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에이프릴, 내 딸아. 아빠의 마지막 말을 이렇게 영상으로 전하는 것을 용서해다오. 이걸 볼 때쯤이면 너는 아마 대강의 이야기는 전해 들었을 거다. 아빠의 동료 형사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너를 붙잡고 괴롭혔을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그들은 내가 어째서 이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는지는 끝내 알 수 없을 거야. 사실 나는 누군가 그 사정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건 아니란다. 어쩌면 이대로 진실이 묻혀지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너만큼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빠 때문에 네가 흘릴 눈물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지만 딸아,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단다.
사랑하는 에이프릴. 지금부터 내가 남기는 말을 잘 듣거라. 네 아빠가 이런 결단을 내린 이유는 너를 내 목숨보다 사랑하기 때문이란다.
1.
“뇌사인데 뇌사가 아니라니?”
뉴욕경시청 의문사 전담반의 데커드 파르손은 보고서를 들고 있던 검시관의 콧잔등을 노려보며 윽박질렀다. 검시관 핀셀은 경찰수첩보다 수배전단에 붙어 있어야 더 어울릴 듯한 데커드의 험악한 인상에 조금 기가 눌리긴 했지만, 책상 위로 비치는 홀로그램을 가리키며 또박또박 말했다.
“반장님도 아시다시피, 지난 2025년부터 뇌사의 거의 모든 원인이 판명되었지요. 그래서 원인 불명의 뇌사란 표현은 10년이 넘도록 쓰지 않았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번엔 써야겠다?”
데커드의 물음에 핀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홀로그램에 떠오른 사진과 도표들 중에서 세 구의 시신들 부분을 가리켰다. 그러자 핀셀의 손가락에 반응하여 시신의 내부를 스캐닝한 듯이 두개골 속 뇌 모양이 홀로그램에 입체적으로 투영되었다.
“저희 검시진들이 모두 달려들어 파고들어도 도통 모르겠더군요. 시신들의 상태를 봤을 때는 분명히 뇌사 상태가 분명한데…….”
데커드는 핀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무당벌레 모양의 홀로그램 플레이어가 재생하는 입체적 디스플레이는 여전히 생생하게 빛나고 있었다. 핀셀은 이어 말했다.
“이제까지 발견되지 않은, 미묘한 느낌의 뇌파가 느껴지고 있습니다. 굉장히 깊은 수면에 이르렀을 때의 반응과 얼핏 비슷하지만, 그것과도 정확히 일치하진 않고요. 아무튼 이런 증상은 학계에 보고된 바도 없다고 합니다.”
결국 검시진에선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얘기였다. 데커드는 미간을 거칠게 문지르고는 핀셀의 허여멀건 얼굴을 노려보다가, 그에게선 더 얻어낼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았네. 병원으로 돌아가서 일 보게, 핀셀.”
핀셀이 문을 박차고 나가자, 마침 문 밖에 있던 형사 라울 피치는 콧잔등이 깨질세라 황급히 뒤로 물러나야 했다. 핀셀과 라울의 눈인사가 오가고 라울은 휘파람을 불며 반장실로 들어섰다. 두뇌 회전이 빠르고 몸놀림이 민첩한 라울은 데커드에게 든든한 파트너임과 동시에, 친동생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뇌사가 아니랍니까?”
데커드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라울의 물음에 대답했다.
“차라리 그러면 다행이게. 정체를 모르겠다는군.”
라울은 데커드의 책상에 조금 다가서서 무언가 찾아내겠다는 듯이 홀로그램을 쏘아보기 시작했다. 푸르스름한 불빛 아래 입체 도형과 사진을 그려내고 있는 홀로그램은 시신의 상태와 사건 경위를 세세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사건은 뉴욕의 프링글스 타운에서 일어났다. 3일 전 거의 비슷한 시각에 돌연사로 추정되는 세 구의 시체가 보고되었는데, 세 구 모두 급격한 충격을 받고 뇌기능이 정지한 상태였으며 침입 흔적 같은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세 명 중 어느 한 사람도 평소 삶을 비관했다거나 우울증을 앓은 기록도, 원한 관계로 보이는 실마리도 찾을 수 없었다. 자살이라 보기에도, 타살이라 보기에도 애매한 사건이었다. 데커드 파르손 경감이 홀로그램 플레이어의 렌즈를 노려보는 이유는 굴속으로 자취를 감춘 푸른혀도마뱀처럼 사건이 미궁 속에 빠질 것 같기 때문이었다. 렌즈에게 부숴버리겠다고 협박하면 저 놈이 답을 내놓을까? 도마뱀의 창백한 혀를 잠시나마 굴 밖으로 끄집어낼 수 있으려나?
잠시 실없는 생각을 한 데커드의 귀로 라울의 탄식이 들려왔다.
“이거 독특한데요. 의문사를 조사하다 보면 별의별 경우를 다 보게 되지만, 뇌파가 살아 있는 뇌사 환자라니.”
라울의 말 그대로였다. 뉴욕경시청의 의문사 전담반인 데커드와 라울은 조사 중에 온갖 희한한 일들과 맞닥뜨려야 했다. 느닷없이 온몸의 혈관에서 피가 빨려 나온 채 사망한 시체도 있었고, 하룻밤 새 피부가 돌처럼 굳어버려 하반신이 산산조각 난 시체도 있었다. 극히 드물긴 하지만 인체가 스스로 발화해 몸만 타버리는 일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건들은 모두 발생 원인이 분명하게 밝혀진 사건들이었다.
“자네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세 명의 공통점은 없었나?”
데커드의 질문에 라울은 어깨를 으쓱였다.
“전혀 없습니다. 프링글스 타운에 살고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사는 곳도 멀리 떨어져 있고, 직업이나 출생 배경의 연관성도 없더라고요.”
“그런가.”
데커드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오랫동안 끊고 지낸 담배가 또다시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두 번 다시 담배를 입에 물 일은 없을 것이다. 데커드의 하나뿐인 딸 에이프릴이 엄하게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데커드는 아쉬운 듯 엄지와 검지를 비비적거렸다.
“어라? 반장님. 여기 좀 보십시오.”
라울이 뭔가 발견한 듯 홀로그램 한구석을 가리켰다. 데커드는 벌떡 몸을 일으켜 책상 위로 기울였다. 라울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을 계속했다.
“공통점이 있긴 있는데요?”
“뭐야?”
“돌연사한 세 명의 남녀 모두…… 하이비전(Highvision)을 켠 채 죽었어요.”
“하이비전?”
라울의 말대로 홀로그램에 투영된 자료들에는 분명히 하이비전 시청 시간이 표시되어 있었다. 세 명 모두 방 안에 두뇌활동이 느껴지지 않으면 자동으로 전원이 꺼지는 아파트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경찰이 출동했을 때는 그 점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자동 시스템을 너무 믿은 나머지 간혹 생기는 실수였다.
“하이비전이라……, 그럼 세 명이 ‘본’ 무언가가 그들의 뇌사에 영향을 미쳤다는 건가?”
“아마도 그렇겠죠. 중요한 건 어떤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었느냐지만.”
데커드는 의자에 덮여 있던 재킷을 집어 들며 말했다.
“그거야 현장에 가 보면 알겠지. 자, 가자고!”
마치 먹이를 발견한 버펄로처럼 데커드가 반장실을 박차고 나갔다. 라울은 허겁지겁 홀로그램 플레이어를 종료시키곤 그의 뒤를 따라 나섰다. 어쨌든 조그만 단서가 생겼으니 그것을 물고 늘어지는 수밖에. 뉴욕경시청 의문사 전담반이 출동하는 순간이었다.
2.
데커드와 라울의 발걸음은 카올로비 맨션의 7302호 앞에 멈춰 섰다. 아무 문양과 특징이 없는 밋밋한 문에서 희미한 기계음과 동시에 레이저가 쏘아져 나왔다. 정확히 데커드와 라울의 안구를 향한 레이저였다. 나타났을 때와 거의 동시에 레이저가 사라진 후 세라믹 재질의 문에 문자가 표시되기 시작했다.
‘데커스 파르손, 라울 피치. 출입 가능.’
안구가 드러내는 신상정보를 읽은 보안시스템이 데커드와 라울의 신분과 뉴욕경시청에서 내린 수색영장을 인식하는 데 걸린 시간은 데커드가 잠시 눈을 비빈 시간보다 더 짧았다. 이윽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출입문이 열렸다.
생체반응을 인식한 내부 시스템이 이미 환하게 조명을 밝혀놓고 있었다.
