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FI

어떤 미운 오리 새끼의 죽음

소설가

2008년 3월 통권 30호

듣는 사람의 기분 같은 것은 털끝만큼도 고려하지 않는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당신은 규격외품입니다, 라고 외치는 것 같은 그 소리가 퍼지기 무섭게 사람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모인다. 얼굴에 피가 몰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어머, 어쩌면 좋아, 그런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일찌감치 옆줄로 빠져 있을 것을, 후배 은영이와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을 놓고 있던 것이 실수였다. 경고음이 나자 저쪽에서 검사관이 다가와 내게 말을 했지만 축약어를 잔뜩 사용하는 2세대 영어라 절반도 이해할 수 없었던 난 어쩔 줄 모르고 우물쭈물했을 뿐이다. 


“선배, 손가락을 다시 대래요.”


뒤에서 은영이가 속삭이는 소리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다른 동료들은 이미 검사대를 빠져나가 10미터는 떨어진 곳에서 일행이 아닌 척하는 중이었고, 가장 뒤에 있던 우리 둘만 검사대에 걸려 있었다. 매정한 사람들.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검사관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손가락을 다시 검사대에 대었다. 손가락 끝에 따끔한 느낌과 함께 피가 한 방울 흘러 기계 안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러고는 다시 시끄러운 삑삑 소리. 


“저기, 이건 그러니까,”


이유를 짐작하는 내가 설명을 위해 입을 열려던 차에, 고개를 갸웃하며 에러 메시지를 확인하던 검사관이 다짜고짜 내 손을 잡고 휴대용 검사 기계에 가져다 대었다. 


“아얏.”


준비도 없이 바늘이 손끝을 뚫는 감촉에 나도 모르게 짧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검사관은 휴대용 검색 기계에 나온 결과를 보고 검색대의 기능을 일시 중지시킨 다음 날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은영이와, 그 뒤에 줄을 서 있는 사람들에게 크게 뭐라고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오염 위협이니, 격리 조치니, 그런 의미의 단어들만 띄엄띄엄 들려왔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떻게 해. 검사관에게 이야기를 해보려고 했지만 그가 대꾸하는 말은 좀처럼 알아듣기 힘들었다. 


“잠시만.”


그 때까지 뒷짐을 지고 구경만 하고 있던 연아가 그제야 나서서 검사관을 제지하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은 나를 가리키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누더니, 자기들끼리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대화를 따라가지 못한 탓에 내가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그녀는 얼굴을 팍 구기면서 말했다.


“증빙 서류 말이야. 가지고 있을 거 아냐?”


“아, 응.”


가방을 뒤적여 서류 다발을 건네주자 그녀는 그걸 검사관에게 넘겨주었다. 검사관은 얇은 책 한 권 분량은 되는 서류를 휘릭 넘겨보고 내게 다시 던져 주었다. 묵묵히 그걸 가방에 다시 넣고 있자 연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비표준형 유전형이라서 3일 동안 격리되어 있어야 한데.”


“하지만 출입국 규정에는 그런 게 없었잖아.”


“새로 생겼대. 국제 표준 유전자형 100번 이전이나 비표준형 유전형은 면역 체계 문제로 병 같은 거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3일 격리 조치라는데.” 


“말도 안 돼. 너도 알잖아, 난 병 같은 거…… 그리고 3일이면 다 끝날 시간이잖아!”


“규정이 그렇다는데 어떻게 해. 그리고 넌 솔직히 안 와도 되잖아. 너 때문에 다들 발목 잡힐 수는 없으니까 알아서 처신해.”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고개를 숙이고 애써 목소리를 죽여서 말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하는 거 아니니?”


“소은아. 너랑 고교 동창이기는 해도 난 네 뒤처리 담당이 아니야. 솔직히 이번에 데리고 나온 것도 나름 애쓴 결과인 거, 너도 알잖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을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연아는 좀 말이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나름 위로의 말을 주워섬겼다.


“3일 후부터는 그냥 돌아다닐 수 있다니까, 끝나고 관광 같은 건 같이 다녀도 되겠지 뭐. 뭘 걱정해? 21세기인데 설마 검사관이 무슨 가혹 행위라도 할 거 같아? 걱정 말고 휴가라고 생각하고 좀 쉬다가 와. 그럼 우리 먼저 간다. 은영 씨, 얼른 와요. 늦겠어.”


끝부분은 그때쯤에야 겨우 사람들을 비집고 검사대를 통과한 후배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녀는 내 옆을 지나가면서 “나중에 연락할게요, 기운 내세요.” 라고 속삭여주었지만 그다지 기운이 나지는 않았다. 발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고개를 들고 아직까지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검사관을 보며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말도 잘 통하지 않는 타국 한가운데, 남들과는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버려진 사람이 하는 말이 우는 것처럼 들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어디로 가면 되죠?”


