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FI

환상진화가(幻想進化歌)

소설가

2008년 2월 통권 29호

 

“숲 너머에 누가 사는지 혹시 압니까? 멀리서 골조가 보이던데.”


샤워 후 뜨거운 밀크티를 홀짝이자 온몸이 다 노곤해졌다. 연희는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 저었다.


“난 몰라요. 검색해보든지요.”


검색한다고 나올 것 같지는 않은데. 


“뭔가 있더라도 아무도 살지 않을 거예요. 거긴 이미 오래전에 버려진 구시가지인걸요. 왜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떤 담대한 꼬맹이가-어른일 리는 없겠지-그 숲을 쏘다니는 걸까? 플랜의 위험에 대해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걸까? 


“직업 정신 발휘 중인 거예요? 근방에서 플랜이 발견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집중 분포 지역과도 꽤 떨어져 있구요. 여기 숲은 별로 깊지가 않아서 자생할 수도 없을걸요?”


어깨 너머로 화면에 뜬 지도를 보고 연희가 말했다. 그녀는 아마 최근에 정원석을 넘어가 본 적이 없는 모양이다. 그곳은 이상 기후로 인해 밀림이라고 해도 어울릴 정도가 되어 있었다. 작년 연말 데이터만 해도 숲의 너비는 무척 미미했다. 이곳을 기준으로 했다면 택시는 나를 잘못 내려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부에 대고 시비를 걸기는 힘들겠군.


“창 전화예요~. 회선 전환해줄게요!”


연희는 어제 바로 택배로 도착한 내 하드 컴퓨터로 회선을 전환했다. 어지간한 용건이라면 휴대 전화로 걸 텐데 누구지? 라며 귓바퀴에 이어쉘(도청 방지용 화상통화 기구)을 장착하자 3차원 모니터에서 강의 초췌한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난 깜짝 놀랐지만 그녀의 형형한 눈을 보고 잠시 걱정의 말을 접어 넣었다.




나는 물처럼 쏟아지는 강의 말에 어안이 벙벙한 채로 더듬더듬 답했다.


“글쎄요…… 저희도 목숨 걸고 잡느라 바빠서요. 사냥이 끝나면 남는 건 광선총에 탄화 흔적뿐이거든요. 워낙에 생명력이 강해서 잿더미 속에서도 일부라도 남아 있으면 재생하기 때문에 짓밟느라 바쁘지 일일이 확인할 틈은 없습니다.”


나는 약간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들으니까 더 그런 거 같은데…… 수컷형은 본적이 없는 것 같군요. 만디가 기준이라면 말입니다.”




나는 복잡해진 미간 주름을 주물렀다.


“그나저나, 좀 실망인데요.”


강은 빙긋 웃었다.




“그건 또 무슨 깨는 소립니까?”




“잠깐만요, 강.”


그러나 회선은 이미 끊겨 있었다. 

“일이에요?”


연희가 의자 등에 달라붙었다.


“아뇨. 그냥 친굽니다.”


“꽤 어려운 얘길 하는 거 같던데요?”


“연희 씨는 일반인이니까요. 저도 당신이 노래 얘기하면서 하는 통화는 전혀 못 알아듣습니다. 중간에 말없이 노래만 하는 건 더 그렇구요.”


연희는 ‘흐응’ 하고 콧소리를 냈다. 나는 그게 그녀가 복잡하지만 별로 중요치 않은 설명을 피할 때의 버릇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 플랜이라는 거, 정말 그렇게 위험한가요? 사진을 봤는데, 꽤 매혹적으로 보이던데요? 마치 과거의 환영을 현실로 불러들인 것 같았어요. 까마득한 전설 속 괴물이 부활한 거 같기도 하고, 화석에 살을 붙여놓은 것처럼 원시적이면서도 직관적이고.”


나는 그녀의 표현이 과히 틀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약간 놀랐다. 흙에서 태어난, 사람을 빼닮은 생물. 그들이 먹는 건 현세 인간이고, 그들을 키운 건 까마득한 과거를 묻어온 퇴적층, 그 대지 위다.


“직접 만나면 그런 생각은 들지 않을 겁니다. 동영상 없이 사진만 떠다니는 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죠. 유혹할 때야 근사하지만 잡아먹으려 들 때는 악몽이 따로 없습니다. 매번 내가 왜 이 짓에 나섰나 후회막급이죠. 인간을 주식으로 한다는 점만으로도 플랜은 인간에게 충분히 위험한 존잽니다. 거기다 플랜에게 먹힌 사람은 재생할 수도 없습니다. 그건 진짜 치명적이죠. 그리고 더 중요한 건, 먹이 피라미드의 꼭대기 주인이 바뀌고 있다는 겁니다. 먹이 피라미드는 미시적 관점으로는 단지 먹이 관계에 불과하지만, 거시적 관점에서는 종(種) 간의 권력 관계를 반영하고 있으니까요.”


나는 줄줄이 흘러나온 내 말에 스스로 놀랐다. 그제야, 내 안에 자리 잡았던 불안의 정체를 깨달은 것이다. 그들이 지구의 새로운 지배자가 아닐까 하는 불안. 역사적으로 가장 결정적인 진화는 언제나 전(前) 세대에 치명적인 충격을 수반했다. 공룡에서 네안데르탈인,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와 신인류 모두. 아니, 망상이 지나쳤다. 강에게 옮았군.