“지미 앤더슨의 맨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천장에서 울려오는 목소리에 라울은 잠시 움찔했다. 처음 듣는 목소리와 억양이었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음성 커스터마이즈에 유명가수나 영화배우의 육성을 합성시키곤 한다. 연예인의 말버릇까지도 그대로 재현해내는 음성 시스템을 보면 그 주인의 취향까지도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첫 번째 희생자였던 앤더슨의 맨션에서 흘러나온 음성은 라울에겐 매우 생소한 것이었다.
“반장님. 이거 누구 목소리죠? 중년 남자인 것 같은데……. 요새 이런 목소리의 배우가 어디 나오나?”
데커드는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라울의 물음에 대한 답은 천장에서 울려왔다.
“이 목소리는 1994년 사망한 고(故) 버트 랭커스터의 목소립니다. 20세기 중반 서부영화 에 등장하는 할리우드 배우인 랭커스터의 육성이죠.”
라울은 그때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카우보이라. 이 남자 꽤나 고전적인 취향을 가졌네요.”
“직업이 뭐라고 했지? 통신회사 직원?”
“네, 홍보 쪽을 담당했던 모양인데요. 직장에서도 크게 두드러지지는 않았던 사람 같습니다. 그쪽에서는 별 소득이 없었어요.”
“하긴. 요새 누가 카우보이 얘기에 심취하겠어, 안 봐도 뻔하군. 앤더슨의 직장 생활이 어떠했을지. 그나저나 라울, 어느 쪽이야?”
데커드의 물음에 라울은 재빨리 가구가 배치되어 있지 않은 벽면을 찾았다. 소파의 맞은편 벽면이 아무런 장식 없이 깨끗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어이, 카우보이. 하이비전을 좀 켜보겠나?”
라울의 질문에 시스템이 곧바로 대답했다.
“어느 분에게 맞출까요?”
시청자의 취향을 자동으로 인식해 프로그램을 틀어주는 하이비전의 시스템을 말하는 것이었다. 만약 시청자가 두 명 이상일 경우 시스템이 그 대상을 물어오는 것이 보통이었다.
“지미 앤더슨의 취향으로.”
라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둘이 바라보고 있던 벽면 전체에 영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케미 실즈가 등장하는 시트콤이었다. 실즈라면 이미 한물갔다고 표현하는 것조차 과분할 정도의 배우였다.
“리모콘은 어딨지?”
데커드의 말에 라울은 소파 어딘가 떨어져 있을 리모콘을 찾기 시작했다. 리모콘. 그것은 거의 모든 시스템이 인간의 음성을 통해 이루어지는 시대에 와서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 물건이었다. 하이비전의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47채널의 다채로운 소리 때문에 무언가를 시청하는 동안에는 시스템이 주인의 육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평화롭게 하이비전을 시청하다가 빽 하고 소리를 지르느니, 차라리 리모콘 버튼을 누르는 쪽을 택했다.
“찾았습니다. 어라? 이거 센서식이 아닌데요?”
라울이 데커드에게 리모콘을 건네자 데커드는 두툼한 손으로 그것을 붙잡고는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전에 이 모델을 본 적이 있어. 이 앤더슨이라는 남자 어지간히도 골동품을 좋아하나 본데. 이건 리모콘이 등장하기도 전의 물건이야. 텔레비전에 붙어 있던 다이얼을 재현한 거로군.”
“텔레비전이요? 그거, 멀티비전보다도 오래된 물건 아닙니까?”
리모콘에는 사람이 직접 손으로 돌려야만 하는 다이얼이 정중앙에 붙어 있었다. 아마 골동품 애호가들이나 20세기 신봉자들을 위해 특별 제작된 모델 같았다. 라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독히 불편해 보이는데요. 요새는 쇼핑 채널만 해도 수천 개에 이르는데, 그 다이얼로는 고작 20번까지밖에 고를 수 없잖습니까.”
“뭐 어떤가. 그저 20세기의 향수를 느끼고 싶어서 만든 장난감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지. 그리고 누구든 즐겨보는 채널은 손가락에 꼽을 만큼 적은 편이지. 차라리 우리에겐 다행이야. 이 남자가 죽기 전에 뭘 봤는지 알 수 있잖은가.”
데커드의 손놀림에 따라 틱, 하고 다이얼식 리모콘이 작동되었다. 그러자 실즈가 배를 잡고 웃는 장면이 흘러나오던 하이비전은 전혀 다른 채널을 비춰주었다. 뭔가 의미심장한 것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던 데커드와 라울은 실망하고야 말았다. 남자가 보고 있던 채널에선 한 여자 소프라노가 열창하는 모습이 나올 뿐이었다. 전혀 특별할 것이 없었다.
“13번 채널이라. 이거 음악 전문 채널입니다. 간혹 시끄러운 가수들이 나오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클래식을 틀어주는 채널로 알고 있는데, 설마 이걸 보다가 죽어버렸을까요?”
“모르겠군. 이것만 봐서는. 다른 곳도 돌아보자고.”
하이비전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데커드의 표정은 여전히 찌푸려져 있었다.
3.
두 번째 희생자인 패션 디자이너 이사도라 가넷의 집 역시 별다른 특징 없이 밋밋한 저택이었다. 그러나 가넷이 쓰던 리모콘 역시 앤더슨 것과 비슷한 다이얼식이었다. 리모콘을 발견한 둘은 무언가 맞아 들어간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고, 하이비전에서 좀 전에 보던 오페라의 클라이맥스 부분이 펼쳐졌을 땐 쾌재를 부를 수 있었다. 그녀 역시 13번 채널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샘 다라본트뿐이군.”
데커드의 목소리는 넘치는 그의 의욕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었다. 라울 역시 사건의 실마리가 술술 풀리는 느낌에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다라본트의 지하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라울은 리모콘을 바닥에 던져 부수려는 데커드를 황급히 말려야 했다.
“제기랄! 이건 왜 14번인 거야!”
다라본트의 리모콘은 13번에 맞춰져 있지 않았다. 세 명의 연관성이 무참히 깨지는 순간이었다. 씩씩거리는 데커드를 진정시키며 라울은 어두운 표정으로 하이비전을 쳐다보았다. 화면에서는 중세의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실감나는 칼부림을 펼치고 있었다. 14번은 영화 전문 채널이었던 것이다. 13번 채널과는 뚜렷한 연결고리가 보이지 않는 채널이었다.
“다시 미궁으로 빠지는 건가.”
데커드의 한숨 섞인 목소리에 라울이 대꾸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사망 시각에 방영되고 있던 프로그램의 데이터를 수집해놓겠습니다. 그럼 공통점이 나올지도 모르죠.”
“그래, 포기하긴 이르지. 세 명 다 하이비전을 보다가 죽은 것은 확실하니까.”
하지만 도대체 무엇을 본 것일까. 대체 어떤 영상이 사람을 뇌사 상태에 이르도록 만든 것일까. 아니, 정확히는 뇌사 비슷한 그 불가사의한 어떤 상태겠지. 데커드의 생각을 방해한 것은 팔목에 부착된 리스트폰(Wristphone)의 신호음이었다.
“전화 왔어요, 아빠.”
딸 에이프릴의 다정한 목소리였다. 리스트폰의 시스템이 합성한 것이긴 하지만 딸의 목소리를 듣자 데커드는 조금이나마 마음이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라울이 실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바꿀 때가 된 것 같은데요, 반장님. 그거 에이프릴이 유치원 다닐 때 입력한 거 아닙니까? 지금 그녀는 중학생이라고요.”
“시끄러. 이때 에이프릴이 얼마나 귀여웠는지 자네가 몰라서 그래.”
데커드는 라울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는 리스트폰을 작동시켰다. 하지만 리스트폰의 홀로그램이 만들어낸 검시관 핀셀의 얼굴은 매우 다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뭔가 믿기 힘든 광경을 목격한 것처럼 부릅뜬 눈을 하고는 말했다.
“바, 반장님! 큰일 났습니다. 시, 시체들이……그러니까……….”
데커드는 핀셀이 말을 계속 더듬도록 놔둘 성격은 결코 아니었다.
“시체가 뭐!”
핀셀의 두 손은 그의 통제를 벗어난 듯 제멋대로 놀고 있었다. 평소에 그토록 단정한 그의 성격으로 미루어보아 보통 일은 아닌 듯했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라울 또한 심각한 얼굴로 데커드의 팔목에서 뻗어 나오는 홀로그램을 지켜보고 있었다. 핀셀의 홀로그램은 쥐어짜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시체들이 사라졌어요!”
