신의 추상인지도 모르지. 그러나 자네가 잠을 자는 동안 보고 듣고 체험하는 그 현상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정신 작용의 소산이 틀림없으나 언어와 달리 경험적 구체성이 있단 말일세. 그렇다면 그 현상을 분석하여 정신-마음의 입자를 검출해낼 수 있지 않겠나! 자, 자네가 할 일은 아주 간단하고 매우 명확하네. 자네가 자면서 겪는 그 현상계 안에서 그 현상을 이루는 근본 입자의 종류와 성질을 파악하기 위한 일종의 실험과 관찰을 해주게.

그러나 정신 입자를 검출하고 분석하는 일은 미묘하고 지난한 작업이었다. 손 박사는 일단 연구 대상에 관한 기초 자료의 수집을 제안했고, 소년은 곧 매일 밤마다 머리와 가슴 곳곳에 전극을 꽂고 투과성 입자 검출 장치 위에서 자야만 했다. 몇 번인가 또 소년은 자는 동안에 벌어지지 않은 일들, 이치에 닿지 않은 사건들을 겪고 경험했고, 그때마다 연구진은 당시 소년의 뇌파 변동과 심전도 기록, 근육 말단 신경 전위와 혈류 정황을 검토하고 분석했다. 연구진들은 매 시간마다 수면 중인 소년을 강제로 각성시키는 실험 관찰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소년의 경동맥에 거름 장치를 삽입해서 뇌순환계로 들어가는 내분비 물질의 종류와 농도를 검측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 결과 연구진들은 소년의 이상 체험-‘현상’이 소년의 신체적 반응 체계와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몇 개인가 복잡한 함수 방정식이 세워졌고, 연구진은 유의미한 범위 내에서 최대 5분 이전에 ‘현상’의 발현 징후를 예측할 수 있었다.

- 그럼 이건 더 이상 병원의 의사들이 불렀던 것처럼 이상 체험이나 뇌 기관 오작동의 산물이 아닌 거야. 엄연한 하나의 체계적 필연적 객관적 사상(事象)인 거지. 따라서 나는 이에 정식 명칭을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제군들 생각은 어떤가?

연구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거림의 횟수와 강도에는 개인차가 있었지만, 모두들 소년이 일종의 실재하는 현상을 체험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았다.

- 이 현상의 근본 특성을 반영한 이름이어야겠군요.

계측1이 말했다.

- 이 현상에 대한 검측 결과는 정신-육체 일원 모형에 대한 신뢰도를 한층 제고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신 작용 역시 육체에 기반한 물리적 현상이라는 것이지요. 피험자1은, 우리가 지금 명명하려고 하는 현상을 체험할 때마다, 심박 및 뇌파, 말초 신경계 전위 등 제반 생리적 지표에서 일반적인 수면에 빠진 비교 집단의 반응과 달리 유의미한 변동을 나타냈습니다.

- 아뇨, 유관계함을 입증하는 자료이긴 하지만 어느 쪽에 종속 여부를 확정짓기는 아직 곤란하지 않나요? 정신 작용에 의한 신체적 증후인지도 몰라요.

- 뭐, 어느 쪽이든 조만간 판명되겠지요.

계측1은 웃으며 연산2의 반론을 수용했다.

- 덧붙여, 새로운 발견에 주목해야 할 것 같네. 추후 우리의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행사할 사실이 아닐까. 피험자1은 부분적으로 이 현상 안에서 자신의 의지를 행사할 수 있음을 입증했으니까.

발 박사의 발언에 연구진들의 시선이 일제히 소년을 향했다. 소년은 그 뜨거운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 피험자1은 자신이, 혹은 자신의 정신이 이 현상의 영향권 내에 들어섰음을 인지한 적이 세 번 있었으며, 마지막 체험에서는 임의로 현상의 내용을 바꾼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연산1이 말을 받았다.

