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FI

환상진화가(幻想進化歌)

소설가

2008년 1월 통권 28호

정신을 차려 보니 온몸에 ‘플랜(plant)’의 뿌리 덩굴이 감겨 있었다. 시꺼멓고 축축한 데다 끈끈하기까지 해서 그냥도 떼어내기가 번거로운데 하나를 떼면 두 개가 더 얽혀 들어서 어설피 건드렸다간 숨도 쉴 수 없게 될 게 분명했다. 명색이 플랜 헌터(Plant hunter)인데 이런 꼴이라니 어이가 없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활짝 핀 꽃잎에서 피어오르는 몽환향 때문에 정신을 차리기가 무척 힘들다. 뇌를 꺼내 버터에 버무린 다음 싸구려 술에 푹 절여 다시 되는 대로 쑤셔 넣은 것처럼 엉망진창이었다. 그래도 나는 생각해야만 했다.


안개처럼 부연 밤을 청명하게 흩트리는 웃음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소름끼치게 듣기 좋은 플랜의 웃음소리였다. 덕분에 흐느적거리며 녹아내리던 머릿속이 굳어지며, 뒤엉켜 있던 기억의 실타래가 느리게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등에 미지근한 수액이 흐르는 보드라운 플랜의 팔이 느껴졌다. 예쁘고 하얀 작은 발은 벌거벗은 채로 내 허벅지에 감겨 있었다. 쓸모없는, 근육도 없이 모양뿐인 발이지만 효과는 탁월했다. 헌터를 속여 넘겼으니 말이다. 놈들은 원래 발이 없다. 외양적으로 인간의 어린아이와 놈들을 구분하는 방법은 그것뿐이다.


놈들이 처음 나타난 건 유성우가 쏟아지던 밤이었다. 별들의 축제처럼 밤하늘이 야단스럽던 날 놈들은 <돔> 외곽의 숲 속에서 처음 싹을 틔웠다. 놈들은 갓 태어난 어린애 모양을 하고 작고 말갛고 투명하게 빛났다. 땅에 떨어진 별처럼.


온화하고 요상스런 광채와 무력한 모습은 유성우를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은 요정이 버린 아기라고 생각했을 테고, 혹자는 아기 예수의 재림이 아닐까 가슴을 울렁였으며, 대부분은 숲에 갓난애가 버려져 있는 것에 두려움과 동정을 느꼈을 것이다. 공통적인 건 그들 모두 예외 없이 아기를 안아 들었고, 여지없이 플랜의 첫 먹이가 되었다는 거다.


그 뒤로 숲에서는 가끔씩 아름다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뭇잎이 부딪는 것처럼 청명하고 흔들리는 수면처럼 잘강대는 웃음은 조용하면서도 멀리까지 퍼져나가서 사람들을 유혹했다. ‘돔’을 떠난 여행자들과 새로운 소식에 느린 외곽 거주자들이 플랜의 주 사냥감이었다. 한밤중에 들리는 웃음소리에 “거기 누구요? 누가 있소? 도움이 필요하오?” 물으며 전등을 들고 나선 사람들은 수풀 속에 숨은 두어 살짜리 어린애를 마주하고 놀랐다. 한밤중에 혼자 숲에 버려진 아이는 조금도 두렵거나 슬픈 기색도 없이 오랫동안 계획한 나쁜 장난이 성공한 것처럼 방울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들은 천진하게 웃는 아이가 내미는 손을 무심결에 마주 잡았다. 그러면 곧장 수풀 아래 숨겨져 있던 덩굴손이 사냥감을 그물처럼 옭아매고 난폭하게 먹어치웠다. 식충 식물처럼. 그게 지금 내가 빠진 상황이다.


거미줄처럼 얽긴 덩굴 틈으로 간신히 손가락을 움직여 벨트를 더듬었다. 제자리에 있어야 할 광선총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제야 흐릿한 기억이 돌아왔다. 휴가 기간이라 무기는 반납 상태였다. 제길. 

플랜에게 잡히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행동요령이 있었나 기억을 더듬지만 공백뿐이다. 나는 지푸라기 하나 없는 늪에 빠진 듯한 절망에 헐떡였다. 놈은 내 몸부림에 아랑곳없이 부드러운 뺨을 내 뺨에 마주 대며 내 귀에 키스하고 천천히 물어뜯었다.



 

ж


“또 그렇게 지독히 재미없는 얼굴을 하고 있군.”


나는 강(江)의 온실에 서 있었다. 플랜 헌터의 초대 멤버이자 창시자인 강은 이제 은퇴해서 늙은이처럼 온실이나 가꾸며 지내는 중이었다.


“강이야말로 뭐가 그렇게 즐거운 겁니까?”


나는 수분과 이온을 조작해 온실 안에 저절로 비가 내리게 하는 전자동 스프링쿨러 대신 손수 물뿌리개를 쥔 강을 쳐다보았다. 박물관에나 있을 법한 물건이었다. 내가 불편하지 않느냐고 묻자 강은 어떤 편리한 것보다도 익숙한 게 가장 편하다고 대꾸했다.


“나야 이 빌어먹을 미친 세상이 언제나 즐겁지.”


강의 입술에 매끄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크림치즈에 얹힌 체리 셔벗처럼 부드럽고 산뜻한 입술이다. 처음 저 입술에 정신을 빼앗겼던 순간이 떠오른다. 나는 진심으로 강이 내 짝짓기 상대가 되어주길 바랐다. 지금의 나로서는 그때의 내가 놀랍지만, 그때 나를 놀라게 한 건 강의 대답이었다.


“기분 좋은 말이지만, 사양할게. 난 이미 번식 의무를 다했어.”


“말도 안 돼요. 이렇게 젊어 뵈는데?”


“난 아홉 번째 재생체야.”


그 말은 아직 첫 성장체에 불과했던 내겐 상당한 충격이었다. 서너 번이야 이제 꽤 보편화됐지만 아홉 번째 재생이라니, 기적에 가까운 숫자였다. 나는 우리 사이에 걸린 시간의 간극 앞에 눈이 핑핑 돌았다. 


“정말로, 아홉 번이나 재생했어요? 저를 거절하려는 핑계가 아니구요?”


강은 귀 뒤에 미세하게 박힌 재생증명칩을 보여주었다. 반짝이는 나선형 장식 안쪽에 아홉 개의 홈이 있었다. 


“이제 됐어?”


강은 내게서 몸을 뗐다. 나는 아쉬움을 느끼며 내 귀를 더듬었다. 아직 보송보송한 솜털뿐이었다. 


“어떻게 아홉 번이나 재생했어요? 초기만 해도 진짜 불안정했다던데.”


“글쎄. 어쩌다 보니.”


그 말은 이후로 내가 강에게서 가장 많이 들은 말 중 하나가 되었다. 어쩌다 보니. 세기를 넘나드는 동안 벌어진 수많은 사건들을 덤덤히 기억하기에 그보다 더 적절한 말이 없으리라.