데커드와 라울은 동시에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둘 모두 마치 유령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었다. 할 말을 잃은 두 명의 귓가에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파고들었다. 화면 속의 한 중세 기사가 옆구리에 파고든 칼날을 부여잡은 채 쓰러지고 있었다. 기사가 숨을 거두는 장면이 클로즈업으로 비쳐지는 순간 하이비전은 다시 원상태의 벽면으로 돌아갔다. 데커드와 라울이 번개처럼 뛰쳐나가자 집안은 다시 정적만이 자리하게 되었다.
4.
“어떻게 시체들이 사라질 수 있단 말이야!”
병원의 통제실로 뛰어 들어온 데커드는 핀셀의 멱살이라도 붙잡을 기세였다. 그런 그의 성미를 잘 알고 있는 핀셀은 대꾸하는 대신 말없이 감시 카메라가 녹화된 화면을 가리켰다. 뒤따라 들어온 라울과 함께 데커드는 모니터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데커드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래, 어떤 놈이 시체를 훔쳐 갔는지 얼굴이나 보자고.”
그러자 핀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반장님. 아무도 시체를 훔쳐 가지 않았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데커드가 또다시 무언가 윽박을 지르려는 순간 라울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뒤를 돌아본 데커드의 눈에 하얗게 질린 라울의 표정이 들어왔다.
“저것 좀 보십시오, 반장님.”
라울의 말에 모니터로 눈길을 돌린 데커드는 헛바람을 들이키는 수밖에 없었다. 영안실 복도를 멍한 눈길로 걸어 다니는 세 남녀. 그것은 분명 홀로그램으로 본 시체들의 얼굴이었다. 보고서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라울이 중얼거렸다.“제, 제 발로 걸어 나갔단 말입니까? 갑자기 뇌사 상태에서 깨어났다는 뜻인가요?”
핀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는 없어요. 아무런 징후도 없었단 말입니다. 하지만 만약에 그들이 뇌사에서 막 깨어났다면…….”
데커드가 핀셀의 말을 끊어버렸다.
“그런 건 지금 중요하지 않아. 이게 몇 분 전 모습이지, 핀셀?”
“40분 정도 됐습니다.”
“라울! 본청에 연락해서 당장 추적에 들어가라고 해.”
데커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라울은 리스트폰의 홀로그램 플레이어를 작동시키고 있었다. 추적 요청이 들어간 지 4분 만에 응답이 돌아왔다. 머리에 헤드세트를 낀 연락원의 홀로그램이 말했다.
“가넷의 생체반응이 발견됐습니다. 스키틀즈(Skittles) 타운 7번가입니다.”
“7번가? 거기는 그녀의 자택 주소가 아닌데?”
라울의 물음에 연락원의 홀로그램이 대답했다.
“이혼한 전남편이 그곳에 살고 있습니다. 타격대를 출동시킬까요?”
데커드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 보내도록 해. 스키틀즈 타운이면 여기서 가까우니 우리가 먼저 도착할 거라고 말해. 그리고 다른 두 명도 계속 수색하라고, 알았나?”
연락원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홀로그램은 사라졌다.
데커드가 강력반 소속일 때부터 에이프릴은 아빠가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을 싫어했다. 그렇기에 의문사 전담반으로 자진해 부서를 옮긴 것이다. 데커드는 의문사 전담반에 배정된 뒤로 거의 쓸 일이 없었던 물건인 핸드건을 점검했다.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저릿했다.
“대체 이혼한 남편 집엔 왜 찾아간 걸까요?”
“뭔가 안 좋은 예감이 드는군. 서두르지, 라울.”
두 명이 쏜살같이 통제실을 뛰쳐나갔기 때문에 핀셀은 그들에게 무언가 말을 걸 틈도 없었다. 그래서 결국 그가 중얼거린 말은 혼잣말이 되어버렸다.
“그들이 정말로 막 깨어난 거라면…… 극도로 불안한 상태라고요.”
5.
가넷의 생체반응이 멈춘 곳은 스키틀즈 타운 7번가의 외딴 저택이었다. 사위는 고요했으나 저택 안이 어떠한 상황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두 형사는 은은하게 불빛이 새어나오는 창문 아래에 숨어들어 있었다. 불안한 말투로 라울이 입을 열었다.
“타격대를 기다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의문사 전담반이 첫 배정지였던 라울은 ‘범인 검거’라는 것이 매우 생소했다. 하지만 데커드는 단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껏해야 그림 그리던 여자야. 겁먹을 것 없어, 라울.”
“누가 겁을 먹었다는 겁니까? 전 단지…….”
그때, 창문 안에서 한 남자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왜 이러는 거야, 가넷!”
보지 않고서도 그가 가넷에게 공격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데커드는 망설임 없이 본청에 연락을 취했다.
“지금 즉시 출동지의 제어 시스템을 차단해주기 바란다.”
데커드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저택의 불이 꺼져버렸다. 경비 시스템을 비롯한 모든 제어 시스템이 마비되었기 때문이다. 데커드와 라울은 적외선 고글을 착용한 채 문을 박차고 집 안에 들어섰다.
거실에 한 남자가 쓰러져 있었고 그 위에 가넷이 식칼을 든 채 좌우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터였다.
“칼 버려, 이사도라 가넷.”
데커드가 그녀의 등을 향해 핸드건을 겨누며 말했다. 라울의 총구도 마찬가지였다. 가넷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적외선 고글로는 그녀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칼 버리라니까!”
그녀는 데커드의 두 번째 외침에도 칼을 놓지 않았다. 물론 거기까지는 데커드의 예상 범위 안이었다. 하지만 그때 그의 예상을 벗어나는 일이 일어났다. 가넷이 느닷없이 그의 총구를 향해 달려든 것이다.
피슉!
가넷의 돌발 행동에 반응한 건 데커드가 아니라 라울의 손가락이었다. 그의 핸드건에서 뿜어져 나간 고열 레이저가 가넷의 복부 근육을 파열시키는 그 찰나의 순간, 그녀의 정면에 서 있던 데커드는 그녀의 표정을 스치듯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잔뜩 일그러진 짐승의 표정이었다.
“가넷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고개를 다리 사이로 푹 숙인 채 라울이 물었다. 사람을 쏜 충격에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강력반 당시 숱하게 범인을 상대해왔던 자신과 달리 라울은 실제 총격전 경험이 전혀 없었다. 데커드는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생명엔 지장이 없다는군. 혼수 상태야.”
“……남편은요?”
“가벼운 찰과상이야. 그녀가 느닷없이 달려들어 넘어트렸다는군.”
그때서야 라울이 고개를 쳐들었다.
“왜 그랬답니까?”
“글쎄, 남편도 그걸 모르겠대. 뇌사 상태로 알고 있었는데 자기를 찾아왔으니 깜짝 놀랐겠지. 그런데 문을 열어주자마자 주방으로 뛰어들더니 식칼을 들고 덤벼들었다고 하더라고. 예전에 함께 살았을 때도 그런 난폭한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하더군.”
“원한일까요?”
데커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닌 것 같아. 오히려 그 반대라더군. 이혼한 상태지만 자주 만남을 가졌다고 하던데. 심지어 둘은 조만간에 재결합을 하려고까지 했던 모양이야. 제길. 이거야 어찌된 영문인지.”
바로 그때, 본청에서 연락이 왔다. 연락원의 홀로그램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앤더슨이 발견되었습니다. …… 오레오(Oreo) 다리에서 뛰어내렸다는군요.”
“자살했다는 뜻인가?”
데커드의 물음에 연락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울이 중얼거렸다.
“뇌사에서 깨어나자마자 한 명은 남편을 죽이러 가고, 한 명은 느닷없이 자살이라…… 그럼 마지막 한 명은?”
“다라본트도 지금 막 포착되었는데, 뭔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연락원은 난처해하는 표정이었다. 우물쭈물하는 것을 싫어하는 데커드는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 우락부락한 눈을 홀로그램을 향해 부라렸다. 연락원은 토해내듯이 말했다.
“생체반응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무언가에 탑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 부상 자동차인가?”
연락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것보다 더 빠른 속도입니다."
라울이 벌떡 일어섰다.
“파일럿이었어!”
데커드는 그 기세에 흠칫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파일럿?”
데커드의 물음에 라울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라본트의 직업 말입니다. 모노플레인 파일럿입니다.”
데커드는 라울의 말에 머리가 지끈거려오기 시작했다.
“개인 비행기의…… 조종사라고? 미치겠구먼. 이륙 장소는 어디인가?”