연희는 내 이야기를 잠자코 끝까지 듣고 나서 불쑥 말했다.


“창, 과연 플랜만 사람을 먹을까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나는 얼얼하게 충격이 가시려는 머리에 다시 몽둥이가 다가와 있는 것처럼 간질간질한 느낌을 받았다. 연희는 마치 미스터리 영화의 주인공처럼 말에 뜸을 들였다.


“글쎄요, 방금 스쳐 간 생각인데…… 제대로 말하려면 좀 정리해야 할 거 같아요.”


“그래서요?”


“에? 정리가 필요하다니까요?”


“아직 안 됐습니까?”


연희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꽤 예민해져 있던 나는 그 갑작스런 웃음소리에 충격을 받았다.


“창, 생각보다 성질 급하네요. 난 과학자가 아녜요. 이렇게 금방은 안 돼요. 시간이 필요하다구요. 우선 오늘 밤은 자야겠어요. 내일 일찍 K시로 떠야 하니까. 먼저 잘게요.”


“…… 잘 자요.”


나는 떨떠름히 인사했다. 연희는 수면 시간이 정확했다. 자기 관리도 있겠지만 곧 노화에 들어가므로-외모 상으로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생각보다 체력 소모가 심한 듯 했다. 물론 그녀 정도의 부와 명성이라면 다음 재생 따위는 별로 걱정할 필요도 없겠지. 아쉽다면 이번 생에서 번식체를 하나도 만들지 못했다는 것 정도일까? 나는 그녀가 몇 번째 재생체인지 모르기 때문에 짝짓기에 얼마나 부담을 갖고 있는지도 잘 모른다. 


오늘 낮엔 케이크를 갖고 그 애와 헤어진 장소에 갔었다. 낮의 숲은 얌전하고 어딘지 모르게 허전했다. 밤의 흥분과 위협, 광란에 찬 포효는 나무껍질 밑이나 덤불 속에 던져놓고 멍청하게 졸고 있는 맹수처럼. 나는 버석 마른 바위에 주저앉아 휴대용 종이 아이스박스의 케이크가 녹아 버릴 때까지-케이크는 끝까지 녹지 않았다- 그 애를 기다렸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저녁엔 연희와 있어야 하므로 저택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우리의 생체반응 거리가 50센티 이하가 아니라면 ‘돔’의 잔소리 로봇이 객쩍은 소리를 하러 올 테니 말이다. 연희와 나는 그 이후로는 짝짓기를 시도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내가 도무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차라리 아침에 샤워와 함께 배출하는 편이 훨씬 기분이 깔끔했다.


“자요?”


간신히 청한 잠에 들려는데 어둠 속에서 연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낮게 ‘끙’ 소리를 내고 스탠드 등을 켰다.


“깼습니다. 얘기하세요.”


연희는 잘강거리는 술잔을 들고 내 침대 옆에 걸터앉았다. 내 잔도 있었다. 내가 이미 마셨다고 하자 연희는 ‘흐음……’ 하는 그녀 특유의 모호한 콧소리를 내고 가까운 탁자에 잔을 내려놓았다.

“저번에 그 얘기 말이에요. 아무도 죽지 않는데 왜 새로운 인간이 필요하냐는 거……”


나는 잠자코 그녀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그거 역으로 생각하니까 무척 간단해지던데요? 물론, 당신이 바란 게 이런 종류의 대답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계속하라고 손짓했다.


“오리지널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곳이 어디인지 생각 해봐요.”


“사회죠.”


“당신 바보예요? 물론 오리지널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선전하는 건 사회죠. 각 분야에 새로운 혁신이 필요하다면서요. 하지만 그게 아니란 건 당신도 나도 알죠. 우리 사회는 이미 오래전에 그걸 포기했어요. 그런 척만 하고 있을 뿐이죠. 아니면 사람들이 지독히 혼란스러워 할 테니까. 아무도 그런 건 원하지 않죠.”


“그럼 대체……”


“유전자 돔이에요.”


갑자기 세게 얻어맞은 듯 머리가 띵했다. 당연히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실은 가장 중요한 걸 놓치고 있던 거였다.


“새로운 오리지널은 새로운 외부 자극에 대한 자연 항체를 갖고 있죠. 재생체랑 다른 점은 그거 하나에요. 우리는 재생할 때마다 그걸 옵션으로 첨부하죠. 그런데, 과연 그 옵션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나는 그런 말을 눈 하나 깜짝 않고 하는 그녀가 두려워졌다. 


“이건 아까 낮에 말하던 건데요. 플랜만이 포식자가 아녜요. 오리지널을 먹고 있는 건 우리에요. 그들은 우리 먹이가 되기 위해 만들어지고 있는 거라구요.”


“너무, 극단적인 생각 아닙니까?”


“글쎄요.”


연희는 두툼한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는 자신이 한 말의 무게를 제대로 모르는 거 같았다.


등에 진땀이 흘렀다. 나는, 굉장히 훌륭하게 살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남에게 폐를 끼치거나 부당한 일은 하지 않는다는 나름의 긍지를 갖고 살아왔다. 그런데 세상에 존재하는 자체로 내 모든 것이 이미 죄악 덩어리였다. 어떻게 내가 플랜을 식인귀라고 욕할 수 있었을까? 나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는데.