- 현상의 변형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잠시 다른 방향으로 새는 이야기이지만, 피험자1의 체험에는 결국 시간성이 개입되어 있지만, 현실의 시간과는 달리 상당히 왜곡되어 있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주관적 시간과 객관적 시간 사이의 차이점에 접근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몇몇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시간 입자 혹은 시간 파동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것 역시 인간의 정신 입자와 모종의 상관관계를 만들어내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 좋은 제안이네. 이 연구가 우주 전체의 모든 비밀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이 확실시되고 있네. 도대체 우리 내면을 정리하지도 못한 채로 어떻게 우리 외부에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들의 본질을 탐구할 수 있겠나? 시간뿐만 아니라 공간도 마찬가지야. 피험자1이 체험하는 곳은 어떤 곳인가? 객관적으로 실존하는 공간인가? 주관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인가? 체험하는 피험자1 자신은 어떠한가. 자아는 정말 정신 입자로 되어 있는 것일까? 우리의 인지는 정신 입자가 정신 공간에서 작용한 결과일까? 정신 공간의 위상은 어떠할까. 그것은 물질 공간과 어떤 관계일까. 다른 차원일까? 병행 공간일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먼저 다음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네. 왜 피험자1만 체험할 수 있는 걸까? 피험자1의 체험과 우리의 일상적인 의식-정신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 다시 명칭의 문제로 돌아가자면, 지금까지의 관측 결과를 토대로 세운 가설을 반영하는 용어가 좋지 않겠습니까?

연산1의 말에 발 박사가 입을 열었다.

- 이 현상은 우리의 정신계를 구성하는 입자가 두뇌(정확히는 대뇌 회백질), 특히 전두엽 부근 신경세포의 전기 화학적 힘이 전환되어 형성되는 것으로, 이러한 기제를 통해 현실계의 사상들과 우리 정신이 상호 작용하는 것이라는 기존 가설을 뒷받침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가설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계는 결국 우리 몸과 외부 현실에서 꾸어온 힘과 정보를 통해 형성되는 것입니다.

- 일반적인 표준 모형이로군. 결코 실험적으로 증명된 적은 없지만.

냉소한 것은 팔 박사였다.

- 하지만 덕분에 재밌는 이름이 생각났는데,

그는 제는 체하며 말을 계속 이었다.

- 현실에서 꾸어온 것들로 발현되는 현상이라면 ‘꿈’이라고 하면 어떨까.

- ‘꿈’이라, 그럼 동사형은 ‘꾸다’가 될까요? ‘피험자1이 꿈을 꾸었다’ 그럴듯한데요?


7.
아빠가 말했다 엄마가 죽었단다 작고 노란 고양이가 횡단보도를 가로질렀다 신호등이 깜박였다 겨울이었다 엄마가 말했다 밥 먹어라 식탁 위로 모래 바람이 불었다 엄마는 연산2였다 밥을 먹으려면 구구단을 외워야 돼 아빠가 말했다 아빠는 고양이였다 횡단보도를 가로지르다 모래차에 치였다 식탁 위로 피 섞인 모래가 튀었다 아빠가 죽었으니 이제 네가 구구단을 외워야겠구나 엄마가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소년은 엉엉 울었다 이이는 몇인지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왜 이렇게 맨날 흐리멍텅할까 이젠 구구단도 못 외우니 집에서 쫓겨날 거야 너무나 서럽게 엉엉 우는 동안 눈물은 베갯잇을 흥건히 적시고 볼에 축축하게 맞닿아왔다.

- 안 좋은 꿈이었나 보구나.

흠뻑 젖은 얼굴에서 전극을 떼어주며 부드럽게 말을 건넨 것은 연산2였다.

눈부셨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색깔의 하늘 아래서 눈을 꿈벅였다 청금석 혹은 쪽빛 같은 새파란 하늘에 하얀 솜뭉치 같은 것이 있었다 처음에는 얼룩이나 무늬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부피감이 느껴졌다 ‘하늘은 텅 빈 것이 아니었나?’ 무언가가 눈길을 끌었다 다가가 보니 빛나는 것이 조금씩 일렁이고 있었다 빛과 그림자가 순식간에 짧은 선을 이루며 나타났다 사라졌다 ‘모래흐름 같아 거대한, 반대편이 보이지 않는 넓은 모래흐름’ 하지만 그것의 빛나지 않는 부분들은 거의 투명했다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보니 ‘액체? 이건, 물이잖아!’ 그때 하늘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묵직한 소리였다 놀라 눈을 들어 본 하늘은 더 이상 파랗지 않았다 탁한 잿빛이었다 그리고 한 줄기 더운 바람이 불어오더니 다시 무거운 충돌음과 함께 차가운 무언가가 목덜미를 때렸다 이마를 손등을 어깨를 연이어 때렸다 놀라 고개를 움츠리며 위를 올려다보니 수없이 많은 투명한 물방울들이 어둑한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허공을 직선으로 내리그으며 떨어졌다 마른 땅바닥은 점점 짙게 얼룩지더니 마침내 물줄기가 이곳저곳에서 이루어져 예의 거대한 물을 향해 흘렀다 그 거대한 물은 시시각각으로 커져서 어쩔 줄 몰라 얼어붙어 있는 사이에 흘러넘쳐 발목을 잡아당기고

- 괜찮아! 괜찮아! 도대체 무슨 꿈을 꾼 건가!