연락원이 뭔가를 들여다보는 듯하더니 대답했다.
“뉴욕 변두리에 있는 이륙장입니다.”
“어디로 향하고 있나?”
“멘토스 34번가 쪽입니다.”
“멘토스? 거기엔 또 뭐가 있는데?”
뭔가를 눈치 챈 라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번엔 연락원도 우물쭈물하지 않았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입니다.”
6.
“이거 얼마나 빠른가?”
헬리콥터의 날개 소리 때문에 데커드는 파일럿에게 있는 힘껏 소리를 질러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파일럿도 마찬가지였다.
“걱정 마십시오! 모노 플레인은 한 방에 격추시킬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파일럿이 질문을 잘못 이해한 듯했다. 데커드는 그의 실수를 정정해줄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원래 성격대로 그의 뒤통수를 후려갈겨주기에는 여러 가지로 머리가 복잡했기 때문이다.
‘하나는 식칼 들고 날뛰고, 하나는 다리에서 뛰어내리고, 나머지 하나는 비행기로 육탄 돌격?’
헬리콥터 안이 아니라 반장실 안이었다면 분명 책상을 후려쳤을 것이다. 그 점은 옆에 타고 있던 라울도 충분히 눈치 챌 수 있었다.
‘도무지 공통점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군!’
혼란스러운 데커드의 머릿속과는 상관없이 헬리콥터는 빠른 속도로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한 멘토스 타운의 상공을 가로질렀다. 몇 분의 시간이 흐르고 반대쪽 하늘에서 그들이 찾고 있던 목표물이 등장했다. 작지만 빠른 속도로 날고 있는 노란색 비행정이었다.
“모노플레인입니다. 격추시킬까요?”
파일럿이 물어왔다. 데커드는 이번에도 잘못 알아들으면 헬리콥터 바깥으로 던져버리겠다고 다짐하며 대답했다.
“아니, 대화를 시도해보겠다.”
“알겠습니다.”
다행히 데커드가 직접 헬리콥터를 조종해야 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파일럿이 건네준 것은 로켓런처 버튼이 아니라 마이크로 확성기였던 것이다. 데커드는 확성기를 빼앗듯이 가로채곤 말했다.
“최대한 가까이 붙어서 비행해주게.”
이윽고 충분히 소리가 들릴 만한 거리에서 데커드는 확성기를 통해 다라본트에게 외치기 시작했다.
“뉴욕 경찰이다. 지금 즉시 이륙장으로 돌아가라.”
가넷이 그랬듯이, 마라본트 역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제기랄, 다라본트! 빌딩에 부딪치면 너도 죽는단 말이야!”
아무리 윽박지르고 타일러도 다라본트는 묵묵부답이었다. 모노플레인의 방향 역시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데커드는 확성기를 툭 내려놓고는 라울을 쳐다보았다. 라울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격추시키죠. 라울의 눈빛에 데커드도 눈빛으로 되받아쳤다. 하지만 그럼 그는 죽어. 라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빌딩에 부딪치면 더 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데커드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힘없이 파일럿을 향해 말했다.
“버튼…… 어딨나?”
모노플레인의 폭발음은 아마 멘토스 타운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데커드의 예상대로 탑승자였던 다라본트는 모노플레인과 함께 공중 분해되었다. 불붙은 나방처럼 떨어져 내리는 모노플레인의 처참한 모습을 바라보며 라울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데커드는 헬리콥터 바닥을 향해 주먹을 꽝 하고 내리쳤다. 수사가 더욱 난항에 빠진 것이다. 도망친 푸른혀도마뱀이 놓고 간, 잘려진 꼬리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뉴욕경찰청으로 돌아온 데커드와 라울의 어깨는 축 처져 있었다. 사건의 실마리는 풀리지 않고 있는데 피해자이자 가장 유력한 증언자 중 두 명이 죽어버린 것이다. 세 명 중 유일하게 숨이 붙어 있는 가넷마저도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니 결코 희망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세 명의 공통점은 아직도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의문사 전담반이 생긴 이래 가장 곤혹스런 사건이군. 데커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라울이 문을 열고 들어오며 말했다.
“데이터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반장님.”
“틀어봐.”
라울이 반장실로 가져온 디스크에선 두 개의 영상이 홀로그램으로 떠올랐다. 하나는 웅장한 홀에서 오케스트라 공연이 벌어지는 공연실황이었고, 하나는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여행을 떠나는 멜로영화였다. 세 피해자가 사망 당시 보고 있던 13번과 14번 채널의 프로그램들이었다.
“이걸 보면서 뇌사에 빠졌다니 믿을 수 있겠나, 라울?”
“솔직히 두 손 들고 싶습니다. 이번만큼은 모르겠어요.”
라울은 그렇게 말하면서 실제로 두 손을 치켜드는 시늉을 해보였다. 데커드는 피식 웃고는 등을 의자에 깊게 파묻었다. 그러다가 뭔가 결심한 듯 리스트폰에 대고 “에이프릴” 하고 말했다. 라울 피치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반장님, 설마……?”
데커드의 리스트폰 위로 앳된 소녀의 홀로그램이 튀어나왔기 때문에 라울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아빠, 안녕. ……어라, 왜 이렇게 표정이 어두워? 피치 아저씨도 울상이네요. 무슨 일 있는 거예요?”
환한 표정으로 등장했던 에이프릴의 얼굴은 곧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데커드는 에이프릴에겐 보이지 않는 각도로 라울에게 손짓을 보냈다. 웃어라. 라울과 데커드의 입 꼬리는 순식간에 올라가는 놀라운 변화를 보여주었다.
“아니야, 에이프릴. 아빠가 또 경찰청 컴퓨터를 부숴먹었지 뭐냐. 아무래도 이거 다 고치고 집에 가야겠는걸?”
“또? 내가 아빠 성질 좀 죽이랬잖아. 왜 컴퓨터는 때리고 난리야.”
“하하, 그러게 말이다.”
“……그럼 오늘 못 들어오겠네? 혼자 집에 있는 거 무서운데.”
데커드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무안한 듯 웃었다.
“미안하구나, 에이프릴. 아빠가 대신 내일 맛있는 거 사가지고 들어갈게.”
“치. 알았어요. 아이스크림 캔디 사와야 돼?”
“약속하마. 그럼 잘 자거라, 에이프릴.”
“아빠도 잘 자. 피치 아저씨도 바이바이.”
라울은 여전히 치켜 올라간 입 꼬리를 유지한 채 에이프릴의 홀로그램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에이프릴의 모습이 사라지자 라울은 곧바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불가사의예요. 어떻게 반장님의 유전자에서 에이프릴같이 귀여운 아이가 나올 수 있는 거죠?”
“다행히도 죽은 지 엄마 유전자만 골라 닮아서 그래. 라울, 누누이 말하지만 눈독 들이면 박살내버린다.”
라울은 황급히 손사래를 치면서 생각했다. 애초에 그럴 의도는 전혀 없지만, 반장님이라면 진짜로 날 죽일지도 몰라. 잠시 후 라울의 표정은 금세 다시 딱딱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반장님. 그럼 오늘 ‘그거’ 하는 겁니까?”
데커드는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울은 어깨를 으쓱였다.
“전 여전히 찬성 못하겠습니다. 도저히 적응도 안 되고. 아무래도 꺼림칙하다니까요.”
“입 다물고 따라오기나 해.”
7.
두 형사는 다라본트의 아파트에 와 있었다. 사건이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데커드가 고집을 부리는 수사 방법이 바로 이것인데, 사건 현장에서 하룻밤을 지새우는 것이다. 물론 라울은 형사로서 데커드를 존경해 마지않았지만 이 수사 방법에 만큼은 존경심을 표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의문사가 일어났던 현장에서 잠을 자다니, 왠지 모르게 오싹하기 때문이다.
“자네가 무슨 유령 신봉자야? 오싹하긴 뭐가 오싹해. 저번 독가스 사건 때도 이것 때문에 해결했지 않나.”
데커드는 지난 사건을 끄집어냈다. 한 남자가 의문사를 일으켰는데, 알고 보니 일정한 시각이 되면 지면에서 독가스가 올라오는 지층 위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데커드의 수사 방법이 개가를 올린 순간이었다. 라울은 수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마디 덧붙이는 것은 포기할 수 없었다.
“그것 때문에 반장님이 질식사하실 뻔한 건 기억 못 하시나요? 에이프릴이 천애고아가 될 뻔한 순간이었다고요.”
“하지만 그것 때문에 실마리가 풀렸지. 이건 그만한 가치가 있는 거야.”