“아무튼 희귀하디 희귀한 첫 성장체의 짝짓기 신청이라니 영광이야. 하지만 난 짝짓기 행위도, 새로운 오리지널 창조에도 관심 없어.”


“……의외네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아쉬운 손바닥을 비볐다. 오래 긴장했는지 꽤 축축했다. 물론 지금 강과 마주한 내 손은 바싹 말라 있다.


“뭐가?”


“여자들은 모두 오리지널을 만들고 싶어 하는 줄 알았는데…….”


나를 만든 여자는 언제나 짝짓기만 생각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건 늘 수태와 번식과 그것이 가지는 신성함에 대한 것뿐이었다. 그래서 강은 내게 더욱 신선한 사람이었고 맺어지지 못한 게 아쉬웠다.


“그런데 왜 그렇게 씁쓸하게 웃는 겁니까?”


“내가? 그래 보여? 설마. 그냥 자네 기분이 씁쓸해서 그래 뵈는 거 아냐? 난 이 녀석을 만난 뒤로 세상이 즐거운걸.”


 


나는 강이 가리킨 쪽을 의식적으로 외면했다. 거기엔 강의 발 앞에 웅크린 채 떨어지는 물방울을 기분 좋게 맞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나는 ‘놈’의 흠뻑 젖은 옷 위로 드러나는 관능적인 곡선들이 무척 낯설고 보기 불편했다. 놈에겐 과거 수컷을 유혹하기 위해 처음으로 육체를 활용했던 암컷의 농밀함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신선하고 달콤하고 톡 쏘는 듯한 향내와 획을 꺾을 곳을 찾기 곤란한 섬세한 곡선들. 지금의 여자들에게는 그런 특징이 사라진 지 오래다. 그들의 메마른 자궁과 불안한 난자, 그리고 활동이 용이하도록 발달된 필수 근육과 그걸 보호하기 위해 살짝 덮인 최소한의 지방층이 전부였다. 힘들여 임신하거나 출산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수정에 성공한 수정체는 나팔관에서 자궁까지의 사치스런 여행을 즐길 틈도 없이 사출되어 즉시 ‘돔’의 인공자궁으로 옮겨졌다. 23세기 말에 세계적으로 불어 닥친 극심한 다이어트 열풍 때문에 가슴과 엉덩이의 지방층이 사라져 임신 기능이 저하된 탓도 있고,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증진함에 따라 과도한 스트레스가 수태 확률을 떨어뜨렸기 때문도 있고, 인공자궁이라는 의학적인 발명 때문에 임신의 소용성이 사라진 탓도 있는, 닭인지 달걀인지 알 수 없는 모든 사건들이 폭발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결국 외양만으론 여자는 비쩍 마른 남자와 별반 다를 게 없게 되었다.


“뭐야, 자네. 설마 만디가 마음에 들었어? 이건 플랜이야, 인간이 아니라고.”


알고 있다. 허벅지부터 뻗어나가는 어지러운 덩굴은 분명 플랜의 것이다. 약간 몽롱하면서도 천진한 웃음도 유성우 떨어지는 밤이 그대로 각인된 오색반사 되는 눈동자도 플랜의 것이었다. 


“가만 보면 자네 취향 참 고루해. 난 가끔 자네가 나와 동시대 사람이라고 착각하곤 한다니까. 나야 녀석을 보면 옛 생각이 나서 즐겁지만 자네 사는 데는 별로 안 즐거울 거 같은데, 다음 재생 때는 취향이 바뀌도록 옵션을 달지 그래? 그럼 세상 살기 좀 편할 텐데.”


나는 빙긋 웃으며 고개 저었다.


“아무리 재생이 발달해도 그런 옵션은 절대 무릴 겁니다.”


재생 옵션은 병이나 바이러스, 정신병적 이상 호르몬 수치에만 관여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과학의 발달은 정신 조작이나 두뇌 활용에도 간섭할 수 있었지만, 너무나 세심한 작업이었고, 잘 조율된 뇌일수록 더 빨리 마모되거나 미쳐 버릴 확률이 지나치게 높았기 때문에 기획 자체가 폐기되었다. 게다가 그런 뇌는 두 번 다시 재생할 수 없었다.


“가능하면 더 곤란하지. 우리는 모두 초인이 될 테고, 그럼 세상에 아무도 필요 없어질 테니까.”


강의 목소리엔 웃음이 섞여 있었지만 난 따라 웃지 않았다. 강은 머쓱하게 턱을 문질렀다. 


“자네는 이상해. 나야 23세기에 난 사람이니까 그렇다 치지만, 자네는 천 년은 더 뒤에 태어난 주제에 나랑 비슷한 냄새가 난단 말이야? 여자 취향도 그렇고. 이런 구식 스타일이 어디가 좋다고 꼬셨던 건지.”


강은 스스럼없이 자신의 불룩한 가슴과 처지기 시작한 뱃살을 주욱 당겨 보였다. 나는 웃으며 얼굴을 붉혔다.


누군가 ‘사람은 태어난 때와는 관계없이 제각각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했다. 몸은 두고 머릿속만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30세기에 태어나 살고 있는 사람이라도 관념이나 행동 패턴 등은 20세기나 르네상스 시대 사람과 같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가 정확히 어떤 걸 말하고자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막연한 느낌으로 내가, 지금, 여기서 느끼는 부적합함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놈한테 이름까지 지어준 겁니까? 만디?”


하늘거리는 플랜을 가리키자 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맨드레이크(mandrake). 흰독말풀. 전설 속에선 기적의 만병통치약이자 비명 소리로 사람을 죽이는 걸로 유명했지. 뭐 실제의 흰독말풀은 진통제 수준이지만. 어딘지 닮았잖아? 몽환을 유도하는 점이나 웃음‘소리’로 사람을 살해하는 점이나.”


나는 지나치게 로맨틱한 거 아니냐고 투덜댔다.


“녀석들은 식인귀라구요.”


“그거야 그렇지. 뭐 이름쯤이야 아무려면 어때? 그나저나, 자네처럼 어수룩한 사람이 플랜 사냥꾼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단 말씀이야. 난 자네가 살아 돌아오지 못할 줄 알았어. 처음 헌터들과 내보냈을 때 내가 뒤에서 저장 세포랑 재생허가서를 쥐고 얼마나 쫄았는지 모르지?”


강은 과장되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손바닥 아래 불룩한 곡선이 기분 좋게 달라붙었다. 나는 그때는 워낙 정신이 없어서 기억 저장소에도 등록해두지 않았다는 건 말하지 않았다. 기억 저장 없이 재생해봤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 할 테니까 강이 아는 나는 아니었을 것이다. 어쨌든 난 살아 돌아왔기 때문에 그걸 말할 일은 없었지만.