검사관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자취할 때 쓰던 것과 비슷한 삭막한 단칸방이었다. 원래 무슨 여관이었던 모양인데, 이것만 봐도 그가 말하는 감염 위험으로 인한 격리 조치 운운이 별 근거 없는 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말 그런 위험이 있다면 더 제대로 된 시설에 넣었을 테니까. 


나 말고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 보였기에 조금 안심하고, 검사관이 준 배지를 살펴보았다. 발신기인데, 이걸 달지 않고 돌아다니다가 잡히거나, 달고 있어도 출입이 금지된 장소에 들어가면 바로 본국으로 돌려보내진다고 했다. 천덕꾸러기가 된 것 같아. 못생긴 모양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본국으로 돌려보내지는 것도 싫었기에 셔츠에 달았다.


“짐을 풀어야지.”


듣는 사람도 없는데 혼잣말을 한다. 자꾸 말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말하는 법도 잊어버릴 것 같아서. 본의 아니게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던 탓에 걸린 병이다. 3일 만에 다시 싸는 것도 귀찮았고, 짐을 다 풀면 여기에 눌러 앉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간단하게 입을 옷 몇 벌과 읽을 책 몇 권을 꺼내 놓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아, PDA도 빠뜨리면 안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PDA를 꺼내자 메일이 도착했다는 녹색 표시등이 점멸하고 있었다. 


‘저녁 시간이 지나야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거기는 어디예요? - 은영’


짧은 메시지였지만 마음 씀씀이 고마웠다. 그래도 긴 답장을 보낼 기운은 없어서 주소만 짧게 쳐서 보냈다. 바빠서 그런 거라고 생각해 줄까? 네비게이션이 있으니까 찾기는 어렵지 않겠지만. 


그러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눕기만 해도 가득 차는 좁은 방에서 뒹굴면서 하염없이 시간을 죽이는 수밖에. 그러다 보니 이내 공항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부끄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화도 났다. 누구는, 그러고 싶어서 그랬나? 부모님이 마음대로 이렇게 만들어버린 걸 가지고 날더러 어쩌라는 거야.


“연아 그 지지배. 말하는 싸가지하고는, 미워죽겠어.”


혼자서 중얼거려봤자 화만 더 날 뿐이었다. 두고 봐, 언젠가는 꼭 복수해 줄 테니까. 당했던 대로 그대로 갚아줘야지.


하지만 어떻게? 


방법이 없었다. 연아는 나보다 키가 10센티미터는 크고, 화장을 하지 않아도 뽀얀 얼굴과 먹어도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몸뿐만이 아니라 머리도 몇 배는 좋았다. 돈 많고 잘난 부모님 덕분에 최신 표준형으로 조작을 받고 태어난 연아와, 유전 기사의 실수로 기형으로 태어난 어머니와, 유전형의 오류로 역시 기형이 된 아버지가 멋대로 작당을 해서 최소 옵션으로 태어난 나는 출신성분부터가 달랐다. 출발선부터가 달랐는데 달리기 속도도 차이가 나니 연아보다 두 배, 세 배 노력을 해도 따라갈 수 없는 것은, 억울하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후천적으로 유전자를 바꾸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지만, 새로 몸을 배양해서 뇌 이식을 하는 방법이 있기는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잠깐 희망을 가져보기도 했지만 까무러칠 정도의 비용이 든다는 말에 곧 꿈을 접고 말았다. 6년째 승진도 못하는 내 쥐꼬리만한 월급으로는 평생을 모아도 부족한 돈이었으니까. 나중에 알게 된 것이었지만, 돈 많은 한량들이나 가끔 찾아가서 최신 유행에 맞춰 몸을 바꾸는 용도로나 쓴다고 했다. 


세상은 불공평해. 


불평을 해보았자 달라질 것은 없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깜빡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조그마한 창문 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시계를 보니 9시가 한참 넘어 있다. 은영이는 오지 않은 모양이네. 혹시 여기를 찾지 못하는 건가, 그렇다면 메일이라도 보냈을 텐데 하고 PDA를 확인해 보았지만 추가로 온 메일은 없었다. 바빠서 그런가 보다. 다시 자리에 누웠지만 낮에 한참 자버린 탓에 정신은 말똥말똥하기만 했다. 혼자 있어봤자 우울하기밖에 더하나. 그런 생각에 대충 옷을 꿰어 입고 밖으로 나왔다.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관리인 같아 보이는 사람이 힐끔 나를 쳐다보기는 했지만 배지를 달고 있었던 탓인지 무사히 넘어갔다. 밖으로 나오니 막상 갈 곳이 없었다. 말도 잘 안 통하고, 지리도 모르는 타국인 데다가, 출입이 가능한 곳도 제한되어 있다 보니. 다시 들어갈까 하는 생각도 잠깐, 근처 지도 목록을 불러서 대충 훑어보고 아무 술집에나 들어갔다. 술이라도 마시면 기분이 나아지겠지. 몇 년 전이라면 이런 곳에 돈을 쓰는 일도 없었겠지만, 돈 모으는 것은 포기하고 난 다음이니까. 