소년은 더듬거리며 빠르게 자신이 본 것을 이야기했다. 너무나 기묘해서 세부적인 것들도 잊어지지 않았다. 연구진들은 꿈에 대한 소년의 기억이 점차 희미해지는 것을 ‘정보 입자의 활성 층위 변화량’이라든가 ‘꿈 입자의 존재 범위’ 같은 알 수 없는 말들로 부르며 초시계를 준비하고 소년이 잠에서 깨면 질문을 퍼붓거나 일정한 간격 동안 내버려두다가 느닷없이 꿈에 대해 물었다.

- 물 입자야! 맙소사, 물이 풍부한 세계에 대한 꿈을 꿨군! 임계량 이상 물을 보유한 세계에서 물은 제2형태로 공기 입자 사이에 불균일하게 혼합되어 있을 수도 있어. 그러다 포화되면 다시 제1형태의 거대 입자로 액화되어, 중력에 끌려 지면으로 내려오겠지. 자네 혹시 그 물방울들의 속도를 어림할 수 있겠나?

밑도 끝도 없었다 벽면이 위로 빠르게 줄달음치는 것으로 떨어지는 속도를 가늠해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계속 떨어지다 보니 오히려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는 느낌마저 들었다 ‘책을 가져왔으면 읽을 수도 있었겠네’ 최근 들어 꿈을 자각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책이나 신문을 읽는 건 불가능했다 연구진들에게 내색하진 않았지만 근래 들어 꿈이라고 그들이 일컫는 주관 세계와 잠에서 깨었을 때의 외부 객관 세계의 차이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이 안에는 내가 아는 것만 있어’ 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초록빛 감도는 반투명한 무언가가 출렁이는 것이 아련하게 보였다 물일까 따뜻해 보였다 그 위로 떨어져도 아프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연산2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곁에서 졸린 표정으로 야릇한 미소를 지은 채 옆으로 누워 있었다 같이 떨어지고 있었다 떨어지는 가속도가 만들어낸 기묘한 환각이 양쪽 귀를 머리 위의 허공으로 밀어올렸다 발밑에 단단한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일종의 쾌감을 빚어냈다 홱 홱 벼랑이 머리 위로 쏜살같이 치솟았다 바닥까지는 아직도 한참 남았다 근래에 들은 물리학의 여러 법칙들이 떠오르자 돌연 겁이 났다 가속도의 법칙 작용 반작용의 법칙 높이힘에서 움직힘으로의 전환 같은 것들 ‘저 아래에 떨어졌을 때 충돌힘은 얼마나 될까’ 연산2에게 물어보면 될까 싶어서 돌아보니 없었다 엄습하는 외로운 공포감 속에서 바닥이 빠르게 다가왔다 바닥에는 물이 없었다

- 괜찮나? 괜찮아! 맙소사 이렇게 다리를 버둥대다니! 발 박사! 방금 허벅지 근육의 움직힘을 측정했나? 아니? 신경 전위 측정기는 필요 없어! 줄자를 가져와! 발목이 여기까지 올라왔던 거 맞지? 누구 시간 잰 사람 없어?

이제는 잘 때마다 꿈을 꿨다. 소년은 거울 속에서 움푹 파이고 거뭇거뭇한 눈가로 희미하게 웃고 있는 자신의 너무 말라 뾰족한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왜 웃니?

거울 속의 창백한 얼굴에게 물어봤지만 대답은 없었다.


8.
한낮이었다. 연구실의 긴 의자 곳곳에 연구원들은 쓰러지듯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자료가 집적되면서 밤낮 가릴 것 없이 실험하고 계산하고 토론하느라고 다들 잠을 설쳤다. 소년은 조용히 주방에 가서 양수기를 돌려 물을 마셨다. 자는 것이 일이다 보니 남들이 잘 때는 잠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끝없이 목이 말랐다. 식은땀을 너무 많이 흘려 그런 걸까. 소년이 잘 때마다 신경을 곤두세우는 연구진들은, 정작 실험이 끝나면 뒷정리하고 자기들끼리 떠들다 곯아떨어지느라 소년은 뒷전이었다. 가끔 연산2가 밥은 제대로 챙겨 먹고 있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지만, 그나마도 연구가 점점 더 고조되면서는 연산2도 구식 계산기와 출력 종이에 파묻혔다가 쉬는 시간마다 긴 의자나 양탄자 위에 널브러지기 바빴다. 소년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언제 밥을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아서, 대답하기 곤란했으니까.