게다가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만약에 모든 게 준비되었다 해도 플랜에게 당했다면 ‘나’는 여기 있을 수 없었다. 플랜에게 당한 자들은 재생되지 않았다. 영혼 끝까지 양분이 되어 잡아먹힌 것처럼 아무리 육체를 배양해도 유기수조 속에서 썩어버리거나, 설사 세포 활성화에 성공해도 열린 동공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번개 맞기 직전인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처럼. 처음에는 재생 세포나 기억저장 장치의 결함으로 치부되었는데 근간에야 플랜이 원인임이 밝혀져 사람들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 뒤로 플랜의 별명은 ‘밤의 웃음소리’에서 ‘영혼까지 먹어치우는 탐식자’로 바뀌었다.


“달리 할 일이 없잖습니까. 요즘 같은 세상에 일자리 얻기가 어디 쉬워야죠. 저를 만든 교미쌍이나 제 퍼스트나 별반 모아놓은 게 없어서 이번 재생 비용을 갚으려면 아직 까마득합니다.”


아무리 탄생률이 저조해도 새로 태어난 자들이 할 일은 없었다. 일자리는 한정되어 있고 아무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계 수단을 나누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돈은 곧 재생이고 죽어도 죽지 않는 힘이었다. 그래서 우리 같은 첫 성장체들은 서둘러 재생 비용을 모으기 위해 가장 위험하고 어려운 일로 빠지기 일쑤였다.


기이하게도 재생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이후부터 세상은 어쩐지 전혀 변화하지 않았다. 사람이 바뀌지 않으니 세상도 달라지지 않는 것일까? 이건 과학 분야도 예외가 아니어서 수직 발전(있던 것을 계속 더 탐구해 가는 것) 외에 수평 발전(아무도 생각지 못한 새로운 것을 연구, 발견하는 것)은 거의 퇴화하다시피 했다. 100년만 더 살았으면 더 굉장한 발전과 번영을 가져왔을 것이라 짐작되었던 위대한 사람들도 어쩐지 오리지널이 이룩한 것 이상은 해내지 못했다. 물론 그들은 끊임없이 연구하고 결과물들을 선보였지만 오리지널의 변형이나 패러디에 불과할 뿐 완벽하게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세상은 고인 물이 되었다. 




“돈이 없어? 어째서? 자네는 최고의 헌터잖아? 올해 최고 기록 갱신자 명단에서 자넬 봤어. 작년에도, 재재작년에도 그랬던 거 같은데? 자네 오리지널도 플랜 헌터였잖아? 상금만 해도 어마어마할 텐데? 게다가 플랜 헌터의 위험수당은 또 어떻고? 그 많은 돈을 대체 다 어디다 썼는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어쩐지…… 쓰자고 보니 없던데요. 돈이란 게 원래 그런 거잖습니까.”


강은 한숨을 푹 쉬었다.

“내 아들 같으면 엉덩이를 펑펑 때려주고 뱅크 메모리 칩을 거머쥐겠건만.”


“강의 자식이었다면 교미신청에서 그렇게 매정하게 거절당하지도 않고 최우선 교미 후보에 올랐을 겁니다.”


나는 웃었다. 아들이란 말은 지금은 개념조차 사라진 말이었지만 강과 오래 알아 온 터라 어렵잖게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재생이 거듭되다 보니 자식, 부모, 가족의 개념이 희미해졌다. 개인은 개인으로서만 완전했다. 굳이 가족을 얽자면 누구의 부모의 몇 번째 재생체와 그 자식의 몇 번째 재생체인데, 대게 직접적인 관계를 가졌던 개체에서 두세 번씩 재생한 상태라서 연관성은 이미 사라졌고,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사는 터라 일부러 교류를 갖지 않는 한 얼굴 한 번 제대로 마주칠 일이 없었다. 게다가 아무리 이동수단이 발달해도 사람들은 서로를 방문하기엔 너무나 바빴다. 재생에 재생을 걸쳐 이렇게 지독히 긴 시간을 가지게 됐는데도 오히려 필요한 일들을 뒷전으로 미뤄두는 지루한 여유만 늘었을 뿐, 정말로 중요한 일들을 하기에 시간은 지나치게 길었다. 더운 여름날, 도저히 어찌 할 수 없이 늘어진 엿가락처럼.


“또, 또, 엄한 소리한다. 요즘 좀 여유가 생겼나 보지?”


강은 질색했다.


“다른 건 몰라도 생식에 관해선 강이 살던 세기의 도덕관념은 적용되지 않습니다.”


나는 등 뒤의 등걸나무에 느슨하게 몸을 기대며 최대한 뻔뻔한 표정을 지었다.


“<돔>에서는 건강한 오리지널만 얻을 수 있다면 어떤 짝과 교미하던 상관치 않죠. 어차피 퍼스트도 아니고 대부분 재생체의 재생체니까, 같은 사람인 동시에 다른 사람이잖습니까. 설사 강이 저를 만들었대도 상관없죠. 직접 자궁에서 키워낸 것도 아니니까요. 게다가 워낙에 낮은 수정 성공률에 또 건강하게 성장시키기도 힘드니까, 건강하게 성장했다는 건 다음 대도 그럴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고 그런 짝들이 만난다면 확률은 두 배로 높아진다는 소리니 적극 권장할 만하겠죠.”


두 배라는 건 과장이다. 유전적 돌연변이가 나올 ‘만약’을 배재할 수 없으니까.


아내가 있고 남편이 있는 혼인제도는-그게 일부일처제든 일부다처체든 일처다부제든 간에- 벌써 10세기 전에 사라져버렸다. 20세기 이후로 현저하게 떨어지기 시작한 생식력이 불완전한 혼인제도 안에서 더욱 희박해졌기 때문이다. 결국 지구 연합정부인 <돔>은 ‘혼인제도’를 폐지하고 ‘짝짓기 정책’을 폈다. 남녀 한 쌍이 오직 다음 세대를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만나는 것이다. 정해진 기간 내에 서로에게서 다음 세대를 얻지 못하면 교미 짝이 바뀌었다. 같은 행위는 ‘번식의무(각각 오리지널을 최소한 넷 이상 만들 의무)’가 완료될 때까지 전 재생체에 걸쳐 계속됐다. 


“그거 참 편리하네. 마치 어제의 죄를 지은 나와 오늘 회개한 나는 전혀 다르다는 과거 모 종교의 회유책 같잖아? 피 묻은 옷을 갈아입었으니 저지른 살인 자체도 없던 게 된다? 말도 안 되지. 아무리 새 옷을 갈아입어도 그 속의 때투성이 자신은 별로 달라지지 않아. 난 그럴 수 없어.”


나는 이럴 때 새삼 강이 구시대 사람이란 걸 깨닫는다.


“강은 너무 많은 걸 기억하는군요. 설마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전부 기억하는 건 아니겠지요?”

“왜 아니야?”


강은 눈을 똥그랗게 떴다. 나는 ‘역시’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래요, 설마 강이 기억을 지우거나 했을 리 없죠. 보통들은 해마다 기념처럼 기억 사출소에 가서 쓸데없는 기억을 처리하거나 재생 때마다 자동 기억 삭제를 옵션으로 선택하는데, 강만큼은 절대 그럴 리가 없는 사람이었죠. 제가 잠시 착각했나 봅니다.”