들어간 술집의 분위기는 예상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았다. 콘크리트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벽에, 입구는 두터운 철문이라 허름한 느낌도 났지만 나름대로 인상적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1, 2인용 작은 테이블이 많고 조명이 어두워서 옆 사람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저녁을 먹지 않았다는 생각이 나서 간단한 음식과 맥주를 주문하고, 음식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며 자리에 앉아 주위에서 들리는 알 수 없는 외국어들의 묶음에 귀를 맡긴다. 처음에는 뭐가 뭔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익숙해지자 그중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반신반의했지만 모국어를 못 알아들을 리는 없었다. 연아와 은영이었다. 둘이서 나한테 찾아왔다가 자리에 없으니까 밖으로 나온 건가 싶어 엉덩이를 떼었다가 들려오는 말소리가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곤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한 달 전인가? 생일선물을 해줬는데 엄청 좋아하는 거예요. 평생 한 번도 못 받아본 사람처럼.”


귀에 익은 은영이의 목소리였지만 그 애는 저렇게 사람을 깔보는 투로 말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생일선물이라니?


“못 받았을 걸? 걔 고등학교 때도 왕따였는걸. 그나저나 너도 사람이 참 나쁘다. 그렇게 놀려먹으면 재밌니? 걔 둔한 눈치로는 알아차리지도 못할 텐데.”


대꾸하는 연아의 목소리. 설마 둘이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에이, 언니만 하겠어요. 잘라도 되는 걸 굳이 잡아두면서 괴롭히고 있는 거 연구소 사람들은 다 알아요. 소은 언니만 빼고.”


내 이름이 나오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 이야기였어?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난달에 받은 열쇠고리를 손이 아프도록 움켜쥐었다. 작은 백조 새끼 모양 피규어였다. 생일 축하드려요, 라고 말하면서 웃던 네 얼굴이 아직 기억나는데, 그게, 날 놀리는 거였어?


그만하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너였니? 그런 소문내고 다닌 게? 난 걔 인생이 불쌍해서 그러는 거야. 지금 잘리면 어디 다른 곳에 취직을 하겠어, 아니면 시집을 가겠어? 다 늙은 부모님도 별 볼일 없는데 거기에 붙어살기를 하겠어?”


“그렇게 치면 저도 불쌍해서 그러는 거예요 뭐. 소은 언니 얼굴에 주름살 생겼다고 화장하고 다니는 거 아세요? 저번에는 다이어트도 하던데. 불편해서 어떻게 그러고 사는지 모르겠어.”


“체질이 그러니 별 수 없잖니. 그건 그렇고 알아듣는 사람 없다고 너무 막말하는 것도 안 좋다.”


“예, 예.”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서고 말았다. 이상하게도, 마음은 침착했다. 너무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면 화도 나지 않는다고 하던데 꼭 그런 경우였던 것 같다. 음식과 맥주잔을 들고 내 자리로 오던 웨이터의 어리둥절한 얼굴을 뒤로하고, 그대로 카운터로 직행해서 계산을 치르고, 방으로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썼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정신을 잃을 때까지 울었다.




누군가 날 흔드는 손길에, 언니, 언니 하는 달콤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다. 눈을 뜨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은영이의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을 보자마자 아까의, 언젠지 모를 적의 일이 생각나서 속에서 뭔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고개를 돌리자 머리맡에 놓인 시계가 보였다. 두 시간 정도 지난 것 같다. 


“나 괜찮아. 그만 흔들어줄래?”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혀를 조금 내밀고 네에, 하고 대답하며 덧붙인다.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일 때문에 좀 늦었는데 와보니 쓰러져 계시고. 식사는 하셨어요? 먹을 걸 좀 사 왔는데.”


그 말투에, 그 표정에는 거짓이 없다. 잠깐이지만 내가 악몽을 꾼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네가 밀어 놓은 음식을 보자 헛웃음이 나왔다. 패스트푸드잖아, 나 이런 거 살찐 다고 안 먹으려고 하는 거 알잖니 너는? 


“괜찮으세요?”


은영이가 다시 물어본다. 그 얼굴에, 그 눈빛에서 나는 전에는, 그녀의 본심을 몰랐을 적에는 알 수 없었던 표정과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에게 베푸는 우월감 섞인 동정. 구역질이 나려고 했다. 부축하려는 그녀를 밀어내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미안, 속이 좀 안 좋은 것 같아. 좀 누워 있을게.”


“약 사 올까요?”


“으응. 괜찮으니까 먼저 돌아갈래? 시간도 늦었잖아. 아까 낮에 보니까 여기 밤에 혼자 다닐 만한 곳은 아닌 것 같더라.”


“택시 부르면 되는데…….”