소파에 등을 기대며 데커드는 리모콘을 집어 들었다. 다이얼로 채널을 돌리자 하이비전에서는 사망 시각에 방영된 프로그램들이 쭉 펼쳐지기 시작했다. 데커드가 본청에 요청해 그 시간대에 방송된 모든 하이비전의 전파를 통째로 복사해온 것이다.
“그리고 밤새도록 돌려 본다는 얘기죠? 오케스트라와 멜로영화라. 숙면 전용 채널이 남부럽지 않겠는걸요. 어디 안 자고 버틸 수 있으려나.”
라울이 투덜거리자 데커드가 라울의 옆구리를 툭 치며 말했다.
“맞아. 그러고 보니 커피를 안 사왔군. 라울?”
“……옛썰, 대령하겠습니다.”
라울이 자리를 뜨자 데커드는 곧장 하이비전의 화면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두 눈을 부릅뜨고 노려본다 해도 화면에선 별다른 징후를 찾아볼 순 없었다. 그저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현란한 손놀림과 멜로영화에 나오는 연인들의 키스신만이 반복되어 나올 뿐이었다.
‘13번과 14번이라. 한 채널이면 좋았을 것을, 어째서 두 개로 나눠진 거지. 그것도 붙어 있는 채널을…… 잠깐, 붙어 있는 채널?’
순간 어떤 섬광이 데커드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붙어 있는 채널과…… 다이얼이라.”
데커드는 오랫동안 리모콘을 노려보다가 다이얼을 붙잡고 채널을 돌리기 시작했다. 13번에서 14번으로, 14번에서 13번으로. 화면에서는 콘트라베이스의 연주자 얼굴과 멜로영화의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역의 얼굴이 겹쳐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데커드는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챌 수 있었다.
분명히, 13번 채널에서 14번으로 넘어가는 순간 두 채널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무언가가 데커드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리모콘을 쥔 데커드의 손에 땀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잠시 심호흡을 한 뒤 데커드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이얼을 움직였다. 13번도, 14번도 아닌 그 두 채널의 정 가운데에 다이얼을 고정시킨 것이다.
분명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야 정상인데, 놀랍게도 화면에서는 현란한 무늬의 영상이 데커드의 눈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온갖 원색적인 도형들과 이미지들이 번개처럼 지나가며 데커드의 시선을 고정시켰다. 어느 순간 데커드는 자신의 주위를 그 기묘한 도형들이 가득 채워가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경계심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정면에서 자신을 뚫고 지나갈 듯이 쏟아져 나오는 이미지들에 시선이 쏠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분명 익숙한 것들이었다. 데커드의 딸 에이프릴의 웃는 모습, 라울과 함께 표창장을 받던 순간. 데커드 자신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기억의 파편들이 형상화되어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이미지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아내가 병상에 누워 힘없이 웃는 장면과 탯줄을 끊기도 전의 갓난아기인 에이프릴의 모습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이미지들은 점점 데커드의 어린 시절로 회귀해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데커드는 이미지가 더 이상 쏟아져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어둠만이…… 공포라는 감정마저 삼켜버릴 듯한 어둠만이 온몸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더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 거지?’
데커드의 마음속에 미묘한 거부감이 들었으나 멈출 길은 없었다. 그는 한없이 깊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반장님! 반장님! 정신 차리세요!”
볼에 무언가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자신의 뺨을 때리고 있었다. 데커드는 그 괘씸한 녀석의 팔목을 부러뜨릴 요량으로 손을 휘둘렀다. 하지만 라울은 이미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까스로 붙잡히지 않을 수 있었다.
“정신이 드십니까, 반장님?”
데커드의 눈이 천천히 뜨여졌다. 라울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우. 정말로 다행입니다, 반장님.”
“내가…… 뭘 하고 있었지?”
“지난번 독가스 사건 때보다 더 놀랐습니다, 반장님. 뭘 하고 있었다니요? 백치처럼 멍한 표정으로 하이비전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계셨단 말입니다.”
그때서야 바늘처럼 왼쪽 뒤통수를 찔러오는 두통이 느껴졌다.
“내가? 하이비전을 보고 있었다고…… 채널…… 그래, 채널 13과 14의 중간을 봤지. 분명 뭔가 있었어. 그런데…….”
라울이 데커드의 말을 끊었다.
“네, 뭔가 있었어요. 무슨 마법 같았죠. 아무리 큰 목소리로 부르고 흔들어도 반장님은 화면만 쳐다보고 있었단 말입니다. 제가 전원을 끄고, 뺨을 거칠게 때린 뒤에야 겨우 일어나신 겁니다. 대체 뭘 보신 거예요?”
데커드는 자신이 무엇을 봤나 떠올리려 애썼다. 하지만 생각나는 것은 여러 가지 색깔들만이 희미하게 떠오를 뿐, 어느 것도 구체적으로 기억해낼 수 없었다.
“모르겠군. 기억이 안 나.”
라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했습니다, 반장님. 만약 반장님이 그 영상을 계속 보고 계셨더라면…….”
“알아. 나 역시 뇌사 상태가 되었을지도 모르지.”
라울의 표정이 더욱 무거워졌다. 하마터면 존경하는 선배이자 파트너를 잃을 뻔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데커드의 표정은 살아나기 시작했다.
“좋아. 드디어 실마리가 잡혔군. 이제 내가 본 영상을 연방수사국에 의뢰하면…….”
“지금은 안 됩니다, 반장님. 쉬셔야 해요.”
“난 멀쩡하네, 라울.”
라울은 단호한 동작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람을 뇌사에까지 이르게 만드는 지독한 영상입니다. 잠깐이었지만 반장님의 뇌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 몰라요. 오늘은 쉬고, 내일 아침에 가보도록 해요. 오늘도 피곤한 하루였잖습니까.”
데커드는 라울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고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로선, 자신보다 라울의 판단을 믿는 것이 더 현명한 길이었다.
“그래. 자네 말대로 하도록 하지.”
데커드는 곧 소파 위에서 잠에 빠져 들었다. 하지만 라울은 쉽게 눈을 붙일 수 없었다. 머릿속을 맴도는 한 가지 생각에 잠이 오질 않았던 것이다. 식칼을 들고 남편에게 덤볐던 가넷과 모노플레인을 몰고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향해 돌진했던 다라본트의 모습이 망막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만약에 반장님이 그들처럼 된다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지만 그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순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반장님을 막아야 하는 건가.’
라울에겐 굉장히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8.
다음날 아침 일찍, 데커드는 최면 전문가 소르마크 박사를 경찰청으로 불렀다. 사건 경위를 전해들은 소르마크 박사는 덥수룩한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생각하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불가능하진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하이비전과 다중채널의 스피커가 표현할 수 있는 영상물은 강력한 최면 수단이 될 수 있겠죠. 물론 굉장히 위험한 방법인 데다가 단 한 번도 시도한 적이 없어서 확신은 못하겠지만 말입니다.”
데커드와 라울에게는 그 대답만으로 충분했다. 라울이 데커드 대신 입을 열었다.
“이제 확신하셔도 될 겁니다. 그렇다면 또 한 가지, 최면 상태에 깊게 빠져들면 뇌사에 이를 수도 있나요?”
“뇌사? 글쎄요……. 아무리 강한 최면요법이라고 해도 그건 불가능할 텐데요.”
그때 데커드가 나섰다.
“정확히는 뇌사가 아닙니다, 박사님. 뇌사와 똑같은 증상을 보였지만 뇌파는 살아 있었죠. 그리고 3일 후 깨어났습니다.”
그 말을 들은 소르마크 박사는 다시 턱수염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데커드의 인내심이 거의 바닥날 때쯤 소르마크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건 뇌사가 아닙니다. 잠에 빠졌던 거죠. 아마 비렘수면(N-REM) 단계보다 더 깊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난 것일 겁니다.”
“그게 가능하단 말입니까?”
“이론적으론 가능합니다, 파르손 반장. 하지만 그럴 경우엔…….”
“그럴 경우엔?”
소르마크 박사는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람은 비렘수면 단계에서 꾸었던 꿈조차 기억하지 못합니다. 너무나 깊숙한 무의식을 건드리는 부분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수면에 빠졌다가 다시 깨어난 경우라면, 얼마나 근원적인 무의식을 건드렸을지 짐작하기조차 힘들군요. 어떤 특이한 행동을 보여도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살인 같은. 순간 데커드와 라울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입 밖에 낸 것은 라울이었다.
“그렇다면 박사님. 누군가 의도적으로 사람을 세뇌시켜 지배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이 방법을 쓸 수도 있나요?”