자동 기억 삭제는 한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눈을 뜨면 당신 앞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집니다. 당신은 순백의 어린애처럼 깨끗하고 세상은 흥미와 호기심으로 넘칠 것입니다”라는 게 광고 카피였다. 고착된 일상에 물려버린 사람들에게 그야말로 획기적인 상품이었고, 만약의 경우에는 기억저장소에서 이전 기억을 다시 다운 받으면 되니까 안정성도 있었다. 그러나 고착 상태는 개인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였으므로 대부분이 이 옵션을 반품했다. 아무리 자기가 변하려 해도 그간 자기를 보아왔던 주변의 눈들이 바뀌지 않는 이상 절대로 완전히 변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지금은 좀 더 세밀화된 부분 선택 기억 삭제로 보편화되었다. 언젠가는 ‘완전한 기억력, 치매도 실수도 없다. 생체컴퓨터(생체 에너지로 작동하는 진화형 개인보조 탑재 컴퓨터) 없이 당신의 일과를 좀 더 손쉽게!’라는 기억 강화 옵션이 유행하기도 했지만 신경증과 강박증 수치가 네 배로 늘어난 바람에 결국 <돔>에서 제재했다.


“나는 그냥 자연스러운 게 좋아.”


이미 조금도 자연스럽지 않은 세상인데 새삼 뭐가 더 자연스럽고 덜 자연스럽다는 걸까.


“이번 재생휴가 때 뭐 계획해두신 거 있습니까?”


나는 화제를 바꿨다.


“글세, 별로.”


강의 목소리는 평이했지만 나는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그녀는 뭔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강이 재생 휴가를 꽤 오래 미뤄왔다는 걸 상기했다. 그녀는 어쩌면 다시는 재생하지 않을 생각인지도 모른다. 


“강?”


강이 갑자기 꺼져가는 촛불처럼 위태해 보여서 난 몸을 내밀어 그녀를 잡았다. 갑자기 오리지널 때의 두근거림이, 아니 그때의 향수가 아주 잠깐 내 심장을 두드렸으나 금방 사그라졌다. 강은 웃으면서 몸을 뺐다.


“왜 그래 갑자기? 잠 덜 깬 사람처럼.”


나는 멋쩍게 손을 놓았다. 강은 물뿌리개를 치웠다. 플랜은 아쉬운 듯 눈을 감고 하늘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낮잠에라도 든 거 같은 모습이었다. 물론 단순한 의태 반응이지만.


“흠. 강, 저 플랜 말입니다. 돔의 연구실에 있던 거죠? 어쩌다 떠맡게 된 겁니까?”


나는 플랜의 난(亂)반사되는 눈이 감긴 것에 안도했다. 놈의 눈은 지나치게 매혹적이어서 영혼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아무리 단련되어 있더라도 보호경 없이 계속 보다 보면 홀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녀석은 나를 잡아먹으려는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시선은 미미한 호기심에서 그쳤지만 아니라면 아무리 나라도 그냥 넘어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돔의 연구실에 사는 플랜은 산채로 사로잡힌 최초의 플랜으로 유명하고 연구자들을 족족 잡아먹은 걸로도 유명했다. 한 달 이상 놈과 지내고도 잡아먹히지 않은 유일한 인간은 강뿐이었다. 그래서 강에게로 오게 된 것이다.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놈이 강에게 손대지 않는 건 가장 처음 조우한 것이 강이기 때문에 알에서 깬 오리처럼 따르는 것이고-말도 안 된다. 플랜의 번식법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으나 확실한 식물체이므로 그럴 리가 없다-, 또 다른 소문에는 놈이 강의 첫 교미 짝을 잡아먹었기 때문에 강과 막역한-대체 어떤?-관계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강은 어떤 풍문에도 진지하게 응수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도 어이없는 헛소리일 뿐이다. 놈들의 첫 출현 시기가 강이 퍼스트로 살았던 시기와 미묘하게 겹치기 때문에 그런 소문이 생긴 모양이었다.


“운석에서 나왔다든대…… 어디서 온 건지 알아냈습니까?”


이렇게 안심하고 가까이에서 살아 있는 플랜을 관찰할 기회는 많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놈의 하늘거리는 은빛 이파리나 끈적이는 가시가 촘촘히 박힌 촉수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마취 독을 듬뿍 품은 보라색 가시 촉수는 아주 얌전히 큰 이파리 밑에 말려 있었다. 플랜을 사냥하고 여러 가지 훈련을 받기는 했지만, 플랜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은 거의 없었다. 내가 공부를 하지 않은 게 아니라 제대로 알려진 게 없었다. 간신히 손에 넣은 자료도 대개 전설이나 풍문에 빗댄 쓸모없는 가십뿐이었다.


“그건 그냥 학계의 추론 발표일 뿐이야.”


“그럼 강의 생각은 다르단 겁니까?”


“그거 알아? 식물도 지성과 감정을 가지고 있어. 소리도 지르지. 다만 우리가 인지할 수 없을 뿐이야. 플랜은 그것의 극명한 형태가 아닐까? 식물이 드디어 어리석은 인간들을 위해 직접 커뮤니케이션에 나서준 거지.”


강은 순간 현실 밖에 있었다.


“또 그 상상병 도졌군요? 그래서, 잡아먹는 게 대체 얼마나 커뮤니케이션이 된다는 겁니까? 어차피 위장에 들어갈 거라면 그쪽에 커뮤니케이터를 설치해주는 편이 나을 텐데요?”


내 비꼼에 강은 콧방귀도 안 뀌고 말을 이었다.


“좋아. 상상이 많이 가미되었다는 건 인정하지. 하지만 플랜은 우리가 지금껏 발견하지 못한 지상의 생물일 가능성이 충분해. 유성우와 함께 갑작스레 출현한, 아니 그때 출현하리라고 예정되어 있던 생물. 우리 인류가 그랬듯이. 외 우주에서 왔다고 하기에는 녀석들은 우리를 지나치게 의태했어. 이건 카멜레온이 색깔을 바꾸는 것처럼 단순한 문제가 아니야. 놈들은 우리를 잡아먹기 위해 불현듯 둔갑한 게 아니라 이 모습이 되도록 오랜 시간에 걸쳐 진화해왔다고.”


나는 순간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간단히 말하면, 인간에게 드디어 절대적인 포식자가 출현했다는 말이지. 사실 그렇잖아. 게다가 한 끼로 사람 하나를 삼키는 대단한 탐식가지.”


갑자기 머리가 아파졌다. 순식간에 눈앞에 떠오른 먹이 피라미드 꼭대기에 조그만 씨앗이 떨어지더니 하늘거리며 꽃을 피웠다. 플랜이었다. 파급효과를 계산하지 않은 단순한 상상에 불과한데도 나는 그 씨앗이 너무나 불길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건 먹이에 관한 문제가 아니었다.


“기껏 인간 하나 먹자고 지나치게 복잡한 진화를 감수했군요. 환경 호르몬이나 유전조작이나 그런 상황은 다 고려된 겁니까?”