몸에 힘이 없어서, 쓰러진다는 의식도 없이 스르륵 몸이 무너졌다. 공교롭게도 연산2가 잠든 긴 의자 옆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 안 돼, 아니야, 아냐, 저리…….

고개가 번쩍 들렸다. 눈이 번쩍 뜨였다. 연산2는 여전히 긴 의자 위에 엎드려 있었다. 눈은 꼭 감은 채 입술만 달싹거리다 신음했다. 그러다 번쩍 눈을 떴다. 흐릿한, 초점 잃은 시선으로 두리번거리다 소년에게 초점을 맞추더니,

- 너 뭐야!

때릴 듯한 어조로 내뱉더니 벌떡 일어나 어디론가 도망가듯 달려갔다.

뭐긴 뭐야 외치면서 목을 그어버렸다 손에 쥔 것은 유리조각이었다 연산2의 목이 반동강 났다 묽은 피가 시늉처럼 흘러나왔다 다른 연구원들이 덤벼들었다 계속해서 손에 쥔 유리조각을 휘둘렀다 주로 목을 찢었다 목이 찢어진 연산1과 연산2 계측1 팔 박사와 발 박사들은 그런데도 이상하게 죽지 않고 쓰러지지 않고 꿈틀거리며 일어섰다 마침내 긴 의자들을 뒤집고 부서진 나무판자로 머리를 후려 팼다 깨진 뒤통수에서 붉을락 말락한 것들이 사방으로 튀는데도 사람들의 손은 끈질기게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결국 움직일 수 없게 되었을 때였다 손 박사가 나타나 슬픈 표정으로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지 내 연구는 어떻게

엄청나게 신음했다고 했다. 도대체 무슨 꿈을 꾼 거냐는 연구진의 질문에 답하기가 참, 소년은 난처했다.

풍경이 정신없이 홱홱 지나간다 무섭다 너무 빠르다 발치 아래는 둥글고 흐릿하다 사막의 아지랑이가 어슬렁 둥근 선 위를 쏜살같이 질주한다 둥둥 뜬 채로 팔다리를 둥글게 휜 허리 앞으로 말은 상태에서 앞을 향해 떠간다 지지점 없이 허공에 뜬 발밑이 불안하다 속도는 점점 더 올라가고 마침내 발밑의 선이 무엇인지 난데없는 깨달음이 머리를 친다 지평선이다 ‘그렇다면 여기는?’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정면에서 순간 거대한 둥근 곡선이 빛줄기를 이루더니 그 위로 커다란 빛 덩어리가 솟구친다 마침내 별이 뜬다 ‘아니야, 태양이야’ 이제 발치의 둥근 곡면이 빛 아래 환히 드러난다 아침이다. ‘맙소사, 대기권 위를 날고 있는 거야’

- 계측1, 괜찮나? 피곤해 보이는 기색인데?

- ……괜찮습니다. 날이 덥네요.

- 더운 게 문제가 아닌데요, 식은 땀 아녜요?

마침 과일즙을 가져온 연산2가 쟁반을 연구실 탁자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 괜찮아요, 괜찮다구요!

계측1은 짜증을 내며 휘청거리며 일어서더니 도망치듯 나가버렸다.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서로 쳐다보았다.

- 다들 너무 무리하고 있네. 거울을 볼 필요도 없어. 서로 얼굴만 보더라도 알 수 있지. 반면 연구는 지지부진한 답보 상태야. 자료는 쌓여가고 있지만. 종합할 해석이 없네.

- 그건 현상 자체가 너무 다양하기 때문이야. 한 번이라도 비슷한 꿈이 나온 적이 없지 않나.

- 아니야. 오히려 꿈들 자체는 몇 가지 범주로 묶어볼 수 있어. 가장 크게는 일상적인 세계에 관한 것, 일상적 세계와는 몇몇 상수가 다른 세계에 관한 것, 피험자1에게 의미가 있는 사상들의 반영으로 이루어진 것, 피험자1이 그 의미를 알지 못하는 사상들의 반영으로 이루어진 것.