“의도적인 세뇌 말입니까? 그러나 그건 윤리적으로…….”
쾅! 결국 데커드가 책상을 부술 듯이 내리쳤다.
“박사님. 그놈의 ‘윤리’는 잠깐 쓰레기통에 던져두고 생각해봅시다. 그게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만 말씀해주십시오.”
박사는 데커드의 박력에 잠시 놀랐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지독한 악의가 느껴지지만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데커드의 눈빛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13번 채널과 14번 채널 사이에서 흘러나왔던, 문제의 그 영상을 본 방송국 관계자는 무언가를 떨쳐내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물론 영상은 굉장히 작은 화면에, 게다가 소리 역시 제거한 상태라 최면 효과가 나타나진 않았지만 방송국 관계자에게는 크나큰 충격으로 다가온 듯했다.
“이런 해괴망측한 영상이 심의를 통과했을 리가 없습니다. 절대로 채널을 부여받을 수 없다고요. 이런 건 본 적도 없는 데다가……, 어쨌든 이런 방송을 허락할 정신 나간 방송사가 있을 리 없습니다.”
라울이 입을 열었다.
“저희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건 정식 채널에서 나온 영상이 아닙니다.”
“아니라면요?”
“채널과 채널 사이에서 흘러나온 거죠. 다이얼 방식의 리모콘으로만 잡아낼 수 있었던 매우 특이한 영상이란 말입니다.”
‘채널과 채널 사이’란 말에 방송국 관계자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그건 방송업계 전체의 윤리를 무시하는…….”
데커드의 표정이 급격히 변하는 것을 본 라울이 황급히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윤리란 말은 가급적 쓰지 마십시오. 우리에겐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요. 어쨌든 그런 방법이 가능하긴 한 겁니까?”
데커드가 뿜어내는 콧김은 방송국 관계자의 머리카락을 날려버릴 듯했다. 결국 방송국 관계자도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그때서야 데커드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어떤 괘씸한 녀석이 채널과 채널 사이에 몰래 전파를 끼워 넣었다는 거군. 맞소?”
“거의 확실합니다. 프링글스 타운이라는 지역에 한정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뉴욕 어딘가에 발신지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죠.”
라울이 주먹을 불끈 쥐는 것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본인은 느끼지 못했지만 질문을 던지는 라울의 목소리는 매우 떨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전파를 역추적할 수도 있겠군요?”
9.
“저거, 아무리 봐도 발신탑이군.”
“네. 숨겨놓지도 않았으니, 이거 원. 대범하다고 해야 하나?”
두 시간에 걸려 전파 추적에 성공한 뒤 데커드와 라울은 기동 타격대와 함께 발신탑으로 보이는 작은 전파탑을 포위할 수 있었다. 전파탑 아래에는 회색 건물 한 채가 버젓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반장님. 만약 저 안에 범인이 있으면 이거 너무 싱거운 거 아닙니까?”
데커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실망하지 마. 붙잡은 그 순간부터 저 녀석에겐 싱거운 상황은 없을 테니까.”
데커드는 시간 낭비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는 곧바로 타격대에 명령을 내렸고 이윽고 타격대가 건물 안으로 침투했다. 건물 안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디스플레이 장치들과 다채널 스피커들이 작동하고 있었고, 이미 고물이 된 기계들이 무덤처럼 쌓여 있었다. 타격대가 더욱 깊숙한 곳으로 발을 들여 놓았을 때, 그들은 작은 방에서 은은한 빛을 내뿜는 브라운관 앞에서 고개를 떼지 않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라울의 예상이 적중했다. 싱겁게도, 범인은 별다른 저항 없이 타격대에 체포되었다.
자신을 로퍼슨이라 밝힌 범인은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중년 남자였다.
“네 놈이 그거 만들었냐?”
데커드의 질문에 남자는 소리 없이 웃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거’라고 하니 불쾌하군요. ‘작품’이라고 불러주시지요.”
중간에 타격대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로퍼슨은 몇 달 뒤에나 법정 증언이 가능했을 것이다. 데커드의 주먹에 치아가 모조리 뽑혀 나갔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희한한데요. 발뺌을 하지 않는군요.”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범인 로퍼슨의 모습을 보며 라울이 말했다. 데커드는 거친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꼼짝할 수 없는 증거가 있잖아.”
“하지만 저래서야…… 제 발로 들어온 거나 마찬가지잖습니까.”
데커드는 팔짱을 낀 자세 그대로 턱만 움직여 로퍼슨을 가리켰다.
“어쨌든 자네가 얘기해봐. 난 저 녀석 안 때릴 자신 없다.”
솔직한 데커드의 말에 라울은 피식 웃고는 취조실 안으로 들어섰다. 로퍼슨은 슬쩍 고개를 들어 라울의 얼굴을 쳐다볼 뿐 별다른 표정의 변화를 드러내지 않았다. 라울은 프로파일링 전문가였던 선배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그는 이렇게 얘기했었다. 거짓을 말하는 연쇄살인마보다 솔직하게 털어놓는 정신이상자가 백배는 위험하다. 라울은 로퍼슨의 눈빛에서 후자의 느낌을 받았다.
라울은 단도직입적으로 나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왜 그랬지, 로퍼슨?”
로퍼슨은 라울의 노려보는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대답했다.
“예술은 본능입니다, 형사님. 거기에 이유가 필요합니까?”
“죄 없는 사람 두 명이 죽었어. 그래도 예술이라 말할 수 있나?”
“그들의 죽음이 제 작품의 클라이맥스였죠. 그들이 잠을 깨고 움직였을 때는 제가 마치 조물주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둔탁한 충격음이 유리 너머로 들려왔다. 라울은 보지 않고서도 데커드가 흥분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오래 끌면 안 되겠군.
“그럼 범행 사실을 시인하는 건가?”
“당신들이 절 어떻게 다루든 상관없습니다. 난 소원을 이뤘으니까요. 미련은 없습니다, 형사님.”
“좋아. 그럼 한 가지 묻지. 도대체 어떤 최면을 건 거지?”
라울의 질문에 로퍼슨은 느닷없이 천장을 쏘아보기 시작했다. 라울의 인내심이 바닥이 나기 시작할 때쯤 로퍼슨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형사님. 릴케 좋아하십니까?”
“릴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로퍼슨이 고개를 내려 라울의 눈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위대한 시인이죠. 지금은 거의 사라진 장르의 예술가이자,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예술가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생각해보십시오. 형사님. 시인이 시를 쓰고 나서, 그 내용을 독자들에게 일일이 설명해주는 것을 보셨습니까?”
“……얘기해줄 수 없단 얘기군.”
로퍼슨은 다시금 예의 그 웃음을 머금기 시작했다. 아무런 소리 없이 치아를 드러내는 소름끼치는 웃음. 라울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로퍼슨. 자백을 받았으니 더 이상 취조할 것은 없군. 하지만 이제부터…… 내 개인적인 질문을 시작할 거야.”
로퍼슨의 눈에 호기심의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그것은 데커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저 녀석, 개인적인 질문이라니?”
이윽고 라울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데커드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오로지 라울이 입을 벙긋거리고 있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데커드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스피커를 꺼놨어?”
데커드가 들을 수 없는 유리 너머 취조실에서는 라울이 로퍼슨을 추궁하고 있었다. 조금 전과는 확실히 다른 박력을 내뿜는 라울이었다.
“어서 말해라.”
로퍼슨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희한하군요, 형사님. 그걸 묻는 이유가 뭐죠?”
“닥치고 대답하기나 해! 어떻게 하면 최면을 풀 수 있지?”
라울은 위협적으로 로퍼슨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하지만 로퍼슨은 전혀 물러섬 없이 맞받아쳤다.
“알 것 같군요. 하긴, 누군가 나를 붙잡는다면 또 한 명의 시청자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지요. 아마 당신일 수도 있고…….”
말끝을 흐리며 로퍼슨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유리벽을 가리켰다.
“저 험악한 인상의 남자일 수도 있겠군요. 뭐, 어느 쪽이든 나야…….”
로퍼슨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순식간에 멱살을 잡힌 채 들어 올려졌기 때문이다. 라울은 잡아먹을 듯이 로퍼슨의 얼굴을 쏘아보며 말했다.
“우리는 네 놈이 갖고 노는 장난감이 절대 아니다, 로퍼슨. 지금 당장 말하지 않으면…….”
“죽여요.”