“창? 괜찮아요?”


“……연희 씨는 괜찮습니까?”


“뭐가요?”


“그런 생각을 하고도 기분 안 나빠집니까?”


“좀, 나쁘기야 하죠.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걸요. 난 살아 있고, 계속 살 생각이니까. 그 정도의 희생은 감수해야 하잖아요. 그리고 어차피 아무도 정말로 죽지 않잖아요. 좋은 게 좋은 거죠.”


연희의 말은 옳았다. 그럼에도 나는 도무지 용납할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까지 해서 살아야 하는 겁니까?”


연희는 코웃음 쳤다.


“그럼 죽을래요? 당신도 죽고 싶지 않으니까, 재생할 돈이 필요하니까 그렇게 위험한 직업을 선택한 거잖아요.”


나는 연희에게 플랜 헌터를 택한 모순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곤란해할 거 없어요, 창. 누구나 살고 싶어요. 지금 가진 걸 하나도 잃지 않고, 더더욱 많은 부와, 명성과, 육체적 쾌락과 정신적인 환희를 맛보며. 어떤 시대에도 이런 일이 가능했던 적은 없어요. 우린 지금 산 채로 신의 영역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연희의 얼굴은 빛나고 있었다. 그건 어떤 깨달음-그것이 어떤 종류 건 간에-에 닿은 종류의 사람에게서 나는 빛이었다. 


“그럼 말이 나온 김에 오리지널을 만들지 않을래요? 정부에선 내가 짝짓기를 해내지 못하면 내 활동 범위를 제한하겠대요. 그건 나한테 굶어 죽으란 소리죠. 그거 알아요? 최근 오십 년 간 한 명도 태어나지 않았다는 거. 당신이랑 나랑 오리지널을 만들면 ‘돔’에서 꽤나 반가워할 거예요. 나도 당신도 다른 때보다 더 많은 특혜를 받을 거라구요.”


그녀의 혀는 뜨거웠고, 비벼 오는 가슴은 천근처럼 무거웠다. 나는 거칠게 움켜쥐는 손길에 숨을 삼켰다. 


“아니야, 이건 아닙니다…….”


“잘난 척하지 말아요. 우린 모두 공범이에요.”


나는 연희를 뿌리쳤다. 연희는 붙잡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차갑게 벼려진 말을 던졌다.


“그렇게 혼자 순결한 척 할 거면 차라리 죽어 버려요. 그게 제일 깨끗할 테니까.”


연희의 마지막 말은 내 속을 너무 깊게 찔러서 피를 흘릴 틈도 없이 숨부터 막혔다. 어느새 나는 공중전화에 매달려 강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깨워서 미안합니다, 강. 하지만……”


꼴불견이란 걸 알지만 울먹임이 새어나오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강, 우리는 왜 사는 겁니까? 미래를 잡아먹어가면서까지 여기 살아 있는 이유가 뭐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 화면이 영화처럼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졌다. 잠깐 사이에 강은 한결 산뜻해진 얼굴이었다.




나는 연희와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들려주었다. 강은 가끔 고개를 끄덕이고, 가끔은 가로 젓고, 또 여러 번 한숨을 쉬며 끝까지 들었다.




“어떻게, 그렇게 냉정하게 말할 수 있는 겁니까? 여자들은 다 그런 건가요? 아무런 죄책감이나 두려움 같은 거 안 듭니까?”




“욕망이죠. 더 많은 돈, 명예, 쾌락…… 그런 끔찍한 탐욕들, 그리고 죽음에 관한 공포. 더 뭐 있습니까? 희생, 박애? 얼어 죽으라고 하십쇼.”


강은 쓰게 웃었다.




“그건, 누군가 우리가 계속 삶을 갈구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겁니까?”


입안이 바싹 말랐다.




나는 강이 하는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에겐 너무 복잡했고 충격적이었다. 


“강, 난 총이나 쏘고 플랜이나 때려잡으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강은 혀를 찼다.




인구가 줄면 없어지리라 예상했던 기아도 여전히 강력해. 먹을 사람도 줄었지만 일할 사람도 똑같이 줄었기 때문이야. ‘돔’안에선 일거리가 없다고 난리지만 ‘돔’만 나가면 그런 일투성이라고. 인류는 그렇게 종의 마지막을 향해 걷고 있어. 지금 오리지널 어쩌고 하는 건 내 눈엔 어리석은 발악으로 보여.>


“왜…… 왜 그렇게 된 겁니까?”


나는 흥분과 충격으로 어깨를 들먹이고 있었다. 원치 않았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제길, 자기 전에 술을 마신 탓이다. 그래, 그 탓이야.




“대체 누가 우리를 개체로 정의하며 효용성을 따지는 겁니까? 신? 우주? 그런 게 존재하는 거였습니까?”






그때 나는 낮은 허밍 소리를 들었다. 극도로 몰려 있는 내 신경을 부드럽게 다독이는 투명하고 엷은 음색이었다. 나는 수화기를 떨어트리고 그리로 달려갔다. 뒤에서 강의 목소리가 내 발목에 걸렸다가 힘없이 스러졌다.