- 그건 결국 다시 둘로 묶을 수 있을 겁니-

-그게 아니야! 모르겠나? 이 실험은 전적으로 피험자1에게 집중되어 있어! 일상적이지만 피험자1에게 의미가 없는 것도 있을 수 있고 우리에겐 비일상적이지만 피험자1에겐 의미가 있는 것도 있단 말이야! 모르겠나? 이 미치광이 실험은 저 미치광이 애새끼한테 애오라지 매달린 꼴이라구!

팔 박사의 말이 점점 격해지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다른 사람들의 눈도 이상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팔 박사가 말을 끝맺었다.

- 저 꼬맹이의 머릿속을 열어보기 전엔 우리 실험의 타당성을 입증할 수 없어!

이상한 눈빛으로 모두가 열렬히 찬성했다 연산2가 신이 나서 어디론가 달려가더니 날카롭게 빛나는 수술도구 일습을 가져왔다 두개골을 자르는 둥근 쇠톱도 있었다 놀라 달아나려 했지만 또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고무 같은 다리를 억지로 놀려 뒤뚱뒤뚱 달아났지만 이내 따라잡혀 목덜미를 붙잡혔다 손들이 뻗어나와

눈을 떴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계측1이 누웠던 긴 의자 뒤에서 소년은 뻣뻣하게 굳은 몸을 일으켰다. 좀 더 어둑한 곳에서 자려고 했던 게 기억났다. 그리고 이어 다른 것들도 기억났다. 그들이 꿈이라고 부르는 것과, 또……

- 도대체 어디까지가 꿈이야?

목소리가 낯설었다. 그러고 보니 조용한 곳에서 혼자에게 말 걸어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언제나 시끌벅적한 실험실 사람들 속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이 뭐라고 하는 지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더듬거리곤 했으니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어디로 간 걸까? 정말 다들 여기에 있었던 것일까? 여기서 그런 말들을 했던 걸까? 어디까지가 실제로 그들이 한 말일까? 소년은 아주 옛날부터, 자신의 기억을 믿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 세상에는 아무것도 믿을 수 있는 게 없었다.

- 박사님을 믿을 수가 없어요

연구소 근처 모래 언덕이었다 손 박사가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 겉으론 저한테 실험의 성패가 모두 달려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면서 속으론 어떻게든 제 머릿속을 뜯어보고 싶어서 안달복달이신 거 다 알아요

뜻밖이라는 박사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졌다

- 안녕

놀라 뒤돌아보니 문이 있었다 문은 모래 언덕 위에 서 있고 문 너머에는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과 초록빛 언덕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소녀가 있다

- 안녕

소녀가 인사한다

- 안녕

내가 답한다

소녀는 내가 그 곁에 앉을 때까지 잠자코 기다린다 그리고 우리는 나란히 앉아 초록 언덕 너머로 푸른 하늘 속에서 흘러가는 하얀 구름을 말없이 지켜본다

- 아직도 그 사람들, 너 괴롭혀?
소녀가 마침내 묻는다 뭐라고 답할까 한참 망설이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 아직도 그 사람들, 꿈 못 꿔?

소녀가 또 묻는다 뭐라고 답해야할까 한참 망설인다 정말로 뭐라고 해야 할까 우리 세상에서는 꿈을 꾸는 것이 일종의 뇌 이상이라고 답해야 할까 꿈을 꾸는 나만 비정상인 거고 정상인 다른 사람들은 꿈을 꾸지 않는다고 그렇게 답해야 할까 하지만 결국 말할 수 없다 아무래도 그건 우리 세계만의 일인 것 같다 소녀의 세계에서는 ― 소녀의 지난 말들로 미루어 보건대 ― 누구나 꿈을 꾸는 모양이다 하긴 그건 지금 앉아 있는 초록 언덕과 그 위의 파란 하늘과 그 사이의 하얀 구름이 무엇보다도 또렷이 말해주고 있다


9.
모두가 꿈꾸고 있었다. 잠들 때마다. 그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심지어 손 박사조차도 긴 의자에 누워 눈을 감고 으으, 그만, 그마아안, 하고 외쳤다. 물론 아무도, 누구도 못 들은 척 지나쳤다 잠꼬대는 다들 그렇게 모른 척했다. 그래, 그들은 모두 그걸 언제부턴가 잠꼬대라고 불렀다. 그렇지만 누구나 못 들은 척, 못 본 척했다. 관찰되지 않은 현상은 존재하지 않은 것이라는 설이 있어. 언젠가 박사 하나가 말한 적이 있었다. 모두들 정말로 못 본 것처럼 하면 없던 것이 되는지 눈길을 피하고 얼굴을 돌렸다. 정말로 그럴까?