내가 투덜대자 강은 웃었다. 


“물론이지. 일시적 변화라면 지역적으로 한정적이고 불규칙적이어야 하는데 플랜은 돔 외곽의 전 구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출현했어. 형태도 일정했고. 게다가 유혹만큼 간편하고 에너지 효율이 높은 사냥법은 별로 없지. 나름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하는데? 어쩌면 꼭 그것만이 목적은 아닐 수도 있고.”


“그럼 뭐가 또 있단 겁니까?”


강은 신중하게 고개 저었다.


“나도 몰라. 자네 말처럼 인간을 잡아먹기 위한 목적만으로는 지나치게 복잡한 진화였다고 생각 중일 뿐이야. 그나저나 자네 짝짓기 때가 되지 않았나? 선은 봤어?”


강은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손부채질을 했다.


“율가(家)의 여자라고 들었습니다. 그 유명한 가수 집안요. 아직 못 만나봤습니다.”


나는 가끔 이런 강의 질문이 불편할 때가 있다. 아직도 강은 내게 ‘그런’ 느낌인 것이다.


“율가의 처녀라면 연희(聯喜)겠군. 착하고 순한 처녀지. 그 집안 여자들이 대게 다 그래. 짝짓기 상대로도 더할 나위 없이 건강하고. 근데 아쉽게도 한 번도 제대로 성공 못했어. 아직 제짝을 못 만난 탓이겠지. 성공하길 빌어. 자네의 첫 오리지널이라면 과연 어떨지 무척 기대되는걸.”


나는 강이 어떻게 내 짝짓기 상대에 대해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지 의아했지만 미처 묻지 못했다. 그때 내 머리엔 열대의 환락 같은 기묘한 열기와 땀과 쏘는 듯이 매스꺼운 생식기 냄새가 뒤범벅되어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짝짓기는 대단히 불쾌한 경험이었다. 그럼에도 그 행위를 멈출 수 없는, 순간의 본능적 욕구라는 것은 소름이 끼쳤다. 마치 내가 나 자신의 의지가 아닌 외부의, 인간이라는 종의 씨를 뿌리기 위한 단말기 역할을 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창(窓)? 왜 그래? 창백해?”


강이 일깨운 순간, 나는 짝짓기 때와 비슷한 냄새를 맡았다. 플랜의 향기였다. 속이 꿀럭 뒤집히는 것 같았다.

“아…… 음…… 강, 거기 계세요?”


그때 미적지근한 온실에 신선한 바람이 섞여 들었다. 강의 네 번째 번식체인 미완이 강을 찾고 있었다. 나는 아직 성장기를 채 끝내지 못한 낭랑하고 불안정한 목소리에 기묘한 이질감을 느끼며 외부의 건물들에서 밀려들어온 메마른 향을 깊게 심호흡했다. 아직 해는 밝았고 온실 밖에는 열락의 어지러운 기억 따윈 단박에 날려버릴 날카롭고 빡빡한 현실이 악어처럼 어슬렁대고 있었다.


“여기 있다, 미완(未完). 창이 왔어. 전에 인사했지?”


“에…… 아, 안녕하세요, 창. 유명세는 여전하시던데요.”


강이 혼자 있을 것이라 예상했는지 나를 대하는 그의 낯빛이 불편해 보였다. 아니 지금 잠깐 스친 눈엔 증오까지 떠올라 있었다. 내가 그에게 그렇게 밉보일 짓을 했던가? 어리둥절해 하는데 강이 먼저 말했다.


“뜸들이지 말고 용건이나 말해.”


“아, 저…… 그게…… 손님 앞인데요. 나중에…… 음…… 다시 하죠.”


“언제는 창이 손님이었나 뭐. 그냥 해.”


강은 미완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의 용건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알았다. 강이 부르지 않는 한 미완이 이렇게 급하게 강을 찾는 용건은 하나다.


“저…… 그럼, 음…… 돈이 좀 필요해서요.”


역시.


“월급은 열흘 전에 이미 가져간 걸로 아는데? 보너스도 어김없이 지급되었고. 내가 더 이상 네게 돈을 지불해야 할 의무는 없어.”


번식체라고는 하지만 엄연한 성인이고, 서로 재생을 거친 이상 유전적 공유점 외엔 다른 연관성을 강조하기란 어려웠다. 그러나 미완은 몇 번을 재생해도 강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그 밑에서 자잘한 일을 도왔다. 그건 그가 강에게 애정이 많아서라기보다는 사회적 구조상 오리지널이 자리 잡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에 덧붙여, 그가 무능력하다는 이유도 있었다. 미완은 피터 팬이었다. 재생 시 원하는 나이에서 멈추는 옵션을 달면 다음 재생 전까지는 쭉 그 나이대의 외모를 유지할 수 있는데-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직 외모만이다. 연령대를 지날수록 체력 저하와 신체 손상이 극심했다-, 보통 20~40대를 선호하지만 미완은 언제나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은 열네 살이었다.


“다음 달 월급과 이번 연구실 관리비용을 미리 지급해주지. 그쯤이면 돼?”


“에……그게…… 음…… 석 달치 정도, 어떻게 안 될까요?”


장난감 매대의 값비싼 로봇이 갖고 싶어 죽겠는 걸까? 


“알았어.”


강은 이동식 테이블 컴퓨터로 계좌를 불러내 성문으로 지급했다. 그녀는 생체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았다. 과거에 손목시계도 귀찮아서 걸지 않았다던 사람이기에 그런 건 이상하지도 않았다.


“고마워요, 강.”


진행 내내 옆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미완은 손등에 달린 얇은 금속판 같은 생체컴퓨터에 입금액이 확인되자 희희낙락하며 잽싸게 온실을 떠났다. 모든 게 너무 잠깐 사이에 일어나서 내 쪽이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아무리 그래도 석 달 치는 심하지 않습니까? 어디다 쓴다는 말도 없는데.”


“외모만 그렇지 그도 성인이니까. 게다가 나름 성실해.”


“성실이 사고랑 동의어란 건 지금 처음 알았습니다.”


내가 알기만도 미완은 이번 생에서만 벌써 세 번이나 사고를 쳤다. 한번은 유전자 돔에 끌려가는 걸 직전에 빼냈고-재생증명칩만 재대로 끼고 다녀도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한번은 항성계에서 발견된 신물질 다단계 유통에서 끌어냈으며-다단계는 과거나 지금이나 골치 아프기 마찬가지다. 인간의 발전도에 따라 다단계 시스템도 교묘하게 변형 발전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다단계는 다단계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접근하지 않는 편이 이득이란 걸 모르지 않건만 매번 걸리는 인간이 있고, 덕분에 인간은 어떻게 발전하건 간에 과오를 되풀이하는 어리석은 생물이라는 걸 영원히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또 한번은 짝짓기 상대를 죽게 해서 3년간 구금된 적도 있었다. 어찌된 사정인지 모르지만 그 상대는 재생조차 하지 않았다.