나는 그게 강과의 마지막 통화가 되리란 걸 몰랐다. 그때 내 머리 속엔 온통 그 애 생각뿐이었다. 작고 투명한 사랑스런 손가락, 아직 세상 어떤 더러움도 모르는 순결한 미소, 웃음소리, 지친 마음을 위로하는 나직한 노래…… 사생아라도 좋다. 그 애가 무엇이라도 좋았다. 지금 그 작은 몸을 내 몸으로 품을 수 있다면.


나는 엿가락처럼 늘어진 시간의 선로에서 머뭇거리던 열차가 가속 페달을 밟기 시작한 걸 느꼈다. 내 심장이 놈의 엔진이었다. 열차는 그 애를 찾아 달렸고, 창 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을 가늠할 틈도 없이 목적지에 다다라 있었다.


“안녕?”


나는 어색하게 인사하고 그게 멋쩍다고 느낄 틈도 없이 작은 팔 안에 안겼다. 그 애는 내 어깨에 달라붙어 조그만 손으로 내 머리를 감쌌다. 숲의, 태고의, 그 오래고 신비로운 향이 가슴으로 스며들며 날뛰는 숨을 안정시켰다. 어떻게, 그 애가 있는 곳을 찾아냈는지 모른다. 어떻게 그 애가 나를 찾아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난 그 애의 향기를 가슴 깊이 빨아들이는 것만으로 천국에 다다른 기분이었다. 


그 애는 천천히 나에게 입을 맞췄다. 그 애의 입술은 체리 셔벗보다도 달고 부드럽고 시원했다. 내 몸을 더듬어 확인하는 손가락들도 싫지 않았다. 이미 단단히 발기된 내 성기는 어떤 거리낌도 죄책감도 없이 그 애를 원하고 있었다. 그 애는 내 몸에 달라붙은 채로 천천히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를, 내 모든 것의 원자의 뿌리까지 받아들였다. 나는 나른한 충족감에 휩싸여 눈을 감았다.



 

ж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이 바로 지금의 상황이다. 술이 깬 후 감각이 더 날카로워지는 것처럼 몽환향에서 깨자 모골이 송연했다. 시야는 뭔가에 붙들린 채 고정되어 있었지만 주변에 울리는 처덕 소리와 기이하게 움직이는 덩굴의 사각거림이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나는 지금 플랜의 손아귀에 놓여 있었다. 꼼짝도 할 수 없이.


“이런.”


내 눈앞의 천진한 얼굴은 그대로였다. 나는 녀석의 낮은 허밍 소리를 들었다. 플랜이 노래한다는 건 본적도 들은 적도 없다. 놈들의 성대는 그만큼 발달되어 있지 않았다. 웃음소리도 목과 머리의 연결점인 연수부분-인간으로 설명하자면-의 개공구에서 간신히 나오는 거였다. 게다가 분명히 녀석에겐 다리가 있었다! 


[안녕. 창. 당신이. 내게. 준다고. 했어요.]


그 애의 뺨이 내 뺨에 닿았다. 몽환향이 덜 깬 걸까? 나는 마치 그녀의 노래가 사람 말소리처럼 들렸다. 발음도 부정확하고, 어떤 말을 사용하는지도 구분할 수 없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만은 뚜렷했다.


[안녕. 창. 당신이. 내게. 준다고. 했어요.]


“무슨 소리야?”


[안녕. 창. 당신이. 내게. 준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 애는 내 귀에 키스하고 천천히 물어뜯었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그 애는 제 입과 배를 가리키고 나를 가리켰었다. 그건 케이크에 대한 것이 아니었던 거다.


“아니……야…….”


나는 그 애의 얼굴이 천천히 아주 낯익은 형태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죽기 직전의 환영처럼 강이 나를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푸근한 입매와 밤샘 덕에 까칠해진 피부, 왼쪽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버릇, 모든 것이 강 그대로였다. 그러나 어딘가가 어색했다. 눈이었다. 무지개 빛으로 난반사 되는 눈동자, 그건 강의 연구실에 있는 플랜의 눈이었다. 순간 환영은 최고의 악몽으로 탈바꿈했다. 강의 얼굴과 플랜의 눈을 한 그 애의 빨간 입안에서 내 귀였던 고깃덩이가 쩍쩍 씹히고 있었다.


“……안 돼…….”


충격과 공포는 몽환향에 가로 막혀 꼭 닫힌 창 밖의 바람처럼 비명을 질렀다. 그때 갑자기 날카로운 소음이 심장을 꿰뚫었다. 나는 까마득한 심연, 검의 무의식의 바다가 물결치는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내가 죽었다는 걸 알았다. 모든 것이 사라졌다. 모든 것이.



 

ж



믿을 수 없게도 내가 다시 눈을 뜬것은 연구소였다. 엷게 바랜 천장 색과 낯익은 인테리어로 나는 이곳이 강의 개인 연구실임을 알았다. 내 곁에는 미완이 서 있었다. 연희도 함께였다. 


“어떻게 된 거지? 나 플랜한테 먹히지 않았나?”


내 심장은 아직 생생한 죽음의 충격으로 떨고 있었다.


“아, 음……. 다행히 맛보기 시작할 때 뺏었어요. 방법이 좀 거칠었지만.”