한사코 내 옆에 남으려는 그 애를 간신히 달래서 돌려보내고, “나중에 또 연락할게요.”, 하는 말을 들으며 나는 속으로 차갑게 웃고 있었다. 그 웃는, 인형처럼 예쁜 얼굴을 뭉개줄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은영이가 돌아가고 난 다음 짐을 뒤지다가 곧 생각을 고쳐먹고 밖으로 나왔다. 공중전화는 어찌나 찾기가 힘든지. 한참을 뒤진 후에야 겨우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되는 대로 집어넣고 다시는 연락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전화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달칵 하는 소리가 났다.


“여보세요?”


“아저씨? 저 기억하세요?”


“아, 소은이냐? 오랜만이구나. 잘 지내냐? 부모님은 잘 계시고?”


“네, 그런데 그런 것보다 아저씨 아직도 그쪽 일 하세요?”


잠시 침묵.


“그쪽 일이라니 무슨 소리냐?”


“이거 공중전화예요. 그냥 말씀하세요. 전에 무슨 인권 단체인가 하시던 거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유전 조작 피해자들의 클럽에서 서로를 만났다고 했다. 30살이 넘도록 결혼도 못하고 있던 두 분은 그곳에서 바로 마음이 맞아, 얼마 안 가 결혼을 하고 나를 낳으셨다. 내가 태어난 후에 어머니는 관두셨지만 아버지는 꾸준히 나갔고, 나도 어릴 적에 한두 번은 아버지에게 끌려 그곳에 간 적이 있었다. 대부분은 그냥 모여서 우리는 왜 이 모양 이 꼴이냐 한탄하는 사람들이었지만 드물게는 유전 조작 반대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금 전화를 하고 있는 이 아저씨처럼. 


취직을 하고 일 년이 지나지 않은 때였던 것 같다. 취직을 하자마자 부모님 집에서 뛰쳐나와 고시원으로 들어간 나를,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 찾아온 적이 있었다. 싸구려 음료수 한 통을 사 들고 와서는 독립을 축하한다고 했지만 정작 아저씨가 찾아온 것은 다른 용건이 있어서였다.


“뭐, 한다면 하고는 있는데 그건 갑자기 왜?”

한참을 수화기 너머에서 주저하던 아저씨가 겨우 대답을 했다. 

“옛날에 부탁하셨던 일 있잖아요. 지금이라도 돼요?”



우물쭈물하며 한동안 일상적인 일로 말을 돌리던 아저씨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유전 조작 반대 활동을 같이 할 생각이 없냐고. 


‘제가 무슨 연구소에 들어갔는지는 아세요?’


‘알다마다. 그러니까 하는 이야기인데, 정보 같은 거 아는 게 있으면 좀 알려줄 수 없냐는 거지. 물론 사례는 할 거다.’


‘무슨 이야기를 하시나 했더니, 저보고 스파이 짓을 하라는 거예요? 게다가 아저씨네 단체는 과격파잖아요. 친구들이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사람 잘못 보셨네요.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할 테니까, 그만 가주실래요? 다시 연락하지도 마시고.’



“진심이냐? 너도 알고 있겠지만 우리는…….”


“알아요.”


감은 눈꺼풀 안에 어른거리는 옛날 일을 떠올리면서, 나는 결심을 하고 한마디 한마디를 씹어 내뱉었다.


“그래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약간의 실랑이 끝에 겨우 연락처를 하나 받을 수 있었다. 메모는 남기지 않는 게 좋다고 해서 몇 번이나 되물어서 완전히 외운 것을 확인한 다음 전화를 끊었다. 깊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바로 수화기를 다시 든다. 결심이 흐려지기 전에 마저 끝내야지. 


 


네, 유전 조작을 반대하는 생명 윤리 수호 연대 상담소입니다. 뭘 도와드릴까요?”


무슨 말이 나올지 잔뜩 긴장하고 있었지만 전화를 받은 것은 실소가 나올 정도로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 남자였다. 제대로 전화를 건 것이 맞는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바라며 최대한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연락이 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아하. 그 분이시군요.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저희가 매수하거나 스파이를 박아 넣는 일은 종종 있어도 자기가 하겠다고 나오시는 분은 또 처음인지라.”


“시끄러워요. 뭐가 필요한지나 말해 봐요.”


그쪽이 요구하는 것은 내 쪽에서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에 대한 정보와, 해당 연구원에 대한 정보였다. 프로젝트에 대한 정보는 망설이다가 귀국한 이후에 알려주겠다고 했지만 연구원에 대해서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이게 목표였으니까. 핵심 연구원들이 출국해 있다는 것과, 인적 사항, 묵고 있는 숙소의 방 번호까지 이야기하는 데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남자는 마지막으로 사례금 이야기를 꺼냈다. 돈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액수를 듣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 정도 금액이라면 예전에 포기했던 다른 종류의 복수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연아와 은영이에게 복수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단순히 조금 잘못 태어났다고 날 쓰레기 취급했던 세상 사람들 전부를 내려다볼 수 있을 정도로 좋은 몸을 가질 수 있을 만한 돈이었으니까. 