“미완이 좀 순진하잖아. 그리고 돈으로 수습할 수 있는 사고는 별거 아냐.”


그 정도면 순진함을 넘어서 모자란 수준이다. 문득 강이 미완을 두둔하는 게 마지막 번식체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오랫동안 곁에서 함께 지낸 때문인지 궁금해져 물어보려는 찰나, 내 생체컴퓨터의 스케줄러가 빨간 경고등을 깜박였다. 아무리 미뤄도 오늘까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강에게 인사했다.


“아쉽지만 가봐야겠습니다.”


“그래. 바쁜 사람 오래 붙잡은 거 같아 미안하네, 종종 놀러 와.”


그녀가 내 뺨에 키스해주었다. 그것만으로 오늘 해야 할 일의 우울함이 좀 덜어지는 기분이 든다. 




내가 연구소에 딸린 강의 별채를 나왔을 때, 정문 앞에 이미 택시가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부른 적도 없지만, 지시표에 선명하게 재생체 식별 번호와 내 이름이 깜박이고 있었다. 거기다 경망스럽고 거치적대는 리본과 꽃장식이란! 나는 따질 기운을 잃고 뒷자리에 털썩 올라탔다. 두말 할 거 없이 나를 마중 나온 허니문 카였다. 허니문이란 말도 결혼 제도가 사라진 뒤부터는 전혀 쓸모없는 단어가 되었지만, 과거에 향수를 느끼는 노땅들의 악취미란 어떻게 말리래도 말릴 수가 없는 모양이다.




나는 냉장고의 메뉴를 확인하고 달걀처럼 생긴 캡슐 욕조에 앉아 분무되는 차가운 물로 샤워를 했다. 짝짓기를 위한 목적이라는 것만 빼면 억만장자 부럽지 않을 만큼 나무랄 데 없는 서비스다. 짝짓기 성공률이 지나치게 낮고, 직업이나 상황 때문에 지역과 도시를 넘나들어야 했으므로 사람들은 서로 만나는 것만으로 지나치게 많은 시간과 돈이 들었다. 국가에서는 짝짓기를 장려-내가 보기엔 강압-하기 위해 여러 가지 서비스를 만들어냈다. 허니문 카도 그중 하나다.


나는 준비된 턱시도-뭐냐 대체, 이런 구식 옷을 입고 작업을 걸라고? 성공할 것도 안 되겠다-는 거들떠보지 않고 분자 분리 방식을 사용하는 초소형 즉석 세탁기에 옷을 넣으며 툴툴댔다. 분자 분리 방식 세탁기는 옷마다 달려 있는 고유의 형태와 구성 분석표를 기준으로 옷을 일시적으로 분해해 고유 성분 외의 불순물들을 제거하고 다시 재구성하여 내보내는데, 세제도 물도 필요 없이 새 옷이나 다름없어지므로 대단히 각광받았지만 나처럼 편하게 낡아지는 느낌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젬병이었다. 아마 강도 이 물건을 쓰지 않으리라.


샤워 캡슐 옆 선반엔 남성용 화장품은 물론 향수도 여러 가지 구비되어 있었는데 연희라는 여자의 취향이라고 일부러 추천된 것도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뿌리지 않았다. 플랜 헌터는 냄새가 없어야 한다. 




나는 식별 코드를 확인하고 받겠다는 사인을 했다. 그러자 얌전한 중년 여자의 옷을 입은 정(情)이 내 곁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30대의 세련된 직장 여성의 우아함과 섹시함을 고루 갖춘 그녀는 나를 만든 교미쌍의 네 번째 재생체다. 나는 그녀가 왜 전화를 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차가 중앙에서 우회로로 빠지더니 좁은 골목 앞에서 멈춰 섰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창이 열리고 작은 상자와 수령증이 문틈으로 디밀어졌다. 상자 안에는 탐욕스럽도록 빨간 케이크가 들어 있었다. 이게 그녀의 ‘친절 방식’이었다. 제멋대로 줘놓고, 요구하지도 않은 친절에 대한 대가를 받아 간다. 매번 당하는 내가 멍청한 거겠지만.




“누구 맘대로.”


실컷 투덜댔지만 이미 그녀는 자기 이야기에 푹 빠져 듣고 있지 않았다. 나는 지리멸렬한 그녀의 잔소리가 이어지건 말건 간에 시트를 당겨 다리를 쭉 펴고 누웠다. 한결 나았다. 


정은 이미 오래전에 난자가 고갈됐다. 그녀가 수태한 여덟 번째 번식체는 재생부적격체로 성장체까지만 간신히 버티고 폐기되었다. 정에겐 그게 마지막 수태였다. 그러나 번식에 대한 그녀의 야심은 끝이 없어서 자신이 불가능해지자 번식체들의 수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로서는 도대체 왜 그녀가 그렇게 번식에 연연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죽음은 사라졌다. 영원한 소멸도, 이별도 없다. 굳이 불안정한 다음 개체에 자신의 일부를 저장하지 않아도 훨씬 더 완벽하고 효율적으로 자신을 존속시킬 수 있다. 사람들은 넘치는 인생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바빴고 목숨을 걸었던 모든 위험한 일들은 최고의 스릴 이상 어떤 의미도 갖지 않게 되었다-헌터를 제외하고-. 그게 32세기다.




정의 안색이 굳어졌다. 머릿속에 뛰어다니던 질문이 결국 입 밖으로 뛰어나간 모양이다.


“왜 그렇게 번식에 집착하냐구요. 당신이 우리를 만들었지만 우리가 당신 소유물은 아니잖습니까.”




“그게 아닐 겁니다. 유명한 의학자, 교수, 사법관, 과학자, 플랜헌터, 그래요, 거기에 딱 하나만 더 넣으면 완벽하겠지요. 유명한 연예인. 그거 압니까? 그들이 없으면, 당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그냥 평범한 여자일 뿐이니까.”


갑자기 정의 홀로그래피가 쑥 사라졌다. 기분은 찜찜했지만 마음은 훨씬 가벼웠다. 나는 내 공격에 정이 해야 할 대답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깨닫기 전에 알려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리고 백 번 재생하더라도 그녀는 결코 답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너무나 완벽해서 껄끄러운 목소리가 나를 깨웠다. 어느새 깜박 잠이 들었나 보다.




택시에서 내리자 컴컴한 숲과 습윤한 공기가 나를 맞았다. 돔의 쾌적한 공기를 위해 조성된 인공 숲이었다. 이 정도면 플랜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인공 숲이 없으면 돔이 죽고, 인공 숲이 있으면 플랜이 산다, 이게 딜레마였다.


나는 경계심을 곧추 세웠다가 갑자기 피식 새어나온 웃음 때문에 긴장이 달아났다. 짝짓기 휴가 기간이라 광선총은 반납 상태인 데다가 한 손에 쪼그만 케이크 상자를 들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헌터라니, 맛있게 잡아먹혀도 웃어야 할 상황이다. 그러나 곧 웃음기가 싹 가셔버렸다.


“어디가 직선거리냐!”