라울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죽이란 말입니다, 형사님. 모든 예술에는 끝이 있게 마련이죠. 그래야 완결성을 획득하거든요. 형사님이 제 예술의 끝을 내주시면 영광이겠군요.”
“이 자식, 정말 미쳤군.”
로퍼슨은 또다시 활짝 웃었다. 그 웃음은 라울에게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섬뜩하게 다가왔다.
“미쳤다는 말은 그럴 때 사람들이 흔히 쓰는 말이죠. 천재의 혼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라울은 서서히 멱살 잡은 손을 풀어 주었다. 그가 보기에 로퍼슨의 정신 상태는 이미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뒤틀려 있었다. 흥분을 겨우 가라앉힌 라울이 취조실을 빠져나오려는 순간, 등 뒤에서 로퍼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밌군요, 형사님. 끝난 줄 알았는데 아직 하나가 남아 있다니. 만들어낸 저조차도 나머지 하나의 작품은 어떻게 끝날지를 모르겠군요. 이거 색다른 흥분을 가져다주는데요? 클라이막스를 기대할 겁니다, 기쁜 마음으로.”
라울은 취조실 문을 부숴버릴 듯이 닫아버렸다.
10.
“대체 무슨 얘길 한 거야?”
궁금한 걸 참지 못하는 데커드의 질문에 라울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몇 번을 시도해봐도 라울이 입을 열지 않자 데커드는 결국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이 녀석 알고 보니 악어고집이었군.
“좋아. 범인은 이미 억류했고 증거도 확보했겠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영상의 내용물도 연방수사국에 의뢰해놓았으니, 곧 결과가 나올 거야. 그럼 우린 침팬지처럼 엉덩이를 들썩이며 보고서만 작성하면 땡이라고.”
그 말에 라울은 희미하게 웃음을 보이기 시작했다. 데커드는 더욱 신이 나서 얘기하기 시작했다.
“좋아. 오늘은 우리 집에서 한잔 어떤가, 라울? 에이프릴한테 추파만 던지지 않기로 약속하면 내가 한턱 내겠네.”
‘추파’란 대목에서 라울은 결국 실소를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라울과 에이프릴의 나이차는 자그마치 열다섯이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초대해주시면 감사히 가야죠.”
“자네 말야, 너무 에이프릴한테 실실거리지 말라고. 그 녀석 근처에 남자라곤 아빠밖에 몰라서 자네 같이 무뚝뚝한 녀석한테도 이상한 생각을 품을지도 모른단 말이야.”
“반장님. 에이프릴도 남자친구 만들 나이가 되었다는 걸 잊지 마세요. 아니면 혹시 반장님이 에이프릴의 남자친구들마다 따라다니며 협박한 거 아닙니까? 내 딸 건드리면 박살내버리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뭐, 우리 에이프릴 좋다고 따라 다닌 놈은 많았지만 그때마다 나는…….”
데커드의 집으로 가는 길 내내 라울은 겉으론 웃고 있었지만 속으론 딴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최면에 걸린 채 무시무시하게 돌변했던 희생자들의 얼굴과 로퍼슨의 얼굴이 번갈아가며 떠올랐다. 그리고 로퍼슨이 남긴 말도 묵직하게 가슴속에 남아 있었다.
‘뭐, 별일 없겠지.’
라울은 일단 머릿속을 비우기로 마음먹었다.
“그 녀석 말이야. 어렸을 때부터 종종 나한테 물어봤다고. ‘아빠, 아빠는 나를 위해 죽을 수 있어?’ 그렇게 물어오는 녀석은 어찌나 귀엽고 당돌한지. 요새도 영화나 드라마 같은 데서는 그런 대사가 종종 나오는 모양이야. 나는 그때마다 죽을 수 있다고 대답하지. 에이프릴은 내 목숨보다 소중하거든. 뭐, 너무 그렇게 토하겠다는 표정하지 말라고. 어차피 그런 일은 삼류 신파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거니까.”
데커드가 웃으며 혼자 떠드는 사이 둘은 어느새 데커드의 집 앞에 당도해 있었다. 데커드는 환한 얼굴로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자 문 앞에 에이프릴의 영상이 투영되기 시작했다.
“어? 아빠다! 피치 아저씨도 왔네요?”
“그래, 에이프릴. 문 좀 열어주겠니?”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에이프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문은 다시 딱딱한 세라믹으로 돌아왔다. 에이프릴의 천진한 얼굴을 보자 라울은 그동안의 걱정과 근심이 모두 날아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래, 괜한 기우일지도 몰라.
“오랜만에 제 요리 솜씨를 보여 드려야겠군요. 반장님 실력은 눈 뜨고 못 봐줄 정도 아닙니까. 아니면 이제 슬슬 에이프릴에게 요리사 모자를 씌워줘도 될 텐데 말입니다. 안 그래요, 반장님? ……반장님?”
평소대로라면 농담이나 주먹이 날아왔어야 할 텐데, 바로 옆에 서 있던 데커드는 마치 목석처럼 굳어 있었다. 라울의 등 뒤로 싸늘한 기운이 스쳐지나갔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쳐다 본 데커드의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것은 라울이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던 데커드의 얼굴이었다.
“아빠, 아이스크림 캔디 사 왔어?”
문 너머 에이프릴의 목소리를 듣자 데커드의 표정은 더욱 험악해졌다. 라울은 천천히 데커드에게서 물러나며 소리쳤다.
“문 열지 마, 에이프릴! 나오면 안 돼!”
그러면서 동시에 라울은 재빠르게 핸드건을 꺼내어 데커드를 향해 겨누었다.
“물러나십시오, 반장님. 안 그러면…….”
라울은 차마 그 뒤의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 때 라울이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던 여러 상황들 중 최악의 상황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데커드가 라울을 쳐다보며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그 손이 향하는 곳은 볼 것도 없이 데커드의 핸드건이었다.
“뽑지 마십시오. 정말 할 겁니다. 쏴버릴 거라고요!”
바깥의 소란을 들은 에이프릴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피치 아저씨, 무슨 일이에요? 대답해봐, 아빠!”
데커드에겐 이미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저 몸에 배인 동작 그대로, 오래 전부터 훈련 받았던 순서대로 총을 꺼내 들고 있었다. 그 찰나의 시간 동안 데커드와 의문사 전담반을 맡으며 얻게 된 수많은 추억들이 라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환청처럼 귀를 파고들었다. 빌어먹을. 라울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새하얀 복도를 가로지르며 날카로운 총성이 울려 퍼졌다.
11.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새하얀 천장이었다. 그러고 나서 시선을 아래로 내렸을 때, 붕대가 칭칭 감겨져 있는 복부와 링거 바늘이 꽂혀진 오른팔이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무서운 두통이 엄습해왔다. 뭐야,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일어나셨습니까, 반장님?”
걱정스런 표정으로 데커드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검시관 핀셀이었다. 데커드는 멍한 표정으로 핀셀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가 퍼뜩 데커드의 정신을 차리게 만든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에이프릴! 에이프릴은 어딨나!”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반장님. 총을 두 발이나 맞았다고요!”
데커드는 에이프릴의 안위를 확인하기 전에는 절대 누울 수 없다는 듯이 물어왔다. 핀셀은 간호사 세 명의 도움을 받아 그를 겨우 진정시키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지금 안전한 곳에 요원들과 함께 있습니다.”
그제서야 데커드의 표정이 조금 풀어지기 시작했다.
“그런가, 다행이군. ……그나저나 라울은? 이 녀석, 선배가 총을 맞았는데 대체 어디 쳐 박혀 있는 거야?”
그 말을 들은 핀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데커드가 그 표정을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뭐야……, 그 녀석도 다친 건가?”
여전히 긍정의 대답은 없었다. 핀셀이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것을 보았을 때 데커드는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라울이 어디에 있는지를.
“노, 농담하지 말게. 핀셀. 그 녀석 여기 어디에 숨어 있는 거지? 나를 놀래려고 그러는 거지?”
두터운 붕대가 불그스름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데커드가 흥분하자 총상에서 다시 피가 배어나온 것이다. 데커드는 소리치고 싶었다. 침대를 들어 올려 부숴버리고 싶었다. 윽박지르고 싶었다. 오열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총상의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어째서 라울이 죽었는지, 누가 죽였는지 본능적으로 알아챘기 때문이다.
핀셀이 차마 떨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입을 열어 말했다.
“총격전이었습니다. 반장님은 복부에 두 발을 맞으셨지만……, 라울 피치 형사는 머리에 한 발을 맞고 말았어요.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데커드의 두 손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그는 멍한 눈으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이 손으로.
라울을 죽였다고?