미완은 빈 손가락으로 총 쏘는 흉내를 낸 다음 어색하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에…… 저…… 플랜이 전부 먹어 치우기 전에 그냥 둘 다 쏠 수밖에 없었어요. 이해하세요. 도저히 떼어낼 수가 없었거든요.”


나는 미완의 목소리가 묘하게 엇나가는 걸 느꼈다. 미완 탓이 아니라 내 귀 탓이었다. 오른쪽 귀가 없었다.


“음…… 그러니까…… 녀석이 당신의 귀를 물어뜯더군요. 그쪽엔 이미 플랜의 독이 퍼져서 재생하더라도 몸이랑 따로 놀 거라서……. 아…… 음…… 그래서 지금 인공형의 본을 뜨고 있어요. 곧 평소랑 똑같아질 거예요.”


“어떻게 된 건지 누가 설명 좀 해보시죠.”


나는 그런 설명에는 강이 제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그녀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대신 미완이 답했다.


“에…… 그게…… 어디서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 일단 제가 당신을 구했어요. 어떻게 제가 거기 있었냐면…… 음…… 연희의 전 짝짓기 상대가 저였거든요. 저는 그전부터 이미 연희의 열렬한 팬이었기 때문에 정말 기뻐했는데, 실패로 끝나자 또 만날 길이 막막해졌죠. 흠…… 제 월급으론 연희가 있는 곳까지의 편도 요금 밖에 안 됐어요. 그래도 있는 돈을 다 끌어 모아서 그녀의 모든 공연과 스케줄을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죠. 에…… 저는 정말로 그녀를 사랑하니까…….”


나는 사랑이란 건 믿지 않지만 적어도 미완이 어떤 기분으로 그 일들을 했을 지는 조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날 강의 온실에서 그렇게 나를 노려본 거였군.


“음…… 아무튼…… 당신은 운이 좋았어요. 당신이 숲으로 사라져 버렸을 때 마침 강이 근처에 있는 저를 불렀어요. 진짜…… 타이밍이 좋았어요.”


나는 그때 이야기는 더 듣고 싶지 않았다.


“강은 어딨습니까?”


“그게…….”


미완은 선뜻 답하지 못했다. 나는 속으로 차분히 최악의 일들을 상상했다. 이렇게 하면 어떤 일을 마주하건 간에 꽤 완충제 역할이 됐다.


“에…… 창이 일어날 수 있게 되면 녹화 칩을 보여 드릴 생각이에요. 저도 제 눈을 믿기 어렵지만…….”


나는 연희를 넘겨다보았다.


“당신은 봤습니까?”


연희는 고개 저었다.


“전 일반인인걸요.”


나는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지금 봅시다.”


“잠깐, 창은 좀 더 쉬셔야…….”


“괜찮습니다.”


지금의 내 신경으로서는 이 불길한 긴장을 버텨 내는 것만으로 녹초가 될 지경이다. 매를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먼저 맞는 편이 나았다.


미완은 나를 부축해 영상실로 인도했다. 영상실은 곤충 눈의 내부에서 밖을 보는 것처럼 한번에 마흔 여덟 개의 각도에서 자료를 살펴 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저…… 미리 말씀드리지만…… 녹화 상태가 조악해요. 전파 장애라도 있었는지 중간에 3분 정도 노이즈만 나올 거예요. 다른 카메라를 확인해 봤는데 연구동 전부, 아니 돔 전체가 시스템 다운을 일으켰더군요.”


나는 미완의 설명을 제대로 들으려 노력했지만, 미간에 땀만 맺힐 뿐이었다.


“흠…… 혼자 계시는 게 나을 거 같네요.”


그는 컴퓨터에 필름 칩을 투입하고 문을 닫고 나갔다. 잠시 후 나는 온실에 서 있는 강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잠옷인지 작업복인지 구분 불가능한 구깃구깃한 흰옷은 분명 내가 통신기를 집어던지고 숲으로 달려간 그날 밤의 것이었다. 나는 화면 하단에 뜨는 녹화 시간으로 그게 강이 나와의 통화를 끊은 직후라는 걸 알았다.




혼자 있는 강은, 마치 사람에게 하는 듯이 플랜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눈을 감고 하늘거리며 플랜은 물 밖에 나온 붕어처럼 입을 뻐끔댔다. 성대가 없어서 입을 움직인다는 건 별 의미가 없었지만 놈들은 일부러 인간 흉내를 내고 있었다. 나는 묘한 동정심과 함께 찜찜함을 느꼈다. 그렇게까지 해서 놈들이 얻고자 하는 게 무얼까? 그들은 왜 우리와 소통하려 하는 걸까? 강의 말처럼 놈들이 우리를 닮은 건 단순한 사냥의 미끼 차원이 아니라, 그러지 않으면 안 될 어떤 이유가 있는 거였을까? 네안데르탈인과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가 원숭이와 고릴라만큼 유전적 구조가 다름에도 비슷한 형태를 가지고 어느 한 접점에서 서로 소통했던 것처럼-그게 대립이건 친화건 간에-. 


나는 숨을 죽였다. 만약에 그렇다면 대체 왜, 어떤 이유인지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은 이 화면밖에 남지 않았다.