어이없게도 멍청한 기계 뇌가 가운데 숲을 계산에 넣지 않고 직선 측정으로 나를 내려준 것이다. 기가 막혔다. 주변엔 희미한 미등 외엔 인적도 없었다. 택시는 이미 부유 도로를 타버렸고, 길이 없는 숲을 지나갈 차가 있을 리 만무했다. 나는 할 수 있는 욕이란 욕은 다 하면서 숲길을 헤치고 들어갔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터라 생체컴퓨터로 다른 택시를 부를 생각은 나지도 않았다. 가뜩이나 싫은 일을 하러 가는데 이렇게 수고로워야 하다니, 짝짓기가 끝나면 <돔>에 대고 화끈하게 풀어줄 테다. 아니, 넷으로 운송 회사를 걸고넘어지면 회사 측에서 알아서 돔을 물고 늘어져주겠지. 개인이 상대하는 것보다 그 편이 낫겠다. 그리고 또……


그때 뭔가가 휙 내 손에서 케이크 상자를 낚아채 갔다. 나는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누구냐?”


‘히힛’ 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사사삭’ 풀 꺾이는 소리가 들렸다. 미안하지만 이쪽은 헌터라고. 


“거기 못 서!”


손끝에 잡힐 듯하던 조그만 것이 나무 위로 훌쩍 뛰어 올랐다. 그리고 뭔가 툭 머리 위로 떨어졌다. 빈 케이크 상자였다. 위를 올려다보자 하얗게 흔들리는 작은 발이 보였다. 은색 단발머리를 한 조그만 계집애가 손과 입가에 온통 벌건 칠을 한 채로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 해맑은 미소에 갑자기 힘이 쭉 빠져버렸다.


“뭐냐, 너? 율가의 꼬마냐?”


계집애는 대꾸 없이 원숭이처럼 뛰어내려 온몸으로 내 뺨에 처덕 달라붙었다가 또 잽싸게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향기처럼 흥얼대는 허밍 소리가 꽤 오랫동안 귓전에 남았다.


“쳇. 대대로 가수 집안이라더니.”


주머니에서 수건을 꺼냈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거울이 없이도 내 꼴이 얼마나 엉망인지 알 수 있었고, 수건 하나로는 수복할 수 없었다.




“창…… 이세요? 안녕하시냐고 묻고 싶지만, 별로 그래 보이지 않네요.”


천신만고 끝에 숲을 가로질러 율가의 뒷문에 다다른 나를 본 연희의 첫 인사는 이랬다.

“오다가 말썽이 있었습니다.”


나는 케이크 시럽으로 끈적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정도론 어림도 없겠어요. 욕실을 안내해줄게요.”


연희가 걸걸하게 웃자 큰 몸이 웃음을 따라 출렁였다. 그녀는 남자보다 더 남자 같은 여자였다. 유일하게 여성스런 점이라면 구슬처럼 크고 까만 눈이었는데, 흰자위가 거의 보이지 않아서 무척 독특하고 순해 보였다.


“이쪽이에요.”


나는 널따란 욕조가 놓인 호사스런 샤워실을 보고 약간 충격을 받았다. 12세기에나 유행했을 법한 대리석 물건이었다. 나는 그 욕조가 아주 마음에 들어서 특별히 욕조 목욕까지 했다. 나와 보니 새 셔츠와 바지가 준비되어 있었다. 


“창 건 아직 세탁 중이에요. 얼룩이 잘 지지 않더라구요. 못 입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괜찮습니다.”


옷에는 희미하게 연꽃 향기가 배여 있었다. 좋아한다는 게 이런 종륜가? 취향이 나쁘진 않군.


연희는 나에게 편안한 자리와 술을 권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꽤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거슬릴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내게 키스해 왔고 둔중한 다리가 내 허리에 감겨들었다. 나는 눈을 감고 본능에게 이성의 자리를 양보했다. 그러나 도무지 행위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난 반쯤 벌거벗은 상태에서 연희를 밀어내고 말았다.


“미안합니다, 난…… 난 못하겠어요.”


“내가, 너무 서둘렀나요?”


“그런 게 아닙니다.”


나는 고개 저었다. 연희는 몸을 떼고 어깨를 으쓱했다.


“역시 내가 좀 별로죠? 괜찮아요, 솔직히 말해도. 자주 있는 일이니까요.”


그녀의 표정은 덤덤했지만 난 많이 미안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내 문제예요. 그러니까, 이 상황에서 이런 말이 얼마나 웃길지 알지만, 난 짝짓기에 찬성할 수가 없습니다. 왜 우리가 이런 비이성적이고 번거로운 방법을 써야만 하는 겁니까? 인공수정을 하는 편이 훨씬 편리하고 깔끔할 텐데.”


연희는 잠깐 생각한 후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요. 세균이 묻을까 봐 악수를 할 때도 항균 장갑을 애용하는데 생판 모르는 사람들끼리 살을 맞대라니 경악할 만하군요. 하지만 짝짓기가 인공수정보다 수태율이 15배가 높대요. 기형아도 방지할 수 있구요. 인공수정의 미세한 충격과 온도 변화만으로도 수정체는 심각한 손상을 입으니까요.”


“아닙니다 연희 씨, 내가 궁금해하는 건 그런 게 아니라……”


다시 말을 잇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아무도 죽지 않는데 왜 새로운 인간이 필요한 겁니까?”


연희는 또 오래 생각했다. 난 약간 놀랐다. 강 외에 나의 정리되지 않은 생각에 진지하게 대꾸해주는 사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다행이네요, 적어도 내가 싫었던 건 아니군요. 솔직히 유명세만 빼면 나 자신으로서는 별 볼일 없는 여자거든요. 물론, 자기 비하는 아녜요. 난 나로서 충분하니까. 단지, 매력적인 짝짓기 상대는 아니라는 걸 객관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에요. 아, 왜 외모를 옵션으로 안 했냐는 얼굴이네요. 직업적인 이유예요. 가수는 눈에 띄어야 하는데 지나치게 보편적인 미모만 좇다가 오히려 몰개성해질 수도 있거든요. 그건 뚱뚱한 거보다 더 나쁘죠. 아무튼, 당신이 말한 문제에 관해서는 난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좀 더 생각해보고 나중에 대답해줄게요. 그때까지도 듣고 싶다면.”


사이 띄기가 결코 없는 그녀의 말을 그래도 제대로 알아들은 건 순전히 정에게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정은 결코 중간에 말을 쉬는 법이 없었다.


“듣고 싶을 거 같습니다만.”


“그럼 여기 좀 있을래요? 빈집 관리인이 휴가를 냈거든요. 어차피 짝짓기 기간이 끝날 때까지는 돔이 눈에 불을 켜고 감시 중일 테고 난 주말 동안은 공연 때문에 비울 테니까요. 지내기 불편하지는 않을 거예요.”


“좋습니다.”