“반장님, 여긴 출입 금지입니다! 비켜 주십…….”
경비원은 자신이 해야 할 말도 맺지 못한 채 물러서야 했다. 악마도 씹어 먹을 것 같은 얼굴을 한 데커드가 핸드건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 있나?”
경비원은 그가 진심으로 총을 쏠 것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목숨을 거는 기분으로 질문해야 했다.
“……네?”
다행히도 데커드는 경비원의 머리에 레이저를 쏘아 넣는 대신에 다시 한 번 말해주었다.
“로퍼슨, 어디 있나?”
임무가 목숨보다 중요할 수는 없는 법이다. 경비원은 황급히 전자감옥의 문을 열어주었다. 데커드는 같은 식으로 몇 명의 경비원을 거친 다음 결국 로퍼슨이 있는 방에 도달할 수 있었다. 로퍼슨은 차분한 모습으로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데커드는 그의 멱살을 부여잡거나 방구석에 처박지는 않았다. 다만 조용히 총을 들어 그의 미간을 겨누었을 뿐이다. 차가운 총구가 이마에 와 닿는데도 로퍼슨은 표정의 변화 없이 데커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데커드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게 무슨 짓을 한 거냐?”
로퍼슨이 대답했다.
“당신이 내 마지막 작품이었군요. 사실 확률은 반반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난 그 형사 쪽에 걸었었거든요. 뭐, 어쨌든…….”
피슉!
순식간에 로퍼슨의 왼쪽 손목이 날아갔다.
“끄어어헉…….”
잔뜩 짓눌린 듯한 비명이 로퍼슨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데커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말을 해야 하니 입은 가장 마지막이다. 이 핸드건은 600발의 고열 레이저를 발사할 수 있지. 다시 묻겠다. 내게 무슨 짓을 한 거냐?”
로퍼슨의 모습은 기괴망측했다.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입은 웃고 있었지만 혀끝에서는 신음소리가 새어나오듯 들렸다.
“깨, 깨운 겁니다……. 당신…… 당신의 보, 본능을…….”
“본능?”
로퍼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
로퍼슨은 계속 말했다.
“죽이십……시오. 원하는 건 그, 그거…… 아닙니까? 당신의 본능을 그대로…… 따르란 말입니다.”
데커드는 다시 총구를 로퍼슨의 머리에 갖다 대며 말했다.
“그게 너의 유언이냐?”
로퍼슨의 어깨가 갑자기 들썩이기 시작했다. 웃기 시작한 것이다.
“당신도 똑같군. 당신도…… 결국, 인정을 하지 않아.”
“인정? 뭘 인정하란 말이지?”
로퍼슨이 고개를 들어 데커드를 쳐다보았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로퍼슨의 얼굴을 보다 데커드는 당장이라도 방아쇠를 당기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로퍼슨은 어느새 더듬지 않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당신도 보이는 것만…… 믿으려 하지. 드러나는 채널만…… 보고 싶어 하는 거야. 채널과 채널 속에 숨겨진 진짜 본성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거라고.”
“알아듣지 못할 소리만 하는군.”
“당신이 한 거야!”
느닷없이 로퍼슨이 소리를 질러댔다. 오히려 머리로 총구를 밀어내는 몸짓이었다. 데커드는 방아쇠를 당기지 않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시켜야만 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퍼슨은 계속해서 말했다.
“당신이 무슨 짓을 했든지 간에, 그건 당신 마음이 시킨 거야! …… 내가 저지른 게 아니란 말이야. 킥.”
그 말을 끝으로 로퍼슨은 더 크게 웃어대기 시작했다. 데커드의 일그러진 얼굴 앞에서. 그가 겨눈 총구 앞에서. 로퍼슨이 이윽고 허리를 젖힌 채 웃기 시작할 때쯤, 방 안 가득 싸늘한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더 이상 웃음소리는 없었다.
12.
“에이프릴이 여기로 오고 있습니다, 반장님.”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 있는 데커드에게 핀셀이 다가와 물었다.
“나는…… 구속되는 건가?”
“무단으로 금지구역에 출입하고…… 재판을 받지 않은 범인을 살해하셨으니, 일단은 그렇습니다. 에이프릴과 만나신 후 조치가 취해질 겁니다.”
“에이프릴에게는…….”
“비밀로 하겠습니다.”
“고맙네.”
데커드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고 있었다. 핀셀은 말을 꺼낼까 말까 고민하다가 데커드가 ”뭔가?”하고 묻자 결국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 영상 말입니다. 분석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로퍼슨이 죽은 지금은 의미가 없겠지만, 반장님께서 관심이 있으실 것 같아서요.”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데커드가 말했다.
“보여주게.”
핀셀은 말없이 가져온 홀로그램 플레이어를 작동시켰다. 홀로그램이 만들어낸 소르마크 박사가 말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매우 특이한 영상물입니다. 대상의 특성상 깊이 파고드는 조사가 불가능했지만 몇 가지 알아낸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이것은 피해자의 무의식 중 깊숙한 곳에 있는 파괴 본능을 일깨웁니다. 말 그대로 무언가를 ‘파괴’하는 거죠. 그리고 피해자들이 3일 동안 뇌사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은 그들이 너무 오랜 시간동안 이 영상물을 시청했기 때문에 지나치게 깊은 무의식에 빠지느라 뇌가 멈춰버린 것처럼 보인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이 영상물의 흡입력은 엄청난 것으로 보입니다.”
데커드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동안 라울과 함께 수사했던 며칠간의 모습들이 생생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알려드릴 것은 이 영상물이 거는 지독한 최면과 암시의 가장 무서운 점입니다. 이 영상물은 쉽게 말해 ‘무언가를 파괴하라’고 충동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면의 수준을 봤을 때 그 파괴에 성공하거나 대상이 소멸된 것을 자각했을 때에야 풀리는 듯합니다. 그런데 그 대상이 무엇인지는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미루어 추측해 보건데…… 그것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대상’인 것 같습니다.”
뭐라고? 데커드는 두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그것에 상관없이 소르마크 박사의 홀로그램은 계속 말했다.
“첫 번째 희생자였던 가넷은 자신이 끔찍이 사랑했던 전남편을 죽이기 위해, 즉 파괴하기 위해 그를 찾아간 것입니다. 두 번째 앤더슨은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 자기 자신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자살을 택한 거죠. 마지막 세 번째 희생자인 다라본트의 경우가 가장 비극적인데……. 그가 가장 사랑한 것은 자기 소유의 모노플레인이었나 봅니다. 다라본트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폭파시키기 위해 비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최면 상태라고 좀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능과 지식은 그대로지요. 그는 아마 뉴욕 최고의 빌딩을 향해 돌진하면 자연히 격추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 이후의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데커드의 뇌리 속에는 오로지 하나의 문장만이 자리 잡고 있을 뿐이었다.
가장 사랑하는 대상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핀셀.”
“예, 반장님.”
“잠시 나 혼자 있게 해주겠나?”
핀셀은 별다른 말없이 문을 열고 나갔다. 혼자 남겨진 데커드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내 파괴 대상은 라울이 아니었군. 그것은…….
그 파괴에 성공하거나 대상이 소멸된 것을 자각했을 때에야 풀리는 듯합니다.
에이프릴이 여기로 오고 있습니다.
아빠, 아빠는 날 위해 죽을 수 있어?
데커드는 조용히 핸드건을 꺼내들었다. 핀셀은 반장인 데커드를 존중해주었는지 아무런 압수 절차도 밟지 않은 듯했다. 장전된 핸드건을 머리에 겨눈 채 방아쇠를 당기려던 데커드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아무 죄 없는 에이프릴. 혼자 남을 에이프릴. 자신의 아버지가 왜 죽어야 하는지 알지 못할 에이프릴.
결국 데커드는 리스트폰을 작동시켰다.
“영상 기록.”
데커드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에이프릴의 밝은 목소리가 리스트폰의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영상 기록이야, 아빠. 화면빨 잘 받게 얘기해야 돼?”
epilogue.
이만 얘기를 끝내야겠구나, 딸아. 이제 내가 왜 이 방아쇠를 당겨야 하는지 너도 알게 되었을 거다. 이렇게 아빠는 너에게 모든 걸 얘기하지만 너는 내게 아무 말도 전하지 못하고 우린 헤어지는구나. 에이프릴. 네 허락 없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아빠를 용서해다오. 그리고 부디 건강하게 자라다오.
안녕. 에이프릴.
말 못할 만큼 사랑한다, 내 딸아. 내 목숨보다 더 너를 사랑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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