전화를 끊고 부스에서 나와 들이마신 이국의 밤공기는, 전과 달라졌을 리 없겠지만, 상쾌했다. 그대로 숙소로 돌아와 자리에 누웠다. 이번에는 꿈 한 번 꾸지 않고 푹 잘 수 있었다.




날 다시 잠에서 깨운 것은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였다. 눈을 비비면서 일어나 번호를 보니 은영이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다급한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왜 이렇게 늦게 받아요? 귀국 결정이 났으니까 짐 전부 챙겨서 공항으로 오래요.”


잠이 덜 깬 몽롱한 정신으로 듣기엔 밑도 끝도 없는 소리였다. 


“무슨 소리야?”


“그게, 나중에 설명할 테니까 일단 공항으로 오세요. 4시까지예요. 아셨죠?”


잠깐만, 하고 불러봤지만 이미 끊어진 다음이었다. 액정 화면에 떠 있는 숫자가 지금이 오후 3시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다시 걸어보려다 관두고 짐을 챙겼다. 애초에 풀어놓은 것도 없었으니 다시 쌀 것도 별로 없었다. 택시를 타고 공항에 도착했을 때가 세시 반.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다 도착해 대합실에서 불안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연아만 제외하고. 


날 먼저 발견한 은영이가 손을 흔들었기에 일단 그쪽으로 가방을 끌면서 움직였다. 그녀는 내가 가는 것을 다 기다리지도 못하고 내 옆으로 다가와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무슨 일인지 아직 못 들으셨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아직 뉴스에도 안 나왔지만, 간밤에 습격당했어요.”


작고,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밖에 나가 있던 사람 몇 명이 다쳤고, 연아 선배가 죽었어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가방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죽었다고? 나 때문이야? 하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을 애써 집어삼켰다. 예상하지 못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렇다고 이런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아니다. 기대했었다. 


죽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 안 그래? 과격파라고 했잖아. 그 단체에서 무슨 일을 해왔는지는 알고 있었다. 연구소 폭파, 연구원 살해, 기타 등등. 알고는 있었지만, 복수하겠다는 생각밖에 머릿속에 없었던 어젯밤과 자고 일어나서 머리가 차가워진 지금은 달랐다. 


옆에서 은영이가 뭐라고 계속 떠들어댔지만 하나도 듣고 있지 않았다. 떠들다가 제풀에 지친 그녀가 입을 다물 때까지, 그리고 귀국하는 비행기 내에서 내내, 고민했다.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기쁜 것인지, 슬픈 것인지, 죄책감에 사로잡혀 괴로워하고 있는 것인지.


흡사 밀입국자처럼 몰래 공항을 빠져나와 연구소로 돌아온 다음에는 어느 정도 감정이 정리되어 있었다. 신문과 뉴스는 모처럼 터진 큰 사고를 기뻐하는 것처럼 연일 사고 소식을 내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본의 아니게 사고 경위를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날 술집에서 은영이는 내 숙소 쪽으로 왔고, 연아는 좀 더 있다가 호텔로 돌아갔다고 한다. 돌아가는 도중에 괴한의 습격을 받아 사망. 빠르기도 해라. 연락을 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시각이었다. 범행 성명은 우리가 귀국행 비행기에 타고 있는 동안 발표되었다. 내용은 별 볼일 없었다. 우리는 유전 조작을 반대하고 가진 그대로 태어날 수 있는 인간의 권리를 주장합니다, 였든가. 


칼에 찔리면, 아프겠지? 고등학교 때, 못에 찔려 이틀 정도 입원했던 기억이 났다. 다들 말은 안 했지만 그게 연아가 주도한 따돌림의 일환이었다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무척 아팠었지, 그때. 피를 보고 비명을 지르고,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절뚝거리면서 혼자 양호실에 갔었다. 그것보다 더 아프겠지. 죽어가면서 너도 도와달라고 외쳤겠지? 나 때문에 그런 일을 당했다는 걸 알았을까? 알 수 없었겠지. 그저 운이 나빴다고 생각했을까? 


“간사해.”


무심코 중얼거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연아와 관련한 일들은 나쁜 추억들만 끄집어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리고 그것과 연아가 당했을 고통을 비교하면서, 나 자신을 정당화한다. 내가 훨씬 아팠어, 내가 훨씬 고통스러웠어. 하지만 실제로 그랬는걸. 


조금씩, 조금씩, 그 애가 죽었다는 사실이 기뻐지고 있었다.




자료를 복사하는 일이 다 끝났기에 책임 연구원인 선현이를 만나러 갔다. 휴가를 내기 위해서였는데, 잔뜩 잔소리를 들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각오를 단단히 굳히고 있었지만 정작 선현이는 쉽게 승인을 해주었다. 


“그래, 충격이 컸지? 집에 가서 쉬는 게 좋겠다.”


“응. 고마워.”


“장례식은 다음 주래. 올 거지?”


“잘 모르겠어, 지금은.”