연희는 필요한 걸 주문할 수 있도록 하드 컴퓨터를 빌려주었다. 이쪽이 생체컴퓨터보다 화면이 커서 쇼핑에 용이했다. 나는 간단한 옷 몇 벌과 세면도구, 기호품을 주문하고 별로 급하지 않은 메일 함을 어슬렁거렸다. 그때, 디링 소리와 함께 화상통화 연결창이 떠올랐다. 본의 아니게 사생활을 침해하게 된 나는 약간 당혹스런 기분을 느끼며 연희를 불렀다.


“연희 씨 전홥니다.”


막 욕실에서 나오던 연희는 느긋하게 머리를 말아 올렸다.


“내비둬요. 별로 중요한 건 아닐 테니까. 필요한 건 다 했어요?”


“예. 산책 좀 다녀올까 하는데, 괜찮습니까?”


“물론이죠. 아, 정원석 너머로는 가지 말세요. 돌본 지가 한참이라 엉망이거든요.”


나는 이미 한 번 거쳤다고 대꾸해주었다.


“아참, 당신 직업이 헌터랬죠? 김에 순찰이라도 돌아줄래요?”


통화 버튼을 누르면서 연희가 말했다. 난 씩 웃었다.


“그럼 내게 노래해줄 겁니까?”


우리는 눈이 마주쳤고, 동시에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좋은 여자였다. 짝짓기를 빼고 생각한다면 더없이 즐거울 인연이다. 물론 짝짓기가 아니라면 절대 스칠 일도 없는 별천지의 사람이지만.


“생각해보죠.”


나는 문을 닫았다. 문득 문틈으로 보인 화상 화면이 어쩐지 낯익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몇백 년을 살았는데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이 몇이나 있으랴 하면서.




케이크 시럽을 닦아낸 뺨에 닿는 숲의 공기는 충분히 쾌적했다. 나는 발밑에 버석대는 흙을 킁킁대고 약간 맛보았다. 플랜이 사는 흔적은 없었다. 놈들은 사람을 주양분으로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주변의 토양에 독특한 성분들이 결핍되거나 과밀하기 마련이었다. 노련한 헌터들은 플랜이 사는 흙이 늙은 사과처럼 달고 퍼석퍼석하다는 걸 안다. 이 흙은 촉촉하고 짙고 썼다.


톡……


그때 갑자기 눈바람이 휘몰아쳤다. 나는 영문을 몰라 눈을 껌벅였다. 8월에 눈이라니, 아무리 세기말의 기후 대격변이 있었다 해도 이건 좀 심하다.


사사사 쏴……




나는 손으로 이마를 가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리진 달은 휘영청 밝고 하늘은 바다 속처럼 깊고 파랬다. 눈은 마치 물속에 뿜어진 산호 알처럼 허공에서 반짝였다. 휘날린 눈이 뺨에도 입에도 달라붙어서 손바닥으로 쓸어내자, 어느새 잘게 찢은 종이 조각으로 변했다. 나는 굵은 조각 하나에서 내가 잃어버린 케이크 상자의 상표 일부를 발견했다. 얼굴을 들자 그 애가 보였다.


나무 등걸에 걸터앉은 그 애는 달처럼 동그란 얼굴에 무심한 표정을 지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또 휙 사라져버렸다. 나는 장난끼가 동했다. 잠깐 몸이나 풀까 하는 생각이 떠오르기도 전에 이미 두 다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어두운 숲을 유쾌하게 내달렸다. 어둠을 볼 수 있도록 미세하게 조작된 시신경 채널을 살짝 바꾸자 밤은 우물 속처럼 어두운 초록색으로, 모든 나무와 사물은 황금빛으로 타올랐다. 그 애는 날다람쥐처럼 나무에서 나무로 건너뛰며 이동했는데 어찌나 몸이 가볍고 재빠르던지 포대처럼 허술한 상의 끝자락만 간신히 쫓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이번 나무에서 다음 나무까지는 뛰기에는 무리가 있다. 저기쯤이겠군.


“얍!”


‘여기다’라고 예상했던 곳에서 막 그 애의 옷자락을 잡으려는 찰나 발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쿠당’ 하는 느낌과 함께 황금 먼지가 사방에 피어올랐고 눈앞에 별이 번쩍였다. 나는 대(大)자로 뻗어버렸다.


잠시 후, 정교한 사슬 목걸이가 스치는 것처럼 잘강거리는 웃음소리와 작은 숨결이 뺨에 닿았다. 그 애는 땀 냄새와 숲 향기가 뒤엉킨 묘하게 자극적이면서도 싱그러운 냄새를 풍겼다. 난 정신이 있었지만 그냥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조그맣고 새털처럼 부드러운 손가락이 나를 만졌다. 이마에서 뺨으로, 코를 한번 비틀어 쥐었다가 놓고 삐죽 튀어나온 턱 언저리를 지나 목젖에서 또 잠시 그릉대는가 싶더니 마침내 쇄골과 가슴팍 사이에 다다르자 한참 동안 떠나지 않았다. 내 가슴이 거칠게 오르내리는 진동을 즐기듯이.


나는 갑자기 와락 그 애를 끌어안았다. 그 애는 깜짝 놀라는 듯 했지만 금방 조용해졌다. 너무 조용해서 이상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 애는 내 절반도 숨 가빠 하지 않았다.


어색한 기분에 슬그머니 팔에서 힘을 빼자 그 애는 물거품처럼, 요정처럼 순식간에 내 품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멀리 가진 않고 두어 걸음 물러난 정도였다. 나는 몸을 일으키고 멋쩍게 웃었다. 그 애는 말없이 나를 보다가 손을 흔들며 자기 입과 배를 가리키고 나를 가리켰다. 입 주변엔 아직 케이크 시럽이 묻어 있었다. 뭘 요구하는지는 뻔했다.


이런 시대에도 말을 못하는 사람이 있나 싶다가 문득 사생아가 생각났다. 정식 등록되지 않은 짝짓기는 난소가 검열되지 않기 때문에 장애를 가진 수정체가 그대로 체내에 남게 되는 일이 종종 있는데, 그럴 경우 신고도 곤란하고 사출도 어려워서 미숙한 자궁에서 그냥 자라게 된다고 했다. 대부분이 적은 돈으로 뒷골목에서 제거됐지만 간혹 성공적(?)으로 성장체의 삶을 얻게 되기도 하는데, 그런 식으로 돔 밖에 버려진 체로 자란 기형체의 기사가 종종 넷에 오르곤 했다. 나는 짐승에 가까운 그들의 외설스런 외모에 혐오를 느끼기보다, 어림할 수도 없는 그들의 숫자가 플랜의 확산에 얼마나 기여를 하고 있을지가 두려웠다. 다행히 이 애는 지나치게 가벼워서 사라져버릴 것 같은 느낌 외엔 외관상으로 큰 문제는 없어 뵌다. 근처에 수용시설이 있는 걸까?


“알았어.”


말하지 못하면 대개 듣지도 못한다고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나서 나는 목을 크게 끄덕이는 동작도 해보였다. 그 애는 안심한 얼굴로 숲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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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림(silverfo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