화면 속의 강은 홀린 듯이 플랜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화면에서 이명 같은 것이 들렸다. 나는 스피커 볼륨을 높였다. 노이즈가 심했지만 이명이 아니라 분명 노랫소리였다. 놈이, 플랜이 노래하고 있었다. 나는 그 음조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강은 플랜에게 가까이, 위험할 정도로 가까이 다가갔다. 놈은 강을 현혹하고 있었다. 분명했다. 


“들으면 안 돼요, 강. 들으면 녀석이 당신을…….”


나는 숨을 삼켰다. 놈이 강을 잡아먹을 거라는 예상은 다행히 빗나갔다. 강은 흔들리면서 천천히 플랜에게서 물러났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플랜에게 다가갔다.




강은 팔을 펼쳤고, 플랜은 그녀를 허공으로 안아 올렸다. 거기서부터는 카메라 밖이라서 보이지 않지만 희미하게 쥐어뜯기는 소리와 화면 안으로 툭툭 떨어지는 고깃덩이-이전에 강이었던 조각-를 볼 수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강을 먹으면서도 플랜은 노래하고 있었다. 그건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 놈의 몸 전체, 연구실, 건물 외관, 돔, 그 주변을 둘러싼 모든 숲, 그 아래 지저 속 원시 대지가 부르는 노래였다.


그 순간, 내가 놈에게 귀를 깨물리던 순간 강은 놈에게 먹히고 있었고 온 세상이 플랜의 노랫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다른 어떤 소리도 그걸 꿰뚫고 들어올 순 없었다. 다른 어떤 소리도 그보다 더 강력하게 세상을 지배할 수는 없었다. 화면은 꺼졌다. 미완이 말한 3분간의 공백 부분이었다. 화면은 없지만 나는 그 안에서 벌어진 일들을 알고 있었다. 이제 강은 어디에도 없다. 마취에서 덜 깬 심장에 뻐근한 상실감이 전해져 왔다.


“그게…… 흠…… 우리가 너무 방심했던 거예요. 우린 우습게도 저 놈이 강을 좋아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어요. 강도 그랬죠. 그녀는 플랜과 소통한다는 착란에 빠져 있었어요.”


어느새 미완이 곁에 서 있었다. 나는 콧물을 훔쳤다. 미완은 굳이 내 쪽을 보지 않았다.


“놈은…… 어떻게 됐습니까?” 


“우리가 발견했을 때, 저 플랜은 말라죽어 있었어요. 미라처럼 바싹. 내부엔 식물과 똑같은 물관만 즐비하더군요. 그건 약간 예상외였지만요. 창이 궁금하시다면 나중에 연구실에서 보실 수 있도록 조처해둘게요. 대신 한 가지 굉장한 걸 발견했죠.”


나는 그가 내미는 사진을 보았다.


“소름끼치게도 놈들은 땅 밑에 거미줄처럼 얽힌 균사로 그들만의 통화 수단을 갖고 있었어요. 우리가 과거에 가졌던 유선 전화망처럼요. 아니 유기적인 형태와 정교함에선 놈들이 앞서요. 놈들은 균사를 통해 서로 양분을 교환한 흔적도 있었어요.”


나는 미완의 말이 별로 놀랍지 않았다.


“우리는 당신이 재생하는 동안 균사의 행방을 쫓았어요. 연구실 벽에는 거대한 유기체 지도가 펼쳐졌죠. 그게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 아세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숲입니까?”


“바로 맞아요. 연희 씨 댁이었죠.”


미완과 연희는 서로 마주 보았다. 


“우리는 놈들이 미리 눈치 채고 숨지 못하게 신중하게 헌터를 배치하고 균사 마디에 동시 다발적으로 산성액을 부었어요. 그야말로 전면전이었죠. 창이 그 광경을 보지 못해 무척 아쉬워요. 땅을 온통 파헤친 덕분에 송전관까지 건드려서 반나절간 ‘돔’의 기능이 정지했지만, 완벽한 안전에 비한다면 작은 대가죠.”


“과연, 완벽할까요?”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맞지 않기를 빌었지만 뇌가 지끈지끈한 이런 종류의 예감은 절대 빗나가지 않는다. 


“놈들은, 양분 말고 다른 것도 이동시킬 수 있었을 겁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놈들은 영양분뿐 아니라 몸 전체를 이동했어요. 식물 주제에 어떻게 그렇게 신출귀몰 할 수 있었는지 이제 알았습니다. 연구실의 플랜은 말라죽은 게 아니라 여길 떠난 겁니다. 놈들은 분명히 사람을 씹어서 양분화하죠. 그건 기타 소화 기관이 있어야 마땅하다는 뜻도 됩니다. 그냥 물관뿐이란 건 말이 안 되죠.”


“믿을 수 없어요! 그런 건 말도 안 돼요! 그럼 놈은 왜 일부러 여기에 잡혀 있었던 거지요? 언제든 나갈 수 있는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미완은 플랜에게 농락당한 분통을 나에게 터트렸다.


“당신은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강에게 상상병이라도 옮은 건가요?”


“강이 옳았습니다. 놈에겐 상식보다는 상상력을 적용시키는 편이 낫습니다. 낡은 껍질은 버려두고 중요한 알맹이만 분해해서 균사를 통해 이동 후 재조합한다면 발이 없어도 무척 안전하고 효율적인 이동이 됐겠죠. 게다가 제가 최근에 만난 놈은 본체와의 분리도 가능했습니다. 물론 장시간은 아니었지만.”