“그래.”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책상머리로 고개를 묻었다. 그만 나가보라는 이야기인 것 같아, 뒤로 돌아 문손잡이를 잡았을 때 그녀가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뒤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많은 모양이던데 너무 신경 쓰지 마.”


“응?”


무슨 말인지 몰라 되물어보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저을 뿐이었다.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더 이야기를 해줄 기색도 아니어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오랫동안 궁금해할 틈도 없었다. 선현이가 말하려고 했던 게 무슨 의미였는지 금방 알 수 있었으니까. 난 왜 듣지 않아도 좋은 이야기는 꼭 듣고야 마는 걸까?


선현이의 사무실을 나와 복도 모퉁이를 돌려고 하는 참에 휴게실에서 소곤거리는 소리를 듣고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또 내 이름이 오가고 있어. 그냥 지나치려고 했지만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말이 들렸다.


“같이 따라간 사람 많았는데 왜 연아 씨가 그런 일을 당한 거야? 차질이 크겠는데.”


“그러게 말이야. 거 왜, 소은 씨였나? 그 사람도 있잖아. 일도 잘 못하고, 별로 도움도 안 되고, 얼굴도 별로고. 그러고 보니 왜 여태 안 잘렸지?”


“그 사람하고 연아 씨하고 고교 동창이래. 빌붙어 있는 거지 뭐.”


그런 적 없어. 그런 적 없어! 


“뭐 곧 잘리지 않을까? 안 그래도 구세대는 정리해고할 거라는 소문이 도는데.”


“쉽게 안 잘릴걸. 책임도 동창이라던데?”


“누구는 좋겠다. 난 어디 잘나가는 고교 동창…….”


그 말은 미처 맺어지지 못했다. 더 이상 참고 들을 수 없었던 내가 휴게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기 때문에. 못 볼 것이라도 본 듯한 남자 연구원들의 그 표정들이란.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답답한 가슴에 걸린 것처럼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움츠러드는 그 사람들 얼굴을 한 번씩 노려봐주고,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은 것이 고작이었다. 


나쁜 놈들. 나 같은 사람은 구세대니, 규격외품이니 하고 뒤에서 떠들어대지만, 실상 너희들도 다른 게 없다는 걸 알아? 다들 비슷비슷한 얼굴을 해 가지고선. 전자 제품처럼 번호 붙여서 불리는 것이 그렇게도 좋아? 어차피 십 년만 지나면 너희들 유전형도 다 구식이 될 거야. 어디 그뿐인 줄 알아? 


연아의 일을 생각하니 오히려 화가 조금 가라앉았다. 날 깔봐? 두고 봐, 마음에 안 드는 놈들은 하나씩 팔아 넘겨 없애버리겠어. 그리고 그렇게 받은 돈으로 최신 유전형으로 날 바꾼 다음에, 너희들이 한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무시해 주겠어. 구형이라고. 능력 없다고. 못생겼다고. 


연구소를 나올 때쯤에는 이미 화는 다 가라앉고 오히려 그 사람들이 불쌍한 기분마저 들고 있었다. 결국 자신들이 속한 세상이 전부인 줄 알지만, 내 말 한마디에 내일 아침에 눈을 뜰지 말지가 결정되는, 불쌍한 인간들. 


이런 기분이었니? 이런 기분으로 날 보고 있었던 거니, 은영아?


연구소를 나와 전에 몇 번이고 문 앞만 서성거렸던, 일명 미용 시술소라는 곳으로 직행했다. 혈액과 체세포를 조금 채취하고 옵션을 골랐다.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체질로. 노화는 당연히 제외. 머리와 눈은 유행하는 색깔로. 지능 지수는 당연히 최대치. 공항에서 당한 수모가 생각나서 면역 기능 강화도 빼놓지 않았다. 유전자 조작 자체는 이미 표준형으로 라이브러리가 구축되어 있기 때문에 오래 걸리지 않았다. 클론을 고속 성장시키는 데 일주일 정도, 그 후에 뇌수술을 하고 상처가 아물고, 세포 치료와 재활 훈련을 하는 데 두 달 정도 걸린다고 했다. 일주일 후로 수술 날짜를 잡고, 선금을 치른다. 그동안 모아둔 돈과 연아를 팔아넘기고 받은 돈을 합쳐도 통장 바닥이 드러날 정도였지만, 이것만 끝나면 나도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아니 그보다 더 나아진다고 생각하니 마냥 즐겁기만 했다. 


“말하자면, 다시 태어나는 거지요.”


수술 상담을 끝내고 나서 의사가 한 말이다. 그 말 그대로다. 


병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무슨 수호 연대라고 하는 곳에 다시 연락을 했다. 연구 자료를 넘기고 받기로 한 돈만으로도 수술비용을 치르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수술을 마친 후에 새 출발을 할 돈도 필요했고 정리해야 되는 인간관계도 아직 남아 있었다. 수화기를 손으로 감싸 쥐고 이번에는 한 치의 거리낌도 없이 말한다. 