연구는 진척이 없었다. 소년은 자기가 꾼 꿈을 기계처럼 되풀이 얘기했고 받아 적은 연구진들은 기계처럼 반복해서 뭐라 뭐라 떠들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이 보기에도 아무런 진전이 없어 보였다. 꿈은 욕망이야 언제나 보고 싶은 것, 만나고 싶은 사람, 가고 싶은 곳을 꿈꾸지. 잿빛으로 굳어있는 연산2를 지나치며 소년은 생각했다 저편에 소녀가 이미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고 있다. 난 이 아이를 만나고 싶었던 걸까?

- 안녕?

소녀가 답한다.

- 안녕?

둘은 손을 잡고 문 너머로 걸어간다. 거대한 구리 동전들의 고원. 서로 다른 높이로 쌓아올려진 거대한 원반들은 하나하나가 들판에 맞먹는 넓이. 제멋대로 쌓인 동전들의 탑은 기울기도 제각각이고 소년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옆으로 미끄러진다. 그러고 보니 발에는 작은 바퀴가 달린 신발이 신겨져 있다 소녀는 웃으며 먼저 원반의 테두리를 향해 미끄러진다 ― 기보단 달려 나간다. 소년은 필사적으로 버티지만 두 발에 바퀴가 달린 상태에선 불가능하다. 마침내 발끝이 금속판의 너머로 굴러가고-

몸이 허공 속에 정지, 한 듯하지만 추락이 완성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길기 때문에 발생하는 착각일 뿐 ― 떨어지는 동안 맥박을 헤아려야 되는 걸까, 손 박사의 지시가 떠오르지만, 이내 머리에서 털어버린다 불가능하다 허공 속에서 심장은 가슴뼈를 부서져라 두드린다. 더 높은 위치에서 더 낮은 위치들에 대한 조망 : 지평선까지 계속되는, 오르락내리락하는 동전들의 거탑들 ― 한순간에 한 시야에 모두 들어온다파르스름한 청동빛이저물어가는햇살 속에서빛난……

소년은 머리를 털며 일어났다. 얼마나 진저리를 쳤는지 실험대 위에서 굴러 떨어져 바닥에 널브러진 상태였다.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게다가 방금 꾼 꿈은 기억하기만 해도 끔…… 잠깐, 왜 아무도 없는 거지? 왜 아무도 방금 꾼 꿈을 묻지 않는 거지? 소년은 실험실에서 나갔다. 분명히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모두들 평상시처럼 계측과 기록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을 때 깨어난 적은, 이 연구소에 온 이후 첫날밤을 빼곤 한 번도 없었다.

복도에도 아무도 없었다. 너무나 조용했다 순간 소년은 아직도 자신이 꿈꾸고 있는 걸까 의문했다. 뺨을 찰싹 때려보았다 아팠다 하지만 그건 아무 뜻도 없었다. 꿈속에서도 아픈 건 아픈 거였다 소년은 그 사실을 잘 알았다. 현관으로 나가보려던 소년은 문득 방금 지나친 문 너머로 무언가 본 느낌에 되돌아섰다 연구 서적들이 아무렇게나 꽂힌 서가들 사이 빠끔히 얼굴 내민 벽에 붉은 글씨가 갈겨 쓰여 있었다. “안 미쳤어!!!” 바닥에는 붉은 물웅덩이가 있었다 다음 순간에야 그게 피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람의 몸에서 쏟아낸 것이라곤 상상할 수 없는 양이었다. 소년은 현관으로 달렸다. 붉은 바탕에 초록 동그라미가 그려진 구급용 모래차가 막 출발하고 있었다 차 뒤에 서있던 사람들이 멍하니 뒤돌아 소년을 보았지만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괴물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연산2, 손 박사, 계측1, 연산1, 발 박사, 배 박사 모두. 소년은 응급차에 실려 간 게 팔 박사라고 짐작했다. 팔 박사는 팔목을 자른 걸까? 미치지 않기 위해서? 혹은, 안 미쳤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혹은, 다짐하려고? 하지만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었다 그럴 표정들이 아니었다. 이윽고 사람들은 하나둘 씩 연구소 안으로 들어갔고, 어리둥절한, 방금 잠에서 깨어난 지 십 분도 채 되지 않은 소년만이 오후의 두 햇살 속에 남겨졌다

사람들은 말없이 벽에 묻은 피와 바닥에 고인 피를 지우고 닦아낸 다음 일찌감치 퇴근했다. 손 박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에는 아무도 출근하지 않았다.