그 애가 나무 사이를 건너뛸 때 분명히 식물 부분은 없었다. 그러나 놈이 나를 먹을 땐 분명히 플랜이었다.


“저를 쏜 전자총 지금 갖고 있나요?”


미완은 주저하며 총을 내주었다. 나는 총신에 저장된 최근 사용 기록을 불러내고 녹음 칩의 나머지 부분을 재생했다. 강을 잡아먹고 무거운 연기처럼 바닥으로 살포시 내려앉은 플랜은 천천히, 천천히 말라 가고 있었다. 나는 화면 아래의 시간을 확인하고 총신의 사용기록과 대조했다. 역시 녀석이 나를 잡아먹던 시간과 겹쳐졌다.


“후…….”


절로 한숨이 났다. 나는 강으로 변하는 녀석의 얼굴과 난반사 되는 눈동자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저를 잡아먹는 순간 놈의 모습이 변했습니다. 천천히 여기 연구실에 있던 플랜의 모습으로.”


나는 놈의 외관이 강을 빼다 박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도 미친 소리를 더 신빙성 없게 만들 수 있는 어떤 말도 보태선 안 됐다.


미완은 여우에 홀린 듯한 표정이었다.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직접 거기 가보면 알게 될 겁니다.”


나는 ‘끙’하고 몸을 일으켰다. 미완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안 됩니다. 창은 아직 몸이…….”


“지금 몸 운운할 때가 아닙니다. 이건 인류 전체의 존망이 걸린 문젭니다.”


“이번엔 당신이 너무 확대 해석하는 거 아녜요?”


내내 잠자코 있던 연희가 항의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환자복을 갈아입었다. 새 육체는 새 옷처럼 뻣뻣했지만 활력이 넘쳤다.



숲은 거의 초토화 상태였다. 곳곳에 플랜을 사냥하느라 태운 자국이 역력했지만 주변에 흩어진 흙더미로 보아 진짜 플랜을 잡은 게 아니라 균사를 처리하고 남은 흔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내가 그 애-혹은 그것-를 만난 자리를 찾았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주변에 격자무늬로 난사 된 광선총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었다.


“뒤처리는 제가 했어요. 방법은 대강 알고 있으니까요.”


뒤쫓아 온 미완이 말했다. 그는 나름 해냈다는 것에 뿌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허리를 굽혀 흙을 움켜쥐었다. 버석하고 달큰한 냄새가 났다. 플랜이 사는 냄새였다.


“놈을 잡은 즉시 불태웠습니까?”


“예? 물론이죠. 아, 잠깐…… 태우기 전에 당신 뇌부터 척출했어요.”


어째 재생 시간이 지나치게 짧더라니.


미완은 내게 감사의 인사를 원하는 듯 했지만 난 전혀 고맙지 않았다.


“미숙한 플랜 헌터가 어떻게 당하는지 압니까?”


“네?”


“사냥에 만족하고 잠깐 방심한 틈에 남은 찌꺼기에서 재생한 놈에게 당하는 사례가 가장 많죠. 놈들의 생명력은 그만큼 강력합니다.”


나는 신발 끝으로 주변의 흙을 헤쳤다. 놈은 분명히 남아 있었다. 헌터도 아닌 비전문가가 놈들을 뿌리 끝까지 제대로 처리했을 리 만무하다. 그럼 놈은 미완이 내 뇌를 꺼내는 틈에 재생해 우리를 공격했어야 옳았다. 그러나 놈은 그러지 않았다. 그럼 분명히 뭔가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던 거다. 모든 생물에게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최우선시 하는 일. 아마도 번식이겠지. 젠장. 범죄 현장으로 돌아온 범죄자가 이런 기분일까?


“역시.”


내 발 앞에는 설치류가 저장해 둔 도토리같은 것들이 잔뜩 드러나 있었다. 완벽한 원은 아니지만 거의 원에 가깝고 뾰족한 돌기 때문에 씨앗처럼 보이는 그것들은 은색으로 보얗게 반짝였다. 그 애의 머리색과 겹쳐 보이는 건 지나친 생각일까.


미완이 허리를 굽혔다.


“이게 뭐죠? 알? 씨앗?”


“뭐든 간에 적어도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어떤 종류의 것도 아닐 겁니다. 놈들은 지금 이 순간도 진화하고 있습니다. 처음 갓난애 모습에서 성체로 진화했듯이.”


나는 견본으로 하나를 굴려내 파삭 밟았다. 끽 소리와 함께 끈적한 진액과 엷은 초록빛의 물풀 같은 것이 터져 나왔다.


“뭐든 간에, 냄새 한번 지독하네요.”


따라온 연희는 코를 싸쥐고 물러났다. 미완과 내 눈이 마주쳤다. 미완이 먼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건 정액 냄새였다.


“그럼 이게 플랜의 종자란 말입니까?”


뒤늦게 도착한 연구진은 씨앗을 보자 뛰지도 않고 숨을 헐떡였다. 나는 그들을 내버려두고 땅을 해쳐 플랜의 씨앗을 모두 파냈다. 그리고 출력을 높인 광선총을 그 위에 난사했다. 하얀 연기와 붉은 섬광이 지면에 넘실댔다.