“이번에 새로 선임 연구원이 된 건 오은영이라는 사람이에요.”


두 명이나 죽으면 이 프로젝트는 거의 중단될 거예요, 하는 말도 잊지 않았다. 사실이었으니까. 그래서, 오히려 그 수호 연대인가 하는 쪽에서 소극적으로 나왔을 때는 내가 놀랄 정도였다. 

“그야 그렇겠지만, 경호도 더 강화될 거고 쉽게 손을 쓰기 힘들어요.”


“필요하면 좀 도와드릴 수도 있어요. 친한 사이니까 불러내거나 하면…….”


“저희야 좋죠.”


“그럼 잠시만 기다려요.”


수화기를 잠시 전화기 위에 올려놓고 시간을 확인했다. 7시가 다 되어가니까 퇴근 시간이겠지. PDA를 꺼내서 은영이에게 메일을 보냈다.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겠니? 한 시간 후에. 우리 집 근처에 있는 카페 알지? 


답장은 금방 왔다. 이제 막 퇴근했으니 바로 그리로 갈게요, 하고.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있어야 하니까 두 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다. 나는 다시 수화기를 들고 약속 장소와 시간에 대해서 말했다. 


“휴가 아니셨어요? 갑자기 보자고 해서 깜짝 놀랐어요.”


은영이는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웃는 얼굴로 카페에 도착하더니 대뜸 저렇게 말했다. 곧 저 얼굴도 보지 않아도 돼,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나도 애써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응, 나 연구소 그만둘까 하고. 다른 사람들 얼굴은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은데, 너한테는 작별인사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다른 의미의 작별 인사지만. 


“에? 그만두세요? 왜요?”


“연아 일도 있고, 솔직히 나도 많이 힘들었거든. 다들 말은 안 해도, 슬슬 나가주지 않으려나 하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동안에도 계속 생각했는데 연아가 계속 말렸거든. 그런데 이제 걔도 없고 하니까.”


은영이는 얼굴이 조금 굳어졌지만, 곧 원래의 가식적인 웃는 얼굴로 돌아오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런 소문 같은 거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선현 선배도 있고. 저도 선임 연구원이 되었으니까 언니 잘리도록 두지는 않을 거예요.”


“아냐, 내가 부담스러워서 그런 건 싫어. 그냥 관두게 해줘.”


은영이는 몇 마디 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상투적인 말로 나를 만류했지만, 내가 막무가내로 그만둘 거라고 말하자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정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도 더 말릴 수 없네요. 종종 연락은 하실 거죠?”


“응.”


웃으면서, 그렇게 대답했다. 


“저 그러면 먼저 갈게요.”


“응, 난 좀 더 있다가 갈게. 차도 남았고.”


은영이가 카페를 나간 다음 천천히 차를 다 마신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하철역으로 가려면 거쳐 가게 되어 있는 공원을 지나면서 딱 이쯤이지 않을까 하는 장소에 그 애가 쓰러져 있었다. 천천히 옆으로 다가간다. 아직 숨이 다 끊어지지 않은 모양인지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 옆에는 흘러나온 피 웅덩이에 반쯤 적셔진 싸구려 전단지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실혈량을 가늠해 보면서 가급적 피가 묻지 않도록 무릎을 굽혀 그 애 옆에 앉았다. 


“은영아.”


몇 번이고 부른 다음에야 겨우 알아듣고 초점이 잘 맞지 않는 눈으로 나를 본다. 


“언니…… 구급차를…….”


“미안. 그 전에 꼭 할 이야기가 있어. 나, 사실은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어. 들었거든? 이틀도 안 됐지? 연아 아직 살아 있을 때, 술집에서 둘이 같이 떠들던 거 기억해? 나 그 뒷자리에 있었거든?”


“그럼…….”


눈을 크게 뜨면서 말을 하려다가, 다 내뱉지 못하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뒷말도 삼킨다. 그 모습에 즐거움을 느끼면서 나는 마저 말했다.


“응. 역시 머리가 좋네. 내가 찔렀어. 칼로 찌른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같지. 팔아넘긴 거야. 매일 깔보던 사람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하니까 기분이 어때? 나 참 궁금한데. 말해 줄 수 있어?”


“난…….”


“아까 만났을 때도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느라고 고생 많았어. 사실은 장난감 하나 없어지는 게 아쉬웠던 거 다 알아.”


“전 그런 생각…….”


“그때만 해도 이런 일 당할 줄은 몰랐지? 그래도, 그동안 우리……. 2년인가? 알고 지낸 정을 생각해서 이렇게 일부러 찾아온 거야. 자기가 뭐 때문에 죽는지도 제대로 모르면 불쌍할 것 같아서. 미안, 솔직히 나 지금 무척 기분 좋다? 진즉 이럴 걸 그랬어. 연아 지지배 죽는 꼴도 봤으면 좋았을 걸 싶다.”