말없이 혼자 늦은 아침을 먹으며 간밤에 꾼 꿈을 되새겼다 그때였다. 비틀거리며 손 박사가 식당에 들어섰다. 소년은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잖아도 아침을 먹고 나면 박사에게 가볼 참이었다. 혹시나 박사가 박사 방의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지는 않을까 소년은 두려웠다.

박사는 말없이 소년의 반대편에 앉았다. 한동안 묵묵히 둘은 아침을 먹었다 간밤에 꾼 꿈을 말할까, 소년은 잠시 망설였지만 그럴 틈이 없었다. 손 박사는 단호한 태도로 그릇을 비웠다 그래서 소년도 단호한 표정으로 간밤 꿈을 되새기며 접시를 비웠다. 무슨 맛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박사가 말했다.

- 꿈의 구조는 꿈을 이루는 정보 입자를 내면으로 끌어당기려는 흡력과 꿈의 질료 내부에서 외부 객관 현실로 밀어붙이는 반탄력들이 결합하여 작용한 결과다. 이와 같이 바깥쪽을 향한 압력이 정신 질료의 조건들, 특히 밀도에 대해 가지는 관계를 정신의 상태 방정식이라고 하자. 일반적인 꿈의 경우 상태 방정식은 고온 기체의 물리적 현상의 기술과 유사한데, 이는 충분히 이해되고 있다. 반면 활성꿈의 경우 상태방정식은 정신력의 상세한 특성에 따라 결정되는데, 여기에 대한 이해는 불충분하다.

-……네?

- 쓰고 있었던 책의 한 구절일세. ‘꿈의 분석’이라는 제목을 붙일 생각이었지 웃기지도 않게 말야.

손 박사는 쓰게 웃었다.

- 너무 많이 들여다봐서, 외울 지경이야. 다 쓸데없어졌지만.

- 네?

- 이젠 다 끝났어. 모두 끝났어. 내 연구라는 건 결국 이상한 정신 상태를 가진, 결코 보편화될 수 없는 비정상적 뇌를 기반으로 한 개별적 탐색이었을 뿐이었고, 그것도 결코 궁극적인 해석에는 가닿지 못했지. 다 내 잘못이야. 모두들 떠나기로 한 것도 결코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

소년은 할 말이 없었다 그때 다시 간밤 꿈에 들었던 소녀의 말이 귓전을 때렸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꿈꾸지 못한다는 거야?

응. 요즘 들어서는 꿈을 꾸는 것 같지만 확실히는……

그러니까, 네가, 네 세계에서는 꿈꾸는 유일한 사람?

뭐, 아마도……. 어쩌면 말이지, 그러니까……

그럼 그 사람들은 꿈이 뭔지 전혀 모른단 말이야?

아니야, 그 사람들도 꿈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어, 그러니까, 날 통해서 말이야. 내가 꿈을 꾸고 보고하면, 꿈의 입자의 방정식을 만들어내려는 거 같아.

꿈의 입자?

응…… 꿈이 어떤 입자로 이루어져 있는지, 그 입자는 어떤 함수를 따르고 있는지……

아니야. 소녀는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꿈은 입자로 이루어진 게 아냐. 세상은 입자로 구성된 게 아

하지만 해야 해.

박사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잠시 동안 정신을 놓았던 소년은 뒤늦게 네? 반문했다. 초점이 풀린 눈으로 박사가 말했다.

- 해야 한다고 했다. 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가 없구나. 모두 내 책임이야. 내가 초래한 문제니까 내가 해결해야 해.

그러면서 박사는 팔을 들어 소년에게 뻗었다. 그 손에는 작은 권총이 들려 있었다.


10.
- 왜……왜……

얼어붙은 소년은 더듬거리며 물었다. 뭘 알고 싶은지 알지 못한 어조였다. 하지만 박사는 대답했다.

- 전염성이야. 네 그……꿈은, 전염성이야. 나는 너무 어리석었고, 그렇게 위험한 증상을 더욱 북돋기만 했어. 하지만 뒤늦게나마 사태를 파악했으니 책임을 져야지. 그래, 책임을 져야해.

그리고 권총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 안 돼요.이번에는 박사가 얼어붙었다 어느새 소녀가 총구를 가로막고 서 있었다.

- 너넌, 뭐……뭐야?

- 꿈이에요.

박사는 덜덜 떨면서 웃었다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 아, 물론 그렇겠지. 이건 꿈이겠지.