“지금까지 놈들의 번식 방법을 알아내지 못한 건 우리가 멍청했던 게 아니라 놈들에게 ‘번식법’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존재하죠.”


“어떻게 이런…….”


미완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몇 번이나 고개 저었다. 밤잠을 설쳐 가며 강 옆에서 함께 플랜의 생식을 관찰하던 게 그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잠깐, 견본을 좀 놔두지 그랬소. 연구소에 가져가면…….”


연구진의 멍청한 소리에 나는 턱을 꽉 물고 무뚝뚝하게 답했다.


“두 번 다시 위험한 장난질은 안 됩니다. 이미 그쪽도 피를 볼만큼 봤잖습니까?”


“당신은 일개 헌터요. 우리가 당신 말에 따라야 할 필요는 없소.”


“저도 그쪽 말에 따라야 할 필요 없습니다. 제 임무는 플랜 말살이니까요.”


하얗게 타버린 씨앗 더미 앞에서 망연자실한 미완과 연구진을 두고 난 헌터 회선 전체를 열어서 동료 플랜 헌터들에게 씨앗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전했다. 연구진의 플랜말살이라는 위대한 성과에 실직을 우려하고 있던 모두는 예상한 만큼의 경악과 환호-무엇에 관한?-로 나에게 답신했다.


“이 숲은 우리가 처리하도록 하죠. 아직 수백 개는 더 있을 겁니다.”


정액에 들어 있는 정충의 수가 정확히 얼만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몇 만 마리다. 분명 씨앗은 그만큼 존재할 테고, 지금 태운 씨앗은 고작 100여 개에 불과했다. 나머지 씨앗은 균사망(菌絲網)의 유기통로가 태워지기 전에 이미 사방으로 퍼져 나갔으리라.


“창, 어째서……?”


미완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는 불안하면서도 의아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의 눈을 피했다. 나로선 대답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시 사항을 나눈 30분 뒤, 그냥도 무너진 철골 구조물처럼 흉측하던 숲은 아무것도 남지 않을 정도로 참혹하게 유린되었다. 숲이 없으면 ‘돔’이 죽고 숲이 있으면 플랜이 산다. 나는 헌터들 사이의 농담을 떠올리고 착잡해졌다. 왠지 스스로의 숨통을 조이는 어리석은 싸움을 시작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결코 기권할 수는 없었다.



새벽녘에 지친 몸으로 다시 연구실로 돌아온 나는 병상으로 가야 한다는 미완의 만류를 뿌리치고 영상실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전날에 보았던 녹음 칩을 재생했다. 낮은 노래 소리, 노이즈, 찌걱찌걱 씹는 소리와 피가 사방에 흥건하고……


“어?”


나는 잠깐 재생을 멈추고 2, 3초간을 되돌렸다.




강은 팔을 펼쳤고, 플랜은 그녀를 허공으로 안아 올렸다. 강이 플랜에게 안기기 직전 카메라 쪽을 보았다. 나는 그녀의 입술을 읽었다.






갑자기 우주 밖으로 튕겨진 듯한 무시무시한 막막함이 온몸을 휩쓸었다. 노이즈처럼 미세하게 시작된 플랜의 노래가 어느새 거대한 합창이 되어 사방에 울리고 있었다. 나는 지구 한 구석에서 작은 씨앗이 싹을 틔우고 줄기를 뻗고 잎을 살랑이며 사람처럼 춤추는 것을 보았다. 놈들의 출현으로 인류가 공들인 지표 포장은 속절없이 뒤집히고, 타르 찌꺼기 밑에서 창백하게 썩어 가던 대지는 발가벗고 햇살과 입을 맞추었다. 댐에 가로 막혀 있던 강은 유쾌하게 바다를 향해 내달리고 멸종했던 열대 나비가 날아올랐다. 창 너머 세상은 플랜의 눈처럼 아프도록 오색 찬란한 빛으로 가득했다. 아직 미완성이었지만 나는 그게 다음에 올 새로운 지구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거기 핀, 지상 전체를 뒤덮은 새로운 지배 종은 우리 인간이 아니라 사람의 상체와 식물의 하체를 가진 꽃들이었다.


뚜-


재생이 끝나고 태고의 밤처럼 새카만 어둠이 화면을 물들였다. 나는 어느새 연구실 구석에서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을 웅크린 채 귀를 막고 있었다. 강이 필요했다. 이런 이야기쯤은 ‘상상력이 조야하다’며 가볍게 비웃어 넘겨줄 그녀의 유쾌한 목소리가 필요했다. 하지만 강은 어디에도 없다.




강, 그건 대체 무슨 뜻이지?

뭔가 절대로 알고 싶지 않은 두려운 현실이 살금살금 내 등을 덮쳐 오는 것만 같다. 그때 불쑥 생체컴퓨터의 저장 메시지 신호가 새빨갛게 번뜩였다. 나를 흠칫 놀랐다. 동료 헌터였다.




나는 갑자기 어지러움을 느꼈다. 과연 내일의 나는 무엇과 싸우게 되는 걸까.



※¹환상진화가는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유전적 구조가 다르다는 학설을 바탕으로 씌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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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림(silverfo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