은영이는 그저 입을 벌렸다 닫았다 할 뿐이었다. 그 입이, 뭔가 말을 하려고 열리다가 채 닫지도 못하고 멈추는 것을 보며, 감기지 않고 크게 터진 채로인 눈을 보며, 인형처럼 예쁜 얼굴을 보면서, PDA를 천천히 꺼내 들었다. 119를 누르고, 가능한 다급한 목소리를 내려고 애쓰면서 여기 사람이 죽어가요, 얼른 와주세요, 그렇게 외치면서도, 입가가 저절로 올라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뒤로 부산한 한 주가 지났다. 경찰 조사에 끌려 다니고. 은영이가 죽는 모습을 보는 것은 통쾌했지만 몇 시간이나 조서를 꾸미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가지 말걸 하고 조금은 후회했을 정도로. 다행히 범행 성명이 뚜렷했고 뭣도 모르는 선현이가 찾아와서 애를 써줘서 나는 순식간에 동료를 두 명이나 잃고 실의에 찬 연구원을 연기할 수 있었다. 


그리고 덕분에 지금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병원 수술대에 누워 있기도 하고. 복잡한 검사와 준비 과정을 마친 다음 머리에 몇 군데 마킹을 한 채로 누웠다.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니 나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하지만 훨씬 아름다운 몸이 나란히 머리에 마킹을 한 채로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자 준비 다 되셨죠?”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수술 시간을 밤으로 잡은 탓에, 좀 졸린 표정을 하고 있는 의사가 격리실 밖에서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방금 전까지 의료용 로봇을 가지고 이런저런 테스트를 하느라 시끄러웠는데 겨우 다 끝난 모양이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키보드를 몇 번 눌렀다. 마스크 안으로 마취 가스가 들어오는 모양인지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다 끝났어. 수술이 끝난 다음을 기대하며 즐거운 상상에 젖었다. 일단 연구소에 다시 나가야지. 승진에 승진을 거듭해서 책임 연구원이 된 다음, 그동안 나를 무시하던 사람들을 마구 부려먹는 거야. 당한 대로 그대로 갚아줘야지. 커피도 타 오라고 시키고, 프린트도 뽑아 오라고 시키고. 가끔은 서류 뭉치를 얼굴에 집어던지면서 “이것도 리포트라고 쓴 거예요? 다시 해 오세요.”라는 말도 해줘야지. 야근도 마구 시키고, 그러면서 업무 수행 평가 보고는 전원 D를 줘야지. 그러면 날 불러내서 잘 봐달라는 둥, 갖은 아양을 떨 테고…….


꿈은 끝없이 계속되어, 왠지 모르지만 이미 죽었을 연아가 나오고 그 애의 남자친구를 연아보다 더 예뻐지고 직급도 높아진 내가 가로채서 결혼하는 곳까지 갔다. 연아는 그 잘난 체하는 성격에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굳은 얼굴로 내게 축하해, 같은 말을 하고 있었고 나는 그 애를 보며 웃어주고 있었다. 아련히, 멀리서 시끄러운 소음이 들려왔지만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예식장의 문이 벌컥 열리면서 주례를 맡은 의사가 들어와 마이크에 대고 “당신들 누구야!” 하고 외치는 소리,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총성이 들려왔고, 이어서 폭죽 대신 성대한 폭음, 난 정신을 완전히 잃었다.


다리가 끊어지는 것 같은 통증과 함께 정신을 차렸다. 수술실의 풍경은 눈을 감기 전과는 영 딴판으로 변해 있었다. 태풍이라도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수술 로봇들은 이리저리 부서진 채로 쓰러져 있었고, 격리실의 유리창도 산산이 부서진 상태였다. 컴퓨터 앞에는 의사가 흰 가운을 붉게 물들인 채로 넘어져 있다. 몸을 움직이려고 하다가, 다리에서 올라오는 통증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후회했다. 보지 말 걸. 수술대에서 떨어지면서 수술 기계 중 하나에 깔린 다리는 얼핏 봐도 정상이 아닌 각도로 꺾여 있었다. 


그것보다, 내 몸은 어디에 있지? 먼 곳을 찾을 것도 없이 바로 옆에 있었다. 마찬가지로 수술대에서 떨어져 있었지만 기적적으로 손상 하나 없었고, 숨도 아직 붙어 있는 모양으로 가슴도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몸만 멀쩡하면 다시 수술을 받을 수 있고, 그러면 지금 다리가 부러진 것 정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탁, 탁, 하는, 단단한 물체가 바닥에 두 번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내 앞에 둥근 물체가 떨어졌고, 그 물체는 수백, 수천 개의 쇠구슬을 벼락처럼 뿌리면서 폭발해 나와 내 앞에 있던 새 몸을 갈가리 찢어발겼다. 통증을 느낄 사이도 없이 흐려지는 시야 한구석에 경쾌한 음악과 함께 천장에 투영되어 반짝이는 글자들이 보였다. 


우리는 유전 조작을 반대하고 가진 그대로 태어날 수 있는 인간의 권리를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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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