소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 병이야, 병이 골수에 끼친 거야.

박사가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소녀의 가슴 앞으로 총구를 드밀었다.

- 그렇다면 넌 없는 거야. 가짜야. 헛것, 환영이지. 내가 방아쇠를 당기면 죽는 건 저 아이고, 모든 문제는 끝나겠지

- 과연 그럴까요?

흔들림 없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소녀가 물었다. 그 말에 박사는 혼란스런 표정을 지었다.

- 이건 꿈이야, 꿈일 뿐이야. 네가 네 입으로 그랬지? 그래, 꿈이야. 그럼 빨리 현실로 돌아가서 문제를 해결해야겠군.

잠시 활기차게 외쳤지만 그러나 곧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 어떻게 깨지? 권총을 돌려 잡고 손잡이로 이마를 후려쳤다 퍽 소리와 함께 새빨간 피가 튀었다 휘청거리면서도 박사는 아픈 기색보다는 - 왜 안 깨지지? 피가 흐르는 이마로 절망적인 표정을 짓더니

권총을 고쳐 쥐고 자신의 관자놀이에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 탕!!!!

총성이 귀가 먹먹하게 되튀어 울렸다 박사는 머리가 산산조각 났다 소년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박사님!!!” 소년이 손을 입으로 틀어막고 흐느끼며 주저앉는데 소녀는 침착하게 한 손을 들어올렸올어들 을손 한 게하착침 는녀소 데는앉저주 며끼느흐 고막어틀 로으입 을손 이년소 ”!!!님사박“ 다렀질 을명비 디마외 이년소 다났 각조산산 가리머 는사박 다렸울 어튀되 게하먹먹 가귀 이성총
!!!앝 -

다겼당 를쇠아방 고누겨 에이놀자관 의신자 고쥐쳐고 을총권

니더짓 을정표 인적망절망적인 표정을 짓는 박사에게 소녀는 조용히 말했다

- 꿈은 입자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세상도 입자로 구성된 것이 아니에요. 다만 꿈일 뿐이에요.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꾸는 꿈. 당신들은 지루한 꿈을 너무 오랫동안 꾸고 있었어요. 왜 당신들을 얽매고 있는 꿈에서 헤어 나오지 않으세요? 왜 지금, 여기와 다른 것은 꿈꾸지 않죠?

박사는 묵묵히 고개를 들었다 두 눈은 텅 빈 공허로 번득였다

- 너는 누구지? 내가 원하는 건 단지, 우리가 던져진 이 세상을 이해하고 싶었던 것뿐이야 우리의 삶이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던져진 이 세상이 결코 잔혹한 우연에 의해서 진행되는 바보들의 텅 빈 행렬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야. 질서는 이성에 의해서 확보되고 이성은 수식에 의해서 담보된다. 수식에 포착되지 않는 사상事象은 무질서하고 따라서 무의미해. 내가 원했던 건 단지 인간도 우주의 거대한 수식에 포함되는 것뿐이었어. 그런데 도대체 넌 누구지?

꿈이에요 말했잖아요 세상은 거대한 꿈이에요 세상은-우주는 고정된 것이 아니에요 꿈꾸는 사람들의 모든 꿈이 모인 것이에요 나는 수많은 세계들을 보았어요 사람들이 자신들을 옭아매는 꿈 밖에 꾸지 못한 세계들도…… 그리고 어느 날인가 이런 꿈을 꾸었어요 사람들에게 다른 꿈을 보여주자 다른 꿈도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자 세상은, 삶은 다만 꿈이고 우리가 우리의 꿈을 꾸기에 달렸다는 것을 알려주자 그러면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럼으로써 우주가 행복해지는 꿈을 꿀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소녀는 한 손을 들어올렸다. 식당 벽 한켠에 문이 열렸다. 문 너머로는 초록빛 초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회색 하늘 아래 맑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 안녕.

소녀는 소년의 손을 잡고 문으로 걸어가며 인사했다.

- 안녕. 잊지 마세요. 다른 꿈을 꾸면 다른 세상이, 다른 삶이 열려요.

그리고 소년과 함께 문 너머로 사라졌다

소년과 소녀가 들어가자 문은 조용히 닫혔다.

박사 혼자 남았다.

박사는 조용히 일어섰다. 닫힌 문을 향해 걸어갔다.

다음 날, 신고를 받고 출동한 감찰들이 도착할 때까지 박사는 묵묵히 연구소 식당 벽 한쪽을 쓰다듬고 있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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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